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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와 궁녀들 - 청 황실의 마지막 궁녀가 직접 들려주는 ㅣ 걸작 논픽션 2
룽얼 구술, 진이.선이링 지음, 주수련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11월
평점 :
약간은 야사 같은 내용일 줄 알았는데 책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렇게 두껍다니...
600 페이지 넘는 책은 오랫만이다.
다행히 구술식으로 쓰여 있어 내용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너무 장황해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기분도 들고 당시 청 황실의 풍속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됐다.
글도 모르고 고관대작들이나 정치에 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게 차단되어 있었던 궁녀가 기술한 책이라 당시 청나라 조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큰 정보가 없지만 대신 실권을 쥐고 있던 서태후의 일상 생활을 살펴 볼 수 있다.
어쩜 이렇게 상세하게 구술을 하는지.
녹음기도 없이 수 년에 걸쳐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두꺼운 책으로 엮은 게 오히려 신기하다.
궁녀의 기억이 너무나도 세밀해 시간차를 두고 옮겨 적은 저자의 기억력에도 약간은 의문이 들 정도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청나라 궁녀들은 한족이 하나도 없고 전부 만주족 기하인인데 10대 초반에 궁에 들어온 후 25세 전후로 궁 밖으로 나가 결혼을 한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는 조선처럼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으나 후반기로 올수록 태감, 즉 내시들과의 결혼이 공공연히 벌어졌고 청나라 때는 제도적으로 결혼을 위해 궁에서 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태감은 한인이 있었으나 궁녀는 오직 만주족에서만 뽑아다고 한다.
기인이 만주족 귀족이라면 기하인은 이들의 노비라 볼 수 있는데 한족 보다는 우월한 신분이었던 것 같다.
국가에서 보조해 주는 돈을 아편이나 놀음에 탕진하고 인생을 망치는 기인들이 이 책에도 등장한다.
서태후라고 하면 독재자, 청나라를 멸망시킨 권력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옆에서 모신 궁녀의 눈으로 본 서태후는 꾸미는 것에 매우 관심이 많고 카리스마가 대단하며 세심하게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통 큰 여인이었던 듯 하다.
그 거대한 제국의 권력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고 두 명의 황제를 끼고 앉아 좌지우지 했던 그녀의 배포가 놀랍다.
정치가 여성에게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제를 통해 대신 권력을 행사했지만 한나라 초기의 여태후나 당나라 때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 등은 남자로 태어났으면 세상을 주물렀을 담대한 여자들 같다.
그러나 아무리 개인적으로는 카리스마가 넘치고 대단한 정치가라 할지라도 국가를 떠맡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비전과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부족했기에 결국은 사리사욕을 채우는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청말 혼란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앞으로 청 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 같은 미래 지향적인 사고가 과연 있었을까 싶다.
마치 한말의 민비나 고종처럼 말이다.
4장에 실린 서태후의 피난길은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한 편의 박진감 넘치는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서태후라는 한 개인을 위해 수많은 궁녀들과 태감들이 24시간 대기하면서 시중을 들고 이런 의식들이 법으로까지 규정되어 있는 걸 보면 왜 권력은 늘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수많은 대중들은 그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매우 전제적이던 중국 왕조가 결국은 혁명으로 쓰러지고 공산주의로 돌아선 배경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전제왕조를 무너뜨리는데 공산주의만큼 강력한 이념이 또 있을까.
너무나 상세하게 기술된 청말의 황실과 서태후의 일상사를 들여다 보면서 구한말에는 이런 구술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참 아쉽다.
이 책 역시 저자가 수 년에 걸쳐 궁녀에게 공을 들이고 이러한 이야기가 기록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애쓴 덕분에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명성황후를 보필했던 궁녀의 이야기, 이런 책이 발굴되면 구한말 우리 역사는 얼마나 풍부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