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교토의 1만 년 - 교토를 통해 본 한일 관계사
정재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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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여행 다녀온 기념으로 관련 책들을 읽고 있는데 의외로 일본사, 특히 교토에 관한 책이 많지는 않다.

도식적인 제목 같아 흥미가 생기긴 하지만 미뤄뒀던 책인데 그래도 제일 관심사에 합당한 책 같아 읽게 됐다.

일본 역사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교토의 유명 절과 신사 등을 소개한다.

저자가 한일 교류 관련 전공자라 그런지 내용은 비교적 충실하나 교과서에 나오는 평이한 서술이라 좀 지루한 게 단점이다.

그렇지만 뒷부분의 메이지 유신 이후 역사는 아주 재밌다.

교토라고 하면 막연히 고대 도시라고만 생각했는데 현대사, 특히 한국의 식민 지배와도 관련된 유적이 많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특히 윤동주, 정지용, 송몽규 등 교토 유학생들이나 조선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가슴이 싸~해질 정도로 와닿았다.

식민지 조국을 떠나 지배자의 나라로 학문을 위해, 생계를 위해 건너 왔던 당시 조선인들의 치열한 삶이 애달프다.

마지막에 북한과 남한의 일제 유산 청산에 관한 저자의 의견이 인상적이다.

보통 북한은 친일파 청산에 성공했고 남한은 여전히 친일파 잔재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저자는 정반대로 일제의 물적 기반은 중공업 중심지인 북한에 많이 남아 해방 후 경제 발전에 이바지 했고 남한은 경공업 중심이라 물적 유산이 적었을 뿐더러, 그나마도 6.25 당시 거의 파괴됐다.

남한의 경제 재건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미국의 원조인데 식민 기간 동안의 일제의 물적 유산과 맞멎을 정도라고 한다.

정치 이념 측면에서도 북한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유사한 소련의 통제식 전체주의를 받아들여 일제의 연속선에 있으나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특히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이승만이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일제와는 매우 다른 미국식 사회체제가 유입됐다고 한다.

이는 전후 일본도 마찬가지로 한국와 일본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사회로 공통의 문명 기반 위에 있고, 전전의 군국주의 일본이 오늘날 북한과 같다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매우 예리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앞서 읽은 유홍준 씨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체가 아니라 다소 지루하게 읽었고 대신 두 책을 읽으니 어느 정도 일본사와 교토 유적에 대한 체계가 생긴다.


<인상깊은 구절>

293p

혁명이 성공하면 거기에 참가했던 필부들까지 나중에 기라성 같은 인물로 성장한다. 그렇지만 혁명이 실패하면 그것을 주도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조차 나중에 필부로 전락한다. 사실은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의 능력이 그것의 성패를 좌우했다고 보는 게 옳을 테지만,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역적으로 몰려 역사의 음지에 처박힌 반면,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충신으로 뽑혀 역사의 양지에 등장했다. 

308p

일본은 1937년 중국과 전면 전쟁에 들어간 이후 한국에서 황국신민화정책과 인력물자동원정책을 철저하게 강행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 전반에 일본식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도 만만치 않아 국내외 도처에서 독립과 해방을 지향하는 민족운동이 불을 뿜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강렬한 반일민족주의를 체득하게 되었다.

353p

도널드 킨은 메이지 천황이 국내외 정책이나 전략의 실제 입안자가 아닌 인자한 통솔자였을 뿐이라며 일본 정부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오히려 메이지 천황은 그 존재만으로도 수많은 변혁을 이끈 공신들에게 항상 마음의 의지처가 되었다고 본다. ...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면 천황제 국가가 국민을 통합하고 국력을 결집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메이지 천황은 막강한 권력을 스스로 행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유신 정부의 관료들에 의해 치밀하게 가공되고 연출된 존재인 측면이 많았다. ... 그리하여 러일전쟁을 도발할 즈음에는 "백성을 위해 마음이 편할 때가 없네/ 몸은 구중궁궐 안에 들어 있건만"이라는 시가를 읊을 정도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지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일본이 보잘 것 없는 동양의 한 군주국에서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근대 제국으로 발돋움할 때 그 원동력이 된 존재였다. ... 메이지는 유신의 기세를 몰아 일본을 세계 5대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고 죽음으로써 대제라는 칭송을 받은 반면, 고종은 몇 번에 걸친 개혁의 기회를 놓친 채 5백 년 사직을 지켜 내지 못하여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황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71p

