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효의 글쓰기 만보 - 일기 쓰기부터 소설 쓰기까지 단어에서 문체까지
안정효 지음 / 모멘토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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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어렵다 "가짜영어사전"도 어렵게 읽고 있는데 이 책 역시 쉽지 않다. 일반적인 글쓰기 보다는 소설쓰기를 위한 가이드 같다. 이 책 보다는 강준만씨의 "글쓰기 전략" 이 좀 더 실용적이지 않나 싶다.

결론은 역시 많이 써 봐야 한다는 것이다. 변형일기를 쓰라는 조언은 상당히 유익했다. 막연하게 글을 쓰려면 힘들기 때문에, 일단 제목을 정한 후 그 제목에 맞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가짜 일기를 쓰라는 뜻이다. 그 다음에 퇴고를 한다. 저자는 헤밍웨이 식으로 간결한 문장을 선호한다. 특히 처음 글쓰기를 시작하는 초보일수록 늘어지는 장문 대신 간결한 문장을 쓰기 위해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잘 쓰는 어법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라고 한다.  ~인 것이다, 혹은 ~하는 것 같다 등은 나 역시 매우 자주 쓰는 표현인데 자기가 쓴 글을 읽어 보면서 이런 문장들을 다른 표현으로 고쳐 보라고 한다. 같은 문장의 반복 보다는 다양한 표현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비둘기 150마리를 죽인 남자에 관한 예문은 소설쓰기에 있어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상상력을 키우려면 관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드러낸다. 한 남자가 비둘기 150마리를 죽였다는 예문을 가지고 글을 써오라고 했는데, 학생들의 50% 이상이 비둘기가 사람의 눈을 쪼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죽였다는 글이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보통 사람들의 상상력이라는 게 얼마나 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실제로 비둘기나 기타 조류들은 사람 눈을 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시작부터 완전히 잘못된 설정인 셈이다. 이 시점에서 저자는 소설을 쓰려면 독자들이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완벽하게 사전 조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세상을 살다 보면 소설보다 더 기막히고 우연적인 일들이 많지만, 독자들은 개연성이 충분해야만 소설에 빠져 든다고 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관찰력이 매우 뛰어나야 하고 연구도 많이 해야 한다. 막연하게 상상력으로만 쓰다 보면 수준높은 소설은 쓰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저자 역시 "하얀 전쟁" 에서 주인공 한기주가 변진수를 권총으로 쏘는 장소로 설정한 사직공원을, 수십 번도 더 왔다 갔다 하면서 꼼꼼하게 주변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심지어 변진수가 폴란드제 리볼버를 숨기는 것도, 실제로 저자가 군복무 도중 목격했던 사건을 차용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쓴 미첼 여사도 도서관에 틀어 박혀 수년 동안 남북전쟁 당시 역사를 세세하게 조사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역시 수준있는 소설은 단순히 작가의 머리에서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뛰는 노력도 큰 일조를 하는 모양이다

전반적으로 쉽지는 않다. 까칠한 저자의 저술 태도와도 상당한 연관이 있을 것 같다. 페이지수도 만만치 않아 읽으려면 꽤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글쓰기에 본격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꼼꼼하게 읽어 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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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달콤하고도 씁쓸한 유혹
가야마 리카 지음, 이윤정 옮김 / 예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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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구입한 것이 작년 겨울 쯤인데 벌써 절판이 되다니!! 참 안타깝다 표지 그림도 멋지고 글솜씨도 괜찮고 무엇보다 결론이 정말 마음에 딱 드는, 독신 여성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역시 외국에서 나온 에세이다 보니 판매 지수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리뷰 몇 글자 적는다

혹자는 제목만 보고 결혼에 대한 상업성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한다. 제목과 결론은 매우 상이하다. 저자는 일본의 정신과 여의사이고 현재 독신이다. 단순히 에세이로 보기는 힘들고, 일종의 보고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 통계청의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하여 저자 나름대로의 결론을 낸다.

일본 역시 30대 여성의 독신률이 크게 늘고 출산률 저하로 고민인 모양이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일종의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까? 아마도 일본이나 한국 역시 유럽처럼 동거가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싶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형태만을 가족이라고 인정하는 경직된 가족관도 점차 변화될 것 같다.

