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요에의 美 - 일본미술의 혼
고바야시 다다시 지음, 이세경 옮김 / 이다미디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우키요에에 관심이 생겨 오래 전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알라딘 리뷰를 보니 2011년에 읽었던 모양이다.

문득 다시 봐야겠다 싶어 빌리게 됐는데 재독인데도 더 어려운 느낌이다.

한국인이 쓴 책이 아니라 일본인이 직접 쓴 우키요에 이야기라 그런지 훨씬 복잡하고 상세한 느낌이다.

특히 각주가 친절하게 달려 있긴 하지만, 여러 문화 관습이나 양식들이 일본어 그대로 실려 있어 직관적으로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워낙 일본 문화에 대해 무지해서인 것 같다.

또 일본어 이름은 입에 잘 붙지가 않는다.

겨우 확실히 아는 화가 이름이 안도 히로시게와 가츠시카 호쿠사이 정도인데 가츠사와라고 꼭 잘못 발음을 하게 된다.

스승의 이름을 물려받아 계보를 잇는 전통 때문에 더 헷갈리는 것 같다.

겨우 10개월을 불꽃처럼 활동하다가 사라져 버린 도슈사이 샤라쿠가 사실은 조선에서 건너간 김홍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들은 적이 있는데 너무 황당해서인지 이 책에는 언급이 없다.

우키요에의 본류는 미인도와 가부키 배우들 그림인 것 같은데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큰 감동이 안 생긴다.

특히 우키요에의 일본 미인도는 아름답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는다.

왜 얼굴을 크고 투박하게 그리는 걸까?

아마도 우키요에만의 개성있는 표현방식인 것 같은데 신윤복의 미인도 같은 가녀린 느낌도 아니고, 서양화의 화려한 미인도 아니라 아주 개성있으면서도 감동이 일지 않는다.

반면 안도 히로시게나 가츠시카 호쿠사이로 대표되는 다색 풍경화는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사실 나는 판화에서 별 매력을 못 느끼는데 이 다색판화의 풍경화만은 과연 고흐가 똑같이 묘사했던 심정이 이해가 되는 될 정도로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구도도 그렇고 서정적 풍경화라는 용어에 걸맞는 분위기와 색감이 정말 아름답다.

어떻게 이런 판화 양식을 창조해 냈을까?

18~19세기 에도의 초닌층, 즉 상인계급은 유럽의 중산층과 비슷한 개념인 것인가?

그들의 경제력이 이처럼 독특하고 매력적인 서민문화를 창조해 낸 것일까?

조선 역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유행했다고 하지만 일본의 우키요에처럼 대량 생산되어 대중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서민문화가 아니라 여전히 엘리트 고급 예술이었던 것 같다.

결국 우키요에의 성장은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상인층의 경제력 덕분인가 싶다.

우키요에의 시작이 소설에 딸린 삽화였고 유명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을 그리면서 발전한 걸 보면 출판 문화나 공연 문화가 아주 활발했던 것 같다.

1부는 12명의 우키요에 화가들을 소개하고, 2부는 목판화 우키요에, 3부는 직접 그린 육필화를 소개한다.

좋은 도판 덕분에 잘 감상했고 안도 히로시게의 풍경화는 색감이 너무나 매혹적이라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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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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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 교수의 책은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정말 글을 잘 쓰시고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사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소설책도 아니고 역사책인데도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나, 읽을 때마다 감탄한다.

좋은 책은 재밌는 이야기책이 아니라 해도 독자에게 즐거움과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2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도 몽골 제국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에 대해 핵심만 짚어서 아주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전에는 한국에서 쓰여진 역사책은 그저 연대기 나열에 불과하고, 사회 체제와 구조를 분석하는 깊이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좋은 책을 접하지 못해서 생긴 편견이었던 모양이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이라고 하면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부족 단위로 떠돌아 다니다가, 흉노나 몽골처럼 일시적으로 군사력이 강해질 때 흥기해서 뻗어나가다가 곧 농경국가에게 정복당하고 사라져 버리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고대의 흉노가 한나라를 압박할 정도로 큰 나라를 이루었지만 결국은 초원을 떠돌다 소멸된 것처럼 유목민은 정주민과 달리 축적된 문화나 국가를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

이 책은 유목민에 대한 이런 편견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농경과 유목은 인류 생산양식의 양대 축으로, 농경민이 곡식을 생산하듯 유목민은 고기를 통해 삶을 영위해 갔다.

