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역사마을 3 - 아시아 유목민과 유럽 항해 정복자들 세계의 역사마을 3
김광식 글.사진 / 눈빛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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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바다에 빌려 읽은 책.

책 도착하자마자 코로나 확산되어 도서관 대출 중단됐다.

읽을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3권은 내용이 1,2 권 보다 훨씬 풍부하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걸렸다.

잘 모르는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이야기라 찾아 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도 읽고 나니 이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잡힌 것 같아 만족스럽다.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다. 

저자의 직업 자체가 세계 문화 유산을 탐방하고 관리하는 것이라 그렇겠지만, 이렇게 좋은 곳들을 여행하고 깊이있게 탐사한다는 게 참 부럽다.

일반 직장인들이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열심히 다녀 보고 싶다.

지금은 시간이 없고 은퇴하면 체력이 안 되겠지?

아쉬운 마음을 책으로 달래 본다.

사진이 너무 훌륭해 보는 즐거움이 있고 전문가라 그런지 가벼운 감상에 그치지 않고 각 지역의 유산이 갖는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해 줘서 유익했다.


느낀 점 몇 가지들

1)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밀림 속에 매몰되어 있다가 부총독으로 부임한 영국인 레플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앙코르와트 사원도 프랑스인들에 의해 발견되고 둔황의 고문서도 마찬가지다.

마야의 유적지도 그렇다.

그러고 보면 고대의 유적을 발굴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문화재로 보호하는 행위는 매우 서구적이고 근대적이라는 개념인 것 같다.

2) 중국의 광둥성과 복건성 등에서는 해외 무역이 고래로부터 매우 활발했다.

동남아시아에 수많은 화교들이 정착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해금 정책을 고수하여 결국은 서구에 의해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을까?

저자에 따르면 중국은 항상 내륙의 침입자들, 즉 유목민을 경계했기 때문에 바다는 봉쇄하고 내륙으로만 확장했다고 한다.

일리있는 말이긴 하다.

결국 도전정신과 교류가 인간을 발전시키는 모양이다.


<오류>

49p

동로마는 비잔틴제국으로 남아 1543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한다.

-> 1543년이 아니라 1453년에 멸망했다.

57p

1942년에 발견되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트라키안 왕묘는 3세기 축조 유적으로 무덤 안에 프레스코 채색화 매장실과~

-> 트라키아 왕묘는 기원전 3세기 유적이다.

76p

1543년 셀주크제국의 한 토후였던 술탄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터키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함에 따라

-> 1453년에 점령했다.

129p

카자흐족과 우즈베크족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분류되는데, 러시아에서는 '코자크'로 알려진 용맹한 민족이다.

-> 러시아의 코자크는 투르크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에서 기원한 슬라브족으로 알고 있다. 서로 다른 민족이다.

152p

떠나는 날 우리는 고롱스(鼓浪嶼) 섬을 잠깐 방문했다.

-> 고롱스라고 해서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한참을 찾았다. 구랑위, 혹은 한자 그대로 고랑서라고 알려져 있다.

165p

이중에도 가장 두드러진 이민 집단은 광저우성 차오주(潮州)인 집단이다.

-> 광둥성 차오저우라고 써야 할 것 같다.

185p

13세기 몽골(원) 쿠부라이 칸의 세 차례에 걸친 침략을 슬기롭게 피하였고

-> 쿠빌라이라고 써야 할 것 같다.

190p

구옌 왕조는 참파왕국과 대치, 전쟁과 회유를 구사하여~

-> 바로 윗 문장에서는 응우옌 왕조라 하고 그 밑에서는 구옌 왕조라고 하니 기왕이면 하나의 고유명사로 통일해야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196p

교회의 의료선교단의 일원으로 자카르타와 자바 섬의 중부 스마랑을 여행하면서, 자바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 스마랑은 semarang 인데, 윗 문장에서는 스마랑으로, 다른 문장에서는 세마랑으로 나와 헷갈린다. 고유명사는 하나로 통일해야 할 것 같다.

201p

인도네시아는 1948년 독립 이후 방대한 다민족 국가를 통합하기 위해 국어를 새로 만들어 전 인도네시아에 보급했다.