저자는 출산률 저하를 막기 위해 정부가 벌이는 노력에 대해 반대를 표한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마치 여성의 의무라도 되는 양 아이 낳기를 강요하는 것은 매우 강압적인 태도라고 본다. 특히 아이를 낳지 않는 가정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사회 여론에 대해서도 개인의 선택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현상이라고 우려한다. 우리나라 역시 남자는 군대에 가는데 여자는 애라도 낳아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있다.

저자의 대안은,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싱글맘도 하나의 당당한 가정으로 인정해 주고, 동거 커플 역시 법적으로 보호해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법적 절차를 밟아 그 테두리 안에서 낳아 자식을 기를 때만 인정하는 요즘 세태로는 출산률 저하를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이미 사회는 다원화 되고 개인의 자유가 무엇보다 중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21세기에 아이낳기를 국가가 혹은 사회가 강요한다는 것은 위험스럽게 들린다. 출산률 저하를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저자의 이런 주장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결혼에 따른 사회적 신분 하락을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상당히 낭만적인 주장 같기도 하다. 미혼 여성들이 쉽게 결혼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사회적 위치가, 결혼으로 인해, 즉 자신의 조건보다 못한 남자와의 결혼으로 인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라고 본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과거에는 여자들의 교육률이 낮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당연히 결혼을 했다. 그러나 요즘은 여자들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받고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반드시 결혼할 필요가 없게 됐다. 남성들은 배우자를 고를 때 같은 계급 혹은 자신보다 좀 더 낮은 계급의 여성을 고르는 반면, (결혼 자체가 남성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여성들은 최소한 같은 계급, 혹은 더 높은 계급의 남성을 고르므로 여성 독신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보다 못한 남자와 결혼할 바에는 아예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높아가고 상위 클래스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더 나은 계급의 남자와 결혼하기는 매우 힘들다

사회적 지위가 하락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던져 버려야 진정한 소울 메이트를 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낭만적으로 들리면서도 현실적이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 역시 막연하게 여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하면 남성을 써포트 하는 게 당연시 되는 요즘의 풍조도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결국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결합 보다는, 진정한 생의 동반자를 찾으라는 바람직한 결론에 이른다. 독신 여성들이 한번쯤 읽어 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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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뽀스 2006-08-1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검색 들어갑니다. ^^:

marine 2006-08-16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보시게 됐으면 좋겠어요^^

2006-08-16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콩장 2007-03-12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의 심리학>으로 다시 출간되었답니다^^; 참고해주세요~
 
배낭메고 돌아본 일본역사
임용한 지음 / 혜안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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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임용한씨 글을 참 좋아하는지라, 홈페이지에서 답사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구입해서 읽었다 올 가을에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읽게 됐다

사실 나는 3년 전 4박 5일 코스로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여행 상품이 다 거기서 거기인지라 이 책에 나온 곳도 오사카를 제외하고는 전부 다녀왔다 그런데 그 때는 일본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가이드 설명에만 의존해야 했다 그나마 가이드가 있어서 망정이지, 그 설명도 없었더라면, 즉 배낭여행으로 혼자 떠났다면 눈에 비추는 일본의 풍경에 만족하고 왔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가이트 투어를 선호한다)

내 눈에 비친 일본은 굉장히 낯선 곳이었다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일본이 우리와 매우 비슷할 것이라고 착각을 했었다 또 축소지향형이라는 편견 때문에 실제의 모습을 보고 더 놀랬던 것 같다 일본의 절은 우리와 매우 달랐다 우리나라 절이 산 속에 고즈넉 하게 위치한, 수도를 위한 곳처럼 보인 반면, 일본의 절은 굉장히 화려하고 규모가 매우 컸다 정말 일본이 축소지향형인지 굉장히 의심스러웠고, 내가 알고 있던 일본은 내 편견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특히 성 같은 곳은 한국의 산성들과는 다르게, 마치 유럽의 성처럼 굉장히 웅장했고 천수각은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확실히 무사들의 나라다웠다

일본 여행 후 일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 관련 책들을 읽던 차에, 좋아하는 작가의 답사기가 나와 굉장히 반가웠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유적지들에 대해 꼼꼼하게 역사와 건축 구조 등을 설명해 준다. 역사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단순한 감상 위주의 여행기는 아닌지라 실제 여행에 참고하려면 다소 무거운 경향이 있지만, 책을 읽고 간다면 2배는 더 즐거운 여행이 되리라 확신한다. 특히 일본의 성에 대한 설명은 매우 자세하다. 전공인 만큼 보는 눈도 남다름을 느꼈다 그 분의 다음 저서가 될 임진왜란 편이 더욱 기대되는 바다.

