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책을 읽는 멸종 직전의 지구인을 위한 단 한 권의 책
조 퀴넌 지음, 이세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표지 디자인은 신선한데 한국적 상황과 맞지 않다.

제목도 인상적이지 않다.

본문에 소개된 수많은 책들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공감이 될 리가 있겠는가.

차라리 좀 오타쿠적이더라도 일본 수필이 더 공감이 간다.

저자가 소개하는 책들을 절반이라도 읽어 봤으면 모를까, 제목만 휙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대부분이라 제대로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나의 독서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진 점은 좋았다.

나는 왜 책을 읽는가?

한 때는 고전과 소설을 읽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읽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반적인 애서가와는 좀 다르게,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논픽션을 좋아하는 쪽이다.

너무 궁금해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나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고 그런 느낌이 말할 수 없는 충족감과 행복감을 준다.

가끔 많이 몰입해서 책을 읽고 나면 이렇게 행복한데 죽으면 이 기쁨을 못 누릴텐데 안타까울 때도 있다.

독서는 강렬한 만족감과 기쁨을 주는 중독성 강한 취미이라 생각한다.

기쁘게도 이 취미는 평생 질리리 않을 무한대의 다양한 영역이 있고 내 경우는 돈이 거의 들지 않는다.

나는 애서가지 장서가, 수집가는 아니다.

사실 사서 읽고 싶긴 한데 공간의 문제로 살 엄두가 안 난다.

책값이 문제가 아니라 보관할 공간이 없다.

1년에 200권이면 5년이면 금방 천 권이 되버린다.

창고에 쌓아 놓으면 제 때 꺼내 볼 수 없으니 의미가 없고 책장에 진열해 놔야 하는데, 서재는 커녕 책상도 제대로 없어 화장대에 겨우 독서대를 놓고 읽는 처지라 서재는 엄두도 안 난다.

그래서 도서관을 애용한다.

요즘 도서관은 신간을 너무 잘 사 주고 장서 보유량도 꽤 많을 뿐더러 밤 10시까지 개관해서 직장인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집에서 멀어 이동 시간이 많이 걸리고 내가 사는 인천은 도서관끼리 상호대차가 안 돼서 가끔 없는 책들도 있다.

대출은 직접 가서 하더라도 택배로 반납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직장인이 되니 시간이 돈이라 퇴근 후 도서관까지 가는 시간이 아깝고 주차 공간도 턱없이 부족해 접근성이 떨어지는 게 아쉽다.

나의 독서 계획은 매일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이다.

소설이나 에세이는 한 시간에 100페이지 이상도 가능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논픽션은 배경 지식이 부족한 경우 속독하기가 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나마 본문만 읽으면 좋은데 온갖 궁금한 것들을 직접 찾아봐야 하니 열심히 읽어도 한 시간에 70~80페이지가 최선이다.

독서는 상당히 완결성 있는 행위로 한 번에 쭉 집중해서 읽는 게 제일 좋다.

매일 다섯 시간 정도 할애하면 될 듯 한데 아무리 수면 시간을 줄여도 수험생도 아닌데 다섯 시간씩 독서 시간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1년에 200권 읽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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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 - 그의 삶, 시대, 유산 역사 모노그래프 3
린지 휴스 지음, 김혜란 옮김 / 모노그래프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6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라 지루할까 봐 걱정했는데 예상대로 읽느라 좀 힘들었다.

평전은 한 인물의 일생에 대해 너무 상세하게 설명하는 바람에 지엽적인 것들까지 다 읽어야 해서 지루함을 피하기가 어려운 듯 하다.

앞서 읽은 장거정 평전과 비슷한 느낌이다.

근대 러시아를 세운 표트르 대제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읽게 됐는데, 동양사에 비해 유럽사, 특히 러시아사에 무지하다 보니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진도가 빨리빨리 안 나가 꽤 힘들게 읽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개인의 찬양에 함몰되지 않는 입체적인 인물 평가와 18세기 러시아가 어떻게 유럽에 편입하게 됐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저술이다.

정통 역사학자의 놀라운 필력이 돋보인다.

