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이 있는 옛 절터 이야기 - 옛 절터에서 전하는 역사 탐방
김남용 지음 / 일진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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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코너에 있던 책이라 최근에 나온 건 줄 알았는데 잘못 꽂아졌던 모양이다.

무려 2005년에 발간된 책이라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에서 무왕의 비로 사택왕후가 나온 내용이 없고, 선화공주 이야기만 있다.

제목대로 폐사가 된 옛 절터 중 국보와 보물이 있는 곳을 답사한 책이다.

책 표지는 촌스럽지만 본문의 사진 도판은 정말 훌륭하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프로 사진작가 못지 않게 탑이나 절을 잘 살려 주고, 도판 질이 무척 선명해 보는 즐거움이 있다.

신라와 고려 때만 해도 불교가 국교인 때라 많은 절들이 창건됐으나 조선 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쇠퇴하면서 역사적인 고찰들이 스러져 간 것 같아 무척 아쉽다.

또 서양처럼 석조 건물이 아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절터가 사라졌고 석탑이 남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남한강가에 유명한 폐사지가 왜 그렇게 많나 했더니만, 세금으로 내는 쌀의 창고가 있던 곳으로 남한강을 통해 서울로 운반했던지라 매우 번성했다.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등이 당시의 융성했던 문화를 전해 준다.


<오류>

165p

황룡사 목탑의 1층에 일본, 2층에 중화, ... 5층에 응유, 6층에 말갈, ... 9층에 예맥을 각각 배정했던 것은 이들 이웃 나라의 침략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웃하고 있는 고구려나 백제가 빠져 있는 것은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립이 삼국 통일에 대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신라가 3국 통일의 의지를 가졌다고 볼 수 없다. 5층의 응유가 바로 백제이고, 9층의 예맥이 고구려다. 당시 신라인들에게 오늘날의 민족의식을 바란다는 것은 무리다.

224p

당시 실력자였던 최우의 두 아들인 최항, 최이 등이 혜심의 제자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최우가 개명한 이름이 최이고, 그 아들이 최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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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일본, 일본의 한국 - 이천 년 한일 교류의 현장을 가다
허문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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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이 쓴 일본 속의 한국 유산인 줄 알았는데, 동아일보 기자들이 쓴 취재기다.

14명의 기자들이 각 주제별로 글을 쓴 독특한 형식의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앞어 유홍준씨 책과 도자기 이야기, 교토 이야기 등을 읽을 때 산만했던 지식들이 하나로 정리되는 느낌이다.

확실히 기자들이 쓴 책이라 그런지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는 듯 하다.

표지는 개성있고 좋은데 책에 실린 도판은 화질이나 크기가 작아 아쉽다.

일본에 이렇게 많은 한국의 유산이 있는지 새삼 깨달았고 가장 가까운 나라인 만큼 많은 교류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좋은 관계 속에서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과 교토 1만년>이라는 책에 나온 바대로 일본과 한국은 정치와 사회 체제가 매우 유사하고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에 국제적 협력이 매우 잘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문화적 교류가 좀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

이번 겨울 휴가 때 교토와 오사카에 다녀왔던 게 많은 도움이 됐다.


<인상깊은 구절>

363p

1719년 사행록인 <해유록>에서 신유한은 오사카에소 교토까지 요도가와 강(강이 가와이니 요도 강이라 해야지 않을까?)을 따라 인부들이 밧줄로 끄는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서 강변 제방이 잘 정비돼 있으며 건물이 정교하고 깨끗한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한탄스럽다. 부위영화가 잘못되어서 이런 흙으로 빚은 꼭두각시 같은 자들에게 돌아갔으니..."

전쟁을 일으킨 야만의 나라에 이렇게 부가 축적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류>

42p

왕인 박사는 또 고대 일본 귀족들이 짓거나 암송했던 전통 정형시 와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905년 발간된 노래집 <고금화가집>은 <나니와쓰의 노래>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왕인 박사를 '와카의 아버지'라고 적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고금화가집>의 저자가 왕인 박사를 와카의 창시자로 잘못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시집인 <만엽집>을 보면 와카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잘 보여주는데, 후대 사람인 왕인이 와카를 창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83p

고닌 왕의 정실 부인은 45대 쇼무 왕의 딸로, 고닌 왕과는 9촌 사이였다.