일본의 역사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지난 번 여행이 수박 겉핥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답사기를 읽으면서 헤이안 시대와 전국 시대, 그리고 에도 막부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장점을 꼽자면, (사실 저자의 장점이기도 한데) 현상만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현상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을 꼼꼼하게 짚어준다는 데 있다. 단순히 일본인의 국민성이 그렇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또 그런 배경을 알기 위해 역사학자들의 가르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무책임하게 한국인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던지, 일본인은 원래 깨끗하고 부지런하다든지, 몇 대째 걸쳐 가업을 이을 정도로 장인 정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든지 이런 식의 무비판적인 찬양이라던가, 아니면 반대로 일본 얘기만 나오면 군국주의의 화신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것도 참 부담스럽다 그런데 저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숨겨진 사회적 배경을 짚어줌으로써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보편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결국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남의 지배를 받아야 할 만큼 열등한 민족도 없고 반대로 남을 지배할 만큼 위대한 민족도 없다는 얘기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워낙 높아서인지, 일본의 군국주의적 특성에 대한 비판은 매우 조심스러운 경향이 있다 신사에 대한 설명은, 매우 유용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 보면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국립묘지 격이 바로 신사라고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전쟁을 일으킨 전범까지도 받들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지만 어쨌든 죽은 이를 신으로 모시는 일본 특유의 무속 신앙이 들어 있는 독특한 곳이 바로 신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책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행 경로를 표시한 지도가 없다는 점과 칼라 사진이 몇 장 첨부됐으면 좋겠다는 점이다 400페이지를 넘기 때문에 이미 15000원이라는 만만치 않은 가격이지만 흑백 사진만 실려 있어 아쉬웠다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읽은 후 가을에는 제대로 일본 여행을 다녀올 생각이다 좋은 책이 홍보 부족으로 묻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혹시 일본 여행을 하실 계획이 있는 분이라면 강력 추천하는 바다 단 다소 수준있는 글이라 한번에 죽 읽히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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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08-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보다는 다소 재미가 떨어지지만, 읽은 보람은 있습니다
이런 책들 홍보 좀 많이 하면 좋을텐데 늘 아쉬워요

비로그인 2006-09-2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혜안에서 나온책이니 신뢰갑니다. 혜안이 일본역사전문출판사죠. 저도 서점에서 살펴보고 만족해서 다음달에 살려고 하는데 님의 리뷰에 별이 3개라 의아했는데 평은 좋군요.아마 칼라사진이 있으면 책값이 올라서 흑백으로 했겠죠. 분량에 비하면 값은 보통 학술서정도네요.
 
악마의 사도 - 도킨스가 들려주는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이야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바다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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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바이러스의 세가지 특징

 

1. 신념적

2. 증거 부족

3. 수수께끼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함

 

도킨스가 비판하는 점은, 종교가 아무런 근거도 없으면서 무조건 믿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사실 종교의 경직성과 무비판적인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녀 재판식의 판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의심하면 일단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본다

절대 교리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근거를 대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이성적으로 사유하면 이미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의심많은 도마라는 말처럼 모욕적인 단어도 없을 것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식으로, 뭐든지 신의 특별한 계획이란 식으로 넘어가고 이런 신비주의를 강화함으로써 더더욱 종교의 교리는 절대적이고 교조적으로 변해 간다

 

도킨스의 지적한 바대로, 성체 의식 역시 예수님의 몸과 피라는 상징적 의미만으로도 충분히 믿음을 환기시킬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제들은, (혹시 이것이 카톨릭의 공식 교리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빵과 포도주가 육화됐다고 믿는다

화학적인 변화를 거쳤다는 식으로 말이다

상징적인 의미 부여만 해도 충분할 것을, 종교의 절대적인 권위에 기대어 말도 안 되는 오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포도주가 피가 됐다는 식의 논리를 어떻게 자연과학자들이 받아들이겠는가?