책의 2/3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이다.

러시아 역시 유럽사에서는 변방인지, 스웨덴과의 전쟁은 그저 이름만 들어봤을 뿐 이렇게 중요하고도 20여 년의 시간을 끈 오랜 전투였는지 처음 알았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비로소 러시아는 유럽 사회의 진정한 일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근면성실하고 현실적인 독특한 개성의 집념어린 인간이었던 듯 하다.

취미가 배 만들기었던 황제라니.

목공이 취미였던 명나라의 천계제가 생각난다.

황제의 위상에 걸맞지 않는 매우 현실적인 취미를 가졌는데도 역시 개인의 역량에 따라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게 다를 수 있는 모양이다.

군대와 함께 살았던 스웨덴의 칼 12세나 (심지어 결혼도 하지 않았다) 맨 밑의 사병부터 복무했던 표트르 대제를 보면 확실히 유럽의 왕들은 조선의 유학자적 군주와는 매우 다른 지배자였던 듯 하다.

표트르 대제가 외국인 농민의 정부에 불과했던 예카테리나를 황후로 만들고 심지어 그의 사후 여제로 등극까지 했던 것을 보면서 거의 같은 시기를 살았던 숙종과 장희빈이 생각난다.

장희빈이 남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사후 병약한 아들을 통해 권력을 쥐고 흔들 수 있었을까?

농민의 딸을 황후로 세운 표트르나, 궁녀를 중전으로 만든 숙종이나 보통 성격의 군주는 아니었을 듯 하다.

또 표트르는 전처 아들 알렉세이를 고문으로 죽게 만든다.

이 부분도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과 흡사하다.

저자가 평한 대로 당시 자식에 대한 관념은 오늘날 아이를 대하는 태도와는 매우 달랐던 게 분명하다.

표트르의 사인은 물에 빠진 병사를 구하러 뛰어들었다가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위키에 나왔는데, 역시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였다.

읽으면서도 너무 이상하다 싶었다.

저자는 항간에 떠도는 야사로 일축하고 있고 진짜 사인은 요로결석에 의한 요폐쇄와 그에 따른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생각한다.

1월 17일 배뇨장애가 발생했고 1월 28일 사망하는 바람에 후계자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결석은 엄청난 통증을 유발하는 것인데 그로 인해 죽기까지 10여일 간 얼마나 큰 고통에 시달렸을지 짐작이 간다.

전통주의에 함몰되어 있던 러시아를 근대화 시킨 표트르를 보면서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개항에 대해 생각해 봤다.

표트르는 개혁을 위해 유럽 여러 나라를 순례했고 복식 개혁을 단행하고 군함을 건조하고 군사력을 키웠다.

조선이 근대화에 실패하고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타국과의 교류가 단절됐기 때문일까?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와의 교류마저 단절한 채 고립주의로 나간 것이 가장 큰 요인일까?

정말 소현세자가 등극해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면 중세적 농본주의 유학자의 나라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당시 사회체제로는 왕 개인의 노력이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이런 위대한 지도자의 전기를 읽으면 한 국가를 이끄는, 특히 전제군주제의 왕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껴지고 우리 근세사에서 근대화를 가능케 할 군주가 없었음이 아쉽다.



<인상 깊은 구절>

40p

러시아 농민의 탈주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피해자'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17세기 러시아의 기후나 토양이 대체로 농업의 생육에 매우 빠듯한 조건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농민경제가 농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국가에 재정여유분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는 꽤 성공적이었다. 대체로 낮은 생산성을 초래한 것은 흔히 말하는 농노제도 때문이 아니라, 까다로운 기후적, 지리적 환경 때문이었다. 물론 농노제도 자체가 훌륭해서 농민이 농노제를 열렬히 받아들였다든가, 농민의 삶이 편안했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

44p

물론, 유럽 다른 나라들의 지식수준을 과장한다든가, 코페르니쿠스 이론이나 미적분학을 들어본 적 있는 서구인의 수를 과대평가해서는 안 된다. 당시도 지금처럼 선진적 과학지식은 극소수의 전유물이었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전하는 토착적인 민중의 지혜와 기술이 대부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민중의 지혜과 농민의 수공예로는 최신 군사기술의 창조와 원양함선의 건조 등 표트르가 상당히 주의를 기둘여야 했던 분야에서 성과를 거둘 수 없었고, 외국 조정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도 없었다.