일본은 민족주의가 신앙과 결합하여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반면에 한국의 민족주의는 직설적인 언설로 주입하여 마음에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74p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라이벌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어르고 달래는 정책을 쓴 반면, 그는 항상 강경하게 억누르고 짓밟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두 사람의 노선 중 결국 야마가타의 주장이 일본의 외교정책으로 채택됐다. 통감으로서 한국 통치에 실패한 이토 히로부미도 나중에는 그의 노선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384p

정부는 '조선인 폭동'이라는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계엄령을 공포하였고 지역 민간 단체를 조직하여 무고한 한국인을 살해했다. 그 배경에는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데서 연유한 민족 차별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 민중이 3.1독립운동 등을 통해 항일의 자세를 선명히 내보이자, 이에 대한 공포심이 잔악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414p

'윤동주 시비 건립 취지서'는 이렇게 쓰여 있다.

"전쟁과 침략이라고 하는, 입에 담기조차 무서운 말이, 성전 혹은 협화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빛나는 미래를 꿈꾸고 있던 수많은 청년들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 갔습니다. ... 시인이 공부했던 도지샤의 설립자 니지마 조는  "양심이 전신에 충만한 대장부들이 궐기할" 것을 말했습니다만, 시인의 생전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하면서 양심이 명하는 바에 따라 그는 살았습니다."

436p

6.25 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노후한 시설을 교체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제가 미국제로 바뀌었다. 6.25 전쟁으로 일제의 유산이 거의 대부분 파괴된 데다가, 복구 과정에서 겨우 잔존한 것마저 미국식 시설로 탈바꿈된 것이다. 해방 당시 일제의 물적 유산은 미군정기 동안 한국에 도입된 원조액과 거의 비슷했다. ... 1960년 시점에서 보면 일제의 물적 유산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액의 7분의 1 정도에 불과하여, 그 후 본격화되는 한국의 공업 발전에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 1948년 8월 15일 미군으로부터 정권을 인계받은 이승만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반공자유주의자였다. 그는 미군정보다 경제 분야에 광범한 통제를 허용했다. 그렇지만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 그럼에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한이 일제 말기의 전체주의와 군국주의 체제를 폐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한 것은 이후의 역사 발전에 있어 앞으로 나아가에 하는 힘이 됐다고 할 수 있다. ... 지주 등은 고향에서 추방되고 남한으로 이주함으로써 친일파도 상당히 제거되었다. 그리하여 북한은 일제와 단절된 것처럼 보기 쉽다. 그러나 정치, 경제의 근본에 관련된 이념이나 가치 등에서 북한은 일제와 연속된 측면이 많았다. 북한은 해방 이후에도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구축한 통제 경제 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 개인의 자유로운 정치, 경제활동을 금하고 모든 권력을 국가에 집중시키는 것은 전체주의의 핵심이다. 북한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이 펼쳐졌다. 이는 전시체제기 일제의 정책과 연결되었다. 통제의 강화, 인적 물적 자원의 국가 총동원, 지주제 폐기, 자산 국유화 등의 움직임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미 시작됐다. 김일성 정부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북한의 전체주의체제가 현저히 군국주의적 색채를 띠게 된 데는 일본 군국주의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 남한과 일본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의 천황숭배 군국주의 체제와 전혀 다른,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미국의 통치를 경험하게 됐다. 그 후에는 미국이 주도한 6.25 전쟁을 치르고 미국의 영향 아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켰다. 현대의 한일 관계는 바로 이런 공통의 문명 기반 위에서 맺어지도 영위됐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북한은 일제강점기 말기와 오히려 유사성이 강한 소련군의 통치를 겪었다. 그리고 6.25 전쟁과 그 이후에는 일당 독재정치와 사회주의 통제경제에 익숙한 중국과 소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유산과 결합하여 북한식의 독특한 사회 체제를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서로 다른 문명 기반을 지닌 북한과 일본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을지 예측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남북한의 통일 또한 그러하다.

