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인물통찰 - 폄하와 찬사로 뒤바뀐 18인의 두 얼굴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전문가가 아닌 필자의 주장은 상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전문가라면 한 분야에서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 정도는 되야 할 것 같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근거를 밝히는 것, 자연스러운 인과관계를 도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곤 한다.
서점에서 이 책을 보고 기존의 평가와 다른 관점으로 역사적 인물을 되돌아 본다고 해서 흥미가 생겼는데 이 쪽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걱정을 했었다.
그렇지만 역사학과 출신이고 아주 엉터리는 아닐 거라 생각하고 읽게 됐는데 평가는 실망 쪽이다.
환단고기를 믿어야 한다고 내세우는 식은 아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제일 위험한 것은 현대인의 관점으로 과거를 바라보는 것인데, 사대주의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당시의 국제 질서를 인정한 현명한 외교 정책이었다까지는 좋지만, 한미 동맹을 주장하는 보수층이 바로 숭명반청을 주장하던 노론 집권세력과 똑같은 거다, 이런 식의 단순 비교는 진도를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흔드는 오늘날의 미국을, 이미 망해버린 17세기 노론 집권층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명나라와 어떻게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자존심을 지키려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야만족의 나라 청을 배척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반미가 반청과 통하는 게 아닐까?
저자의 이런 현대주의적 관점은 연산군이나 정도전에 대한 평가에서도 나타난다.
정도전이 정말로 추구한 것은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재상정치였고 그것은 힘없는 백성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가진 자들의 권력 추구, 즉 소수 귀족인 사대부들을 위한 정치였으니 정도전을 민중을 생각하는 개혁가로 볼 게 아니라는 식이다.
왕조 국가이자 전근대 사회였던 15세기 조선 사회에서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오늘날 민주주의나 서민정치에 합당한 의식을 가진 정치가가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원의 간섭과 홍건적, 왜구의 침략 등으로 엉망이 되버린 고려 사회를 재정비하고 국가의 틀을 새롭게 갖춘 조선 개국자들의 시대적 역할은 오늘날 민주주의 관점으로 결코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산군은 또 어떤가.
그가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고 해서 과연 사대부의 권력을 제한하고 민중의 편에 선 왕인가?
집권층을 억누르면 곧 백성을 위하는 왕이 되는 것인가?
연산군의 공포 정치는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도 미화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폭정을 일삼는 왕들이 많았고 저자의 말마따나 태종도 아버지를 유폐시키고 세조도 동생들과 조카를 다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연산군처럼 대책없이 사회 근간을 흔들지는 않았다.
그 보다 더 나쁜 왕들도 많다더라는 식으로 연산군의 폭정과 정책 실패를 미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차라리 광해군이 왕위를 빼앗긴 것은 유교적 명분론에 반하고 무리한 궁궐 공사를 강행했기 때문이라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게 더 와 닿는다.
광해군의 평가에서처럼 어쨌든 정권을 못 지키고 무너진 것은 명백한 실패가 아닌가. 

동의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다.
장수왕이 중국에 사대정책을 취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점, 명성황후는 실세가 아니고 사실은 고종이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 이황이 실은 관료로서 야심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는 점, 정조 시대의 한계점 같은 것들이다.
장수왕이 북위와 남조 왕조들의 책봉을 받으려고 애쓰고 당시의 국제 질서를 인정했기 때문에 국가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평가는, 후에 연개소문이 당과 충돌하는 바람에 결국은 망국까지 갔다는 평가와도 일정 부분 통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성계가 여진족이었다느니, 강감찬의 귀주대첩 덕분에 거란과 고려, 송, 일본 등의 동북 아시아가 250년 동안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느니, 김대건이 실은 프랑스 제국주의자에게 이용을 당했던 거라느니 하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가 세거지인 전주를 떠나 삼척을 거쳐 함경도로 이주한 사건은 임용한씨의 <조선국왕이야기>를 통해 자세히 읽었다.
그 때도 이안사를 따라 170여 가구가 이주했다는 부분에서 약간의 의문을 품기는 했으나 당시 시대적 환경으로 이해를 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부분을 두고, 많은 가구가 주인을 따라 이주한 것이야 말로 이성계의 조상이 전주의 농경민 집단이 아니라 유목민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사료 비판이라는 이유로 실록에 나온 태조의 가계에 관한 부분을 완전히 거짓으로 치부하는 건 합리적이지가 않다.