-> 독립 후 갑자기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기존에 쓰던 바하사 인도네시아를 전국에 보급했다는 게 맞을 것 같다.

206p

수마랑은 인구 약 150만 명이 중부 자바의 중심 도시이다.

-> semarang 을 같은 책에서 스마랑, 세마랑, 수마랑 이렇게 각각 다르게 언급하니 헷갈린다.

250p

수리비자야 왕국은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그러나 스리비자야 의 수도가 어디냐 하는 데는 ~

->Sriwijaya 스리비자야 왕국을 윗 문장에서는 수리비자야, 아랫 문장에서는 스리비자야라고 하니 통일이 필요하다.

258p

국공내란으로 징더전의 요업이 한때 저조했던 틈을 타 일어난 일본 이마리야키와 아리타야키 도요지도 몇 번 찾아가 본 일이 있다.

-> 국공내란은 20세기 초이고 일본 자기가 중국 자기 대신 수출을 많이 했던 시기는 명청교체기이다.

282p

1954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 함대가 도쿄 만 밖에 정박하고

-> 페리 제독의 내항은 185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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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새로운 뮤지엄건축
서민우 외 지음 / 기문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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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관련 책들은 현학적인 얘기가 많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편인데 이 책은 뮤지엄 건축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쓰여진 점이 장점이다.

물론 건축 용어 같은 건 다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많은 사진들을 통해 새로운 뮤지엄들이 갖는 의미와 건축의 특성에 대해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라 만족한다.

55000원이라는 가격에 걸맞게 도판도 정말 많고 100여 곳에 달하는 많은 전세계 뮤지엄들을 소개해 주고 있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책바다를 통해 빌릴 수 있어서 감사하게 읽었다.

어떤 책에서, 종교가 사라져 버린 현대에는 미술관이 예배당과 같은 의미를 준다고 했었다.

종교나 예술이나 사람의 마음을 고양시키고 미적 감동을 준다는 점에서 같은 범주에 속하는 듯하고, 그렇다면 감상하는 내용물 뿐 아니라 건물 자체가 주는 의미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문화의 세기를 지향하는 21세기에 더욱더 복합문화공간으로서 뮤지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테이트 갤러리나 루브르 박물관 같은 아주 유명한 거대 뮤지엄 외에도 일본의 나오시마와 같은 버려진 낙도 재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미술관들도 많이 소개된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다음은 문화적 즐거움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산유국인 UAE 에 루브르 분관이 세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2017년도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아직 인터넷에서는 검색이 쉽지 않아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뮤지엄이라고 하면 미국이나 유럽만 생각했는데 가까운 중국과 일본에도 많은 특색있는 뮤지엄들이 많아 방문해 보고 싶다.

특히 중국에서 이렇게 많은 새로운 미술관들이 지어지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문화라는 것도 결국은 국가의 부와 직접 상관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뮤지엄 건축가로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가 렌조 피아노이다.

빛을 많이 받는 캐노피가 특징적이다.

유럽은 국가 주도 건축이 많은 반면 미국은 역시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개인의 기부에 의한 민간 건축이 주를 이룬다.

기업의 사회 환원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바람직한 현상 같다.

우리나라의 리움 미술관이나 뮤지엄 산, 본태 박물관 등이 소개되어 반가웠다.


<오류>

24p

특히 Altes Museum은 빌헬름 3세(Prussia Friedrich Wilherm 3)의 수집품을 위한 국립미술관 구관으로

-> Friedrich Wilhelm 3,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이다. 빌헬름 2세가 마지막 황제라 빌헬름 3세는 없다.

29p

도판의 설명이 바뀌었다.

그림-11b 땅콩 모양의 Cloud Gate 조각

그림-11c 시카고 시민 1000명의 영상이 담긴 분수조각 Crown Foundation과 땅콩

그림-11d Frank O.Gehry의 Jay Pritzker Pavilion

이 순서로 바뀌어야 한다.

306p

15m 높이의 마크 디 슈베르(미국 조각가)의~

옥외에는 수베로, 쟈코메티, 헨리 무어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 고유명사를 같은 페이지에서 왜 다르게 표기할까?

마크 디 수베로이다.

