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민의 한양읽기 : 궁궐 상 홍순민의 한양읽기
홍순민 지음 / 눌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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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전편 격인 도성 편은 실록 내용을 그대로 편집해 놓은 것 같아 지루했는데 궁궐 편은 아주 재밌다.

단순히 궁궐의 구조나 전각을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궁궐을 조성할 당시 사람들의 사고체계나 상황 등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함으로써 서문에 나온 저자의 말처럼 입체적으로 조선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듯 하다.

궁궐의 외형에 관한 책은 너무 많이 나오고 인터넷 검색만 하면 무수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반면, 궁궐이 어떤 사상이나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지어졌는지, 역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에 대한 분석은 전문가의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지식 같다.

흥미진진하게 정말 재밌게 읽었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궁궐을 방화한 것이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처럼 백성이 저지른 게 아니라 왜군, 특히 가토 기요마사의 짓이다고 추정해야 식민사학의 극복인가는 동의할 수 없다.

그 외 심증만으로 경운궁 화재를 러일전쟁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에 의한 방화라고 의심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외 부분은 궁궐과 그 안에서 삶을 영위했던 옛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했다.

특히 부록으로 실린 문화와 문화유산에 대한 정의는 쉬우면서도 명확한 이해를 돕는다.

육십간지의 앞 글자인 간에 해당하는 글자를 숫자 4부터 대입하면 맞는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역사를 워낙 좋아하고 연대를 외우면 비슷한 시대의 사건들을 같이 공부할 수 있어 어지간한 사건들의 발생년도는 거의 외우고 있긴 한데 (심지어 화가들의 생존 연대도 외우고 있다) 이 법칙에 맞춰 보니 힘들여 외울 필요가 없다.

이를테면 갑신정변은 간지인 갑이 숫자 4와 대응하니 1884년, 을미사변은 다음 숫자인 5와 대응하니 1885년, 정미의병은 간지인 정이 네번째이니 7과 대응해 1907년 이런 식이다.

정말 신기하다.

빨리 하권을 읽어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116p

우리 문화가 여러 면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런 까닭에 중국 문화와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149p

건물을 이해하고 그 느낌, 아름다움을 감상하고자 할 때 너무 부분에 매달려서는 곤란하다. 전체적인 인상, 느낌을 잡아야 한다.

172p

이중환은 당시 세력을 잃은 남인 계열에 속하여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야인으로 지냈다. 택리지는 그의 주요 저작으로 풍수적 자연지리를 넘어 인문지리서로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한 책이기는 하지만 택리지 역시 한 개인의 저작으로서 야사가 안고 있는 자료적 한계가 간간히 눈에 뜨인다. ... 역사적인 진실은 믿음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176p

자신의 의견으로는 찬성이지만,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매우 조심스럽고 다소 무책임하다고 할 태도였다. 하륜 같은 사람이 그토록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무학이 그런 태도를 취했던 것은 당시 불교의 형편과 그의 처지와 관련이 있다.

208p

비변사에서 계를 올려 아뢰었다. " ... 지금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고 전국이 텅 비고 고갈되어 있어서 아침에 저녁 일을 헤아리지 못할 정도입니다. 궁궐을 짓는 일은 지금 할 일이 아니며 사람들의 마땅치 않게 여길 것입니다."

214p

그 이전에도 터를 정하고 건물을 짓는 데 이러한 설들을 참고한 경우가 자주 있기는 하였지만, 그보다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신료들의 판단이 주를 이루고 그러한 풍수설, 길흉설 등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보조하는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7년 이후 크게 벌어졌던 궁궐 영건 사업에서는 오히려 그러한 술사들의 의견이 주류를 이룰 정도였다. 

250p

헌종 연간에 이미 흥선대원군은 종친의 핵심 인물이었다. 다만 왕권이 극히 약했던 그 시기 종친의 위상 역시 보잘것없었기에 종친의 핵심이라 해도 별 영향력은 없었다. ... 흥선대원군이 권력에 접근하게 된 일차적인 계기는 임금의 생부라는 자격을 매개로, 고종을 임금으로 결정한 대왕대비 신정왕후와 결탁한 것이었다. ... 경복궁 중건을 위한 이 영건도감이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는 기반이 되었다. ... 경복궁 중건 사업을 통하여 임금의 권위가 높아졌다기보다는 흥선대원군의 실권이 커졌다. ... 흥선대원군의 실각은 이러한 고종의 정치적 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292p

사랍답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후대로 이어지고 그렇지 못한 것은 사라진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 쌓여서 문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는 축적되는 속성을 갖는다. ... 문화는 그 문화가 빚어낸 삶의 꼴을 벗어나는 행위에 대해서는 제재를 가하는 구속력을 갖고 있다.

