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연 여성 잔혹사
서명숙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참 멋지다
기가 막힌 제목을 붙힌 것 같다
그런데 내용은 좀 약하다
서명숙이라면 시사저널을 정기구독 하던 시절, 편집장 인사를 통해 자주 만나던 인물이다
어린 마음에, 여자가 잡지사 편집장도 될 수 있구나,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에 올라온 리뷰도 좋고, 저자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는데 전체적인 내용은 너무 수필식이지 않나, 다소 실망스럽다
여성 흡연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사회적인 분석을 시도한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목이 어찌나 거창하고 중후한지 깜빡 속은 셈이다) 담배에 얽힌 본인의 일화 소개가 대부분을 이룬다
소재가 담배일 뿐, 자기 이야기를 풀어 쓴 수필집이다
인문학 도서를 기대한 나에게는 예상과 다르기 때문에 오는 약간의 씁쓸함이 있다
그렇지만 가벼운 수필로 대한다면 나쁘지 않은 글들이다

얼마 전에도 지나가던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20대 노점상이 시비를 붙여 경찰서에까지 끌려 간 기사가 실렸다
나 역시 오래 전에 PC 통신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워도 되느냐의 논리로 한바탕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그 때 예시로 등장한 것 중에, 검은 색이 아름답다였는데, 나와 토론을 하는 남자는 자신을 속이지 말라면서, 어떻게 검은 것이 아름다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검은색은 흰색에 비해 당연히 더러운 색이지 않냐고 했다
당연히 흑인도 백인에 비해 떨어지는 인종이라는 의미가 포함되는 발언이었다
어이없는 논리 전개를 읽으면서, 편견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는 옳고 당연한 이야기도 사회적인 편견에 휩싸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당한 차별을 받게 된다
억울하다고 호소해 봐도 다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졸지에 약자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다

여성 흡연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남녀 평등이라는 이유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끊임없이 경고하지만, 저자의 분석대로 여성 흡연을 기호품의 하나로 봐 준다면,굳이 건강을 담보로 정치적 흡연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 흡연과 남성 흡연이 같은 의미, 즉 개인적인 기호의 하나로 여겨진다면, 요즘 같은 금연 열풍에 여성 역시 기꺼이 동참할 것이다
왜 여성 흡연이 증가하느냐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 분석과 해결책이 필요하다
단순히 건강에 나쁘다, 임신할 사람들이 무책임 하다는 식으로 몰아 부친다면 여성들의 정치적 흡연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될 것이다
제발 여성들도 본인의 건강을 생각해 담배를 끊을 수 있도록, 여성 흡연을 남성 흡연처럼 개인의 기호로 평범하게 봐 주었음 좋겠다

여성 흡연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주변에서 담배 피우는 여자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기 여자 친구나, 딸이나, 엄마나, 동서 등등이 담배 피우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여성 흡연은 늘고 있으나 정작 주변에서는 찾기 힘든 실정이다
그만큼 여성 흡연은 비공개적이고 비밀스러운 곳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일종의 주홍글씨다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졸지에 싸가지 없고 막나가는 여자로 찍히기 쉽상이다
삐딱한 시선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여성은 드물 것이다
이 책에 소개된 유숙렬 같은 사회적 발언권이 센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은 뒤로 감출 수 밖에 없다
혼전순결과 더불어 여성 흡연은 대표적인 이중 잣대다
남자가 하면 기호일 뿐이고 여자가 하면 도덕적 해이라고 생각하는 이 편견을 과연 어떻게 깨부숴야 할까?
태아 때문이라고 말하는 남자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독신 여성이나 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은 피워도 되는 것인가?
간접 흡연의 피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학생 운동으로 경찰에 잡혀간 후 저자는 가방에서 나온 담배 때문에 끔찍한 폭언과 함께 싸대기를 맞게 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함께 있던 여경들이 혀를 차며 행실 운운하면서 부모 걱정을 하더라는 것이다
남학생이 잡혀 가면 자백을 받기 위해 흔히 이용되는 것이 바로 담배다
취조자가 담배를 권하면 취조받는 이는 긴 연기를 한 번 뿜은 후 한숨을 쉬고 말을 열기 시작한다
TV나 영화 등에서 흔히 연출되는 장면이다
그런데 담배 피우는 여성이 잡혀 들어가면 그 담배 때문에 더욱 폭언에 시달리며 폭력이 가해지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도덕적인 판단과 전혀 상관없는 기호품 하나 때문에, 니까짓 년들이 나라 걱정이냐, 니 행실부터 똑바로 해라라는 폭언을 들었을 때 얼마나 비참하고 억울하고 분노했을까?
말은 민족고대 운운하면서 정작 일상에서는 권위주의가 판치는 대학 현실에 분노했다던 저자의 후배 말이 실감나게 느껴진다
권위주의적인 정치 못지 않게 일상의 파시즘도 개인의 삶을 억압한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잊곤 한다

