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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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다른 시각을 기대했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반론의 여지가 많았다는 것.
고종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고 이태진 교수의 주장, 고종은 군주로써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것은 일제의 잘못이다는 관점은 나 역시 매우 비판적이다.
KBS 역사 프로그램에서 이태진 교수의 입장에서 고종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했던데 그 때도 굉장한 반발심을 느꼈고 책을 읽으면서 역시 고종은 망국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 앞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명백한 책임을 져야 할 최고 지도자임을 확인했다.
<궁궐의 눈물, 백년의 침묵> 이라는 책을 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한 후 황제국에 적당한 격식을 차린다는 이유로 엄청난 국고를 쏟아 부은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대한제국의 건원칭제를 대단히 자주적인 사건으로 언급하지만, (마치 조선도 황제국이었다, 이런 식으로) 10여 년 안에 결국은 식민지가 되고 말아야 했던 현실에서 황제가 된다는 것이 재정파탄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정말 회의적이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은 황제의 전제권을 강조한 매우 반동적인 체제였다.
개혁파와 시대의 흐름이 원했던 입헌군주제를 고종은 굉장히 싫어했고 자신의 권력을 뺏어가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독립협회와 틀어진 것도 이런 시각차 때문이었다.
저자는 고종이 권력의 사유화에 몰두했다고 통렬하게 비판하는데 그간 고종이 보여준 일련의 행태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이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유교적 군주의 왕권강화와는 전혀 다른 1인 절대 권력을 지향했기 때문에 말년에 남은 사람은 정상적인 국가 체제에서는 절대 관료가 될 수 없는 일종의 친위부대만 남았다는 것이다.
고종이라는 전근대적 인물에게만 이런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일견 불공평해 보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흐름에서 벗어난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영조나 정조나 왕권강화 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한 것이 고종의 불행이라고 할까?
고종 독살설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 저자의 시각이 어떤지 궁금하다. 

소현세자나 효명세자에 대해서는 명백한 독살설이라고 단정짓던데 그렇다면 과연 독살이라는 의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왕이 누가 있겠는가?
소현세자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청에서 돌아온 후 급사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보여준 아버지 인조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조 대왕과 친인척> 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바로 당시 정치 상황이었는데, 뜻밖에도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는 반청파였고 봉림대군의 장인 장유는 비교적 청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자점의 입장에서는 반청파인 강석기 쪽 보다는 봉림대군이 더 편했을 것이다.
효종은 즉위한 후 김자점 일파를 축출했지만, 소현세자의 급사 이후 왜 원손이 아닌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분명히 언급해야 할 것이다.
효명세자의 독살설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한 거라 더 어리둥절 하다.
스물 한 살에 갑자기 죽은 게 문제가 된다면 열 아홉에 즉위하자마자 사망한 예종은 어떻고, 정조와 경종은 또 어떤가?
재위 1년을 못 채우고 죽은 인종은 정말 계모가 준 떡 먹고 급사한 것은 아니고?
이덕일씨의 관점을 싫어하는 이유는 이런 저런 가설과 추측이 지나쳐 자의적인 역사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이 독살설이야 말로 정말 경계해야 할 문제 같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평가는 뜻밖이었다.
안중근 열사가 저격한 조선 침탈의 일등공신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선의 식민지화 대신 그 보다 약한 단계인 보호국 정도를 원한 온건파였다고 한다.
이 점은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은데 다른 책에서 읽기를, 안중근이 저격할 때만 해도 이미 정계에서 은퇴한 상태라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했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 라는 미국인의 저서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 행로에 대해 읽긴 했으나 일본 정치사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라 조선 문제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던 것 같다.
과연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을미사변을, 일본의 강경파가 저지른 실수라고 생각한다.
고종과 러시아의 결탁을 끊고 왕을 공포에 몰아 넣기 위한 지나친 제스쳐 때문에 오히려 반일 감정이 확대되고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이라는 반동적인 결과가 나타났다고 했는데 을미사변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같아 신선했다. 

