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하) 한국문화총서 12
안길정 지음 / 사계절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가 마지막 챕터에서 밝힌대로 조선시대 각 신분의 생활사가 관아, 즉 지방 통치 기구를 중심으로 잘 그려진 책이다.

유럽사 쪽에서만 보던 이른사 미시사, 생활사라는 관점에서 무척 신선하고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조선왕조가 양인층에 기생하는 양반층의 확대로 망하게 됐다는 결론은 너무 단순한지 않나 싶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양인 이하 계층의 생활사를 세밀하게 복원한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고 깊이있는 분석을 제시하는 점은 좋지만, 지배 엘리트의 역할에 대한 고찰이 아쉬운 부분도 있다.

마지막에 실린 성황제가 국가에서 관리하는 제사였다는 점도 신기하다.

막연히 민간에서 행하는 굿으로만 알고 있었다.

특히 단오제 같은 큰 굿을 할 때 아전층이 이런 연회를 담당했다는 점도 처음 알았다.

옷 한 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큰 공력이 들고 그 가치가 얼마나 컸는지,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등과 같은 실제적인 생활상 분석이 당시 사회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족징과 인징 등과 같은 폐해가 결국 연좌제에서 비롯된 것이고 세금이나 형벌이 개인이 아닌 가족과 마을이라는 공동체에 부과됐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근대사회는 집단에서 개인으로 분화해 나가는 듯 하다.

에필로그 부분은 저자로서는 전문 학자도 아니면서 이렇게 성실한 저작을 왜 내놓게 됐는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지만 독자에게는 잘 전달이 안 되는 듯 하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55p

체면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품위 유지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씀씀이가 더 커진다. 돈을 아꼈다간 체면이 깎이거나 여지없이 홀대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수모'를 두려워하게 되고, 이를 회피하려고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상납하게 만드는 데 잔머리를 굴리게 된다. 고전을 보면 체면 유지나 인사치레로 드는 각양각색의 돈이 나오는데, 예전이니 인정이니 정비니 하는 것들이 다 상대에게 호의를 바라고 건네진다.

209p

성서에서 예수가 로마군에 붙잡혀 처형될 때 군병들이 그의 옷을 나눠 갖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는 기사가 나온다. 아무려면 죽은 이가 입던 낡은 옷까지 서로 차지하려고 그럴까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할 법한 대목이다. ...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던 전통시대에 옷 한 벌 짓는 데는 많은 시간과 품이 들었다. ... 원료의 생산에서 완성품을 이루기까지 한 벌의 옷은 그야말로 여인의 고된 공력이 아로새겨진 노동력 덩어리인바 번듯한 의관 한 벌은 웬만한 형편에서는 넘볼 수 없는 고가였다. 궁색한 양반들은 결코 의관이 번듯할 수 없었다.

221p

추운 겨울, 이것은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꼭 이해해야 할, 오늘과는 다른 과거의 생활상이다. 서민들이 추위의 제약에서 벗어난 것은 오래 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보릿고개에서 벗어난 것과 대략 일치할 것이다.

228p

오늘날에는 세금 납부액이 개인별로 발부되지만 당시 세금은 리별로 할당되었다. 즉 리와 면은 전결, 군역, 환곡, 잡역 같은 각종 세와 역을 거두는 데 공동책임을 졌다.

238p

조선의 주민 장악방식을 보면 매우 절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연한 행정계통이 있는데도 별도의 주민 기구를 가동하여 징세하는 방식은 이웃나라들에선 유례가 없다. 만약 주민 조직의 도움 없이 이런 성과를 내려면 관료 조직은 엄청나게 방만해졌을 것이다. 비대한 관료 조직은 자짓 재정 파탄을 부를 수 있어 언제나 나라에 득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민 자치는 나라에서 양보한 일방적인 시혜일 수 없다.

246p

베짜기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전업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다른 집안일을 하고 남는 시간에 행해졌다. 이를테면 김매기 같은 밭일이 기본이고 베짜기는 가외의 일이라서 해가 떨어진 밤이나 한가한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때문에 웬만한 체력이나 인내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다. 이런 중노동이 조선시대 여인들에겐 일상이었다.

