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귀신들 - 대한민국 수재 2,000명이 말하는 절대 공부법
구맹회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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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아직도 이런 책을 졸업하지 못하는 걸까?

이른바 서울대 들어가는 학생들이 이런 책을 읽을 리가 없고 (오히려 이런 책에 수기를 올려줘 소정의 돈을 받을 것이고) 설마 이런 공부법 읽고서 서울대 갈 리도 없을텐데 말이다.

자기계발서로 성공하는 사람은 그 책을 써서 돈버는 저자 뿐이라던데.

합격할 시험도 없는데 여전히 공부법 관련 책을 들여다 보는 까닭은, 효율적인 독서 생활을 위해서다.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더 정확히는 바쁜 일상에서 어떻게 독서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

읽은 내용을 좀더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까.

책의 주제를 파악하고 요점 정리하는 독서법은 어떤 것일까 등등.

항상 느끼는 바지만 특별한 비결은 없고 다만 목표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 위해 끊임없이 자극을 줄 필요가 있다.

책에 소개된 핵심 중 하나가 스몰 스텝 전략이다.

다른 책에서도 무수히 보아온 얘기다.

작은 성공을 되풀이 하라.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은, 실패는 또다른 실패를 부른다가 현실이다.

거대한 목표는 이루기 어려우니 목표를 잘게 쪼개 하나씩 달성해 가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1년치 거창한 계획보다는 큰 목표를 세운 다음, 분기별로, 월별로, 주별로, 더 어려우면 1일 계획으로까지 쪼개는 것이다.

약간 독창적인 이 책의 아이디어로는, 1주일을 두 개로 나눈다.

월화수, 목금토로 나누어 일요일 저녁에 전반기 계획을 세우고 수요일 저녁은 비워놓은 뒤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고, 후반기 계획을 세운다.

토요일 오후 역시 비워놓고 후반기를 마무리 한 뒤 1주일에 부족했던 부분은 다시 일요일에 보충한다.

예비 시간을 두라는 의미다.

100% 달성은 어렵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내 경우에도, 평일에는 바쁘기 때문에 주말에 몰아서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오히려 주말이 더 바쁘고 쉬고 싶은 욕구 때문에 진도가 안 나간다.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 암기법이다.

어떤 방식이 최적의 암기법일까?

기억의 궁전이니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얘기는 나한테는 도움이 안 됐고, 에빙하우스 망각의 곡선을 이용해 하루, 1주일, 한 달의 간격 복습법이 그나마 나은 것 같다.

기억에서 약간 지워질만 할 때 다른 맥락에서 내용을 접하면 확실히 머리에 각인이 된다.

목차를 보면서 내용을 정리하거나, 백지에 배운 내용을 적어 보라는 말도 실천해 볼만 하다.

역사책의 사건이 일어난 해를 외울 때 나만의 방식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에 일어났는데 17=8+9 이런 식으로 외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이니까 5->7로 홀수로 늘어난다고 외운다.

프랑스의 7월 혁명과 2월 혁명의 순서도 헷갈려서 1학기 말이 7월이고 2학기 말이 2월이라고 외웠다.

서양의 왕위 계승 순위도 늘 헷갈린다.

존엄왕 필리프 2세, 성왕 루이 9세, 광인왕 샤를 6세 이런 식으로 특징이 있으면 쉬운데 그 외 왕들은 구별이 어렵다.

그래서 나름대로 법칙을 만들어서 외운다.

필리프 4세는 네 명의 자녀가 다 왕위에 올랐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그리고 에드워드 2세의 부인인 이자벨이다.

미술사에서 화가들의 생존연대를 외울 때는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을 기준으로 그 사람보다 앞에 사람인가 뒤에 사람인가를 대략적으로 추측해 본다.

이를테면 인상파의 시작인 마네가 1830년대 사람이고 모네는 1840년, 고흐는 1850, 클림트는 1860, 마티스는 1870, 피카소는 1880, 샤갈 1890 달리 1900 이런 식으로 대략적인 연대를 설정하고 나머지 화가들은 앞뒤로 집어넣어 어느 시대 사람인지 가늠한다.

