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 김갑수의 세상읽기
김갑수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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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대를 많이 했던 책인데, 실망하는 책 모음의 카테고리에 넣게 되어 아쉽다.
김갑수씨의 전작,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는 나름대로 재밌게 읽었고 그 책을 통해 한쪽 눈이 의안인 이 열정적인 아저씨를 알게 됐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한쪽 눈 실명을 계기로 헤어졌으며, 뜻밖에도 자신을 치료해 주던 여의사와 결혼했다는 기막힌 러브 스토리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음악에 대한 그 열정이 너무 멋지게 보여, 그 후에도 TV 나 라디오에 김갑수씨가 나오면 주의깊게 보곤 했다.
연기를 잘해서 좋아하는 배우와도 이름이 같아, 이래저래 호감이 있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 하면 좋았을 것을, 이번에 읽게 된 신작은 영 기대치에 못 미친다.
일부러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해서 읽은 책인데 예상했던 내용과 너무 달라 실망스러웠다.
시사비평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새삼 느낀다.
누구나 자기의 전문 분야가 있는 법이다.
아마도 그의 전문 분야는 책과 음악 세계가 아닐까 싶다.
훌륭한 에세이스트라고 생각했던 고종석도, "신성 동맹과 함께 살기" 에서 어설픈 시사평론을 한 바 있는데, 이 책은 그것보다도 더 수준이 떨어진다.
누가 시시비평을 해야 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여튼 이 사람은 어설프다.
차라리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쓴 2부가 훨씬 와 닿았다.
책에 대한 마니아적인 기질을 공유해서인지, 레코드판과 오디오 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큰 집을 사고 비싼 자동차를 굴리는 대신, 레코드판과 훌륭한 소리를 잡아내는 오디오 속에 파묻혀 사는, 얼핏보면 매우 미련하기까지 한 그 고집스러운 애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작인 음악 에세이에 이런 얘기가 있다.
학생 때 돈만 생기면 음반을 사는 바람에 화장실의 휴지 살 돈도 없어, 샤워기로 뒷처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가 어느 정도 음악에 집착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는 그 정도로까지 소유욕이 강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책을 읽고자 하는 인식욕은 그 못지 않다.
음반에 깔려 압사하고 싶다는 소망만큼이나, 나도 책 속에 파묻혀 질식사 하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한다.
(물론 진짜로 죽고 싶지는 않다.)

표정훈씨 책을 읽을 때는 서재 이야기나, 한 달에 책을 얼만큼만 사야 하는지 등등 책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아 참 즐거웠다.
무엇보다 그의 문장력이 글을 술술 읽히게 만들어 편했다.
김갑수씨도 자시의 진짜 장기인 음악 이야기나 책 이야기를 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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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임라이트 ver.2 - i Limelight White
국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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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름대로 비싼 돈을 주고 샀는데, 생각보다 별로 유용하지 않습니다.
눈이 상당히 피로합니다.
역시 스탠드 켜고 책 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요.
기숙사에서 옆 사람에게 피해 안 주려고 산 것이긴 한데, 이 불빛으로 책 보다가는 시력 나빠질 것 같네요.
버전 3이 새로 나왔던데 가격이 무려 54000원이나 돼서 포기했습니다.
그건 밝기가 좀 조절이 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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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12-2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오랫만이군요. 일터는 괜찮은가요?. 이런저런 이야기나눌 기회가 없었던 것 같군요. ㅎㅎ. 즐거운성탄절되시구. 한해 마무리도 잘하시구요. 들른 김에 인사드리네요. ㅎㅎ

marine 2007-12-20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여울마당님, 반가워요^^
직장은 뭐, 1년 지나서 적응되긴 했지만 세상에 쉬운 일은 없더라구요
작년 이맘 때 여울마당님이 "제인 에어" 보내 주셔서 즐겁게 읽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울마당님도 행복한 성탄 보내시고 활기찬 새해 맞이하세요^^
 
미술관에서 오페라를 만나다 - 오페라와 명화, 영혼을 움직이는 두 예술의 만남과 교감
조윤선 지음 / 시공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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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에세이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
그럴 듯 하게 포장은 됐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기대에 못 미치는 그런 식사 같다.