또 이안사가 그렇게 큰 세력을 가졌다면 그깟 지방관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첩 문제로 다투다 집단 이주를 했겠냐고 하는데 이런 상황 논리야 말로 가장 위험한 논리 전개라고 생각한다.
그 지방관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정확히 밝히지도 않은 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다.
또 몽골이 국토를 유린하는 시대에 어떻게 그 많은 가구가 북쪽까지 전진했냐고 하는데 몽골이 1년 내내 전국을 지배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추측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이성계 집안이 함경도 부근의 여진족 출신이었다면 당시나 후대 기록에 일말의 의문이라고 남겨야 하는데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심지어 고려인들이 깔보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라 사대부들이 16세기가 될 때까지 산림에만 머물고 정치 참여를 거부했다느니, 세종이 한글을 만든 것도 제 문자를 갖는 유목민의 전통을 지키고 사대부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누르기 위해서였다느니 이런 논리적 비약이 심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김대건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앞잡이로 이용당하다 조선 정부에 처형당했다는 평가도 지나친 비약이다.
선교사들이 종교를 앞세워 포교에 나서면 군대가 뒤따라와 총칼을 들이대는 식의 식민 지배가 19세기에 자주 벌어진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선교사 개개인의 신앙적 포교 활동을 무조건 정치나 시대적 큰 관점으로만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과연 프랑스가 19세기 말의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병인양요를 일으켰다고 하지만 정말로 식민 지배의 야심이 있었다면 한 번 패했다고 그걸로 끝이겠는가.
김대건은 정치적 인물도 아니고 한국 역사에 큰 역할을 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그는 순교자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조선 정부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을 꺽기 위해 천주교 박해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과장과 논리의 비약이다.
유교의 교조주의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고 남인들에 대한 정치 공세로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했다는 것이 정설 아닌가.
흥선대원군이 쇄국주의자로 낙인찍힌 큰 이유가 신미양요 때 러시아도 일본도 아닌 오늘날 한국인이 짝사랑하는 미국을 물리쳤기 때문이라는 것도 정말 넌센스다.
저자의 반미적 관점을 역사적 인물의 평가에 적용해서는 안 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명백한 시대 착오였고 미국이 아니라 어디를 물리쳤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시대를 잘못 읽은 정치가다.
인물 뒤집기는 이래서 항상 위험하다.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를 하려면 기존의 학설을 뒤엎을 수 있는 수많은 근거와 사료들을 준비해야 하는데 대부분은 한 두 가지 정황적 추론으로만 기존의 평가를 무시하려고 한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저자의 논리 전개가 허술하다는 느낌이 들어 약간은 실망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려, 북진을 꿈꾸다 - 고구려 영토 회복의 꿈과 500년 고려전쟁사 KODEF 한국 전쟁사 2
정해은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굉장히 쉽게 잘 쓰여진 책이다.
300 페이지 정도 되는데 4시간 좀 더 걸려서 읽었다.
상당히 빨리 본 셈이다.
각 전투의 상황들을 세세하게 기록하지는 않아 상세함은 떨어지지만 (임용한씨의 <전쟁과 역사> 시리즈가 훨씬 자세하다) 대신 고려 시대라는 긴 시기에서 외침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한 눈에 볼 수 있게 한다.
고려라는 나라가 좀 더 가깝게 느껴지고 저자의 평가대로 중원 땅에서 유목민들이 흥기하여 어지럽던 시대에 이만큼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국가를 유지했던 고려인들을 결코 과소평가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관점은, 거란의 침입 이후 요나라에 사대하고 심지어 한 수 아래로 여겼던 금나라에도 사대했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당시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해 실리 외교를 했다고 평가한 점이다.
우리가 심지어 거란에게 책봉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그러나 11세기는 거란의 시대였고 12세기는 금을 건국한 여진의 시대, 그리고 13세기는 전 유럽과 아시아 몽골의 말발굽에 신음할 때였으니 동북아시아의 변방에 있던 작은 나라 고려로서는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도 국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평가대로 홍건적의 침입도 무려 20만 대군을 이끌어 넘어온 만큼 결코 가볍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체 현종이나 공민왕은 얼마나 무능하면 나주와 안동까지 피신을 했나 늘 한심하게 생각했는데, 고대 전쟁에서 국왕과 수도가 점령당한다는 것은 곧 나라가 패망하는 것과도 같으니 이들의 빠른 피난을 꼭 나쁘게 생각할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고려의 기본적인 군사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
성을 공격하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한 시대였고 더군다나 한반도는 산이 험하기 때문에 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성전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외침이 있으면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면서 시간을 버는 동안, 중앙군이 대오를 정비하고 성으로 달려와 일거에 적을 섬멸하는 방법을 썼다.
