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이 만든 결정적 순간들
함규진 지음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조약이라고 해서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세계사가 결국 합의를 통한 조약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근현대사 조약들의 의미를 짚어 보고 당시 세계 정세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 역사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됐다.
핵확산금지 조약이나 남극 조약 같은 최근 이슈들도 같이 있어 흥미롭다.
다만 서독이 1970년대 동독과 기본 조약을 맺고 90년대에 통일에 성공한 반면 남한과 북한은 왜 동방 정책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할까에 대한 분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정당의 합의가 아닌 행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부치기 식이라 기존 정책이 정권 변화에 따라 왔다갔다 해서라고 설명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전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세습 왕조이기 때문이라 본다.
북한은 동독의 정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단적인 체제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26p
정묘호란 이후 양국은 각자의 강역을 지켜나가며 평화 공존을 유지했다. 청이 조선을 힘으로 정복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결코 쉬운 상대도 아닐뿐더러, 조선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사대의 틀에서 조공을 받되 조선의 정치나 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나라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36p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즉, 수단 때문에 목적을 희생하는 일이다.
138p
나폴레옹이 300년을 넘길 리가 없다고 비웃었던 이 체제는 빠른 결단과 필요한 물자의 신속한 동원이 장기인 독재 체제에 비해 전쟁과 정복에는 서투를지 몰라도, 협상과 조역을 통해 내실 있고 장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46p
그러나 실제로 도광제가 그토록 비통해했는지, 정말 중국 군민은 일부 부패한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일치단결하여 영국 침략지에게 맞섰는지는 의문이다. 그 당시 중국은 서구적 방식으로 틀이 잡힌 지금의 세계와는 생활문화, 사고방식, 정치철학, 군사기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면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부패하거나 낙후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동떨어짐이었다.
149p
영국을 상대하는 청나라가 믿을 만한 것은 먼 거리와 많은 인구뿐이었다.
158p
중화의 천명을 얻은 오랑캐 왕조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문명에 굴복하고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낯선 백인들은,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외계인이나 다름없을 서양인들은 더 이상 중화도 오랑캐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세상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에 따라 모두 동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있을 뿐이다.
185p
당시 조선은 '서양 문물은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고, 사대부는 물론 거의 모든 백성들이 이런 생각에 공감했다. 그런 마당에 개방을 추진한다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반대파에게 절호의 기회를 줄 게 뻔했다. 따라서 세도정치 세력과 싸워온 대원군은 더더욱 쇄국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경험은 그에게 主和는 매국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213p
특히 미군, 영국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가혹 행위와 소련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가혹 행위가 유명했는데 (그 사실 및 소문은 그만큰 '복수'를 유발했다), 전쟁이 총력전이 되면서 포로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어진 데가 이데올로기가 적군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민간인에 대한 유례없는 가혹 행위 역시 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다.
230p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격분한 오를란도는 회담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불씨가 된다. 일본도 자국의 요구가 거절되자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윌슨이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하며 회담장을 떠났다. ... 이로써 다수의 독일계 주민이 졸지에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현실주의가 민족자결주의에 거둔 이 승리의 후유증으로 독일의 나치스 집권이 가능해진다. 이상이든 평화든 간에 자신들이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강요받았다고 여긴 독일인들 사이에서 점차 나치즘이 싹텄다.
250p
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그토록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중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먼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의 전쟁 기피 성향이 상상 이사응로 높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 히틀러에 대한 경계심도 키운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필요하면 소련과 임시로 손을 잡더라도 히틀러를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제3제국의 패망과 독일의 분단도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뮌헨 협정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유화정책의 비극으로 곧잘 거론된다. '불량국가와 타협해서는 안 되니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급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뮌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소련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등 뒤를 받쳐 주던 소련이 사라진 다음 이라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만약 지금 중국이 없다면 북한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셈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외교적 결정에 오판은 있을지 몰라도, 어리석음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상황의 진실과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판단하고 상대는 어리석을 따름이라고 보는 정채 결정자가 있다면, 곧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70p
과도한 군비경쟁이 소련 경제를 장기적으로 거덜 내는 바람에 동쪽 진영이 제풀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이를 극복하고자 군비 축소와 경제 회생을 추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오히려 혼란과 반발만 가져와 소련의 명을 더 단축시키고 말았다.
274p
최근 미 국방부에서는 "유사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은 ANZUS이고, 그 다음이 나토"라는 보고서를 내놓아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은 신뢰도가 낮은 동맹 대상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이 안주스를 가장 신뢰하면서 그 범위를 한국, 일본, 대만 등까지 확대하지 않은 까닭은 '똑같이 영어를 사용하는 신대륙 국가이며 서구 문명의 일원'이라는 유대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길 권유하고, 그리하여 안주스와 비슷한 동북아 삼각동맹 체제 수립을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 간으 뿌리 깊은 적대감이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동맹 체제는 안주스 외에 한미 동맹, 미일 동맹 등 개별 동맹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져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처럼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 이미 1951년 초, 미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군사 개입 자체가 실수였다'는 인식 아래 하루바삐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려고 휴전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상 한국은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인데, 국지전으로 시작한 전쟁이 이미 중국을 끌어들였고 소련도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 이렇게 되자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노심초사했다. 남한의 전력이라곤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데, 미국이 물러난다면 당장에라도 북한과 중국이 밀고 내려와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것이 아닌가? ... 안주스 예를 따라 안보 동맹 조약을 맺고, 휴전 후에도 여차하면 다시 한국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승만도 그에 만족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8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 주한 미군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 내용은 안주스 조약이 동등한 국가 간의 안보 동맹인 데 반해, 한미 동맹은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형태의 동맹이라는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준다. ... 이승만은 자동 개입 조항이 없는 점과 제6조에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할 가능성을 열어 둔 점이 끝내 못마땅해 끝까지 재고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안주스나 필리핀과의 동맹을 예로 들며 입장을 관철시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발목을 잡혔지만, 공연히 연루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410p
영국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왜 피 같은 세금을 써서 무슬림 난민들을 돌봐주고,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느냐'는, 상식적인(베스트팔렌 조약 체제에서의 상식이겠지만) 의문이 끝내 EU 잔류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과실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430p
자동차나 쇠고기 등에서 한국에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판론자부터 북한의 강경한 태도와 남한의 반미 열풍을 한데 엮어 한국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일부 우파 정치인들까지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다가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 의회 내 '네오콘'들을 중심으로 FTA 회담을 그만두고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472p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여성이 당한 성적 착취에 대해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배경으로 했다. 그 이전에는? 비록 강제적이었더라도 '정조를 잃은 여인'을 좋지 않게 보는 문화 속에서, 조용히 설움을 삭여야 했던 나날이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오류>
21p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신왕국 시대'에는
->신왕국 시대는 기원전 1570~1070년까지로 기원전 16세기부터다.
18왕조의 세티 1세 때에는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인 카데시를 손에 넣었다.
->세티 1세는 람세스 2세의 아버지로 19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이다.
22p
도판에 기원전 2세기 히타이트 제국 지도로 나와 있는데, 기원전 13세기가 맞을 것 같다.
105p
미국이 포함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협정(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온 것이 1853년이고 미일화친조약인 가나가와 협정은 그 다음 해 1854년에 맺어졌다.
133p
나폴레옹은 처남인 샤를 르 클레르에게 2만 5천 명의 병력을 주어 생 도맹그로 보냈으나
->샤를 르 클레르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폴린 보나파르트의 남편으로 나폴레옹의 처남이 아니라 매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