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행사의 길을 가다 - 압록강 넘은 조선 사신, 역사의 풍경을 그리다 이상의 도서관 51
서인범 지음 / 한길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라 부담스러웠는데 본격적인 학술서라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기행문이라 부담없이 쉽게 읽힌다.

다만 너무 상세하게 사신로를 탐방하는 바람에 다소 지루하다.

또 유명한 지역들이 아니라 정확히 어디를 지칭하는지 금방 와 닿지가 않는다.

지명을 한자어로 표시하고 있어 구글 지도에서 찾기도 힘들었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글자로만 상상하는 독자를 위해 좀더 소상히 주변 지역을 설명해 주면 이해하기가 더 쉬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꼼꼼한 기행문을 당시 역사와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었다.

연행로라고 하면 단순히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일이었는지를 저자가 세심하게 그려낸다.

몇 달에 걸치는 긴 여정의 힘든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등한 국가가 아닌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이른바 상국으로 가는 지라 끊임없는 뇌물 요구에 시달렸다.

사신은 공식적인 사절들이니 가는 길에 적어도 숙소 정도는 마련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잠자리는 커녕 비적들의 습격까지 감당하면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고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중국의 사신들도 조선에 올 때 이렇게 힘들었을까?

오히려 그들이 한 번 조선에 오면 엄청난 뇌물을 바치느라 허리가 휜다고 들었다.

조선은 왜 이렇게도 열심히 명나라를 섬겼을까.

성리학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사대가 단순히 오늘날의 외교 차원이 아니었을 듯 하다.

오늘날의 대등한 국제적 외교관계로 조선시대를 읽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여진족에게 사행로가 점령당하자 바닷길을 따라 조공을 하고 처음 가는 행로라 배가 난파되어 사신들이 죽는 참변까지 벌어진다.

망해가는 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험한 해로를 헤쳐 나가던 당시 조선 위정자들의 모습이 후손의 눈으로 보면 안타깝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인 듯 한데, 비교적 화질이 선명해서 보기가 좋다.


<인상깊은 구절>

469p

이처럼 많은 애로사항 중에서도 사신을 가장 피로하게 했던 건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일이 끝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인정물품을 요구하는 중국의 관료, 환관, 서리들이었다. 적은 외교비용을 가지고 압록강을 건넌 사신의 주머니는 점차 줄어들었다. 북경에 도달했을 때 그 행낭은 거의 텅 빈 상태였다. 물론 북경에서의 본격적인 외교전을 앞두고 사신을 괴롭게 한 것이 비단 부족한 비용뿐만은 아니었다. 부주의한 언사 한마디도 외교활동을 수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이처럼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나라 선조들은 오로지 왕명을 완수하려 고군분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신병주 지음 / 책과함께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근무할 당시 썼던 책인 모양이다.

뻔한 이야기일까 봐 안 읽었던 책인데, 인터넷 검색하다가 궁금한 문장이 있어 읽게 됐다.

세종조의 성비와 공비에 대한 기사였는데 이 책을 봐도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고 인용만 됐을 뿐이라 아쉽다.

검색해 보니 성비는 태조의 후궁 원씨이고, 공비는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였다.

앞쪽의 그림이나 지도 등은 너무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있는 그대로의 설명 뿐이라 지루했고 뒷부분의 저작 소개가 흥미롭다.

지봉유설이나 반계수록 같은 책들은 이름만 들어봤지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줄은 처음 알았다.

실학자들이 근본적으로는 성리학자였으나 명분론, 의리론과는 다른 실제적 학문을 논한다는 점에서 좀더 살펴볼 가치가 충분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3p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 오랑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박제가의 발상. 북학 선구자의 이미지에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 박제가는 북학에 대한 확신범처럼 일생을 살았다. 중국의 선진문화를 동경하면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보잘 것 없는' 조선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가 <북학의> 곳곳에 나타나 있다.

147p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이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와 크게 다른 것은 토지, 호구, 군사 항목이 없는 대신에 인물이나 제영의 비중을 늘린 점이다. 이는 성리학 이념이 조선 사회에 점차 확산되면서 이에 충실했던 충신, 효자, 열녀의 행적을 널리 전파하고, 관리나 학자들이 쓴 시문들을 알려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이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면서 이러한 점이 더욱 강조되었다.

307p

지봉유설에서 이수광은 "우리나라 사람의 일로서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부녀자의 수절, 천인의 장례와 제사, 맹인의 점치는 재주, 무사의 활 쏘는 재주"를 들었다. 

330p

대개 실학자와 성리학자를 구분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 실학자들 모두 출발전은 성리학이었다. 그 점에서 이들은 성리학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390p

그러나 중인들은 양반 중심의 신분사회를 극복하기보다는 양반을 닮으려는 안일한 입장에 머물렀다. 시문집이나 전기 편찬에 주력한 것은 이들의 한계였다. 결국 중인들은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서 역사적 기능을 하지는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라 할 중인 문화를 형성하는 데 그쳤다.