57p

친척이 아닌 남성과의 접촉을 제한하는 특별한 풍습과 엘리트 여성의 생활을 고립에 가까운 상태로 규제하는 모스크바 차르국의 관습 때문에 여성의 공개적인 정치 행보는 제한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여성들은 여전히 상당한 권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이 왕족 혈통이기도 하고, 정교회의 대변자이자 왕족 남성들과 왕국을 돕는 중재자로서 왕후와 공주의 역할을 강조한 정치권력의 종교적 견해 때문이기도 했다.

94p

표트르는 상징적, 표상적인 것의 가치를 인정할 소양을 갖췄지만, 평생 관념보다는 물질에 훨씬 큰 애착을 두었고, 추상적인 것보다 실질적인 것을 훨씬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상스러운 유머감각도 있었다.

104p

핵심 측근 내부에서 출세하는 데에 필요한 비결은 공식적인 자격보다 '성격상의 궁합'에 달려 있었다. 멘시코프는 표트르에게 추천될 만한 자질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는 차르의 유머 감각에 대응할 센스를 갖췄고, 함께 대작할 수 있을 만큼 주량도 셌다. 표트라가 멘시코프의 여러 단점, 그중에서도 그의 야망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 멘시코프는 수년 동안 자신의 지지 조직을 구축하면서 부와 권력을 형성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표트르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코 동등해질 수 없었다.

156p

표트르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만만찮은 상대와 대결하고 있었다. 표트르는 결코 낙승을 거두지 못했고, 스웨덴의 '소년 왕(칼 12세)'은 표트르보다 훨씬 더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음이 입증되었다. 심지어 그는 취향도 표트르보다 소박하고 불편한 환경에도 무심한 편이었다. 실제로 칼 12세는 1700년부터 1718년에 죽을 때까지 스웨덴 본토에 거의 돌아간 적이 없었다. 표트르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짬을 내어 했던 일들, 이를테면 새로운 정원 조성의 감독, 가장무도회의 준비, 선반 위에서 코담배 보관함 만들기 등의 여러 가지 일을 칼 12세는 전혀 하지 않았다. 군대와 함께 한 칼 12세의 암울한 생활(그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에 비교하면, 표트르의 문제 많은 가정생활은 전원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혹자는 집착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칼의 군대 사랑은 유별났다.

279p

표트르가 반포한 아래의 칙령은 표트르를 '괴롭힌' 수많은 탄원인을 떠오르게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탄원하지만, 그들이 탄원하는 대상은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한사람은 너무나도 많은 군사 업무를 비롯한 여러 가지 힘든 일들로 둘러싸여 있다. ... 그리고 설사 그에게 그렇게 많은 업무가 쌓여 있지 않다고 한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을 모두 살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298p

표트르는 자신이 '父情'에 이끌렸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역할에 관한 그의 인식은 결코 오늘날의 아이 중심적 개념이 아니었다. 표트르는 "사적으로는 부모지만, 우리처럼 매우 합당한 이유로 군주의 권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어떤 판관들의 판결과 무관하게 자식들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갖고 있다."라고 글을 씀으로써, 당시의 신념에 공감을 표했다. 아버지는 두 번째 직책일 뿐이었다. 그는 임무를 맡은 군주였지만, 그의 아들은 가장 최악의 방법인 국가를 저버리는 행동으로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표트르는 알렉세이를 대할 때 일종의 지독한 일관성이 있었는데, 그의 그런 태도는 누구든, 심지어 아들이라도 본인이 직접 쟁취하지 않은 특권과 승진을 누릴 수 없다는 그의 고집과, 높은 지위를 갖고 태어난 사람은 봉사해야 할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 우선 표트르 자신이 원치 않던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를 결코 사랑한 적이 없었고, 알렉세이 또한 자신의 나이 겨우 여덟 살에 모친을 유배한 부친을 사랑할 수 없었다.