->고닌은 덴지의 손자이고, 쇼무 왕의 딸은 덴무 왕의 현손이므로 9촌이 아니라 8촌 간이다.

115p

선광왕의 4대손인 경복왕의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의 증손이 경복왕이므로, 선광의 4대손이 아니라 3대손이다.

262p

일본 무사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미나모토노 요시미쓰가 신라선신당 앞에서 성인식을 치르고 아예 성을 '신라'로 바꾼 것이다.

->앞서 읽은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이라는 책에서 본 내용으로 당시에도 이상해서 찾아보고 오류임을 확인했던 부분이다.

미나모토 가문과 신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당시 무사들이 성인식을 한 신사를 이름 앞에 밝힘으로써 소속감을 나타냈다고 한다.

신라사부로는 한자로 신라삼랑인데, 신라신사 앞에서 성인식을 한 미노모토 가문의 셋째 아들, 즉 三郞이란 뜻이다.

큰 형은 하치만 신사에서 성인식을 해 이름 앞에 하치만 太郞, 둘째 형은 가모 신사에서 해서 가모 次郞, 막내 요시미쓰는 신라 신사에서 해 신라 三郞인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국에서 이런 부분을 꼼꼼히 확인해 보지 않고 마치 정설인 양 방송하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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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으로 보는 세계사 강의 - 화해와 배신, 강압과 화합이 만든 결정적 순간들
함규진 지음 / 제3의공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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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조약이라고 해서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세계사가 결국 합의를 통한 조약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특히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근현대사 조약들의 의미를 짚어 보고 당시 세계 정세를 설명해 주는 방식이 역사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됐다.

핵확산금지 조약이나 남극 조약 같은 최근 이슈들도 같이 있어 흥미롭다.

다만 서독이 1970년대 동독과 기본 조약을 맺고 90년대에 통일에 성공한 반면 남한과 북한은 왜 동방 정책의 성공을 이어가지 못할까에 대한 분석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저자는 단순히 한국의 정치 상황이 정당의 합의가 아닌 행정부의 일방적인 밀어부치기 식이라 기존 정책이 정권 변화에 따라 왔다갔다 해서라고 설명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전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세습 왕조이기 때문이라 본다.

북한은 동독의 정치 환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극단적인 체제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26p

정묘호란 이후 양국은 각자의 강역을 지켜나가며 평화 공존을 유지했다. 청이 조선을 힘으로 정복하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결코 쉬운 상대도 아닐뿐더러, 조선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한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사대의 틀에서 조공을 받되 조선의 정치나 체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명나라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36p

법조문을 엄격히 준수하는 일은 선량한 시민의 중대한 의무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의무는 아니다. 법률 문구에 집착하느라 조국의 파멸을 불러온다면 그것은 법 자체를 파멸시키는 일이다. 즉, 수단 때문에 목적을 희생하는 일이다.

138p

나폴레옹이 300년을 넘길 리가 없다고 비웃었던 이 체제는 빠른 결단과 필요한 물자의 신속한 동원이 장기인 독재 체제에 비해 전쟁과 정복에는 서투를지 몰라도, 협상과 조역을 통해 내실 있고 장기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146p

그러나 실제로 도광제가 그토록 비통해했는지, 정말 중국 군민은 일부 부패한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일치단결하여 영국 침략지에게 맞섰는지는 의문이다. 그 당시 중국은 서구적 방식으로 틀이 잡힌 지금의 세계와는 생활문화, 사고방식, 정치철학, 군사기술에 이르기까지 온갖 면에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부패하거나 낙후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동떨어짐이었다.

149p

영국을 상대하는 청나라가 믿을 만한 것은 먼 거리와 많은 인구뿐이었다.

158p

중화의 천명을 얻은 오랑캐 왕조는 예외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문명에 굴복하고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낯선 백인들은, 중국인들이 보기에는 외계인이나 다름없을 서양인들은 더 이상 중화도 오랑캐도 없다고 못을 박았다. 세상에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원칙에 따라 모두 동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있을 뿐이다.

185p

당시 조선은 '서양 문물은 백해무익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굳어져 있었고, 사대부는 물론 거의 모든 백성들이 이런 생각에 공감했다. 그런 마당에 개방을 추진한다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반대파에게 절호의 기회를 줄 게 뻔했다. 따라서 세도정치 세력과 싸워온 대원군은 더더욱 쇄국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경험은 그에게 主和는 매국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했다. 

