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쾌 송신용 - 평생을 책과 함께한 마지막 서적 중개상 틈새 한국사 2
이민희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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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일이 많아서 그런가 정말 책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를 못하겠다.
리뷰 쓰는 것도 책 읽었다, 이 정도지 길게도 못 쓰겠다.
갈수록 에너지가 소진되어 그런지,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너무 짧다.
점점 생활인이 돼가고 있는지... 

얇은 책이고 들고 다니면서 읽기 좋다.
책쾌가 뭔소린가 했는데 책벌레, 책 좋아하는 사람, 이런 의미가 아니라 고문서 중개상을 이르는 말이다.
요즘처럼 출판이 활발한 시대도 아니고 고전이 중시되는 구한말이었으니 서점이라는 대중적 장소보다는 개인을 통한 고문서 거래가 많이 이뤄졌던 것 같다.
사실 막연히 간서치 이덕무, 이런 느낌이 들어 조선 후기 무렵의 책만 읽다간 선비 얘긴줄 알았다.
의외로 시대적 배경이 최근이다.
대한제국 무렵이고 저자는 벼슬을 했던 형님 덕분에 조실부모 했어도 신식 교육을 받는다.
당시 유명했던 사람들이 동창에 선생님에 많았는데 나중에 책중개상을 할 때 이런 인맥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런데 구한말에 신식 교육 받은 사람이 워낙 적어 다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된 줄 알았더니, 이 책의 주인공 송신용처럼 평범하게 살다 간 사람도 있구나 하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는 건 참 대단한 일이다.
인물 자체의 삶은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이들의 삶을 재구성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갈수록 거시사 보다는 미시사에 초점을 맞추어 정말 대중사회가 되어 가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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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차림 문화 한 권에 담은 우리생활 시리즈 3
김상보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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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글을 참 잘 쓴다.
알기 쉽게 상차림의 역사에 대해 잘 설명한다.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다.
황혜성씨가 쓴 책의 12첩 반상 임금님 수라상에 대해 저자는 반대 입장이다.
사치 풍조가 심해지면서, 특히 구한말에 왕실 숙수들이 궐 밖으로 나가 요릿집 등을 열면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리는 문화가 형성됐다고 보고, 원래 전통적인 왕실의 상차림은 5첩 내지 7첩 반상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주장의 근거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을 모시고 수원에 가서 환갑 잔치를 벌인 기록, <원행을묘정리의궤>다.
영정조대로 넘어 오면서 더욱 검약 풍조가 강조되어 밥과 국이 중심이 되고 침채, 즉 채소소금절임과 젓갈, 구이 등이 추가된 5첩 반상이 기본을 이뤘다고 한다.
이 때 5첩 반상이라고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반찬 뿐 아니라 밥이나 국 등도 포함된다.
학교 다닐 때 가정 시간에 5첩 반상이라고 하면 밥, 국, 장, 김치 등의 기본 그릇은 제외하고 순수하게 반찬만으로 갯수를 센다고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적어도 조선 후기까지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이 점이 새로웠다. 

