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 - 큐레이터 캐서린 쿠가 사랑한 20세기 미술의 영웅들
캐서린 쿠 지음, 에이비스 버먼 엮음, 김영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4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이라 지루할까 걱정했는데 예술가 개인에 포커스를 맞춘 책이라 그런지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번역도 비교적 매끄럽고 본격적인 미학서가 아니라 그런지 훨씬 쉽게 다가온다.

사실 가까이서 예술가들을 바라본 저자의 가벼운 인상평이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그런데 정말 수준높고 밀도있는 평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맨 앞부분에 자서전을 미처 마무리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저자를 위해 그를 가까이서 본 후배가 그녀의 일생을 정리해 준 부분이 아주 매력적이다.

본인이 다 완성했다면 자신에 대한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전부 뺏을 것이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장애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거의 안 나온다.

어설픈 페미니즘에 관한 담론도 없고 정말 그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잘 아는 분야인 현대 미술이 온전히 예술계와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최우선시 했던 듯하다.

예술가의 성별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16년 동안 큐레이터로 일했던 시카고 미술관 관장과의 부적절한 사이에 대한 후배의 조심스러운 언급은 꽤나 흥미로웠다.

애 딸린 이혼남 사업가와 결혼했으나 당연히 이렇게 야망이 넘치는 여인이 얌전하게 집안에서 현모양처로만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가정적인 사람이 되는 데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는 고백이 내 심리상태와 비슷해서 그런지 너무나 와닿았다.

역사에 길이 남을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도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고 어찌 보면 너무나 겸손한 느낌마저 주는 저자의 문체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렇게나 인터뷰이를 잘 이해하고 그가 가진 사상에 대해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면서도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는 평전을 근래에 잘 못 본 것 같다.

다시금 느낀 바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사회와 내적인 인정의 욕구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최고가 되기 위한 강렬한 욕망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일, 불멸의 명성을 얻은 듯하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단순히 그들의 엄청난 재능에만 놀라는 게 아니라,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그 강렬한 욕망과 의지, 창작욕 같은 심리 상태에 훨씬 더 감동을 받았다.

저자가 이런 부분을 참 잘 묘사하고 있다.

은둔형 예술가도 있고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는 예술가도 있고 참 인간의 특성은 다양한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강렬한 감동과 자극을 준다는 점에서, 또 그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모두 다 특별하고 위대하다.

오랜만에 정말 좋은 평전을 읽어 기분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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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 -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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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부터의 통신>이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만, 금석문을 통해 그려보는 당시의 사회상에 대한 내용이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와 비슷한 포맷의 책이고, 비단 백제 뿐 아니라 고구려, 신라, 발해까지 범위를 넓혀서 여러 학자들이 한 챕터씩 설명한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나, 미륵사의 금제사리봉안기 등이 아직 발견되기 전에 나온 책이라 아쉽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모두루묘지나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해인사 묘길상탑기 등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안악 3호분인 동수묘의 주인공이 고국원왕인가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인가 하는 점에서 저자는 동수묘라고 분명하게 단언하여 궁금증이 좀 풀렸다.

다음 챕터에 바로 나온 유주자사 진 묘지에 쓰여 있는 수많은 관직명을, 실제로 그 구역을 다스린 것이 아니라 교치, 즉 행정구역의 주민들이 타지로 이동하면서 당시 군현명을 옮기는 관행으로 설명한 점이 신선했다.

반면 광개토왕릉비 편에서는 여전히 일본 변조설을 마치 정설인 양 설명해서 의아했다.

이미 일본인 탁본 이전에 원본 탁본이 확실히 나온 마당에 애매하게 변조설도 있다더라, 라고 무게를 실어주는 건 이해가 안 간다.

고구려적 세계관에 의거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으려 했던 왜를 광개토왕이 물리쳤다고 업적을 과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주장이 합리적으로 들린다.

신라가 혼란에 휩싸인 9세 말에 해인사를 지키다 죽은 승병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묘길상탑을 세우고 최치원에게 그 과정을 쓰게 한 탑기에 관한 챕터도 흥미로웠다.

왜 절이 초적들의 공격 대상이었을까?

신라가 지방 반란에 의해 대농장 경영이 어려워지자 귀족들은 이름 높은 스님들이 있는 절에 시주를 많이 했고 초적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자 승병들이 절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많았던 모양이다.

일본에서는 승병들이 난를 일으키는 경우를 종종 봤는데 우리 역사책에서는 처음 접한 얘기라 신기하다.