<오류>

29p

인헌왕후(효종의 할머니)의 친가인 능성부원군 댁에 보낸 것이다. 

->인헌왕후의 아버지 구사맹은 능성부원군이 아니라 능안부원군이다. 능성부원군은 구치관으로 세조 시대 영의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곡가의 집 - 천재 작곡가 20인, 그들의 삶 속으로 떠나는 여행 이상의 도서관 50
양기승 지음 / 한길사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이렇게 재밌을 수가...

제목도 명료하면서도 인상적이라 마음에 드는데, 내용도 알차다.

스무 명의 작곡가들 생가를 찾아가는 내용의 칼럼 연재물이라 수박 겉핥기 식의 지루한 나열일까 봐 걱정했다.

저자가 작곡을 전공한 분이라 그런지 내용이 깊이 있고 문장에 위트가 있어서 에세이 읽는 즐거움이 있다.

한 작곡가의 생애를 짧은 분량에 잘 녹여내고 특징적인 부분들을 어필해서 머리에 확 들어온다.

다소 미화적인 느낌도 없지는 않다.

역사책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천재 예술가들이었으니 경외하는 마음은 당연히 들 수밖에 없을 것 같긴 하다.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멘델스존처럼 부유한 음악가도 있었지만, 드보르작이나 베르디처럼 소위 말하는 하층민 계층의 입지전적인 음악가도 있다.

(전에 읽었던 베르디 평전에 따르면 세간의 오해와는 달리 베르디의 집안은 중농 정도는 됐다고 한다)

모차르트나 리스트처럼 아버지가 극성스럽게 아들을 닦달하면서 교육시킨 경우는 그나마 복있는 케이스 같다.

스무 명의 작곡가들의 일생이 나같은 이름없는 대중과는 다른 위대한 예술가라 그런지 특별히 극적인 삶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인상적이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상 깊은 구절>

18p

시종으로서의 음악가. 모차르트만 해도 그것이 싫어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하이든은 그럴 수 없는 시대를 살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하이든은 수많은 시민의 요구 대신 한 명의 영주만 만족시키면 그만이었고, 나머지는 그의 자유였다.

26p

나이 든 스승의 장기 여행에 대해 모차르트는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다음 해, 오히려 하이든은 여행 도중 자신을 염려하던 젊은 모차르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38p

작곡가 베버의 사촌이기도 했던 콘스탄체는 노래와 피아노에 능숙했고 모차르트의 C단조 미사 초연을 맡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다. 그녀는 가난한 가계와 병약한 천재를 함께 돌보느라 지쳐 있었다. 그런 그녀가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안정된 직업을 가진 덴마크 외교관과 재혼해 장수를 누린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시샘할 수 없을 것이다. ... 콘스탄체는 성공적인 재혼을 했고 모차르트의 두 아들 토마스와 볼프강 역시 니센의 도움에 힘입어 훌륭하게 교육하고 성장시켰다. 부유한 말년을 보냈고 언니 알로이지아도 잘츠부르크로 불러들여 여생을 함께 했다. 그리고 레오폴트를 비롯한 모차르트 가족의 묘역을 이렇게 단아하게 마련하는 게 크게 기여했다.

40p

아버지 레오폴트는 후임 후작 주교 콜로레도에게 서유럽 연주여행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23세 아들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 대성당 오르가니스트로 복직시켜달라고 애걸하기도 했다. 결국 부자가 해임과 파면을 당했던 그 영욕의 세월을 성당 앞의 성모상은 알고 계시는지 궁금했다.

43p

모차르트의 평생 매니저였던 아버지가 온 유럽의 후원자들에게 밤마다 연주회 청탁 편지를 작성했던 곳에는 그의 안타까운 부정이 구석마다 서려 있었다. 그 방들을 거닐다보니 천재와 아버지를 잇는 고리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49p

제일 먼저 거론된 살해 혐의자는 살리에리였다. 한때는 언론까지 합세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당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경쟁이 되지 않는 높은 사회적 지위와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었던 대작곡가였다.

64p

그에게 좋은 환경이란 외향적 모습만이 아닌 자신의 절대자유가 보장된 그러한 공간이었다. 인류의 온 세기를 초월해 대악성이 될 베토벤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상적인 작업실 하나 마련할 돈도, 기회도 마지막까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연을 더 사랑했는지 모른다.

