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천년을 가다 - 역사학자 4인의 문명 비교 탐사기
박한제 외 지음 / 사계절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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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의 서울대 사학과 교수들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기행문 형식을 빌어 집필한 책.

한국일보에 연재됐었다고 한다.

박한제씨의 역사기행을 재밌게 읽어서 책의 집필진 중 한 명으로 있길래 같이 읽게 됐다.

보통 여러 명이 기술하면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고 주제의 통일성도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13세기 유라시아라는 분명한 주제가 있고 전공자들이 그런지 퍽 수준있는 책이 됐다.

신문에 칼럼으로 연재하는 글은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내용의 깊이가 얕다는 단점이 있는데 유라시아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유라시아 하면 13세기 몽골 제국에 의해 이루어진 팍스 몽골리카나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막연히 몽골은 잔인한 유목민 부대가 중국과 유럽을 뒤흔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서구 혹은 중화주의 사학자들의 일방적인 매도임을 새삼 느낀다.

고려가 몽골과 항쟁하고 급기야는 부마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몽골에 대해서는 우리도 박한 평가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정복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늘 있어 왔고 칭기스칸과 그 후손들이 유라시아 대륙을 뒤흔들면서 건설한 제국 덕분에 무역로가 확장되어 구세계가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몽골의 위상이 과거 역사에 비해 축소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를 못 받는 것 같아 아쉽다.

유목민이라고 하면 막연히 천막 치고 돌아다니는 떠돌이 느낌을 받았는데 이것이야 말로 중화주의적 시각임을 깨닫는다.

몽골 제국사에 대해 좀 더 공부해 봐야 할 듯.

박한제 교수의 역사 기행을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 5대 16국이면 혼란기라고만 생각하고 이른바 오랑캐들이 난립했던 시대라고만 여겼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편견이었는지, 또 그 당시 중국이 대내외적으로 얼마나 확대되었는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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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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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과학자가 되었나> 와 비슷한 느낌?

같은 편집자의 책이라 그런가?

열 여섯 명의 과학자들이 여러 관점에서 지적 설계의 모순을 지적하고 진화론의 타당성을 설파하고 있다.

약간은 산만하고 깊이가 얕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런대로 재밌게 읽었다.

나는 진화론의 확신범이기 때문에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지만 오히려 왜 여전히 사람들은 창조론을 믿는지 궁금해서 이런 류의 책을 읽게 된다.

이른바 자연과학을 한다는 사람들 조차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여전히 창조론을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교회 부흥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미국의 유명 대학 천문학 교수라는 분이 나와서 여호수와가 팔을 들어 해를 멈추게 했다는 성경 구절이 천문학적으로 어떻게 옳은지를 설명하는 걸 듣고, 미국 교수라고 해도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 있구나 깨달은 적이 있다.

단지 개인의 권위 하나만 가지고 정설을 뒤집을 수는 없다고 할까?

넓게 보면 민간 요법으로 암을 이겼다든지, 어떤 의사가 알려진 것과 다른 치료법을 주장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사이기 때문에 신뢰해야 된다는 말도 틀리다.

과학이 자연법칙을 설명하는데 막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수많은 동료 과학자들에게 끊임없이 검증을 해야 하고 수많은 반증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 과학 그 자체가 갖는 권위 때문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을 달에 보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창조론과 교회가 맹위를 떨치는 것은, 책에 나온대로 유사가족에 대한 애착 때문인 것도 같다.

특히 이단이라 불리는, 극렬한 종교적 열정을 공유한 집단들이 이런 경우가 많은데,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 위안을 얻고 같은 믿음과 의식을 공유함으로써 남들과 다른 우리라는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무리짓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봐도 모여서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는 이 교회라는 집단이 사라지기는 참 어려운 일 같다.

또 사람들은 과학이 종교를 공격하고 짓밟아 버리면 도덕도 함께 붕괴될 것이라 우려한다.

지적 설계론, 혹은 창조론에 동의하는 대중의 심리 속에는 종교가 도덕을 지탱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숨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티븐 핑커의 지적대로 과연 종교가 도덕의 기반이 될 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다.

오히려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을 편협하고 불관용으로 이끈다.

우리와 다른 타인으로 구별짓고 그들을 비난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일상 생활에서도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일 거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새삼 느낀다.

정말 교인들이 도덕적 양심을 일반인보다 더 많이 지닌 사람이라면 오늘날 거대 교회를 둘러싼 돈에 관한 잡음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핑커의 지적대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도덕적 감각이 진화하면서 우리는 고대보다 훨씬 더 자비로워졌고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다.

신분제가 철폐되고 육체를 잔혹하게 처벌하는 형벌도 사라졌지 않은가.

종교와 도덕의 분리야 말로 종교의 속성을 보다 정확히 보는 관점이 될 것 같다.