<인상깊은 구절>

49p

길림 방면의 북부여 지역에는 본래 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부여는 285년 모용부의 침공을 받은 이후 급격히 쇠약해졌지만, 그 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넓고 비옥한 평원을 배경으로 기원전부터 두각을 나타내, 기원전후에는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 고구려나 백제 왕실이 부여에서 유래하였다고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 3세기 중반 고구려 제천 행사의 명칭을 '동맹'이라 하여 부여 시조인 '동명'의 이름을 따온 데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왕실은 부여 방면에서 출자하였다.

 그렇지만 고구려와 부여는 2세기 초반에 이미 적대관계로 돌변해 있었다.

118p

안악3호분 벽화는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이 확실하지만, 당시 고구려 사회에서는 낯선 기법의 장의미술 작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덤 형태 역시 돌무덤이 중심인 고구려 고유의 묘제와는 거리가 있는 돌방무덤이며, 무덤 구조도 이후 고구려에서 유행하는 돌방무덤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회랑식이다. 더구나 안악 3호분은 고구려가 북쪽으로 올라오는 백제와 맞부딪쳐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기에 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악 지역에 축조되었다. 낙랑, 대방 지역을 안정감 있게 점령지배하지 못하던 357년 전후에 고구려는 정말 대방의 옛 땅 한가운데에 왕릉을 만들었을까

140p

13군 75현으로 구성되었다는 유주 관련 묵서명의 내용도 사실이나 허구 가운데 하나로 단정짓기보다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교치'라는 형태로 흔히 나타나는 실제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조합시키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남북 왕조들이 상대국 영역까지 포함해 반 허구, 반 실제를 바탕으로 행정체제를 짰던 사실도 참고할 수 있다.

155p

빈은 죽은 이를 추모하는 기간이다. 각처에서 조문을 받기도 하며, 후계자가 차기 국왕으로 등극하는 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선왕의 위엄을 빌어 정국을 안정시키는 데 필요한 기간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254p

온조왕이 건국한 뒤부터 700여 년 동안 존속하였던 백제에서 큰 세력을 떨친 부여씨와 대성8족 성씨는 오늘날 별로 찾아볼 수 없고, 대신 신라 지배층이었던 김씨, 박씨와 조선 왕조 이씨가 한국인의 다수를 차지한다. 이는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의 옛 지배층이 통일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편입 성장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286p

백제에서 건너온 기술자만으로 사찰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 있는 토착 토기 공인이나 석공 등도 직, 간접적으로 동원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백제에서 박사 칭호는 특정한 기술을 가진 전문 장인에게 주는 것으로, 사비 시기에 기술공을 우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와박사는 6세기 후반에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기와 공인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60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생산된 인각와는 이렇듯 기와를 전문으로 생산하던 집단이 분업화와 전문화, 분지화되면서 나타난 것이다.  국가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일정한 노동의 대가를 확보하거나 자신의 노동을 검증받기 위해서 집단 명칭이나 부호를 찍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기와만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와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아, 기와 생산이 전문화와 분업화되는 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음은 짐작할 수 있다.

321p

670년 웅진, 671년 사비를 장악하면서 자신을 얻은 신라는 673년 백제인을 회유하는 방책으로 그들에게 신라 경관과 외관의 관등을 수여하였다. 백제 지배층을 우대하여 백제 유민들이 갖고 있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였다. 674년 조성된 아미타불비상에 백제 유민들의 신라 관등이 나오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330p

발해가 고구려를 잇고 있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과 달리, 중국과 러시아는 발해를 고구려와 상관없는 말갈계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중국은 발해를 속말말갈족이 중심이 된 당나라의 지방 봉건 정권으로 잘라 말하고 있다.

 이렇게 발해사를 놓고 여러 나라가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발해의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애매한 기록 때문이기도 하다.

360p

왜 불교 사원이 도적들의 습격 대상이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약탈하거나 훔칠 물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초기의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건의문에서 사원의 사치를 언급하던 중에 "신라 말기에 불경과 불상에 모두 금은을 쓰고 사치가 지나쳐서 끝내 멸망했으며, 장사치가 불상을 훔쳐와서 부수어 팔아먹으며 살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사원은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던 만큼,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곡식을 얻을 목적으로 사원을 습격하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신라 말의 금석문들에서 왕실이나 귀족, 또는 지방 부호들이 사원에 토지를 시주한 사실은 흔히 확인된다.