마지막 장에 실린 저자의 금연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뭐든지 한 번 빠지면 쉽게 못 헤어나오는 저자처럼 나 역시 중독 증세가 심한 사람이라 어떻게 금연에 성공했는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임신했을 때조차 담배와 헤어지지 못한 저자는 현재 금연 1년째라고 한다
보통 금연에 성공했다고 하려면 최소 2년은 필요하다고 하니까 아직 저자의 금연은 진행중인 셈이다
"긍정적 중독" 이라는 책을 읽은 후 저자는 달리기에 빠졌다고 한다
달리기 힘들 때는 반신욕으로 담배 생각을 잊었다고 한다
남성 흡연자들과는 달리 여성 흡연자는 금연도 비밀리에 혼자 해결해야 한다
담배 피운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 금연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담배를 끊는다고 선언하면 가족들이 도와 주는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의 금연은 혼자 몰래 해결해야 하므로 배는 힘들 것이다
저자는 대학 노트를 산 후 금연 일지를 5년째 적고 있다고 한다
끊임없는 실패와 금연 결심의 반복으로 이제는 금연 중독이 될 지경이라고 호소하는 저자는, 결국 1년의 성공을 지속시키고 있다
보통 금연을 하게 되면 군것질거리로 입이 심심한 것을 달래는데, 이 때는 체중증가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저자는 달리기와 반신욕, 그리고 담배를 둘로 나눈 후 냄새를 맡는 방법 등으로 욕구를 이겼다고 한다

술은 마셔도 되지만 담배는 안 된다는 논리는 너무나 억지스럽고 황당하다
할머니는 담배를 피워도 되지만 젊은 여자는 안 된다는 사회적 통념도 인종차별에 버금가는 편견일 뿐이다
제발 여성들도 건강을 생각해 금연을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다
정치적 흡연을 할 수 밖에 없는 차별적인 분위기가 바뀐다면 여성 흡연률은 훨씬 떨어질 것이다
더불어 저자의 완벽한 금연 성공을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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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3-12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는 남자든 여자든 담배 피는 것이 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혀 영향을 안주면 상관이 없는데 그 연기를 고스란히 비흡연자가 맡게 되니까요. 길거리에 앞에 가는 사람이 담배 피면 정말 피할곳도 없고...죽겠어요.

marine 2005-03-14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접 흡연의 폐해를 좀 더 널리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술과 담배는 오랫동안 기호품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규제하기가 쉽지 않을 걸로 보입니다 더구나 여성 흡연은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 왔기 때문에 정치적 흡연을 하는 여성들도 많구요 남에게 피해가 안 가는 선에서는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해 주는 분위기로 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유대인 살림지식총서 39
정성호 지음 / 살림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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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실망스러우려고 한다
이런 작은 문고판 책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게 잘못이지만, 미셸 푸코나 샤르트르 등의 책은 참 좋았는데, 이건 영 아니다
워낙 주제가 다양하고 저자도 많다 보니 수준있는 책도 나오고 떨어지는 책도 나오는 게 당연하겟지만, 그래도 살림 총서에 대한 나의 애정 때문인지 몹시 실망스럽다