79p

테레제의 가족 역시 슈베르트에게 호감을 지닌 터여서 사실상 경제적 여건만 갖춰진다면 언제고 결혼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사이는 발전되었다. 그러나 평생 슈베르트를 따라다닌 가난이 이들의 앞날을 막았다. 5년여 뒤 슈베르트가 헝가리 백작의 가정교사 자리를 수락하며 테레제에게 청혼을 결심할 무렵, 슈베르트는 그녀로부터 청첩장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피로연 연회장 피아노에 앉아 그의 <피아노소나타 a단조>D537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105p

요약해서 말하면 멘델스존은 부유한 가정의 천재로 세상에 태어난 셈이었다. 물론 작곡가로서 자신과 벌이는 투쟁, 즉 타고난 재능과의 갈증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수많은 예술가가 겪어야 했고 넘어야 할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의식주에 관한 고통으로부터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비록 짧은 세월이었지만 일평생 서로만을 사랑했던 여자를 아내로 맞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입김이 스쳐가듯 가볍게 받아들인 행운의 예술가, 멘델스존. ... 아버지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천재적인 아들을 높은 교양을 지닌 사업가로 키울 생각이었다. ... 당시 사회적으로 괴테는 무조건적인 신앙과 같은 대상이었다. 적어도 예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괴테를 알현하지 않는다는 것, 그에게 선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늘 논쟁의 대상이었던 문제의 바그너에 대해서도 그는 선배로서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 그는 결혼과 여자 문제에 관한 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순하고 사무적이었다. 그에게 결혼은 나이가 찼고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가장으로서의 의무감에 신부감을 찾아 나선 것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창작에 전념했다'는 스토리 못지않게 또다른 감동을 안겨주는 것이 '부러울 것 없는 삶 속에서도 숙명처럼 창작과 연주에 일생을 바쳤다'는 얘기가 아닐까.

141p

아홉 살의 첫 공개 연주회부터 시작된 연이은 성공은 아버지의 집념의 결과였다. 빈으로 이주한 것도, 피아니스트 체르니와 작곡가 살리에리와의 만남도 아버지 덕분에 성사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리스트의 피아노 연습 일정도 결코 만만하게 짜지 않았다. 매일매일 고정된 스케쥴 외에도 연습이 끝나면 필수적으로 바흐의 푸가 6곡과 그것들을 즉석에서 이조해 연주하도록 아들에게 강요했다. 리스트가 후일 수백 곡의 기성 작곡가 작품을 즉석에서 편곡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도 결국 이러한 아버지의 교육 덕분이었다. ... 사실 바그너는 리스트의 작품을 인정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에 상관없이 리스트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탄호이저> <로엔그린>을 세상에 알리느라 분주했다. 또한 '베를리오즈 주간'을 바이마르에 만들만큼 미래 지향적 연주회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 그러나 리스트의 견해는 달랐다. 바그너와의 인간관계와는 상관없이 언젠가 그의 작품이 온 세상에 통용되는 날이 오리라 굳게 믿고 있었고 그 선봉 역할을 끝내 자청했다.

165p

어린 나이부터 다섯 명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술집을 전전하며 연주해야 했던 브람스가 세기적인 대작곡가가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저변에는 타고난 재능과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슈만과의 해후라는 엄청난 행운이 깔려 있었다. ... 만약 그에게 이런 행운이 없었다면 브람스는 재주 많은 반주자 아니면 시골 소그룹 합창 지도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앞서 얘기한 대로 브람스는 자신에게 지나치게 비판적이었기에 충분히 그랬을 수 있다.

177p

베르디의 아버지 카를로 베르디는 문맹이었다. 여느 음악가들처럼 화려한 음악적 계보도 없고 그렇다고 아들을 음악가로 키워 돈이나 명예를 얻겠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는 벽촌의 필부에 불과했는데 기이한 일이 아닌가. 어떻게 그 아래서 세계적 오페라의 제왕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음악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여리고 여렸던, 선함으로 덩어리진 삶을 살게 했을까. 끝내 대표작 하나 없노라, 라며 겸허로 일관했던 베르디를 낳은 동네, 론콜레에는 그칠 줄 모르는 안개비가 계속 내렸다.

234p

베를린,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로마로 돌아다니느라 빈 오페라좌를 너무 많이 비운다는 것이 공적인 해임 사유였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작곡가 말러에게 예정된 길이었다. 그는 지휘와 작곡을 함께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나아가 정열 넘치는 예술사회의 리더이고 싶었다. ... 젋은 시절부터 유독 건강에 자신이 없었던 말러는 모든 일과를 규칙에 따랐다. ... 그녀의 천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생활이었지만 알마는 그 모든 것을 그의 작품으로 보상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261p

"내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한 가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더 중요한 것은 그러기 위해 평소에 늘 더 많은 것들을 네 스스로가 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드보르자크가 54세 때인 1895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드보르자크는 먼저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 그는 다른 작곡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음악적 환경과는 거리가 너무 먼, 그래서 음악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가 태어난 집안의 가업은 정육점이었다. ... 드보르자크에게는 늘 소원이 있었다. 작곡가가 되기 전, 마을 술집을 전전하는 고달픈 악사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이 생각지 못하는 소원을 지니고 살았다. ... 언젠가는 그 자신이 슈베르트가 되리라는 무서운 욕구를 품고 살았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을 작품을 통해 실현하고픈 헌신에 가까운 바람을 일평생 간직하며 살았다. ... 그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었던 프라하 국립극장 비올라 주자 자리까지 던져버렸다. 드보르자크는 다시 가난에 빠져들었지만 그것은 오직 작곡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작은 소망 한 가지도 들어주지 못한 셈이 되었다. 프라하 오르간 학교를 졸업하고도 끝내 전업 오르가니스트가 되지 못한 그는, 아버지 프란티제크의 기준대로라면 결국 쓸모없는 음악가가 되고 말았다.

