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영의 이혼 소송 1704~1713
강명관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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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읽고 막연하게 대한제국이나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어난 근대 여성의 이혼소송인 줄 알았다.

신문에 보도되고 장안을 떠들석 하게 한 나혜석 이혼 케이스 같은 줄 알았는데 왠걸, 무려 숙종 때 이야기다.

그러고 보니 제목에 1704-1713년이라고 명시가 되어 있다.

뭐든 대충 보는 내 습관이 문제인 것이다.

책이 너무 얇아 좀 놀랬다.

리뷰가 좋아 기대했는데 솔직히 동어 반복이 많이 지루했다.

오늘날의 재판 기록과는 달리 조선 시대의 재판은 당위적인 얘기가 많아 자료만 가지고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 같긴 하다.

당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보다 풍부한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신태영이라는 이름이 현대적이라 더더욱 20세기 이야기로 오해했었다.

보통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은 누구의 처, 혹은 김조이, 이런 식으로 기재되는 것 같던데 재판 기록이고 사대부가 여인이었기 때문에 이름이 기록된 모양이다.

내용을 보면 좀 어이없긴 하다.

이혼은 민사 재판인데 조선 시대는 민형사 구분이 없어 재판을 하려면 일단 당사자를 인신구속 했던 것 같다.

부부가 이혼하려는데 재판을 위해 두 사람 모두를 1년 가까이 구속시킨 것이다.

부부간의 불화로 생긴 지극히 개인적인 이혼 문제 때문에 그 추운 겨울을 감옥에서 지내야 하다니.

남편 유정기는 아내가 시부모에게 욕을 하고 제주에 오물을 넣어 제사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아내를 쫓아내 10년이나 따로 지냈다.

아내는 친정 오빠가 얻어 준 집으로 갔다가 그 집에 불이 나자 남편의 전처 아들 집으로 간다.

효라는 개념 때문에 비록 아버지에게 쫓겨난 계모였으나 아들된 도리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 집으로 찾아와 이 부부가 상봉을 하고 큰 싸움을 한 후 신태영은 한밤중에 집을 나가 버린다.

유정기는 아내가 밤에 집을 나갔기 때문에 失身 한 것이나 다름 없다면서 별거 10년 만에 정식으로 이혼 소장을 제기한다.

실제로 강간을 당하거나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닌데 단지 밤에 집을 나갔다는 이유로 정절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이혼을 제기하다니.

너무 놀랍다.

그런데 조선 시대는 여성의 지위가 낮은 만큼 이런 저런 이유로 이혼을 받아들이면 여자는 재가도 불가능하므로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어 위정자들도 원칙적으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인조도 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 갔다가 돌아온 사대부가 여인들의 이혼을 금지했을 정도다.

유정기의 친구가 조정의 관료로 있어 적극적으로 이혼 소송을 진행했으나 정작 신태영을 심문하자 오히려 남편이 여종인 예일에게 빠져 본처를 쫓아내고 가사권을 비첩에게 맡겼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본처를 쫓아내고 10년이나 지나 이혼 소송을 진행한 까닭이 혹시나 자신이 죽은 후 신태영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정처로서의 권한을 행사할까 두려워서일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1년여의 인신 구속 끝에 이혼은 불가하고 신태영과 여종 예일은 유배를 당하고 유정기에게도 장형이 내려진다.

몇 년 후 다시 유정기는 숙종의 행차 중에 상언을 올려 또다시 이혼시켜 달라고 했으나 그 과정에서 본인이 죽고 사건은 종결된다.

훗날 신태영이 죽었을 때 아들인 유언명은 아버지에게 妻가 아니면 아들에게도 母가 될 수 없다는 예론을 인용해 상복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출셋길이 막혀 조정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가문이 몰락했으니 친모도 아닌 계모에 대한 원망이 클 수밖에 없을 듯하다.


맨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조선시대 가부장제의 문제가, 남성의 성적 욕망을 본처 이외의 여인으로 확대시키려 하면서, 오직 여성에게만 투기하지 말고 지아비에게 절대 복종하라고 가르친 데 있다고 했다.

부부간의 정절이야 말로 결혼의 가장 기초적인 필수 조건인데 축첩제도가 허용된 조선시대의 가정 불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당장 국왕인 숙종마저 후궁에게 빠져 중전을 폐하고, 다시 사랑이 식자 중전을 복위시키더니 그녀가 죽었다고 화살을 후궁에게 돌려 죽여버리지 않았던가.

