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00
이진홍 지음 / 살림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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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사 놓은 책인데 이제서야 읽었다

100페이지를 넘지 않는 작은 문고판

유럽으로 미술관 투어를 가려고 결심한 뒤 산 책이다

사실은 4만원 맞추려고 끼워 넣은 거다

최근에 발간된 거라야 하루 배송이 가능해서 고르고 고른 책이다

100번이라는 매력적인 번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솔직히 처음에는 재미가 없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의 방법, 뭐 이런 얘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황당하게 고대로부터의 여행의 역사가 죽 나오는 거다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나오질 않나, 한 무제 때의 장건이 나오질 않나 한 마디로 황당 그 자체였다

그런데 여행의 역사 부분은 한 챕터에 끝나고 뒤로 가면 내가 원하는 얘기도 나온다

그리고 요즘에야 여행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관광과 비슷한 의미로 여겨지지, 과거에는 사회적 국가적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떠나는 일종의 모험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까 콜럼버스의 대항해 이런 것이 과거 여행의 일반적인 행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교통이 발달하지 않고 천문학이나 지리학 발전이 더디었던 고대 사회에서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생명을 건 행위였을 것이다

일단 지구나 평평하다고 생각했으니 세상끝에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는 게 일반인들의 두려움 아니었겠는가?

결국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은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진보하는 것 같다

그 정신이라는 것도 과학기술의 도움이 있어야 한 단계 나아간다는 얘기다


 

여행을 왜 떠나는가?

저자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우선 꼽는다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또 관습이나 사회적 규제로부터 저항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내면의 발견, 자아찾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도 있겠으나, 직접 행동하는 것과 단순히 상상력에 의지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다치바나의 말대로 책을 통해 익힌 지식을 경험을 통해 즉 여행을 하면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경제력이 필수일 것이다

더불어 시간까지

결국 교양인이 되려면 돈과 시간과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글쓰기의 메타포가 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마치 책을 읽고 나면 할 말이 많아지는 것처럼,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풍경과 삶의 방식을 접하면 이야기거리가 많아질 것 같다

 

소유로서의 여행보다 존재로서의 여행을 즐기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소유로서의 여행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루브르 미술관에 갔다, 사진을 찍었다, 나 거기 가 봤다고 남들에게 자랑한다, 뭐 이런 것들 말이다

하긴 이것도 어렸을 때 말이지 나이가 좀 들면 이런 자부심 같은 건 유치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 어디 가 봤어, 이런 걸로 자신의 가치를 높힐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어딨겠는가?

그렇다면 존재로서의 여행, 자아 찾기로서의 여행은 무엇인가?

천천히 자신에 대해 돌아보면서, 남과 다른 점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특성을 분명하게 정의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하여간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것은 생각의 확장에 큰 도움을 준다

나만 해도 내셔널 갤러리에서 직접 명화들을 보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타인과 시선을 교환하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선진국 여행객들이 후진국을 여행할 때 우월감을 갖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우리와 다른 문화권에 가면 낯선 것들에 대해 거부감을 갖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행지의 주민들도 실은 우리 여행객들을 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이해하고 새롭게 바라보면 그들 역시 나를 호의적인 시선으로 볼 것이다

솔직히 함부로 막 사진 찍는 사람들, 거부감 든다

반대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온 여행객이 동정의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 보면서 사진 한 장 찍자고 하면 얼마나 불쾌하겠는가?

가난한 아프리카 여행객이 뉴욕에 가서 사진 한 장 찍어도 되겠냐고 하면 흔쾌히 응하는 백인 별로 없을 거다

그러므로 여행을 떠날 때는 보다 겸손해져야 한다

불편함과 이상함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오는 이질성에서 기원한 것임을 명심하고, 함부로 가치판단을 내리지 말자


 

여행을 자주 떠나고 싶다

여행 중독이 되면 일상은 그저 여행 사이사이의 충전 시간으로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관광지만 휙 도는, 소유로서의 여행 말고, 내가 속한 공동체와 문화권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으로 나를 볼 수 있는 그런 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

내면의 발견이랄까?