298p

문화를 이야기할 때 흔히 설정하는 인간 집단은 민족이라고 하겠다. 민족이란 어떤 집단인가? 민족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흔히 언어라고 말한다. ... 같은 말을 쓰면서 같은 공간에 모여 살다 보면 하나의 정치 체제, 달리 말하자면 한 국가를 이루게 되고, 자연히 서로 물자를 사고 팔면서 비슷비슷한 소비 생활을 하는 경제권을 이루게 된다. 그 결과 살아가는 모습, 곧 생활 습관이나 풍습을 같이 하게 된다. 그 안에서 혼인 관계를 맺고, 그 결과 혈통을 공유하고 비슷한 외모를 갖게 된다. 이렇게 어느 정도 오랜 세월을 지내다 보면 다른 집단과는 구별되는 "우리" 의식을 갖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 집단이 민족이다. 

300p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을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진 것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사회의 문화적 전통의 일부로, 인위적인 것들이 주가 되며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304p

안목은 어떻게 해서 생기는가? 안목의 출발점은 관심이다. 관심이 있어야 보인다. ... 직접 현장에 가서 답사를 하면 느낌이 생기게 마련이다. ... 이렇게 관심이 안목의 출발점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새로운 느낌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안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관심과 느낌에 뒤이어 이해가 따라야 한다. 관심에서 출발해서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면 그것에 관해서 온갖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 안목은 관심과 느낌에 더하여 정보와 지식을 밑거름으로 삼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 느낌과 지식은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느낌과 지식을 키우고, 그것이 쌓이면 자기 나름의 체계를 갖추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느낌과 지식이 어우러진 인식이 생겨난다. 인식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안목이 제대로 서게 된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고 책을 읽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여행을 가서 느낌이 생기면 제대로 알기 위해 돌아와서 책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쌓는다. 그러면 여행지에 대한 관심과 느낌이 지식으로 배가되어 인식의 외연이 확장되고 그 과정이 너무나 즐겁다. 이번에 교토를 다녀온 것도 그렇다. 유홍준씨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교토편을 보면서 교토의 문화재에 관심이 생겼고 직접 가서 보고 많은 느낌을 갖게 됐으며 다시 돌아와 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아, 그 때 봤던 게 바로 이런 의미였구나 하고 깨닫고 있다. 나는 아직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체계를 갖추는 인식의 상태까지는 못 간 것 같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 자체가 삶에서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이다)


<오류>

102p

제용감, 내자시, 사섬시 등 왕실에서 쓸 물품을 조달하는 관서들이

->사섬시가 아니라 내섬시다.

220p

인조는 자신의 잠저인 이현궁으로 옮겼다가~

->인조의 잠저는 상어의궁이고 이현궁은 광해군의 잠저였다. 반정으로 폐한 뒤 인조는 자신의 어머니 연주부부인을 이현궁으로 모신 후 계운궁이라는 궁호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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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 서울편 1 - 만천명월 주인옹은 말한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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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믿고 보는 유홍준 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

이번 일본 여행 때도 큰 도움이 됐고 최근작인 서울 궁궐 편도 역시나 만족도가 높다.

나같은 평범한 독자 수준에서 어렵지 않게 그러면서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동궐도를 늘 대충 봐서 어디가 어딘지 항상 헷갈리고, 특히 후원의 정자는 쉽게 눈에 안 들어왔는데 찬찬히 본문과 지도를 맞춰 보면서 읽어 나가니 이제는 확실히 감이 잡힌다.

창덕궁 후원 설명이 어찌나 맛깔스러운지 당장이라도 가 보고 싶다.

이번 교토 여행도 교수님의 답사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인상깊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독자로써 늘 감사드린다.

아쉬운 점은 동궐도의 전체 부분과 해설하는 부분을 매칭시켜 보여 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

본격적인 관광책은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만 구글 검색으로 지도 찾아 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래도 동궐도를 구입해서 같이 봐야 할 것 같다.


1) 세종은 정말 다방면에 천재적인 군주였던 모양이다.

