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마을 2 - 중국과 베트남의 실크로드 역사.문화기행 세계의 역사마을 2
김광식 글, 사진 / 눈빛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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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은 정말로 유네스코에서 역사마을로 지정된 곳들을 소개하는데 2권은 저자의 하서회랑 기행문이다.

그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잡을 수 있어서 좋긴 했지만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아 아쉽다.

이 책의 특장점은 사진이다.

저자가 직접 찍었다는데 이건 프로 작가의 솜씨라 놀랍고 인쇄 상태도 아주 좋다.

다만 책 판형이 옆으로 길어서 읽기가 약간 불편하다.

1권과는 달리 본문 내용도 많아 기행문으로서는 괜찮다.

하서회랑이나 오르도스 지역이 정확히 어디인지 감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맨 마지막 부분에서 신라 기마민족설이라던가, 문무왕릉의 비문을 근거로 신라 왕족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현재 잘못된 이론으로 밝혀져 시의성이 떨어졌다.

어설픈 TV 프로그램이 문제인 것 같다.


<오류>

35p

산시성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장희태자묘의 <예빈도>에는

-> 장회태자이다.

216p

<열하일기>에서 사신 일행이 "5일 안에 옹정제를 알현하기 위해 청더로 오라"는 지시를 받고

-> 박지원이 사신으로 간 것은 옹정제가 아니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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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역사
피터 에이 클레이턴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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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일 줄 알았는데 300 페이지 밖에 안 된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먼저 읽은 후 읽어서 그런지 185명의 파라오에 대한 이야기가 비교적 쉽게 머릿속에 들어온다.

이렇게 긴 역사를 이렇게 짧은 분량으로 압축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저자의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아마도 피라미드 발굴에 참여했던 이력 탓인지 무덤과 미이라를 중심으로 파라오의 역사를 설명한다.

자칫 지루하고 난삽해질 수 있는 설명 방식인데 주제에 대한 압축력이 높고 번역도 매끄럽다.

일본인 학자가 쓴 책에서는 피라미드를 반드시 무덤이라고 할 수 없다고 했었는데 이 책에서는 당연히 파라오의 무덤으로 생각하고 실제로 석관도 발굴됐다고 한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 역시 이미 전실은 도굴되었고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것은 석관이 있는 현실이었다고 한다.

도굴꾼들의 침략은 참으로 집요하고 놀라워 비단 최근에만 도굴한 것이 아니고 이미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장례가 치뤄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도굴이 시작됐다고 한다.

오죽하면 사제들이 역대 왕의 미이라를 한데 모아 놓기까지 했을까.

도굴은 결국 화려한 보물을 얻기 위한 경제적 이득에서 비롯된 것이니 인간의 자본주의적 욕망은 본성임이 틀림없다.

무려 5000년 전에 살았던 지배자들의 이름과 재위 년도까지 정확히 기록되고 오늘날에도 그 계보를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이 책에서는 모세의 출애굽을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생각하고 아마도 람세스 2세의 치세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때 많은 건축물들이 지어져 여러 이민족에 대한 인력 동원이 대대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단행한 이스라엘인들을 쫓다가 홍해에 빠져 죽은 파라오 메르넵타의 미이라가 발견되지 않아 성서의 역사적 증거로 언급됐으나 다행스럽게도 발굴됐다.

아무래도 출애굽은 설화라 생각되는 부분이다.

근친혼이 매우 성행했는데 이복남매들끼리의 혼인은 그렇다 쳐도 친아버지와 딸의 혼인은 참으로 놀랍다.

여성 파라오 대신 파라오의 딸과 결혼하면 남편이 그 권리를 위임받는 식으로 새 왕조가 개창했다.

파라오는 꼭 친딸과 결혼해야 했을까?

고대인의 사고방식은 지금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 같다.

피라미드처럼 지상으로 높이 솟은 무덤도 놀랍지만, 지하 100m 이상 뚫고 들어간 묘지도 참으로 놀랍다.

세티 1세의 무덤이 그렇다.