국내 여행도 좋지만 가능하면 해외여행을 많이 해 보고 싶다

이국적인 풍경이 주는 낯선 느낌을 자주 느끼고 싶다

외롭고 처량한 기분도 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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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 살림지식총서 76
홍성민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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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드외에 따르면 문화적 취향, 예술에 대한 감식력 같은 것이 경제력과 직결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예술이 현대 사회의 지배적 이념인가?

예술가들이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경제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예술적 심미안이 높은 것을 상류층의 특징으로 꼽는지 잘 모르겠다

부르드외에 따르면 미술관 찾아 다니고 책 많이 읽고 이런 것들이 다 높히 평가받는 지배 계급의 속성 중 하나로 인식되야 하는데,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이것은 지배 계급임을 드러내는 필수 조건은 아니라는 의문이 생긴다

물론 지배 계급, 즉 이른바 상류층이 문화 예술적으로 심미안이 높고 그 쪽으로 투자도 많이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조건은 될 망정 필요조건은 아니라고 본다

그냥 있으면 좋고 없어도 별 지장없는 그 정도 수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나 싶다

 

반대로 가난한 예술가들은 어떻게 해석되야 할까?

상징자본이 이렇게까지 중요하다면 그 상징자본을 생산해 내는 예술가들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데, 순수예술은 늘 죽기 일보 직전이라고 앓는 소리를 해댄다

만약 상징자본은 풍부한데 경제력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배 계급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한국 사회에서 상징자본은 경제력에 종속된 하위 개념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일단 돈이 많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음악, 미술, 사진 이런 것들에 대한 취향이 고급스러우려면 경제력을 확보하고 이른바 지배 계급에 편입되야 함을 인정하지만, 그렇게까지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다

학교 교육을 성실하게 수행해낸 사람이라면 문화적 취향도 고급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이 안 풀려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산다

문화적 취향이 고급스럽다고 지배 계층에 편입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또 대한민국 부자들이 과연 예술에 대한 감식안이 풍부한지도 잘 모르겠다

증권이나 부동산에는 밝을지언정 예술적 취향도 고상하다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술에 대한 취향 자체를 중요시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교 교육이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도 않으며 오히려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해 내는 공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물론 그렇다

노동자 계급의 투쟁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해 국가가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건물을 짓고 교사들을 채용해 공짜로 학생들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의 기본 원리인 기브 앤 테이크의 법칙 아니겠는가?

국가는 학교 교육을 통해 지배 이념에 적절한 인간을 양성해 낸다

그러니 대안학교 어쩌고 하면 국가는 이들의 사회 진입을 막으려고 한다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란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더러 노동자 중심으로 가르치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상징적인 의미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할 뿐이지, 능력의 차이는 분명히 있고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든 다 똑같은 수준은 아니지 않을까?

미학 역시 좀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관점은 분명 있다

그런 게 바로 진보 아닐까?

지배 이념이란 적어도 교육이나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보다 발전되고 세련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도태되어 지배 이데올로기로 남아 있을 리도 없다

그러니 어느 정도 편향적인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또 사회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 공감하는 사상이나 문화적 틀을 수용해야만 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부르드외가 주장하는 문제점은 인정한다

노동자의 90%가 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재생산 되고, 이들은 자신들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낙오됐다고 문제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진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평범하고 무능력한 사람도 왠만큼 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바로 복지국가의 이념일 것이다

능력의 평등은 안 될지라도, 기회의 균등에 있어 가능하면 그 범위를 넓혀 주자는 데 진정한 진보의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노동자의 90%가 다시 노동자가 되는 이 시스템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아예 상승 자체가 불가능 했기 때문에 아무리 미련하고 모자란 놈도 귀족으로 태어나면 평생 지배 계급으로 군림했으나 현대 사회는 일정 수준에서 크게 벗어난 사람들은 환경이 어지간히 좋더라도 도태되게 된다

반대로 엄청나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신분제의 한계에 묶였던 것에 비해, 현대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지배 계급으로의 편입의 문이 좁게나마 열려 있다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지배 계급이 되는 바로 그 10%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온다

어떻게 하면 이 비율을 높이느냐다

노동자로 태어나 지배 계급으로 상승하는 비율을 어떻게 하면 좀 더 늘릴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부르드외는 현재의 학교 교육 시스템으로는 거의 불가능 하다고 본 것 같다

