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정 평전 - 과연 시대는 개혁을 바라는가
주둥룬 지음, 이화승 옮김 / 더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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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행된 역사서는 확실히 서구 역사서와 다른 느낌이다.

사회 제도 등의 분석 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췄다고 할까.

평전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얼마 전에 읽은 <영락제> 평전이 대외원정을 중화질서의 완성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매우 흥미로웠던 반면, 이 책은 사서에 기록된 장거정이라는 인물의 활동에 너무 포커스를 두는 바람에 다소 지루했다.

그럼에도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명대의 정치 제도와 관료들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을 얻게 된 점은 유익했고 장거정이라는 개혁가이자 독재자의 일생을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권력자가 옆에 있다고 황제가 전부 바보가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표트르 대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했으나 곧 권력을 휘어잡고 러시아를 개혁했던 반면 비슷한 나이에 즉위한 순조는 평생 세도정치에 휩싸여 왕으로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개인의 자질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

이 책의 중요 인물인 신종 만력제 역시 10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라 잘못을 하면 어머니 앞에 꿇어 앉아 반성문을 쓸 정도로 다소곳 했고 장거정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처럼 처신했으나 결국은 그의 사후 조정을 휘어잡고 전제군주로써 보복을 가했으니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섭정왕이었다가 사후 순치제에 의해 의해 격하된 도르곤이 떠오른다.

황제 일인의 전제국가라는 점에서 중국 역사는 의회의 힘이 커져 민주주의로 발전한 서구와는 확실히 매우 다른 전통을 가졌던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28p

그는 스무 살에 학생이 되어 과거를 준비했으나 향시에 7차례나 낙방했다. 훗날 아들인 장거정이 한림에 제수된 지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어려서부터 이제까지 40여년간 공부를 할 만큼 했는데도 오늘날까지 이 모양인 것은 운명인가 보다"라며 과거를 포기했다. ... 태조 주원장이 하층 출신이었다는 점은 그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장거정은 한림원 편수로 중용된 후 자신의 출신 배경을 이렇게 밝혔다. "국가는 오직 능력으로만 현자를 뽑으니, 공을 세우면 신분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37p

명조는 3대 성조 이래 정치의 중심이 내각에 있었다. 구성원인 내각대학사는 황제의 개인비서일 뿐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 하더라도 여전히 황제의 제한을 받았고, 대학사라 하더라도 황제에게 버림을 받으면 바로 지체 없이 북경을 떠나야 했다.

45p

친번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세습 종실이 많았고, 조정은 이들의 막대한 생활비를 대느라 국고가 휘청댔다. 이제 이 문제는 정치보다는 경제 문제로 변해 있었다. ... 이들의 생활을 책임지는 국가의 재정은 커다란 압박을 받았다. "두 성의 곡식만으로는 종실을 먹여 살리기에도 부족하니 관리나 군인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91p

명대 언관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벌떼와 같아서 건드리기만 하면 무리지어 달려들곤 했다.

96p

그러나 목종은 탕임금이나 진시황은 고사하고 이 나라의 태조, 성조, 심지어 세종도 아닌 그저 관대하고 후덕하기만 할 뿐, '전체를 장악하고 위엄으로 다스리는' 황제가 못 되었다. .... 명나라는 개국 초기부터 완전한 전시 체제를 취하고 있었다. 국가의 정치 중심인 북경은 최전선에 있어,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국방이 제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04p

모반을 하려면 그만한 용기와 준비를 했겠지만, 요왕은 그저 놀기 좋아하는 한심한 왕족이었을 뿐이었다. 모반의 준비는 오직 흰 깃발이 전부였고, 홍조선도 이를 알았다. ... 목종은 대신들과 가져야 할 관계를 갖지 못하자 환관들에게 의지했다. ... 다음 날 목종황제가 서거했다. 고공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열 살 난 태자에게 어떻게 천하를 다스리라고 하는가!" 그는 자신의 책임을 더욱 막중하게 느끼는 듯했다.