 농업 사회에서 부의 최대 원천이 토지였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9세기 후반에 해인사가 토지를 집중적으로 확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가 있다. <해인사전권>, 즉 해인사의 토지문서가 그것이다.

365p

해인사가 왕족, 귀족에서 사들인 토지들은 매매의 형식을 빈 사실상의 시주가 많지 않았나 짐작된다. 집권력의 약화와 도적의 봉기로 인하여 멀리 떨어진 지방의 대토지를 경영할 능력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지방의 사원들은 주변의 대토지를 경영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다. 성주사의 낭혜화상처럼 종교적 신망을 얻고 있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9세기 말로 접어들면 초적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신라 국가의 지배체제를 결정적으로 무력화시킨 이들이었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신라 중앙정부의 무기력함을 대신하여 일정한 지역을 거점으로 지배권을 확립한 자들 중 성주, 장군을 칭하며 더 많은 세력을 규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우리가 흔히 '호족'이라 부르는 세력은 이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한편, 이들과 달리 처음에는 일정한 거점이 없이 여러 곳을 휩쓸고 다니며 세를 규합하던 무리들도 있었다. 궁예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런 무리들의 일부는 초적과 같은 수준에서 출발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직을 갖추고 활동 반경이 넓어질수록 이전과 같은 약탈자적 성격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지방 사회에 토착한 부호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자처하지 않으면 장기적인 지지를 끌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원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한 조직체계를 갖춘 뒤에는 사원의 권위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 안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오류>

95p

천전리 암각화 아랫부분에는 훨씬 훗날 신라 화랑들이 쓴 낙서가 가득하다. 신라 법흥왕이 다녀갔다는 낙서도 보인다.

-> 법흥왕이 아니라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이 다녀가고, 훗날 부인인 지소태후와 아들 진흥왕, 그리고 법흥왕의 왕비가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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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01-02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금석문으로 백제를 읽다>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첫번째 꼭지의 내용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성과 왕국 - 북한산성이 전하는 스물여섯 가지 한국사 이야기
조윤민 지음,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엮음 / 주류성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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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성과 왕국>이라 우리나라 산성에 대한 이야기인 줄 알았다.

펼쳐 보니 "북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북한산성을 축성할 무렵인 숙종과 영조 시대에 초점을 맞췄다.

삼국시대 당시 이야기는 너무 뻔한 역사 얘기라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실제로 북한산성을 축성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승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한 계기가 됐다.

막연히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을 폈고 승려들이 성을 쌓는 부역에 동원됐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조선의 불교 정책, 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조선이라고 하면 무조건 불교를 억압했을 것 같은데, 왕실에서도 의례를 위해서 사찰이 필요했고 왕족이나 고위 관료들이 개인적인 신앙심으로 사찰을 후원했으며 일반 백성들 역시 유교만으로는 종교심을 다 채울 수 없었던지라 여전히 불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불교 역시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에 맞서 자구책의 일환으로 승군 조직이나 종이 제조, 능묘 건설 같은 공사에 동원되어 역할을 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등이 축성되면서 성 내의 사찰을 승영으로 삼아 승군들이 수비를 맡는다.

백성들이 군역을 지듯 승려들이 서울로 올라와 산성을 지켰던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승군들이 의병 활동을 펼칠 수 있었나 보다.

전쟁 후 승려가 34명이나 공신에 책봉됐다고 하니 과연 불교계가 큰 활약을 했던 모양이다.

북한산성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고 벌써 절판된 것이 아쉽다.

영조의 청계천 준설 사업은 백성을 위한 왕의 큰 업적으로 칭송하면서 뜬금없이 오늘날의 청계천 준설은 개인의 탐욕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어이없어서 기록해 둔다.

역사적 사건을 오늘날과 단순 비교하는 것도 웃긴데 한 쪽은 애민 정신이고 한 쪽은 탐욕이라는 기준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인상깊은 구절>

156p

던컨 교수는 조선 전기의 주요 양반 가문 38개 집안 중 넓게 보아도 16개 집안 정도를 신흥사대부로 볼 수 있으며, 이마저도 조선 초기 중앙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건국 때 지배층의 대대적인 교체가 없었으며 사회 혁명이 수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려 말의 권문세족 가문 다수는 조선시대 들어서도 계속해서 큰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175p

이 두 사건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 불교계가 불교억압정책에 대해 그냥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맥과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의사를 표명하고 때로는 불법을 저지르면서까지 불교계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교계의 이러한 반발과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세조 때를 잠시 제외하면 조선 전기의 억울 정책 기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177p

당시 조선사회는 억불정책을 철저하게 추진하기에는 사회적 제약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왕실 사람들이 사찰을 찾고 불교를 믿었다. 사찰에서 왕가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했으며 질병 치유를 위해서도 불교의례를 행했다. 왕실이 주축이 돼 불교경전을 간행하기도 했다. 왕조 사회에서 왕실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을 고려할 때, 왕실의 불교신앙은 정책 추진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추세에서 고위 관료층 일부에서도 사찰을 후원하고 지원했다.