능력만 되면 얼마든지 신분 상승의 기회가 보장된 사회가 곧 열린 사회고 발전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기득권 보장도 좀 더 줄어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경제 발전을 이룩한 만큼 사회 시스템이 여러가지로 불안정 하지만, 대신 역동적이고 신분의 이동이 활발하다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큰 해당없는 얘기지만

어쨌든 한국 부모들이 자식 교육에 목숨 거는 이유도 바로 이 신분상승을 위해서 학교 교육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리라

돈을 크게 벌어서 신분 상승 하는 것보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제도권 안에 들어가는 것이 백만배 쯤 쉽다는 걸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부르드외가 주장한 학교 교육을 통한 지배 계급의 재생산과 더불어, 외국 문화에 종속된 후기 식민지성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니가 학벌 사회의 폐해는 전 세계 공통적인 일반적 문제인데 비해, 미국 문화에 철저하게 종속된 것은 대한민국 교육의 특수한 문제인 셈이다

외국이란 곧 미국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문화는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다 미국이 기준이고 영어 실력의 유무가 개인의 능력을 결정짓는 가장 큰 지표가 된다

한국이야 반도 국가의 특성상 과거에도 중국 문화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었고 그것이 또 생존방식이었다

일제 시대 때는 일본 유학을 통한 지식인 그룹이 형성됐고, 미국에 의해 해방된 이후는 미국 유학 코스를 통해 지배 계급이 만들어졌고 이들이 경제 개발에 앞장섰다

미국 것은 좋은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어떤 다른 이론이나 문화도 용납될 수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한국 사회는 학벌주의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모든 고등학교의 목표는 서울대학교 많이 보내기다

사실 우리나라 교육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전형적인 예다

어느 정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이 학교 교육이란 것은 인정하지만 그 도가 천박하리만큼 지나치다는 게 문제일 것이다

밤 10시까지 자율학습 시킨다면서 모든 학생들을 잡아두고 심화반이나 기숙사 등을 운영하고 모든 학생들의 목표를 서울대로 잡는 나라!!

그러고 보면 앞에서 우리나라는 프랑스 보다 낫다고 생각한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편견이었나 반성하게 된다

 

기존의 마르크시스트들이 경제적 구조에 따라서 지배 피지배 계급을 나눴던 반면, 부르디외는 문화지배에 의한 방식으로 계급을 나눴다

그런데 이렇게 문화 자본이나 상징 자본이 경제 구조보다 더 중요시 된 이유는, 바로 경제 발전에 있지 않을까?

먹고 살만해지니까 더이상 빵을 위해 극렬하게 투쟁하지 않는 것이다

저자 역시 지적한 바지만, 노동자 계층도 (특히 현대 자동차) 휴가철이면 바캉스 가고 외식 자주 하고 자동차도 굴린다

자신들이 피지배 계층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할 수 밖에 없다

절대적인 부가 커짐에 따라 평등하게 나눠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일정 부분 그 혜택을 누리면서 하층 계급이 갖는 저항 의식 자체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

이른바 노동 귀족들이 탄생했다

저자의 말처럼 물적 자본의 소유 유무로 계급의식을 결정할 게 아니라 소비 양식에 따라 나눠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계급의식의 대표적 표현이 바로 투표 성향일 것이다

 

나도 의문을 가졌었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대다수가 노동자 계층인데 왜 노동당이 정권을 잡지 못할까?

울산의 경우 노조가 그렇게 활발한데도 왜 항상 정몽주가 당선되는 것일까?