301p

제주 보광 피닉스 아일랜드 내 '니어스 로사이'와

-> Genius Loci, 즉 지니어스 로사이이다.

415p

일본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사무 노구치는~

-> 이사무 노구치는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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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행간에서 조선의 삶과 문화 깊이 읽기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13
장윤수 외 지음 / 새물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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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 보이고 특색없는 제목과는 달리 이 시리즈는 표지를 참 잘 만든다.

2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길이고 일기를 분석한 책이라 두 시간만에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고문서들이 발굴되면서 거시사가 아닌 일상의 미시사가 연구되고 있어 반갑다.

이 책의 주제는 안동시 풍산읍의 오미마을에 세거한 풍산 김씨 일족의 3대에 걸친 일기이다.

안동의 하회마을 같은 곳인가 보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흥미롭게 읽었다.

고려 시대 호장이었다가 중앙으로 진출해 이 곳에 봉토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후손이 조선 전기에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사대부가 어떤 계기로 한 지역에 세거하여 중심 위치를 점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보통 지방 사족들의 일기를 보면 과거 급제해 실패하고 평생 도전하다 끝날 정도로 매우 벽이 높던데 이 가문 사람들은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다.

특히 김대현은 아들 여덟 명이 다 과거에 급제하고 그중 다섯 명은 문과에 급제해 인조로부터 오미마을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게 된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사마시도 가문에서 급제자를 배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8형제가 전부 급제하다니 정말 대단하다.

아버지의 교육열이 엄청났을 것 같다.

일기를 남긴 후선 김병황은 선조들과 달리 과거에 수년 동안 도전하지만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만다.

한 번 서울 올라갈 때마다 엄청난 경비가 들기 때문에, 저자는 과거시험을 치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지역 사회에서는 큰 위상을 갖었다고 설명할 정도다.

한마디로 과거 준비를 하면 생업에서 벗어나 학문에만 몰두할 수 있을 정도로 먹고 살만한 양반이라는 표시였다는 얘기다.

일기의 마지막 저자인 김정섭은 일제 시대를 살면서 항일운동을 하기도 한다.

동생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자 군자금을 대주다가 복역하기도 하고 지역에 학교를 세우기도 한다.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김지섭이 족제였다고 하니, 이 가문의 항일의식을 알만 하다.

그럼에도 변화하는 20세기의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차별적인 전통적 정서에 안주하려고 한 점은 한계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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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서원의 위상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7
차장섭 외 지음, 한국국학진흥원 기획 / 새물결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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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일기들을 분석한 이 시리즈, 아주 좋다.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주제를 놓고 분석한 책이라,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좀더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는 것 같다.

제목은 좀 지루해 보이지만, 궁금해 하는 주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조선 시대 가장 대표적인 서원인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재지사족들에게 서원이 어떤 위치였는지를 보여준다.

후기로 갈수록 노론 일당 독재에 경화벌열, 일부 가문에게만 관직이 허용되면서 상대적으로 영남 남인들은 지방에서 세력 확보가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주자학이 점차 강화되면서 많은 제자들을 키운 퇴계의 영향력은 높아갔는데 서원이 바로 영향력의 중심이었다.

퇴계는 수령권과의 다툼을 극도로 경계하며 가장 먼저 세금을 바치고 수령의 포폄도 피할 정도였으나 도산서원의 위상이 높아질수록 재지사족들은 지방 수령과 대립하게 된다.

국가 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어려운 일인데 차별적 질서가 당연했고 권력에서 200년 동안 소외되어 있던 조선 후기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도산서원의 원장이었던 이황의 후손 이유도가 소송 중에 감사에게 불경한 언사를 했다고 갇힌 후 심문 중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금 생각하면 옥에 갇히는 것 자체가 고령의 노인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을텐데 형장까지 맞다 보니 사망해 버렸던 것 같다.

국가에서 재지사족들, 특히 영남 남인들을 엄격하게 제압하려 했었음을 알 수 있고, 이황의 처신이 현명했던 셈이다.

서원의 위상이 높아지자 19세기에는 이황의 집안인 진성 이씨 가문에서 원장을 독점하다 보니 지방 문화의 거점이 한 가문의 기구로 전락해 공적 기능과 위상을 잃어버리고 만다.