326p

시골의 풍류 생활에 대한 이런 설명이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삶은 그렇게 목가적이지 않았다. 평화는 여전히 찾기 힘든 상황이었고, 1720년의 하반기에 표트르는 해상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335p

우리의 수도사들은 그간 너무 살이 쪘다. 천국으로 통하는 문은 믿음과 금식, 그리고 기도다. 나는 그들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이 철갑상어와 포도주가 아니라, 빵과 물이면 충분하다는 점을 일러줄 것이다.  ...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표트르 역시 신의 섭리가 인간사의 결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관념에 결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372p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오직 관료의 직책이 사람에게 사회적 명성을 줄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출생과 결혼에는 계속 특권이 부여되었다. ... 요구하는 등급에 오를 만큼 성공한 평민에게 세습 귀족의 신분이 수여된다는 사실은 "귀족이 타고난 사회지도층"이라는 개념을 뒷받침했다. ...  "표트르가 염두에 둔 것은 귀족의 지위를 격하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우수한 자질과 혈통의 측면에서 귀족과 일반 평민이 다르다는 사실을 귀족계층에게 주입하려는 의도였다."

384p

표트르의 경제는 전통적인 틀 안에서 운영되었다. 그런 운영의 계기가 된 것은 전쟁이었고, 표트르가 군사적 요구에 대처할 수 있게 해준 것은 전제군주제와 농노제였다. "이 무소불위한 지배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백성을 이용하고, 자신이 나누고 싶은 곳에 백성의 부를 사용한다." 자급경제는 사복을 채우는 관료들과 지방 실력자들의 '착취'를 받는 백성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국가가 분담하기에 딱 충분한 흑자를 만들어냈다. 러시아인들은 거의 자본이 없었고, 보험제도나 품질관리제도 또한 없었다. 대외무역과 부수적인 서비스(보험, 운송, 중개)를 위한 신용거래는 외국인이 제공했다. 상인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고 한 태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416p

주지하듯이 표트르는 특히 '공익'에 반하는 범죄를 잘 용서하지 않았고, 그러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는 대체로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든 관료가 처형식에 참석하여 적절한 주의를 받아야만 했다.

425p

"사람들은 미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쭉 자라온 그녀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의 정점인 황후에 오르게 한 신의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료들은 기쁨을 표현함으로써 황후에 대한 각자의 충성심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443p

표트르가 자신에게 나타난 증상을 무시하고 활동 속도를 늦추는 것을 거부하여 자기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일치하는 견해이다.

458p

군주의 측근이었던 사람들이 실제로 가장 원치 않았던 일은 또 한 명의 표트르를 대면하는 것이었다. 그를 대면한다는 것은 진이 빠질 만큼 벅찬 작업일정을 소화하는 것은 물론, 곤봉으로 두들겨 맞거나 치욕스러운 몇몇 의식에서 굴욕을 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여성 군주는 대규모 군사 훈련 사이에 한숨 돌릴 틈과 약간의 여유를 약속했다.

467p

표트르의 경제는 전통적인 틀 안에서 운용되어 전쟁이나 방어가 자체의 추진력을 만들어 냈고, 표트르가 군사적 수요에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제군주제와 농노제 덕분이었다. 그의 경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소작농인 전체 주민에게서 병역, 노동력, 세금을 착취하는 절대 권력을 사용했는데, 본질은 결국 러시아의 '후진성'을 최대한 활용한 것이었다. ... 출세한 사람들은 기업가가 되기보다 장원경제를 성공적으로 착취하는 귀족이 되려고 했고, 기업가 중에서 가장 성공한 부류도 귀족이 되기를 열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성공한 개인 기업가의 일부는 구교도들이었는데, 그들은 제국의 기득권층에 합류하려는 열망 없이 자립과 절약을 통해 자본을 축적했다.