유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성경을 읽으면서 부터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성경을 접해 왔지만 목사님이라는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읽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내 머리로 직접 읽는 성경은 마치 문학 작품처럼 너무너무 흥미진진 했다
또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예수의 모습도 살아 다가왔고, 인간의 위악적인 부분이나 신의 분노, 질투 등을 가감없이 기록한, 어찌 보면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이 경전이 너무 재밌다
그래서 이 종교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성경에 따르면 선택받은 민족인 유대인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그들은 어떤 민족인가?
수많은 박해와 수천년의 유랑 생활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이 2천년 만에 국가를 세우고 만, 세계 유일의 초대강국인 미국을 지배하는 이 민족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가장 궁금했던 점, 즉 소수 민족인 그들이 갑자기 세계의 전면에 나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 책 보다는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의 미국인편이 훨씬 도움됐다
이 책의 저자는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과정 보다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유대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특성들에 대해 좀 부정적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대인에 대해 별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과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면 금방 알 것이다
종말론을 강조하는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건국과 발전을 예수 재림이 가까워졌다는 증거로 제시한다
물론 이스라엘은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드러냈다는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정치를 현실적으로 보지 않고 종교 교리에 끼워 맞춰 이스라엘이 중동을 지배하는 것은 성경의 섭리에 맞는 당연한 것이라는 식의 논리를 듣고 있자면, 친미주의, 친서방주의의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리 기독교는 미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미국 반대는 곧 나라의 멸망이라고 주장할 정도다
이런 미국이 지지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우리가 이스라엘에 대해 아무 이해 관계도 없기 때문에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에 대해 호불호가 없다고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역시 아무 관계도 없는 아랍 사람들은 왜 그렇게 배척하고 싫어하는가?

저자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벗겨 주고 싶다고 저술 목적을 밝히지만, 편견을 벗기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더욱 강화시킨다
유대인은 머리가 좋고, 유대인은 자식에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고, 유대인은 창의적이고, 유대인은 상술에 뛰어나고, 유대인은 신의를 잘 지키고, 유대인은 전쟁이 나면 당장 고국으로 달려가고...
너무 많이 다 쓰기가 힘들 정도로 저자는 그 동안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유대인 신화를 다시 한 번 지면을 통해 강조한다
"유대인" 이라는 중립적인 제목 대신 "유대인의 장점" "유대인의 성공 비결" 등 보다 책 내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제목을 달았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저자는 유대인의 결속력을 통해 우리도 세계 각지에 흩어진 한민족의 힘을 모아 강력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론짓지만, 이 주장에도 동의할 수 없다
왜 민족은 반드시 단결해야 하는가?
근대 국가가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에 대한 충성도를 높혔다면, 보다 진일보한 개념은 국가를 넘어서 진정한 개인의 힘으로 서는 것이다
세계화란 바로 이 민족국가를 뛰어 넘는 개념 아닌가?
물론 헌팅턴의 주장처럼 세계화란 아직은 그저 허상에 불과할 뿐, 여전히 민족과 국가는 개인을 가장 안전하게 보장해 주는 장치일 수도 있지만,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는 개념이 진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도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 자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민간 나라에서 태어난, 말하자면 그 곳 문화를 체험하면서 자란 이민 2세대, 3세대 등에게도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선택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부모가, 혹은 조부모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미국식으로 교육받은 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 아닐까?