금권 선거가 아닌가 이런 생각마저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현대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문화 향유 계급으로 여긴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가족이야기]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스스로를 일반 노동자들과 다른 계층으로 상정하는 것 같다

사실 전공의들도 노조가 생기고 공무원 노조도 인정한다고 하지만 과연 공무원이나 의사를 노동자로 인정해 줄지는 의문이다

창녀들이 노조 만든다고 하니까 심지어 여성 노동가마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노동자란 사용자로부터 임금을 받고 일하는 모든 계층을 아우르는 보다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노동자 계층은 이렇다, 는 식으로 단정지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재밌는 부분은, 같은 계급 내에서도 소비 양식이나 표현 양식이 다른 경우들이다

나도 이 점에 대해 참 궁금했다

상류층은 이렇다, 혹은 중산층은 이렇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들이 종종 관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르디외 말을 빌리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다

같은 계급 내 있더라도 얼마나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혹은 자본 구성이 어떻게 됐냐에 따라, 기존의 계급이 어떤 곳이었냐 등에 따라 계급의식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로 보자면 밑바닥에 올라온 중간계급은 더욱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

위로 올라가려는 상승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을 드러낸다

중산층이 진보를 이룩한다 식의 시민사회론은 그저 말을 위한 말에 불과한 것 같다

 

학벌 컴플렉스,

대한민국에 살면서 제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학벌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 인정한다

또 갖기 못한 사람들의 패배의식 어쩔 수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너무 노골적이다

저자의 지적대로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온 국민을 피해자로 몰고 간다

누군가의 말대로 대한민국에서 지배 계급에 편입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제 미국 밖에 없는 것 같다

학벌과 함께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하는 게 바로 미국이다

미국 학벌이면 최고층을 점유할 수 있는 것이다

경제적 소유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일단 지식층이라는 타이틀을 달면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같은 중산층이라 할지라도 계급의식은 위쪽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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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09-1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모르겠지만, 부르디외를 전공하신 분들이나 들뢰즈 전공하신 분들...이 교단에 서기 몹시 힘든 것 같더군요. 제도권의 벽인지? 새로운 시각이 낯선 것인지? 모르겠지만 실력있으신 분들이 지역에서도 힘든 것 같더군요. 학문적 방법이나 도구로 우리사회를 분석, 연구하는 것도 무척 가치있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님의 지적처럼 너무나 암담하기도 하고..... 말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양장) 믿음의 글들 185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이종태 외 옮김 / 홍성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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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해, 루이스는 아주 쉽게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억지로 생기게 애쓸 것이 아니라, 일단 사랑한다고 가정하고 행동하다 보면 자연스레 감정도 생길 거라고 말한다

유태인들을 미워해서 학대했으나, 학대하다 보니 더욱 미워지는 악순환을 역으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선과 악의 감정은 모두 복리로 증가한다고 한다

정말 그 말이 맞다

미워하면 할수록 더욱 미워지고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좋아진다

감정이 계속 증폭된다고 해야 할까?

기독교적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고 한다

사랑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다

또 남을 사랑하라고 해서 그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다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말도 아니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나란 인간이 실수투성이고 단점이 많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듯, 남에게도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베풀라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가 잘 되길 바라라고 한다

이를테면 유영철 같은 놈이 잡혔다,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고 욕한다

그러나 그가 자기 죄를 뉘우치고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게 바로 사랑이다

유영철에 대해 자기가 평소 갖고 있던 온갖 스트레스까지 다 퍼부으며 마치 그를 단죄하는 것이 정의인 양 행동하는 것은 기독교의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루이스는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규정한다

교만은 남보다 우월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생긴다

사실 이것만큼 우리를 괴롭히는 감정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는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돈을 벌고 열심히 일하는 게 아니라,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애를 쓴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라고 해야 할까?

언젠가 읽은 우화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피정을 갔는데 다른 사람들이 저녁 기도도 안 드리고 자 버리자, 기도를 드리던 아들이 아버지에게 남들 흉을 본다

피정 왔으면서 저녁 기도도 안 드리고 자 버리냐고, 진실한 교인들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슬픈 목소리로 말한다

아들아, 차라리 오늘 네가 기도를 안 드리고 자는 게 나을 뻔 했구나

이 아버지가 걱정하는 것이 바로 루이스가 말한 교만이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보다 낫다고 여긴다면 그 마음이 바로 교만이다

교만의 함정에 빠지기란 얼마나 쉬운지!!