 무엇보다, 공인된 소수의 사찰만으론 당시 백성들의 종교 욕구를 채워줄 수 없었다. 불교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백성들의 생활에 스며들었고 사찰은 지역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백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을 없앨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선이 건국 이념으로 내세운 성리학은 윤리 규범과 예절 면에서는 효과가 있었지만 사람들의 종교 욕구를 만족시키기엔 한계가 있었다. 왕실의 잦은 불교의례도 이런 점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억불정책은 현실과 유리된 정책이었다.

 국가 의례에도 아직은 불교가 필요했다. 가뭄과 홍수, 흉년 등의 자연재해 방지를 기원하는 국가 의례에 불교식 의례가 활용됐다. 전염병 방지와 전란을 우려하는 민심을 달랠 때도 백성들이 믿는 불교 의례가 효과적이었다. 외교정책에도 불교가 긴요했다. 당시 외교의 두 축인 명나라와 일본은 불교를 신봉했으며 외교 절차에서 불상이나 불경을 요구했다. 원활한 외교관계 수립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불교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적인 요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불교교단 정비와 사찰 수 제한을 통해 토지와 노비를 관에 귀속시킴으로써 국가재력 확보가 가능했다. 이는 국가재정 확충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불교억압정책은 조선 초기의 불안했던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적자원 활용이라는 면에서도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는 필요했다. 당시 승려 계층은 규율을 잘 갖춘 집단이자 잘 훈련된 인적자원이었다. 조정에서는 부역의 헝태로 승려들을 성곽 축조와 건축물 공사 등 국가 토목사업에 동원했다. 때로는 종이제조와 동전 주조 등 특수한 업무에 활용하기도 했다. 이런 목적이 달성된다면 조정에서는 무리하게 불교계에 개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조선의 지배층은 억불정책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론 불교를 용인하고 일부 사찰을 보호하는 포용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처한 현실과, 현실이 필요로 하는 요구에 의해 조선은 불교억압과 불교포용이라는 상반된 정책전략을 함께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과적으로 조선 초기의 불교는 상호모순 돼 보이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억불정책과 대치되는 정책 사안이 동시에 추진되고 일부는 파행 현상을 드러냈던 것도 이러한 이중 정책 탓이 컸다.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은 지배층에겐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겠지만 정책 대상자인 승려들에겐 편치 않은 일이었다. 굴욕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사찰의 기반을 잠식하고 불교의 저변을 뿌리 채 흔드는 존속의 위협으로도 다가왔을 것이다.

180p

조선 전기 억불정책 하에 북한산 지역 일부 사찰은 이전보다 더 보호를 받고 융성을 누렸다. 당시 왕실에는 의례와 기원을 행할 사찰이 필요했고, 도읍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북한산 사찰은 이런 왕실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산세 또한 웅장하면서도 수려했으며, 무엇보다 북한산은 도읍을 지키는 한양의 진산이었다. 삼국시대부터 북한산 지역이 불교 요람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왕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190p

8년 동안 굴욕적인 볼모 생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이후 은밀하게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도성 외곽 방위에도 중점을 두어 한양 주변 지역의 성곽을 보수하고 수비력을 강화했다. 이런 선상에서 효종 말년에 북한산성 축성이 고려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북벌 추진이 재정난과 집권층의 반대에 부딪치자 효종은 집권층의 지지기반 하에서 북벌정책을 추진했지만 집권세력은 북벌의 명분만 좇을 뿐이어서 실질적은 정책으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효종 시기의 북벌정책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북벌론을 패배한 전쟁에 대한 책임과 전쟁 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통치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본다. 북벌론으로 백성의 관심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국내 문제에 대한 비판과 불만을 억누르고 민의를 하나로 결집시켜나갔다는 것이다. 효종은 북벌론을 내세워 군사력을 증강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송시열이 중심이 된 서인 정권은 북벌론을 붕당의 이익 추구와 정치적 입장을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삼았다고 본다.