147p

풍보는 장인태감으로, 궁내에서는 황제의 하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에게 건네지는 모든 문서를 장악하고 있으므로 역시 장거정에게는 또 한 사람의 주인이었다. 풍보는 절대적으로 자성황태후에게 의지했다. 그러므로 장거정은 태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풍보의 압박을 줄이려 했다. ... 그는 풍보가 정치에만 간섭하지 않으면 대체로 눈을 감았다. ... 신종은 당시 열 살이어서 비교적 쉽게 상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어려운 상태였다. 장거정이 죽은 뒤 발생한 일을 보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알았지만, 실제로는 정치를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아야 하며, 심지어 자신을 지배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신종은 장거정에게 호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한편, 자신이 그의 주인이라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신종은 자신의 지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바로잡으려 했다. 따라서 장거정에 대한 호감은 자격지심으로 인해 점차 나쁜 감정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신종의 미묘한 변화를 장거정은 간과하고 말았다.

180p

신종은 황태후에게 다시 청해 처형을 집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실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관대함을 주장해 백성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실제로 책임을 맡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183p

명대처럼 과거시험이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시대도 드물다. 때문에 중기 이후에는 학교 교육이 과거시험을 위한 준비기관으로 전락하였다. ... 만약 장거정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고려했다면 학풍을 정돈하는 일을 단행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당대의 지식층이 있고 이들에게 밉보이면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재는 당시의 지식층으로 관리 배출뿐 아니라 지방 여론을 주도했다. ... 개인적인 정을 돌보지 않아 많은 적을 만들었으니 개혁은 성공했으나, 훗날의 재앙을 피하지 못하였다.

202p

명대 정치에는 부패 요소가 많았다. 지금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들도 당시에는 그저 관례적으로 여겼다. 따라서 말하지 않으면 관습으로 여기지만, 일단 지적을 받으면 부패가 되었다. .. "권력을 잡은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부는 이미 지역의 으뜸이다"그는 지적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대 관리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다. 만약 장거정이 이렇듯 부패가 만연한 시대에 살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부친이 없었다면 그는 청렴한 재상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 권력을 잡은 인물들은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해 이 두 갈래 길에서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사회가 가진 공통된 약점이다.

245p

미관말직은 '그저 자리에 몸을 싣고' 고관대작은 '명철보신'하는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국가의 일에 실제로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한다'고 욕을 먹거나 '세속에 물든 관리'라고 손가락질을 받지만,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도 누군하 하겠지 하고 시나 지으며 세속적인 일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252p

열여섯 살의 황제는 자신과 권력을 다투지는 않더라도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고, 상황도 변해서 독재를 하는 신하와 군주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만 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장거정이 죽자마자 신종이 가장 큰 적으로 돌아선 것은 정치역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신종 초에는 신종과 장거정 모두 이러한 경각심이 없었다. 그리고 유태, 왕용급 등은 그저 장거정이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행동하니, 황제가 그를 제재해야 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299p

친정을 시작하게 된 신종은 재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금관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때부터 명나라는 급격히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오류>

14p

왕망은 조카 애제의 황위를 찬탈했다.

->왕망은 애제가 아니라 원제의 정비인 왕황후의 조카이다. 원제의 손자인 애제가 급사 후 역시 원제의 손자인 평제가 즉위했고, 왕망의 딸이 평제의 황후가 된다. 평제를 죽인 후 선제의 현손인 유영이 황위에 오르는데 이 황위를 찬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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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와 광기 - 세계사를 바꾼 정복자와 독재자들
류광철 지음 / 말글빛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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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최근작 <누가 이슬람을 지배하는가>를 재밌게 읽고 (특히 십자군 부분이 너무 재밌었다) 다른 책도 같이 읽게 됐다.

제목이 좀 모호하고 책 디자인이 세련되지가 않아 확 눈에 띄지는 않지만 내용은 역시나 흥미진진하다.

과거 역사에서 두 사람, 현대사에서 세 사람을 뽑아 평전처럼 기술한다.

1편은 일종의 총론인데 인물들을 먼저 설명하고 뒷부분에 종합하는 식으로 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알렉산드로스나 칭기즈칸은 역사적 인물들이라 비교적 잘 알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스탈린, 특히 사담 후세인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던 부분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역사에 남는 영웅 내지 반영웅이 되려면 일단 배포가 커야 하고 범인으로서는 갖기 어려운 무자비함과 냉혹한 성격을 지녀야 하는 듯 하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야 워낙 많이 알려져 그러려니 하지만, 스탈린의 숙청 규모가 이렇게 큰 줄 미처 몰랐다.