외부에서 원장을 초빙하기도 했으나 실제적인 권한은 진성 이씨 집안에서 쥐고 있었다고 한다.

영남 만인소 등을 통해 비록 권력에서 소외되었으나 중앙 정부와의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소개된다.

맨 마지막 챕터에서 여러 사대부들이 당색을 초월해 도산서원을 방문하여 지은 제영시들을 소개하면서 이곳이 당대의 문화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서양화가 아닌, 유교식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이런 수많은 제영시들도 문화 컨텐츠가 될 수 있겠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과연 현대인들이 즐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류>

113p

안동부사 송상인은 부임 초부터 '가혹하고 사나운 정치'를 선보였던 원칙주의자였는데, 향촌에서 행세하던 사족과 양반 중 그에게 매를 맞은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유도가 문초받는 과정에서 수령과 감사를 모욕했고, 갇힌 지 2달 만에 장형을 받아 사망하는 불상사가 생겼던 것이다.

-> 같은 책 26페이지에 따르면 이유도는 안동부사 송상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사인 원탁에 의해 체포됐고, 감사가 직접 안동에 와서 형신을 가하다가 구금된지 15일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전에 읽었던 김령의 계암일록에서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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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기에 나타난 조선 중기 상속 문화와 가족제도 국학자료 심층연구 총서 15
문숙자 외 지음 / 새물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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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디자인이 지루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산뜻하고 예쁘다.

25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이해하기 쉬워 금방 읽었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분재기라는 명백한 자료를 분석하여 쓴 글들이라 신뢰도가 높다.

책 내에서도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저자는 장자 우선 상속제가 19세기 초까지도 실제로 행해졌다고 보기 어렵고, 오히려 일제 시대가 되면서 큰 아들에게 몰아주는 일본의 가부장적 관행이 20세기에 정착된 게 아닌가 의심한다.

사실 전통이란 것도 알고 보면 최근 100여 년의 관습인 경우가 많으니 그럴 듯 하기도 하다.

또 다른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17세까지 아들딸 구분없이 균분상속이었다가 전란 후 종법제도가 강화되면서 딸은 타 가문으로 시집간 남이라 생각하고 외손봉사가 사라져 갔으며 그에 따라 유산에서도 배제됐다고 본다.

이 부분은 앞의 저자도 동의하는 바다.

유산을 주는 중요한 근거가 바로 제사를 지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균분상속과 윤회봉사는 같은 맥락인 것이다.

18세기로 넘어오면서 외손의 제사는 정성이 없다는 인식이 퍼져 점차 아들들이 제사를 가져오게 됐고, 유산 역시 딸을 배제하고 아들들에게 균분상속 한다.

그러다가 다시 가문을 승계하는 장자를 우대하는 장남우선상속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대를 잇는다는 개념도 강화되어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세우게 된다.

국가에서 정해주는 법이 아니니 (경국대전에는 오히려 균분상속으로 정해져 있다) 일률적으로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지역마다 가문마다 다양했을 것 같긴 하다.

대체적으로 17세기 후반부터 딸은 가문에서 배제되었고 남성 위주의 가문 승계의식이 강화된 것은 맞는 것 같다.

죽은 후에 나눠주는 상속 말고도 별급이라고 해서 부모가 살아 생전에 자녀들에게 각기 상속하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는 상속이 아니면 재산을 따로 만들기 어려운 시대이다 보니, 오직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이 거의 유일한 재산 형성 방법이었을 것이다.

재산은 토지와 노비였다.

초기에는 노비 위주로 상속이 됐다가 19세기로 가면 아예 노비들은 상속 문서에 나오지도 않고 토지만 상속이 된다.

시대가 갈수록 인력 보다는 토지의 생산성이 중요시 됐던 것이다.

결혼할 때 떼어 주는 신노비가 있고 (이게 시집갈 때 따라가는 몸종 개념인가 보다) 그 후에도 득남했거나 급제했거나 혹은 병에서 회복되거나 반대로 사별로 생활이 곤궁해지면 부모는 그 기쁨과 애통함을 표현하기 위해 따로 재산을 떼어주는 별급을 시행했다.

자본주의 사회만 돈으로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 이렇게 경제적인 존재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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