207p

공교롭게도 20일 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유배지에서 압송되는 도중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 왕비 폐출에 동조하지 않았던 남인 세력이 왕비 폐출과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는 정치적 거래를 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내막은 차치하더라도 정국은 서인에서 남인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두 세력 간의 갈등과 충돌에서 숙종의 입지와 목소리는 한층 강화되었다. 남인은 정권을 잡았지만 왕권을 강력하게 견제하기에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환국은 숙종이 주도했고 정권 장악은 어부지리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결국 환국으로 가장 큰 득을 본 사람은 왕 자신, 숙종이었다.

 인현왕후에 적대적이었던 남인 중에서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무리라고 여겼을 정도고, 사관이 인현왕후와 연결된 서인 세력에 우호적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왕비 폐출의 이유가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왕비 폐출의 숨은 목적이 무엇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한 가지는 숙종이 강한 권력욕과 이를 이루려는 과감한 실행력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218p

그런데도 숙종은 여러 신하들의 목소리를 두루 듣는 편이었다.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했고, 때로는 숙종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며 근거를 들어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신하들은 의사를 표명하며 나름의 이유를 들어 상대방을 설득했고, 거기엔 숙종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거기에 종종 극단적인 감정 표출과 돌발적인 정치 행보를 보인 숙종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이러한 토론 분위기는 의외의 사실로 다가온다.

 숙종 대에도 이런 정도의 합리적인 정치협의체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건국과 함께 형성된 재상 중심의 관료체제 덕분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협의체 아래서는 왕과 신하들이 여론을 살피고 상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왕권과 신권이 조율되고, 재상권과 언관권이 서로를 견제했다. 이를 통해 독단의 폐해를 막고 성급한 정책결정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려 했다.

221p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늘어났다. 상업적 농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부농층이 형성됐다. 사회 전체로 보면 눈에 띄는 성장임이 분명했지만 한편으론 가난한 농민이 많아지고 살기 위해 농촌을 떠나는 유랑민이 늘어났다. 이른바 사회 양극화 현상의 심화였다. 도시 빈민도 증가했는데, 한양으로 유입된 유랑민은 도성 지역의 빈민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유랑민 유입은 당시 한양 인구 증가의 한 요인이기도 했다.

222p

북한산성이 축성되는 18세기 초엔 조선과 청나라는 대체로 긴장관계보다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외침의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동북아 정세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축성정책을 추진한 데는 대외적 요인보다는 국내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왕은 고뇌했을 것이다. 정략과 결단을 통해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지존의 자리를 지켜나갔지만 나라의 책임자라는 무겁고 엄중한 책무의식 또한 커져갔을 것이다. 숙종은 부지런했으며 항시 일에 철저했다.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는 마음도 깊었으며 이를 실행으로 옮기는 실천력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마 시대의 한계는 아직 두터웠고 그가 볼 수 없었던 난관 또한 많았다. 의지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고 정책은 종종 현실과 부합되지 못했다. 그래서 왕은 괴로웠을 것이고 또 외로웠을 것이다.

 숙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그의 극단의 애증 표출만큼이나 심하게 엇갈린다.

(전에는 왕들의 나라 걱정이 피상적으로 느껴졌는데 나이를 들고 보니,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지존이지만 그만큼 엄청난 책임감과 부담감에 시달렸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미인들을 끼고 향락에 빠져 있기만 해서는 아무리 전제왕권 시대라 해도 왕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연산군처럼 쫓겨나고 말았을 것 같다)

234p

축성 결정에서 축성 시작까지의 기간이 2개월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중앙과 지방 관청의 즉각적인 협조는 당시의 행정조직이 순조롭게 운영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엔 왕과 최고위 재상들의 통솔력이 뒷받침됐을 것이다. 숙종시대에 강화된 왕권과 숙종의 정책 추진력 또한 효율적인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고 정책을 발 빠르게 추진하는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277p

이렇게 해서 피난처 확보와 군사방어시설 구축으로 시작된 숙종 시대의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다음 시대 국가방위정책의 밑거름이 된다. 도성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영,정조 시기 '도성 중심 방어전략'의 기반시설로 자리 잡는다.

283p

임진왜란을 전후에 나타난 이 공명첩은 돈이나 곡식 같은 물질을 통해 관직을 얻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제도였다. 태어나면서 신분이 정해지고 그 신분의 한계 내에서 사회적 권리가 허용되는 신분제도, 조선지배층의 권위와 권리의 정당성을 보장한 그 한 축을 지배층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부정'은 신분제도 자체의 허구와 모순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변화시키련느 실천의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면서도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회피하고, 더 많은 이익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것이었다.