213p

특히 미군, 영국군 포로에 대한 일본군의 가혹 행위와 소련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가혹 행위가 유명했는데 (그 사실 및 소문은 그만큰 '복수'를 유발했다), 전쟁이 총력전이 되면서 포로까지 챙겨줄 여유가 없어진 데가 이데올로기가 적군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을 퍼뜨렸기 때문이다. 민간인에 대한 유례없는 가혹 행위 역시 세계인들을 경악시켰다. 이에 따라 '전쟁범죄'라는 개념이 주목받았다.

230p

이 명백한 차별 대우에 격분한 오를란도는 회담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이는 훗날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불씨가 된다. 일본도 자국의 요구가 거절되자 회담을 거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윌슨이 마지못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 이번에는 중국이 반발하며 회담장을 떠났다. ... 이로써 다수의 독일계 주민이 졸지에 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현실주의가 민족자결주의에 거둔 이 승리의 후유증으로 독일의 나치스 집권이 가능해진다. 이상이든 평화든 간에 자신들이 지나치게 가혹한 대가를 강요받았다고 여긴 독일인들 사이에서 점차 나치즘이 싹텄다.

250p

왜 체임벌린과 달라디에는 그토록 멍청한 실수를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신중한 계산의 결과였다는 주장은 먼저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들의 전쟁 기피 성향이 상상 이사응로 높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 히틀러에 대한 경계심도 키운 두 나라의 지도자들은 필요하면 소련과 임시로 손을 잡더라도 히틀러를 없애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전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제3제국의 패망과 독일의 분단도 피치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뮌헨 협정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유화정책의 비극으로 곧잘 거론된다. '불량국가와 타협해서는 안 되니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급된다. 하지만 히틀러가 뮌헨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소련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등 뒤를 받쳐 주던 소련이 사라진 다음 이라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만약 지금 중국이 없다면 북한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정치의 셈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외교적 결정에 오판은 있을지 몰라도, 어리석음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상황의 진실과 상대의 진의를 섣불리 판단하고 상대는 어리석을 따름이라고 보는 정채 결정자가 있다면, 곧 자신이야말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70p

과도한 군비경쟁이 소련 경제를 장기적으로 거덜 내는 바람에 동쪽 진영이 제풀에 주저앉았다. 뒤늦게 이를 극복하고자 군비 축소와 경제 회생을 추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오히려 혼란과 반발만 가져와 소련의 명을 더 단축시키고 말았다.

274p

최근 미 국방부에서는 "유사시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은 ANZUS이고, 그 다음이 나토"라는 보고서를 내놓아 한국과 일본, 필리핀 등은 신뢰도가 낮은 동맹 대상임을 고백하기도 했다. 미국이 안주스를 가장 신뢰하면서 그 범위를 한국, 일본, 대만 등까지 확대하지 않은 까닭은 '똑같이 영어를 사용하는 신대륙 국가이며 서구 문명의 일원'이라는 유대감도 얼마간 작용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길 권유하고, 그리하여 안주스와 비슷한 동북아 삼각동맹 체제 수립을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한일 간으 뿌리 깊은 적대감이 그런 가능성을 차단했다. 결국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안보 동맹 체제는 안주스 외에 한미 동맹, 미일 동맹 등 개별 동맹의 집합으로만 이루어져 오늘날 아시아가 유럽처럼 하나의 연합체를 이루지 못하고 각자 제 갈 길을 가게 된 한 원인이 되었다. ... 이미 1951년 초, 미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군사 개입 자체가 실수였다'는 인식 아래 하루바삐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려고 휴전협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상 한국은 애써 지킬 필요가 없는 변방 중의 변방인데, 국지전으로 시작한 전쟁이 이미 중국을 끌어들였고 소련도 실질적으로 개입하고 있어서 자칫하면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 이렇게 되자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노심초사했다. 남한의 전력이라곤 사실상 제로에 가까운데, 미국이 물러난다면 당장에라도 북한과 중국이 밀고 내려와 한반도를 적화통일할 것이 아닌가? ... 안주스 예를 따라 안보 동맹 조약을 맺고, 휴전 후에도 여차하면 다시 한국을 돕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승만도 그에 만족하고, 휴전협정 체결 후인 1953년 8월 8일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 주한 미군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이 내용은 안주스 조약이 동등한 국가 간의 안보 동맹인 데 반해, 한미 동맹은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는 형태의 동맹이라는 본질적 차이를 나타내준다. ... 이승만은 자동 개입 조항이 없는 점과 제6조에 일방적으로 동맹을 파기할 가능성을 열어 둔 점이 끝내 못마땅해 끝까지 재고를 요청했지만, 미국은 안주스나 필리핀과의 동맹을 예로 들며 입장을 관철시켰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발목을 잡혔지만, 공연히 연루될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410p