더구나 이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믿음이 부족하다는 식으로 몰아 부치니, 과학하는 사람들이 종교와 화합하기란 참 요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종교의 그 교조적인 분위기가 싫다

믿음과 교회는 별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교회 시스템의 무오류설이 부담스럽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조작하고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듯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신도들의 믿음을 권력의 기반으로 사용하는 것 같다

실제로 카톨릭이 권력을 얻은 중세 천년간 하나님의 이름을 빗대어 엄청난 권력 전횡과 범죄들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도킨스는 종교에 부당한 권력이 주어짐을 비판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신의 이름으로 테러를 가하고, 여성들을 핍박한다

신에 대한 논쟁은 접어두고서라도, 기존 종교인들의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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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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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읽은 줄 알았는데 절반 정도 읽었다

어찌나 줄을 열심히 그어 댔는지 다시 보기 싫을 정도다

앞으로 철학이라고 이름붙은 책은 안 보려고 한다

너무 어렵다

철학에 대한 건 형이상학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지고 논하기 때문에 너무 사변적이다

그리고 말을 위한 말이 되기 쉽다

상당히 부담스럽다

 

왜 도덕적 개인은 많아지는데 사회는 점점 타락해지는가?

사회가 타락해진다는 말도 믿을 수 없다

과거 어느 시대에 비해 얼마큼 타락했단 얘긴가?

타락의 근거가 뭔가?

인간의 속성이 비슷하듯 그들이 이루는 사회도 다 오십보 백보였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도덕적인 시대가 과연 있었을까?

어쨌든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으나 사회가 비도덕적인 이유는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집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단 이기심을 제어할 수 있는 제도 정비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심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런데 그 개인도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루이스는 양심, 절대적인 도덕률을 들어 신이 인간의 내면에 명령한 소리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즉 비난을 피하기 위해 상식 수준에서 도덕을 지킨다

물론 살인 같은 끔찍한 범죄는 누가 보든 안 보든 쉽게 저지르기 힘들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갑을 주웠다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는 것 보다 그냥 쓰는 게 훨씬 더 일반적이고 인간의 본성에 맞는 행동일 것 같다


 

"종교개혁 당시 농민들이 복음의 원리를 사회적 평등의 원리로 이해하고 천국을 이 땅에 실현시키려고 했을 때 루터가 봉건제후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에 대항했던 것처럼, 오늘날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 역시 사회적 평화 뒤에 숨은 불의와 억압의 요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 무비판적으로 현존하는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의 입장에 서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 종교로서의 신약적 측면 그리고 예언자적 종교로서의 구약적 측면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측면이 억압받는 자에게는 체념을, 압제하는 자에게는 용기를 주는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만약 정의롭지 못한 사회구조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잘못된 점을 용기있게 말할 수 있는 성직자라면 억압받는 자들에게는 신음하는 백성의 외침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구약의 종교를 통해 삶의 의지를 북돋아 줄 것이다 반면에 압제하는 자들에게는 내세의 심판과 천국을 그리고 있는 신약의 종교를 통해 자신이 지닌 부와 권력이 영속될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겸손으로 변모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성직자들이 기존의 질서에 존재하는 불의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건전한 비판 세력이 될 때 종교는 비로소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사회를 도덕화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좋은 말이긴 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과연 종교가 사회를 도덕화 시킬 수 있을까?

종교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관여한다는 게 옳은 일일까?

루이스에 따르면, 성직자들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끌기 위해 교육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 제도나 운영 체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개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잘 모르는 일에는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물론 박정희 시대 때는 숨죽이고 독재 정권에 협력하면서 경제 개발의 특혜를 누린 교회가, 누구나 다 말할 수 있는 민주화 시대가 오자 사학법 들먹이면서 나라 구한답시고 구국 기도회를 여는 모습은 가소롭기 짝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직자는 말 그대로 성직을 수행하면 될 것 같다

사회의 도덕화 문제로 고민할 필요도 없고 (능력이 안 된다고 본다)교인들의 영적인 삶을 이끌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종교가 사회에 관여하면 (도덕화든 어떤 명분이든) 곧 하나의 권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늘 사회참여는, 특히 종교의 힘이 센 사회에서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사회를 도덕화 시키려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한 복지 부분에서 조용히 일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로든 종교는 영적이 삶을 책임져야지, 절대 사회 권력화 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종교란 궁극적으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신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곧 개인적 체험의 절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성서의 구절처럼 개인의 종교적 체험은 경전의 이해와 해석에 의존하며 이해와 해석은 불완전한 인간에 의존하기에 종교적 체험을 절대화하는 것은 자칫 자신의 주관을 절대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 종교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 같은 자력종교는 구원 자체가 불가능 하다

이슬람은 어떤 교리인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적어도 내가 알기에 불교신자는 신에게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도가 말하는 신만이 옳다는 것도 아집이고 독선일 수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절대자 즉 야훼 하나님을 대면하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게 아닌가 싶다

카톨릭에서 선언한 바대로,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해야 하나?