286p

전란 후의 피폐한 사회 실정으로 인해 국가사업에 필요한 인력이 부족했던 것도 승려 동원의 한 요인이 되었다. 전란 후 승려의 수는 더 늘어난 상태였으며, 더구나 이들은 승단이라는 조직을 갖추고 일정한 훈련을 거친 인력이었다. 재정 악화로 곤란을 겪던 조정 입장에서 보면 승려만한 인력이 따로 없었다.

292p

교계에서는 억압을 완화시키고 교단의 존속을 위해서도 조정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일정한 선을 두고 불교계와 조정의 타협이 이뤄졌으며 승군 운영은 그 한 결과였다. 조정의 불교정책에 좀 더 적극적인 승려 세력은 이를 기회로 불교진흥을 꾀했을 수도 있겠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고 승려 개인이나 일부의 입신출세에 활용되었을 이다.

306p

변란을 일으킨 세력은 청주성을 함락하고 한양으로 북상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런데 변란에 대처하는 영조의 태도는 이전의 왕들과는 달랐다. 영조는 도성 외곽의 산성으로 피신하라는 대신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도성을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317p

돌과 벽돌을 섞어 쌓음으로써 성벽의 견고함도 높였다. 이처럼 주변에 피난성인 산성을 따로 마련하지 않고 읍성 자체에 강력한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수원 신읍은 읍성과 산성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복합적인 성곽도시로 탄생했다.

 정조는 수원 신읍을 상업도시이자 자급자족의 농업지역으로 육성하고자 했다. 신읍 주변에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간해 군인들이 군사 업무를 맡으면서 농사를 짓도록 했다.


<오류>

110p

고려 전기 성종에 이어 목종이 즉위하자 성종의 왕비이자 목종의 생모인 현애왕후가 섭정을 하게 된다. 

-> 현애왕후가 아니라 헌애왕후이다. 그녀는 성종의 왕비가 아니라 성종의 여동생이고, 전 왕인 경종의 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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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고의 금석문 포항 중성리비와 냉수리비 한국고대사 학술총서 1
이기동 외 지음 / 주류성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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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학술서에 꽂혀 어려운 책들만 계속 보고 있다.

다시 한 번 느낀 바지만, 역시 이런 학술서는 내가 읽을 수준이 못 된다.

이번에는 한자가 없어서 그나마 좀 편하게 읽긴 했지만 학자들 사이에서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들이라, 나 같은 비전공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포항 중성리비에 대한 명확한 내용이 없는 게 의아했는데, 여전히 논쟁 중이라 그런 듯하다.

오죽하면 마지막에 방청객으로 나온 포항시 문화재 관련자가 비문의 내용을 학자들이 정리해서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했을까.

정말 공감이 가는 부탁이었다.

중국식 한문이 완전히 도입되기 전이라 당시 신라에서 한자라는 문자를 이용해 우리말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해석하는데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비문에 새겨진 몇 글자도 확실치 않아 연대 비정도 각기 다르다.

신사년이라는 간지가 몇 년도에 해당하냐는 것이다.

대체적으로는 501년으로 되어 있는데, 근거가 지절로 갈문왕이 바로 지증왕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니 최근 只 가 中 으로 확정되어, 지절로가 아닌 중절로가 되므로 지도로 등으로 불린 지증왕과는 상관이 없게 됐다.

그렇다면 이 비문은 60년 전의 신사년, 즉 441년이 되는 셈이다.

냉수리 비문이 503년인데 훨씬 초기의 한문 구성을 보이는 중성리비가 바로 2년 전인 501년일 수 없다는 주장도 나와 있다.

아무래도 훨씬 연대가 떨어진 441년이 맞지 않을까 싶다.

또 논란이 되는 것은, 두지 사간지 궁과 일부지 궁이 작민, 즉 소작민을 모단벌훼로부터 뺏어가 소송을 했더니 중앙에서 다시 돌려주라고 판결을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발표자 중에는 정반대로 모단벌훼의 작민을 두지사간지궁에 돌려달라고, 간단히 말해 원고와 피고를 정반대로 해석하기도 하고 작민을 소작하는 백성이 아닌, 인명으로 보기도 해, 뭘 돌려달라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여중죄, 즉 판결에 반하는 사람에게는 추가로 죄를 묻겠다고 하는데 누구한테 죄를 물을지도 각기 다르다.

