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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ㅣ 살림지식총서 39
정성호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평점 :
좀 실망스러우려고 한다
이런 작은 문고판 책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게 잘못이지만, 미셸 푸코나 샤르트르 등의 책은 참 좋았는데, 이건 영 아니다
워낙 주제가 다양하고 저자도 많다 보니 수준있는 책도 나오고 떨어지는 책도 나오는 게 당연하겟지만, 그래도 살림 총서에 대한 나의 애정 때문인지 몹시 실망스럽다
유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성경을 읽으면서 부터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접해 왔지만 목사님이라는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읽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내 머리로 직접 읽는 성경은 마치 문학 작품처럼 너무너무 흥미진진 했다
또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예수의 모습도 살아 다가왔고, 인간의 위악적인 부분이나 신의 분노, 질투 등을 가감없이 기록한, 어찌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 경전이 너무 재밌다
그래서 이 종교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성경에 따르면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어떤 민족인가?
수많은 박해와 수천년의 유랑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2천년 만에 국가를 세우고 만,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인 미국을 지배하는 이 민족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가장 궁금했던 점, 즉 소수 민족인 그들이 갑자기 세계의 전면에 나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 책 보다는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의 미국인편이 훨씬 도움됐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과정 보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대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특성들에 대해 좀 부정적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별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과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면 금방 알 것이다
종말론을 강조하는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발전을 예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물론 이스라엘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는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치를 현실적으로 보지 않고 종교 교리에 끼워 맞춰 이스라엘이 중동을 지배하는 것은 성경의 섭리에 맞는 당연한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듣고 있자면, 친미주의, 친서방주의의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는 미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미국 반대는 곧 나라의 멸망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이런 미국이 지지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 이해 관계도 없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에 대해 호불호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역시 아무 관계도 없는 아랍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배척하고 싫어하는가?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벗겨 주고 싶다고 저술 목적을 밝히지만, 편견을 벗기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유대인은 머리가 좋고, 유대인은 자식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유대인은 창의적이고, 유대인은 상술에 뛰어나고, 유대인은 신의를 잘 지키고, 유대인은 전쟁이 나면 당장 고국으로 달려가고...
너무 많이 다 쓰기가 힘들 정도로 저자는 그 동안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유대인 신화를 다시 한 번 지면을 통해 강조한다
"유대인" 이라는 중립적인 제목 대신 "유대인의 장점" "유대인의 성공 비결" 등 보다 책 내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제목을 달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저자는 유대인의 결속력을 통해 우리도 세계 각지에 흩어진 한민족의 힘을 모아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짓지만, 이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왜 민족은 반드시 단결해야 하는가?
근대 국가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혔다면, 보다 진일보한 개념은 국가를 넘어서 진정한 개인의 힘으로 서는 것이다
세계화란 바로 이 민족국가를 뛰어 넘는 개념 아닌가?
물론 헌팅턴의 주장처럼 세계화란 아직은 그저 허상에 불과할 뿐, 여전히 민족과 국가는 개인을 가장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장치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개념이 진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민간 나라에서 태어난, 말하자면 그 곳 문화를 체험하면서 자란 이민 2세대, 3세대 등에게도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선택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모가, 혹은 조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미국식으로 교육받은 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아닐까?
유대인의 결속력은 2천년이 넘는 방랑의 역사에 기초한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이 유대인처럼 될 수도 없고, 그들을 본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거의 완벽한 민족으로서의 이 유대인 신화가 참 부담스럽다
유대인 교육법, 유대인의 상술, 유대인의 조국애 등 과도할 정도로 찬양 일색인 이 신화는 우리의 친미 성향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 같다
살림 총서에서 나온 미셸 푸코나 장 샤르트르 등의 책은 짧은 내용이 무색할 정도로 깊이 있고 친절하게 그들의 사상을 쉽게 안내해 줬는데, 이 책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다
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방랑하면서도 살아 남았는지, 그들이 세계 경제를 주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결속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중동 문제 해결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보다 깊이있는 분석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