유대인의 결속력은 2천년이 넘는 방랑의 역사에 기초한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한다
다른 민족이 유대인처럼 될 수도 없고, 그들을 본받을 필요도 없다
나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거의 완벽한 민족으로서의 이 유대인 신화가 참 부담스럽다
유대인 교육법, 유대인의 상술, 유대인의 조국애 등 과도할 정도로 찬양 일색인 이 신화는 우리의 친미 성향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100페이지도 안 되는 책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 같다
살림 총서에서 나온 미셸 푸코나 장 샤르트르 등의 책은 짧은 내용이 무색할 정도로 깊이 있고 친절하게 그들의 사상을 쉽게 안내해 줬는데, 이 책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표면적이다
어떻게 해서 유대인들이 오랜 시간 동안 방랑하면서도 살아 남았는지, 그들이 세계 경제를 주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인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결속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중동 문제 해결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등에 관한 보다 깊이있는 분석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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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VS 사람 - 정혜신의 심리평전 2
정혜신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마태우스님의 추천대로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다
소재도 흥미롭고 글솜씨도 훌륭해서 물 흐르듯 한 번에 쑥 읽어 내려갔다
너무 금방 읽어 버려서 아까운 면도 있다
시사저널에 연재하던 정혜신의 칼럼을 참 재밌게 읽곤 했다
의사는 대표적인 기득권층인데 보수 논리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이고 냉정한 눈으로 정국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핵심을 집어 내는 글솜씨에 놀라곤 했다
그녀의 인물 분석은 중언부언 하지 않고 속마음을 콕 잡아 내는 시원함이 있다
그 때만 해도 정치는 남자들이 하는 것이고 아무래도 여자가 쓰는 칼럼은 약하다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혜신은 이런 나의 편견을 가볍게 부숴 준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보다 자신의 성격을 고백한 서문이 마음에 든다
1:1 대화에는 문제가 없는데 1:다수와의 의사소통은 힘들다는 고백이 왠지 모를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나 역시 그런 면이 있다
여럿이 어울려 시끌벅적 떠드면서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은 참 힘든데, 두 세 명이 모인 자리에서는 누구보다 말을 잘 한다
집단 속의 나는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그것을 내향적인 성격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내향적인 성격이란 남과 어울리기 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인간 관계가 넓지 않고 자기 자신의 세계로 침잠하는 성격이다
그녀는 보다 명확하게 내향성과 외향성을 구분한다
내향적인 성격은 자신의 판단을 중요시 하고 내가 어떻게 느끼냐를 먼저 생각한다
즉 보다 주관적이고 주체적이다
반면 외향적인 성격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시하고 나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냐 보다는 외부의 평가가 어떤가를 중요시 한다
모짜르트 음악을 두고 외향적인 성격은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평론가들의 평판 등을 얘기하지만, 내향적인 성격은 자신이 느끼는 모짜르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인간관계의 넓고 협소함, 혹은 남들 앞에 잘 나서거나 얌전함 등으로 나누는 것은 피상적인 분석에 지나지 않고, 그 보다는 사물을 어떻게 인식하냐로 내향성과 외향성을 구분한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내향적인 성격은 어둡고 외향적인 성격은 밝다는 것도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흥미있는 인물 분석이 참 많다
특정 누구를 꼽을 것도 없이 여기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이들이고, 저자의 분석 역시 흥미롭기 그지 없다
이명박은 자수성가한 사람 특유의 독선이 배어 있다
가난도 겪어 보고 성공도 해 봤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처지를 다 알 수 있다는 식의 오만이 묻어 있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어려운 역경을 헤치고 혼자의 힘으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게 강하다
또 하면 된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밀어 부치기도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
다양성과 소통의 시대라는 21세기에 과연 이명박식 밀어 부치기가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될지 생각해 본다
경제 위기가 계속되면서 사람들은 박정희식의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그리워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은 지도자 한 사람의 독불장군적인 리더쉽으로는 이끌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하고 성숙했으며 또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노무현의 통치 방식을 비웃고 심지어 거대 야당은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보지만, 권위주의로부터의 탈피만으로도 하나의 발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이 아니라 박정희가 다시 온대도, 그래서 병영 국가가 되어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다 쳐낸다 해도, 21세기 대한민국을 경제대국으로 이끌기는 힘들 것 같다
이미 효력을 상실해 버린 통치 방식을 왜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워 하는 걸까?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선회하면 박정희를 찬양하던 그 사람들 조차 견뎌 내기 힘들텐데 말이다