그러고 보면 글을 잘 쓴다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고 축복이다.
특히 아마추어가 식견을 가지고 책을 쓴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다시금, 비슷한 주제로 책을 내는 박종호씨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저자는, 글 쓰는 연습을 좀 더 열심히 한 후에 다음 책을 내야 할 것 같다.
변호사라는 개인으로서의 교양은 훌륭하겠으나, 대중에게 책을 파는 작가로서의 역량은 썩 뛰어나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을 말하자면 비교적 덜 알려진 오페라와 그림들을 소개해 줬다는 데 있다.
아마도 저자가 그림에 무척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서평에서도 나온 바지만, 대체 어디서 이런 그림들을 찾아 냈는지 존경스럽다.
오페라에 걸맞는 주제들이, 비록 대가의 필력은 아니더라도 소박한 형태로 그려진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이 서양 문명을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매우 피상적이고 한계가 분명한 일 같다.
마치 미국인이 한국 전통 문화에 박식하다고 해서 그 안에 숨겨진 뉘앙스나 보편적인 정서, 상식 등에 능통하기는 힘든 것처럼 말이다.
평소에 르네상스나 기독교 문화 등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 책에 소개된 그림들을 보니까 아직도 갈 길이 멀 뿐더러, 나는 영원히 서양 문화의 어설픈 관찰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껏해야 라파엘로나 고야, 벨라스케스 등이 화가의 전부인 줄 알았다.
또 알고 있는 화가라 할지라도 대표작 밖에는 몰랐다.
서양 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기독교, 그리고 중세 시대 전설들...
그것들이 그림 속에 녹아져 내린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그림을 감상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 같다.
특히나 도상학적 주제가 선명한 르네상스 시대 그림은 더더욱 말이다.

재밌는 건 대가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다 훌륭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별히 훌륭하고 평가받을 만한 작품만 유명해진 것 같다.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 이나 에라스무스 초상화 등을 보면서 어쩌면 이렇게 인물의 감정을 잘 드러낼 수 있는지 무릎을 치면서 감탄했었는데, 홀바인이 그린 다른 초상화를 보니 감흥이 떨어진다.
헨리 8세의 세 번째 아내였던 제인 시모어 같은 이의 초상화는, 홀바인이라는 이름이 없다면 눈길을 안 줬을 평범한 작품이다.
그렇게 위대하다고 믿었던 고야의 작품도 어떤 것은 시시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양한 그림을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전작주의가 다소 허망하다고 느꼈던 것이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였다.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라든가 "저문 날의 삽화" 등을 읽으면서 박완서씨의 심리 묘사에 혀를 내둘렀다.
소시민의 이기적인 심성과 위선적인 모습을 어찌나 잘 파헤치던지, 이 사람이야 말로 정말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녀의 문장력 하나는 끝없는 신뢰를 보내게 됐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읽은 책, "아주 오래된 농담" 이라든가 "그 여자네 집" 등을 보면 너무 평범하고 시시해서 박완서라는 이름이 없다면 굳이 읽지 않았을 것이다.
대가들도 항상 위대한 작품을 쓰는 건 아니다라는 것, 더 크게 보자면 사람은 완벽할 수 없다는 것 등등을 새롭게 깨달은 계기가 됐다.

유명한 오페라만 알고 있었는데 새로운 오페라를 많이 소개해 줘서 흥미가 생겼다.
일단 유명한 것부터 좀 들어 보고 덜 알려진 오페라에도 관심을 가져 볼 생각이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더니, 정말 지식과 문화의 샘은 끝도 없는 것 같다.
이래서 또 세상 살 맛이 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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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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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리처드 도킨스라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라도, 일단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다.
사람의 마음을 혹하게 만드는 필력이 있다.
뛰어난 학자라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저술가이지는 않는 법인데, 글솜씨를 타고났다는 점에서 무척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단,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감정적인 부분이 간혹 눈에 띄어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분이 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점잔 빼지 않고 비꼬는 기술이 탁월한데, 학술적이기 보다는 감정적인 주장이 간혹 보여 그 점이 매력이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가 두려웠다.