454p

일본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3종의 신기'라 불린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를 마음껏 이용하며 소비와 안락의 꿀맛을 즐기게 되었다. 6.25 전쟁을 현장에서 겪은 한국과 한국인의 비참한 신세계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일본과 일본인은 그렇게 안정을 누렸다. 

465p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한 반면, 일본은 6.25 전쟁의 특수 계약과 특별 수요에 힘입어 세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면서도 한국과 일본은 미국의 압도적 영향 아래서 천황제적 군국주의와 통제 경제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로 문명 전환을 했다. ... 불과 반세기만에 한국은 국민의 생활양식과 문화 수준에서 일본과 선진성과 보편성을 공유하는 동질 국가로 발전했다. 한국이 이렇게 발전한 데는 일본의 협력과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오류>

124p

11세기 후반에 즉위한 시라카와 천황은 외조부가 섭관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라카와 천황은 고스자쿠 천황과 후지와라노 시게코로 섭관가인 후리와라씨가 외가이다. 시라카와 천황의 아버지인 고산조 천황의 어머니가 섭관가가 아닌, 산조 천황의 딸 데이시였기 때문에 위 문장은 고산조 천황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산조 천황은 우다 천황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 씨를 외척으로 하지 않은 천황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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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 이야기 - 르네상스의 주역 현대지성 클래식 14
G.F. 영 지음, 이길상 옮김 / 현대지성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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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매력적인 제목과는 달리, 읽기가 매우 힘들다.

너무 세세하게 당시 상황들을 늘어놓는다.

최근작이 아니라 20세기 초에 나온 번역서라서 읽기가 힘든가 싶다가도, 아래 리뷰를 보면 대체적으로 흥미롭다는 평이니 메디치 가와 당시 피렌체에 대한 내 기본적인 지식이 부족한 탓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장점은 메디치가가 당대 예술의 통큰 후원자였던 만큼 정치 얘기에 그치지 않고 건축과 회화, 조각 등과 같은 예술사를 함께 설명해 준다는 점이다.

별 관심이 없었던 기베르티, 도나텔로, 루카 델라 로비아, 베노초 고촐리, 보티첼리 등 당대 유명한 예술가들이 사회에 끼친 영향과 작품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과연 르네상스 시대였구나 싶다.

작품을 검색해 보니 잘 몰랐던 훌륭한 조각과 그림들이 참 많다.

특히 루카 델라 로비아의 환조와 보티첼리의 아름다운 성모자 등이 정말 인상적이다.

메디치 가문이 공화국을 지배하는 과정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인상깊은 구절>

336p

종교개혁을 낳은 것은 루터가 아니라 '새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봐도 루터처럼 그렇게 미미한 지위에 있던 한 개인이 온 유럽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뒤흔든 격동을 일으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루터가 한 일은 이미 내연성을 가진 물질들에 불을 붙인 것이었다.


<오류>

165p

베네치아에서는 두 형제 젠틸레와 조반니 벨리니와 이복 형제 만테냐가 미술 학파를 시작하고 있었는데

->만테냐는 벨리니 형제의 처남이다.

305p

프랑스 군은 용감하고 유능한 젊은 장군 가스통 드 푸아가 지휘했는데, 그는 루이 12세의 사촌으로서

->가스통 드 푸아의 어머니 마리 드 오를레앙은 루이 12세의 누이이다. 그러므로 그는 루이 12세의 사촌이 아니라 조카다.