오늘날 수백 미터의 높은 건물들도 다 이런 고대의 기술들이 바탕이 됐던 모양이다.

5천 년 전에 벌써 위대한 제국을 만들었던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언제 읽어도 흥미롭고 중국과 비교해 봤을 때, 오늘날의 몰락이 오히려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오류>

263p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기원전 338년에 페르시아에서 독살당했고, 그의 젊은 후계자 아르세스는 불과 2년 뒤에 다리우스 3세에게 살해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다.

-> 위키백과에 따르면 아르세스를 살해한 이는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이고, 유일하게 남은 아르키메데스 왕조의 후손인 아르세스의 외사촌 다리우스 3세가 바고아스를 죽인 후 등극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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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여성의 기원 - 『열녀전列女傳』에 대한 여성학적 탐구
정재서 외 엮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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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제목과는 달리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그런지 편집이 올드하고 철학적인 접근도 많아 약간 지루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여성주의, 이런 느낌이랄까?

여성의 사회적 지위 변천 같은 내가 원하는 실제적 접근은 적은 것 같아 아쉽다.

유교, 특히 정주이학이 사회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이 되면서 여성으로서의 구별이 강화되어 급기야는 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이 작아지고 남성과 시가에 예속된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한 것 같다.

혼례를 치루고 시집으로 가던 중 가마의 휘장이 떨어지자 숙녀가 사람들 앞에 노출되었다는 이유로 자살을 택한 극단적인 예가 역사서 속에서 칭송받는 식이고 중국의 이런 사례는 그래도 한나라 같은 고대에나 있을 법한 일인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여성 억압이 강화되고 열녀로 칭송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전족이 유행하여 심리적인 것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주도적인 생활을 어렵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잔인한 전통인가.

여성, 특히 아름답고 요염한 여성은 권력자의 마음을 뺏는 악의 요소로 규정된다.

군자가 멀리 해야 할 악덕이 되버렸으니 긍정적인 여성상을 갖기가 매우 어려웠을 듯하다.

요즘처럼 자식을 안 낳아서 문제인 사회에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고대의 여아살해 관습이 과연 성행했을 법한 사회 환경이다.

유교의 예라는 것이 남녀유별을 넘어 차별과 종속적인 인간상을 구현하게 되니 전제주의 전통사회에서는 적합했을지 모르겠으나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명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오류>

74p

심지어 어려서 죽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뿐이었던 인종이 죽었을 때도 2명의 여성이 자결을 했다고 한다.

-> 명나라의 인종, 즉 홍희제는 어려서 죽은 게 아니라 만 46세에 즉위해서 8개월 만에 사망했다.

206p

양기는 동한 말 사람이고 원가 시기는 항제(恒帝 147~167)의 재위 시기이니 역시 동한 말이다.

-> 재위 시기로 봤을 때 항제가 아니라 환제(桓帝)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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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사무라이 사회를 관찰하다
박상휘 지음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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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얼핏 보고 단순히 선비와 일본의 사무아리를 비교해서 쓴 뻔한 책인 줄 알았다.

읽어보니 전공한 학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쓴 책이라 내공이 상당하다.

재일교포 3세라는 저자의 약력이 인상적이다.

그만큼 객관적이길 기대하는 탓일까?

제목 그대로 조선의 선비, 즉 일본에 갔던 조선 통신사들이 무사들이 다스리는 일본 사회의 구조를 관찰하고 쓴 문집을 바탕으로,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일본이 어떻게 비춰졌는지에 관한 책이다.

조선으로서는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므로 일본이 재침할 것인지 여부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고,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와는 다른 토쿠가와 막부가 집권했기 때문에 과연 평화 정책을 유지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됐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희화화 되는 것처럼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당파 싸움에 휩싸여 각기 다른 보고를 했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조선의 통신사들은 꽤 깊이 일본 사회를 분석하고 나름의 대책과 전망을 내놓았다.

저술 간행이 활발했었는지, 일본에 다녀온 적이 없는 이덕무, 정약용, 홍대용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도 통신사들의 책을 읽고 일본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다.