안 그래도 흔들지고 갈등하는 믿음에 대한 기반이 무너져 버릴까 봐 계속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했으나 움직이는 물리 법칙을 만들고 생명의 기원을 만들었을 뿐 기본적으로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최근에 알게 된 이론에 따르면 나 같은 생각은 이신론에 해당한다.
18세기 계몽주의 학자들이 가졌던 생각이고 다윈 같은 진화론자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도킨스에 따르면 그것은 약화된 일신론일 뿐이고 궁극적으로 인격신을 인정하는 것이며 유신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크게 보면 지적 설계론과도 일치한다.
범신론은, 자연 만물이 신이라는 생각, 즉 고대의 애니미즘이나 토테미즘, 정령 신앙 같은 초보적인 신앙이라고 생각했는데, 용어만 빌린 것 같다.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실제로는 이 범신론자에 해당한다고 한다.
범신론자, 즉 물리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아름다운 자연과 천체에 경의를 표하는 것, 그러니까 유신론자들이 도킨스 등을 공격할 때 하는 말, "과학이 바로 당신의 종교군요"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를 심판하고 기적을 통해 인간사에 간여하고 처벌하고 우리의 숭배 대상이 되는 그런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예수의 처녀잉태나 최후의 심판 같은 것도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수 밖에.
영혼이나 사후 부활 등도 믿지 않는다.
기독교의 교리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꼴이니 범신론은 크게 보면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지적 설계 이론이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의 공격을 피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괘씸한 것으로 생각한다.
지적인 존재가 우리를 설계했다는 믿음, 절대자가 존재한다는 믿음, 그리고 그 절대자가 최후에는 우리를 심판할 것이라는 믿음, 결국 이것도 세상이 물리적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기본 전제와 배치된다.
무엇보다 지적 설계론은 화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중간 단계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내 생각과 매우 다른 부분인데, 모든 것은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진화를 부정하고, 그러므로 시조새 따위의 중간 동물은 없을 뿐더러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완벽한 형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화석의 존재는?
반증 가능한 이론만 과학적 진실로 받아들이라는 법칙에 따르면, 화석이 시대를 달리하는 지층에서 발견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다면, 즉, 매머드 화석이 느닷없이 선캄브리아 지층에서 발견되더나, 혹은 공룡 화석이 신생대에서 발견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우리들의 진화론은 단박에 부정될 것이다.
창조론자들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그런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세상은 특별한 목적에 의해 창조됐으며 다만 그 시작을 하나님이 주도하셨을 뿐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물리 법칙에 의해 진행됐고 인간사에 개입하는 경우는 없다는, 이런 이신론은 과연 성경에 나온 기적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며 따지고 들면 결국 이신론자들이 기독교인이냐는 괴로운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예수에 의한 구원을 부정한다면, 최후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영혼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특별한 목적에 의해 설계된 게 아니라면, 인격신을 믿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감동하면서 읽은 "현대 기독교와 과학의 논쟁" 이라는 책에서 지적 설계론자가 나처럼 이런 생각을 가진 이신론자들을 공격하던 말이 생각난다.
당신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척 하지만, 사실은 무신론자와 다를 게 없다고 했다.
그 때는 단지 창조론자들이 교회 안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인신공격, 즉 남의 믿음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궁극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과연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라는 회의감이 든다.
신앙적인 문제는 나로서도 너무나 괴로운 부분이고 이렇게 불확실한 생각이 든다면 단지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믿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기적의 존재를 믿지 않고, 기적이란 예수님이 오셨을 때, 혹은 성경에 나온 선지자들이 특별한 계시를 받아 매우 예외적으로 행했던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가톨릭에서 가끔 파티마의 성모니 하는 것도 전혀 믿지 않으며, 성자들의 수많은 기적들도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게 있어 기독교란, 혹은 하나님이란 나의 존재 이유, 그리고 내가 죽은 후 내 존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설명해 주는 분이다.