얼마 전에 읽은 알타이 고분에 관한 책에서도 고기만 먹었을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발굴된 부장품을 보면 실제로는 곡식이 주식이었고 변경지대에서 농사를 짓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도 여러 사치품과 일상용품, 곡식 등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주국가와의 교역을 통해 수요를 충족시켰다.

중국이 자신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조공이라는 형식을 통해 무역을 했던 반면, 유목국가들은 경제적 목적으로 교역을 원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세를 과시하고 좀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교역의 목적이 전혀 다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인 학자가 쓴 영락제 평전에서도, 정화의 원정이 서양인의 대항해처럼 경제적 동기가 아니라 순전히 조공 국가를 넓혀 천명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정화의 원정은 돈이 매우 많이 드는 비경제적인 활동이었던지라 영락제 사후 중지되고 만다.

조공 무역이 중국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없고 오히려 권위 과시를 위해 많은 돈이 들어 조선 사신들의 조공도 횟수 제한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였다.

중국은 너무나 큰 나라였고 당시로서는 경제력이 최상위였기 때문에 타국과의 교역을 통해 특별히 얻을 게 없었으므로 유럽이나 유목민들처럼 단순히 경제적 목적만으로는 굳이 교역을 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다.

역시 필요가 발명을 만드는 것인가?

유럽이 배를 타고 바다로 뻗어 나간 반면, 유목민은 내륙에서 실크로드로 대표되는 교역로를 확대하였으나 청나라와 러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생기면서 결국은 소멸되고 만다.

반대로 전통적인 중국 왕조들은 바다보다는 내륙의 방어와 확장에 집중하여 해외무역을 포기하는 바람에 결론적으로 유럽에 밀리게 된다.

중국의 항해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목표가 달랐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서양 위주의 세계화를 맞게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양이 세계화의 첫 발을 내딛도록 자극한 것이 바로 몽골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부분은 동의하기가 좀 어려웠다.

몽골이 세계제국을 이루면서 서양과 중동, 중국 등을 잇는 거대한 교역망이 형성되고 세계사적인 관점이 확립되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세계지도 등이 작성되어 비로소 서양이 대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저자는 몽골 제국의 입장에서 보다 보니 그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중국이 결국은 청조의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고 또 한족만의 국가아 아니라 여러 민족들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는 만큼 단순히 전통 중국이 유목민들을 일방적으로 흡수했다고만 볼 수 없다는 관점이 독특하다.

침투왕조나 정복왕조라는 표현도 그런 생각의 발로일 것이다.

그동안은 너무 중국적인 관점에서, 한족의 관점에서만 역사를 해석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저자의 말마따나 특히 몽골사는 너무나 많은 나라들의 언어로 쓰여있기 때문에 학자들 간에도 정확한 해석이 어려울 것 같고, 한국의 경우는 더더욱 중국 입장에서만 유목민들을 평가하게 되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짧은 분량인데도 유목민의 역사와 세계사적 의의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고 무엇보다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서술이 가독성을 높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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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의 흥망과 성쇠
이종완 지음 / 공주대학교출판부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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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렇게 복잡한 책을 전에 어떻게 읽었지?

종이가 얇아 분량이 작은 줄 알았는데 430 페이지나 되고 내용이 정말 많다.

제목에서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부 유럽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에 관한 이야기다.

한 시간에 40 페이지 정도로 천천히 읽고 있어 꽤 힘들다.

내용이 어렵다기 보다는 통혼 관계가 워낙 복잡하고 우리에게 덜 알려진 왕조의 여러 인물들이 나와 찾아 보느라 시간이 걸린다.

우리로 치자면 역사책에 잘 안 나오는 중종의 후궁들과 왕자들 통혼 관계까지 등장하는 느낌이랄까?

특히 근친혼이 많아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경우들이 있어 가계도 그릴 때 헷갈린다.

왕위를 이을 남자 후계자 얻는 것이 결혼의 가장 큰 목표인데 워낙 유아 사망률이 높을 때고 사고나 질병도 많아 왕들의 3혼, 4혼도 흔했고, 결혼하면 지참금으로 영토를 떼어 줘야 하기 때문에, 왕국이 줄어드는 걸 막기 위해 가능하면 가문 내에서 배우자감을 찾는 바람에 숙부와 조카의 결혼도 자주 일어난다.