325p

로마 교황청과 신교도들 사이에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의롭게 되느냐, 즉 구원을 얻느냐는 문제를 두고 근 500년 간에 걸친 논쟁을 거듭해 왔다. 쟁점이 된 것은 선행에 대한 평가였다. 교황청과 달리 캘빈이나 루터가 보기에 자선은 구원의 결정적 요인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며, 선행이나 믿음이 반드시 구원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우리의 구원 여부는 최후의 심판을 주재하는 재판장의 자유로운 독단에 따르며, 우리의 선행이나 믿음에 대한 평가도 오로지 재판장의 전권 사항이다. 


<오류>

136p

노비들의 도망이 끊이지 않자 왕실은 18세기 벽두에 공노비 해방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노비 해방령은 1801년, 즉 19세기에 내렸다.

331p

광범위한 도망의 형태로 나타난 노비들의 저항이 없었다면 숙종조의 공노비 해방령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공노비 해방령은 숙종이 아니라 순조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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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8-03-11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 추천해줘서 감사합니다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 (상) 한국문화총서 11
안길정 지음 / 사계절 / 2000년 7월
평점 :
절판


우연히 교보문고에서 보고 당연히 전공자가 쓴 책인 줄 알고 빌렸는데, 뜻밖에도 출판일을 하는 분이라 놀랬다.

사료를 적당히 짜집기 한 가벼운 교양서에 그치지 않고 문헌 자료를 깊이있게 분석해 조선시대 지방 통치 체제와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간혹 현대사에 대한 비판이 생뚱맞게 끼어 있어 책의 흐름을 방해하지만 대체적으로 성실한 저작이고 조선시대 지방이 어떻게 통치되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독서였다.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국역을 져야 하는 양인들의 부담이 가중되어 왕조가 망하게 됐다는 고찰이 흥미롭다.

조선이라는 사회 자체가 근대화와 전혀 맞지 않는 체제였기 때문에 결국은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을테지만, 각종 세금과 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들이 줄어 들고 명목상 양반이 늘어나면서 결국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는 지적이 일리가 있다.


<인상깊은 구절>

80p

오늘날 우리는 본인에겐 죄가 없는데도 가족이라는 탓으로 피해를 입는 연좌제나 족징, 또는 이웃에 살고 있다는 죄로 애꿎게 덤터기를 쓰는 인징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형이나 징세시 개인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대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였으며,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질족이 왕조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 형을 운영할 때 삼강오륜을 기초 윤리로 과감하게 존중하였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86p

이런 고색창연한 몸가짐들은 모두 상대에게 깊은 존경과 두려움을 나타내기 위해 표시하는 예법으로, 관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는 몸에 익은 자세였다. ... 이런 예법은 번거로웠지만 신분사회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엄격하게 지켜졌다.

148p

조선왕조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은 여행시의 편의시설을 오직 관리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리라 할지라도 임의적으로 발마를 요구할 수 없었으며, 규정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말, 음식, 숙소를 제공받았다.

162p

도망이 보편적 현상으로 번지자 더 이상 역로는 유지될 수 없었다. ... 조선 양반사회가 적대 계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양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난 기생 계급의 중압으로 와해되었다. 양인을 압살하는 최대의 부담은 군역이었으며, 전세나 환곡 같은 나머지 부담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사회적 천대와 함께 더욱 가중되었다.

167p

양반은 벼슬에 나아갈 수 있는 권리, 즉 사환권을 비롯한 여러 특권을 누렸다. 벼슬살이는 농업 이외에 자본을 축적할 수단이 마뜩찮았던 전통시대에 가산을 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185p

양반은 법제가 아니고 사회운동에 따라 오랜 시기에 걸쳐 형성된 계급이다.