여성의 인권이나 인간적인 정리 면에서 매우 잔혹한 시대였음이 분명하다.


<오류>

유척기는 궁거한 지 26년이라고 하였으니,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 본문의 문맥상 유척기가 아니라 유언명이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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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행록, 사대부가 여인의 한글 자서전 조선의 사대부 13
김봉좌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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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인데 생각보다 알차고 재밌다.

고행록, 말 그대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일생을 기록한 책이다.

숙종 시대 남인, 탁남의 거두였던 유명천이라는 인물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한산 이씨가 자신의 삶을 정리한 회고록이다.

사대부가 여인들도 이런 자서전을 남긴 모양이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몰락했으나 후손들이 조상이 남긴 글들을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보관하여 세상에 나와 연구 자료가 됐으니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진주 유씨 문중의 정성이 아름답다.

정치사나 사상계 외에 이런 일기류, 특히 유교 국가에서 주변인의 역할에 머물 수 밖에 없었을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발굴되어 보다 입체적으로 역사가 그려지면 좋겠다.


이 회고록의 주인공 한산 이씨는 임진왜란 때 북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의 현손이다.

명문대가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급제도 못하고 일찍 사망했고 막내딸로 태어나 18세에 유명천의 셋째 부인으로 시집가게 된다.

조선 시대에는 워낙 출산시 사망률이 높아 후손을 남겨야 하는 사대부가 남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재혼, 삼혼을 젊은 여성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유명천은 고위 관료였으나 삼혼 당시 나이가 무려 44세였으니 아버지 뻘이었고 첫째, 둘째 딸은 이미 혼인까지 한 상태였다.

한산 이씨는 남편 덕분에 18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숙부인에 봉해졌고 33세에는 정경부인에 오르기까지 한다.

비록 삼혼으로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자에게 시집갔으나 매우 존귀한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는 환국이 계속 일어나는 숙종 대였다.

변덕스러운 숙종은 여러 차례 환국을 일으켜 남인이었던 유명천은 높은 승차를 했다가 곤두박질 쳐서 유배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보통 유배지는 혼자 가는 줄 알았는데 부인이 세 번의 유배지에 모두 직접 따라가 함께 지냈고 결혼한 양아들 내외까지 함께 생활했다.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하고 관에서도 배려한 탓일까?

그러나 역시 유배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죄인의 신분이라 90 노모가 사망했는데도 상을 치루러 가지 못해 노모의 운구가 유배지를 우회하여 선산으로 향하기도 했다.

한산 이씨 부부는 당시로서는 70세까지 장수했으나 불행히도 자식 복이 없었다.

시집 와서 바로 첫 딸을 낳았으나 몇 달 만에 사망하고, 본인도 산욕열에 시달려 죽다 살아난다.

연년생으로 바로 낳은 둘째 딸 역시 첫 돌을 못 넘기고 사망하며, 유배지에서 낳은 귀한 아들은 심지어 2주 만에 죽고 만다.

얼마나 이 아들이 귀했으면 90 다 된 시어머니가 보고 싶어하는데도 부정탈까 두려워 안 보여주는데 속절없이 죽고 말자, 시어머니께 손주를 못 보여준 것을 한스러워 하기도 한다.

정말 옛날에는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것 같다.

예방접종이 없었을 때이니 돌 전에 많이 죽었던 것 같고, 그래서 생후 1년이 지나면 성대하게 돌잔치를 거행했던 모양이다.

아이를 낳다 죽은 산모나 아기들이나 다들 안타깝다.

한산 이씨는 자식복이 없었는지 양아들을 들인 후 두 며느리마저 연달아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다섯 살 어린 나이부터 키워서 시집 보낸 전처 소생의 막내딸마저 출산 후 사망하자, 그 어린 손녀를 키워 줄 사람이 없어 집으로 데리고 오면서도 자기가 키우면 부정탈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너무나 안타깝다.

보통 조선시대 시어머니라고 하면 며느리를 삐딱하게 볼 것 같은데 양아들의 배우자인데도 세 번째 며느리까지 모두 칭찬하는 글을 남긴 걸 보면 심성이 고운 분 같다.

종부로 시집 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양자를 들였으나 그 양자마저 자손을 못 남겼으니 당시 사대부가 여성으로서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모르겠다.

세상에 아무 즐거움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이해된다.