317p

바르토크의 연구가 헝가리 음악사에 일조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의 가정 형편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레슨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 바르토크는 첫부인과 이혼하고 곧바로 재혼을 했다. 사실 바르토크는 쫓기듯 무엇인가를 찾고 도전하는 이상주의자였던 반면 그의 첫부인은 순종으로 일관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순종만으로는 천재의 부인 역할을 담당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 바르토크가 세상을 하직하던 날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 미국 국민이 가장 큰 애도를 보냈다던가. 그의 조국 헝가리를 물론 유럽 어떤 나라에서도 떠나는 그를 애석해하는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고 전해진다.

330p

천성적으로 쇤베르크는 비평에 무덤덤했다. 평생 동안 자신과 작품에 대한 구설수며 평론에 관해,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인내심으로 초연한 태도를 보였다.

357p

완벽한 음악, 정결한 음악의 대명사로 거론되는 그의 작품들을 그러나 상당 부분 가난과 역경 속에서 생산해낸 것들이었고 실제로 존재하기 힘들 만큼의 의지와 노력의 결정체였다. ... 바흐의 적성대로라면 교사보다는 악장을, 지휘보다는 오르가니스트를 훨씬 선호했겠지만 그는 주어진 직분을 천직으로 알며 그 모든 갈등을 끝까지 참고 이겨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려 역사상의 탐색 - 국가체계에서 가족과 삶의 문제까지
노명호 외 지음 / 집문당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루하게 보이는 표지 디자인이나 책이름과는 달리, 너무너무 재밌는 책이다.

여러 명의 필자가 모여서 집필하면 주제의 중심성에서 이탈해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과연 여러 학자들의 이름값을 한달까, 깊이있는 수준과 무엇보다 가독성이 매우 뛰어나다.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근래에 이렇게 재밌는 역사책을 읽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조선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려사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왜 이성계는 우왕을 폐하고서 그 아들인 창왕을 세웠는지, 고려 시대 문벌이란 과연 유럽의 귀족과 같은 존재인지, 고려가 황제국을 칭했는지, 삼별초로 대표되는 전사단의 성격은 어떠한지 (이 부분이 너무 흥미롭다. 외국 필자라 그런지 일본의 막부나 이집트의 맘룩 등과 비교한다), 고려 시대 관료들의 문무 겸비 특성, 향리층이 과거제를 통해 어떻게 중앙으로 진출했는지, 부마국으로서의 고려 위상, 책봉-조공 관계의 의미 등 궁금했던 주제들이 너무나 명쾌하게 설명되어 고려시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좋은 책이란 전문성과 식견을 가진 필자들이 독자에게 쉽고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책일텐데 그 명제에 매우 잘 부합되는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19p

오랜 기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고려가 사대하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당시 고려 조정을 주도한 묘청일파는 이 계열의 대표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고려 황제 유일론을 내세우며, 국제정세를 잘못 파악한 속에 금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계열의 천하관은 당대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다른 두 천화관들에 비하여 조정 내에서의 경쟁력이 뒤졌다. .... 수나 당 같은 강력한 한족의 통일왕조와 빈번한 관계를 가지면서, 그 거대한 세력과 선진 문화에 압도되어 한족의 화이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신라통일기말에 가까워지면,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족의 선진적인 문화와의 격차가 많이 좁혀지게 된다. 이러한 추이 속에서 천자, 황제의 나라인 중화에 대해 자국을 夷의 나라, 제후의 나라로 보지만, 문화적으로 중화에 근접한 소중화적 존재로 보는 화이론이 형성되었다. 화이론자들은 대개 선진문화인 당송의 문화에 심취하였고, 그 방면에서 당대의 문화적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유교문화를 비롯한 중화의 문화를 가능하면 전면적으로 수용해야할 절대적 선진문화로 여기고 있었다. 대외관계에서는 송에 대해 명분론적이고 당위론적 관점에서 사대이념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고려는 절대로 황제국의 제도를 채택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제후국의 제도를 채택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최승로 등이 주도하던 10세기말 성종대나 김부식이 주도한 12세기 중엽에는 고려초 이래의 황제국 제도들이 혁파되거나 억제되고 제후국의 제도들이 새로에 도입되었다. 고려시대의 화이론은 한족의 선진 문화 수용에 가장 과감하고 적극적이었다. ... 외교정책상의 중대한 실태 오판으로 성종대에는 거란의 침입에서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기도 하였고, 예종대의 김부의처럼 신흥세력 금과의 관계에서 외교적 실리 확보를 위한 협상의 기회도 배제시킨 명분론적 사대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37p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유독 연호에 대해서만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 고려가 '외왕내제'의 상황에서 중원 왕조와의 관계에서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그 원칙은 상하 관계를 인정하고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것은 고려 일대에 걸쳐 변함이 없었다. 고려는 이 상하 관계를 역전시키려 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관계로 변경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한 점에서 황제국 고려의 존립 근거인 다원적 천하관이란 다수 천하의 대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 간의 위계를 인정하는 것이었음을 새겨둘 필요가 있다.