470p

표트르의 해군과 구소련의 우주로켓은 모두 각자의 직접적인 기능 이외에도 많은 상징을 만들어냈으며, 러시아가 인접 국경을 넘어 세계를 정복할 수단을 갖추고 세계 무대를 노린 주요 도전자였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동시에 표트르의 해군과 구소련의 우주로켓 모두 훨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공적자금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오류>

145p

표트르는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언니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명령으로 감옥에서 단두대로 끌려 나왔던 일"을 염두에 두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메리의 언니가 아니라 당고모다. 엘리자베스와 아버지 제임스 5세가 외종 사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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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아프리카 - 에티오피아에서 마다가스카르까지 아프리카 14개국 종단기
김성호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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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접한 것은 KBS 3라디오의 오디오북 코너에서였다.

아프리카 여행이라는 흔하지 않는 주제라 흥미롭게 들었는데 출근 시간이 안 맞아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했는데 584 페이지의 상당히 두꺼운 책이었다.

여행기라서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고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문장도 가독성 있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분량은 상당히 많은 편이라 며칠에 걸쳐서 나눠 읽었다.

눈에 잘 띄는 표지 디자인이나 눈이 피로하지 않은 한 톤 다운된 듯한 인쇄 상태가 마음에 들지만, 역시 저자 본인이 찍은 사진은 도판으로 싣기에는 많이 아쉽다.

관련 지역들을 검색하다 보니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여행기를 책으로 묶은 듯 하다.

에티오피아부터 시작해 남아공까지 동아프리카를 내려오고 위로 올라가 나미비아에서 바다 건너 마다가스카르에서 끝나는 76일의 여행기다.

짧은 휴가에 가능하면 많은 곳을 돌아보기 위해 정신없이 다니는 직장인들의 여행과는 컨셉이 전혀 다른 프로 여행가의 직업적 여행기라 읽다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같은 사람은 따라하기 힘든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여행사에서 숙소와 교통편을 안내해 주는 편안한 여행이 아니다 보니, 더군다다 유럽에 비해 여행객을 위한 시설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아프리카를 배낭 여행하다 보니 좌충우돌 별별 사고가 다 있고 그런 불편함들을 별다른 불평없이 여행의 과정으로 묵묵히 감내해 가는 저자의 느긋한 태도가 독자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한다.

다만 중간중간 보이는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 비교는 좀 쌩뚱맞아 공감하기 어렵기도 했다.

약력을 보니 국회의원까지 지낸 분이라 뭔가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 같긴 한데 글만 가지고는 크게 공감이 안 갔다.

아프리카 각 나라들의 놀라운 자연환경들이 아직 관광지로 많이 개발되지 않아 아쉽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같은 유럽의 미술관 투어만 할 게 아니라 자연 유산을 테마로 여행을 하는 것도 신선하고 의미있을 것 같다.

한국인은 거의 없는 듯 하고 유럽 여행객들이 식민지 역사 탓인지 많다.

경제적으로 낙후되고 특히 정치 상황이 안정되지 못해 여전히 국민소득이 낮아 관광 자원 개발도 어려운 듯 하다.

개발이 덜 되서 멋진 자연 환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당장 수출품을 만들기 힘든 상황이라면 관광 자원 개발에 좀더 투자를 하면 국민소득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이런 것도 어설픈 감상일까?

많이 접해 보지 못한 아프리카 대륙의 여러 여행지들을 소개해 줘서 흥미롭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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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 장가보내기 - 구혼과 처녀간택부터 첫날밤까지 국왕 혼례의 모든 것
임민혁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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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의 책이라 매우 상세하게 국왕의 혼례 절차와 그 의미를 분석하여 다소 지루하지만 예치국가라는 조선의 정체성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아마도 같은 저자였던 듯 한데 다른 책에서 간택 후궁에 대한 글을 읽은 적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간택 후궁인 숙의 가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다.

후궁이라고 하면 사가의 첩처럼 특별한 의례를 거치지 않고 좋아하는 궁녀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의외로 승은 후궁은 많지 않고 역사책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대부분이 출신 좋은 사대부가의 간택 후궁이었다.