세종 대왕의 업적 중에 아악 정비가 나오길래, 그냥 했나 보다 싶었는데 책을 읽어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루이 14세는 스스로 발레도 췄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던 세종이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니, 이런 분이 왕조 국가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러시아를 건설한 표트르 대제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해야 하나 싶다.

종묘제례 과정이 자세히 나오는데, 이를 보면 유학이 단순한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서양으로 치면 기독교와 비슷한 위치가 아니었을까 싶다.

일상생활의 의례를 규정하는 내용이 워낙 많아 종교가 아닌 마치 단순한 철학 같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상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었을까?

2) 조선 궁궐의 미학을 설명하면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나왔다는 "儉而不陋 華而不侈"를 매우 강조한다.

사실 그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오사카 도자미술관에 가서 한중일 세 도자기를 보면서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중국와 일본 도자기에 비해, 혹은 고려 청자에 비해 확실히 조선 백자는 좋게 말해 순박하고 얌전하지 화려한 매력이 없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주로 우리 백자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셋을 동등하게 비교해 놓으니 확실히 차이가 난다.

이런 검소함을 사대부들이 추구했던 것 같다.

유교, 특히 성리학 혹은 주자학과 상업은, 특히나 21세기의 자본주의와는 도저히 함께 갈 수가 없는 사상임을 새삼 느꼈다.

3) 승화루 서목에 따르면 3천여 점의 서첩과 화첩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왕실이 망하면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보관되어 있었다면 최고의 왕실 수장품으로 격조높은 작품들이었을텐데 정말 아쉽다.

그런 걸 보면 8세기 무렵의 왕실 수장품이 여전히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의 정창원은 정말 놀랍다.

읽다 보니 사도세자에 관한 부분이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위키백과 내용을 요약해서 쓴 것 같다.

요즘은 인터넷 검색이 너무 잘 되니 출처 표기에 매우 민감해야 할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지금 천석정에는 霽月光風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사랑하던 문구다. 송대의 문인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이의 고상한 인격을 칭송하며 그의 마음이 '화창한 바람, 비갠 달과 같다'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311p

육당 최남선이 <심춘순례>에서 선암사 강선루에 올라 정자에 걸린 다섯 편의 시를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고는 두 번 읽고 싶은 시는 없다고 한 대목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소리 내서 읽을 수 있는 시가 하나도 없구나'라고 해야 할 판이다. 이런 한이 있어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한문 강독 모임 세 곳에 참석하며 공부하고 있지만 마냥 어려운 것이 한문이다. 

(저자가 문화재청장 시절에 펴낸 책이 <궁궐의 현판과 주련>이라고 한다. 이럴 수가! 답사기 책도 좋지만 이 책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감사한 마음이 마냥 샘솟는다)


<오류>

38p

사도세자, 효명세자처럼 나중에 왕으로 추존된 분이 열 분이나 되기 때문이다.

->왕으로 추존된 분은 덕종, 원종, 진종, 장조, 문조 등 다섯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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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생활 - 비참과 우아
노승림 지음 / 마티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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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재밌고 알차다.

지루하게 뻔한 음악가와 화가들의 일대기를 늘어 놓지 않고 저자 나름의 비평을 가하며 위트있게 좀더 세속적인 관점에서 예술가들의 삶을 평가한다.

작품으로서 신화화된 예술가가 아닌 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니 훨씬 친숙하게 느껴진다.

인격적으로는 평범한 대중과 별 다를 게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위대한 작품으로 범인과는 다름을, 그들의 우월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더 강렬한 대비가 되는 듯 하다.

이를테면 혁명에 가담했다가 곧 복고주의자로 돌아선 바그너처럼 말이다.

휘슬러가 러스킨과의 분쟁 과정에서 그림은 스토리가 아닌 형태와 색채의 조화만으로 감상해야 하며 진정한 평론은 평론가가 아닌 예술가만이 할 수 있다는 예술지상주의 주장이 무척 와닿는다.

19세기 모더니즘의 시대를 대변하는 말 같다.

러스킨이 비판한 휘슬러의 작품이 "검정과 금빛의 녹턴:떨어지는 불꽃"이었다고 한다.

검색해 보니 정말 아름답다.

역시 러스킨은 라파엘전파를 옹호한 보수적 평론가답다.

이런 세련된 그림을 비난했다니, 과연 휘슬러가 소송까지 걸었을 만 하다.