수성전은 곧 중앙군의 합류를 기다리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공민왕 역시 홍건적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동안, 안동으로 피난해 관군을 소집하고 반격할 기회를 노려 일시에 홍건적 10만을 살해한다.
어찌 보면 위험하기까지 한 선택을 한다.
즉, 보통 도망칠 때는 곡식을 모두 불태우는 청야전술을 구사하는데 배고픈 홍건적이 계속 남하할까 두려워 아예 곡식을 그대로 놔두고 떠난 것이다.
예상대로 홍건적은 개경에서 배를 채우며 사태를 관망한다.
청야전술 포기를 주장한 대원수는 파직됐으나 공민왕은 안동에서 숨을 고르고 정세운 등을 앞세워 홍건적을 치러 올라갈 수 있었다.
개경에 들어가기 전 잠시 흥왕사에서 머무는데 이 때 김용의 반란이 일어나 최영이 이를 진압한다.
홍건적의 침입과 무장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공신 책봉이 일어나고, 이를 배경으로 이성계나 최영 같은 신흥 무장세력이 등장하게 됐다. 

무신 정권의 대몽 항쟁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많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아리송 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관점에 적극 동의하게 됐다.
어떤 책에서는 무신 정권이야 말로 귀족 사회를 전복시키고 실력 위주로 나가게 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고, 30년간 대몽항쟁을 지속한 덕분에 자주국가로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내 생각에 무신 정권은 또다른 비정상적 세력의 일당 독재에 불과하고 과연 고려 사회에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의심스럽다.
더군다나 삼별초의 난까지 합하면 무려 40여년 간 몽골에 시달리게 되는데 강화도로 들어간 것은 명백하게 정권 유지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긴 대몽항쟁 덕분에 고려는 비록 부마국이 되기는 했으나 고려라는 국호를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것은 저자의 평가대로 고려 민초들의 저항 덕분이지 정권 유지에 급급한 무신 정권의 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영흥 지방 사람들이 몽골에 귀순해 직할령인 쌍성총관부가 생겼겠는가.
공민왕까지가 끝이다 보니 이성계의 활약상이 안 나와 아쉽다. 

쉬운 문장으로 쓰여서 고려 시대 외침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장법사
샐리 하비 리긴스 지음, 신소연.김민구 옮김, 이주형 감수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중국인이 썼던 현장법사와 같은 내용인데도 서술적 차이가 보인다.
서구인이 보는 시각은 동양인과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실감했다.
사람 이름도 마찬가지인 게, 중국 사람의 저서에서는 계현왕이라 하면, 이 책에서는 하르샤라고 표기하는 식이다.
또 기독교인의 관점으로 불교를 비교하는 점도 흥미로웠다.
석가모니를 죽이려고 했던 사촌 데바닷타를 가롯유다와 비교하고, 현장이 공부한 날란다 승원을 기독교의 수도원과 비교하는 식이다.
현장은 단지 불법을 구하러 떠난 승려이기 보다는, 16년 동안 중앙 아시아와 인도를 여행한 위대한 7세기의 여행가이고, 19년 동안 불경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다.
그래서 저자도 현장을 14세기의 모로코인 여행가 이븐 바투바와 비교하기도 했다.
현장이 남긴 <대당서역기>는 오늘날에도 7세기의 중앙 아시아와 인도의 풍습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또 그가 번역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도 매우 중요한 경전으로 읽히고 있다.
단순히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로만 알고 있었는데 인간 현장의 일생도 매우 흥미롭다. 

인도 하면 힌두교나 이슬람교가 성행하고 정작 불교는 탄생지에서 배척받아 불교사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인도에 얼마나 많은 성지와 유물이 있는지 새삼 확인했다.
현장도 전 인도를 돌면서 부처의 전설과 일화가 남은 곳을 일일히 살펴 보면서 일종의 성지 순례를 했다.
그 때 가져온 많은 불상들이 7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 전해져 복제되어 왔음은 물론이다.
인도의 부처 조각상이나 벽화를 봐도 그렇고 설화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부처의 느낌은 아니었다.
생김새부터가 이국적이고 인도인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난다.