 

의식에 대한 과학적 증명에 관한 내용은 여전히 모호한 느낌이다.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죽음으로써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을 두려워 하는 감정은 확실히 과학만 가지고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 같다.

나 역시 한 때는 죽음에 관한 해결할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기독교적인 신을 의지하기도 했다.

내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내가 계속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후 세계를 약속하는 기독교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는 태어나기 전 의식이 없던 시절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고 그 때를 모른다고 해서 불안해 하지도 않는다.

또 어린 시절의 내가 과연 지금의 나와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저 기억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나가 같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제로는 바로 이 순간, 숨쉬고 생각하는 지금만이 온전히 나로써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은 과연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그 사람은 과거의 자신과 같다고 할 수 있을까?

결국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공포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잠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잠들어 있을 때 나라는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잠깐 동안 죽음과 유사한 상태에 이른다.

단지 깨어날 거라 예상하기 때문에 잠드는 것이 두렵지 않을 뿐, 그 상태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잠드는 그 순간 이미 죽은 게 아닌가.

 

시간이 흘러 종교관이 변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무신론자이고 종교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과학이 진보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은 사회적 울타리와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 종교를 버리지 못할 것이므로 불필요한 논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는 지적설계론을 공교육에 도입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은 일축해야 한다.

그야말로 중세로의 퇴보가 아닌가?

확실히 종교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힘이 좀 더 약화될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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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9 18: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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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우울할까 - 멜랑콜리로 읽는 우울증 심리학
대리언 리더 지음, 우달임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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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읽는 지루한 책.

잘 읽어 보려고 두 번이나 봤는데도 크게 와 닿지가 않았다.

정신분석에 관련된 책이었다면 안 봤을텐데...

어쩐지 나는 이런 무의식의 세계가 모호하고 말 가져다 붙이기 같은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일어난다.

나는 책에서 비판하는 인지행동치료를 더 선호한다.

저자는 우울증의 내면에 깔린 무의식의 세계를 분석해야 한다는데 사례로 드는 상황들이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정신분석을 받아볼까 생각해 본 적은 가끔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감정 변화가 심한 편이고 어떤 면에서는 양극성 장애가 아닐까 가끔 생각하기 때문에 내면에 숨겨져 있는 컴플렉스나 억압된 기제를 터뜨리면 좀 더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애도와 멜랑콜리아의 차이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데, 애도는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는 과정이고 멜랑콜리아는 상실을 안고 산다고 할 수 있겠다.

멜랑콜리아가 막연히 우울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만성 우울증과는 좀 다른 정신 상태인 것 같다.

확실히 이런 진단명이 붙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감정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왜나면 이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쉽게 공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약물적 치료를 선호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신분석으로 병적인 정신 상태를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프로작 남용에 대해 서문에서부터 비판하지만 프로작 같은 항우울제야 말로 정신병이나 우울증 등을 하나의 병적 상태로 인정해 주고 진정한 치료법을 제공해 준 해결책이라 보는 쪽이라 책을 읽는 내내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애도 반응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

가까운 이를 잃는다는 것, 이를테면 자식이나 배우자, 혹은 부모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는데 나 역시 최근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이런 과정을 겪었다.

엄마가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엄마 대신이었고 엄마에게 느끼는 애착을 나는 할머니에게 느꼈었다.

엄마나 아빠는 나를 위해 죽을 수 없어도 할머니는 나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는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순간순간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혼자 울 때가 많았고 삶이 허망하고 우울한 감정을 많이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들이 옅어지면서 이제는 할머니를 떠올려도 감정 기복이 크지 않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져 가는 것이 정상적인 애도 반응인데 멜랑콜리아의 경우는 상실의 슬픔을 안고 사는 경우로 끝없는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린다.

망자와 헤어지지 않고 망자와 함께 사는 것이다.

가끔 TV에 죽은 배우자의 무덤을 매일 찾아 보고 심지어 가상의 전화통화까지 하는 사람들이 소개되는데 이것이야말로 멜랑콜리아의 전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창한 장례의식을 행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왜 고대인들도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 조성에 수많은 노력을 쏟았는지 알 것 같다.

단순히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망자와의 헤어짐으로 얻게 되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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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의 덫
미키 맥기 지음, 김상화 옮김 / 모요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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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서의 허상을 파헤친 책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학술적이다.

한 때 감동하면서 읽었던 스티븐 코비나 앤서리 라빈스를 비판하는 글에서 뜨끔했다.

나 역시 그저 읽기만 했을 뿐 삶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뭔가 다른 삶을 꿈꾸면서 자극이나 내적 동기가 되지 않을까 자기계발서를 버리질 못한다.

"시달리는 자아" 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불안정한 노동 시장에서 끊임없이 고용 가능 상태를 유지하라고 닦달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을 학문적으로 파헤쳤다.

그래서 솔직히 지루했다.