한 손에 잡히는 적당한 사이즈의 판형이나 한 눈에 들어오는 편집이 인상적이다.

제목이나 도판은 좀더 매력적인 것으로 바꿨으면 낫지 않았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인상깊은 구절>

6p

베토펜이 귀족들과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역정이었지, 신분제를 향한 반발은 아니었다. 그는 귀족처럼 대접받고 싶어 했고 최종 목표는 오스트리아 황제를 섬기는 궁정 악장이었다. 그가 평민을 대하던 태도를 보면 좀 더 분명해지는데, 특히 가난한 고용인들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을 찾아볼 수 없었고 돈을 훔쳐갈까 늘 의심했다. 베토벤에게 고용된 하녀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걸핏하면 해고되거나 못 견디고 도망치곤 했다. 그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에게도 무례했다.

8p

여러 문헌들을 살펴볼수록, 처음 완성된 순간부터 명작으로 인정받은 예술품은 생각보다 드물었고, 작품만큼 고귀한 인품을 소유한 예술가는 더더욱 드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p

무엇보다 그가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사보나롤라의 예술관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예술의 유일한 기능은 오로지 종교적 교화뿐이라고 역설했다.... 미켈란젤로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명작이 이 불길 속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성서 속 이야기를 묘사하기에만 바쁜 예술을 경멸했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육체의 조화가 신앙보다 우선했으며 그럴 때 더 신과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다.

35p

19세기 갑자기 불어닥친 셰익스피어 숭배 열풍에 대해, 문화 평론가 자크 바전은 "19세기 독자들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대목과 숱하게 맞닥뜨렸지만 그들은 공개적으로 그 허물을 지적할 용기가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43p

렘브란트의 그림에 네덜란드 사회는 즉각 반응했다. 그의 그림은 발표되자마자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로도 계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심지어 그가 죽은 이후에도 시대에 뒤쳐진 퇴물로 대접받은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이는 그의 그림 값이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63p

륄리는 완벽주의자였으며 노력을 통해 대가를 얻어왔다. 그는 타인에게도 그만큼 양질의 능력을 기대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음악을 그런 식으로 대충 연주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101p

18세기에는 대장장이 아들이 음악가가 되어도 그리 요란 떨 일이 아니었다. 음악가는 대장장이만큼이나 미천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111p

시민혁명과 근대화가 코앞에 와 있는 시점에, 고야는 국왕에게 무조건 충성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자평했다. 왕실과 귀족의 사랑을 듬뿍 받는 와중에도 그는 틈틈이 자신의 천재성을 이용해 그들을 조롱하고 야유했다.

134p

블레이크는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한참 어긋나는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니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않는 것이 신사의 예의라고 여겼던 런던 사교계와는 처음부터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142p

예술가에게 돈은 명예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노동 계급이었고 그들에게도 당연히 부양할 가족이 있었다. 가장의 가장 절실한 임무는 가족을 부양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이든의 두 제자인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마찬가지였다.

222p

클라라는 작곡에 관한 한 자신보다 남편의 작품을 늘 우선순위에 두었다. 남편의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희생한 것은 그녀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칙은 슈만과 부부로 살 때는 물론 그가 죽고 홀로 미망인으로 생을 다할 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다방면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클라라의 상당히 예외적인 이면이 아닐 수 없다. ... 클라라는 남편이 죽고 난 후에도 끝까지 남편과의 의리를 지키며 악착같이 살았다. 슈만이 남기고 간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 이런 상황에서 클라라가 느꼈을 경제적 압박과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열심히 연주회를 개최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슈만의 피아노 작품을 연주했으며, 음악계 인사들을 만나 죽은 남편의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생전에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슈만의 이름은 그가 죽은 다음에야 아내 클라라에 의해 꽃을 피웠다. ... 슈만이 사망한 뒤 클라라가 여성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업적을 이루어내기까지 브람스가 삶의 큰 지주가 되어주었던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242p