그러므로 내가 열심히 기도를 한다고 해서 특별히 나에게 어떤 기적을 보이실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중보 기도 같은 것도 별로 신뢰를 못한다.
책에서는 어처구니 없게 중보기도의 효과를 이중맹검법이라는 과학적 방법을 통해 실험까지 했던데 아무 차이가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
교회에서는 성당의 연옥 이론을 비웃으며, 열심히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고 죽은 죄인이 천국 가겠냐고 미신적인 행위라고 하지만, 사실 중보기도도 엄격하게 따지면 같은 맥락 아닌가?
내가 열심히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그 사람이 축복받거나 병이 낫거나 죽을 사람이 살아 나겠는가?
내가 내 자식의 합격을 위해 백일기도를 드린다.
그런데 나만 기도하겠는가?
모든 수험생 엄마들이 죄다 각자의 신,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하나님께 빌 것이다.
그럼 부모가 열심히 기도하는 순서로 합격하겠는가?
문제는 나만 기도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결국은 실력에 의해서 당락이 결정될 뿐이고, 넓게 보면 나를 위해서 세상의 법칙이 바뀔 수는 없다는 게 내 기본적인 생각이고 보니 기복신앙 같은 그런 기도나 헌금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 존재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분이다.
나는 왜 태어났는가, 죽은 후 내 의식은 어디로 가는가, 이런 것들을 말이다.

미국의 기독교를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고 한숨이 나온다.
대체 왜, 미국처럼 합리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종교에 의해 좌우되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상이 발생했을까?
도킨스의 지적처럼 역사가 짧고 개인주의가 워낙 발달한 이민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교회가 확대가족의 역할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미국에 안 살아 봐서 그 나라 분위기를 모르니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인이 이민가면 제일 먼저 지역 교회부터 찾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안정감을 찾고 정체성을 확인하며 가족이 주는 소속감을 느끼는지 모른다.
하여튼 한 나라의 대통령이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옹호하는 발언을 공식 석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고, 진화론을 못 가르치게 하는 학교가 있는 걸 보면, 아랍 세계 같은 신정국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종교가 인간을 억압하는 무시무시한 중세 분위기가 확 난다.

책을 다 읽고 문득 드는 생각은,  진정한 진화론자라면 결코 종교인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성경의 무오류설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은 제외한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도킨스의 지적처럼, 믿음을 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성경의 무오류설을 믿는, 그리고 지구가 겨우 1만년도 안 됐다고 믿으며,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지금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설프게 과학과 종교의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태도에 불과하다.
차라리 근본주의자들이 더 솔직하다.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주를 보는 눈 자체가 완전히 다르니까.
진화론을 믿는다면, 혹은 지구가 46억년 전에 탄생했다는 것을 믿는다면, 또 화석의 존재를 믿는다면, 사고의 일관성을 위해서 예수의 처녀 탄생설도 부정해야 맞는 것 같다.
도덕으로서, 혹은 위안으로서의 종교는 과학과 공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런 종교는 이미 신앙이나 신념과 같은 고차원적인 수준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도킨스는 에둘러 말하지 않는다.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본질을 직시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백혈병으로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종교 갖기를 거부했다는 칼 세이건이야 말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 사람이다.
진화론을 믿는 기독교인, 혹은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는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진실을 외면하거나 자기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 버린 꼴이다.
진실로 진실로 어렵고도 두려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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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씨를 유명하게 만든  "사다리 걷어차기" 는 매우 지루하게 읽은 반면, "개혁의 덫" 은 신문 칼럼을 모아서 그런지 비교적 편하게 읽었다.
이번 책은 지루함이나 가독성 면에서 중간 정도였다.
비교적 술술 넘어가기는 했으나 동어 반복이 너무 많아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주제가 선명하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한 일이나 같은 얘기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때문에 어쩌면 이 책의 절반 분량으로도 충분히 압축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정희의 국가주도 경제계획을 좋게 평가했던 점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같은 대의명분론에 휘둘리지 않고 비교적 공정한 평가를 했다고 보기 때문에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박정희가 아니라 누가 했어도 당시 상황이 발전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무책임한 발언이 무척 거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와 시장 개방에 대하여 장하준 교수만큼 거품물고 반대하고 싶지는 않다.