사촌끼리 혼인은 특별히 언급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잦았고 양가 남매간의 이중혼, 즉 겹사돈도 아주 많았다.

결혼이 곧 정치적 동맹이므로 같은 가문끼리 여러 차례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런 행태는 비단 유럽 뿐 아니라, 조선 시대에도 매우 흔했으니 상류층의 가문 영속 방법인 듯하다.

근친혼 때문에 유아 사망률이 높고 결국에는 대가 끊어졌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 보면 꼭 합스부르크 왕가만 그랬던 것도 아닌 듯 하다.

숙질간의 결혼, 즉 4촌이 아닌 3촌 간의 결혼은 너무 가까운 사이라 문제가 더 많았던 것일까?

결혼 동맹을 통해 신부가 지참금으로 영토를 상대방 왕국으로 가져가고, 또 후계자가 안 태어나면 시집간 딸에게 왕위 계승권이 넘어가 그 남편이 왕위를 계승하여 외국인 왕실이 들어온다.

민족 국가 성립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가능한 일일까?

오랫동안 한반도에서 단일 국가를 이루고 살아온 우리에게는 낯선 개념인 듯하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과 중부 유럽을 다스리게 된 것도 이런 중첩된 혼인 정책을 통해서였으니 정말 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근대의 발명품이 확실하다.


<오류>

68p

1346년 대립왕으로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손자인 카를 4세(1316-1376)를 선출하였다.

-> 카를 4세는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이다.

145p

모리츠는 작센 선제후의 사촌이며

-> 모리츠는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와 6촌 간이다.

163p

카를 5세의 이모가 되는 카타리나가 영국왕 헨리 8세와의 재혼에서 낳은 딸로 펠리페 2세와는 이종사촌 간이었다.

->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는 영국의 메리의 5촌 조카이다.

191p

장자인 막시밀리안 2세는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차남 페르디난트 2세는 티롤과 포르란테를 상속하였고

-> 조카인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헷갈리므로 대공 페르디난트 2세로 표기해야 할 것 같다.

193p

차남인 프랑스의 왕 샤를 9세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말리안 2세의 딸 안나와 결혼하여야만 하였다. 그와 동시에 샤를의 누이동생 마가렛은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를 얻어야만 하며

-> 샤를 9세는 막시밀리안 2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혼인했고, 안나는 외삼촌인 펠리페 2세와 혼인했다.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는 독신이었고,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가렛은 앙리 4세와 혼인했다.

239p

요제프 2세가 부르봉-파르마의 이사벨라와 결혼함으로써 축제의 막을 올렸다. 차남 레오폴트 2세가 부르봉-스페인의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함으로써 두 번째 막을 올렸다. 특히 이사벨라와 마리아 루도비카의 어머니들은 자매간으로 이종사촌이었다.

-> 이사벨라의 아버지 파르마의 필리포 1세와 마리아 루도비카의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모두 펠리페 5세의 아들들로 둘은 사촌간이다.

부록의 가계도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엘리자베트 = 샤를 4세

-> 샤를 9세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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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 인 러시아 2 - 도시 이야기 줌 인 러시아 2
이대식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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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1권을 읽었던 것 같은데, 2권이 신간으로 나와 못 지나치고 빌리게 됐다.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는 학자가 아니다 보니 깊이 면에서는 부족하지만 현재 러시아의 산업 분야에 초점을 맞춰 현장감 있게 소개한 것이 장점이다.

기업 연구소라서 역사적 배경과 더불어 지금 현재의 경제 상황도 같이 소개하여 균형감이 있다.

그렇지만 역시 본격적인 러시아의 역사적 전통을 알기에는 내용이 부실하다.

얼마 전에 읽은 <시베리아 유형의 역사>를 읽어 보면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이 갖는 의미와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나온다.

동방정책이라고 점잖게 표현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인디언들을 몰아 내고 금을 찾아 서부 개척을 했던 것처럼, 러시아 역시 시베리아의 수렵인들을 몰아내고 모피를 찾아 동쪽 끝까지 진격해 나간 내부 식민지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중국이 신장과 티벳트를 정복하여 한인 이주 정책을 펴는 것처럼 러시아 역시 현지인의 동화 과정이 활발하고 약소 민족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과정일 듯하다.

