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6
박훈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오랜만에 별 다섯 개를 줘 본다.

"너무너무너무" 재밌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으면서 일본 근대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었는데 그 책은 번역서이기도 하고 솔직히 내 수준에서 좀 어려웠다.

반면 이 책은 나 같은 일반 대중의 수준에 딱 맞춰 너무나 쉽고 재밌게 그러면서도 깊이 있게 설명해 준다.

이런 교수들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는 하나같이 정말 수준이 높고 무엇보다 지루하거나 어렵지 않다.

교양인들을 위한 강의로 딱 맞는 시리즈라 적극 추천한다.

신상목씨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세계사>를 읽으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 갔고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메이지 유신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도와주는 책이다.

사실 제목 때문에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누구나 쉽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이라 더 좋다.

230 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인데 딱 두 시간 밖에 안 걸렸다.

번역서가 아닌 책들은 가독성이 있어서 참 좋고 저자의 문장력도 읽기에 아주 좋다.


페리 제독의 방문 이전부터 일본에서는 개항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가 있었다.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붙어 있고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 우산에 안주하여 대외 침략에 대한 걱정없이 19세기 말까지 국제정세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쇄국정책 속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반면 일본은 중국에 기댈 수도 없는 나라였고 오히려 임진왜란 이후 명이 쳐들어 올까 걱정했을 정도였으며 바다로 둘러싸여 러시아나 서양 함대의 공격 가능성에 매우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사의 나라이니 외적의 공격 가능성에 대해 조선보다는 훨씬 민감했을 것이고, 이미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등과 무역을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서양 세력이 세계를 지배해 가고 있는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페리 제독이 내항하기 전부터 러시아가 극동 정책으로 캄차카 반도까지 진출하자 이미 조정은 러시아 침공 가능성에 대해 민감해진 상태였다.

지나친 기우였지만 혹시나 하는 가능성으로 위기론이 고조된 가운데 페리 제독이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했으니 막부는 개항을 결정하고 나라의 체제를 변혁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 막부의 태도 변화가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앙시앵 레짐, 즉 프랑스 왕정이나 조선 왕실 같은 구체제는 보통 개혁에 저항하고 혁명이나 외세에 의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도쿠가와 막부는 서양의 개항 압력에 대해 쇄국으로 일관하지 않고 체제 변혁을 시도하면서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고 해군을 창설하며 서구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그리고 개항 이후 사쓰마와 조슈 번의 내전을 치루면서도 15대 마지막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단행한다.

저자는 이 결단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어찌 보면 도쿠가와 막부의 권력을 반납했으니 그가 가문을 멸망시킨 것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매우 높이 평가받을 만한 결단이었던 셈이다.

이로써 프랑스 혁명이나 신해 혁명처럼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내부의 동요를 최소화시켜 근대화에 매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저자는 권력층에 있는 이들의 개혁적 선택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반체제의 개혁 노력도 중요하지만 권력층에 있는 이가 개혁 쪽을 택한다면 그 영향력은 훨씬 크고 개혁에 따른 혼란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일본 엘리트들은 이 시대적 조류 변화에 아주 능동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에 대해 18세기 이후 일본 무사들 사이에 퍼진 유학의 역할을 언급한다.

솔직히 이 부분은 다 공감하지는 못했다.

유학이라고 하면 근대화와는 매우 동떨어진 학문이고 조선이 바로 유학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주자학의 대표적인 나라인데 쇄국정책으로 일관해 근대화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일본이 택한 주자학은 사무라이들을 士 로 변신시켜 봉록만 받고 평화시대에 할 일이 없었던 그들을 지사로 만들어 변혁의 시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론을 형성했다고 본다.

사실 조선의 언관 제도는 좋게 보면 강력한 공론의 정치가 아닌가.

붕당 역시 긍정적인 쪽으로 보면 오늘날의 정당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유학의 붕당이 갖는 한계점에 대해서도 명확히 선을 긋는다.

붕당은 기본적으로 군자당이 있을 뿐이라 오늘날의 다당제 개념이 아니었다.

군자당의 반대는 소인당이니 이들은 나라의 해가 되므로 없어져야 한다.

그러니 서로 군자당임을 주장해 사화로 수많은 이들이 죽고 결국은 왕권의 약화와 더불어 한 가문이 독점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고 만다.