319p

이복 형제 필리포 스트로치와 그외 피렌체의 주요 인물들이 로렌초 2세를 수행했다.

->필리포 스트로치는 로렌초의 누이 클라리체와 결혼했으므로 이복형제가 아니라 매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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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나의 서양미술사 100
김영나 지음 / 효형출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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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신간을 보고 너무 반가워 도서관에 신청했다.

저자의 전작 <서양미술의 기원>을 매우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 서양미술사를 얼마나 깊이있게 분석했을까 기대에 차 읽었는데 신문에 연재된 글 모음이라 그런지 너무 말랑말랑 하다.

본격적인 개론서 정도 되는 줄 알았는데 편안하게 그림 감상하면서 읽을 수 있는 연재물 모음이라 좀 아쉽다.

100편이나 되는 그림을 소개하고 관련 이야기를 하느라 440여 페이지로 벌써 분량이 두껍긴 한데 그래도 한 챕터마다 조금 더 길게 설명해 주면 어땠을까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지만 내용 자체는 편하게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재밌다.

또 표지와 편집, 도판이 아주 마음에 든다.

다소 어둡게 나온 도판도 있지만 티치아노나 벨리니 같은 베네치아 화파들의 그림은 정말 색채감이 잘 살아있어 너무 마음에 든다.

작품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작품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이나 의의 등에 대한 인문학적 설명이 훨씬 많다.

소장처와 작품 크기, 발표 연도까지 표기되어 이해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135p

현대 서양에서는 개인을 숭배한다는 것 자체에 회의를 느껴,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도서관이나 대교 등에 붙여 기념한다.

195p

이 환상적인 앙리 루소의 그림은 진정으로 타고난 재능과 상상력을 가진 작가만이 가능한 것으로, 예술은 교육과 훈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201p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묘비에서는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후 심판을 받는 장면이, 기독교 미술에서는 천국 또는 지옥의 장면들이 나타나는 데 비해, 그리스 미술에는 이러한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 인들은 현세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216p

청교도 정신이 뿌리 깊은 개척민이었던 미국인들에게 땀 흘리고 일하는 밀레의 농민상은 도덕적 우월성과 인간의 미덕을 보여준는 것이었다. 프랑스처럼 오랜 봉건 제도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미국에서는 건장한 농민 이미지에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291p

표현주의를 위험한 예술로 생각한 나치는 1934년에 그에게 더 이상 작업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고, 1936년에는 놀데의 작품을 反독일적, 퇴폐적인 미술로 선언하며 작품을 압류했다. 자신을 독일적인 화가로 여기고 나치 당원으로 가입까지 했던 놀데를 반독일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정말 아이러니였다.

340p

미술은 노동자의 기준에 맞추어야 하며 이젤 회화는 부르주아 회화라고 주장하는 정부와 미술이란 기본적으로 개인의 표현이라고 생각한 말레비치는 마찰을 빚기 시작했다.

347p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은 작품이 마치 상품처럼 거래되는 미술 시장에 반발하였다. 미술은 아이디어가 중요하며 회화와 조작같이 반드시 물리적인 대상일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 요즈음에는 새로운 미술의 영역을 개척하려는 충동 자체가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대중의 문화 의식도 높아지면서 더 이상 난해난 미술에 충격받거나 분노하지도 않는다. 고립되고 저항적인 성격의 아방가르드의 의미는 이제 사라진 것일까?