222p

조선 후기의 신분 동요는 이 같은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양인들의 필사적 몸부림이었다. 물론 여기에 향리와 노비들이 가세하기는 했지만,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는 양인, 즉 국역 부담자의 고갈은 곧바로 국가의 붕괴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신분이 너나없이 양반을 지향했다. 17세기 이후 신분을 사서 양반 행세를 하는 이들이 맹렬하게 늘어났고, 이들이 벗어난 역의 부담을 뒤집어쓴 빈농층은 더욱 비참해졌다. 그와 함께 국가도 신역의 징발 대신 금납화를 추진하면서 신분의 통제도 점차 느슨해졌다. 18세기는 양반이 사회 계급으로 형성된 시기인 동시에 그들의 특권을 시샘하는 자들이 대거 모칭을 자행함으로써 국가의 역제에 커다란 위기가 들이닥친 시기다. 궁핍한 양인들은 이들 기생 계급의 하중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 하중이 곧 국가의 붕괴를 초래한 원동력이었다. ... 양인의 붕괴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부양자들의 몰락과 재정 파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232p

근대에 들어와 보장된 개인의 자유는 잔혹한 전제주의와 싸우기로 결단한 사람들이 마침내 이겨서 후손들에게 전한 유산이다.

246p

수감 시설의 정비는 죄수의 고통을 고려한 인도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형법 질서를 엄정히 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고도의 통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오류>

292p

1994년이었던가 태국 정부가 범법한 어떤 미국인 청년을 태형에 처할 거라고 하자

->태국이 아니라 싱가포르 정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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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의 운하길을 걷다 - 항주에서 북경 2500km 최부의 '표해록' 답사기 이상의 도서관 40
서인범 지음 / 한길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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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때 제주도에서 표류되어 중국 영파로 갔던 관리 최부의 <표해록>을 바탕으로 직접 중국 대운하를 답사한 일종의 인문 여행기다.

직접 <표해록>을 번역한 학자의 여행기라 당시 중국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지루하지 않게 여행기도 간간히 곁들여 흥미롭게 읽었다.

다만 도판이 흑백이라 아쉽고 여행 일정이 꽤 많이 삽입되어 전문적인 인문 답사기로서는 밀도가 떨어지는 듯 하다.

마치 정수일의 <라틴 아메리카를 가다>를 읽을 때 기분이랄까.

전공자의 답사기인 만큼 주제에 좀더 집중해서 썼으면 어땠을까 싶다.

책값 때문이겠지만 도판도 기왕이면 컬러로 실어주면 보는 즐거움이 배가될 것 같다.

천신만고 끝에 중국 남방에서 북경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6개월 만에 귀국하여 왕에게 표류기까지 지어 바쳤으나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참형에 처해지는 비극을 겪는다.

말년이 이렇게 비참한 줄은 몰랐던 사실이다.

표해록은 말로만 듣고 이 책에서 본문을 처음 접했는데 당대 중국 역사와 지리가 꽤나 상세해 역시 엘리트 관료였구나 싶다.

사행록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가졌는데 <열하일기> 해설서 같은 걸 읽어 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350p

그러나 최부는 禮에 해당되지 않는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곧 음사라며 거부했다. 음사로 복을 얻은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며 귀신에게 도와달라고 갈망하는 태도를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유자의 면모를 의연하게 지켜냈던 것이다.


<오류>

269p

한신은 처음에 항우를 찾아갔으나 등용되지 못했다. 그러자 한나라에 귀부해 공을 세워 한왕이 되었고

->한왕이 아니라 초왕이 되었다.

274p

경종 경태 2년에 들어서~

->경태제의 묘호는 경종이 아니라 대종이다.

287p

유방은 배다른 어린 동생 유교를 초왕으로 임명했다. 이 유교의 6대손이 바로 유주다.

->초양왕 유주는 초나라의 6대왕이나, 첫 왕인 유교의 6대손이 아니라 현손이다.

340p

효강황후 장씨는 가정 28년 1549년에 죽었다.

->무종 정덕제의 모친 장씨는 가정 21년 1541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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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 넓고 깊은 사색의 세계
허균 지음 / 다른세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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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서원에 관한 가벼운 안내 책자다.

여러 서원의 다양한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어 책 자체는 참 예쁜데 내용이 간략하여 아쉽다.

200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라 여러 곳을 소개하기는 힘든 것 같다.

서원 자체에 대한 내용 보다는 건물과 그 명칭이 갖는 유래를 주로 설명한다.

명승으로 지정된 곳도 많은 만큼 사찰 뿐 아니라 서원도 문화 답사에 많이 활용되면 좋을 듯 하다.