한자 해석만 해도 어려운데 학자들마다 해석하는 내용이 이렇게 다르니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백제가 마한, 즉 전남 지역을 언제부터 실효지배 했는가에 대한 논쟁과 비슷한 논란 같다.

이 책에서도 신라가 진한 12국을 언제 병합했는지 시기 문제가 잠깐 나온다.

사료에는 훨씬 빨리 병합했는데 실제 고고학적 증거는 후대까지 독자적인 고분 양식 등이 남아있어 완전한 복속이 아닌 영향력 행사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심도있게 다뤄지지는 않고 대략 6세기에는 경상도 유역을 실제 지배한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백제의 마한 복속과 비슷한 시기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후에 비로소 3국이 한반도에 완전히 정착한 모양이다.

내 수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학자들이 논거를 가지고 토론하는 내용이라 신라 초기 사회를 이해하는데 대략적인 개념은 갖게 됐다.


<인상깊은 구절>

134p

<봉평리비> <냉수리비> 발견 전에 왕과 왕제, 또는 매금왕과 갈문왕을 다른 세력으로 본 점에는 큰 의의가 있다. 다만 매금왕과 갈문왕의 위상 차이가 있는 '2부 2왕 중심의 6부체제'로 수정해 보는 편이 설득력이 높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부체제적 정치운영은 사탁부 지도로 갈문왕의 집권 이후 사탁부 우위로 전환되다가 점차 집권화로 이행되어 갔다. 그렇지만 집권화와 부체제의 해체가 동시에 이행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봉평리비>에서 최상위관등은 사탁부가 독점하지만 탁부, 사탁부의 인원 배분은 대체로 균등하다는 점은 지도로 갈문왕을 낳은 사탁부 인물들을 중심으로 집권화를 모색했지만, 법제적으로는 부체제적 정치운영을 한동안 유지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184p

신라 중앙의 정보전달을 문자로 표현하는데 있어, 냉수리비는 '敎'라는 문자를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고, 이는 봉평리비와 그 이후의 비에도 적용된다. 그런데 중성리비는 중앙의 정보전달을 '敎' '云' '口' 등 매우 다양한 문자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이는 중성리비 단계에는 아직 문자를 권력표출 의지가 냉수리비보다 상대적으로 약했음을 의미한다. 중성리비의 이러한 문장 작성 방식이나 어휘 사용 방식 등으로 볼 때,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2~3년이 아니라 훨씬 이전에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냉수리비로 알 수 있지만, 신라에는 503년 이전에 이미 '前世二王 의 敎 '가 있었다. 503년 단계에 절거리의 사망을 걱정해 재물의 상속방법까지도 별교로 내린 걸 보면, 냉수리비에 기록된 '前世'의 시점은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올라간다고 생각된다. 이는 신라에서 교를 문자로 기록한 시점이 441년 무렵으로 올라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307p

출토유물로만 본다면 고구려적인 요소나 경주 왕경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단언적으로 고구려의 묘제가 흥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냉수리를 거쳐서 경주로 들어간 것인지 안 들어간 것인지에 대해서 확실히 답해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여튼 흥해 지역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원삼국시대의 그런 세력자들이 삼국시대 초기 정도, 5세기 이후가 되면 경주의 영향을 거의 직접적으로 받는 단계에 들어가지 않았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제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경주의 석실묘가 어느 경로를 거쳐서 왔는지, 낙동강 쪽에서 들어왔는지 아니면 고구려식의 영향을 받았다든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를 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336p

진한 시기 흥해의 다벌국이 포항 영일만 지역의 서라벌에 복속한 근기국과 함께 신라 왕국 성립 발전에 국방과 재정의 직할지로서 역사적 역할을 하게 되어 그 과정의 중요한 산물이 6세기 초의 신라 最古 금석문인 중성리비와 냉수리비였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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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폴란드사
김용덕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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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고 쉽게 잘 읽힌다.

폴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생소하다 보니 겨우 퀴리 부인이나 쇼팽, 코페르니쿠스 정도 생각날까 그 외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나라인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폴란드, 천 년의 예술> 이라는 전시회에서 얀 마테이코의 대형 역사화를 보면서 관심이 생기게 됐다.

러시아 미술사에 대한 관심도, 한가람 미술관에서 봤던 러시아 이동파 전시회부터였으니 이런 순회 전시가 확실히 문화의 저변 확대에 많은 도움이 되는 듯하다.