전제주의 황제를 몰아내고 세운 인민의 나라라는 실체가 결국 수백 만명에 달하는 자국민 처형이었다니 마르크스가 주장하던 공산주의는 그저 문자로만 가능한 이야기인 듯 하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이나 문화혁명을 봐도 그렇고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나라라는 것도 결국 1인 독재로 귀결되어 엄청난 사망자를 낼 뿐이니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결국 실패한 체제가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67p

고대 영웅들인 알렉산드로스나 칭기즈칸과는 달리 히틀러는 점령지 국민들 자국민으로 편입시키는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히틀러의 목표는 오로지 넓은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독일인이 광대한 생존공간에 일등신민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이런 목표를 가진 히틀러는 점령지 주민을 제거하거나 몰아내려고 했지 구태여 동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 그가 독일 국민을 세상에 우뚝 선 민족으로 만들어줄려고 했던 망상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히틀러가 영광을 되찾아주려고 했던 제국은 무너져 내렸고 독일은 전승국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히틀러가 유대인과 함께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공산주의는 오히려 타오르는 불길이 되어 유럽의 절반을 차지했고 히틀러의 수도를 나누어 가졌다. 히틀러를 영웅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히틀러에게 걸며 그를 숭배했던 독일 국민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독일은 오늘늘까지도 히틀러가 끼친 죄과를 사죄하며 히틀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하는 나라로 살고 있다.

85p

팔랑크스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열을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위해 뒤쪽 열에는 경험이 풍부한 병사들을 배치했다. 밀고 들어가는 전법이므로 밀리지 않는 것이 생명이었다. 죽어도 물러서는 일이 없도록 팔랑크스 대원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 안티파트로스는 섭정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는 평생 군인답게 충실하고 엄격한 섭정이었으나 올림피아스와는 성격이 맞지 않았다. 안티파트로스에 대한 그녀의 불평과 비난 그리고 폄하는 원정 내내 알렉산드로스를 괴롭혔다. ...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멋쟁이 지휘관이었으며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다. 전투에서 앞장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적의 목표가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많은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로스도 대단한 행운아였다. ...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메니온과는 달리 위험 부담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 시대를 막론하고 정복자들이 처음부터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뒤 출정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부족하지만 강한 신념과 정열에 의지하여 출정에 나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부족한 식량과 돈을 마련하는 것이 늘 현실적인 문제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후세의 정복자들에게 귀감으로 남았다. ... 또한 그들은 중무장한 알렉산드로스군 앞에서도 겁을 집어먹지 않았다. 싸워보지도 않고 알렉산드로스에게 굴복할 경우 영원히 예속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 중앙아시아 정복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스키타이계, 투르크계 민족들은 용맹했고 전투에 능했다. 지방의 호족들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말리 족과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가슴에 활을 맞고 거의 죽을 뻔했다. 단신으로 성벽에 올라가 부하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적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무모한 면도 있었지만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전투를 즐기는 철두철미한 군인이었다. 

158p

황제는 칭기즈칸이 얼마나 뛰어난 전략가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양측의 차이는 뚜렷했다. 칭기즈칸은 총사령관으로서 몽골군을 진두에서 지휘하면서 작전을 펼쳤으나 금황제는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양도하고 자신은 북경의 궁궐에서 보고만 받았다. ... 북경은 관심 밖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이 정복한 도시에 가보지도 않았다. 북경 뿐 아니라 이 후에 정복한 모든 도시들에 대해서도 칭기즈칸은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몽골군은 성을 약탈하고 파괴했을 뿐 도시를 점거한 후 활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를 살만한 곳으로 여지기 않았다. 싸움이 끝나면 도시를 파괴하고 속히 초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칭기즈칸은 도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새로운 지식을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 칭기즈칸은 살육자에 도시 파괴자를 겸한 것 같은 정복자였다. ... 유럽이나 중동에서 벌어진 다른 전쟁에서는 전투에서 패해도 귀족이 죽는 일은 드물었다. 그들은 포로가 되어도 기사도 정신에 따라 귀족으로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몽골군에게는 그러한 관행이 없었다. 포로면 포로지 귀족이고 평민이고 구분이 없었다. 몽골군은 왕족이나 귀족은 오히려 더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다. 살아 돌아가면 힘을 규합하여 복수전을 펼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따라서 몽골군은 그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다. ... 포로로 잡히는 순간 태후의 존재는 사라지고 말았다. 고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배려해주는 일은 일체 없었다.