영국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왜 피 같은 세금을 써서 무슬림 난민들을 돌봐주고,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들의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하느냐'는, 상식적인(베스트팔렌 조약 체제에서의 상식이겠지만) 의문이 끝내 EU 잔류로 기대되는 여러 가지 경제적, 정치적 과실을 무시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430p

자동차나 쇠고기 등에서 한국에 너무 많이 양보했다는 비판론자부터 북한의 강경한 태도와 남한의 반미 열풍을 한데 엮어 한국과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일부 우파 정치인들까지 부시 행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다가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자 미 의회 내 '네오콘'들을 중심으로 FTA 회담을 그만두고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472p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여성이 당한 성적 착취에 대해 국제적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배경으로 했다. 그 이전에는? 비록 강제적이었더라도 '정조를 잃은 여인'을 좋지 않게 보는 문화 속에서, 조용히 설움을 삭여야 했던 나날이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오류>

21p

기원전 15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신왕국 시대'에는 

->신왕국 시대는 기원전 1570~1070년까지로 기원전 16세기부터다.

18왕조의 세티 1세 때에는 아나톨리아까지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인 카데시를 손에 넣었다.

->세티 1세는 람세스 2세의 아버지로 19왕조의 두 번째 파라오이다.

22p

도판에 기원전 2세기 히타이트 제국 지도로 나와 있는데, 기원전 13세기가 맞을 것 같다.

105p

미국이 포함으로 일본을 개항시킨 가나가와 협정(1853년)

->페리 제독이 일본에 온 것이 1853년이고 미일화친조약인 가나가와 협정은 그 다음 해 1854년에 맺어졌다.

133p

나폴레옹은 처남인 샤를 르 클레르에게 2만 5천 명의 병력을 주어 생 도맹그로 보냈으나

->샤를 르 클레르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폴린 보나파르트의 남편으로 나폴레옹의 처남이 아니라 매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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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술가 - 인물로 보는 한국미술사 서울대박물관 수요교양강좌 시리즈 1
안휘준 외 지음 / 사회평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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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수요강좌라는 프로그램에서 일반인 상대로 강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모양이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1995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직장 때문에 이런 좋은 강좌를 한번도 들은 적이 없어 아쉽다.

강사들 면면이 화려하다.

현역 서울대 교수들이 일반인 대상으로 이런 격조높은 강연을 무료로 진행하다니, 정말 의미있는 일 같다.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도판이나 편집 상태가 조악한 점이 아쉽다.

산수화는 거의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렵고 색이 들어간 수묵담채화나 뒷부분에 실린 현대 화가들의 작품은 볼만 하다.

내용 자체는 아주 알차고 유익하다.

우리 역사에 남을 유명화가들이라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금 무한한 관심과 애정이 생긴다.

정선과 김홍도는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작품이 너무 익숙해 별 감흥이 없었는데 책에 실린 도판들을 보면서 얼마나 위대한 화가인지 새삼 느꼈다.

정선의 산수화는 과연 관념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무엇이 다른지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고 개성있고 김홍도는 못하는 주제가 뭐였나 싶을 정도로 온갖 방면에 능력을 발휘했던 듯 하다.

그림과 한시가 어우러진 수묵화가 비록 제대로 이해는 못하지만 보는 즐거움이 크다.

조희룡의 화려한 매화 그림이나 서옥도 등도 매우 감각적이다.

현대 화가 편에 실린 김환기와 장욱진 그림도 무척 인상깊게 봤다.