또 이슬람이 침입하고 난 후 본격적으로 불교 문화가 파괴되고 사라졌지만, 그 전까지는 불교 역시 인도 대륙에서 상당 기간 동안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때 아시아 곳곳으로 뻗어나가 오늘날 동남아시아나 동북아시아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안 석불을 비롯해 키질 석굴이나 베제클릭 석굴 등 중앙아시아 곳곳에 불교 문화 유산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한 때 기독교에 경도되었던 때는, 예수가 동정녀에게 출생했음은 당연한 교리라 생각하면서도 석가가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교리는 유치한 민담 정도로 치부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서구적 발상인지 모르겠다.
불교가 이렇게 심오하고 오랜 역사와 체계를 갖춘 종교임을 관심을 갖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불교를 인도 전역에 전파한 것은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을 비롯 다음 쿠샨 왕조의 카나슈카 왕 등이고 굽타 시대 때도 힌두교가 성행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불교를 우대했다고 한다.
그런 국가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오늘날 세계 3대 종교로 남은 것은 불교가 가진 철학적 신학적 깊이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불교의 교리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다. 

아쉬웠던 점은, 인도나 중앙 아시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현장이 다녀갔던 지명들이 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감이 거의 안 온다는 것이다.
첫 장에 지도가 실려 있어 참조하긴 했으나 워낙 배경지식이 없다 보니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기회가 된다면 이번에는 중앙 아시아와 인도를 여행해 보고 싶다.
현장의 루트를 따라 불교 성지를 순례하는 것도 무척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다.
한 매력적인 여행가이자 번역가, 학승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대인들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교류를 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오늘날의 지구촌 시대는 끊임없는 이동과 교류를 통해 쌓여온 결과물인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마한복 2011-10-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보고 갑니다



명품달마한복
생활한복/개량한복/천연염색/두루마기/누비한복/아동한복/원복/등등단체복전문점
http://www.dalmahanbok.com/
 
영국근대회화전 도록 : 대(大) - 터너에서 인상주의까지
크리스토퍼 뉴얼 지음 / 지엔씨미디어(GNCmedia)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만에 가 보는 전시회인가.   
정말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 갔다.
작년에는 전시란 전시는 빠지지 않고 죄다 쫓아다녔는데 올해는 시간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잡다한 일들로 관심이 뜸해졌던 것 같다.
이 전시도 우연히 광고를 보고 알게 됐다.
직접 가서 보고 도록을 구입할 것인가, 먼저 구입할 것인가로 고민한 이유는 역시 책에 담겨진 평일 관람권 때문이었다.
대도록은 비싸기 때문에 소도록에 눈길이 먼저 가지만 결국은 모든 작품이 다 나와 있다는 유혹에 못 이겨 항상 대도록을 들고 나왔던지라 평일 관람권이 들어 있는 대도록은 먼저 주문했다.
예습을 하면 어쩐지 작품이 주는 첫 느낌이 전문가에 의해 좌지우지 될까 봐 그래서 흥미가 떨어질까 봐 나중에 해설을 읽는 스타일인데 이번에는 책도 먼저 왔겠다, 예습을 하고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역시 시간부족으로 먼저 전시회에 다녀왔고 집에서 도록을 보고 복습했다.
전시회에 다녀오면 도록이 꼭 필요한 이유는, 짧은 시간 동안 감상했던 작품들을 리마인드 하기 때문에 두 배의 감상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때 받았던 느낌을 여백에 쓰다 보면 보다 더 밀도있는 감상이 가능하다.
그래서 아주 비싸지 않는 이상 도록은 항상 구입하는 편이다.
아쉬웠던 점은 도록의 해설을 그대로 음성으로 옮겨 놓은 게 오디오 가이드인 경우가 많아 이번에는 대여를 안 하고 들어갔더니만, 이럴 수가, 모든 작품에 해설이 단 하나도 붙어 있지 않은 거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봤다.
그렇지만 오디오 가이드의 해설 없이 처음 내 느낌 그대로 작품을 편견없이 대할 수 있었던 점은 좋았다.
시간이 맞아 도슨트의 해설도 들을 수 있어 더 알찬 전시였다.
방학이라 그런지 평일 오후 시간대인데도 초등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감상에 상당히 방해가 되긴 했지만 (너무너무 떠든다...) 어린 아이들이 미술에 관심을 갖고 전시회장을 방문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작품에 대해 말하자면, 해외 유명 전시회의 아쉬운 점은 대작은 한 두 점에 불과하고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나 습작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이 전시회 역시 터너의 작품은 두어 점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습작이 끼어 있었다.
