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에 서다 - 2천 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국인들
최진열 지음 / 미지북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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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꼭 재야 사학 같은 사이비 민족주의서 같은데, 내용은 아주 알차다.

중국에서 활약한 고구려인, 백제인, 발해인 등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흥미롭고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남북조 시대의 인물들이라 정말 유익했다.

특히 북위의 황제들의 어머니가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다.

가벼운 야사나 끄적이는 게 아니라 꼼꼼하게 사서와 당시 정황을 잘 분석한 본격적인 역사서이면서도 대중적인 흥미를 잃지 않아 정말 유익한 독서였다.

다만 각 장의 말미에 나오는 현대 정치사에 대한 언급은 출간된지 좀 된 책이라 그런지 시의성에 떨어지고 그다지 적절한 비교 같지도 않다. 

이미 평가가 끝난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는 학자로서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는 게 좋겠으나 여전히 진행중인 현대사에 대한 비평은 정말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상대적으로 고대사 부분이 전공 분야라 그런지 깊이있는 분석이 돋보였고, 뒤로 갈수록 특히 조선사 부분은 다소 맥빠지는 뻔한 전개라 아쉽다.


<인상 깊은 구절>

116p

고선지가 안서절도사로 발탁되었던 것도 번장들을 대거 중용했던 이림보의 인사 정책 덕분이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개인의 성공에는 그 자신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운도 따라야 한다. 이림보의 엉뚱한 생각이 아니었다면 고선지는 고작 중앙아시아 변방의 중견 지휘관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어쨌든 절도사가 된 고선지와 가서한 등은 뛰어난 전공을 세워 기대에 부응했다. 그런데 안록산은? 그는 성공한 정치군인이었다.

136p

삭방군은 환관들의 견제로 더 이상 활약하지 못했고, 신책군이 최정예 친위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실제로 신책군은 지방의 절도사 세력을 제압하는 데 활용되기보다는 황제의 후계 분쟁이나 환관들의 권력 투쟁에 더 자주 동원되었다. 그 결과 황제와 신하들은 환관의 사병이 되어버린 신책군의 기세에 눌려 오히려 정치의 들러리 혹은 관객으로 전락하고 만다.

139p

빈공과 합격자들은 일정한 자격과 지식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관리로 임용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사실상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부분 6두품 출신이었던 신라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학업을 마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당나라에 눌러 앉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68p

오래전부터 당나라의 법률 체계를 받아들인 동아시아 삼국의 통치자들은 치외 법권을 '오랑캐'들에게 적용하던 기존의 관행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즉 동아시아의 전근대적인 관념 속에서 치외 법권은 상대방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인들이 누렸던 자치권과 치외 법권의 의미를 오늘날의 관점에서 부풀리는 것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 부족의 산물일 뿐이다.

228p

따라서 충선왕이 이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 <원사>에는 충선왕이 카이샨의 즉위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현이 자신의 주군에게 충성한 나머지 그 역할을 다분이 과장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을 따라가보면 충선왕이 계승 분쟁의 주역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가담했다 해도 조연이나 엑스트라에 불과했을 것이다.

291p

물론 최부는 미신을 배격하는 성리학자로서의 자세를 꿋꿋이 지켰다. 최부 일행을 호송하던 명나라 관리들이 용왕묘에서 제사를 지내려 하자 최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참여를 거부했다.

"산천에 제사하는 것은 제호의 일이고 양반과 평민들은 다만 조상에 제사할 뿐입니다. 조금이라도 분수를 넘는다면 예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 산천의 신들에게 절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신당에 절할 리가 있겠습니까?"