그는 수업료를 일절 받지 않았다. 이러한 자본주의에 위배되는 거래에 대해 훗날 바그너 전문가 마르틴 그레고어-델린은, 바인리히는 훌륭한 제자가 성공하면 자신의 명성 또한 그만큼 높아지리라고 자부했을 만큼 바그너의 성공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바인리히의 안목은 결과적으로 옳은 것으로 판명이 났지만 기나긴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 이유는 음악적인 것이 아니라 바그너의 타고난 제멋대로 기질에 있었다. ... 비참한 가난은 부부 곁을 쉽게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그너 부부의 가난이 사업의 실패가 아닌 사치스러운 습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는 인간의 주인이며, 자신의 욕망만이 유일한 법이며, 자신의 능력은 소유의 전부이다. 그로 인해 성인은 홀로 자유로운 자이며 그보다 높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 바그너는 망명 과정에서 정치적 소신을 너무 쉽게 포기했다. ... 그런 일터를 잃은 그는 혁명이 자신의 밥벌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최대한 신속하게 전향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다니는 곳마다 자신은 혁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떠들어댔다.

258p

예술가들이 평론가의 입김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들의 평가에 의해 작품의 가격이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례가 그렇듯 평론은 시장경제의 법칙과 손을 잡으면서 사회 전면에 진출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259p

무엇보다 휘슬러는 설명적인 그림을 경멸했다. 그림이란 자고로 스토리보다 색채와 형태의 조화가 더 중요하며, 때문에 그림 제목은 그저 제목으로만 남겨야 할 뿐 그 제목을 통해 어떤 이야기도 그림 속에서 읽으려 해서는 안 되며 단지 색깔이 얼마나 조화로운지만 느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 그는 평소 붓이라곤 일절 들어보지 않은 이들의 입담과 필담에 화가의 생명이 좌우되는 게 크게 분노했다. ... 휘슬러는 "예술은 비평가가 아닌 예술가만이 온전히 비평할 수 있다"는 평소 자신의 지론을 강하게 어필했으며 ... 러스킨은 보티첼리를 좋아하는 보수적 취향의 소유자였으며 사회를 교화하는 예술의 기능적 가치를 중시했다. 반면 휘슬러는 파격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으며 예술은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어야지 그 외의 목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301p

건축은 돈이 많이 드는 예술이다. 가난한 대장장이 아버지를 둔 가우디에게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 가우디에게 구엘 백작은 신이 준 최고의 기회였다. 섬유 공장을 기반으로 부를 축적한 구엘 백작은 심미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 특히 화려함과 사치의 절정을 달리는 구엘 궁전에 대해서는 무제한으로 재원을 지원했다. ... 자금을 흥청망청 써대는 가우디를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구엘 본인이 아니라 구엘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이었다. ... 하층민 출신이었던 가우디는 노동조합이 건설한 산업단지에 참여할 만큼 가난한 이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스스로 예술가가 아닌 '장인'으로 불리길 바랐던 것 역시 노동의 신성함을 익히 알았기 때문이다. ... 젊은 시절의 가우디는 사치스러운 신사였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북유럽풍 외모를 타고난 그는 가난에 허덕거리면서도 몸단장을 잊지 않았다.

315p

이처럼 사업 수완이 좋았던 고흐가 훗날 화가로 전업을 한 뒤 자신의 그림을 한 점도 제대로 팔지 못해 좌절했던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고갱은 화가 피사로의 조언으로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고 서른다섯 살 이후부터는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했다. 하지만 무명 화가의 생활은 예나 지금이나 비참했다. ... 이처럼 평화로운 공존은 고흐의 배려가 컸다. 고흐는 이미 아를에 오기 전부터 고갱에게 매료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고갱이 언제라도 아를의 풍경이 마음에 안 들어 떠나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늘 초조했다. ... 하지만 고흐는 고갱의 독설에 입는 상처보다 그가 언제든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컸다. 고갱은 정말로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거인의 극단적인 감정의 기복에 지쳐 있었다.

328p

그녀는 춤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꿈처럼 아름답고 화려한, 현실을 초월한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예술의 고귀하고 우아한 면모를 고수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것은 형식의 파괴가 아니라,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 고립되어 있던 정통 발레를 대중에게 보급하는 것이었다. ... 놀란 매니저가 공연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파블로바는 공연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녀는 아무런 불평없이 "나의 춤을 여러분께 보여주고 싶어 왔다"며 밝은 표정으로 공연을 마쳤다. ... 하지만 역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제일 가혹했다. 파블로바는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마다 십자 성호를 긋고는 러시아어로 "이 쌍것!"이라고 혼잣말을 했다고 그녀의 매니저는 증언했다.