한국의 명승은 자연풍경 보다는 인문화된 산수 정원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유교 경전과 유학자들의 삶을 기리는 좋은 뜻을 현판의 이름으로 삼은 만큼 유교적 소양이 있어야 제대로 된 감상이 가능할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79p

논어 <태백>편에 증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153p

북송의 시인 황정견이 성리학자 주돈이의 인품을 평하며 '光風霽月'이라 표현한 바 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이 쇄락하여 광풍제월과 같고 명예를 탐하지 않고 뜻을 얻는 데 예민했다." 비가 개인 뒤의 맑고 깨끗한 달의 모습을 고결한 인격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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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 19세기 묵장의 영수 테마 한국문화사 12
이선옥 지음 / 돌베개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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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여항 문인의 대표격인 조희룡에 관한 연구서다.

꽤 많은 그림들이 전해오는 듯 하다.

좋은 도판으로 실컷 감상했다.

김정희에게 난 치는 법 등을 배웠으나 궁극적으로는 전혀 다른 미감을 선보여 과거에는 경시되었으나 최근 19세기 중인 예술가들이 주목받으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호산외기>라는 중인 전기를 남겼고 그 외 다수의 문집이 있다.

김정희와의 친분 때문에 3년이나 임자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김정희가 이른바 서권기 문자향이라는 정신을 강조한 반면, 조희룡은 수예론이라고 하여 예술적 재능을 중시했는데 매우 현대적인 예술관 같다.

1789년생이라면 다비드나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시대 화가들과 비슷한 연배이니 화가가 단순한 기예가 아닌 예술 그 자체로써 인정받던 서구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매화를 매우 즐겨 그렸고 홍매대련도나 매화서옥도 등은 은은한 색채와 어울어져 정말 매혹적이다.

매우 부유했다고 자주 언급되는데, 뭘 해서 재산을 모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어 궁금하다.

얼마 전에 읽은 현재 심사정은 사대부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나가지 못해 평생을 궁핍하게 살아 집 근처를 떠나보질 못했다고 했는데 조희룡은 비록 유배로 좌절됐으나 중국 방문 계획까지 세울 정도로 재력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희를 통해 청나라의 문화사조를 받아 들였고 자기화 시켜 예술 세계를 넓혀 나갔는데, 교류가 매우 제한적인 당시 상황이 재능있는 예술가들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인상깊은 구절>

320p

그동안 감정 있는 사람들과의 부대낌에 지쳤는지, 조희룡은 감정 없는 사물과의 사귐을 참다운 사귐이라고 하였다. 그가 사귐을 맺은 사물들이란 벼루, 붓과 같은 문방구나 서화, 골동품, 매화, 난 같은 것들이었다. 이들과의 애틋한 조우의 순간을 시로 쓰거나, 그간 자신이 즐겼던 시와 그림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였다. 그는 강가에 거주하며 맑게 수양하는 삶을 살았다. 책상머리에는 <유마경>을 두고 날마다 향을 피우고 반복해 단정히 외우느라 속세 사람과 더불어 쓸데없는 말을 언급할 겨를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잡념을 끊고, 득실을 한결같이 보고, 영예와 모욕을 잊은 채, 여유 있고 한가롭게 애오라지 한 생애를 마쳤다." 그는 그렇게 78세의 수를 누렸다.

323p

조희룡이 십여 년 전 금강산 유람 중에 여러 명스오가 이름 없는 언덕들을 보고 깨달은 바를 <이향견문록> 서문을 통해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이름난 봉우리와 이름 없는 언덕들 중에서도 빼어난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별 차이가 없다고 보았다. 단지 미처 잘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인 것이다.

334p

시서화를 두루 잘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조희룡의 일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지극히 부러운 삶이다. 그러나 신분의 차별이 분명했던 조선시대에 낮은 벼슬의 어중간한 양반으로서 지배 양반의 멸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던 그는 그 나름대로의 억울함과 분노로 괴로웠다. 그러나 문인 예술가였기에 그는 글로 써 기록하였다. 그의 분노는 시가 되고 그림이 되어 그를 더욱 빛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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