312p

심지어는 복수를 법제화한 경우도 있었다. 부모의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행위를 私和라고 하는데, 이는 윤리적으로도 불효로 지탄받을 뿐 아니라 법적인 처벌도 받게 되었다. 특히 재물을 받고 원수와 화해했다면 가중 처벌을 받았다. 부모를 위한 복수라면 어떤 의미에서 권장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348p

만주인 사회에서는 군주만이 아니라 군주 씨족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정치에 간여했다. 그래서 심지어 누르하치가 아직 살아있을 때도 그의 아들들은 나라의 주요한 정책 결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주인들은 조선의 소현세자도 당연히 일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들을 조선 조정에 관철시켜주기를 바랐다. 예컨대 청나라의 황족 아제격은 소현세자에게 마치 그 자신에게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둘러대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세자의 정치 개입을 금기시하는 조선의 정치 제도 속에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충고였다. 소현세자는 단지 청나라의 요구 사항을 조선의 승정원에 전할 뿐이었고, 승정원은 이를 인조에게 보고한 뒤 다시 인조가 내린 지시를 세자에게 전해주었다. 

364p

당나라에서는 무예에 능한 이민족 출신들을 군인으로 발탁했기 때문에 능력만 충분하다면 무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문관인 행정 관료로 활동한 사람들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실무적인 능력보다 정치적 배경이나 문학적 능력이 출세에 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오류>

50p

고조는 선무제의 고모 고평공주와 결혼했다. 

->고평공주는 효문제의 딸로, 선무제의 고모가 아니라 누이다.

95p

표에 무사확의 손자들인 무승사와 무삼사의 아버지가 물음표로 되어 있어 누군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무삼사는 무사확의 장남 무원경의 아들이고, 무승사는 차남 무원상의 아들이다.

또 무삼사의 아들이 무승훈으로 되어 있는데 武崇訓, 즉 무숭훈이다.

258p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과 마찬가지로 목수 일에 취미가 있었다고 기록했다.

->목수 일에 취미가 있는 황제는 의종, 즉 숭정제의 형인 희종 천계제이다.

339p

강홍립의 가족들은 역신으로 몰려 모두 살해당한 뒤였고, 그 자신도 곧 벼슬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이 후금에게 항복하라고 밀지를 내렸다는 설은 잘못 알려진 것으로, 여러 정황상 13000명의 병사 중 5천명을 잃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는 것이 요즘의 정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강홍립이 후금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가족들 역시 고국에서 무사했고 이괄의 난 이후 후금에 투항한 한윤이 거짓으로 가족이 몰살됐다고 전한 사실 때문에 조정에서는 오히려 가족이 무사함을 알려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 인조는 강홍립이 중간에서 잘 조율해 주기를 기대하여 아들들에게 벼슬까지 내리고 이런 분위기에서 영구 귀국할 수 있었다. 1년 여 후 병사했고 인조는 비록 취소되긴 했으나 관작 회복과 장례용품 지급까지 명했다.

342p

중국 땅을 직접 밟아본 조선의 왕으로는 세조와 효종이 있다.

->태종은 왕자 시절 중국 사신으로 가 홍무제와 영락제를 알현했고, 현종은 심지어 중국에서 태어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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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유럽 역사산책 - 초승달과 쌍두 독수리
이기성 지음 / 북랩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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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이라고 하면 그냥 복잡한 동네, 코소보 사태, 이 정도가 아는 상식의 전부였는데 김철민 교수가 쓴 발칸 반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관심이 생겼고 역사의 중심이 되는 서유럽과는 상당히 다른 개성적인 곳임을 알게 됐다.

잘 모르는 곳이라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가벼운 여행기를 택했는데 생각보다 발칸 반도의 역사와 더불어 터키까지 알차게 정리해 준다.

저자가 발칸의 역사에 대해 꽤 많이 공부를 한 듯 하다.

가벼운 여행기와 발칸 역사가 비교적 고르게 잘 어우러진 책이다.

다소 아쉬웠던 점.

자세한 불가리아 역사 서술은 좋은데 불가리아 사람들이 터키를 싫어하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것에 대해 균형 감각이 부족하다고 가볍게 평하는 것은 좀 이상하다.

마치 외국인이, 한국인은 오랜 지배를 당한 중국에는 우호적이면서 겨우 36년 식민 통치를 받은 일본에 대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가볍게 서술하는 것 같다.