<오류>

66p

륄리는 요행히도 오래도록 살아남았다. 여든일곱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국왕에 잘보이고 싶어

->륄리의 생존연대는 1632-1687년이다. 87세가 아니라 5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93p

앤 여왕의 사망으로 제임스 1세의 외손자인 하노버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했다.

->조지 1세는 제임스 1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외손자로, 제임스 1세의 외증손이다.

134p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중용의 덕에서

->"넘치는 편이 모자란 것보다 못하다"가 맞다.

280p

1852년 나폴레옹 2세가 통치하는 제2제정이 시작되면서

->나폴레옹 2세는 나폴레옹 1세의 아들로 로마왕이고 1832년에 사망했다. 제2제정의 황제는 나폴레옹 3세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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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탁효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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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연재한 글을 책으로 엮은 경우는 아무래도 밀도 면에서 가볍기 마련인 듯 하다.

주제가 독특해 도서관에 신간 신청한 책인데, 본격적인 교양서로서는 다소 가벼운 느낌이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조선 왕실의 원당과, 역사에 짧게 언급된 비빈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접하게 된 점이 좋았다.

이를테면 세종의 5남 광평대군이 유복자를 둔 채 20세 사망했고 외아들인 영순군 역시 27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두 고부가 불사를 하여 도성에 세운 절이 바로 봉은사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이런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흥미롭다.

또 단종의 가례 당시 삼간택에 든 권씨와 김씨가 같이 입궁하여 숙의로 봉해졌다거나, 연산군이 세자 시절 삼간택 때 올라온 곽씨가 숙의로 입궁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보통 삼간택 때 뽑힌 처자는 결혼을 못했다고 알려졌는데 후궁이 된 사례들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조선이 계속 불교를 용인했다면 유럽처럼 사찰이나 불교 문화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왕성하게 빛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날 불교 문화가 깊은 산중의 절 외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는 것도 조선의 억불숭유 탓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68p

<세종실록>에는 의정부와 예조가 새로이 중궁을 들일 것을 청하자 세종이 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임금이 나이가 들면 비빈도 늙어서 얼굴빛이 나빠지고 자연히 총애가 점점 없어짐은 인지상정인데, 만약 다시 어린 여자에게 장가들면 애정이 깊어지는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 사이에 아들이라도 태어나면 서자가 적자를 누르고 적자 노릇을 할 징조가 있을 것이다. 옛 사람이 禮를 정하여 제후는 두 번 장가가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깊은 뜻이 없으랴."

->과연 세종대왕다운 생각이다.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낳을 정도로 다복하고 정이 깊은 사이었고, 왕비가 죽은 후에도 따로 중전을 맞지 않은 깊은 뜻이 있었구나 싶다.

당장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 간택만 해도 후계 문제에서 피바람이 불지 않았나.

위인들은 범인과 과연 다르구나 싶다.

149p

이들이 비구니가 된 보다 큰 이유는 왕의 부인으로 왕의 딸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비구니가 되는 것 외에 이들이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232p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으니, 이는 절의가 국가에 관계되고 우주의 동량이 되기 때문이다. 잡혀갔던 부녀들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을 힘을 다해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들에게 왜 안 죽고 살아 돌아왔냐고 되물은 것이다. ... 이들은 자신도 지키지 못한 절개와 대의명분을 여자들에게 강요했고, 그 이데올로기를 교조화시켜 소중화라고 자처했다. ... 두 번의 전란을 겪는 동안 조선의 성리학 교조주의를 병적으로 심화되어 갔고, 여성들의 지위는 더욱 낮아졌다.

250p

팜파탈의 기본 요소에 비추어볼 때 장희빈은 여러모로 억울한 면이 많다. 그녀가 중전의 자리에서 내쫓겨 사약까지 받은 것은 죽을 때까지 지켜준다고 했던 남자, 숙종의 변심이 가장 큰 이유였다. 새로운 연인 숙빈 최씨에게 빠져들면서 숙종은 장희빈에게 쏟아부었던 사랑과 권력을 모조리 거두었다.