<인상깊은 구절>

91p

술을 좋아하는 활달하고 파격적인 일면을 지녔다는 점에서 최북이나 장승업과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명국은 두 사람처럼 기행과 일탈적 행위를 일삼지 않았으며 60평생 동안 화원이라는 직분을 잊지 않고 도화서라는 제도 안에서 국가의 일정한 회화 업무를 묵묵히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다르다.

98p

공재도 격물치지게 있어서 마음 밖에 별도의 理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여 바깥 세계의 사물을 실제로 경험하고 증명함으로써 실제적인 이해를 추구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음악, 패관소설, 병서, 공장, 기교 등 다방면에 걸쳐 학식을 넓히게 되었다. 이는 마음 수양에 중점을 두고 있던 당시 성리학의 일반적 학문 경향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형상과 같은 이는 공재의 학문에 대해 그 번잡함을 경계하면서 비판과 충고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공재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격물치지론은 모든 학문의 출발점이자 방법론으로서 근대적인 사고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식론이었다.

138p

조선 후기에 갑자기 윤두서, 정선, 조영석, 심사정, 이인상, 강세황 등 기라성 같은 선비화가들이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서화에 대한 선비 계층의 적극적인 참여와 후원은 조선 후기 화단이 풍성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이것은 17세기까지 조선화단을 장악하였던 최고의 화가들이 김명국과 이징 같은 직업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비된다. 조선 후기의 선비들은 이전의 직업화가들이 그린 기교가 넘치고 격조가 떨어지는 그림 대신에 선비 특유의 아담한 정취와 예술적 품위가 드러난 그림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새로운 자료를 통하여 배울 수 있게 된 중국의 문인화풍에 관심을 가졌다.

174p

심사정은 조선 후기 남종산수화를 이끌었던 문인화가로서 당시 문인들이나 감식가들로부터 "그림에 '아치', '운치', '고상함'이 있으며, 우리나라 천 년간에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현재 그에 대한 평가는 좀 다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심사정을 중국적 색채가 짙은 화가로 말하고 있다. 그 말의 의미가 조선의 경치나 인물이 아닌 것을 그렸다는 뜻이라면 조선시대의 많은 작품들, 심지어 정선의 작품조차도 중국적 냄새를 풍긴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심사정에 대한 당시의 높은 평가는 그가 추구했던 회화의 세계가 그 시대의 미적 기준과 일치했으며, 그 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210p

강세황은 문인화의 보편적 가치를 이상으로 삼아 한국적 문인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였다. 일생 문인화의 본질을 추구한 그 자리에 조용하고 담담하며 고상한 강세황 개인의 문인화가 뿌리내렸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맑고 담박하며 상쾌하고 시원한 기운은 바로 한국적 '담박,소쇄'로서 그가 본보기로 삼았던 중국 문인화의 그것과 차별성을 가진다. 이러한 차이는 일차적으로 공간 구성, 붓과 먹의 사용, 채색의 성질 등 그가 구사한 개성적 양식에서 오는 것이며, 그 그원은 그의 체질인 한국적 미감에 닿아 있다. 

254p

회화와 같은 예술세계는 산림처사나 고관대작의 일상과는 별개의 것으로 그것을 담당하는 인물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그림이 사대부 문화의 한가한 취미로 취급되고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반발하여 회화예술의 독자적 의의를 강조한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부심은 예술세계에 몰입하는 전문학의 견해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조희룡의 예술관은 당시 문인들의 회화관과는 크게 구별되는 독특한 것으로, 그의 화풍의 변화과정과도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 이는 예술의 효용을 인격을 수양하거나 학문을 닦는 데에 두었던 유교적인 예술관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 것이다.

355p

이들 세대들은 주로 화면에서 서양과 대비되는 동양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이후의 세대들이 집단적인 정체성보다는 개개인의 정체성 탐구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과 대조가 된다. 김환기의 경우 자연에 대한 그의 남다른 애정은 한국의 산과 달, 바람, 구름, 나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의 일기에 나타나 있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별들과 함께 있기에..."