적장자로 왕위 계승을 한 예가 많지 않음에도 어머니가 궁녀 출신인 경우는 경종과 영조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경종은 장희빈이 폐위되긴 했으나 한 때 왕비의 자리에 있었으니,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의 컴플렉스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고려 시대에는 여러 왕비가 있었던 데 비해 조선 건국 이후 왕 역시 한 명의 정처만을 둬야 했으나 중국의 예에 비추어 1빈 2잉이라는 제 2의 처를 두었다.

이것이 사대부의 첩과는 전혀 다른, 제후의 특수성이다.

첩이 가례 절차 없이 함께 사는, 이른바 야합에 의한 매우 사적인 관계였던 데 비해, 국왕의 간택 후궁은 의례를 갖춘 후 정식으로 입궁하여 사대부의 첩과는 다른 제 2의 처, 부인의 지위를 가졌다.

그래서 입궁 당시부터 종 2품의 숙의라는 높은 직첩을 주었고 정조대부터는 후계자 생산을 위해 아예 빈으로 맞이 했다.

그 예가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다.

적장자인 후계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왕의 위상에 걸맞게 제 2의 처인 숙의를 간택 후궁으로 들인 예가 조선 전기 때 많이 보인다.

태종과 세종, 문종, 단종, 예종, 성종, 중종, 선조 등 많은 왕들이 간택 후궁을 들였다.

의외로 세조가 여색에 관심이 없다고 후궁 간택을 거절했다.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도 후궁에서 중전이 되었고, 폐비 윤씨와 정현왕후 역시 숙의로 함께 입궁 후 각기 중전이 되었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역시 반정 직후 숙의로 봉해진 후 왕비가 되었다.

아무리 간택 후궁이라 하나 첩이 정실이 되는 것은 불가하다는 유학자들의 주장으로 중종 이후부터는 이런 경우가 안 보이고 특이하게 숙종이 승은 후궁인 장희빈을 중전으로 세웠으니 신하들의 반발이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히 간다.


<인상깊은 구절>

92p

일부 정치 세력이 장악한 권력이 왕권을 능가할 수 없는 왕조 국가의 속성상 왕비 간택의 주체는 국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국왕은 독단과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특정 가문과 통혼할 수 있었다. 그 권리는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203p

군신관계는 상하의 예의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의례의 제도화는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이었다. 일정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이를 매개로 인위적인 군신관계의 상하질서를 재생산 혹은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도전이 언급한 바와 같이 신분에 따른 질서를 얻는 수단이었다.

248p

왕실에서는 의례를 통해 왕실의 근원과 역사 및 정통성을 고양하고 재확인시켜 정치적으로 좀더 안정된 지지 기반을 갖추고자 했다.

281p

영조는 사친이 숙의에 봉해진 적이 있으며 그의 자식으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로 인해 숙의 가례에 대한 인식이 특별했을 것으로 보인다. ... 영조의 이러한 숙의 가례의 인식은 정조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선왕 영조가 후궁의 지위를 높여 숭봉하는 예에 철저했던 현실을 몸소 경험하고 그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는 자신도 종법에 어긋나는 계승관계와 즉위 후 경각에 달린 위기 상황을 경험했기에 원만한 왕통 계승과 왕실의 안정이 자손의 번성에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궁 간택을 서둘렀는데, 동왕 2년에 숙의가 아닌 빈으로 후궁의 국혼을 격상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287p

국왕의 간택 후궁은 출신 성분의 가례의 시행 여부, 의위의 차이 등에 비추어 승은 후궁과 구별되어야 하는 신분이었다. 간택된 후궁 숙의는 제2의 처로서 부인이라 칭하고, 승은 후궁은 첩이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택 후궁인 숙의는 왕조례의 특수성과 계급성을 인정하는 방향에서 첩이 아닌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302p

이들을 추모하고 예를 펴는 일은 제삿날은 물론이려니와, 이들에 얽힌 많은 추억 속의 날과 장소 및 역사적 사건 등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효제와 탕평은 영조가 평생토록 지키고자 했던 삶의 목표였다. 한편으로는 예치사회 질서의 재건에 필요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기도 했다. 숙종의 적장자가 아니라 경종의 아우로서 왕위를 계승하여 왕권의 정통성에 하자를 안고 있었던 영조는 더욱이 미천한 후궁의 자식이었다. 거기서 닥쳐오는 왕권의 부정과 도전을 극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조는 효제를 적극 강조하고 이를 철저히 실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굳건한 왕권을 확립하고 왕실의 안정을 도모하며 출신의 한계를 이겨내고자 했다.