굳이 기독교적 계명이 아니라 할지라도, 남과 비교하는 것은 대체적으로 사람을 불행하게 이끈다

비교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는 운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내러벼 두는데도 정신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신념은 계속 붇돋워 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성경읽기와 기도, 그리고 교회에 계속 나가야 함을 역설한 말이다

물론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그렇지만 성경읽기와 기도까지는 그렇다 쳐도, 교회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 많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들은 혼자 성장할 수 없다고 한다

교류를 통해 믿음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교류라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분위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부 교회는 종말론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이 망하고 휴거가 일어나고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로 나는 믿는다

또 몇 년 내에 그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받았고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대체 왜 그 종말에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세상의 종말을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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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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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설국을 읽었다

항상 읽어야겠다는 부담감만 가진 책이었는데, 오늘 다 읽었다

15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이다

연작식으로 드문드문 발표한 글들을 모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글의 흐름이 이어지지가 않고 끊기는 느낌이었나 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는 엄청난 타이틀 때문에 상당히 쫄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재미는 없다

이런 소설은,즉 문장력이 빛나는 소설은 원서로 직접 읽어야 맛이 날텐데 번역서로 읽다 보니 아무래도 진수를 느끼기가 힘들다

저자는 성심성의껏 번역한 듯 하지만, 왠지 겉도는 것 같은 문장들이 많다

소리를 내고 밑줄을 그으면서 여러 차례 읽어야 하는 그런 문장 말이다

 

[금각사]가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 반면 [설국]은 풍경 묘사에 주력한다

[금각사]가 1인칭 시점이라 당연히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또 [설국]은 3인칭 시점이라 아무래도 심리 변화에 덜 주력할 수 밖에 없겠으나, 어쨌든 두 소설은 기법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렇지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미시마 유키오를 아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미시마는 그가 딱 총애할만한 제자였을 것이다

난 [설국] 보다 [금각사]가 더 마음에 든다

왜냐면 금각사는, 설국보다 훨씬 읽기가 쉽다

풍경 묘사로 한 권의 책을 써 내려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설국이 높게 평가되는 것 같다

탁월한 문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대부분의 소설에서 보면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구나, 정도로 떠벌이는 것으로 끝나는데, (즉 소설에서 중요한 모티브가 아니라 그냥 배경 묘사 정도로) 이 소설에서는 눈덮힌 겨울 풍경이 주인공에게 끼치는 심리 변화의 추이를 세밀하게 그려낸다

 

가와바타는 천편일률적인 풍경 묘사에 질려, 본인이 직접 여행 행장을 꾸리고 눈덮힌 니카타 현의 온천장에 머물면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매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셈이다

일본도 눈이 참 많이 오나 보다

문득 이문열이 쓴 단편 소설이 생각난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주인공은 젊은 시절 절대미를 찾아 눈덮힌 강원도로 무전 여행을 떠난다

눈에 발이 푹푹 빠져 걷기도 힘들 정도의 눈보라 속에서 주인공은 절대미를 발견하고 감격에 겨워한다

이문열 특유의 화려한 미문체가 길게 이어진다

어쩌면 이문열은 금각사나 설국을 통해 절대미의 세계를 그리겠다는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왠지 그도 일본 소설, 이런 탐미주의 계열을 좋아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와 감성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문열이 탐미주의 작가란 얘기는 아니고, 모티브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시마무라는 직접 보지도 않은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을 쓰면서 살아가는 고급 실업자다

도쿄 서민가에서 태어나 가부키와 같은 전통 문화에 취해 살다가, 언제부터인가 서양 무용에 관한 책을 탐독하더니 여기저기 평론을 발표하게 됐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빈둥빈둥 지내며 너무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산을 타고 온천장에서 며칠 묵어 가곤 한다

그는 이미 결혼도 했고 도쿄에서 산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35년이니, 일본 사람들 역시 서양인이 직접 하는 발레 공연을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독학으로 선진 예술을 접하고, 실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감상에 취해 마치 천국의 시를 쓰듯 몽환적인 얘기들을 잡지에 발표하고 그것이 먹혀 들어간다

하긴 1930년대에는 글자만 알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였으니까, 시마무라 같은 고급 지식인들이 충분히 놀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온천장에서 만난 고마코는 게이샤다

게이샤나 기생이라고 하면 왠지 예술도 좀 아는 나름대로 풍류를 즐기는 신분 같은데, 따지고 보면 결국 창녀 아닌가?