소설가 김훈에 대한 글도 참 재밌었다
"칼의 노래" 를 그다지 재밌게 보지 않았던 까닭으로 김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가끔 언론 매체를 통해 그의 일면을 엿볼 때마다 퍽 개성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사과나무" 라는 프로그램에서 김훈을 찾아가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선정됐다는 말을 전하자 그는 무안하게도, 나는 영향력 있는 작가도 아니고 그런 영향력을 끼치고 싶지도 않다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 때는 참 이상한 노인네다, 싶었는데 정혜신의 글을 읽어 보면 원래 김훈은 문학의 위대성 따위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다소 정신 상태가 이상한 것 같은 이인화의 문학론과 완전히 배치된 지점에 있다
펜을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칼 잡은 사람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왜? 원래 칼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김훈이 생각하는 문학이다
그래서 그는 밥벌이로서의 글쓰기를 강조하고, 인간의 본능을 끔찍하리만큼 정확하게 그려낸다
칼의 노래를 보면 유난히 끼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작가 김훈에게 밥 먹는 일이란 그만큼 절대절명의 문제인 것이다
오죽하면 "밥벌이의 지겨움" 이라는 수필집까지 냈겠는가?
그는 스스로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이 노인네는 왠지 밉지가 않다
정혜신의 지적처럼, 그는 30여년 동안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도 자신의 사상을 글에 드러내지 않았던 사람이다
언론에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고 일정한 영향력을 끼치려 들지만 않는다면, 자기 혼자 무슨 생각을 갖고 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박근혜가 정치인이 아닌 그저 박정희의 딸로서 아버지의 업적을 기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으나 그것을 공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루려고 하니 비판을 받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김훈은 이문열이나 이인화와는 또다른 느낌의 보수 우익 같다
그렇지만 그들과는 다르게 훨씬 진정성이 있고 밉지가 않다

심은하에 대한 분석은 그 동안 그녀에 대한 나의 삐딱한 생각을 바꿔 줬다
훌륭한 글쓰기란 이처럼 읽은 이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경우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소 심은하에 대한 언론의 추종을 천박하다고 생각했다
먹이거리를 찾는 연예매체에 의해 자신이 가진 가치보다 훨씬 과대포장 되어 언제 복귀할 것인가로 또 하나의 쓸데없는 기사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의 연기에 특별히 감탄한 적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신비화 전략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기자의 말처럼 어느 정도의 사생활 노출은 팬 서비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혜신의 글을 읽어 보면 원래 그녀 자신이 노출을 지극히 꺼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심은하가 아닌 배우 심은하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 정상이다
가수로 데뷔했으면서도 음악 프로그램에는 안 나가고 토크쇼에만 나가려고 한다는 정신나간 연예인들이 오늘날 대다수를 이루는 걸 보면 심은하처럼 대중매체에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고 작품으로서만 대중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배우는 분명히 가치있다는 생각이 든다
정혜신의 말대로 그녀는 돈 벌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하고 있다
고현정만 해도 이혼 후 바로 TV에 얼굴을 비추며 엄청난 돈을 벌어 들이고 있는데, 심은하는 언론에의 노출을 꺼리므로써 CF 등으로 벌 수 있는 막대한 수입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제발 파파라치처럼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짓을 그만뒀으면 좋겠다
이번 이은주 자살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한 번 기삿거리가 될만한 사건이 터지면 더 이상 쥐어 짜도 나올 게 없을 때가 될 때까지 당사자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버리는 게 바로 연예 매체이 속성이다
결혼과 동시에 은퇴하려고 했던 그녀의 속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수현에 대한 분석은 다소 불만족스러웠다
촌철살인 같은 저자의 분석의 칼이 왠지 김수현 편에서는 무뎌진 느낌이다
그저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야기 할 뿐, 김수현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내가 김수현을 싫어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에 불만을 갖는 건지도 모른다
김수현 드라마를 즐겨 보지만, 억지스럽고 작위적이며 오버하는 그 말투는 정말 싫을 때가 많다
특히 가부장적인 사고 방식이나 수직적인 가족 관계는 참 짜증난다
버릇없고 싸가지 없는 딸과, 예의바르고 부모에게 절대 복종하는 아들의 명확한 대비를 보면, 대체 저 여자는 무슨 생각으로 드라마를 쓸까 궁금할 때도 있다
그녀의 특기가 살아 있는 대사라고 하지만, 주인공들이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대사도 과장되고 억지스러워 듣기 거북할 때가 많다
(부모님 전상서에서는 그런 면이 많이 줄어든 것 같긴 하다)
인어 아가씨 등을 쓴 임성한 작가처럼 김수현 드라마를 보면 그녀가 썼음을 금방 알 정도로 정형화된 공식이 있고, 시청자들의 호불호도 분명하게 나뉜다
나는 정혜신이 그녀의 이런 부분을 분석해 주길 바랬는데, 드라마의 내용이나 주제 의식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었다
다만 작가 김수현의 강한 개성에 대한 평가가 많았다
드라마 내용과 관계없는 작가의 캐릭터에 관해서라면 일견 멋지게 보이기도 한다
이효리가 캐스팅 된 걸 알고 기절하는 줄 알았다거나, 김희애 대신 이병헌이 연기 대상을 탄 걸 두고 상은 받을 만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고 일갈을 갈기는 그녀의 쓴소리는 시원한 면도 있다