이웃 나라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가질 때는 오랜 역사적 근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인상깊은 구절>

91p

점령한 보스니아의 가톨릭 프란체스코회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허락한 이 칙령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특히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사례였다.

"나 정복자 술탄 칸은 만방에 다음과 같이 선포하노라. 보스니아의 프란체스코회는 술탄의 이 칙령으로 보호받을 것이다. 아무도 그들과 그들의 교회에 해를 가할 수 없다. 그들은 나의 영토 안에서 평화를 누릴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교회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다. 땅과 하늘을 지으신 성스런 신의 이름으로 나의 검을 들어 이 칙령을 선포하노라."

211p

이렇게 역량 있는 국가나 민족은 특정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행동한다. ... 물론 종교나 인종을 들먹이며 몰아가는 지도자들도 문제지만, 이들의 선동이 먹혀들어가는 사회의 내부 역량도 큰 문제라고 본다.


<오류>

305p

세르비아는 그나마 무라드 2세를 암살하는 기개라도 보였다.

->세르비아가 암살한 이는 무라드 1세로 무라드 2세의 증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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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인명이야기 - 신화와 성서가 낳은 인명으로 읽는 유럽 문화사
우메다 오사무 지음, 위정훈 옮김 / 파피에(딱정벌레)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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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보면 확실히 일본 사람들은 유럽 문화나 역사에 대한 조예가 우리보다 훨씬 깊은 것 같다.

근대화 전에는 중국 문명,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유럽에 대한 동경 때문일까?

유럽인들 이름의 기원에 대해 중세 역사와 함께 상세히 설명한다.

너무 자세한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갔고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분야인 유럽 중세사에 대한 기초 지식도 많이 얻게 됐다.

기독교와 더불어 그리스, 로마, 켈트, 바이킹, 슬라브 족 등 수많은 문화의 원류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국인의 경우 성씨면 몰라도 이름은 이런 기원과 무관하지 않을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39p

종교개혁은 일종의 원리주의 운동이라 해도 좋을 운동이었습니다. 복잡해진 전례를 폐기하고 성서 자체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신교권에서는, 복음서에서 예수에게 그냥 '여자' 등으로 불리며 별로 높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던 마리아 신앙이 부정되어 마리아게 감화받은 이름은 인기가 급속히 쇠퇴했습니다. 또한 성서 외전 등 유래가 분명치 않은 전설에 의한 성인의 성스러움이 부정되어 그들 성인에 감화받은 이름 등도 인기가 없어졌습니다. 대신에 인명의 출처로 사람들은 구약성서에서 근거를 찾게 되었습니다.


<오류>

113p

부르고뉴 공국의 호용공 필립은 잔 다르크가 활약했던 오를레앙 전투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던 인물입니다.

->장 2세의 아들 부르고뉴의 호용공 필리프 2세는 1342-1404년에 생존했고, 잔 다르크는 1412-1431년에 살았다. 잔 다르크와 관련된 인물은 필리프 2세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 3세인 듯 하다. 그는 잔 다르크를 생포했다.

142p

아우구스투스 교황의 딸도 율리아입니다. 그녀는 제 2대 교황이 되는 티벨리우스와 불행한 정략결혼을 하지만...

->교황이 아니라 황제로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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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왕과 왕비, 왕의 총비들의 불꽃 같은 생애
김복래 지음 / 북코리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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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백과 덕분에 좀더 자세히 유럽 왕실에 대해 알게 된다.

프랑스 왕실 소개 책은 흔치 않아 이 책이 유용하긴 한데, 의외로 소소한 오류들이 많다.

프랑스 근세 왕실의 시작인 프랑수아 1세부터 루이 16세까지 발루아와 부르봉 왕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쉽게 풀어 쓴다.


<인상깊은 구절>

25p

프랑스의 직물짜는 가난한 여공은 국왕의 석방을 위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그 분은 만인이 우러러보는 우리의 사치품이야. 우리는 오직 그 분을 통해서 꿈을 꿀 수가 있지!"