궁극적으로는 유럽 연합처럼 지역별로 경제통합이 이루어질 것이고 점차 시장을 개방해서 국경선을 없애는 것이 되어가는 방향이라고 보기 때문에 어쩐지 장하준 교수의 이런 시도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까지는 아닐지라도, 흐름을 애써 막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저자가 수많은 예를 들어가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있는데도 100% 설득되기에는 미진한 느낌이 많이 남는다.
저자 역시 시장 개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관세장벽이나 보조금 지급, 국내 시장 보호 등이 유치산업 육성을 위해 필수적인 제도라는 주장은 이해가 간다.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게 발전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미 그 혜택을 톡톡히 본 신흥 강국들은 더 이상 보호받을 수만은 없다.
미국이나 기타 선진국 입장에서 보면 아마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썼다기 보다는, 한국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 개발도상국과 극빈국을 위해 쓴 게 아닌가 싶다.
적어도 현 대한민국 상황에서는 계속적인 내수시장 보호를 외치는 건 저자의 비유를 인용하자면, 다 큰 어른이 계속 일은 안 하고 돈만 받아 쓰겠다고 떼쓰는 것처럼 보인다.
일련의 주장들은, 대한민국 같은 경제대국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빈국들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 한 말이 아닐까?
한국도 과거에 충분히 국제 시장에서 보호를 받았고 이제 더 이상 봐 주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관세 장벽이나 보조금 지급 등을 외쳐도 그게 국제 시장에서 먹혀 들어가냔 말이지.
대한민국은 극심한 경쟁에 노출되어 있고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과거와는 다른 경제정책을 취해야 한다.
시대와 상황이 변했으니 말이다.

다만 이런 점에는 동의를 하겠다.
마셜 플랜을 예로 든 것처럼, 후진국들이 적어도 선진국의 물건을 살 수 있을 만큼은 경제 성장이 되야 하므로, 후진국의 경제발전을 돕는 것은 절대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오히려 물건을 내다 팔 수 있는 시장을 키운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인도적이고 인간적인 부수효과를 내기 때문에 그런 지원 정책이 국제적으로 육성된다면 우리는 보다 진보하지 않을까?
"환경 위기의 진실" 이라는 책을 보면, 진정으로 환경을 걱정한다면 산업화를 막을 게 아니라, 제 3세계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가난하면 환경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우선 먹고 살아야 하는데 강 좀 오염시키면 어떻고, 산에 나무 좀 베면 어떻겠는가?
"빈곤의 종말" 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절대빈곤은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선진국들이 발상의 전환을 한다면 말이다.
"빈곤의 종말" 에서도 마셜 플랜을 예로 든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경제 발전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한다. (장하준 교수에 따르면 사실 큰 돈도 아니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런데 현재 미국이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등에 지원하는 원조액은 그 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고 한다.
미국은 제 3세계에 대한 원조를 지금보다 훨씬 늘여야 하고, 한국이 바로 국제 사회의 원조를 기반으로 성공한 나라로 언급된다.
과연 한국인들 중에 그 원조를 바탕으로 경제기적을 이뤘다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저자의 궁극적인 주장은, 단순히 시장개방을 막자는 얘기가 아니라 개발도상국이나 극빈국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 주자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한국의 국가 주도 경제계획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후진국의 발전을 도와야 한다는 게 핵심 내용 같다.
특히 특허권처럼 지나치게 신기술이 보호된다면 외화를 벌 수 없는 후진국에서는 기술 이용이 어렵기 때문에, 적어도 가난한 나라에서는 특허권이나 지적재산권이 더 느슨하게 적용되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문화나 지식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기 마련인데 지나친 기술 보호, 이를테면 특허권 같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특허권이야 말로 자본주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임을 지적하는 경제서적을 본 것 같기도 한데, 하여튼 저자는 일괄적인 접근이 아니라 차별적인 적용을 주장하는 게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처럼 어느 정도 발전이 이뤄진 곳이라면 당연히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본다.