요즘 우리 옛 화가들에 대해 읽고 있는데 이 때도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48년 생이므로 정선이나 김홍도가 대략 이 사람보다 앞섰나 뒷섰나로 당시 서양 화단과 비교해 보면 입체적으로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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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 개정판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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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출간됐던 구판이 다른 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온 모양이다.

만화 특유의 생략성 때문에 내용이 평이하고 가볍고 지극히 단순화 시켰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신 쉽게 잘 넘어간다.

1권부터 5권까지 일독하고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어 볼 생각이다.

과거의 역사가 과연 현재의 1:1 거울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시대든 그 시대만의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매우 위험하고 역사학의 진정한 목적도 아니라고 본다.

저자는 십자군 전쟁을 부시의 이라크 침공과 계속 비교하고 있는데 단순히 흥미를 끌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면 1차원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역사적 사건이 현대를 비판하는 도구로 쓰일 수 있을까?


<인상 깊은 구절>

172p

고향에서의 삶을 버리는 것이라 해도, 그들은 떠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고향에 붙들어 매어놓을 수 있는 물질적 혜택이 전혀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쉽게 고향을 떠났다. 순례자들의 배낭 속에 들어 있는 물품은 초라했다."

203p

때로 지식인들은 '순례'라는 이념 자체를 의심하였다. "한 학생은 '예루살렘이나 다른 성지에 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요?'하고 묻는다. 그러자 선생은 '여행에 드는 비용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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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실록 - 화려한 이름 아래 가려진 공주들의 역사
신명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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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인터넷 검색하다가 조선시대 공주들의 삶이 언급되어 정리하는 기분으로 재독했다.

금방 읽을 줄 알았는데 가계도가 복잡하게 얽혀서 시간이 좀 걸렸다.

사료를 성실하게 분석한 책이라 야사 위주가 아니라 신뢰도가 있다.

유명 공주 몇 명에 국한되어 아쉽긴 하지만 워낙 자료가 부족해 이해가 된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조선 시대 저주 사건들이다.

청나라에 항복하고 충격이 너무 컸던 탓일까, 인조는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옆에서 부추기는 조귀인과 함께 많은 궁녀들을 죽인다.

그런데 다음 왕인 효종 역시 저주 사건의 주범으로 조귀인의 딸인 효명옹주를 지목하여 어머니와 남편을 사사시켰다.

생각해 보니 장희빈도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하여 남편에게 죽임을 당했다.

당시 사람들은 저주가 정말로 효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귀신을 믿지 않는 유학이 국시인 나라에서?

마녀재판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를 해야 하나 싶다.

한 가지 또 기록해 두고 싶은 것은, 고종의 딸 덕혜옹주의 출생 시기다.

말년에 믿고 의지한 엄귀비가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하나 뿐인 아들이 임종도 지키지 못했는데 너무나 뜻밖에도 그 달에 복녕당 양씨를 임신시켜 엄비 사망 10개월 만에 덕혜옹주가 태어난다.

젊은 청년왕도 아니고 60이 넘은 노인왕의 정력이 놀랍고 오늘날의 기준으로 당시 사람들을 볼 수 없는 듯 하다.

유교적 의례, 특히 상례 절차가 까다로워지면서 상중이나 제사 기간에는 금욕을 해야 하는 날이 많았고 조선 후기에 왕비들의 출산력 저하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논문을 본 적이 있다.

구한말이라 이미 이런 금기는 사라져 버린 것인가, 아니면 부모나 정식 왕비가 아닌 일개 후궁의 상중이었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었던 것인가 궁금하다.


<오류>

22p

태종이 처음 염두에 두었던 정선공주의 사윗감은 이속의 아들이었다.

->보통 이 고사는 정선공주가 아니라 노비 출신 후궁 신빈 신씨의 딸 정신옹주와의 혼담을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위키를 찾아보니 태종실록에 실려 있는 얘기다.