저자는 한국의 전통 밥상은 절대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 버리는 음식이 많은 호화로운 식단이 아니라, 밥과 국만으로도 충분히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검약하고 간소한 상차림이라고 강조한다.
생각해 보면 밥이랑 국에 김치 하나만 있어도 한 끼 식사로 충분히 든든하다.
영양적으로도 탄수화물과 비타민, 무기질, 단백질이 있으니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어쩐지 반찬이 적으면 못 먹는 느낌이 들었는데 시각적인 효과일 뿐 부족한 식단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한정식집에 가면 수십 가지 나오는 반찬에 포만감을 느끼고 버리는 반찬이 많아 아쉽다고만 생각했는데 밥과 국만으로도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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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낳은 후궁들 표정있는 역사 8
최선경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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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다른 책을 훑어 보다가 다시 읽고 싶은 충동에 재독하게 됐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맞춰 지나친 상상은 자제하고 성실하게 저술한 점을 높게 평가한다.
사극 등을 통해 너무 많이 알려진 인물들이라 뭐 새로울 게 있을까 싶었는데 읽어 보니 재밌다.
사료 해석이 이렇게도 다를 수가 있구나 싶었던 부분은 <동이>라는 드라마로 유명해진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출궁에 관한 부분이었다.
숙종은 자신이 살아 있는데도 숙빈을 이현궁에 내보냈다.
이 점이 참 궁금한게, 조선 시대 후궁들은 왕이 죽고 나서 출궁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왜 아들인 연잉군이 아직 혼례를 올려 나가 살지 않은 상태인데도 먼저 내보냈냐는 것이다.
다른 후궁들도 그런 경우가 있는지 특별한 사정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종성씨가 쓴 글에 따르면 숙빈에 대한 애정이 식어서 내보내고 이현궁이 크다는 이유로 후궁에 걸맞지 않다고 후에 연잉군에게 줬다고 되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정반대로 해석했다.
숙빈에 대한 총애가 변함없어 사관들이 크다고 지적할 정도의 규모인 이현궁을 내려줬고 연잉군이 출합한 후 같이 살게끔 배려했다는 것이다.
이래서 역사 해석은 함부로 할 게 아니다.
흥미로웠던 인물은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로, 정조가 후사가 없자 정식 가례 절차를 통해 얻은 후궁이라 입궁 당시에 이미 수빈이라는 첩지와 가순궁이라는 궁호까지 받았다.
그녀는 모두의 소원대로 아들을 낳았고 딸까지 낳아서 정조에게 유일한 1남 1녀를 낳아 준 아내가 된다.
시어머니인 혜경궁이나 중전인 효의왕후와도 잘 지냈고 검소한 성품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검소한 인물의 친정 오라비 등은 급격한 출세에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역사의 평가에 이면은 늘 존재하는듯.
정순왕후도 손자며느리인 수빈을 매우 총애했다고 한다. 

의외로 왕을 낳은 후궁들은 사대부 출신이 많았던 것 같다.
성종의 후궁으로 나중에 중전이 된 정현왕후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는 궁녀로 입궁해 후궁이 됐다고 한다.
양반가의 여식들도 궁녀로 입궁하는 경우가 많았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유교적 명분 사회였던 만큼 후궁인 어머니를 추숭하는데 왕들은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심지어 광해군은 무려 14년에 걸쳐 어머니 공빈 김씨의 추숭 작업을 하여 기어이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명나라에서 고명까지 받아 온다.
인조도 병자호란이라는 엄청난 국난을 앞에 두고도 아버지 추존 문제로 신하들과 대립했다고 하니 이 문제가 정통성과 국왕의 권위 확보에 얼마나 중요했는지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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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사후 63년 - 세도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 서남동양학술총서 45
박현모 지음 / 창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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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많이 했으나... 재미가 없다.
박현모씨 책은 예전에 나왔던 정조의 정치 철학 관련 책도 퍽 어렵게 읽었는데 이번 책도 학술적인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썩 재밌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임용한씨처럼 사실들 속에 숨은 행간을 읽어 주는 스타일을 원하는 것 같다.
비전문적 독서가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인가?
세도정치로 조선의 공론 정치가 완전히 몰락하는데 정조의 역할이 컸음은 이미 전작을 통해 알고 있었다.
정조는 노론 독재를 막기 위해 왕권을 강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산림이나 언관들의 입지를 상당히 축소시켰는데 어린 왕이 연달아 등극하면서 조선의 전통인 여론 수렴이 약화되어 결과적으로 한 가문에 세도가 몰리는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영조나 정조 같은 걸출한 군주가 출현했으면 조선 후반기는 또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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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국가의 회화 - 조선시대 궁중회화 1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1
박정혜 외 지음 / 돌베개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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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으면서도 다소는 지루한...
학술도서의 한계 같다.
궁궐이나 왕실 문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학 군주로서의 조선 시대 왕들은 상당한 문화적 소양을 가졌음을 알게 됐다.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은 조선 시대 후반기로 가면 선조나 숙종, 영조, 정조 등은 미술이나 서예 부분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본인들이 남긴 작품들도 많은 편.
허망하게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유럽 왕실처럼 미술관 등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화재로 많은 작품들이 소실되어 심지어 어진마저도 남은 것이 겨우 몇 점에 불과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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