254p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팜파탈, 조귀인과 장희빈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어미가 노비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매우 미천한 신분이었다. 그녀들이 의지할 데라곤 자신의 미모와 임금의 사랑밖에 없었고, 오로지 '스스로의 노력'으로 최상의 권력을 장악했다. 두 번째는 집요한 권력욕이다. 조귀인과 장희빈이 권력을 키워가는 동안 수많은 인물들이 사화나 저주 사건에 연루되었다. ... 이들이 정말로 궁궐 안에서 굿판을 벌이고 분신 인형에 저주를 퍼부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란 그녀들이 왕의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주술의 힘을 빌리는 것 말고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260p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실의 불교 신앙은 급격히 기복화되는 양상을 띤다. 왕실 내에서 고승들을 초청하는 법석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고, 남녀를 막론하고 출가자도 나오지 않았던 반면 왕실 비빈들이 복을 빌거나 아들 점지를 발원하는 원당만 계속 늘어갔다. 즉 구도적 요소는 거의 사라지고 기복적 성격만 나타나는 것이다.

272p

장희빈이나 숙빈 모두 한미한 집안 출신이어서 이들이 맏을 구석은 숙종의 마음밖에 없었다. ... 그나마 숙종의 아들을 낳은 이가 자신뿐이라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숙빈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희빈의 불안감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279p

무신난의 배경에는 정계에서 배제된 영호남 유생들의 불만이 내재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궁궐의 여종이라 할 수 있는 무수리의 소생이 왕으로 오른 데 대한 뿌리 깊은 무시와 경멸이 깔려 있었다.

284p

조선 후기에는 승려들이 역이 일종의 세금처럼 부과되었기 때문에, 능이나 원을 수호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무상으로 역을 제공해야만 했다.

289p

불교를 배척하기 위해 조정 내에서 격렬히 이단 논쟁을 벌이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에 들어서면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인정하고, 불교계와 협력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들의 활약과 전쟁 복구 사업에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자한 이데올로기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불교를 핍박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308p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명문 집안의 여식 중에 간택되었다. 또한 친정 집안의 家格이 후궁의 지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왕자를 낳은 궁녀가 가장 높은 첩지를 받았다. 무수리든, 나인이든 출신은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를 배출하기만 하면 그는 내명부의 정일품 嬪의 품계를 받았다.

315p

그런데 대원군을 신랄하게 평가하는 학자들조차도 인정하는 부분은 그가 집념이나 배짱이라는 측면에서 보통 사람을 훨씬 능가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323p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이 민비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은 바로 그녀 특유의 결단력과 총명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명성황후는 조선 시대, 아니 한국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권력을 누린 여성이다. 그녀만큼 왕을 완벽히 손아귀에 넣었던 여성도, 시아버지와 싸워 이길 정도로 힘이 있었던 여성도, 외세를 저울질할 정도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한 여성도 없었다. 


<오류>

144p

눌지왕의 두 아들이 고구려와 일본에 각각 볼모로 잡혀 있었는데

->박제상이 구한 것은 눌지왕의 아들이 아니라 형제들이다. 즉 내물왕의 아들들이다.

191p

인종의 태실 수호 사찰을 은해사로 지정한 이는 인종의 할머니 정현왕후였다. ...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가여운 손자를 위해 태실 수호 사찰이나마 왕의 격에 맞게 지어주고 싶었던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종의 할머니 정현왕후는 1530년에 사망했고, 인종은 1545년에 사망했다. 은해사가 태실 수호 사찰로 지정된 것은 인종이 승하한 다음해 명종 1년인 1546년이다. 그러므로 혹 계모인 문정왕후가 은해사를 수호 사찰로 지정할 수는 있어도 이미 죽은 정현왕후는 아닐 것이다.

240p

1654년 황해도관찰사로 있던 김홍옥이 강빈의 신원 회복과 경안군의 석방을 요청하자

->김홍옥이 아니라 김홍욱이다.

266p

숙종에 대한 명성왕후의 사랑은 일반적인 모성애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외아들인 데다 누이들마저 모두 죽고 하나 남은 자식이다 보니

->명선, 명혜공주는 어머니 명성왕후 보다 먼저 죽었으나 막내인 명안공주는 어머니 보다 오래 살았다.

270p

이현궁으로 옮기기 전에 숙빈이 거처했던 보현당은

->보현당이 아니라 寶慶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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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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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은 교토의 역사, 4권은 명소에 관한 이야기다.

시대적 순서대로 장소를 옮기면서 해설하는 방식을 취하니 과연 서문에 나온대로 일본 역사를 쭉 훑게 된다.

덕분에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원정정치, 남북조 시대 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일본 정원의 독특함이라 할 수 있는 마른 산수, 석정 등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라 그런지 도판이 어두운 게 많아 아쉽지만 사진만으로도 너무나 매혹적이다.