저자는 자꾸 왕조 국가에서 명이나 청에 대한 사대 관계가 현재 대한민국의 미국 종속보다 훨씬 약하다고 주장하는데 전근대적 국가의 책봉 문제와 현대 국가의 미군 주둔이 어떻게 같은 관점에서 평가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하지만, 이런 과도한 비유는 정말 신중하고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맥락이 다른데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한 가지 저자의 관점에서 동의했던 것은, 명이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한 것이 단순히 자국 보호라는 순망치한의 논리보다는 기존의 사대 관계에 입각해 조선을 보호하려는 전통적 의리 문제도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보통 한국 학자들의 임진왜란 관련 책을 읽어 보면 명의 출병을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 때문이라고 일관하고 실제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는 점만 강조하는데 지나치게 한쪽 면만 본다고 생각한다.
왜 명이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 숭명반청 의식이 강했는지는 충분히 생각해 볼 문제다.
단지 선비들이 주자학에 빠져 명분만 외치는 바보들이어서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실학이 근대 지향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반드시 모든 근대화가 서구식이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실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근대화가 결국은 산업화를 동반한 서구식 모델을 받아 들이는 것이라는 점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지 않을까?
세계화란 결국 서구식 모델의 수용이 아닌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서구식 산업화가 아닌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산업화가 아니라면 궁극적인 사회 변화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왕조 타도와 민주주의, 인권 사상, 개인주의 이런 일련의 모든 사성적 변화가 주류가 되는 것도 산업화를 통해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개인의 권리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식민지라는 불행한 경험을 통해 근대화를 이룩해야 했던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모든 제국주의 피해국에서는 이 문제가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옳고 그름을 떠나 산업화를 배제한다면 궁극적인 근대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자꾸 주장하는 서구식이 아닌 다른 형태의 근대화는 어쩐지 공허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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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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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봉승씨라고 하면 조선왕조 5백년의 그 작가가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 이 시리즈를 재밌게 읽었었고 좀 더 나이가 들면서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흥미 위주의 야사를 다룬 책이 아닌가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문묘 18현> 이라는 주제가 좋아 읽게 됐고 내용은 성실하지만 지나치게 평면적이라 솔직히 지루하다.
그렇지만 조선 왕조 5백년 동안 선비들의 표상으로 시대와 당파를 초월하는 존경을 받았던 선비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알게 된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인용된 상소문들은 솔직히 원론적인 얘기가 너무 많고 배경지식이 부족해서인지 저자와 같은 감동을 받지는 못했다.
일두 정여창이나 회재 이언적 등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니라 문묘에 종사됐는지 전혀 몰랐다.
비교적 당쟁이 적었던 조선 초기에 살았던 분들이라 인지도가 떨어졌던 것 같다.
조선 이전의 위인으로는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가 있고, 조선 중기 이전에는 다섯 분의 선비들이 동방5현으로 문묘종사 됐는데 길재의 학풍을 이은 한훤당 김굉필, 기묘사화의 주인공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그리고 화폐의 주인공까지 된 이황이다.
나중에 문묘종사된 분들로는, 이황과 함께 중국의 성리학을 조선의 것으로 토착화 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율곡 이이, 같은 기호학파를 이끈 우계 성혼, 하서 김인후, 그 유명한 송시열과 송준길, 예학의 대가 김장생과 김집 부자, 소론을 이끈 남계 박세채가 있고 다소 의외의 인물이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사망한 조헌이다.
이 분은 선비로서의 이미지 보다는 의병장으로서의 무인적 느낌이 강한데 의외로 성리학자로서 존경을 받았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전에도 선조에게 도끼를 지고 와 상소를 올릴 만큼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고, 그 때 미움을 사 먼 함경도 땅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전쟁 후 1등 공신으로 책봉됐는데 종묘에까지 배향된 점은 정말 의외다. 
당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좀 더 알아 보고 싶다. 

저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의 강직한 성품과 학문을 대하는 신실한 태도, 예로써 사회의 질서와 안정을 바라던 예치, 도덕 정치에 대해 강한 믿음을 보이지만, 그 꼿꼿하고 올곧은 태도에 감동하면서도 교조주의로 흐를 수 밖에 없었던 성리학의 한계에 대해서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이런 논쟁이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선조의 아들인 광해군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올랐다.
그렇다면 인조는 선조의 왕통을 계승한 것이니 실제로는 할아버지인 선조를 아버지로 칭해야 맞는가?