38p

강화 천도에 반대하면서 유승단이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그의 주장은 당시 고려 사람들 다수의 정서를 대변했을 것이다. 게다가 전쟁 초기인 고종 21년에 책봉국이었던 금이 멸망했으므로 몽골과 책봉-조공 관계를 맺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대 관계를 받아들이면 정권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최씨 정권의 계산과, 책봉-조공 관계의 경험이 거의 없었을 몽골의 태도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될 수 밖에 없었다.

43p

<제왕운기>에는 오랜 전쟁으로 고려를 괴롭힌 몽골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우리 상국 대원'의 광대함에 대한 찬양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원을 사대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서는 나오기 어렵다. ... 몽골과의 전쟁에서 강화를 경험한 세대의 역사 서술에서 공통적으로 조선과 단군을 되살리고, 그를 통해 중국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를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이승휴와 일연은 고려가 몽골과의 전쟁에서 비록 승리하지 못했으나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데 대해 안도하면서, 그러한 현실의 당위성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리라. 지금 우리들은 당시 사람들의 고민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63p

중국에서 화와 이를 나누는 명분은 힘이 아니라 문화였다. 중국은 수준 높은 문화를 보유했기 때문에 화이며, 그렇기에 이는 중국을 섬기면서 그 문화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 태조는 자국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한 반면, 최승로는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 보편 문화를 추종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한국의 역사과정을 통시적으로 보면 자국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점차 약화된 한편,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질서를 강조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갔다.

77p

공민왕의 황제복 착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장기간 지속된 원의 간섭으로 지배층의 자주 의식이 전기보다 약화되었을 뿐더러 중국에 대한 사대를 당연시하는 성리학자가 증가하였다. 외부적으로 는 한족 정권이 흥기하고 홍건적이 침략하는 등 자주성을 강화하기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 1370년에 명에서 고려에 사여한, 명에 비해 두 등급을 격하한 국왕과 관리의 복식은 명의 입장에서 설정한 고려의 위상을 반영할 뿐이다. 그런데 조선에서 명의 복식 제도를 수용하면서 두 등급을 낮추어 입은 것은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여긴 조선 지배층의 자의식을 반영한다. 고려 후기를 거치면서 국왕을 비롯한 지배층은 다원적인 시각으로 국제 관계를 파악하거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 별도의 영역을 설정하지 않게 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는 데 익숙해졌다. ... 관리의 복색을 2등급 낮추어 정하고, 국왕이 상복으로 대홍포를 착용한 것은 명의 명시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화이관을 수용한 자의식은 명이 멸망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 이는 중국의 한족 왕조에서 화이관에 근거하여 설정한 국제질서가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에 굳건히 자리 잡았음을 알려준다.

100p

사신은 남면하고 국왕은 북면한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조선의 내용을 듣는다는 점 등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명 국내의 지방에서, 혹은 황제의 아들인 친왕이 위치한 왕국에서 황제가 파견한 사신을 맞이할 때 행하는 의례와 완전히 일치했다. 고려라는 영역을 자국에서 마련한 의례 규정이 적용되는 자국 경내의 어느 곳과도 차이를 두지 않고 이해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명은 역시 원대의 유지를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원과의 관계를 통해 제후국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에 대해 인정하게 된 고려에서도 이를 그대로 수용하여 준행하였다. ... <경국대전> 그중에서도 이전과 예전의 체제와 내용은 <대명회전>의 그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그것을 대폭 수용한 규정들로 채워져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각종 제도의 격이 강등되었다는 사실 정도이다. 이와 같이 조선국왕이 명의 예제 질서에서 위치했던 관료적인 위상은 조선의 관료제적 문물제도 정비 과정에서 대원칙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115p

고려는 서양의 작위귀족과 달리 관직이 정치권력의 원천이자 경제적 수입원이며 사회적 위세의 상징이었으므로 5품 이상의 문무 고위관료가 되면 귀족적 특권을 부여받고 이를 3세대 거듭하면 가문을 형성하여 귀족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이 역시 3세대에 걸쳐 고위관료를 배출했다고 해서 이들 관료가문을 귀족으로 보