227p

히틀러가 국민으로부터 영웅 취급을 받고 전례 없이 높은 인기를 누리는 인물로 떠올랐지만 사실 그의 권력을 지탱해 준 것은 군부이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위반을 감수하고 재무장 정책을 추진할 것을 공약했는데 이는 군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은 것이다. 군을 확장하겠다는데 군부가 반대할 이유가 있겠는가? ... 재무장까지는 좋았지만 히틀러가 그보다 더 나아갈 것을 예측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군부는 히틀러에게 운명을 맡긴 뒤 5년도 못돼 전통적인 지위를 상실하고 그에게 예속된 집단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두려운 길을 히틀러와 함께 걸어가야 했다. ... 영국의 견고한 저항은 히틀러를 패망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히틀러는 영국을 제압하지 못할 경우 언젠가는 대서양 너머 거대한 미국이 지원 세력으로 나서게 될 것으로 예측했다. 비록 군사적으로 영국을 돕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도울 가능성은 다분했다. 독일은 총체적으로 소련을 얕보고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경멸했고 그의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슬라브족을 우습게 봤고 볼셰비즘 따위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 그러나 독일은 소련의 잠재력을 너무나 몰랐다. 히틀러는 소련군보다는 오히려 조직력이 탄탄한 유대인이 더 문제가 될 것으로 오판했다.

272p

결국 전공과는 관계없는 과목을 독학으로 공부한 셈이다. 이 때문에 정식으로 대학에서 정치, 경제, 철학 등을 공부한 공산주의 이론가들과는 지식의 깊이나 넓이에 있어서 차이가 컸다. 스탈린의 학문 연구는 피상적이었기 때문에 레닌이나 트로츠키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부르주아 문화도 경험하고 대학에 전문적으로 지식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 부르주아인 레닌에게 노동자는 자신의 이념을 실현시켜 줄 대상이었으므로 낭만적인 감정이 앞섰으나 스탈린은 냉정했다. 그는 계급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특별한 연민을 가지지 않았다. ... 스탈린은 농민에게 일체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도시인과 농민 모두가 먹고 살 만큼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에는 누군가 희생되어야 하는데 스탈린의 선택은 농민이었다. ... 스탈린은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후 공포정치를 통해 내부 체제를 장악했고 이제는 국가를 구출한 전쟁 영웅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의 행운은 끝이 없었다. ... 마셜은 전쟁으로 피폐한 유럽을 부흥시키기 위해 천문학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그 덕분에 유럽은 빠른 속도로 과거의 풍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소련에게는 미국과 같은 구세주가 없었다. 모든 일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설사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국에게 원조를 요청한다고 해도 1억 5천만 명에 달하는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 차라리 함께 굶주리는 것이 더 나았다. 사실 모두 가난하다면 별로 불평이 나올 일도 없다. 스탈린은 서방에게 원조를 요청하지 않았고 함께 고난의 길을 택했다.

387p

양국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두 지도자는 성격이 다를 뿐 아니라 상반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불행한 것은 이 두 사람이 나라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입장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후세인은 이슬람 혁명을 통해 집권한 호메이니가 그 촉수를 이라크에 미칠까 두려워했다. 반면 호메이니는 후세인을 경멸하고 싫어했다. 후세인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모독이었다. ... 군사적 경험이 전무한 후세인이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 이에 비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지휘봉을 잡은 히틀러는 그나마 나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라도 있지 않은가. ... 전쟁이 지구전으로 치달으면서 후세인은 이라크보다 4배나 넓은 땅에 3배의 인구를 가진 상대국을 점령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실히 깨닫기 시작했다. ... 이란은 11월 공세에서는 인해전술을 구사했다. 본격적인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중무장도 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대규모로 전투에 참가한 것이다. 혁명수비대에서 전장에 나가기를 자원한 수만 명의 젊은이로 구성된 병력은 종교적 열기로 충만한 자하드 세력이었다. 물라를 앞세우고 전장에 나온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하드 병력의 개입으로 이 전쟁은 무슬림 상호간의 성전 비슷한 양상으로까지 발전했다. ... 이들은 시아파이기는 해도 호메이니 정권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 체제에서 살 생각은 없었다. 후세인을 미워하기에 앞서 호메이니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보다 더 원망스러운 그런 사람들이었다. ... 빨리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이 이렇게 오래 지속된 것은 기본적으로 양측의 전력이 비슷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두 고집쟁이 지도자들이 양측에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희생을 줄이는 것보다 자신의 자존심을 더 중시하는 독재자들의 성향이 이 전쟁에서 뚜렷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420p

후세인은 대량파괴무기를 개발함으로써 서방에 대한 안전판을 만들려고 했지만 그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걸프전 패배 후 유엔에 의해 시작된 사찰에 순응하지 않았던 후세인은 일시적으로 미국을 이라크로부터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이 대량파괴무기를 감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9.11 이후 이라크를 침공키로 결정했다. 훗날 부시 대통령의 판단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미국의 결정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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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신상목 지음 / 뿌리와이파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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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재밌을 수가!