이런 내부적인 문제는 과연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러시아의 도시라고 하면 기껏 아는 게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가 전부였는데 시베리아 철도를 지나가는 여러 도시들을 소개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모스크바 공국이 여러 러시아의 공국들을 통합한 이유가, 몽골 제국에 가장 열심히 조공을 바쳤기 때문에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렇지만 결국 힘을 키워 몽골을 몰아내고 주변을 통합하게 된다.

진정으로 러시아가 제국이 된 것은 그칠 줄 모르는 동방으로의 진출 야욕이었을 것이다.

일관되게 로마노프 황제들이 동방정책을 추진했던 점이 인상적이다.

마치 청조의 중앙아시아 정복을 보는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270p

당연히 정치와 경제 면에서도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정치적으로는 귀족과 교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제권력의 기반이 확립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관련 학계에는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 스탈린, 그리고 푸틴으로 이어지는 오랜 권위주의 정권의 전통이 몽골 지배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14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르네상스와 산업화로부터 러시아가 철저히 단절되어 오랫동안 농업국가로 남아 있던 것도 몽골의 지배를 그 요인으로 본다.

 더 흥미로운 것은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몽골에 가장 충직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고 지도자인 대공의 지위는 몽골이 정해줬고 대공은 러시아에서 조공을 거둬 몽골에 바치는 대리 수금자 역할을 했다. 몽골의 인정을 받기 위한 지방 공후들의 경쟁에서 가장 돋보인 사람이 바로 모스크바 공후였다.


<오류>

184p

사실상 매형에게 국정을 맡기는 섭정 체제가 시작되었으니, 표도르의 매형이 바로 보리스 고두노프이다.

->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이 표도르와 결혼했기 때문에 매형이 아니라 처남이다.

270p

이반 뇌제의 사위이자 류리크 가문의 대를 끊은 보리스 고두노프

-> 보리스 고두노프의 여동생이 이반 뇌제의 며느리가 됐다.

342P

프리드리히 1세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의 아들 빌헬름 1세는 호박방에 관심이 없었고

->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이다. 빌헬름 1세는 후대 사람이다.

344p

엘리자베타의 며느리로 와서 남편 표트르 3세를 암살하고 황제가 된, 독일 출신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 엘리자베타 여제는 미혼이었고, 표트르 3세는 그녀의 조카이다.

354p

시어머니인 엘리자베타가 지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겨울궁전에 입성한 예카테리나는

-> 엘리자베타는 예카테리나의 시어머니가 아니라 시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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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식 2020-11-2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정확한 지적 꼭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marine 2020-11-28 09:08   좋아요 0 | URL
저자께서 직접 댓글 달아주시고, 감사드립니다^^
시베리아 철도를 기준으로 모스크바의 여러 도시들을 소개하는 형식이라 러시아라는 거대한 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매 챕터마다 지도를 실어준 부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대식 2020-11-2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적하신 내용은 실제로 제가 강의할 때 말하는 내용인데 원고를 쓸 때 어떻게 그렇게 작성되었는지 저도 이해가 안가네요.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과학에 창조론의 자리는 있는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2 스켑틱 SKEPTIC 1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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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는 정말 나같은 사람을 위해 나오는 책인 것 같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회의주의자임이 분명하다.

나 스스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그에 따른 갈등도 없는데, 말하자면 확신범인데 왜 자꾸 이런 책을 읽는 것인지 생각해 봤다.

기독교에 대한 문화적 관심도 있지만 (마치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궁금하듯) 무엇보다 근본주의 기독교인인 엄마 때문인 것 같다.

엄마는 대학교 2학년 때 시집와, 42년 교직 생활을 하시면서 학생운동 하느라 교도소 수감되어 있는 아빠를 뒷바라지 하며 정말 가족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지금도 직장생활 하는 딸을 위해 반찬을 보내시고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라도 광주에서 인천까지 달려와 아이들을 봐 주신다.

시부모님도 돌아가실 때까지 모셨고 실직하고 이혼한 시동생을 위해 조카까지 맡아 주기도 하셨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에 아무런 불평이 없고 위암도 잘 극복하시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신다.

내가 보기에는 인격적으로 정말 훌륭하신 분인데 단 한가지, 교회 문제로 너무 괴롭다.

엄마는 가족 모두를 구원받게 하시는 게 삶의 목표인 분이시다.