166p

설상가상 8월 2일에 세자빈 장씨의 큰 딸, 곧 인조의 손녀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인조는 누군가가 조 귀인과 세자빈 장씨를 저주했다고 믿었다.

->세자빈 장씨(인선왕후)의 큰 딸 숙신공주는 책에 나온 1645년에 죽은 것이 아니라 봉림대군이 심양으로 떠나던 1637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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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명가 안동김씨 표정있는 역사 4
김병기 지음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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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를 정국을 주도했던 세도정치의 대명사 안동 김씨 가문이 항상 궁금했는데 마침 이 주제의 책이 있어 반가웠다.

세도정치라는 이미지가 워낙 나빠서 그런지 비판하는 글만 보다가 일방적인 비난에 그치지 않고 왜 세도정치가 가능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과, 개개인의 삶에 대해 보다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내용이라 신선하다.

특히 정조가 왜 김조순을 사돈으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다.

세도정치를 시작한 사람이 바로 김조순이고 정조의 죽음 이후 안동 김씨에게 정국이 넘어가게 됐지만 김조순 개인은 비교적 기개있는 사대부였고 주위를 잘 조정하는 온화한 성품이었다고 한다.

유서깊은 사대부 가문이면서 개인적인 특성이 더해져 정조의 눈에 들었던 모양이다.

순원왕후의 한글 편지를 읽었을 때도 느낀 바지만, 수렴청정을 행했던 대비들은 근본적으로 중국의 여태후나 서태후처럼 권력욕이 강한 여인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뒤로 물러나 있는 전형적인 조선의 조신한 여성들이라고 할까.

책에 따르면 정순왕후 역시 친정의 원수갚음이 끝나고서는 딱히 세도를 부릴 의지가 없었다고 한다.

순원왕후 역시 가문에 의해 세도정치가 행해졌을 뿐 개인적으로는 권력욕 보다는, 남편과 자식 넷 모두를 먼저 보낸 불행한 삶이 더 와 닿는다.

대비들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왕들이 단명하고 어린 왕이 즉위해도 왕실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책에도 나온 바지만 세도정치는 단지 왕의 권위에 기대는 일시적인 권력 독점 현상이었을 뿐, 조선처럼 역성혁명을 일으킬 실제적인 힘이 없었다.

당장 대원군이 즉위한 후 일순간에 안동 김씨 가문이 무너져 버린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인상깊은 구절>

96p

하지만 송시열은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사는 길이었으며,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길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오늘날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꽉 막히고 답답한 것이라 해도. 격렬한 투쟁과 지독한 싸움은 싸우는 자의 위치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 보면 허무한 것이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가치이자 이상이었다. 따라서 송시열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게 자신의 뜻을 고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27p

흔히 실학을 지지한 개혁군주로 일컫어지는 정조이지만 실제로 그의 통치를 보면 굉장히 보수적인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문체에 있어서 그러했는데,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문체반정이었다. ... 정조의 문체반정은 청나라 문자의 옥처럼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해할 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당대의 문체를 왕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뜯어고쳤다는 면에서는 마찬가지로 지독한 정책이었다.

135p

정순왕후 김씨는 비록 대리청정을 통해 정권을 잡았고 스스로 女君을 자처했지만 친정의 원한을 갚겠다는 인념 이외에 정치에는 별다른 욕심이 없었던 듯하다. 1804년 6월 23일 조정 조회 때 도착한 언문교지를 본다면 정순왕후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세평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조금은 의외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모든 오욕과 비난을 무릅쓰고 정권을 잡고 휘두를 만큼 담대한 여인도 아니었던 것 같다.

139p

흔히 후궁이라고 하면 어쩐지 격이 떨어지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많은 후궁들이 사대부의 딸 중에 간택되어 입궁하곤 했다.

144p

김조순이 어디까지나 사대부이자 양반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문집인 <풍고집>에서는 사대부이자 외척 그리고 세도가로서 자신의 입장을 고뇌하는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척신이라고 해도 현명한 사대부의 자세를 지킨다면 사대부이다."