357p

2005년에 조사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여성 작가의 작품 비율은 아직도 5%에 불과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성의 누드를 그린 작품 수가 훨씬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361p

미술가에 대한 낮은 사회적 인식은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데 그 주된 이유는 손으로 하는 작업은 미천한 노동자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 화가나 조각가가 되려면 대학이 아니라 장인들의 공방에서 도제 교육을 받아야 했고 길드에 가입해야 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이었다. ... 화가, 조각가들이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부상한 것은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천재적인 미술가들이 등장한 르네상스부터였다. ... 미술학도들든 문학, 고전, 해부학 등을 정식으로 배우면서 장인의 계급에서 그리고 길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74p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술만 배우지 말고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기 때문에 기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손은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을 그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뛰어난 미술가들의 등장과 함께 미술은 이제 장인적인 기술 단련에서 벗어나 이론과 지식, 과학에 바탕을 둔 인문학적 위치로 끌러올려졌다. ... 인상파 화가들은 야외에서 풍경을 빨리 직접 화면에 옮겼는데, 많은 붓질이 겹쳐진 완성작은 아카데미의 기준으로 보면 스케치에 불과한 것이고 교훈적인 내용도 없었다. 

438p

거대한 규모의 이런 작품을 지각하는, 물리적이면서 심리적인 경험은 미술관에서는 어려운 생생한 체험이기도 했다. 그러나 월터 드 마리아는 아무리 최고의 작품이라도 자연 그대로의 그랜드 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 폭포를 능가할 수는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기도 했다.


<오류>

353p

"아델레 블로흐 바우허 초상 1"은 그 후 약 1500억 불이라는 거금에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의 회장인 로널드 로더에게 팔렸고

->1억 3500만 달러로, 1500억 원에 팔렸다.

364p

'우르비노의 비너스' 크기가 11.9m*16.5m로 잘못 기재됐다. 1.19m*1.6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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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 근대의 절정, 혁명의 시대를 산 사람들 주경철의 유럽인 이야기 3
주경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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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3권이 나왔다.

역시 전문가가 쓰는 책은 질적으로 다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서양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깊이있게, 그러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발랄한 문체로 쓰여져 너무너무 재밌고 유익하다.

표지 디자인도 예쁘게 잘 나왔고 많은 도판들이 실려 책 자체가 너무 예쁘다.

어설픈 아마추어 작가들의 사이비 같은 역사서 말고 학자들이 눈높이를 조금 낮춰 대중을 위한 교양서를 많이 내주면 참 좋겠다.

1,2권도 좋았지만 3권도 정말 재밌다!!


1) 17세기 바다를 누비던 해적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층민이 세상을 향해 싸울 때 유일한 무기가 용기라는 말에 가슴이 먹먹하다.

기득권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 사람들이 좀더 많은 권리와 이익을 누리려면 두려움을 무릅쓰고, 어쩌면 죽음을 감수하고서 용감하게 덤비는 수밖에 없는 듯 하다.

대부분의 해적들은 시대가 바뀌면서 국가권력에 의해 처형당하는 불행한 결말을 맺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 밑바닥층 삶을 거부하고 능동적으로 세상에 대항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평범하고 겁많은 소시민인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해적 이야기가 묘한 울림을 준다.

2) 집념이 있는 인간이 승리를 쟁취하는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역사적 인물들의 역사적 사건들을 읽노라면 범인과는 다른 강렬한 투지가 느껴지고, 좀더 일반화시키자면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끊임없이 투쟁하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르는 것 같다.

나르바 전투와 폴타바 전투를 치룬 스웨덴의 칼 12세와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의 이야기는, 세계사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인간의 투지가 느껴진다.

러시아를 전면 개혁한 표트르 대제도 그렇지만 겨우 15세에 왕위에 올라 군대와 함께 생활하며 최고의 사령관이 된 칼 12세도 놀랍다. 

이런 경우만 봐도 확실히 유럽의 국왕은 조선의 왕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군주였던 듯 하다.

3) 권력욕도 타고나는 듯 하다.

모든 왕비들이 측천무후나 서태후, 혹은 명성황후처럼 정국을 쥐고 흔들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불행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적인 일에서 벗어나 사적인 삶을 살고 싶어했고 시대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정치력이 부족한 왕을 남편으로 둔 불행인가.