 

제일 인상적인 부분은 개인의 성공에 가리워진 타인의 숨겨진 노동 측면이었다.

일례로 스티븐 코비는 무려 9남매를 뒀는데 이 많은 자녀들의 교육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티븐 코비처럼 전세계적인 명사가 집에서 자녀 교육까지 신경쓸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와 육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자신의 딸이 결혼 후 아이를 낳으면서 육아와 일에 허덕이자 시간관리 원칙을 바꿔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고 했다.

결국 직장에서의 성공에 올인하면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집안에서 아이들과 가사를 챙기는 조력자가 반드시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자기계발서들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

퇴근 후 세 시간, 이라는 책이 있는데 정말 묻고 싶은 것이, 퇴근 후에 세 시간 동안 자기 계발을 한다면 가사일과 육아는 누가 하라는 얘긴지?

하우스 와이프가 있는 남성이든지 혹은 미혼 여성에게나 해당되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결혼 전에는 가사나 육아 일의 비중을 생각지도 못했다.

나의 정체성은 한 사람의 직장인이고 직장에서 인정받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보니 일보다 가사와 육아가 우선시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특히 육아 부분은 인력을 사서 대신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부분이라 지금까지 맞벌이 여성들이 어떻게 가정과 직장에서 모두 성공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엄마의 경우 직장 여성이면서 세 아이를 낳았지만 전적으로 가사와 육아는 할머니가 담당했기 때문에 가능했고 나 역시 육아의 많은 부분을 가족들의 손을 빌리고 있다.

가족의 희생과 도움 없이 사회적인 성공과 가정에서의 행복이 양립할 수 있는지 정말 의문이다.

 

저자는 스티븐 코비의 윈윈 전략을 비판하면서 그는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회사 내의 고용주와 피고용주 관계를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갈등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데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들은 이러한 갈등 관계를 커뮤니케이션 등을 통해 없앨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시킨다고 해야 할까?

<네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 를 읽고 정말 감동해서 한동안 업 됐던 적이 있는데 역시나 이 인물도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생각만 바꾸면 세상이 변할 거라고 약간은 허황된 소리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자기계발서로 성공하는 사람은 그 책의 저자 뿐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지금의 무한경쟁 사회 구조 자체가 개인을 몹시도 압박하고 있는데 구조적인 문제를 바꾸는 것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말 잘 듣고 유능한 조직형 인간을 만드는 쪽으로 몰고 간다는 생각도 든다.

예술가가 되려면 댓가 따위는 초연해져야 한다는 식으로 정당한 노동의 댓가 지불에 인색한 이른바 예술 계통 산업들의 문제점도 공감하는 바다.

일례로 영화 산업의 스탶들 월급으로는 생활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명분으로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다른 노동을 병행하는 현실을 들 수 있다.

 

책에 특별한 결론은 없고 그래서 읽고 나면 답답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일터가 정말 자아 실현의 장이 될 수 있는가?

일과 여가의 분리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자기계발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일이 사적인 측면으로까지 연장되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은퇴 후에도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던데 정말 일이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적이고 행복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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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사는 나무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붓
강판권 지음 / 효형출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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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신청만 해 놓고 못 읽고 있다가 한참 만에 드디어 읽게 됐다.

표지는 약간 지루한데 안의 글자체는 보기가 참 편안하게 되어 있다.

눈이 피로하지 않다고 할까?

제목만 가지고는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에 관한 생태 보고서인가? 애매했는데 읽어 보니 산수화나 초충도 등에 관한 내용이다.

동양의 수묵화에 대한 에세이라고 할까?

산수화 중에서도 특히 나무나 꽃 등을 집어 감상 포인트로 잡은 점은 특기할 만 하다.

솔직히 나는 아직까지는 그림 속의 나무들을 제대로 구분하질 못하겠다.

기껏해야 능수버들이나 소나무, 대나무 정도?

화훼박람회에 다녀온 후 식물에 대해 급관심이 생기긴 했지만 딱히 어디서 가르쳐 주는 곳도 없고 혼자 책 보고 공부하기에는 어렵게 느껴져 아직은 섬세하게 분류하질 못한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식물도감을 열심히 볼까 싶다.

중국 수묵화에 대한 책도 열심히 보고 싶다.

장엄미라고 표현되는 곽희의 조춘도 등은 정말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조선 후기 화가들이 그림 교본으로 삼았던 개자원화보는 청나라 때 이어라는 사람의 별장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일종의 목판본인데 그림 구도 등을 잡는데 교과서로 삼았다.

강세황이 그린 <벽오청서도>는 개자원화보의 구도를 본뜬 것인데 채색도 없이 선만으로 그려진 인쇄물을 보고 어쩜 그렇게 담백한 채색을 가미했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벽오동 밑 정자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는 선비의 마음이 너무나 잘 살아나는 그림이다.

역시 대가들은 다르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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