... 국구가 된 뒤에도 실권 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나서서 드러내놓고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나라 안에서 그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다. ... 그를 평가한 문헌들은 김조순이 아랫사람에게 너그러웠으며,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세도정치를 펼쳐 조선을 망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현재의 편견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172p

... 세도정치의 근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아무리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라고는 해도 나라의 주인은 여전히 왕이었고, 상징이든 어떻든 권력의 향방을 쥐고 있었다. 누가 왕의 배필이 되고 외척이 되느냐가 왕비 친정붙이의 몰락과 번성을 초래하는 열쇠가 되었다. ... 결국 세도정치란, 양반들이 나라의 전권을 장악하고 누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이 제 역할을 못하는 특수상황에서 그에 기생한 권신 가문들이 왕을 대신하는 정치체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세도정치가 가장 타락한 정치형태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어떻게 본다면 가장 사대부다운 정치체제였다. 따라서 혼자서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새로운 외척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왕을 잃으면 맥없이 힘을 잃고 무너졌다. 흥선대원군이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이후 어떻게 안동김씨가 몰락했는지를 보면 그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3p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김병기는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우리는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고 살아왔으므로 사직과 함께 존망을 같이해야 하니 너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 대원군은 김병기를 미워하기는 했지만 그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213p

아직까지도 친일파 청산과 관련하여 말이 많지만 이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행하며 삶을 불살랐던 인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단군 이래 최대의 국가번영을 누리면서 세계와 어깨를 겨루며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류>

72p

세종의 6대 손으로 뒷날 영의정에 올랐던 이경여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경여는 세종의 7대손이고, 아들인 밀성군의 6대손이다.

81p

김상헌은 슬하에 아들이 없어, 아우 김상관의 아들 김광찬을 양자로 삼았다.

->김상헌은 김극효의 4남이고, 김상관은 차남이므로, 아우가 아니라 형이다.

83p

28세 때는 중시 을과에서 또다시 장원을 했다.

->중시 을과가 아니라 문과 중시에서 을과로 합격했다.

84p

서인들은 인선왕후를 장렬왕후의 둘째 아들(인종)의 아내로 보아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이 아니라 효종이다.

159p

안동김씨가 이미 다음 대의 왕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던, 순조의 손자라는 뜻으로 仁孫으로까지 부르게 했던 이하전이 아닌 이원범을 다음 대의 왕으로 정하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세도정치가 계속되려면 왕이 똑똑해서는 안 되었다.

->다른 책에서 본 바에 따르면 이하전은 덕흥대원군 가인 도정궁의 사손으로 당시 왕가와는 혈연관계가 없고, 이원범은 헌종과 7촌 사이로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당연히 1순위로 왕위에 추대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부러 멍청한 왕을 골라 온 게 아니라는 얘기다.

170p

김문근은 6창 중 하나인 김창협의 현손으로 같은 안동김씨라고는 하지만 김창집의 후손이었던 김조근, 김좌근과는 조금 갈래가 달랐다.

->김문근은 김창집의 외아들 김제겸의 셋째 아들인 김원행의 증손으로 김창집의 후손이다. 다만 김원행이 김창협의 아들 김숭겸의 양자로 가서 족보상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한 김문근은 김성행의 손자인 김이순의 양자로 가기 때문에 족보상으로도 김창협이 아닌 김창집의 후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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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중국현대사 대장정 - 왕초 PD와 1만 2800km 중국 인문기행을 떠나다
윤태옥 글.사진 / 책과함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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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홍군의 대장정은 말만 들었지 실제로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전혀 몰랐는데 답사기 형식으로 쓰여져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현대사는 아직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가급적 안 읽는 편이다.

특히나 인터넷 논객이랍시고 설전을 쏟아내는 요즘의 경망스러운 세태를 혐오하는 나로서는 그나마 가장 최근의 현대사를 접한 셈이다.

왜 장제스가 패할 수 밖에 없었는가, 마오쩌둥이라는 혁명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는가 등을 흥미롭게 읽었다.

앞에 소개된 마오쩌둥이 버려진 아내들 이야기에서는 같은 여자라 그런지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했다.