신앙이야말로 누구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선택할 수 없는 신념의 문제이자 자유의지인데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압적으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

우리 가정의 문제는 오직 이것 하나, 엄마의 강렬한 선교 의지이다.

평범한 기독교도 싫은데 이 교회는 성경을 정말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근본주의 교리를 고집하기 때문에 더 받아들기기가 힘들다.

엄마의 강권에 못이겨 몇 번 나갔던 부흥회에서 나사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강연자로 나서서, 여호수아가 팔을 들어 잠깐 태양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는 기록이 천문학적으로 입증이 됐다는 식의 강연을 듣고 도저히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그 연구원이라는 경력도 진짜인지 의심이 됐는데 오늘 읽은 이 책에 따르면 과학자들도 교회 앞에만 가면 이성의 문을 닫고 맹목적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얻고 힘든 세상 살아가면서 신에게 의지하는 정도의 평범한 교회라면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 나가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설교 시간마다 성경은 과학이다, 아라랏트 산에 노아의 방주 조각이 남아 있다, 진화론은 잘못된 이론이다를 주장하는 이런 신앙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엄마의 강요에 맞서기 위해 나는 계속 무신론에 대한 책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셋으로 나눴다.

첫째는 도킨스 식의 제거론이다.

과학적 사고방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신이 그저 상상력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도 종교에서 과학적 진실을 없애 버리는 제거론자이다.

적어도 생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와 과학이 양립하기 어렵다고 느낄 것 같다.

나 역시 이 쪽인데, 급진적인 주장인 만큼 주변의 공감을 얻기도 힘든 부분이 있다.

두번째는 분리론이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이런 쪽이다.

예술과 과학이 서로 다르듯 종교를 예술과 같은 맥락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갈등할 일이 없다.

일반적인 기독교나 천주교가 이런 스텐스를 취하는 것 같다.

과학은 과학자의 영역으로, 영적인 부분은 종교가, 이 정도의 분리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회피라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조화론이 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간다.

창조의 원리에서 형이상학적 요소를 제거하고 인격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우주 원리라고 할까?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방식'이라고 설명한다.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이 믿었던 우주 원리로서의 신, 理神論 의 개념일까?

진화론이라는 법칙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주체를 창조주로 설정한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신은 인간사에 세세하게 관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인격신이 아니다.

여전히 종교는 인간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자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저자들은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대중을 교육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왜냐면 과학은 실재하는 현실 세계를 다루고 물리적 우주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해결책도 거기서만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인상깊은 구절>

55p

과학기술은 "미래의 먹거리"나 "신성장 동력"이기 이전에 특별한 유형의 지적 전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과학적 세계관은 합리적 추론과 객관적 증거를 집요하게 강조하는 지적 스타일이다. 겉으로는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 강국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런 지적 전통과 문화를 향유하는 시민들이 많지 않다는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뿌리가 약한 국가에 속한다.

88p

누구나 자신이 바라는 대로 믿을 권리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당신에게는 누구든 들을 용의가 있는 사람에게 당신이 아는 최고의 지식을 가르칠 권리가 있다. 목사가 우리 과에 찾아와서 공짜로 성경책을 나눠줄 권리가 있듯이 말이다. 종교 근본주의는 공정한 승부를 벌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자. 그들은 말 그대로 당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그 목표는 다름 아닌 과학과 합리주의에 대한 정면공격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경향을 과소평가하고 그것을 흔들리는 추처럼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추가 되돌아올 즈음이면 우리는 갈릴레오나 다윈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굳건히 지킬 경우에 비해 훨씬 나쁜 세상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토머스 헉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흙에서 개량된 것보다는 원숭이에서 개량된 것이 낫지 않겠는가?"

92p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열린 사고를 하지만 창조론자들은 성경의 권위에 집착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과학은 엘리트 집단의 제도로서, 과학 옹호론자들의 태도 또한 때로는 권위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창조론자들은 대중의 호응을 얻기 위해 상식에 호소하며 일상적인 종교문화에 걸맞은 일종의 실용주의 과학을 구상한다.

 오늘날 창조론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것과 같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과학적 근거를 찾는 대신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방어한다. 창조론자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목격하는 생명체들 또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출현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화론을 통해 생명의 탄생을 훨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깨달았다. 