화대를 받고 몸을 파는 창녀 말이다

시마무라는 외국 책을 번역하고 자비 출판까지 하는, 더구나 무용에 대한 글까지 발표하는 고급 지식인이다 (유명하진 않지만)

더구나 그는 아내까지 있고 도쿄에 산다

우리로 치자면 서울 사는 평론가가 잠시 강원도 산골에 머물면서 창녀를 불러다가 섹스는 않하고 말상대를 하는, 그런 장면일 것이다

 

눈 때문인지,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순백의 미를 가진 여자라 생각하고 함부로 다루질 않는다

시마무라는 일종의 탐미주의자 같다

어쩌면 고마코에게 우정 비슷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하긴 이제 겨우 열 아홉살의 어린애나 다름없는데, 그녀를 상대로 성욕을 풀기는 좀 그랬을 것이다

(물론 그 다음에 섹스를 위해 부른 게이샤는 겨우 열 일곱이었고 오히려 어린 애가 더 편하다는 말도 했지만)

더구나 처음 고마코를 만났을 때만 해도 일본 전통 무용을 배우고 샤이센을 연주하면서 연회에 불려 나가는 일종의 무용수 내지는 음악가 신분이었기 때문에 (즉 창녀로서의 생활이 익숙치 않은) 무용 평론가였던 시마무라는 아내와 함께 올 때 말동무 삼을 생각마저 한다

 

고마코가 시마무라에게 빠져드는 건 당연하다

일단 그녀는 나이가 어리고 자신을 성적으로 대하지 않고 점잖게 말동무로만 여기는 도쿄 남자에게 어느 정도 기대고 싶었을 것이다

시마무라 역시 먼 곳으로 여행와서 눈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어린 여자를 만나 특히 시골에서 보기 드문 실력의 샤이센 연주를 듣고 고마코에게 빠져든다

그런데 둘이 사랑에 빠지면 이건 영락없는 통속 소설에 지나지 않게 된다

아마 가와바타는 둘 간의 사랑에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시마무라는 그저 고마코에게 애틋한 연민의 감정 정도만 느낀다

둘이 한 방에 있는 게 여러 차례 나왔지만 끝까지 섹스를 하진 않는다

오히려 고마코는 손님들에게 불려 나간 날 꼭 혼자 묵고 있는 시마무라에게 다녀간다

여관에서는 고마코를 시마무라의 단골 손님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만약 내 남편이 여행지에서 창녀와 혹은 그 마을 여자와 친구 비슷한 관계를 맺게 된다면 난 어떤 기분일까?

반대로 내가 여행지에서 야릇한 감정을 주고받는 남자가 생긴다면 남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걸 바람피운다고 해야 할까?

둘은 분명히 죽고 못 사는 사이도 아니고 섹스를 한 것도 아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다만 1년에 한 두 번 여관에 묵고 갈 뿐이다

이 정도 관계라면 눈감아 줘도 되지 않을까?

[바람난 가족]에서도 황정민과 문소리는 서로 다른 파트너를 가지고 있고 그 사실에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소리는, 다행이네 당신이 말할 상대가 있어서, 라고 가볍게 반응한다

그나마 영화에서는 섹스 파트너였지만 이 소설에서 두 사람은 성관계도 갖지 않는다

뭐 이 정도라면 눈감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섹스를 안 했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순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루이스는 이런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섹스는 안 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라면 결혼했더라도 이성 친구가 괜찮다는 얘길까?

 

이 소설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헛수고" 라는 단어였다

도쿄 생활을 할 때 고마코는 화려한 가구를 쓰고 열심히 일기를 쓰면서 나름대로 교양있는 문화인의 삶을 살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산골 온천장에 게이샤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도 어떤 남자의 요양비를 벌어 주기 위해서 말이다

나름대로 소설도 읽고 부지런히 샤이센 연습도 하지만 결국 다 그녀에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느낀 시마무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뭔가 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가치없는 일이 되버린 느낌 말이다

시마무라 역시 무위도식하는 삶을 보낸다

고마코와도 언젠가는 헤어질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 역시 이제 가라고 그를 애써 보내려고 한다

여행지에서 잠시 인연을 맺고 마음을 줘 봤자 그 때뿐이고 마음을 준 사람만 상처입기 마련이란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자신은 창녀가 아닌가?