아야 할 이유는 없다. ... 게다가 고려의 제도운영에서 중급관청의 장관은 대체로 3~4품이어서 5품의 직무적 위상은 높지 않았고 누대에 걸쳐 5품 이상을 배출했다고 해도 사회적 인식은 그리 높지 않았다. ... 이처럼 고려에서는 가문이 높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재상을 배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 문벌의 경제 기반은 중앙관료로서 근무한 대가로 받은 전시과나 녹봉이 가장 중요하였고 그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지역의 경제기반이 관료나 문벌이 된 후에 그들의 사회적 위신을 높이는 데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고려의 문벌은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발달된 관료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명망 있는 가문이었고 그래서 문벌이 되기 위해서는 관료제 상의 재상을 배출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관료제를 벗어나 자율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려의 문벌은 귀족으로 보기 어렵다. ... 그들은 국왕이 이끌어갔던 국정운영의 체계 속에서 관료로서 활동하였고,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문벌인 이자겸도 군신관계에서는 국왕의 신료로서 정체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의 문벌은 신라에 비해 발달된 관료제를 바탕으로 누대에 걸쳐 다수의 재상을 배출하고 왕실 및 문벌과 통혼한 명망 있는 가문이었던 것이다.

160p

정부가 생각하는 최고 인재는 문무 겸비의 기풍을 가진 '출장입상'의 존재였던 것이다. 문무 겸비의 기풍은 재상급 지배충에게 요구되는 자질이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윤관과 같은 문신이 여진 정벌을 지휘하고 김부식이 서경의 반란 때 군사를 지취했던 것이다. 특히 12세기 초는 여진족 금의 발흥이라는 격변 속에서 무학의 필요성이 급증하였다. ... 문무를 겸비하면 우선적으로 변경 지역의 수령으로 배정되면서 중앙 정치와 거리가 멀어지게 되어 다시 들어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 기풍 속에서 문신이 군사적 능력과 거리를 두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였을 것이다. ... 그러나 임진왜란 전후로도 儒將의 기풍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서애집>에 따르면 임진왜란 직전에 선조는 비변사에 명을 내려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였고 유성룡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권율과 이순신 모두 중하급 관료로서 크게 명망이 없던 존재였지만 천거 이후 품계를 뛰어 넘어 관직에 배치되었고 그것이 조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양자 모두 유장의 천거 및 활용 방식에 준하여 이루어졌음이 흥미롭다. 권율은 문과 급제자로서 '옛날 유장의 기풍이 있었다'고 하고 이순신은 비록 무과 급제자였지만 20세까지의 문과 준비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문무를 겸비하였고 전쟁 중에 백성을 안정시키고 군사적 역량을 발퓌함에서 문무 겸비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181p

고려전기 무신집권자들은 권력을 장악한 후 스스로에게 부족했던 권위를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보완하고자 하기는 했지만, 그들 권력의 어떤 부분도 외부, 구체적으로는 금과의 관계에 기대어 있지 않았다. 이에 전통시대의 책봉-조공 관계 아래에서 금의 책봉 여부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했으나, 그로 인한 문제는 주로 외교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으로, 무신집권자들 권력의 기저를, 혹은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에 이 시기 국왕 폐위 과정에서 금이라는 황제국의 존재는 단지 외교적인 문제로서 고려되었을 뿐, 적극적으로 의식되지는 않았다. 이에 비해 우왕 14년 시점에서 회군세력의 권력은 황제국인 명에 대한 사대의 예를 주요한 명분이자 근거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공민왕 시해 이후 우왕 책봉 과정에서 보이듯, 이 시점에서의 명은 앞서의 금과는 달리, 책봉국과 피책봉국 사이의 마땅한 예를 따르지 않은 고려에 대해, 향후 간여하지 않을 것이니 고려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이야기 할지언정 형편상 '無禮'를 묵인하고 책봉을 해 줌으로써 황제의 권위를 빌려주지는 않았다. 이에 우왕의 '선위'를 둘러싸고 발생할 수 있는 명 측의 의심이나 그로 인한 '외교적' 분쟁은 단지 외교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군세력이 확보한 명분, 그를 필요로 하는 그들의 권력기반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199p

일찍이 권력과 권위를 호위하던 존재였던 전사단 자체가 제도가 되고, 모든 권력과 권위가 전사단에게 돌아갔다. 다만 고려의 경우 반전이 있었다. 고려왕이 몽골과 제휴하는 와중에 무신집권자들도 새로운 여건에 적응하고자 하였지만, 결국 삼별초를 비롯한 전사단적 존재들이 고려-몽골연합군에 맞서다가 모두 파괴되었다.

281p

고려는 조선과 달리 부계중심의 사회질서로 구성된 사회가 아니었다. 계보에 성별 간 차이가 없는 양측적 친족관행이 고려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제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구성원리였다.