그 외에도 손석희나 박근혜, 이인화, 김민기, 이창동 등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인물들이 많이 있다
누군가의 무의식 세계를 분석한다는 것은 참 재밌는 작업이지만 한편으로는 위험한 일 같기도 하다
개인적인 친분 없이 객관적인 지표만 가지고 평가를 내리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은 얻을 수 있겠으나, 그 사람의 정신세계까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단정짓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전은 좀 더 활발하게 진행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강준만의 실명 비판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 같다
단순한 평전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곁들어 있기 때문에 가벼운 심리학 책을 읽는 기분도 든다
다음에는 전여옥을 분석해 보면 어떨까 싶다
이 여자의 정신 세계는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정혜신도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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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2-2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맞아요, 다음엔 전여옥을 분석해 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marine 2005-02-28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옥은 분석꺼리가 참 많을 것 같죠??
 
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부터 무척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역시 그냥 명성을 얻은 게 아닌 것 같다
경어체를 쓴다거나, 조심스레 검찰 내부를 비판하는 저자의 글을 읽으며, 이 사람은 참 겸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권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겸손하기는 참 어려운 일인데, 아마 신앙심도 아주 깊을 것 같다
특별히 검참 조직을 떠나서가 아니라 원래 성격 자체가 겸손한 사람 같다
만약 검찰에 계속 있었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을 비판한다는 죄책감에 시달렸을 사람이다
그에게는 검사보다 대학 교수가 훨씬 잘 어울린다

제목도 참 마음에 든다
어쩜 이렇게 고풍스럽고 멋들어진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헌법의 풍경이라길래 좀 어렵고 법학적인 내용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재밌고 에세이 형식이라 쉽게 읽힌다
무엇보다 저자의 올바른 마음 자세를 보는 것 같아 읽고 난 후 기분이 상쾌하다

여태껏 나는 올바른 판단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솔로몬의 선택 같은 모의 법정 프로그램을 보면 대체 왜 변호사들끼리 판단이 다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법률에 명시된대로 판결을 내리면 될텐데 왜 서로 판단이 다른 걸까?
이 책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확실한 해답을 얻었다
법이란 모든 상황에 딱 들어맞게 세세하게 결정된 것이 아니다
판결하는 사람의 해석 여지가 큰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 부분은 당시 사회 상황의 이른바 상식선에서 판결이 난다
법률가들 사이에 일반적으로 퍼진 상식에 기초해 판단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아무리 헌법 재판소에서 판결을 내린다 할지라도 100% 옳은 판결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수의견도 존중하는 것 같다

미국 배심원 제도에 대한 오해도 풀렸다
법정 영화를 보면 배심원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변호사가 애를 쓴다
극적인 반전은 꼭 이 배심원들에 의해 일어난다
검사에 따르면 당연히 100% 유죄인데도 배심원들이 느닷없이 무죄 선고를 내려 버린다
왠지 변호사의 말빨과 피고의 불쌍한 환경이 결합되어 법을 제대로 모르는 배심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가 않았다
대체 일반 시민들이 법에 대해 뭘 안 다고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결정한단 말인가?
그런데 이 배심원 제도는 일반인도 법 집행에 참여하게 만든, 시민 참여 제도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처럼 법이 일반 사람들과 유리되어 법률가의 특수 영역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도 함께 재판에 참여할 수 있게 만든 제도다
우리나차럼 인맥, 학연 등으로 얽힌 나라에서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문제점도 있겠지만, 시민들이 법 집행에 좀 더 많은 참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법 고시 합격자가 1000명을 넘는다고 질적 저하를 우려하지만, 수가 이렇게 많아져야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진출할 수 있다고 저자는 희망적인 관점을 피력한다
무조건 돈 되는 분야로만 몰리기 보다는 인권 분야나 장애인 부분 같은 소외된 곳으로도 변호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 셈이다
물론 예전보다 수입이 감소하고 권위 의식을 버려야 함은 당연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사법 고시 합격자들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분석한다
합격하기 전까지는 주변의 냉대를 감수하며 몇 년간 시험에만 매달린다
당연히 자신에 대한 회의가 들 것이다
그런데 합격만 하면 온 세상이 자신을 다르게 대한다
갑자기 엄청난 신분 상승을 이룬 것이다
보상 심리가 작동해 더욱 특권 의식에 집착하게 된다
저자는 이것을 졸부들과 똑같다고 표현한다
사실 우리나라 사법 시험 제도의 문제점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신림동에 산재한 그 많은 고시 낭인들을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다고 하는데 저자는 고시 낭인들을 로스쿨 입학생으로 바꾸는 기능 밖에 못할 거라고 우려한다