저자는 각주에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당정치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것에 대해 "현인지배의 선정정치" 라는 유교적 이념이 자리잡은 탓이라고도 밝힌다.

매우 동의하는 바다.

조선보다 늦게 유학이 전수되서인지 일본에서는 유학을 조선처럼 내제화 신념화시킨 것이 아니라 경세치용 관점에서 이용했기 때문에 보다 열린 자세로 일부 가문에서 독점했던 정치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냈다고 평가한다.

유교적 교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교식 혼례나 제례도 없었고 난학 같은 서양 학문도 쉽게 받아들였다.

과연 유학이 일본 사회의 근대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살펴보고 싶다.


좋은 책을 읽는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20-04-15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약간 흥분하면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얼마전에 동 저자의 책(메이지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이 한 권 나와서 어서 구입을 하긴 했는데 읽는 건 계속 미뤄지네요. 기대는 상당히 하고 있는데 언제나 읽을 수 있을런지...^^;;;

marine 2020-04-16 08:32   좋아요 0 | URL
혹시 <현대 일본을 찾아서> 라는 책 읽어 보셨는지요? 좀 두껍긴 한데 이 책도 정말 재밌습니다.
 
속속들이 이해하는 서양 생활사
김복래 지음 / 안티쿠스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 로마 부분은 지루해서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던 책이다.

리뷰가 좋아서 끝까지 붙들고 있었는데 중세편부터는 너무너무 재밌다.

그리스 로마는 워낙 고대라 사료가 적어서인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들만 나와 지루했던 것 같고, 중세 시대부터는 근대의 기원이 될 만한 것들이 등장해 정말 재밌었다.

오늘날 국민국가들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고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던 시절이라 친숙해서 더 호기심이 생긴다.

르네상스 이후 시기도 말할 것도 없이 정말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전작들도 몇 권 읽었을 때, 오류가 종종 보였던 듯 한데 이번에는 전혀 못 찾아서 꽤 신경써서 편집한 듯 해서 더 좋았다.

도판도 많이 실려 무척 책이 예쁘다.

중세와 근대의 서양인들의 삶이 궁금한 사람들이 읽으면 많은 흥미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1) 왜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가 많았을까?

나도 항상 이런 게 의문이었다.

동양 역사서에서는 별로 못 본 것 같은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종의 문화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동성애가 많았던 듯하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는 오직 남성만이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신체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문화였기 때문에 동성애가 발달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여성들과의 만남이 금지된 군대에서 동성애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주연이나 운동 경기 등에서 반라나 전라 상태로 남성들과 사회적 활동을 하다 보면 우정을 넘어 육체적 사랑까지 발달하기 쉬운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사랑이란 동등한 상대와 하는 게 아니라 남성이 미소년이나 여성, 노예 등 자기보다 낮은 사람과 이뤄졌다고 한다.

성인 남성끼리의 동성애는 거의 없고, 미소년을 데리고 다니면서 일종의 후견인처럼 돌봐 주고 더불어 육체적 감정도 나눴다고 한다.

여성들의 지위가 워낙 낮아 강간도 흔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여성이 강간을 당하면 오히려 당한 여자를 비난하던 우리 문화도 그런 구습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제우스가 왜 그렇게 여자들을 잘 건드리나 했더니 이런 여성 비하가 깔려 있었던 셈이다.

약육강식의 고대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2) 저자는 상층 문화와 하층 문화를 나눠서 설명한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하층의 민중 문화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묘사는 적었지만 상류층 귀족 문화와 민중 문화는 따로 기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세편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단주의 사회였다는 점이다.

너무 당연한 것 같기도 한데, 하다못해 귀족들의 성에서조차 따로 식당이 있는 게 아니라 식사가 시작되면 간이 식탁을 만들고 밤이 되면 치우고 거기에 누울 자리를 만들어 준다.

개인의 공간을 갖는다는 건 중세에세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고 한다.

개인주의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르네상스의 소수에서부터 시작해 겨우 19세기는 되야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렸을 때 안방에서 할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잤고 내 방을 가진 게 고등학생이 된 후 방 네 개짜리 아파트로 이사를 간 다음에서야 가능했던 것 같다.