257p

공화주의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누려온 특권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이 소식이 왕실에 전해졌을 때, 왕비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교회, 교회, 그 다음은 바로 우리 차례일거야!"

258p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친한 친구였던 랑발 공비도 체포되었다. "왕비에의 충성을 부인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공비가 이를 거부하자 누군가 그녀의 머리를 여러 번 쇠망치로 후려쳐 그 자리에서 즉사시켰다. 

262p

왕비는 카페 왕조의 창시자인 위그 카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카페의 과부'란 별명을 얻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마리 앙투아네트'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단순히 '앙투아네트 카페' 또는 '죄수 280호'라고 불렀다.

267p

영국 등 유서 깊은 유럽 왕가를 언급하는 경우에 국민들은 아직도 한결 같은 애정과 존경심을 표시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 유럽 국민들의 무의식 속에는 신성성의 존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케케묵은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의식 저변에는 왕국의 번영을 위해 신이 무엇인가 역사를 하리라는 내재적인 신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동의와 국민의 애정으로 한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왕국의 여명기부터 위대한 신이 직접 손으로 그들을 축성했다는 것, 또 국민이 그것을 알고 인정했다는 암묵적 동의를 전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루이 16세의 죽음은 '성속의 분리'를 위한 상징적인 피의 제식이며, 또한 세속적인 계약의 전주곡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혁명 재판정에서 공화정의 시민들은 가장 증오의 대상이었던 왕비를 마음껏 비웃고 욕하며, 기독교 왕국이 '탈신성화'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오류>

16p

"루이 12세는 곧 마음을 바꾸어, 자기 사촌인 프랑수아와 혼인시키기로 작정했다."

->루이12세와, 프랑수아 1세의 아버지인 샤를 드 앙굴렘이 사촌이다. 그러므로 프랑수아 1세는 루이 12세의 사촌이 아니라 5촌 조카이다.

53p

"카트린 드 메디치는 교황 레오 10세의 조카딸이기도 했다."

->카트린은 레오 10세의 조카손녀이다.

60p

"어머니가 작고한 나바르 국왕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에, 마리 드 클레브는 앙리 드 나바르 어머니인 잔 달브레의 조카가 되었다"

->마리 드 클레브의 어머니인 Marguerite de Bourbon은 1516년생, 나바르 국왕인 앙투안 드 부르봉은 1518년생으로 국왕의 여동생이 아니라 누나다.

97p

"앙리 3세는 그가 아끼는 총신이며 매제이기도 한 주아이유즈 공에게 군대의 지휘를 맡겼다."

->주아이유즈 공은 앙리 3세의 매제가 아니라 동서다. 주아이유즈 공은 앙리 3세의 왕비인 루이즈의 이복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결혼했다.

100p

"브레타뉴 지방은 여전히 기즈 공과 마이옌 공의 동생인 메르쾨르 공작 필립 엠마누엘 드 로렌의 손아귀에 있었다."

->기즈 공의 동생이 마이옌 공이고, 메르쾨르 공작 필립은 이들과 6촌 관계다. 필립은 앙리 3세의 왕비인 루이즈의 이복 남동생이기도 하다.

178p

"멘 공작은 국왕과 멩트농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중 하나였다."

->멘 공작은 몽테스팡 후작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멩트농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던 듯 하다.

189p

"부르고뉴공은 손아래 형제가 둘이나 있었다. 바로 필립과 앙주공이다."

->루이 15세의 할아버지인 부르고뉴공의 형제가 바로 앙주공 필립과 베리공 샤를이다.

196p

"마리아의 아버지 스타니슬라우스는 1704년 폴란드 국왕에 즉위했다. 스위스 국왕 샤를 12세가 폴란드 영토를 점령하여, 1709년 스타니슬라우스는 권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스웨덴의 칼 12세가 폴란드를 침입하여 스타니슬라우스를 왕위에 세웠고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후원을 받은 아우구스투스 2세가 폴타바 전투 이후 다시 왕위에 올랐다.