4) 시몬 볼리바르는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로 구대륙의 압제로부터 신대륙을 해방시킨 사람인데, 왜 남미는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연방으로 발전하지 못했을까? 필그림 같은 이들이 아니라, 구대륙의 지배층들이 너무나 완고하게 남미를 지배하고 구체제와 똑같은 귀족층을 만들었기 때문인가? 혹은 미국이 인디언들을 완벽하게 몰아내고 전 대륙을 장악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잘 몰랐던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고 왜 두 대륙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는지 좀더 알아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36p

"즐겁고 짧은 삶이 내 모토다". 로버츠는 그렇게 선언하고 해적선에 올라탔다. 인생 뭐 있어, 한탕 멋지게 살다 가면 되는 거지!(흔히 이렇게 말하지만 대개는 망하는 길이다.)

44p

해적선에서는 '무질서'가 판치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해적들은 기존 사회의 법 밖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엄격한 규율이 필요했다. 만일 그들이 아무런 규율과 질서 없이 살아갔다면 망망대에서 생존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47p

해적들이 최초의 이상적 혁명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는 과장이다. 일반 선원이나 해적들은 자기 한 몸 편안하게 지내면 그뿐이지 새로운 세상의 건설 같은 이념은 알 바 아니었다. ... 그들은 범죄자로 낙인찍혀 어딘가에 정착해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오늘 하루만 살다 갈 것처럼 돈을 썼다. 해적의 실제 삶은 그런 이상적 면모보다는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 해적들의 주된 심성은 기존 사회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일 것이다. 

52p

근대 초 선상작업은 기계화되지 않아 강도 높은 육체노동으로 이루어졌던 터라 여성에게는 무리였다. 그럼에도 실제로는 근육질의 여성이 상당히 많았던 게 분명하다. 최근 사회사 연구는 상당수의 하층민 여성들이 힘이 세고 성격이 거칠며, 겁이 없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지략으로 생존했다고 밝힌다. ... "겁쟁이들은 법의 보호 아래 가난한 자를 털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용기를 방패삼아 부자들을 약탈한다오" ... 폭력적 억압 체제를 몸소 견뎌내야 했던 힘없고 가난한 선원들은 자신들만의 해상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이 가진 유일한 자산은 용기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유토피아는 섬광처럼 잠시 빛을 내다 순식간에 스러질 수밖에 없었다. ... 국가권력과 법질서가 바다 위에 펼쳐지자 해적들의 가상한 용기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66p

우리나라에서도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상투를 자르려면 차라리 내 목을 자르라"며 반발했는데, 러시아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다간 진짜 목이 잘릴 수도 있었다.

76p

침략자들은 러시아가 그 자체로 엄청난 장애물이라는 점을 뒤늦게야 깨닫곤 한다. 눈 덮인 광대한 동토는 점령이 불가능했다. 여기에 더해 표트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국민도 희생시킬 태세여서, 거의 무한정으로 농노들을 징병했다.

83p

표트르는 말년에 자신이 이룬 성취가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후계자인 아들 알렉세이가 자신의 과업을 이어 더 발전시킬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13p

앙투아네트는 정치를 비롯한 공적인 일에서 벗어나 사적인 삶을 살고 싶어 했고, 루이 16세가 선물한 프리 트리아농에서 그 즐거움을 찾았다.

138p

자코뱅 정부 시기라 불리는 이때 평범한 시민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국가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 프랑스의 제1공화정 시기는 동시에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공포정치의 시대였다.

144p

미라보 의원은 로베스피에로를 이렇게 평했다. "저자는 멀리 갈 것이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모두 믿고 있소." 신념에 따라 말하고, 신념을 실천하려 한 것이다. 그러려면 권력을 잡아야 했다.