개인의 공간에 대한 욕구가 중세에서는 불가능했던 것이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축사를 집 안에 들여 가축들과 함께 자기도 할 정도였으니 오늘날의 시각으로 시각으로 당시를 이해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귀족들은 개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지 모르나, 적어도 민중들은 집단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낙오되고 보호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라 상상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민중의 억눌린 욕구를 표출시키기 위해 축제가 중요했고, 절기마다의 이교도적 축제를 기독교적으로 바꾸기 위해 교회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린다.

크리스마스가 괜히 로마 태양신 축제에서 비롯된 게 아닌 모양이다.

근대는 개인의 발명이 이뤄진 시대라는 말이 실감난다.


중세와 근대인들을 이해하기에 너무나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제 의자왕 평전 - 우매한 폭군인가 불운의 성군인가
양종국 지음 / 서경문화사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전은 세세한 이야기까지 너무 상세하게 다뤄 지루하기 마련인데 백제 시대라 자료가 워낙 귀해서인지 꼼꼼하게 분석하고 저자의 견해를 달아 흥미롭게 읽었다.

평전을 쓰다 보면 그 인물에 너무 몰두하여 긍정적인 쪽으로만 해석하게 되는 게 문제인 것 같다.

유홍준씨의 <완당평전>을 흥미롭게 읽으면서도, 김정희가 당시 동아시아 최고의 문예가였다는 평가에 무척 의아했던 기억이 난다.

내 짧은 지식 탓인가 싶었는데 다른 학자의 책을 보니, 김정희가 조선에서는 최고 문예가였겠지만 국제적으로 봤을 때는 청나라의 최신 경향을 따라가지 못하고 한철 지난 사조를 뒤늦게 받아들여 지역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 책 역시 의자왕이라는 망국의 군주에 대해, 특히 신라에 비해 덜 알려진 백제인의 일생을 애정어린 눈으로 입체적 분석을 시도한 점은 높이 사지만 동의할 수 없는 평가들이 보인다.


1) 의자왕의 항복은 자발적이었나, 예식에 의한 반란이었나?

예식의 묘지명이 발견되어, 사비성에서 탈출한지 5일만에 공산성에서 항복한 이유가 예식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잡아 당나라에게 끌고 갔다고 알려졌다.

저자는 이 의견에 반대하며 예식은 단지 의자왕을 호위하여 출성했을 뿐이고, 의자왕이 5일 만에 항복한 이유는 백성들의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한 자발적인 결단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을사오적의 한일합방도 나라의 혼란을 피하기 위한 구국의 결단이었다고 하겠다.

예식의 묘지명까지 발견됐는데도 가볍게 넘어가는 점은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이 망국의 군주가 당나라로 끌려간 후 포로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금방 풀려나 후손들이 당나라 조정에서 일하고, 웅진도독부를 세웠으며, 증손녀 부여태비는 당 황실과 혼인까지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점에 중점을 두고, 의자왕이 백제의 혼란을 막기 위해 빨리 항복하고 대신 아들인 부여융은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를 다시 재건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웅진도독부라고 하면 당이 백제땅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이고, 조선총독부와 비슷한 개념이 아닌가?

당나라가 그저 친당 정권을 세우려고만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지배 야심을 품었던 것인지 이 책만 가지고는 모호하다.

당에 의해 세워진 웅진도독부가 단지 백제 태자가 수장이 되었다고 해서 주체성을 가진 백제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고조선 멸망 후 세워진 한4군도 같은 의미로 생각해야지 않나?

백제 멸망이 당의 조공 책봉 정책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간 백제를 응징한 당의 13만 대군에 의한 것임은 분명하지만, 외교정책을 통해 당의 군대를 이용하고 훗날 이들의 지배 야욕을 꺾은 신라의 통일 노력을 너무 가볍게 치부한 것은 아닌가 싶다.

고조선 멸망 후 오랫동안 한4군이 한반도에 세워졌던 것처럼, 당 역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할 수도 있었으나 신라의 용감한 항전을 통해 당을 몰아내고 대동강 이남의 통일을 이뤄낸 점은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의자왕의 모후는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에 나온 사택왕후이다.

나도 이 부분에 동의한다.

선화공주는 문학적 영역이므로 사택왕후의 유물까지 나온 마당에 더이상 역사의 실존 영역에 끼워넣기 힘들 것 같다.