195p

"섭정 오를레앙 공이 사망한 후 실권자가 된 부르봉 공은 젊은 국왕의 건강을 몹시 염려했다."

->부르봉 공이 도대체 누굴까 궁금했는데 찾아보니 루이 앙리 1세 콩데 공이다. 콩데 공보다는 부르봉 공이라는 명칭을 더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264p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여 싸우려던 레오폴드 3세가 그만 암살을 당하는 뜻하지 않은 비운이 생겼다."

->암살당한 이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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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되는 순간 - 메트로폴리탄 관장의 숨은 미술 기행
필립 드 몬테벨로.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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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열심히 읽은 책이다.

24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읽기도 편하고 내용도 대화체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다만 번역이 다소 어색하다.

미학에 관한 책들은 용어나 개념 자체가 현학적인 경우가 많은 탓이긴 하겠지만, 수동태 형식의 번역이 문장의 흐름을 종종 방해한다.

어쩔 수 없이 이런 책들은 번역보다는 한글로 출판이 많이 되야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편집도 고풍스럽고 도판이나 책의 질감도 아주 좋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꽂혀 있어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빌린 책인데 정말 간만에 좋은 책을 만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왜 그림을 보는가?

내가 처음으로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교 때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갔을 때다.

미술 시간이라고 해 봤자 수능 공부를 위한 들러리 정도로 밖에는 없었던 시절이라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고 그리는 것에 소질도 전혀 없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만 해도 어마어마한 인파에 치여 모나리자 형태만 대충 보고 도대체 왜 저게 유명한 것인가 의아했을 정도인데, 여행 마지막 날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보고 엄청난 문화적 충격을 받게 됐다.

이 책에 자세히 언급되는 원본과 복제본의 차이를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사진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질감, 물감과 붓질이라는 물질이 주는 강렬한 형식이 가슴을 심하게 뛰게 했다.

일종의 스탕달 신드롬이랄까.

또 크기가 주는 거대한 위압감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쇠라의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라는 대작이었는데 엄청난 크기가 주는 압도적인 느낌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조금이라도 더 그림을 보고 싶어 내셔널 갤러리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바람에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치기까지 했다.

그 후로 그림에 대한 관심을 이어 가고 있다.

책의 주제는 어떻게 그림을 감상할 것인가, 걸작의 기준은 무엇인가, 감식안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대화를 통해 풀어간다.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세계 최고의 박물관에서 무려 31년씩이나 관장을 지낸 분이라 정말 남다른 예술관을 아주 편안하고 겸손하게 풀어낸다.

인터뷰어인 저자 역시 미술 평론가인 모양이다.

단순히 인터뷰이의 말에 일방적으로 동의하고 받아 쓰는 수준의 흔해 빠진 인터뷰가 아니라 날카로운 질문과 평가, 자신의 의견 등을 더해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저자의 다른 책도 같이 읽어 보려고 한다.


<인상깊은 구절>

25p

"그는 현대의 기념물 예찬을 논하면서 '역사적 가치'와 '오래됨의 가치'를 구분했습니다. 후자의 경우 우리는 오래된 오브제를 그 세월 때문에, 즉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해도 그것에 자연과 시간이 가한 변화들 때문에, 사물과 우리를 갈라놓는 시공간적 거리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 때문에, 그리고 오래전에 그것을 만든 사람들에 대해 공감할 정도로 가깝게 느끼는 방식 때문에 가치있게 여긴다는 것이다."

26p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물이 살아남는 대략적인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 사물이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 시간의 영향을 견디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군가란 미술관이나 토스카나의 문화재 담당 부처와 같은 기관일 것이다."

27p

"아마도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미술관이나 그 밖에 다른 곳에서 보는 오브제들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호크니의 요약에 따르면, 이는 지난 시대로부터 보존되어온 특정 파편들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공동의 애정 같은 것이다."

