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와 그의 사람들 역사 속에 살아 있는 인간 탐구 36
주보돈 지음 / 지식산업사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트렌디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학구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는 궁극적으로 이야기라 그런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어떤 수준의 책이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놀라운 흡인력을 지닌 매력적인 학문임을 새삼 느꼈다.

김춘추 평전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신라와 김춘추가, 외세를 끌어들인 매국노 수준으로 격하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정독해 볼만한 책이다.

당시 삼국은 비슷하다는 동류의식은 있었을지 모르나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고 오히려 신라가 백제를 통일한 후 당에 맞서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면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삼한일통 의식이 생겨났다고 본다.

이게 정답일 듯 하다.

통일신라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김춘추는 백제 멸망을 일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없는 노력을 경주해 마침내 아들대에서 삼한통일을 이루어 낸 신라의 가장 출중한 왕이라 할 만 하다.

그 과정에서 처남인 김유신, 문장가 강수, 고승 원효와 자장 등의 도움을 받아 국가의 근본을 유교식 관료제로 바꾸어 나간다.

당과 일본, 고구려 등을 직접 방문하여 외교전을 펼친 꽤나 국제적이고 적극적인 정치가였던 듯 하다.

왕이 직접 타국을 방문해 외교정책을 이끈 예는 우리 역사상 매우 드물지 않을까 싶다.

세종대왕처럼 한국사에서 큰 위상을 차지해야 할 것 같은데 고대인이라 사료도 드물 뿐더러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치하의 현실을 당시 역사에 잘못 대입해 인식하는 바람에 매국노 취급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요즘은 통일 신라가 아니라 남북국 시대로 명명되는 듯 하다.

발해를 우리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니 좋은 일이지만, 한민족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갖는 위대한 의의이니 합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으면 좋겠다.


<인상 깊은 구절>

57p

공략전이 끝난 즉시 문무왕은 왕경으로 돌아와 군공을 포상하는 등으로 고구려와의 전쟁 결과를 정리하고 그 영토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신라가 전쟁이 끝난 뒤 고구려 영역으로부터 곧장 주력 병력을 완전히 철수시킨 자체는 고구려보다는 백제의 영역에 대해 한층 더 크게 관심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60p

당은 아마도 서쪽 변경에서 일어난 토번의 발호나 요동 방면에서 고구려 유민의 움직임 등에 대비하려고 일시 고구려 옛 땅으로부터 병력을 철수시킨 듯 보이지만, 그것은 이어진 고종의 사망과 잇따른 왕위 계승의 문제 및 측천무후의 황제 즉위 등 당의 내정과 결부되면서 결과적으로 철군은 영구화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내부의 지배체제를 정비하자 사신을 파견해 사죄하려는 등 신라의 노력도 일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 당이 그 구심의 구실을 하게 된 것은 큰 성과였다. 말하자면 동아시아에서는 당을 중심으로 일원적인 질서체계가 작동하는 새로운 세계가 성립되었다. 그것은 당나라 직전의 남북조 시기보다는 한층 더 강하게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작용하는 세계였다. 이는 전쟁에 직접 참여한 신라나 일본이 스스로 전후 당제를 한층 더 수용해야 하는 체제로 전환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 신라는 시종일관 백제 땅을 차지한다고 굳게 믿어왔으므로 마침내 당과의 전쟁까지 불사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신라의 백제 옛 땅에 대한 집착은 강고하였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적절히 활용하였고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결국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얻어낸 산물은 '일통삼한'하였다는 의식이었다. 아마도 삼한이란 용어에 내재한 것도 원래는 삼한에 지나지 않았으나 통합 이후 삼국을 의미하는 인식으로 점차 확대된 것이었다. 그것은 통일 이후 곧 닥칠지도 모를 당과의 2차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변화에 걸맞게 내부적인 체제 정비를 위해서도 필히 요구되던 인식이었다.

71p

이로 보면 당태종이 여왕의 폐위를 말한 것은 고구려 원정에만 깊은 관심을 기울이던 당이 신라의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구실이었을 따름이다. ... 신라 역사에서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즉위 자체는 순조롭게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이 어떻든 즉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들 사이에 일정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진 결과였다. 

75p

김품석이 대야성에서 취한 그와 같은 일련의 행위는 신라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대야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김춘추가 받은 충격의 정도는 <삼국사기>에 잘 묘사되어 있거니와, 이는 단지 그의 딸과 사위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는 차라리 그들이 범한 행위로 말미암아 중앙정치에서 그가 입은 타격의 일단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를 지금까지 김춘추의 개인적인 불행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심지어는 이후의 신라정치사를 김춘추 가문의 개인적인 슬픔을 국가적 불행사로 승화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려 한 견해도 있으나 이는 피상적인 이해이다.