미륵사가 3탑 3원 구조라는 이유로 서탑에서 사택왕후의 사리봉안기가 나왔으니 나머지 탑에서 다른 이가 발원한 기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일축한다.

미륵사는 처음부터 3탑 3원 구조로 건립됐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세워진 서탑에 최종적으로 발원자를 밝히는 봉안기를 넣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의자왕의 출생년은 부정확하지만 대략 35세 이후에 태자 자리에 오른 것으로 추정한다.

무왕이 40년 넘게 즉위했던 까닭에 의자왕은 40이 넘어 왕위에 오른다.

의자왕은 왜 이렇게 늦은 나이에 태자가 됐을까?

선화공주의 아들이라 외가인 신라를 견제하는 세력 때문에 늦게 태자가 됐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선화공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당시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공방전을 보면 이런 국혼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

송나라 태종이 재위 20년이 지나 아들 진종을 태자로 책봉한 예를 들어, 전쟁이 너무 치열한 당시 상황에서 아들을 좀더 보호하기 위해 책임있는 자리에 최대한 늦게 올린 것은 아닌가 추정한다.

찾아보니 진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큰아들이 궁궐에 불을 지른 사건 등으로 폐위된 전력이 있다.

진종이 늦게 태자가 된 궁궐의 사정이 있었던 셈이다.

의자왕 역시 무왕의 큰아들이 아니고 알려지지 않은 백제 내부의 사정 때문에 늦게 태자가 됐을 것 같다.

반면 부여융은 의자왕 재위 4년째 태자로 책봉된다.

적장자였고 의자왕의 나이가 많아 바로 태자 책봉이 이뤄진 모양이다.

저자는 일본에 가있던 부여풍을 의자왕의 서장자로 생각한다.

어떤 책에서는 5남으로 추정하고 있어 확실한 기록이 없는 모양이다.

부여풍이 일본으로부터 군사를 이끌고 백촌강 전투를 치룰 때 당에서는 부여융을 내세웠는데 풍이 서자였기 때문에 태자였던 융이 있는 당측에 훗날 흑치상지 등이 항복했다는 저자의 견해가 독특하다.

흑치상지가 단지 백제를 배신하고 당에 부역한 것이 아니라, 정통성이 있는 태자 쪽으로 갔다는 것이다.

당시 심정은 그랬을 수도 있겠으나 결과적으로는 백제 부흥을 막은 배신자가 아닐까?

개인의 소회를 밝힌 글이 없으니 결과로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이 당 조정에서 활동했던 것을 보면 당은 확실히 국제적인 나라였던 것 같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백제는 신라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면서 나라를 잘 유지하고 있었고, 초반에는 당의 조공책봉 체제 안에 순응했으나, 신라 쪽으로 기운 당나라가 백제에게 신라 공격을 멈추라고 여러 차례 조서를 보내자 이를 거부하고 자주 노선을 취하다가 당에게 망했다는 게 이 책의 요지다.

백제가 신라말 혼란기처럼 나라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은 단지 친당 정권만 세우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고 이 의도를 알아차린 의자왕은 쉽게 항복을 했다.

그러나 신라에서 이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당을 몰아내고 결국 백제는 영원히 망하고 만다.

의자왕은 적극적으로 신라를 공격하면서 설마 당이 대군을 이끌고 직접 원정을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조선이 한나라에게 정벌당한 것을 보면 중국은 충분히 한반도에 원정을 감행할 수 있는 나라인데 의자왕의 대외정책이 너무 안이했던 셈이다.

또 당을 움직인 신라의 외교정책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당과 대립하다가 나라가 망한 고구려와 같은 처지가 되버렸다.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느냐가 국가 존립의 중요한 변수인 셈이니 선조들이 조공 체제 안에서 순응하려한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20-04-06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중국 교수의 주장으로는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나 사택왕후가 아닌 빈천한 시절의 무왕의 아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선화공주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지도 않더라구요. 의자왕의 어머니에 대한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선화공주의 존재의 가능성을 따지는 부분에서는 어느정도 동의가 가더군요. 선화공주와 관련된 설화가 통일 신라에 만들어 진 것인데, 그 시절에 굳이 신라 왕실을 모독하는 내용을 넣을 수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서동요를 비롯하여 미륵사지를 창건하였다는 문헌적 사실에서 창건을 청한 주체인 선화공주만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다라는 것 요지였어요.