전시회의 포스터로 쓰인 조지 클라우슨의 작품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대작도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유명 작품을 실제로 본다는 기쁨은 못 느끼더라도 대신 몰랐던 것, 관심없던 분야의 여러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새로운 기쁨이 있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내가 언제 또 영국 풍경화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겠는가.
풍경화는 별로야, 영국은 별로 유명한 작품이 없어, 이런 편견을 일거에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인상적이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평소에 별로라고 생각했던 수채화의 매력을 발견한 점이 가장 큰 소득이다.
수채화는 어쩐지 유화에 비해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고 성의가 없어 보여 진정한 그림은 유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맑은 담채 느낌의 수채화로 그려진 풍경화는 진한 느낌의 유화와는 또다른 신선하고 상쾌한 분위기를 전달했다.
수채화로도 유화처럼 짧은 붓터치를 여러 번 사용하는 기법도 있고 무엇보다 여름날 저녁의 서늘한 분위기나 시시각각 변하는 대기의 느낌들을 너무나 훌륭하게 표현했다. 

인간은 환경의 동물임을 이번 전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영국에서 풍경화가 발달한 배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풍경의 느낌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순간의 것이라 영국 화가들은 그 순간을 그림으로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
한국과 비슷한 크기의 국토라고 들었는데 자연환경은 꽤 다양한 것 같다.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바다에 대한 애착도 무척 강해 보인다.
시골에 대한 영국인들의 열정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는 전통과도 맞물려 보이고, 자연에 대한 강한 향수가 느껴진다.
그런 분위기가 풍경화라는 위대한 장르를 만들었을 것이다.
터너는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화가이기 때문에 그 명성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으나 작품으로 접하니 다시금 그 천재성에 놀라게 된다.
도슨트도 설명한 바지만 겨우 열 일곱 살에 그린 수채화를 보면 피카소가 어렸을 때부터 라파엘처럼 그렸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특히 대기의 표현이라든가 후기로 갈수록 추상으로 변해 가는 화풍을 보면 선구자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실감이 난다.
문득 드는 생각이, 진정한 예술가와 단지 대중의 시선을 끄는 엔터테이너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싶다.
현대미술은 기술적인 것보다는 상상력, 자극성, 아이디어 등으로 승부하는 느낌이 드는데 이를테면 데미안 허스트처럼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는 동시대 작가가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혹은 수백 년이 지나서도) 터너처럼 진정한 예술가로 평가받게 될까?
이미 평가가 끝난 기존의 위대한 화가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데 주목받는 동시대 작가의 명성은 과연 그 예술성과 실력에 걸맞는 것인지 늘 의심이 간다.
어차피 과거에도 시대를 앞서가고 선도하는 새로운 화풍은 기존의 아카데미로부터 쓰레기라고 평가절하 당했을텐데 말이다.
세월의 흐름을 이겨내고 영원한 미의 전당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마느냐는 결국은 내가 죽고 나서 후손들이 판가름할 일인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면 미술 교육은 꼭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문적인 화가는 아니더라도 어떤 풍경이나 정물을 보고 느낀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삶이 굉장히 풍부해질 것 같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여행을 가면 거기서 느낀 점을 그림으로 그리라는 문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사진을 찍는 것과는 또다른 느낌을 것 같다.
사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찍어서 보여 주지만,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감정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근대 화가들이 고전주의 시대와는 달리 자연의 재현 대신 그것을 보고 느낀 화가의 주관적 감정을 그리고자 한 것이 이해가 된다.
직업적인 화가가 될 것은 아니니 약간의 기술과 기본적인 지식만 있다면 자신의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도 정말 매혹적일 것 같다.
그래서 일요화가 같은 아마추어 모임들이 많이 생기나 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여름날 해가 뜰 무렵의 하늘이다.
여름에는 눈이 빨리 떠지는데 새벽 5시 즈음이 되면 밤새 더웠던 공기도 서늘해지면서 파아란 여명이 밝아온다.
그 때의 그 서늘한 대기와 푸르스름한 하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여름날 새벽이야 말로 내 마음 속에 가장 이상적으로 자리잡은 풍경이다.
이런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이번 전시회에는 여름날 저녁의 서늘한 분위기도 많이 그려졌다.
화가들이 표현하고 싶은 바로 그 순간,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는 그 순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전시회장에서 화가들이 그린 실제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나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 살짝 울고 말았다.