128p

당태종이 김춘추와 구두로 약속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당의 기록에 그런 내용이 전혀 남지 않게 된 것도 그런 실상을 반영한다. 군사 움직임의 결정권이나 주도권이 상호 공동으로 충분히 협의된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당에 있던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그것을 대등한 입장에서 취해진 군사동맹의 성립이라 풀이하는 것은 지나친 현재적, 일방적 해석이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당이 비록 구두이기는 하였으나 삼국 가운데 신라를 군사적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힌 사실이다. 이제 당은 오직 신라만을 우호세력으로 인정한 셈이었다. 신라의 당면 현실로서는 그 정도만으로도 상당한 외교적 실리를 얻은 성과였다. 

154p

신라는 실제로는 백제만을 통합한 상태이지만 관념적으로는 삼국을 통합하였다고 여겼다. 물론 영토의 한계는 뚜렷하므로 실상과는 차이가 나지만 그럴 만한 명분은 충분하였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까지 포함한 삼국의 주민 융합책이었다. 통일 이후 중앙의 핵심 군단인 9서당을 편성하면서 각국의 유민을 골고루 섞은 듯이 보이도록 한 것도 그런 일환이었다. 고구려가 역사적으로 볼 때 삼한의 일원이 아니었음이 명백한 데도 억지로 그렇게 연결 짓고자 시도한 것은, 신라가 결과적으로 얼마나 일통삼한 의식에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뚜렷이 증명해 주는 사례이다. (최근 일통삼한 의식을 하대에서 만들어진 의식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재기되기도 하였다. 사적지의 건비 시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7세기 말 일통삼한 의식의 성립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므로 따르지 않는다.)

248p

진평왕대에 이르러 고양된 왕자의식으로 왕자가 이제 원래부터 일반귀족과는 혈족이 다르다는 의식으로 발전하게 되고, 이에 따라 기존 골품제상에서 골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수반함으로써 급기야는 성골 관념이 출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장기간에 걸치는 진평왕의 집권은 왕자의 성골의식을 더욱 굳게 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곧 선덕여왕의 즉위를 가능케 한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여왕 지지파들에 의해 주장되었을 소위 聖骨男盡이다. ... 선덕여왕은 사실상 그야말로 실권이 거의 없는 존재였다. 그 까닭으로 선덕여왕의 개인적인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구조적으로 '여주불능선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신회의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된 만큼 의장인 상대등은 다음의 왕위 계승권에 가장 근접해 있었다고 하겠다. 비담이 왕위 계승을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도 여기에 근거한다. ... 이를 추진한 세력은 김춘추와 김유신이었다. 이들은 한편 여왕 즉위의 명분으로 이웃한 일본의 사례도 아울러 이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279p

이런 전반적 과정을 놓고 보면 당과의 전쟁이 벌어질 때까지도 신라가 삼국 통합의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오직 백제의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강한 의욕만 넘쳐나고 있었을 뿐이다.

299p

아마도 김유신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는 파격을 스스럼없이 단행하는 강한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실 그는 사람의 현실적 능력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지방민을 적극 활용하려 한 데에서 뚜렷이 보이는 사실이다. ... 김춘추에게는 즉위 이후에 벌어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대안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그것이 곧 유교적 인식에 입각한 관료제 국가의 건설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는 곧 골품체제의 부정인 셈이었다. 

337p

그렇지 않아도 백제의 공세로 맞았던 직전의 위급한 상황은 넘겼다고 하지만 위협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아무리 당의 요청이라도 파병 자체는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올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은 바로 얼마 전 신라가 백제의 공세로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청병 요청에 대해서는 온갖 구실을 붙여 철저하게 외면한 바 있었다. 최후에는 파병하기로 결말이 지어졌다. 아마도 당의 승리를 예상하고서 차후 그로부터 여러모로 도움이 뒤따르리라 예상한 파병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파병 주장파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645년 초 본격화된 당의 고구려 공격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당의 도움은커녕 이제 머지않아 강적 고구려로부터 보복적 공세가 예상되는 국면을 맞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파병의 기간에는 당에서 진행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백제의 공세가 잠정 중단되리라는 기대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백제는 당의 요구에 부응하지도 않았거니와 도리어 그 틈을 노려서 신라를 공격하였다. ... 선덕여왕은 반란군에 의한 해를 입어 사망한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여왕의 임종이 가까워졌다고 여겨 이 후사를 노려서 난을 획책하였던 것 같다. ... 진덕여왕 즉위는 차기를 노린 김춘추의 입장이 강하게 스며들어 있는 선택이었다. 가능하면 자신이 즉위할 수 있는 명분과 토대를 튼실히 굳혀 가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충분한 사전 정지작업이 필요한 일이었다.