본격적인 연구자가 아닌 아마추어 필자들의 책은 대부분 이른바 수박 겉핥기 식인 경우가 많다.

얼마 전에 읽은 <한국의 일본 일본이 한국>이 대표적인 경우다.

여러 기자들이 모여서 야심차게 준비한 책이겠으나 내용은 너무나 평이한 자료 모음 수준이다.

다양한 자료를 모아 분석과 식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한 권의 좋은 책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대중서들의 단점은 자료 제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자료야 인터넷을 보면 널려 있으니 굳이 책을 따로 읽을 필요도 없는 시대다.

특히 칼럼 연재물을 책으로 엮은 경우 매 회를 주어진 분량에 맞추려다 보니 전체적인 통일성이 떨어지고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여러 면에서 훌륭하다.

제목이 좀 자극적이라 어설픈 야사 이야기면 어쩌나 약간 걱정이 됐는데 최근 들어 보기 힘든, 대단히 성공한 독서였다.

일본의 근대화의 배경에 대해 한국인 필자가 이렇게도 적극적으로 분석한 경우를 접한 적이 없어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말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인가 반성이 된다.

식민지 지배를 진정으로 청산하는 길이 친일파 처벌 뿐일까.

300 페이지 정도로 짧은 분량이고 글솜씨도 좋아 마치 소설 읽듯 한 번에 잘 읽힌다.

표지 디자인도 세련돼서 좋고 다만 제목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저자에게 바라는 바는, 조선 후기사도 같이 연구해서 일본의 근대사와 본격적으로 비교하는 책을 내 보면 좋겠다.

책에 간간히 조선과 일본 사회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우리 역사 쪽의 분석이 다소 아쉽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충격이 생각난다.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 바탕에는 에도시대의 참근교대와 천하보청 제도로 다이묘들이 돈을 쓰게 되면서 화폐경제가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조닌층이 상업자본으로 성장해 신분제가 흔들리고 자본주의의 싹이 텄다. 

이런 사회적 바탕 위에 페리의 개항이 이뤄지고 메이지유신으로 갑작스런 근대화에 성공한다.

참근교대가 다이묘들을 약화시키기 위한 제도인 줄만 알았는데 의무적 소비 지출을 통해 에도라는 거대한 도시 문화가 완성되고 숙박업과 운송업 등이 활발해지고 무엇보다 이 행사를 위해 곡식이 아닌 돈이 사용되어 화폐경제가 형성됐는데 정작 다이묘들은 곡식을 봉록으로 받았기 때문에 상인들에게 돈으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상인 계층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교환 과정에서 신용을 바탕으로 한 근대 금융업도 성장했다.

천하보청은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쇼군은 징세권이 따로 없어서 다이묘들에게 군역의 확대된 의미로 도시 건설을 요구한다.

도로와 매립지 공사, 급수시설 등 인프라 구축을 다이묘의 돈으로 이룩한 것이다.

에도로 사람이 몰리고 상인 계층이 성장하자 그들의 문화가 만개한다.

유럽을 강타한 우키요에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었다.

일본도 목판 인쇄술을 바탕으로 출판 문화가 활발해지고 사회 변화의 주역이 됐는데 왜 조선에서는 상업 출판이 불가능했을까?

문집 한 권을 펴내는 것도 돈이 매우 많이 들어가는 일이라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목판 인쇄가 어려웠던 까닭이 궁금하다.

일본 역시 서양처럼 금속활자가 아닌 목판 인쇄가 주를 이뤘는데 그 차이도 궁금하다.

확실히 일본은 주자학 일변도의 경직된 사회가 아니었고 이미 16세기부터 서양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결국 세상이 서구화, 자본주의화 되었으니 오래 전부터 난학을 수용하고 있었던 일본이 조선을 앞지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나 싶다.

중국식으로 세계화가 됐으면 조선의 운명이 달랐으려나.