검찰 조직이나 변호사 세계의 숨겨진 면을 많이 보게 됐다
워낙 한 쪽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라 왠만한 개혁으로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이 집단만 그런 게 아니라 이른바 전문가 집단일수록 자기애와 권위의식이 강한 법이다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다양화와 참여 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민들이 법을 나와 상관없는 엄청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스스로 참여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또 법률가 집단들도 다양하게 분화되어야 자기 정화 기능을 가질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시 합격자들이 많아지는 건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이다
법이 생활 속으로 쉽게 들어 올 수 있도록 매스컴이나 출판물의 역할도 중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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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5-02-21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 저도 참 재밌게 봤습니다. 이거. 김두식 교수가 글발도 좀 있고 이력도 특이하고.

marine 2005-02-2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글빨 좀 있으시죠 그런데 참 겸손하세요 이렇게 자기를 낮춰가며 조심스레 글 쓰는 사람 처음 봤어요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양이현정 옮김 / 현실문화 / 2002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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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아 스터이넘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 여자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름다운 페미니스트로 유명하다
여자를 상품화 시키고 외모만으로 판단하는 것에 반기를 든 것이 페미니즘이지만, 그녀의 아름다움과 날씬함이 명성을 높이는데 한 몫 한다
자신이 미모를 이용해 바니걸로 클럽에 위장 취업해 겪은 경험담을 르포 형식으로 출간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즈라는 잡지의 편집자이기도 한 그녀는, 60세가 넘는 나이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20여세 어린 백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 후 변절자라는 말도 듣지만, 페미니즘이 결혼과 유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다
페미니즘은 인종차별 폐지와 일맥 상통하는 말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혹은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차별당하는 것을 거부하자는 이 운동이 대체 개인의 결혼 여부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재밌는 상상이다
글로리아는 멋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월경은 남자의 우수성을 상징하는 징표가 될 것이고 한 달에 한 번 정화의식을 치루지 못한 여자는 불경하다고 간주될 것이다
남자들은 몇 개의 패드를 착용하는지로 자신의 월경양이 많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고 월경하는 기간은 법에 의해 특별한 보호를 받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상상을 통해 어떤 현상이든 기득권을 가진 집단이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날카로운 분석을 시도한다
고대 이래 월경하는 여성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그 월경을 남자가 한다면 지금처럼 뒤로 숨겨지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하긴 흑인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검은 것은 순수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칭송받을 것이고, 백인의 피부색은 병약하고 색소가 부족한 기형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세상에 절대적인 의미란 없는 법이다
결국 기득권층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온갖 사회의 편견들은 말 그래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서 보는 편견, 잘못된 생각에 불과하다