먹고 살만 한데도 우리는 계속 가난하다고 돈을 못 내겠다고 징징 대는 건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다.
에이즈 신약 같은 경우, 아프리카 국가에만 저렴한 비용으로 판매하는 것도 인도적인 측면에서 장려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결론은, 시장개방이 나쁘다거나 혹은 신자유주의가 잘못 됐다거나 이런 국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제 3세계에 대한 국제사회의 원조를 늘려서 그들 국가의 자립을 돕는 게 핵심 내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자도 한국어 대신 영어로 써서 전세계에 출판하지 않았겠는가.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 류의 책만 판치다가 모처럼 반대 주장의 책이 나와 다양성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싶다.

한가지 덧붙이고 싶은 점은, 문화적 차이가 경제발전을 이끈다는 생각이 잘못됐다는 걸 밝혔다는 점이다.
목사님들 설교 중에 제일 짜증났던 게, 서구 사회가 기독교를 받아 들여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한 술 더 떠서, 오늘날 중동이나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도 바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자가당착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지, 굉장한 거부감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아무 근거없는 소리를 한 게 아니라, 막스 베버처럼 대단한 인물이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 같은 책에서 이미 했던 소리다.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한 술 더 떠 기독교를 믿으면 잘 살고 안 믿으면 못 산다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얘기를 아무 생각도 없이 지껄인다.
그러나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이 책을 읽어 봐도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문화적 특성, 즉 경제발전을 이끄는 문화적 차이란 증명하기 불가능하다.
오히려 경제발전에 따른 결과로서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따름이다.
문화적 특성을 부인하려는 게 아니다.
민족적 기질 때문에 경제가 발전하고 망하는 게 아니라, 경제가 발전하면 문화적 특성도 함께 변한다.
어쩌면 민족적 특성과 경제는 큰 상관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유난히도 친이스라엘적인 한국 기독교가 힘을 잡아서 그런지, (물론 미국의 영향이겠지만) 유대인들은 머리가 좋고 상술에 뛰어나고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고 그에 버금가는 게 한국인이라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자부심도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과거에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교 때문에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동아시아가 경제발전에 성공하자, 오히려 유교 때문에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는 기후가 더워 게으르고, 남미는 축제 분위기에 휩쓸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주장도, 아마 그들이 경제 자립에 성공하고 나면, 그런 낙천적인 기질 덕분에 성공했다고 할 것이다.
오히려 그런 기질들은 경제 상황 때문에 도드라질 가능성이 크다.
저자의 말마따나 잘 사는 나라는 비슷한 특성을 공유한다.
질서를 잘 지키고 합리적이고 부정부패가 적다.
스티븐 핑커의 지적대로 인간은 다른 점보다 공통적인 특질이 훨씬 더 많은데 특별히 정직하고 특별히 법을 잘 준수하는 위대한 특성을 가지고 태어난 민족이 얼마나 되겠는가?
먹고 살만해지면 누구나 여유가 생기고 합리적이 되기 마련이다.
인과관계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잘못된 인과관계는 인종주의나 민족주의에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일련의 저작들에서 꾸준히 주장하는 것은, 아직 세계는 진정한 의미의 지구화가 이뤄지지 않았고 국경선 역시 철저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그러므로 국가는 여전히 지켜야 할 가장 큰 단위라는 것이다.
학자들의 상상 속에서나 지구 공동체는 가능한 얘기인가 보다.
결국 인간의 진보 방향은, 국경을 넘어 전인류애적인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라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나온 현실에 한숨이 팍팍 나올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언젠가는 국경선을 넘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고 인종의 구별에 따른 차별이 사라지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란, 그래서 여전히 요원한 문제 같다.
"관용에 대하여" 에서도 지적한 바대로 완벽한 의미의 개인주의는 아직까지는 상상 속에서 가능한 일 같다.
민족과 국가, 인종, 젠더 등이 여전히 개인을 정의하는 가장 큰 범주가 아닌가 싶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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