중국 외에는 소통하는 세상이 없었고 그나마 청나라가 들어선 후 북벌을 외치면서 배격했던 쇄국정책이 조선을 전근대 국가에 머물게 했던 듯 하다.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생겨나 수천 명이 떼죽임을 당할 정도로 강한 신앙심을 보였는데 서양 학문 유입과는 큰 연관이 없었던 듯 하여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4p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에도시대의 일본은 임진왜란 때 납치한 도공이나 조선통신사에게 한 수 배우며 선진 문물을 습득한 문명의 변방국이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여 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32p

같은 시기 서구의 시대상에는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제도, 관행, 인프라의 형성과 작동이라는 측면에서 동시대 조선의 사정과 비교한다면 그 격차는 엄청나다. 한국인들은 무사가 칼 차고 다니며 공포정치를 펴고, 인민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며 벌벌 떨며 살았다고 알고 있는 에도시대에 이미 일본은 조선을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47p

전근대의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소수의 중앙 지배층을 정점으로 하는 다단계의 착취적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고 통치에 민주성이 결여된 전근대이기에 세금은 비효율성도 높고 생산력 확대를 위한 재투자에도 사용되기 어려웠다. 세금은 누군가의 금고로 들어가 사치로 낭비되거나 다 쓰이지도 못하고 소멸되는 국부의 무덤이었다.

73p

전근대와 근대를 구분하는 가장 극적인 차이 중 하나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관념일 것이다. 현대인들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인신이 토지에 부속된 전근대의 보통 사람들은 태어난 곳에서 100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02p

에도시대 출판문화의 특징은 진화 과정에서 '시장원리'가 주효하였다는 것이다. 출판은 상업적인 자생력을 갖춘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유통망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통해 독서는 서민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여 대중화, 생활화되었다. ... 창의적인 비즈니스 기법이 끊임없이 모색된 것은 에도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근세의 특징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 사회가 종교, 윤리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지배층도 반역적이거나 지나친 풍속문란이 아니면 관대한 태도를 보인 것도 출판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정보가 특권계층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대중에게 보급되는 것은 불가역적인 사회 변혁의 단초를 제공한다.

141p

조선시대 가장 유명한 지도는 단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다. 19세기 말에 근대 작도법이 아닌 자체 방식으로 상당한 수준의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유럽 문명을 제외하면) 조선의 과학기술 수준이 당시 세계적 수준에 비추어 보아 손색이 없었음을 시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조선의 지도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 사상과 사방을 일정한 구획으로 나누어 지리 정보를 표시하는 방격법에 기초하였다. 지리는 철학, 사상, 관념과 분리되지 못하였다. 근대 지도의 요체인 위경도 좌표 개념도 들어서 여지가 없었다. 이노의 지도는 동양의 관념적 지도를 배제한 과학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었다.

185p

백의 선호는 조선의 염색 기술을 답보 상태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염색천은 제대로 시장이 형성되지 못하였고, 기술자들은 관청에 예속되어 기술적, 예술적 자율성이 제약되었다.

211p

16세기 이후 유럽의 근대국가 성립 과정에서 왕실과 귀족 등 지배층은 '예술의 후원자'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이 통치력 강화에 필수적이었고, 이는 음악, 미술, 문학 등 다방면에서 유럽 문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급 문화예술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고급 문화예술은 다수에 의해 소비되어 상업적 활력을 갖추기 전까지 그를 애호하고 후원함으로써 취약한 생존력을 보완하고 기술적 축적을 지탱해줄 수 있는 소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 일본의 도자기 발달사는 이러한 '후원'과 '과시적 소비'가 문화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의 도자기문화는 차문화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219p

유럽의 지식사에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한 것이 근대 정치의 토대를 닦았듯이, 소라이가 통치철학으로서의 유학이 교조적 관념론, 도덕론에 치우지지 않고 실증과 실용의 끈을 놓치 않도록 한 것은 근대 정치의 발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228p

막부의 쇄국정책은 '폐문정책'이 아니라 막부가 외부와의 사람, 물건, 정보의 교류를 통제하는 '창구독점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에도시대의 쇄국정책은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거부하는 조선의 위정척사류의 이념형 고립정책과 같지 않다. ... 막부는 서양의 정보를 통제하였지 배척한 것이 아니다. 배척은커녕 민감하게 그 동향을 주시하였다. ... 일본의 지식인들은 근대 유럽문명이 가져온 물질적 혜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혜택을 어떻게 흡수하여 인간의 삶을 이롭게 할 것인가? 그것이 당시 난학을 대하난 지식인들의 태도였다.