288p

12세기 이래로 전시과체제가 붕괴되고 관리들의 주된 경제적 기반이 관직과 별개로 형성되는 경향이 확산되면서, 징벌로서 귀향이라는 행위가 관리에게 주는 타격이 전기에 비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술했듯이 이 시기 이미 많은 관리들은 농장 등의 사적인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 조선은 <대명률>에 입각하여 형법질서를 대대적으로 재정비해 나간다. 그럼에도 이처럼 <대명률>에 나타나지 않는 다양항 형태의 유배형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고려 형벌제도에서 조선 형벌제도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296p

고려시대는 한국 전근대의 역사에서 바다를 통한 대외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대라고 평가받고 있다. 다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중국과의 해상무역의 주역은 주로 漢人 해상이었다고 한다. 같은 시기의 일중무역 또한 상황은 비슷했다. 당시 중국 문헌에 "고려"나 "일본"의 상선 혹은 상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전에는 중국 이외의 각 지역의 해상도 한인 해상 못지않게 국제무역의 현장에 활약했다고 평가해왔다. 그러나 근년, 그들의 정체가 기본적으로 한인 해상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07p

기술적으로 큰 한계가 있던 전근대의 항해자들에게, 신에게 안전을 기원해서 마음의 평온과 용기를 얻는 것은 절실한 항해 할동의 일부였다. 신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신적 격려와 위로 역시 "마음의 멘터넌스"라 할만큼 행해기술의 일부였다.

348p

고려의 국가와 불교의 관계는 <인왕경> 호국품의 "국왕이 불교를 보호하면 인왕이 그 땅을 보호한다"는 관념에 기반하고 있었다. 고려에서 두차례 조성한 대장경은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불사였다. ... 조선에서는 왕권에 대한 도덕적인 견제 역시 유교로 일원화되었지만, 고려는 유교와 불교가 이원적으로 분담하였다고 볼 수 있다.

379p

고려시기의 기록에서 천한 신분의 여성이 정식 배우자가 된 경우는 단 한 사례도 확인되지 않는다. 공식적인 부부나 자녀의 관계는 동일 신분 내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신분이 다르면 생물학적 관계가 있을지라도 사회적, 법률적 관계로 공인되지 못하였다. ... 지배층에서 다처의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신분내혼 및 거주 관행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국왕이 다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모든 신분의 상위에 있는 최고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왕조차도 신분내혼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로부터 동일 신분 내에서의 혼인은 복수의 처를 두는 것이 더욱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등한 신분에서 혼인이 이루어졌으므로 부인은 남편이 다른 처를 두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 중국에서 유래하여 조선에 정착한 '정조'란 다분이 생물학적인 것이었고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이는 부인이 남편에게 귀속되며, 그 귀속은 성행위로서 확인된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다. ... 이렇듯 국왕과 최고 권력자가 미망인이나 이혼녀와 혼인한 사례들은 재혼 시에 성경험이나 혼인 경력의 유무가 배우자의 조건으로 거론되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성관계를 맺는 것을 '순결'을 잃는 것으로 여기고, 남편 사후에 '수절'하는 것을 '정조'를 지키는 것으로 여겼다면 국왕이 이혼녀나 미망인과 혼인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정조'가 지닌 의미는 상호 신의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음이 확인된다. 부,처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삼가는 것이 곧 고려시기의 정조였다고 볼 수 있다. ... 5촌에 이르면 혈연의 농도가 더욱 옅어져 사회 통념상 사적인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관계, 상호간에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는 관계로 여겨졌다. 이에 고려에서는 4촌까지 상피대상으로 지정하였고, 이러한 혈연의식이 남아 있었던 조선전기에 친족의 유산을 상속할 자격을 4촌까지 인정한 것이다.

403p

이러한 제도에 힘입어 한족의 삼년상 문화는 차츰 원 지배층 사이에 확산되었다. 심지어 원 문종 시기에는 한족 방식을 따르려는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한족의 제도를 적용하겠다는 성지가 발표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원은 고려인들의 눈에 중화의 유풍을 계승한 국가로 인식될 수 있었다. 적어도 동시대를 살았던 고려인들은 원을 중화로 인정하였으며, 그 문화를 본받아 고려의 풍속을 바꾸려 하였다. 이색과 같은 고려 사대부들이 중국의 삼년상 풍속을 정상으로 인지하고 이를 비교의 준거로 삼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과의 교류를 통하여 주자성리학이 고려 사회 저변에 침투하였던 역사가 있다. 원의 과거제도는 이 과정에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제과에 응시하여 입신양명하기를 바랐던 고려 유학생들은 주자성리학에 천착하였으며 자연스럽게 주자성리학의 실천윤리를 체현하게 되었다. ... 한국의 상례와 장례에 대하여 생각할 때 떠오르는 고정된 이미지, 즉 삼년상을 치르는 자식들의 애통함과 극도의 자기학대 및 절제는 고려말부터 조선초의 시대적 전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문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로의 길 - 유럽의 교훈 석학인문강좌 69
박지향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40페이지 정도의 짧은 책이지만 내용이 아주 알차다.