혁명은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무엇보다 종교와 재산 소유 문제를 건드리면 일이 커진다(일찍이 마키아벨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부모를 죽인 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재산을 빼앗아간 자는 용서하지 못한다고). ... 뭐가 두려워 주저하느냐는 태도였다. "혁명이 혼란 없이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 로베스피에르는 목수의 집에 방 하나를 얻어 하숙 생활을 했다. 궁전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며 왕처럼 살았던 영웅 나폴레옹과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보인다. 의원 세비로만 생활하며 공적 지위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던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부패할 수 없는'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 그러나 혁명이 밥 먹여주지는 않는 법.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는 파리 민중들은 혁명 정부에 경제 문제를 해결해달라며 자주 봉기했고, 지롱드 내각은 이들을 체포했다. ... 많은 프랑스인에게 혁명은 보급품 징발, 징병, 전통적 생활방식에 대한 위협을 의미했다. 착취 제도입네 뭐입네 해도 어쨌든 사람들이 오래도록 소중히 여기던 신앙 체계를 공격하거나, 혁명력이라는 이름으로 시간관념까지 바꾸어놓은 혁명 세력을 순순히 지지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여전히 소수파이고 정당성 면에서 취약한 그들로서는 폭력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고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 당통이 말한 대로 "민중이 폭력적이 되지 못하도록 우리가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87p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의 궁정 음악가로 재직할 기회를 엿보았던 듯하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어린 시절 모차르트에게 입을 맞추고 옷도 하사했던 여제가 이제는 자기 아들에게 "거지처럼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고용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귀족들은 취향이나 사랑이 아니라 오직 이해관계를 따지고 다른 많은 고려할 사유로 인해 결혼합니다. ... 하지만 우리처럼 가난한 이들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여자를 취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의미를 둡니다. ... 우리의 富는 우리와 더불어 죽습니다. 부는 오직 우리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는 근대적인 결혼관이 뚜렷하다. 그러나 아버지 레오폴트는 부가 오직 머릿속에만 있는 거라는 아들의 개똥철학에 동의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최종 결론은 도박이었다! 도박 빚은 곧바로 갚아야 했다. 빚을 떼먹으면 영화 <타짜>에서처럼 손목을 자르지는 않지만 명예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222p

호위대는 실제 군사 훈련을 하기보다는 번쩍이는 멋진 군복을 입고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식민지 귀족 청년들의 사교 모임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볼리바르는 이곳에서 자신이 진정 군인 체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교 활동보다도 군사 문제를 열심히 공부한 예외적인 학생이었을 것이다. 남은 생을 전장에서 보내게 되는 볼리바르에게 호위대에서 받은 군사 교육은 큰 도움이 되었다. ... 그의 강인한 체력은 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하루 종일 행군한 날 저녁에 대여섯 시간을 더 일하거나 무도회에서 춤을 추곤 했다. ... 볼리바르는 이 강력한 집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파에스를 찾아갔다. 이때 파에스와 부하들은 독립의 대의를 설명하는 볼리바르의 설명은 뒷전이고 그가 말을 어떻게 타는지, 그의 말은 어떤 상태인지 유심히 관찰한 후 승낙했다고 한다. 말을 저토록 보살펴줄 정도라면 물으나마나 같은 편이라고 여겼을 법하다. ... 미국과 프랑스 혁명에 비해 라틴아메리카 독립 혁명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 역시 근대적 자유를 확대시킨 결정적 사건 중 하나였다. 1808년 이후 라틴아메키라에서는 12개 국이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이 나라들에서는 자유주의적 정치와 위계적 사회 질서 사이의 긴장과 모순으로 인해 혁명이 일어난 다른 지역들과는 매우 다른 역사가 진행되었다.