332p

이러한 신분과 지위에 따른 가례 시행상의 위격의 차별은 예의 상하와 존비, 귀천에 따라 의례의 크기를 조절하여 규정한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표현된 예의 실제이나, 그 이면에는 내명부의 계급질서와 국왕과의 관계 설정에 따른 왕실 내에서의 위계질서 등을 안정된 상태에서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간택 후궁의 특별한 지위와 존엄을 가례를 통해 밝힘으로써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지위를 제고할 수 있었다. 후궁이 첩의 시각에서 일정한 예를 거치지 않고 사는 여자라면 굳이 가례를 행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를 거행한 것은 왕조례의 특수성에 따른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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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1337~1453 - 중세의 역사를 바꾼 영국-프랑스 간의 백년전쟁 이야기
데즈먼드 수어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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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비해 서양 중세사는 항상 모호한 안개 속 같은 기분이다.

특히 복잡한 혼인 관계와 민족국가 형성 전의 왕위 계승 문제로 확실한 실체가 보이지 않는 기분이다.

말로만 듣던 백년전쟁이 어떤 배경 속에서 누가 주도하여 어떻게 전개되고 끝났는지에 대한 자세한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정리가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다!

자세한 전투 내용은 정확히 이해를 못했고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민족국가 형성에 백년전쟁이 큰 분수령이 됐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또 중세 전쟁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끔찍한 대학살 내지는 초토화 작전인 슈보시와 점령군에게 내는 일종의 보호비인 파티스, 몸값 지불을 통한 포로 사업 등의 실체를 알게 됐다.

문득 병자호란이 생각났다.

청나라가 침입한 후 무수한 포로들을 데려가 노예로 삼거나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게 했는데 이는 병사들의 개인 재산이라 함부로 방면해 줄 수 없었다는 의미를 이해할 것 같다.

오늘날의 포로 석방 같은 개념이 적용될 수 없고 중세의 전쟁이란 일종의 재산 획득 과정으로 왕과 귀족은 영토를 얻고 병사들은 포로와 값나가는 물품들을 얻는다.

이런 약탈물도 무조건 자기 것이 되는 게 아니라 1/3은 반드시 주군에게 바쳐야 하고 주군은 또 그 위의 상위 귀족과 왕에게 일정 부분을 바쳐야 비로소 권리가 인정이 된다.

영국의 왕들은 프랑스의 대귀족을 사로잡아 얻게 된 몸값으로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중세의 왕들은 고려나 조선 시대의 유학자 같은 점잖은 군주가 아니라 직접 말을 타고 전장의 일선에서 지휘하는 무사들이었다.

장 2세는 영국군에게 잡혀 엄청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슈보시는 적군의 자원을 파괴시키기 위해 인명과 재산을 전부 불태워 버리는 일종의 대학살이다.

몽골군만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르는 줄 알았더니 중세 전쟁의 특성 같기도 하다.

백 년의 긴 기간 동안 프랑스에 영토를 두고 원정전을 펼쳤던 영국의 국력도 놀랍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부르고뉴 궁전의 배신이 있었으며 결국 이들이 다시 프랑스 편으로 돌아오고 대포의 개발로 영국군은 축출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르고뉴 공작은 영국 대신 프랑스를 선택하는 바람에 프랑스 왕실에 합병되어 버린다.

민족국가 형성 전이니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382p

백년전쟁에 대한 잉글랜드의 유일한 기념비는 버너스 경의 웅혼한 프루아사르 번역과 세익스피어의 사극들이다. 두 나라 사람들 간의 불편한 관계의 기원은 백년전쟁 동안 벌어진 전투, 포위전, 슈보시, 몸값 갈취, 약탈, 파티스, 프랑스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저지른 방화와 살해에서 찾을 수 있다는 주장에는 강력한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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