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궁금하기는 하지만 책 자체는 읽고 싶어 지지는 않네요.

marine 2020-04-06 10:45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노중국 교수는 긍정하는 쪽이더라구요. 역사서에 기록된 설화를 무조건 아니다고만 딱 잘라 얘기하기도 어려운 것 같아요.
저는 이 책에서 선화공주의 실존 유무보다, 백제가 의자왕의 자주노선 때문에 당에 의해 멸망했다는 견해가 인상적이었어요.
 
유일신 야훼 - 역사와 그의 실체
김기흥 지음 / 삼인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이어 내 기독교적 회의감에 쐐기를 박는 또 하나의 책이다.

저자는 신학자나 고고학자가 아닌, 신라사를 전공한 한국 역사학 교수인지라 이스라엘 역사와 유대교에 대해 과연 얼마나 전문성을 가질런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인용된 자료들이 최근 고고학 성과들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신뢰감이 생기고 무엇보다 저자의 논증과 문제제기에 깊이 공감했다.

저자는 시종일관 야훼는 이스라엘의 민족신이고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약소 민족으로서 강대국 틈바구니 사이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민족의 통합을 위해 야훼 신앙을 다지고 특히 바빌론 포로기 시절 이방인으로까지 신에 대한 관념이 확대되어 우주 전체의 창조자 유일신 사상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등 중동의 강대국들 틈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 신앙 아래 단결했다.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명멸했으나 수천 년의 디아스포라 끝에 살아남아 여전히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는 유대인의 야훼 신앙은 참으로 놀랍다.

저자는 이러한 신앙이 처음부터 유일신 형태가 아니었고 여러 신들 중 하나를 이 약소 민족이 선택하여 보편적 창조주로써 변모해 가는 과정을 논증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

1) 유대인은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집트의 압제에 시달리던 가나안 하층민들이 철기 시대로 접어들면서 중앙 고원지대로 모여들어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민족으로 변모해 갔다.

저자는 핑컬스타인의 최소주의설을 받아들여 고고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에 출애굽도 부정하고 당연히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도 없었으며 기원전 10세기 무렵 솔로몬 성전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나도 핑컬스타인의 책을 읽고 출애굽의 실체에 대해 부정하게 됐다.

고고학적 증거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그 때는 다 이해를 못했었는데 확실히 이 책의 저자는 역사학자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쉽게 알려준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는 산간 지대로 올간 가나안 토착민들이었던 셈이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 석비에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명이 나오므로 이 무렵 이방인들에게 하나의 민족으로서 인식되었다고 본다.


2) 북이스라엘은 당시 유행하던 가나안의 황소 신상을 야훼의 표상으로 경배했고 남유다에서는 언약궤를 중심으로 내세웠다.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먼저 멸망하자 거기서 내려온 제사장들과 남유다의 왕들은 자신들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들이 우상숭배 때문에 망했다고 천명한다.

유다 왕국은 이집트와 바빌론 등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야훼 신앙을 중심으로 종교 개혁을 하고 기원전 7세기 무렵 요시아왕 때 신명기가 저술된다.

그 후 바빌론 유수 때 모세 오경이 완성됐다고 본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창조 신화는 메소포타미아 신화 등이 섞여 있고, 성경의 저자들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밝히기 보다는, 야훼 신과 언약을 맺고 애굽을 탈출했던 것처럼 바빌론으로부터도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썼다.

그러니 21세기에 당시 중동인의 관점에서 본 천지 창조설을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은 넌센스다.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야훼라는 유일신이 객관적인 실제가 아니라 관념의 신이고 상호주관적인 신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약소 민족인 이스라엘인들이 거대한 제국의 압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내부 결속을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관념적 실체가 바로 신이고, 그 개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변해 왔다.

예수 탄생 후 삼위일체라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를 접목해 보다 보편적인 종교로써 전 세계에 퍼지게 됐지만 과학의 시대에 더이상 문자 그대로의 성경을 주장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종교는 인류가 발전시키고 쌓아온 문화와도 같아 인류 초기부터 지금까지 진화해 왔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라고 본다.

저자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가치의 총합을 바로 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관념적 존재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비단 기독교에만 신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가톨릭의 보편성이 좀더 바람직한지도 모르겠다.