폴란드는 동유럽의 넓은 평원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로, 러시아와 스웨덴, 독일,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등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고 급기야는 123년 동안 나라가 없어지기까지 했다.

퀴리 부인 전기에서 잠깐 봤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외세 지배가 있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1918년 1차 대전 후 독립했다고 하니 식민지 역사, 그것도 같은 유럽인에 의한 지배 역사가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선거로 왕을 뽑는 전통도 독특하다.

신성로마제국만 선거후 제도가 있는 줄 알았는데, 폴란드도 왕을 대귀족들이 선거를 통해 뽑았고 이런 점이 절대왕정시대에 나라를 흔들리게 했을 것 같기도 하다.

요즘 같은 민주주의 시대의 선거와는 다른 개념인 것 같다.

폴란드가 독립 투쟁을 하던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수여받은 장군들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미국에 동상도 있고 거리 이름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한다.

도판이 많아 책이 예쁜데, 아쉽게도 대부분 모르는 그림들이었다.

전시회에서 봤던 얀 마테이코의 작품들만 일부 알아 봤다.

삼국분할 이후 1차 대전을 끝으로 폴란드가 독립하기까지, 또 2차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폐허가 되고 소련에 영토를 뺏기고 공산주의화 되는 과정, 그리고 1980년대 이후 민주화까지 현대사가 매우 흥미롭다.

누군가 폴란드의 역사와 한반도가 비슷하다고 하더니만, 과연 이 민족도 독일과 러시아, 오스트리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때로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한 화려한 시절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외세에 의해 시달림을 많이 받았던 듯하다.

저자가 폴란드사를 전공한 분이라 그런지 폴란드가 오늘날 민주공화국이 되기까지 수많은 투쟁 과정이 애정어린 눈으로 잘 그려져 영웅들과 민중의 항쟁을 읽을 때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2010년 카티인 숲 학살 현장 방문 도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료들이 전원 사망했던 보도는 나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인상깊은 구절>

286p

나폴레옹이 만들고 포니아토프스키가 지켜낸 바르샤바공국은 이후 1815년에 세워지는 폴란드 왕국과 같이 변형된 형태로 계속 이어지며 삼국분할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 국체의 일부분으로 존속했습니다. 바르샤바공국이 1809년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라졌거나 아니면 폴란드왕국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면 11월봉기와 같은 역사적 기회는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포니아스토프스키는 조국이 패망한 암울한 시기에 당대 유럽 최고의 엘리트들과 교류하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줄 알며 애국자란 이런 것이다 하는 본보기를 보여준 영웅이었습니다. 게다가 일개 사병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던 뛰어난 재능을 자랑하던 귀족이자 군인 그리고 정치인이었던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는 조국에 영광을 가져다주고 절망에 빠진 폴란드 민족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게 해준 바로 그런 위인이었던 것입니다.

306p

당시 많은 폴란드인들이 공동의 적인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서둘러 헝가리로 달려갔습니다. 도착한 폴란드인들은 헝가리 군대 산하에 폴란드군단을 창설했습니다. 폴란드 장군인 유제프 벰이 헝가리 독립 운동에서 명성을 떨치며 탁월한 지휘관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줬습니다. 한번은 오스트리아 군대가 헝가리 대포를 포획하는 장면을 보게 된 벰 장군이 말을 타고 혼자서 적진을 향해 내달리며 다음과 같이 독일어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개만도 못한 놈들아, 저리 비켜라. 이 대포는 내꺼다." 말채찍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장군을 본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너무 놀라 유제프 벰이 자신들의 진영을 관통하는 것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총알 하나가 벰 장군의 손을 맞추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부상당한 손가락을 가위로 자른 뒤 벰 장군은 전투를 계속 지휘했습니다. 헝가리 군대가 대승을 거둔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유제프 벰 장군은 조국 폴란드에서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존경받는 영웅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범인과는 다른 불굴의 용기와 카리스마와 넘치는 애국심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백 척이 넘는 일본의 군함 속을 겨우 12척의 배를 이끌고 가장 앞장 서 돌파한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보는 것 같다.)


<오류>

268p

1975년에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로이센이 세 번째로 폴란드를 분할했습니다.

-> 1975년이 아니라 1795년이다.

432p

1999년 2월 6일에 마침내 56명으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과 자유노조를 포함한 재야 대표단이 원탁회의에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 1999년이 아니라 198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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