진짜 아버지인 정원군은 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게 당시 예론의 대가인 김장생의 주장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게 당연히 싫었을 인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그 중대한 시기에 무려 8년의 세월을 정원군 추숭 사업으로 대신들과 대립한다.
결국 인조는 친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종국에는 원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신다.
인조의 어머니인 계운궁이 사망했을 때 청의 침입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도 과연 인조의 상복이 어때야 하는지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김장생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기까지 한다.
저자는 법이 아닌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조선의 도덕정치를 칭송하지만, 민생의 현안에서 벗어난 이런 사상적인 논쟁이 주를 이뤘던 조선 후기의 정치 상황은 기형적으로 보인다.
후대에 일어난 갑인예송이 결코 특이한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이라는 유교적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부여했는지는 몰라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흐름을 주도할 수 있는 유연한 학문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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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된다는 것 - 아이 교육을 위한 부모의 작은 철학
볼프강 펠처 지음, 도현정 옮김 / 지향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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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귀여운 아이 표지가 인상적.
곧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 이 아이와 어떻게 조우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많다.
올바른 육아법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일단 부딪쳐 봐야 하겠지만, 광풍 같은 사교육 열풍에 휘둘리지 않기,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주기,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받아 들이고 사랑하기, 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과연 내가 대세의 흐름에 벗어나서 소신을 갖고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나도 다른 엄마들처럼 영재 교육, 영어 유치원, 고액 과외 이런 것들에 휘둘리지 않을까, 나도 그런 상업적인 교육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 세상에 없던 생명체와 처음 만나 어떻게 이 아이를 키워야 할지에 대해 많은 지혜를 얻었고 약간의 용기도 생긴다. 

결국 제일 중요한 것은 부모가 모범을 보이는 것, 행동으로서 감동을 준다고 해야 할까?
나는 체벌과 권위적인 교육법에 반대하고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교육관을 가지고 있고, 책에 따르면 그게 세상의 흐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막상 주변에서 버릇없는 아이들과 그것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잘한다고 부추기는 엄마들을 볼 때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아이들, 큰 소리로 미술관 같은데서 떠드는 아이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쳐다 보는 엄마, 이런 광경을 보면 속에서 괜시리 부아가 치민다.
혼자 사는 세상인가, 지 아이만 소중한가, 저렇게 키워서 뭐하냐, 이런 짜증이 밀려온다.
책에서도 자유주의 교육관에 수반되기 쉬운 일련의 문제들, 즉 아이가 전제군주처럼 변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아이는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명령하는 전제 군주와 같다는 몽테뉴의 표현이 신선하다.
그러나 결국 부모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의 무한한 요구를 전부 맞출 수 없다.
또 종국에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사회의 구성원으로 적응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규칙과 절제를 배워야 한다.
모든 부모다 염려하는 것도 결국은 내 아이가 사회에서 잘 적응해 행복한 삶을 살길 바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일정한 경계선, 여기까지다라고 한계를 짓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경계선을 긋고 그 안에서는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 그리고 그 경계선을 조금씩 확대시키는 것,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최선일 것 같다. 

아이 역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금지와 규칙들을 체득해야 한다.
학교에 들어가면 당장 교사와 또래 집단으로부터 그 한계를 체험할 것이고, 그 전에는 부모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일종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
저자는 이 권위가 강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모범을 보일 때 아이가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된다고 했다.
마치 난파당할 것 같은 배의 선장이 흔들리지 않는 지도력과 안정감을 가지고 선원들을 격려할 때 그 선장을 믿고 의지하는 것처럼 말이다.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아이와 타협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종국에는 아이가 자기 규율을 습득하여 자신의 삶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가장 바람직한 목표일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은, 아이를 위한답시고 지나치게 미래에 매달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미친 사교육 열풍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도 아이에게 좋은 미래를 선사하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대부분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준비가 아니기 십상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 이를테면 아이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침해하고 학원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정말 아이의 미래에 바람직한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다.
중요한 것은, 이런 학습 매니저 같은 태도가 아니라 아이의 관심과 흥미를 지속적으로 자극하도록 많은 체험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긴 호흡으로 아이의 성장을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이 "긴 호흡" 이라는 표현이 참 마음에 든다.
아이는 자기만의 고유한 성장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른 아이와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결국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내 아이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라는 말과 통할 것 같다.