루이스의 저서에도 타종교의 경우 자신은 느끼지 못하지만 점점 우리가 믿는 구원 쪽으로 변해가는 경우를 설명했다

방식은 다르지만 믿음과 성찰을 통해, 교회를 통한 방법보다는 돌아가는, 빠르지 않은 길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로 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적 관용은 인정되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당사자라면 이 고통이 죄의 대가라는 질책, 천국에서 영생하는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참된 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파늘루 신부는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속에 있는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 악에 대한 해명이 아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파늘루 신부처럼 비록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스러운 신의 의지를 신뢰하면서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계속해서 전진해나가며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신앙의 결단일 것이다 또는 고통 속에 부르짖는 인간에 대해 침묵하는 냉혹한 신을 믿기보다는 신 없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며 자원봉사대를 조직해 페스트와 맞서 싸우는 리유와 장 타루처럼 어둠 속을 맹목적으로 헤쳐나가는 비신앙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사실 영생의 기쁨이 순간적인 인간의 고통을 보상해 줄 수 있다고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소리를 하는 자는 몸소 육체와 영혼의 고통을 맛본 주님을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으리라

 

기독교인은 신의 성스러운 의지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닥쳐온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의 핵심을 향해서 바로 우리의 선택을 하기 위하여 뛰어들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들이 겪은 고통은 우리들에게 쓴 빵과 같다 그러나 그 빵 없이는 우리들의 영혼은 정신적인 굶주림으로 죽고 말 것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 헤맬 때 마땅히 네 죄 때문에 받아야 하는 댓가이므로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성직자가 있다면 당신이 한 번 당해 보라고 되받아 치고 싶을 것이다

다리를 절거나 말을 못하는 등의 선천적 불구가 하나님이 당신을 더욱 사랑하시고 천국의 자리가 더 높기 때문이라고 위로한다면, 당신이 그 자리에 앉고 나 대신 불구가 돼보라고 쏘아 주고 싶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겪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위로랍시고 하는 얘기들이 오히려 더욱 큰 분노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왜냐면 그저 피상적인 이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 상대방이 위로마저 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상대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내 불행은 오로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고 누구의 잘못으로 대신 겪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분노를 쏟아낼 아무 권리도 없다

한술 더 떠서 상대가 비난하고 조롱한다 해도 나는 대항할 능력조차 없다

이미 불행해져서 방어할 능력조차 사라진 상태기 때문이다

 어떤 실직자가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불행한지 제대로 알아 주지 않는다면서 왜 나를 이해해 주지 않냐고 화를 낸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지자면 그는 가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다가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잘못으로 자기 책임으로 오늘날의 비참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에게 빚진 사람도 없고 분노와 노여움을 받아 줄 의무가 있는 사람도 없고 굳이 이해를 하러 들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가 주변의 호의를 구해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자신이 남들보다 불행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도 말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무한한 인내와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한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오류다

내가 불구가 된 것은 누구 탓도 아니다

세상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내게 잘못하신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열등하게 태어났을 뿐이다

무시당해야 마땅한 약자이지만, 도덕이나 동정심 같은 인간 본연의 아름다운 심성에 기대어, 혹은 종교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이해받고 배려받는 넘치는 호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불행을 세상탓 하고 하나님 탓하는 사람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에 불과하다

절름발이가 착하다는 편견을 버리라는 니체의 일갈이 생각난다


 

다양한 기독교적 해석을 읽으면서 다소간의 안심이 된다

신전통주의나 자유주의 신학처럼 과학과 신학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고,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보수적이고 극단적인 창조론에 입각한 성경무오류설 같은 한쪽 교리만 접하면서 고민해 왔던 것이다

성경의 말씀이 전부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다른 문제로 남는다

특정 교회의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진화론은 얼마든지 함께 설명할 수 있고, 갈릴레이의 말처럼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즉 성경을 통해 계시하기도 하지만, 자연을 통해서 계시하시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학이야 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비밀을 푸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뉴턴이나 갈릴레이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도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모양이다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해석을 하는 성직자들을 반대할 뿐이다

신의 존재를 가지고 왈가왈부 하는 게 아니라, 신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놓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페미니즘과 신앙도 훌륭하게 조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좀 더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알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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