 우리가 창조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창조론자들이 과학을 실천하지 않는다거나 특수창조설이 평평한 지구처럼 실패한 이론이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창조론이 끔찍한 실패로도 취급될 수 없는 반증불가능한 부당한 가설이므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창조론자들은 신과 악마의 존재를 말하는데, 과학에서 초자연적인 설명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97p

진화론은 우리가 목격하는 불완정성이 당연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기 시작했고 창조론의 설명을 대체했다. 적응력이 뛰어나고 명확하게 분류되는 생명의 형태들은 공통 조상으로부터 유래한 후손이라는 증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증거에 부합하도록 창조론을 수정할 수도 있겠지만, 진화론과 비교한다면 일련의 변명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 창조론과 같은 광범위한 이론이 무너진 이유는 일부 괴상한 '데이터'가 연역적 결론들과 상충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론이 틀렸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물체가 고유의 자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주장이 뉴턴 물리학에서 더 이상 논리적이지 않았던 것처럼, 신성한 목적이 없다고 가정해야 생물학적 현상을 더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창조론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 아님을 깨달았다. 과학은 자연주의적 설명만 허용하므로 성숙한 과학은 창조와 같은 개념들을 고려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136p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새로운 이론이나 가상적 존재가 단지 유용하다는 이유 때문에 (당대의 과학자들이 그 물리적 실체를 의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진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예를 들면 지구가 아닌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계 모델도 처음에는 물리적으로 참이라서가 아니라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수학적으로 더 간단히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원자핵, 전자, 그리고 광자도 처음에는 유용하긴 하나 물리적 실체는 없는 개념으로 생각되었다. 

 물론 모든 이론이 성공을 거두는 것은 아니며, 가상적 존재가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밝혀지지도 않는다. 실험(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실제적 응용)에 의해서 새로운 이론의 유용성이 입증되면 이론에 내포된 개념들도 물리적 실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과학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과학자들이 이론의 관측 가능한 예측을 생각해내고 그에 따른 적절한 실험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만일 예측이 실패하면 이론은 폐기된다. 하지만 실험이 성공하면 이론은 과학적 실재의 일부가 되고, 한때는 역설적으로 보였던 개념들에도 (이해할 수는 없더라도) 익숙해지고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반해 실험으로 검증할 수 있는 가설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은 과학적 생산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한 다른 차원이 없이도 사실을 더 잘 설명하는 경쟁 이론이 창안될 수도 있다)

196p

아틀란티스 이야기를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증명의 부담은 이 이야기가 역사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측이 지고 있다. 아틀란티스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저 아틀란티스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플라톤이 유일한 근거라는 점만 지적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고대 작가가 기록한 아틀란티스 이야기는 모두 플라톤에서 인용했으며 모든 인용 문헌도 플라톤으로 소급된다)

226p

핸콕은 과학자들이 맹목적으로 한 가지 신념만 고집한 나머지 눈앞에 닥친 재앙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솔직하지 못한 고백이다. 필자는 현장의 지질학자로서, 20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지질학자들이 재앙의 중요성을 간과한 적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과학계는 대재앙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덕분에 월터와 루이스 앨버레즈는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지질학계로 하여금 공룡이 혜성 충돌로 멸종했다는 이론을 수용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핸콕은 정상적인 과학적 회의주의에 부딪힐 때마다 음모론을 흘린다. 이는 믿기 힘든 주장에 가해지는 과학적 비판을 피하려는 핸콕의 핑계일 뿐이며, 자신을 소위 거대하며 불가항력인 동일과정설에 부딪힌 소수자로 위장하려는 행위다.

230p

나는 저명한 화산 용암지대 홍수 전문가인 매사추세츠대학교의 아이작 라슨에게 영거 드라이아스기 충돌 가설과 연관시킬 수 있는 폭우가 내렸을 가능성이 있는지, 핸콕이 제기한 음모론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라슨은 완곡하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재앙을 일으킬 만한 단 한 번의 대홍수는 없었으며 홍수가 여러 번 일어났다는 가설에 과학계는 합의했다. 음모론에 관해서는, 과학계는 신빙성 있는 자료로 뒷받침하는 새로운 가설에 항상 열려 있으며, 결정적인 경험적 증거나 이론적 근거가 부족한 가설은 지지를 받기 힘들다고 말하겠다. 과학자는 상당히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크므로, 이런 사람들 수천 명이 음모론에 얽혀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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