조급하지 않고 아이의 개성을 인정하면서 부모가 그리는 미래상을 버리고 아이 자체를 존중하는 것, 쉽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부모가 가야 할 교육 목표가 아닐까 싶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이만큼 헌신했다는 것을, 아이가 고마워 하고 보답하길 바라는 마음은 어떤 부모나 조금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이가 그것을 몰라 주면 서운하고 헛살았다는 회의감도 느낄 것 같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책의 표현대로 아이는 그런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란 적이 없고 순전히 부모가 좋아서 한 일인데 왜 내가 그것에 대해 고마워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 있다.
보답을 바라지 않을 때 비로소 호의가 가치있는 것이라고 했다.
주는 것만으로 행복한 사랑, 감사와 보답이 없어도 진정으로 기쁘고 즐거운 것, 그것이 부모 자식 간의 관계인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이 많았고 꼭 부모로서가 아니라 해도 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칸트에 따르면 교양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작업하는 거라고 했다.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을 교화시키고 도덕성을 발현시키고 좀 더 나은 사람으로 개선시키는 것.
나 자신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나를 비난하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항상 나는 약간의 자기비하 속에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질책하곤 했는데 이것도 성숙하지 못한 태도라는 걸 깨달았다.
칸트의 격언에 기대어 단지 지식 습득이 아닌, 진짜 교양인으로 스스로를 성장시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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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혜련의 파리 예술 기행 : 미술 건축 - 아는 만큼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곳, 파리 민혜련의 파리 예술 기행 1
민혜련 지음, 손초원 사진 / 21세기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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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그저 그렇다.
파리라는 도시에 대한 글쓰기로, 주제는 매혹적이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그냥 그런 수준.
여행기의 핵심은 모르는 곳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훌륭한 글솜씨가 아닐까 싶다. 
좋은 사진 보다는 좋은 문장력!
여행작가는 궁극적으로 훌륭한 에세이스트가 되야 할 것 같다.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처음 도착한 곳이 파리였는데 공원과 미술관이 워낙 많아 문득 여기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서울처럼 아주 크지도 않고 어디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적당한 규모의 도시.
책에 소개된 클로드 를루슈 감독의 영화 <남과 여>를 보고 프랑스를 동경하게 됐듯, 살아 보지 않은 도시에 대한 이미지는 책과 영화, 역사, 인물들에 대한 기억의 조각들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흔해 빠진 미술관 소개는 아니라서 뻔한 느낌은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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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 :2005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 한글자막 포함
베르디 (Giuseppe Verdi) 외,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Vienna Philh / 유니버설뮤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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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페스티벌 두 번째 작품이 <라 트라비아타>였다.
유명한 오페라인데 내용이나 축배의 노래 등 몇몇 곡만 알 뿐 실제 오페라는 본 적이 없어 무척 기대했다.
역시 베르디의 오페라는 대단하다.
모짜르트 보다 베르디가 오페라에 있어서는 한 수 위라는 생각마저 든다.
프랑스 사교계라는 배경이 말해 주듯 전체적으로 무척 들뜨고 흥겹고 화려한 축제 분위기다.
알프레도의 아버지가 비올레타를 찾아와 아들과 헤어지라고 강요하는 2막 1장이나, 비올레타가 결국 죽고 마는 3막은 말할 수 없이 비극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프랑스 사교계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 오페라를 보기 전에는 비제의 <카르멘>이 가장 흥겨웠는데 이제 정말 <라 트라비아타>를 좋아하게 될 것 같다.
베르디 바리톤으로 일컫어지는 제르몽의 노래도 정말 좋았다.
베르디 오페라의 특성은 남녀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 간다고 하던데 확실히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주고 받는 노래가 극의 중심을 이룬다.
비올레타가 죽기 직전, 이렇게 젊은 내가 죽어야 하다니, 알프레도 당신이 왔는데도 나는 살 수가 없네요, 그리고 마지막에 갑자기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하면서 죽고 말았을 때 돌아가신 할머니의 임종이 생각나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슬펐다.
<라 보엠>의 미미도 그렇지만 19세기만 해도 결핵으로 죽는 젊은 여성들이 무척 많았던 모양이다.
역시 가장 아름다운 곡은,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부르는 축배의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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