21세기에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과연 한국 기독교가 현대인들에게 바람직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회의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춘향전, 역사학자의 토론과 해석
오수창 지음 / 그물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춘향전의 이본이 워낙 많아 그 성격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갈래인 모양이다.

딱 집어 이러이러하다 설명해 주면 이해하기 편하련만, 다양한 해석들을 소개하고 나중에 취합하는 방식이라 약간 산만한 느낌이다.

대체적으로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1. 춘향의 신분은 기생이다.

남원 부사로 왔던 아버지 성참판이 대비속신을 해 줬다는 이본도 있어 기생이다 아니다로 해석이 분분한 모양인데 춘향전을 흐르는 전반적 기류로 봤을 때 저자는 춘향의 신분이 기생임을 분명히 한다.

이도령과의 대화 속에도 자신의 신분이 기생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신관사또 부임 후 점고에 나가지 않은 것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기안에 등록이 안 됐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춘향은 본인이 이도령의 정실 부인이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기껏해야 기생첩의 위치라도 얻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신관사또에 대한 춘향의 수청 거부는 올바른 항거일까?

신분제나 탐관오리에 대한 항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일부종사라는 열녀 개념이 하층민에게까지 내제화 됐다는 해석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도령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권력자의 강압적인 희롱을 거부한 게 아닐까?

책에도 춘향의 항거 이유에 대해 사또의 모욕적인 언사를 들고 있다.

열녀 관념이니 피지배층의 항거니 이런 거창한 개념이 아니어도 첫사랑에 대한 지조를 지키고 싶어 하는 열 여섯 어린 소녀의 강인한 의지가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닐까?

꼭 성관계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랑하지 않은 남자에게 술을 따르고 희롱을 당해야 하는 심정은 너무나 비참하고 자존감을 무너뜨리는 일일 것 같다.

더군다나 위계와 폭력에 의한 강요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2. 기생의 수청은 합법인가?

관행적으로는 수령들의 성접대 요구에 응해야 했겠으나 법적으로는 금지됐다고 한다.

가족을 데리고 임지로 가지 못하기 때문에 특히 변방 같은 경우 일부러 성욕을 충족시켜 줄 관비를 배정한다고 들었는데, 잘못 알고 있었나 보다.

저자의 말대로 그게 합법이면 조선은 성노예제가 법적으로 있었던 셈이니 말이 안 되긴 하다.

다만 관행적으로는 술시중에 이어 당연히 성적 요구에도 응해야 했다.

춘향의 거부는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인 셈이다.

그래서 신관사또도 수청거부를 죄목으로 치죄하기 보다는, 관장능욕 등을 내세웠다.

춘향의 성정 또한 보통이 아니었는지, 여자에게 정절을 버리라 하는 것은 당신에게 역심을 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까지 대든다.

반역 운운했으니 사또 입장에서는 뒤로 넘어갈 만하다.


3. 암행어사는 봉고, 즉 관아의 창고를 봉하고 출입을 금할 수는 있었으나, 파직은 불가능했다.

관리 임명권은 국왕의 중요한 권한이었으므로 잘못한 수령에 대해 보고할 수는 있었으나 현장에서 어사가 파직시킬 수 없었다.

암행어사라는 직책 자체가 국왕을 대신해 사찰하는 임시직이었으니 이해가 된다.

다만 봉고파직이라는 용어가 실록에 같이 쓰인 까닭은, 봉고 후 파직 조치가 일반적으로 따라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책객의 존재.

책에서 이 부분이 제일 신선했다.

수령이 외지로 부임하면 아전과 향리들에게 둘러 싸이니 자기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관청의 회계 업무 등을 봐 주고 여러 사안들을 의논할 수 있는 일종의 책사 같은 존재이다.

사적인 직책이었으므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는 두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는데 현실적으로는 수령에게 필요한 존재였을 것 같다.

사적으로 월급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고 관아에서 숙식을 제공해야 하고 수령 옆에 있으면서 사사로이 권한도 행사했을 것이니 실무를 처리하는 아전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였을 듯하다.


맨 마지막에 이광수가 쓴 <일설 춘향전>이 일부 소개됐는데 확실히 근대소설이라 그런지 묘사가 너무 재밌어서 따로 읽어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