254p

전근대에서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가 금융 근대화이다. 에도시대의 료가에쇼들은 근대 금융업에 필적하는 자체 신용금융제도를 오랫동안 발전시키면서 노하우를 축적해왔다. 이러한 근세기 민간 주도 금융의 발달은 근대화시기 서양 금융제도의 일본 내 수용과 자체적 변용에 큰 도움이 되었고, 이는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265p

막부의 화폐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힘을 축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막부가 화폐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화폐 공급량을 늘여야 했으나, 화폐의 개념이 금, 은 본위화폐 주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막부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로 신용을 창출하여 그를 화폐로 전환시키는 발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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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 시대를 앞선 통찰로 불운하게 생을 마감했던 우리 과학자들
이종호 지음 / 사과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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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대한 이야기.

과학자라기 보다는 실학자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학자들, 뉴턴이나 갈릴레오처럼 과학적 업적을 이룬 위인들 이야기는 아니고, 여러 서책과 일상생활의 기술들을 모아 책으로 펴낸 수준이다.

이 정도만 해도 성리학 위주의 나라에서 뭔가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던 점은 가치가 있을 듯 하다.

그렇지만 저자가 정약용의 기중기가 실제로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음을 지적한 것처럼, 근본적인 서구의 과학 혁명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결과적으로 조선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되지는 못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가 인상적이다.

고위관료이면서도 낙향했던 오랜 기간 동안에 임원경제지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한 열의가 놀랍다.

실제로 농사를 지어 성리학 서적이 아닌 일종의 기술서를 펴냈다는 행보가 독특하다.

저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비교적 성실하게 기술해서 재밌게 읽었다.

다만 조선시대 과학이라는 표현도 좀 과대포장된 거 아닌가 싶은데, 거기에 순교자라고까지 제목을 붙이는 건 오버지 않나 싶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 체제와 맞서 싸운 과학자라 부를 만한 사람은 없고, 다른 이유로 유배 등 불우한 삶을 살았고 야인으로 있는 동안에도 열심히 학문을 연마해 저작을 남긴 이들이다.

순교자라고 하면 천주교인처럼 체제의 강압에 대항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가 아닌가.

그러기에는 다들 너무 점잖은 인물들이다.

맨 마지막 참고 문헌 수준이 아쉽다.

학자가 아니니 이해는 되지만, 네이버 캐스트나 신문기사, 잡지가 참고문헌이라니.

책은 자료모음집 수준을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아쉽다.

혹시나 싶어 참고문헌으로 실린 기사를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대로 옮긴 문장들이 많다.

참고문헌으로 표시했으니 상관없는 문제인가?


<인상깊은 구절>

67p

<동의보감>은 약 400년 전의 의학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에 실려 있는 내용이 모두 맞을 까닭이 없으며 허준이 현대의학을 뛰어넘는 의학자일 수도 없다. 허준은 4세기 전의 훌륭한 의학자일 뿐이며 <동의보감>은 4세기 전의 의학을 잘 정리해 준 유용한 의학서라는 것이다.

81p

동양 사상에서는 사체를 절개하고 해부하여 장기를 들여다 본들 거기서 얻은 지식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다. 죽은 사람에 대한 지식은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에 적용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그야말로 죽은 지식이라는 뜻이다. ... 동양의 의학자들 가운데도 실제로 해부를 해본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동양에서의 해부는 그야말로 일시적은 호기심 차원에 그쳤을 것이라고 했다. ... 전유형의 해부는 파격적이고 그 자체로 의학의 본질에 접근한 것이지만 역사상에서 그의 시도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 당시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해부 사건이 크게 부각되지 않은 것은 전유형이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인들이 해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이후로 조선에 제2, 제3의 전유형이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면 해부 경험이 치료에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보면 의아하겠지만 충분한 근거는 있다. 

108p

"아아. 사대부가 때를 만나지 못하면 갈 곳은 산림뿐이다. ... 그러므로 한 번 사대부라는 명칭을 얻으면 갈 곳이 없다. 그렇다고 사대부의 신분을 버리고 농,공,상이 되면 안전해지고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 그런즉 천하에 지극히 좋은 것이 사대부라는 이름이다. 사대부라는 이름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옛 성인의 법을 준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농공상을 막론하고 사대부의 행실을 한결같이 닦는 것이 마땅하다."