적극적이지도 않는 시마무라에게 고마코는 매달리지 못한다

그러나 일단 그가 온천장으로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달려간다

 

요코의 존재는 뭘까?

고마코가 요양비를 댔던 유키오를 몹시 사랑했던 모양이다

여관의 하녀 일을 하는 걸로 봐서 신분도 매우 낮고 가난한 것 같다

그녀는 유키오가 고마코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또 고마코가 게이샤 생활을 해서 요양비를 대고 있는 걸 뻔히 보면서, 유키오에게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 채 그 옆에서 정성스레 간호만 할 뿐이다

그가 죽고 나자 무덤을 떠나지 못하고 매일 괴로워 하다가 결국 고치창고에 불이 났을 때 2층에서 뛰어내려 죽고 만다

어차피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탈출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뛰어내린 것 같다

고마코 보다 더 불쌍한 여자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고마코는 요코보다 나이도 많고 게이샤 생활을 하면서 돈도 꽤 모은 것 같은데 요코는 하녀일을 할 정도로 더 가난하다

또 고마코가 유키오의 임종을 지키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한 마음을 털어 버린 반면, 요코는 미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들을 만큼 유키오의 죽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순진한 여자애다

그러니까 요코가 제일 순진하고 고마코는 그녀보다는 낫지만 역시 시마무라에게 마음을 줘 버리고, 시마무라는 이 셋 중에서는 그래도 제일 냉정한 편이다

아마 나이가 많고 남자이며 돈이 더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강자가 바로 시마무라고 제일 약자가 요코인 셈이다

역시 요코는 가장 약자답게 자살로 생을 마친다

 

시마무라는 아름다운 요코에게도 마음을 뺏긴다

유키오에게 마음을 줘 버린 요코는 그를 사랑하나는 고마코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잘 해 주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정작 시마무라는 이 두 여자를 가지고 마음 속의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고마코는 더 어리고 아름다운 요코에게 시마무라가 마음을 뺏길까 봐 초조해 하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다

그녀에게 가라는 식으로 말이다

정작 도쿄의 집에 있는 시마무라의 아내는 시골에서 벌어지는 이 일을 알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여간 배우자가 밖으로 돌면 꼭 의심해 봐야 한다

 

온천장의 고치창고에 불이 나고 요코가 2층에서 떨어지는 걸로 소설이 끝나버려 좀 허무하다

어차피 결론이 없는 소설이긴 하지만 말이다

일본어로 직접 읽으면 훨씬 감명깊지 않았을까 싶다

한 문장 한 문장 음미하면서, 혹은 여러 번역본을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이런 문장 위주의 소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걸 보면, 영어 번역을 엄청 잘한 것 같다

해설을 보니까 일본어 운율에 맞춰 아주 잘 써진 글이라고 하고, 또 가와바타의 노벨상 수상은 전문 번역가가 워낙 성실하게 영어 번역을 잘 한 탓이라고 한 걸 보면, 역시 성공하려면 작품의 질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냐도 아주 중요한 문제 같다

이문열이 상당히 미문체라 호흡이 길고 다소 관념적이고 수식적인 글들이 많지만, 영어 번역을 잘 하면 꽤 인기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황석영 작품들이 불어로 많이 번역된다고 하니까 한 번 읽어 봐야겠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이 과연 우리 문학을 그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내가 외국소설을 읽는 것도 절반 정도 밖에, 그냥 분위기 파악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와바타는 제자 미시마처럼 자살로 생을 마친다

헤밍웨이가 권총 자살한 건 문학적인 죽음 어쩌고 하면서 일본인이 죽으면 꼭 군국주의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거 너무 도식적이라 싫다

가스를 틀어 놓고 74세의 나이로 자살했다고 하는데, 어떤 생각으로 죽었는지 궁금하다

탐미주의자였던 것 만큼 관념적이고 아름다운 죽음의 절대미, 뭐 이런 것에 끌려 죽지 않았을까?