사진과 비슷하면서도 화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그 감동의 순간이 그림에서 느껴져 가슴이 뭉클했다.
정말로 예술가들은 훌륭한 족속들이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원본보다 도록이 더 나은 작품들이 있냐는 것이다.
전시회장에서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도록으로 보면 굉장히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작품들이 있다.
물론 반대로 도록에서는 별로인데 실제로 보면 감격적인 작품도 있다.
사진보다는 원본이 나은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작품을 찍은 사진이 더 멋진 경우가 있다.
풍경이야 사진 작가의 구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원본 그대로 찍은 축소판 사진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대체 뭔지 모르겠다.
나는 인물화를 좋아한다고 믿었는데 전시회장을 다니면서 느낀 점이 의외로 내가 녹색과 파란색 계통의 색감을 굉장히 좋아해 풍경화에 끌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시골보다는 도시가 좋아, 이런 주의인데 은근히 나도 자연의 매력을 마음 깊이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녹색 중에서도 막 피어난 새순 같은 연두색이나 진한 초록색의 발랄하고 상큼한 느낌들이 너무 좋다.
파아란 대기와 신선한 숲과 초목이 어울어진 풍경화는 생각만 해도 상쾌하고 시원하다.
이번 전시에서 또 느낀 점은, 영국의 풍경화와 프랑스의 인상주의가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인상파는 실내에서 고전적인 주제를 그리는 대신 밖으로 나가 직접 스케치를 하며 빛이 변하는대로 색깔을 표현하는 외광화파가 아닌가.
대기와 빛의 변화에 따라 자연을 그리는 것, 인상파와 영국 근대 낭만주의 시대의 풍경화는 맥이 닿는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영국 인상주의 작품들을 보면 (핸리 허버트 라 생처럼) 마네나 모네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래서 프랑스 화가들도 터너를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인정했다고 한다.
영국 인상주의와 프랑스 인상주의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전시였고 도록도 훌륭하다.
예술은 드라마나 영화, 수다 떠는 것, 맛있는 음식 등등처럼 삶을 자극하는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다.
<재미>가 느껴진다는 말이다.
약간의 배경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tv처럼 일차적으로 접근하기는 다소 어렵지만, 어쨌든 스노비즘이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삶을 자극하는 기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여운이 오래 남는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오락보다 한 단계 높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고상하고 다른 것들에 비해 월등하게 우월한 분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확실히 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굉장한 기쁨을 주는 놀라운 매체임은 확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술관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 전시회 관람에서 현대미술 감상까지
크리스티안 제렌트 & 슈테엔 T. 키틀 지음, 심희섭 옮김 / 열대림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한 마디로 별로...
서점 신간 코너에서 보고 산뜻한 디자인에 <미술>도 아닌 <미술관>을 주제로 삼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으나 내용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너무 가볍고 비판적이라 나같은 미술 초보자에게는 오히려 부담스럽게만 읽힌다.
현대 미술이 자본에 의해 좌우되고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작품의 예술성이나 질보다는 파격성, 개념 파괴, 혐오감 부추기기 등으로 나가고 있음은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점이긴 하지만, 이제 겨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초보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 같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잘 감상할 수 있을지, 작품은 어떻게 보는 것인지, 나만의 작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정석다운 안내서를 원했던 나로서는 비판 가득한 책이 영 반갑지가 않다.
물론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많이 공감했고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가?
전시회장에 걸리면 바로 예술이다는 저자들의 자조적인 대답이 오늘날 예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말해 주는 것 같다.
낸시 랭을 과연 예술가가 할 수 있을까의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잔 남자들의 이름을 빼곡히 도배한 침대를 버젓히 작품이라고 전시한 트레이시 에민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예술이야 말로 이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진정한 대중적 상품이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디 워홀의 전시장에 가서 감동을 받고 팝 아트에 관심이 생기고 현대 미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걸 보면 단순히 비싸게 거래되기 때문에, 시장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덩달아 나도 감동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의 문제제기처럼 왜 제프 쿤스와 데미안 허스트는 인정받고 다른 작가들은 억만장자가 되지 못하는 걸까?
그들이 다른 동시대 작가들은 넘을 수 없는 뛰어난 예술성을 가지고 있어서?
물론 단지 그것만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인정받고 못 받고의 차이는 단순히 시장의 선택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상당 부분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 100% 예술적 재능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51%의 재능과 49%의 엔터테니너 기질만 있으면 된다는 데미안 허스트의 말이 솔직하게 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