근대화를 곧 영국으로 상정하여 영국 예찬론이면 어쩌나 우려했는데 기우였다.

인문학 강좌라는 일반 시민 대상의 강연집이라 그런지 이해도 쉽고 핵심만 잘 요약해서 전달력이 아주 높다.

이 시리즈가 너무 마음에 들어 가급적 많이 읽어 보고 싶다.

보통 자유와 민주주의를 같이 얘기하는데, 책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언급한다.

근대화의 시작을 영국의 산업혁명과 의회민주주의로 본다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바로 사유재산권의 확립이라고 한다.

사극을 보면 어느날 갑자기 왕이 신하를 잡아가고 재산을 몰수해 버린다.

간단히 말해 영국에서는 사적 재산권이 법으로 보호되어 정부에 의한 갑작스러운 몰수가 어려웠던 것이다.

서양사를 읽으면서 왜 영국 국왕들은 의회를 열어 세금 인상을 요구했는지 의아했다.

왕의 권한으로 세금을 더 많이 걷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반드시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하나?

책에서는 윌리엄의 정복 이후 영국에서 의회의 전통이 강해졌고, 의회에서 왕에게 재정 지출을 승인하는 과정에서 권리가 이양되어 갔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사유재산권의 확고한 인정이었다고 설명한다.

사유재산이 완벽하게 보호되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운 인간이 가능하고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여 민주주의, 즉 권력의 분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유재산을 부정한 공산주의가 결국은 일당독재로 변질되고, 심지어 3대에 걸친 세습왕조가 21세기에 구현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재산권이 자유민주주의의 필요 요소임은 분명하다.

제일 흥미로웠던 부분이 제국주의 식민지에 대한 평가다.

저자는 영국의 예를 들어 식민지배가 반드시 일방적인 착취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생산력의 향상과 인구 증가를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인도 같은 경우는 철도와 근대법, 영어 공용어 사용 등을 통해 오히려 하나의 거대한 민족이 되어 결국은 영국을 쫓아내게 된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로 눈을 돌리면 우리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을 듯 하다.

민족주의적인 반감을 예상해서인지 조심스럽게 지적하기는 하지만, 일제 치하에서 근대적 유산이 확립되었고 노골적인 친일파 이외에도 다수의 평범한 협력자들이 있었음을 상기시킨다.

감정과 현실은 확실히 다른 듯 하다.

근대화의 성과와는 별개로, 식민지라는 것 자체가 인종차별, 2등 국민을 양성한다는 점에서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98P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폐해를 보완하기 위해 개인의 개별성과 독자적 생각을 매우 중요시한다. 밀은 특히 개별성의 개발이야말로 자기 발전의 핵심 요소로서 인간됨과 진정한 행복의 필요조건이라고 확신하였다. 개성의 계발만이 인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천재는 극소수이며 그들이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을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천재는 자유의 분위기에서만 숨 쉴 수 있다. 밀이 판단하기에 개별성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것은 억압적인 정치권력이 아니라 사회적 압제인데, 그것은 다수의 횡포에 의한 법적, 물리적 강제일 수 있고 혹은 사회적 관습이나 공공여론일 수 있다. 군중은 자신의 사상과 다른 사상을 용납하지 않으며 대화와 토론이 아닌 힘으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한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사회에는 관용이 필요하다. 밀은 오직 생각들이 자유롭게 소통될 수 있는 곳에서만 '좋은 생각이 나쁜 생각을 대체'하는 가운데 무지가 사라지고 진리가 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민주주의와 '다수가 항상 옳다'는 아둔한 획일주의가 확산되면서 관용이 위협을 받게됨을 우려했고, '마치 단 한사람의 독재가 인류 전체의 입을 막을 수 없듯이 인류 전체가 단 한 사람의 이견을 막을 수 없다'는 원칙을 강조하였다. ... 복지국가의 기저에 깔린 정서는 이 장에서 다룬 평등에의 욕구를 담고 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개념이 완전히 다른 개념, 즉 모든 사람이 동등한 출발과 동일한 전망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개념으로 바뀌고, 기회의 평등을 넘어 보상과 분배의 평등을 주장하며, 정부가 그 역할을 행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3p

"현명한 법의 공정한 집행보다 더 강력한 문명화의 도구는 없다." 실제로 식민 지배가 남긴 근대적 사법 체제는 전통 사회 엘리트가 누리던 초법적인 권위를 헌법상의 통제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식민지 사회의 변화에 대한히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219p

식민주의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체제였고 피지배민들에게 열등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자신의 능력을 회의하게 만드는 중대한 누를 끼쳤다. 이 점에서 식민주의는 강하게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친일파로 간주되는 윤치호조차 일제의 민족 차별에 치를 떨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