376p

마치 수묵산수화를 보는 듯한 이 작품은 고고한 모습으로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학이나 초막의 인물, 강이 등장해 도상학적으로나 작가적 심상으로나 전통적인 문인화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장욱진의 태도는 그림 그리기를 일종의 취미로 인식하였떤 문인들의 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양식적인 면에서 문인화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에 있어서는 서구식의 작가 개념에 해당하는 모더니스트였다. ... 서구의 새로운 사조에 빨리 적응하여 그들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 한국의 미술을 세계화하는 지름길이라고 믿었던 시대에 장욱진의 동화적인 이상적인 세계는 과거를 따라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또한 보통 300~400호의 거대한 작품과 영웅적인 태도가 대접을 받던 시대 속에서 장욱진의 '작고 예쁜' 그림들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류>

169p

호응박토도 (胡鷹搏兎圖)

->오랑캐 胡가 아니라 호걸 豪가 맞지 않을까? 검색해 보니 두 가지 한자가 다 나오긴 하는데 豪가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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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 바이킹의 바다, 북유럽의 숨겨진 보석 KMI 세계의 바다 시리즈 1
김융희 외 지음 / 바다위의정원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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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독특한 형식의 책이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을 때는 막연히 바이킹 이야기 내지는 발트해 연안 나라들의 역사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데 막상 실물을 받아보니 300 페이지 정도의 적은 분량이지만 도판이 정말 선명하고 여러 필자들이 모여 발트해의 역사와 각 나라들의 문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풀어써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The Ocean>이라는 잡지에서 발간한 책이라고 한다.

출판 양식이 너무 신선해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막연히 발트해라고 하면 바이킹의 나라, 추운 북해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한자 동맹으로 대표되는 중계무역의 꽃이었다.

대서양 무역만 조명됐던지라 그 윗쪽에 이렇게 활발한 무역이 이루어졌는지 처음 알았다.

확실히 나도 서유럽 중심의 세계사를 배우긴 한 모양이다.

박물관 소개나 예테보리와 말뫼의 도시 재생 사업, 크루즈 여행 등도 역사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도자기와 청어 요리 소개도 신선했다.

조용준씨의 유럽 도자기 여행을 참 재밌게 읽었는데 여기 실린 글은 그 책에서 그대로 가져와 다소 아쉽지만 너무나 매혹적인 북유럽 도자기 사진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잡지사에서 만든 책이라 그런가 도판이 정말 훌륭하다.


<인상깊은 구절>

82p

러시아산 곡물이 노동자의 가계에 가장 중요한 식비를 안정시켜 임금 상승의 동기를 지연함으로써 영국의 산업혁명이 순항할 수 있게 도운 셈이었다. ... 값싼 폴란드산 곡믈이 아니었다면 네덜란드는 더 많은 인력과 자본을 농업에 투입해야 했을 것이고, 러시아의 목재, 아마, 대마 없이 영국의 세계 항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러시아의 수지, 곡물 등이 없었다면 영국의 산업혁명은 좀 더 지체됐을 것이다.

100p

1830년과 1848년에 프랑스 파리의 시민은 정부군을 무력으로 제압해서 혁명을 일으켰다. 이때만 해도 정부군과 봉기 시민의 무장에는 큰 격차가 없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1871년 파리코뮌이 보여주듯 봉기 세력이 아무리 용감하더라도 눈부시게 발달한 과학기술을 응용해 만든 첨단 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을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시민이 군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이때의 군대는 용병대가 아니라 국민개병제 원칙에 따라 징집된 국민군이었다. 계기만 마련되면 국민군이 시민 편에 설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다. 20세기 군대는 혁명 세력에게 제압이 아닌 회유의 대상이었다. 지난 300년 동안 그토록 굳건히 체제를 지켜온 군대가 1917년에는 오히려 체제를 무너뜨리는 혁명의 진앙이 되었다.

271p

르네상스 시대의 상인이 직물산업 위에 피렌체를 세웠듯이, 네덜란드는 16세기 말 상인 자본으로 청어산업 위에 근대국가를 세우고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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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23-07-1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마린님
이 책의 유일한 리뷰어인 마린님의 리뷰를 보니 호평 일색인데,,,,그냥 보기엔 오성도 충분한 것 같은데 왜 별은 스리스타인지 궁금해서요 ㅎㅎ 전체적인 호평에도 불구하고 책의 분량이 적어서 하나, 조용준씨 도자기 글이 재탕이어서 둘....그렇게 별 두개가 빠진건가요?? ㅎㅎㅎ 저는 처음에 별만 보고 좀 시시한 책이구나 했는데 마린님 리뷰를 읽어보니 구매욕이 급상승해서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