특히 고보리 엔슈가 조성했다고 여겨지는 가쓰라 이궁이 무척 인상적이다.

다이묘가 조경 건축가였다는 점도 신기한데 중국 원림이나 창덕궁의 후원 등과는 또다른 정갈하면서도 감각적인 느낌의 일본식 정원에 마음이 간다.

저자가 교토 박물관에서 셋슈 서거 500년 특별전을 보기 위해 새치기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일본인의 줄 맞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너무 공감했던 것이, 작년 여름 도쿄 디즈니랜드를 갔을 때 퍼레이드를 구경하던 생각이 난다.

대충 앉으면 될 줄 알고 적당히 자리를 잡았더니 안내원이 와서 계속 줄을 맞춰 앉으라는 거다.

줄서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길가에서 공연보려고 앉아 있는 것도 나란히 줄을 맞춰야 하다니 처음에는 무시했는데 두 번 세 번 와서 지적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옆사람과 줄을 맞춰 앉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보니 내 뒤로도 네댓 줄이 열맞춰 앉아 있는 걸 보고 질서의 나라임을 새삼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인상깊은 구절>

220p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의 비가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람은 사람, 나는 나, 어찌 됐든 내가 가는 길을 가는 간다"

236p

더욱이 그것이 은각사에서 보았듯이 기술 집단에 의해 제작되어 장인도 대접받고 생산량이 많았던 데에는 부러움도 느끼게 된다. 실제로 조선왕조에서 기술을 천기로 생각하여 건축, 무용, 음악, 도자기, 목기, 금속공예의 장인들을 모두 '쟁이'로 취급함으로써 장인의 이름 석 자를 거의 남기지 않은 것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이다. ... 이에 반해 조선왕조의 예술에서 공예는 이름 없는 장인에게 의지했지만 서화만은 '쟁이'에게 다 맡기지는 않았다. 사대부가 직접 참여하거나 중인 신분의 화원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했다. 화원도 문인 취미라는 것을 이해해야 대가가 되었다. 이것은 서화가 지닌 미학이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문정신을 갖추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왕조에서는 장식화보다 감상화가 주류였기 때문에 예술의 본령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44p
와쓰지 데쓰로는 자신이 왜 古寺순례를 쓰려고 하는가를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사실 고미술 연구는 나 스스로에게는 옆길이라 생각된다. 이번 여행도 고미술의 힘을 享受함으로써 내 마음을 닦고, 나아가 풍족하게 하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본래 감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연구도 필요하다."
269p
답사란 장소에 대한 확인만으로도 뜻을 새길 수 있는 것이다.
325p
요란한 장치나 기발한 구조로 사람의 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평범성을 유지하면서도 세련되고 우아하며 기능에 충실한 형식을 갖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타우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현대건축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는 기능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모든 뛰어난 기능을 갖는 것은 동시에 형식도 뛰어나다'라는 명제를 내걸었다. 때때로 이 말은 오해를 낳았자민 가쓰라 이궁은 나의 주장이 맞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410p
우리 유물을 조사하자는데 왜 이리 까다로우냐고 항의를 하니까, 이렇게 철저히 비공개로 하는 것이 사찰의 엄격한 보관 원칙이라면서 그렇게 보관했기 때문에 700년 이상 된 불화가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양해해달라고 했다. 이런 식의 답변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434p
신유한은 비와호를 지나면서 그 풍광에 취해 "어떤 오랑캐가 이렇게 좋은 강산을 차지했을까"하고 탄식했으며 ... 
신유한은 문예 교류에 대해 증언하면서 일본은 무인이 지배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문장이 볼품없고 졸렬하다고 여러 번 말했다.

<오류>

94p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인 고사가 천황이 이궁을 세웠고, 아버지인 가메야마 천황이 여기에 머물러~

->고사가 천황은 고다이고 천황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증조부이고, 조부가 가메야마이고, 아버지가 고우다 천황이다.

231p

1628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서 벌어진 '오사카의 여름 전투'에서 희생된 장수들의~

->오사카 여름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 사이의 전투다.

343p

고미즈노오 상황은 삼촌과 조카가 대를 이어 지은 가쓰라 이궁에 두 번을 다녀오며

->가쓰라 이궁은 고미즈노오 상황의 삼촌인 도시히토 친왕과 그 아들인 도시타다가 지은 궁이다. 그러므로 삼촌과 사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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