32p

"그래서 2천년 뒤의 작품인 바르젤로 국립미술관에 있는 도나텔로의 조각처럼 새것 같아 보인다. 이것은 청동이라는 내구력이 뛰어난 재료가 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청동은 시간의 일반적인 효과를 무효화하여 수 세기, 심지어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을 거의 동시대의 작품처럼 보이게 한다. ... 호크니의 설명에 따르면 청동은 매우 단단한 물질이어서 사랑을 받지 않는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39p

"관람객들은 이름이 가진 명성, 즉 이 청동 문이 천국의 문 역할을 할 만큼 아름답다는 미켈란젤로가 말한 것으로 추정되는 말에 매료된다.기베르티가 이보다 먼저 제작한 청동 문이 세례당 근처에 있지만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46p

"이전에 비해 한층 더 비종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대중은 작품을 종교의식적인 오브제보다는 예술로서 평가합니다. 심지어 작품이 여전히 교회 안에 있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48p

"오브제나 그림은 우리가 그것을 보기 위해 찾아가고, 그것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음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59p

"제대로 보는 방법, 선입견을 버리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의 경우에 그것은 긴 학습 과정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관람객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미술관을 일종의 오락거리로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참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미술 감상은 대중문화가 제공하는 즉각적인 만족감과는 전혀 다른 참여 방식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미술관은 관람객들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줄 책임이 있습니다"

70p

"미술관의 아이디어는 전문 학술지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장 시험대에 올라가 언론을 포함한 다양한 대중의 열광이나 비난, 보다 나쁜 경우에는 무관심으로 평가됩니다. 큐레이터는 미술 작품을 학문적인 고찰의 원천으로서만이 아니라 작품 자체에 대한 일차적인 증거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술 작품을 구매할 때 큐레이터는 학문적인 연구와는 상당히 다른 렌즈를 통해 그것을 살핍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가치를 배분해야 합니다. 금전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미술사적, 미학적 가치까지도 말입니다. 내가 두초의 작품 구매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강조했듯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75p

"균질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루시안 프로이드가 라파엘로를 싫어하는 이유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무게나 피부의 질감이 없습니다. 당신이 그런 느낌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우리에게 라파엘로가 더 이상 신선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16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3세기 동안 모방의 대상으로 혹사당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작품은 <벨베데로의 아폴로>와 더불어 미술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작품들은 나자레파와 라파엘전파가 나타날 때까지 훌륭한 미술을 구성하는 기준이었습니다."

77p

"귀족적인 성격의 미술은 개방적이고 계급의식이 약한 오늘날 사회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1900년경 이전에는 대부분의 미술이 '높은' 계급의 특권이었습니다. ... 세속적인 후원 역시 화려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후원은 극빈자들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후원이 간혹 있었습니다. 신교를 믿고, 보다 시민사회화 된 네덜란드 사람들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여전히 교육적, 문화적 구분이 있었습니다. 1900년 이후, 실질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모든 것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98p

"미술사는 시각 문화 연구로 전환하고자 하는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대한 사람들의 이름들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미술 시장을 포함한 미술계에서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엄청난 액수의 돈'일 것이다."

110p

"우리가 미술관을 새로운 신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미술관에서는 적어도 오래된 미술을 새로운 감각의 準종교적인 경외심을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입니다."

111p

"동양에서는 숭배와 신앙이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남아 있는 정도가 서구보다 한층 더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서구의 개념입니다."

134p

"브뤼헐의 <갈보리 언덕으로 가는 길>처럼 많은 형상이 등장하고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 작품의 경우 아주 묘하게도 초기의 소장자들은 현대 기술이 오늘날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루돌프 2세의 컬렉션에서 황제가 날마다 (칸막이 없이!) 그림 가까이에 눈을 두고 작가가 예리하게 관찰한 일상의 세부 표현들을 하나씩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것을 즐겼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브뤼헐은 결코 정확한 몸짓과 자세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중략적이지마 순차적인 방식을 통한 이 같은 누적적인 작품 감상 경험은 어떻게 보면 그 작품이 우리가 몇 번이고 미술관을 다시 찾게 하는 걸작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159p

"루벤스는 성과 속, 물질과 정신을 동일한 열정과 열의를 가지고 다루었습니다.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를 그린 그림으로, 함께 있는 무리 중에는 가슴을 노출한 풍만한 막달라 마리아와 나이가 지긋한 강의 신 같은 성 제롬,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의 초상화처럼 통통한 수많은 아이들이 있습니다. 작품에 그의 세계. 곧 그가 좋아한 모든 것을 함께 모아놓은 듯합니다."