미투 운동 같은 요즘 분위기로 본다면 혁명 동지였던 아내를 둘씩이나 버리고 대장정 기간 동안에 어린 여자를 취하는 마오쩌둥의 행동은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할 것 같다.

고향에서 처음 결혼한 아내는 3년 살다 죽고 말았는데 단 한 번도 부부관계를 맺지도 않았다고 평전에서 말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여자!

축첩이 자유로웠던 시대적 한계로 이해해야 할까.

전통적 남성 특유의 뻔뻔함이 보이는 것 같아 혁명가도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은 아니구나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대장정을 이끈 위대한 영웅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인간적인 매력도 느꼈다.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 정권을 잡은 이후의 실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아쉽고 다른 책도 같이 읽어 보고 싶다.


<인상깊은 구절>

23p

"양민 3000명을 오인해서 죽이더라도 공산당원 한 명을 죽이면 된다!"라며 멸공을 독려하던 장제스의 군대가 독기를 품고 들이닥칠 곳에 가족과 동지를 남겨두고 떠나는 장정, 그것이 대장정의 출발이었다. 남겨진 가족들은 잔류자로 구분되었다. 마오쩌둥의 어린 자식도 동생 부부와 함께 잔류해야 했고, 그 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96P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힘든 이런 사람들의 희생과, 그 희생을 기록해둔 후손들이 있기에 지금의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닐까. 권력에는 그늘이 있게 마련이지만, 우리가 현실로 마주하고 있는 중국은, 결코 음모의 밀실정치나 선전선동, 개인 숭배로 만들어진 우스꽝스러운 나라가 아니다. 시대의 광풍 속에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딛고 두 다리로 서 있는 나라.

116p

이들은 홍군이나 지방 유격대 전사의 가족들에게 조직의 이름만큼 무참한 보복을 가했다. 토지와 재산을 빼앗긴 원한이 있던 터라 국부군보다 훨씬 잔인했다. 닥치는 대로 죽이고 걸리는 대로 보복을 했다. 장제스는 소비에트 지역의 모든 백성들은 이미 적화분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보복 행위를 방관하거나 두둔했다.

142p

그에 비하면 강제로 징집된 국민당 군대는 많이 달랐다. 촌락별로 징집 인원이 할당되었고, 도주할까 봐 밧줄로 묶어 끌고 가기도 했다.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를 압송하는 풍경이었다. 장교와 일반 사병의 차별이 심했고 일상적으로 구타를 당했다. 이렇게 몸에 밴 폭력성 때문일까,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면 하급 병졸까지 주민에게 행패를 부리곤 했다.

186p

엇보다도 중국이라는 국가는 고난의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결합체임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대장정은 결코 80년 전의 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역사이고, 중국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음을 축약해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232p

질주... 병력과 화력의 열세를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한 것이 바로 홍군의 질주였다. 중국의 장정 기념관들은 마오쩌둥의 '귀신같은 작전 지휘'를 칭송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홍군 전사들의 '목숨을 건 구보'가 승리로 이끈 더 큰 힘이었다고 생각된다. ... 홍군 전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무엇인가 있었기에 이런 극적인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념?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홍군의 지휘부나 간부였다면 모를까, 병사 대부분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324p

기념관 옆의 홍군 사령부 자리에 살던 주민들은 홍군들에게 땅을 내주고 이 산동네로 올라왔다. 혁명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주는 것은 아닌 듯하다. 누군가는 여전히 가난한 인민으로 살고 있었다.

335p

적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자국의 백성 89만 명을 홍수로 쓸어버린 장제스의 군사작전이었다.

337p

"소련과 독일의 무기 전부를 가져와도 메뚜기 떼를 다 죽일 수 없다"는 탄식이 나왔다.

348p

장제스 측의 발상은 "백성이 굶어 죽으면 그래도 중국 땅으로 남아 있지만, 군대가 굶어 죽으면 일본 땅이 되니 어쩔 수 없었다"는 한 관리의 말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지 그 땅은 장제스의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의 것이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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