204p

그러나 학자들은 보다 엄밀한 설명을 요구한다.  ... 1인당 분담되는 에너지는 대략 10.3kg이라고 계산했다. 이 무게는 일반적인 사과 한 상자의 무게인 15kg에도 못 미친다. 사과 한 상자는 보통 사람도 들 수 있는 무게이므로 이 무게를 들기 위해 거중기와 같은 거창한 기구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원 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는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몸체가 워낙 커서 이동을 위해 분리, 조합하는 데 너무 많은 품이 들기 때문이다. ... 박제가가 서양인들을 초청하자는 원론적인 주장을 했지만 정약용은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려면 어떤 구체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37p

정약용은 농사를 전혀 짓지 않고 농업 원론만 얘기한 반면 풍석 서유구는 직접 농사를 지은 체험을 토대로 구체적인 농사 기술을 제안했다. ... 물론 다산도 자신의 생각에 합리성을 부여했는데, 자신의 경세학은 당장의 활용보다는 이상적 통치 이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 다산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풍석은 강력하게 비판했다. 서유구도 이상을 추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이 땅의 현실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저한 현실론을 견지했다. ... 장기간을 열악하게 살았다고는 하지만 방대한 양의 저서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당대 누구보다도 저술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배를 곯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면서도 글을 쓸 시간이 있었고 또한 참고문헌에 900여 권이나 적을 정도로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311p

최한기는 의학 자체애 대한 관심은 없었다. 즉 의사로서의 과학성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사상가로서의 이론에 치중했다. 다시 말해 새로운 과학 지식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 체계의 토대로 삼기는 했으나 새로운 과학 지식의 창조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설명이다. 이를 두고 강신익 박사는 "최한기의 의학사상은 있지만 최한기의 의학은 없다"고 말한다.

355p

현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당시의 발명가 수준은 아마추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다. 당시 발명가들(곧 과학자들)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한 예는 영구동력기관에 대한 그들의 집착이다.


<오류>

36p

<미암일기(국보 400호)>의 저자이기도 한 유희춘이

->미암일기는 보물 260호다.

101p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재종손(사촌형제의 손자)이면서

->재종손은 사촌이 아니라 6촌 형제의 손자이다. 즉, 이중환의 할아버지인 이영은 이익과 4촌이 아니라 6촌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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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로드 - 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손호철의 세계를 가다 2
손호철 글.사진 / 이매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가 별로라 읽을까 말까 했던 책인데 역시 그냥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400 페이지의 긴 분량인데 그저 장정 루트를 따라간 순수 기행문일 뿐 대장정에 대한 내용이 너무 부족하다.

정치학자의 책이라면 어느 정도 배경 지식을 제공해 줘야지 않을까.

앞서 읽은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이 훨씬 도움이 됐다.

어쩜 이렇게 순수한 기행문으로만 일관하는지.

맨 마지막 장에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비판하는 부분만 인상깊게 읽었다.

요즘 분위기로 본다면 이 정도 비판도 상당히 용기있다고 해야지 않을까.

중국의 빈부격차에 주목하면서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이 원했던 바는 단순한 부국강병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이 인상깊다.


<인상깊은 구절>

388p

재미있는 것은 마오 말고 덩샤오핑, 저우언라이 등 중국공산당의 1세대 지도자는 거의 모두 해외 유학파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러시아가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 유학파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부잣집 자식들인 '강남 좌파'는 아니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근로 유학 프로그램을 이용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좌파가 됐다. ... 이 사람들과 달리 마오는 어학에 소질이 없고 노동도 싫어해 근로 유학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자본론>보다는 <수호지>나 <삼국지> 그리고 중국 역대 왕조의 통치술을 다룬 <자치통감>을 더 좋아했다. 이런 특징이 중국혁명에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기능했을 것이다. ... 그러나 동시에 세계와 경제에 어두웠고 국수주의적 경향도 있었다.

397p

고향인 후난성을 방문한 펑더화이는 대약진운동으로 농민이 굶주리고 있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빈농 출신이라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펑더화이는 농민의 고통에 어느 누구보다도 예민했다.

401p

장정의 고난과 목숨을 건 혁명의 피와 땀이라고는 겪어 보지도 못한 10대 홍위병들이 혁명의 백전노장 펑더화이와 류사오치를 '우파'라고 부르며 자술서를 쓰게 하고 고문하는 희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 많은 전투 속에서 적의 총알을 뚫고 살아남은 뒤 혁명 동지이자 두목인 마오의 손에 목숨을 잃으며 그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404p

물론 13억 인구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확대하지 않고는 일류국가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사실 규범적 측면뿐만 아니라 지금 같은 경제자유화 속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를 계속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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