미시마의 경우 일본 자위대의 재결성을 주장하면서 할복 자살했다고 하는데, 금각사가 너무 아름다워 영원히 남기를 바라며 오히려 거기에 불을 지른 주인공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 작가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다

비단 일본 군국주의 작가여서가 아니라, 그는 다른 나라에 태어났더라도 자살로 생을 마쳤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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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라스 세계사 - 역사읽기, 이제는 지도다!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2
지오프리 파커 엮음, 김성환 옮김 / 사계절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사 놓고 내용이 너무 많은 것 같아 내버려 뒀다가 이번에 다시 읽었다

처음에는 지도도 열심히 보고 재밌었는데, 현대사로 올수록 복잡하고 모르는 내용들이 너무 많아 좀 지루했다

천천히 인터넷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빨리 읽을 욕심에 대충 넘어갔더니 뒷부분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발전 상황은 하도 복잡해 머리가 흔들린다

이 지역에 대한 우리 관심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도 자꾸 지도를 보니까 어디 부근인지 감은 온다

이를테면 크림 반도가 흑해 옆에 있고, 발트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으며, 알바니아가 이탈리아 건너편에 있는 것도 확실히 인지했다

또 오스트리아 제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1차대전의 서부 전선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겠다

조선시대 왕과 비교해 가면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제일 놀랐던 건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3대의 통치기간이 루이 14세의 통지 기간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루이 14세는 칠십 몇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70년 이상을 다스렸다

정말 대단한 왕이다

영조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영조도 겨우 52년 동안 재위했을 뿐이다!!

 

시대구분은 확실히 된다

5세기부터 15세기는 중세 천년, 로마가 4세기 후반에 무너지고, 1세기 만에 게르만 민족들이 유럽 곳곳에 나라를 세웠다

비잔틴 제국은 6세기 이후부터 15세기까지 존재했고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대략 200년 동안 네 차례 시행됐고, 소아시아는 오늘날 터키 땅이며, 몽골은 13세기, 이슬람은 7세기, 불교는 기원전 6세기!!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이 동남아시아로 불교 전파시켰고 2세기에 중국, 4세기 한국, 6세기 일본으로 전파됐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가 1차 대전인데,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립이었다

미국 참전으로 전세 역전됨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보불전쟁으로 프로이센이 독일 통일

경제공황 1929년

1941년 태평양 전쟁

1962년에 알제리 독립

1492년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멕시코가 아즈텍 문명, 페루는 잉카 문명이고 안데스 산맥을 따라 길게 뻗어있음

아르헨티나가 남아메리카 밑에 붙어있고 베네수엘라는 윗쪽, 페루는 길게 늘어짐

 

궁금한 점은 다음과 같다

 

1. 1차 대전 당시 1917년 혁명이 일어난 유럽의 가난한 나라 러시아가 어떻게 급속한 성장을 이루고 주변 지역을 점령했을까?

소비에트 공화국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는데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자급자족이 가능했단 얘길까?

 

2. 미국은 어떤 과정을 통해 엄청난 영토를 갖게 됐는가?

미국사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할 것 같다

 

3. 캐나다의 독립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4.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한 후 히틀러가 집권해 프랑스와 러시아를 양 옆에 두고 전쟁을 벌이는데, 과연 이 정도로 군사력이 뛰어났을까?

어떻게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을 같이 유지할 수 있었는지, 당시 독일의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다

 

5. 유럽인이 대항해를 시작하기 전 아프리카의 모습은?

그리고 왜 아시아 보다 아프리카 노예들이 월등히 많았을까?

 

6. 일본의 근대화 성공 요인은?

고종이 즉위할 무렵 쿠테타로 옹립된 메이지 천황은 아무래도 입헌 군주였던 것 같다

일본은 왜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까?

우리도 흥선대원군이 강력하게 개방정책을 폈으면 성공했을까?

일본의 단시간내 강대국 진입은 생각할수록 신기하다

 

전체적으로 아주 유용한 책이었다

간략한 설명과 함께 지도가 매 페이지마다 제공되어 이해하기 쉬웠다

틈나는대로 여러 번 봐서 기본 개념을 익힌 후 다른 개론서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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