160p

"그의 스타일이 친숙하기 때문에, 그리고 수 세기에 걸쳐 무수히 모방되었기 때문에 루벤스가 대단히 독창적인 미술가라는 사실이 간과되기 쉽습니다. 사실 그의 작품은 대단히, 그리고 때로는 기묘할 정도로 상상력이 넘칩니다."

166p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일전에 내게 학문적 주제로서의 미술사는 평가에 의존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좋은 작품과 그보다 좋지 못한 작품을 구별함으로서만 '미술'을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180p

"나는 미술이 어렵고 주의깊은 감상과 몰입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드는 것이 어려운 설득 작업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미술관은 어떻게든 직원의 태도와 분위기, 전시 연출을 통해서 작품을 기꺼이 예리하게 보고자 한다면 큰 보람을 안겨주는 경험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작품은 관람객이 작품에 접근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점도 함께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롱의 반지를 30분으로 압축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술 작품은 짧은 순간에 눈을 통해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속기로 이야기해주리라는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미술은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만약 그 세계에 동화되거나 동화되고자 한다면 미술 작품은 해독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189p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0년 전에는 페르메이르의 이름이 브루인처럼 애호가들에게 낯설었다는 사실이다. 19세기에 페르메이르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미술사적인 명성의 예측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완벽한 예이다."

192p

"이 그림 앞에서 프루스트나 베르고트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그런 경험이 이른바 스탕달 신드롬입니다). 이 작품은 무척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림입니다. 어느 누가 기절해서 홀로 죽을 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205p

"식민지 시대 캄보디아 약탈이 이 대규모 컬렉션을 낳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결과 그 문명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졌습니다. 소급해서 적용하는 죄책감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는 이 시대에 학문과 지식의 측면에서 보상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소중한 유산으로, 그리고 반환 요구에서 국가의 '재산'으로 강력하게 주장되는 대상이 실은 과거에 본국조차 알지 못했거나 적어도 무관심했던 것들입니다. 객관성이 부족하기 쉬운 논의에서 핵심 질문은 앙코르의 사례처럼 문명은 파국적인 사건 이후에 쇠퇴하거나 그저 사라져버리는지의 여부일 것입니다. 무엇이 프랑스로 하여금 캄보디아의 '유산'에 대해 그 지역민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을까요? 힌두교 신들이 더 이상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들은 왜 그것을 국가의 '유산'과 '미술 작품'으로 보존해야 하는 것일까요? 국가의 유산과 미술 작품은 서구에서 유래한 개념입니다. 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런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제시할 만큼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26p

"이 부조는 한때 밝게 채색되었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나는 BC 1000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 부조들이 시간이라는 험난한 수술실에서 되돌릴 수 없게 변형된 채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압니다. 이 부조의 경우 수천 톤의 돌무더기 아래에서 수천 년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현재 돌 색을 띠는 부조를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이 돌 색 상태의 부조를 좋아합니다."

233p

"이 조각들이 오늘날 이슬람 문명의 지역사회와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땅속 깊은 곳에서 파내기 전가지 이 조각들은 그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렌체에서는 우리가 15세기의 사람은 아니라 해도 여전히 그 예술적, 문화적, 종교적 전통의 연속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사의 기념물은 그렇기 않습니다. 그것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입니다. 또한 '엘람, 메디아...'는 역사책에 나오는 명칭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반면에 피렌체의 빛과 풍경, 식물은 잘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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