다행히 이 회고록을 완성한 후 드디어 양자가 세 번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낳아 말년에 손자의 재롱을 보게 됐다고 하니 남은 인생은 그래도 행복했을 것 같다.

사대부가 여성의 일생을 들여다 본 좋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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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권력 그리고 불화 - 고려와 조선의 왕실분화 석학인문강좌 94
김정희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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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의 <석학인문강좌>는 내용이 알차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쉽게 쓰여 아주 좋아하는 총서인데, 이번 책은 중언부언이 너무 많아 아쉽다.

주제는 흥미롭다.

보통 왕실의 불화라고 하면 불교국가였던 고려만 떠올리기 쉬운데 숭유억불의 조선에서도 왕실 발원 불화가 많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어 관심이 간다.

그런데 자료의 부족 때문일까?

2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도 같은 내용이 매 챕터마다 반복된다.

하도 자주 나오니 왕실에서 발원한 불화들의 이름을 외울 정도가 됐다.

저자가 강연 원고를 책으로 내다 보니 압축에 실패한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도 같은 내용들이 계속 반복되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만큼 남아 있는 불화가 적은 탓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하다.


왕실 불화의 특징은 역시 높은 수준에 있다고 하겠다.

왕실에서 아낌없이 지원하다 보니 심지어 문정왕후 때는 순금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왕실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그리는 수준이 매우 높고 재료도 아낌없이 지원을 받아 훌륭한 작품이 나온 것이다.

나라에서는 불교를 억압했으나 권력에서 소외된 왕실 여인이나 종친들의 입장에서는 마음 둘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로 가면 상궁들의 재력도 풍부해져 많은 불사를 일으킨다.

지밀상궁 같은 높은 지위의 궁녀들은 영의정과 같은 최고위급 관료에 함께 시주하여 불화를 남겼다.

왕은 직접 절을 창건하는 큰 역사를 하고 왕실 여성들은 비용이 적게 드는 불화를 희사했다.

특히 과부가 된 대비들이 불화를 많이 발주했다.

그 중에서 인종비 인성왕후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관음보살32응신도가 아주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불화가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 소장되어 안타깝다.

아무래도 불교의 위상이 떨어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소장이 어려웠을 것 같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원당으로 지정한 용주사의 불화는 화승 상겸 등이 25인의 화사를 데리고 그렸다고 한다.

용주사 불화는 서양식 음영법 적용으로 유명한데 보통 김홍도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는 김홍도가 감동을 맡았다고 하고 직접 그린 이는 화승으로 본다.

후기로 갈수록 불화에도 서양식 음영법이 많이 적용되는 걸 보면 이미 서양화 기법이 많이 알려졌던 것 같다.

왕실의 불교 후원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오류>

7p, 157p

선조의 후궁 숙원 윤씨

-> 선조가 아니라 인종의 후궁이다.

36p

헌강왕 사망 후 왕비 권씨가 출가하여

-> 왕비는 의명부인이고, 권씨는 후궁이다.

42p

광해군비 장렬왕후(章烈王后, 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세자빈, 본인 및 작고한 친정부모~

-> 장렬왕후는 인조의 계비인데 한자가 다르다. 광해군의 배우자는 문성군부인이고 왕후로 추존된 적이 없는데 각주에 나온 논문에서도 장렬왕비로 나와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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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산어보를 찾아서 1 - 200년 전의 박물학자 정약전
이태원 지음, 박선민 그림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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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 전부터 읽어야지 했던 책이라 숙제하는 기분으로 드디어 읽었다.

사실 물고기는 먹는 것만 좋아하지 뭐가 뭔지 구분도 못하고 관심도 없지만, 정약전이라는 인물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된 책이다.

역시나 책의 내용은 대충 넘어가게 됐고 정약전이 어떤 일생을 살았는지, 현산어보는 어떤 의미가 있는 책인지 정도만 알게 됐다.

천주교 박해인 신유박해 때 동생 정약종은 순교했고 정약전과 약용 형제는 멀고 먼 전라도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정약용은 18년 만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겨 조선 후기 사상사에 금자탑을 세웠으나 안타깝게도 정약전은 유배 도중 59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만다.

정약용은 몰라도 정약전은 천주교도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어 보면 한때 관심이 있었으나 순교한 정약종 같은 진짜 신자는 아니지 않았을까 싶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 수준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긴 유배 생활은 너무나 억울했을 것 같다.

심경을 고백하는 일기가 없으니 신앙에 관한 문제는 모호하기만 하다.