260p

원리를 알아냈다고 바로 사용 가능한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는 데 지대한 공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 기업의 역사를 보면 사업가가 발명가를 착취하는 경우가 비빌비재한데, 그와 달리 와트와 볼턴은 서로 보완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와트는 새로 고안해낸 밸브, 실린더 등을 계속 실험하면서 증기기관을 개선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자기 아이디어를 표절했던 윌킨슨을 비롯한 많은 특허 침해자보다 한 걸음 더 앞서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287p

아크라이트의 공장에서는 아이들로 일해서 돈을 벌 수 있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아동 착취라고 하겠지만. 당시 형편없이 낮은 임금으로 생계를 꾸리기 힘들었던 노동자 가족 입장에서는 누구든 일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302p

나폴레옹은 오스만 제국 쪽으로 공격 목표를 바꾸어 1799년 시리아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정복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총알을 아낀다며 총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익사시키는 등 적군을 잔인무도하게 살해해 악명만 떨쳤다. 병에 걸린 병사들을 끌고 이집트로 귀환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황제와의 회담에 늦은 캉바세르가 "죄송합니다, 폐하. 숙녀분과 함께 있느라 늦었습니다"라고 변명하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황제와 약속이 있으면 부인들에게 지팡이와 모자 챙겨서 꺼지라고 말하시오."

독재는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니 작은 폭군들은 필요 없다. 즉, 나폴레옹 자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되 다른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재는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선전과 여론몰이도 잘 해야 한다.

324p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모든 독재자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제국을 운영하는 과정은 합리적 전략, 전술이 아닌 개인적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 점에서 나폴레옹은 여느 독재자와 다름없었다. 체제 유지의 관건은 군사력이다. ... 나폴레옹의 전술은 사실 단순했다. 가능한 한 최대의 전력을 집중해 적의 중심을 깨트려 저항 의지를 꺾어놓는 것이다. ... 이런 전술의 실상은 무엇일까? 엄청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재앙에 가까운 희생을 치렀다. ... 나폴레옹은 천재라기보다는 단지 다른 사람들의 희생에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뿐이다. 한 군사사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나폴레옹은 천재가 아니다. 결국 그가 패배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류>

317p

새 신부 마리 루이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이니,

->나폴레옹의 황후 마리 루이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조카인 프란츠 2세의 딸이다. 그러므로 조카가 아니라 조카 손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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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예술로 걷다 - 가우디와 돈키호테를 만나는 인문 여행
강필 지음 / 지식서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도판이 시원시원하다.

상대적으로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이 눈에 띄지 않고 진부한 느낌이 들어 걱정했는데 막상 책을 펼치지 미술관 소장품의 도판이 너무나 선명하고 한 면에 큼직큼직 하게 실어 줘 보는 즐거움이 있다.

저자가 본격적인 학자는 아니어도 관련 전공자라 그런지 본문의 미술 관련 내용의 수준도 무난하고 문체도 비문 없이 쉽게 읽힌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은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신혼여행 때 다녀와서 나에게 매우 특별한 곳이다.

다른 그림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전시했던 넓은 홀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책을 보면서 벨라스케스 작품의 위대함에 새삼 감탄했다.

작품의 부분들을 확대시켜 보여 줘 감상하기가 참 좋다.

가우디가 지은 구엘 공원 편에서 입장료가 8유로라고 나오길래 내가 전에 갔을 때는 돈을 안 냈던 것 같은데 이상하다 했더니만, 2013년 이후 생겼다고 한다.

가이드 해 주던 분이 이 공원은 무료니 마음껏 가우디 작품을 즐기라고 했었는데 어느새 유료로 바뀌었나 보다.


<오류>

28p

19세기 말에는 로히어르의 진짜 작품과, 그의 작품과 유사한 것들을 뭉뚱그려 '플랑드르의 대가(Maitre de Flemalle)'의 창작물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게 오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보통 플레말의 대가라고 하면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스승인 로베르 캉팽을 일컫지 않나 싶다. 메로드 제단화가 대표적인 플레말의 대가 작품인데 후에 로베르 캉팽이라 밝혀졌다. 

120p

캐서린은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의 딸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숙모였다.

->숙모가 아니라 카를 5세의 이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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