그들은 조선을 침략한 토요토미 정권과 토쿠카와는 전혀 다른 정권으로 인식하고 유학을 받아들여 동아시아 유교적 예교 체제에 맞춰 평화정책을 고수할 것으로 내다봤다.

즉 일본의 유교화가 얼만큼 진행되느냐가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전쟁과 평화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척도로 인식됐던 것이다.

맨 마지막에 나온 비판처럼, 당시 조선인들로서는 한중일 세 나라를 넘어서는 국제적 인식을 찾아볼 수 없었고 그래서 막연히 일본이 중화문명체제에 편입되면 군자화 되어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착각했었다.

서양 세력의 침입이 없는 전통사회였다면 우리 조상들이 바램대로 평화로운 시대가 계속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7세기는 서양의 대항해 시대가 이미 시작됐고 특히 일본은 앞장서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 선비들의 바램과는 달리 일본은 유교화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서구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조선왕조의 멸망이다.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라는 책에서도 일본의 유학 열풍이 갖는 근대적 의미를 읽은 바 있다.

그러나 당시에도 주자학을 추구하면서 화이론과 중화 문명을 떠받드는 조선 선비들과는 달리, 일본 유학자들, 특히 오규 소라이는 주자학에 매몰된 조선인을 매섭게 비판했다.

이미 주자학은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더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었으니 조선의 좁은 시선이 안타깝다.

실학자들은 일본의 기술 발전에 놀라워하며 이용후생론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재야의 지식인에 불과하고 정권을 잡은 집권층에게 전혀 의지가 없었던 탓에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집권 엘리트층의 국가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새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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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이 사랑한 천재들 - 괴테에서 바그너까지 도시가 사랑한 천재들 7
조성관 지음 / 열대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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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었던 프라하 편이 가장 밀도가 높았던 것 같고 이번 책은 평범해서 약간 실망스럽다.

괴테와 니체는 그냥 기행문 같았고 헤세와 바그너는 그래도 위인들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마지막 디트리히 편은 영화배우라는 점이 신선하고 아쉽게도 본 영화가 없다.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배우이고 나치에 반대해 미국으로 귀화했으며 무려 90세를 산 여인이다.

나치에 반대해 연합국에 속해 위문공연을 다녔을 정도면 평가받을 만하다.

저자는 독일의 경우, 베를린 수도 한 곳만 언급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오랜 지방 분권 국가였음이 느껴진다.

오히려 베를린은 프로이센의 통일 이후 19세기부터 수도로써 위상이 올라갔고 그 외에 드레스덴이나 뮌헨 등 여러 중심지가 있어 한국처럼 서울 공화국인 나라와는 매우 다른 것 같다.

제일 흥미로운 사람은 바그너와 헤세였다.

바그너는 워낙 유명하고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으로 대변되는 추종자들도 많아 자주 접했지만 헤세에 대해서는 거의 처음이다.

<수레바퀴 밑에서>나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 유명한 책이 많지만 너무 지루해서 끝까지 읽지를 못했다.

김나지움 중퇴 후 시계수리공 견습생도 해보고, 작가가 되고 싶어 독일과 스위스 서점에 무려 8년을 일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저자의 말대로 대학교육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시와 소설을 발표해 전업작가가 됐으며 나치를 피해 중립국인 스위스에 정착했는데 여기서는 수채화를 많이 그린다.

나도 한국에서 열린 헤세의 수채화전을 봤던 기억이 난다.

예술적 재능이 풍부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중학교 중퇴인 사람이 노벨 문학상을 받다니, 정말 천재에게 대학교육은 불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을 때, 헤세로부터 그림엽서를 받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85세로 1962년에 타계했고 사진을 보면 키도 커서 멋쟁이다.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는 것도 멋진 여행법인 것 같다.

가는 곳마다 장소에 얽힌 유명인들의 이야기가 담긴 기념판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은 확실히 기억하고 기념하는 존재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장소이지만, 거기에 기념판을 세움으로써 우리 기억 속에 남은 의미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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