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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후기 로마제국의 가난과 리더십
피터 브라운 지음, 서원모.이은혜 옮김 / 태학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평점 기준 나누기가 요새는 참 애매하다.
적당한 수준, 혹은 기본은 된다 싶으면 별 세 개, 좋은 책, 양서다 싶으면 네 개, 정말 이 책은 내 인생의 책이다 싶으면 다섯 개를 줬는데 너무 짜게 나누다 보니 대부분의 책이 별 세 개이고 네 개도 드물고 다섯 개는 미하일 칙센트미하일의 를 제외하곤 줘 본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기준을 좀 조정해 볼까 한다.
적당하거나 평범하면 세 개, 수준이 괜찮은 책이다 싶으면 네 개, 정말 훌륭한 책이다, 재독할 가치가 있다, 추천하고 싶다 싶으면 다섯 개.
뻔한 내용이거나 별 감흥을 못 주면 두 개, 이건 정말 수준 이하 싶으면 한 개.
그렇게 따지면 이 책은 당연히 별 다섯 개.
처음에는 200 페이지가 약간 넘는 얇은 분량에 깜짝 놀랬는데 제목이 상당히 어려워 걱정은 했었다.
서문에 보니 강연집 모음이라 만만한 기분으로 시작했는데 역시, 상당한 수준의 책이었다.
그러나 난해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훌륭한 저자는 절대로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이 책의 읽기를 방해하는 요인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 뜻밖에도 번역!
아, 정말 근래 보기 드문 수준 이하 번역이다.
이런 학술적인 교양서를 가끔 읽는데 한 번도 번역이 잘못 됐다거나 못 읽겠다거나 하는 느낌을 받아본 일이 없는데, 즉 그저 내 독해 실력이 부족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정말 이 책의 번역은 문제가 많다.
한글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구문이 많다.
두 사람이 번역했다는데 전문 번역가가 아니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기본적인 훈련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전공자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번역가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원서를 읽을 수는 없고, 다른 번역판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내용은 정말 훌륭하다.
후기 로마 시대, 더 정확히는 기독교가 공인된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의 로마 시대에 어떻게 기독교가 국교로서 성장하게 되었는지, 더 나아가 삼위일체가 단성설을 어떻게 물리쳤는지를 꼼꼼하게 기술한다.
제목이 약간 언밸런스 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제목 그대로 가난한 자, 즉 빈민들을 기독교에서 통솔했기 때문에 그 리더십으로 국교가 됐음을 보여준다.
주제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제목이다
흔히 기독교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는 말로 대표될 만큼 자선을 강조한다.
나는 이런 자선 행위가 종교가 사회에 갖는 기본적인 도덕적 기능으로, 특별하게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슬람 신자의 5대 의무 중 자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자선, 더 나아가 서구 사회의 자선은 매우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었다.
가난한 자는 단순히 헐벗고 굶주린 자가 아니라, 자유인으로서 권리를 갖고 있으나 재산이 없어 사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약한 자, 불쌍한 자를 뜻한다.
보통 빈민들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가난한 자, 비참한 자들은 폭동을 일으킬 힘도 조직도 없고 도덕적으로 도와야 마땅한 동정의 대상에 불과하다.
폭동을 일으키는 하층민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위험한 자로 분류된다.
이들은 신분도 자유민이 아니고 매우 거칠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동정과 선의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억압하고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
기독교 이전부터 서구 사회에서는 시민으로서 권리와 예절은 갖고 있지만 어떤 일로 재산을 잃은 빈자들에 대한 자선을 명예와 권력의 타당성으로 강조되어 왔다.
노블리스 오블리쥬의 개념이랄까?
빈자를 구제하면 사회에서 그만큼 위신이 서고 권력의 행사를 인정받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 사회의 기부 문화는 오랜 역사적 전통인 셈이다.
기독교가 들어온 후 이들은 상류층 대신 중간 계층을 포섭하여 이들이 빈자를 위해 희사하는 돈을 가지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시작한다.
즉, 국가 대신 교회가 빈자들의 보호자가 된 것이다.
bishiop 이라는 직책을 감독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이게 어떤 개념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감독이었다고 하는 걸 보면 사제나 주교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확실치가 않다.
어쨌든 교회는 기독교인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빈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선의 의무를 강조했고 직접적인 자선 대신 교회를 통한 자선을 강제했다.
바울의 공동체는 예수의 제자들이 이끄는 갈릴리 시골의 유대인 공동체와는 다른, 도시인들의 자조적인 경제 공동체였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 초기 공동체가 재산을 서로 공유하는 일종의 공산주의 사회였나 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모든 재산은 아니더라도 자선의 의무를 강조하면서 분배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경제적 공동체였던 건 확실해 보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에 면세 특권을 부여했고 교회는 이에 답하기 위해 빈민 구제에 더욱 힘을 쓴다.
구호소와 병원 등을 지어 부랑아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기독교의 자선이 자유민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유민만 보호의 대상이 돼고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라 그들이 알아서 신경써야 했다.
왜 서구의 노예제와 기독교가 양립할 수 있었는지 알겠다.
요컨대 기독교는 국가가 해야 할 빈민 구제를 대리함으로써 사회의 영향력을 넓혀 갔다고 할 수 있다.
즉 가난한 자들을 보호함으로써 리더십을 발휘하고 국가에 요구사항을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3장에 나온 예수 단성설은 다소 어려웠다.
단성설은 예수의 인성을 거부한다고 알려졌는데 읽어 보니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황제와 빈자 사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교회이듯, 하나님과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 즉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 예수라고 보는데 삼위일체설은 예수의 인성을 강조해 중간자 역할을 하지만 단성설에서는 그 매개체를 없애 버렸다는 오해를 받아 거부감을 불러 일으켜 결국 이단시 됐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했던 것은 하나님과 예수가 한 몸으로 완벽하게 결합되는 것이었지 결코 인성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 삼위일체가 단성설을 눌렀는지 궁금했는데 이런 사회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내용이 정말 알차고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 제국과 중세를 삼키게 됐는지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가난한 자에 대한 자선은 곧 유교 사회의 명분론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 강연은 이스라엘 학자인 아랍 테러분자에게 살해당한 메나햄 스턴을 기념하기 위해 10여 년째 지속되는 학술대회에서 한 것이다.
학자를 기념하는 얼마나 훌륭한 행사인가!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 볼 생각이다.
로마 제국의 사회구조를 이해하게 된 정말 좋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