재클린 케네디에 관한 글을 의외였다
아름다운 레이디 퍼스트로 세계를 떠들석하게 했던 그녀는 케네디가 죽고 난 후 그리스의 대부호 오나시스와 재혼한다
특별히 사회를 위해 기여한 것도 없는데 그저 이름과 미모만으로 유명해진 여자라고 생각했다
마치 다이애나처럼 말이다
그런데 글로리아의 글을 통해 그녀가 결코 만만한 가쉽거리가 아님을 알게 됐다
케네디가 죽은 뒤 미국은 그녀가 케네디의 상징으로 남기를 원했다
즉 그녀 자신의 삶을 살기 보다는 케네디의 영광을 지속시킬 액세서리로 살길 바란 것이다
그러나 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지켜 줄 수 있는 결혼을 택했다
(어떤 기사에서 읽은 건데 재클린은 오나시스에게 값비싼 선물들을 받아낸 후 즉시 중고 명품 가게로 달려가 반값에 넘겨 버리고 그 돈을 모았다고 한다)
오나시스마저 죽자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뜻밖에도 편집자가 되었다
결혼 전 기자였던 만큼 자신의 일을 다시 찾은 셈이지만, 누구도 그녀가 일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재클린은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보통 사람의 생을 감당해 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정치적인 일에 나서길 원했지만, (특히 여성의 권익 향상 쪽으로) 그녀는 뒤에서 후원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기 삶을 다치게 하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재클린이 개인적인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쓴 점을 높이 샀다
사실 재클린 정도로 유명세를 탄 사람이 평범한 삶을 살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세계적인 대부호의 미망인이 물려 받은 유산만으로도 평생 호화롭게 살 수 있을텐데, 결혼 전의 일터로 나와 돈을 벌기 위해 사소한 것들과 싸우는 모습은 너무나 의외다
그녀 정도 명성이라면 정치권이나 연예계 쪽의 유혹도 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낸 그녀의 강단있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포르노에 관한 시각도 무척 신선했다
어떤 글에서 포르노는 여성 폭력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포르노를 접한 적이 없을 때라 대체 포르노와 여성 폭력이 무슨 관계가 있나, 의아했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글로리아는 포르노와 에로티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로티카는 남녀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의 애정을 더욱 깊게 하는 성적 유희를 즐긴다
그런데 포르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나뉘어져 있다
힘을 가진 권력자가 묶여 있는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성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이다
가끔 접하는 포르노를 보면 여성을 묶어 놓고 애무를 즐기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때는 이해가 안 갔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 관계라는 걸 깨달았다
더 심한 건 스너프 필름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8mm을 통해 스너프 필름을 처음 접했다
쉽게 상상이 안 가지만, 포르노 필름을 찍다가 실제로 여성을 죽인다
사람이 아무리 가학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살인당하는 여자를 보면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지 영화 보는 내내 무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스너프 필름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딱 한 경우 뿐이라고 한다
스너프 필림을 촬영한 감독의 집 근처에서 여러 구의 여자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스너프가 얼마나 일상화 됐는지 영어 사전에도 그 단어가 실려 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더라도 여자를 묶어 놓고 온갖 성적 가학 행위를 하는 필름은 흔하게 접한다
이것을 성적 취향이라고 내버려 둬야 하는가?
저자의 말대로 에로티카와 포르노를 구분하여, 여성 혹은 힘약한 어린 소년들에게 성적 가혹 행위를 하는 포르노 산업에 제재를 가하여야 할 것 같다

이 글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발간된 것이다
70년대라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다
그런데도 21세기인 지금 읽어도 전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이 어찌 보면 불행인지도 모르겠다
글로리아 역시 서문에 그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차별의 역사는 너무나 길고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라 한 번에 개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들이 합해져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정 부분의 희생을 약자들이 감당할 수 밖에 없다고 하지만, 약자들의 권익을 지켜주는 것도 한층 성숙한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귀족들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진보했듯, 여성이라는 이유로, 혹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100%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은 인류의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그 목표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게 진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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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2-25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도 읽으면서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나네요. 다른 분들이 노력해서 그런지 스타이넘의 시대는 지금 우리나라에서 여성운동을 하는 분들보다는 좀 쉬웠던 것 같아요. 물론 나름의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우리만큼 척박하겠습니까.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겠죠 그래도.

marine 2005-02-2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도 월경을 한다면이라는 발상이 참 신선하죠? 전 유럽이나 미국의 여성 운동사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고 그들에게 너무 미안해져요 생명을 걸고 이루어낸 여성 참정권 등을 내가 함부로 여기지는 않나, 앞세대의 희생으로 쟁취한 것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나... 여의사의 역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왜 그녀들이 사회의 온갖 차별과 비난을 견뎌 가면서 간호사라는 보조적인 위치에서 직접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라는 주도적인 위치로 가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썼나, 무척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자 의대생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절대 사회가 그냥 허락한 게 아니겠지요 앞세대의 희생이 다음 세대의 희망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역사책을 통해 참 많이 발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