저자는 두 형제의 스승이고 박해 때 고문으로 죽은 권철신 역시 천주교인이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절두산 순교 박물관에 정약전의 그림이 있다는데 처음 듣는 얘기라 미심쩍다.

정약용은 철학적, 사상적 관점에서 자연을 탐구했기 때문에 물고기를 노래하는 시에서도 효제라는 교훈을 찾았던 반면, 정약전은 보다 자연과학자다운 태도를 지녀 <현산어보>와 같은 놀라운 자연도감을 남긴다.

형제가 좀 다른 방면으로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궁벽한 시골에서 참조할 서적 한 권 없이 기존에 자신들이 가진 지식과 주변의 탐구, 그리고 깊은 사고 끝에 유배지에서 많은 책을 펴낸 조선 지식인들의 학구열은 존경스럽다.

선비라고 하면 고리타분하고 음풍농월이나 읊는 관념론자들이 연상되는데 사실 그들은 매우 지식이 높은 문화적 엘리트들이었던 것 같다.

앞서 읽은 <중국의 술 문화>에서도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서 벌로 시를 지을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들 같은 대중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각종 어류의 세밀화가 그려져 보는 즐거움이 있지만, 솔직히 무슨 물고기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고기는 안 먹고 해산물은 정말 전부 다 좋아하는데도 왜 해양생태계에 대해서는 이렇게 관심이 없는지 모르겠다.

정약용이 궁벽한 섬에서 형이 서당을 열자 그 아이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사람들은 작은 섬에 사는 걸 비루하다 여기고 넓은 섬에 살고자 하지만, 서책을 읽고 학문을 연마한다면 그 마음은 큰 섬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나 개인은 지극히 미미한 존재이고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소시민에 불과하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충만감에 가득 찬다.

정약용 같은 위대한 학자가 말하는 학문적 경지는 감히 바랄 수 없겠으나, 독서도 정신적 즐거움을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책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정약전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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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질병X의 시대 스켑틱 SKEPTIC 21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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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나올 때만 해도 코로나 19가 이렇게 오래 유행할 줄은 몰랐을 것 같다.

코로나가 무서운 게 아니라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망해가는 게 정말 무섭다.

병들어 죽으나 굶어 죽으나 그게 그거라는 말이 실감나는 시대다.

코로나 19는 인수공통전염병인데 원인 숙주가 박쥐라고 한다.

박쥐에서 뱀이나 천산갑 같은 야생동물을 통해 인간까지 전해져 온다는 것이다.

지난 번 사스나 메르스도 이 박쥐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위생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야생동물을 먹는 관습은 확실히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인플루엔자 유행과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1년여 시간 동안 계속 사회가 통제되고 본문에 나온 바대로 세상은 점점 보수적으로 통제적으로 바뀌어 가는 듯하다.

이제는 진보라는 개념이 바뀐 듯하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다양성, 포용성, 개방성을 지금의 "진보" 정권에 적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 정책이란 것도 국가가 강력하게 사회 자원을 통제하여 보다 많은 인민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이니 권력에 대항하는 개인의 자유 추구는 진보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제일 인상적인 기사가 스티븐 핑커의 투고였다.

대학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이른바 "정치적으로 공정한" 발언만 한다는 것이다.

"탈진실의 시대"는 반어법으로 쓸 수는 있으나 인간은 여전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추구한다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객관적인 진리란 없다, 인간은 원래 비합리적인 존재다, 계몽주의는 구시대 유물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과학이 전부는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들이다.

이런 주장들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에서 본 "현실이라는 가슴 뛰는 마법"이라는 구절이 생각난다.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고 과학적 진실이 직관에 맞지 않을 때도 있으며 감정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효율적인 생존을 위해 인간은 현실에 기반한 합리적인 사고를 해 왔다.

이익을 갖고 선동하는 정치인들이나 유명 인사들에게 휘둘려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풍자가 사라지니 아예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져 버린 개그 콘서트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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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20-11-1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유행하고 있는 사스코로나바이러스-2말고도 전염병의 유행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인 것 같아요. 인수공통전염병이 그렇다더군요. 사라진 건지 숨은 건지 모르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다시 유행이 되기도 하고. 최근에 이 상황 때문에 바이러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관련 도서를 몇권 읽었는데, 얼마전에 읽은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라는 책이 무척 재미있더라구요.

혹시 이쪽에 더 관심이 가신다면 읽어보시는 것도 좋으실 것 같아요.

marine 2020-11-12 09:08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