370p

비록 당이 내부의 사정으로 고구려 선공론에서 백제 선공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할지라도, 이십 년 가까운 기나긴 세월 동안 자나 깨나 백제 공격에 줄기차게 매달려 온 무열왕 김춘추로서는 당연히 자신의 노력으로 성사된 일이라 선전하였을 공산이 크다. ... 이후에도 당은 백제를 먼저 공격하자는 신라의 줄기찬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고구려 공격으로만 일관하였다. 당의 입장으로는 당장의 위협이라 판단한 것은 백제가 아니라 영토를 직접 접한 고구려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사이에 둔 백제는 당으로서는 현실적 위협으로 느낄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보면 당태종이 김춘추와 밀약을 맺은 것도 사실 고구려 공격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신라의 병력을 거기로 끌어들이려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 일단 강수가 사망한 뒤 그의 처가 귀향하기로 결정한 것은 왕경에 오래 거주하였으나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였음을 뜻하거니와, 이는 일단 차별 의식이 존재함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 문무왕의 언설처럼 통일에 대한 공헌이 지대한 강수가 최후로 받았던 관등 사찬이 지방민이 받았던 최고위인 점과 일치한다는 점은 그가 지방민으로 인식되고 있었을 시사해 주는 사실이다.


<오류>

당의 초기 개국공신 세력은 559년 장손무기의 죽음을 끝으로

->559년이 아니라 65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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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18-05-17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춘추는 외교 전략을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고, 삼한일통의 초석을 다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백제는 당 제국의 영향에 들어갔고, 고구려는 아직 건재한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지라 삼국 통일 전쟁에 당 제국을 끌어들인 ‘도박‘의 부담은 오롯이 아들 문무왕이 짊어져야 했지요. 그래서 저는 백제 고토의 통합을 완료하고, 나당 전쟁 발발 이전부터 전쟁에 대비한 문무왕이 부왕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직접 외국을 돌아다니며 국제적인 감각을 갖춘 아버지에게서 정치를 배웠기에 문무왕이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겠지만 말이지요.
 
지상의 위대한 도서관 이상의 도서관 32
최정태 지음 / 한길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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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서관 기행이라는 독특한 주제라 선택했다.

저자의 직업이 사서라 도서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넘치는 점은 좋은데 본격적인 연구와 조사는 아닌 말그대로 기행문이라 여행기 정도의 가벼운 서술이 아쉽다.

한가지 주제에 대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좋은 글쓰기의 전형으로 조용준씨의 <유럽 도자기 여행> 편을 들 수 있겠다.

이 정도의 자료 조사와 시간 투자가 있어야 양질의 컨텐츠를 가진 "읽을 만한" 정보가 많은 책이 나오는 듯 하다.

이 책은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쉽고 대신 유명 도서관 열 두 곳을 소개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다.

도서관 사진의 도판도 좋은 편이다.

도서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는 나에게 박물관 만큼이나 도서관은 흥미로운 곳이다.

그렇지만 진품을 직접 관람하는 것이 중요한 박물관이나 미술관과는 달리, 책은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 내용은 동일하다는 점에서 희귀본을 얼마나 소장하고 있냐 보다 얼마나 많은 책들이 이용자에게 읽힐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듯 하다.

하버드 도서관은 장서수가 1600만권에 달하고 이탈리아 공공 도서관은 무려 6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한국인은 글 읽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현대의 도서관 수나 독서 인구를 보면 이것도 하나의 신화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우리는 일부 식자층이나 책을 중히 여겼을 뿐 실상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민족이 아니었을까?

서구나 일본에 비해 도서관 수나 1인당 읽는 책은 매우 현저하게 떨어지는 반면, 아이돌이나 한류 드라마가 세계로 뻗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책에 나오는 유명 도서관들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 희귀본들이 많고, 장서수는 기본이 천만 권을 넘으며 건물 또한 매우 훌륭하고 무엇보다 사서가 단순히 책정리 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 행사를 주최하는 기획자들이다.

희귀본은 이제 와서 구할 수도 없고, 훌륭한 건물을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대신 도서관이 지역 사회의 문화적 구심점이 되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목표라 생각된다.

요즘은 도서관에서도 작은 행사들이 종종 개최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사서는 책 정리하고 대출해 주는 수동적 이미지가 강하다.

저자의 다른 책에서 봤던 내용인데 양질의 고급 인력을 많이 채용해야 도서관의 질적 수준을 높힐 수 있을텐데 인력에 투자하는 것을 가장 돈낭비로 생각하는 문화 풍토상 쉬운 목표는 아닌 듯 하다.

내가 학생 때만 해도 도서관은 시험 공부하는 독서실 기능이 가장 컸지만 지금은 책을 대출하는 종합자료실의 기능이 많이 강화된 듯 해 좋다.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해 밤 10시까지 대출 서비스를 해 주고 희망도서도 빠르게 구입해 준다.

가족이 여러 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 가족대출 서비스도 좋고 관내 도서관끼리 상호대차 서비스를 지원해 주는 점도 매우 편리하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이용자 부담으로 택배 대출과 반납 서비스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인력 부족으로 실현이 어렵겠지만 현재도 장애인이나 영유아가 있는 부모에게는 시행되는 제도니 확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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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협력일기 -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박지향 지음 / 이숲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역사적 관점이 나와 무척 일치해서인지 읽는 책마다 너무 공감하고 재밌다.

친일파 논란이 거센 요즘 윤치호라는 인물에 대한 평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전공이 서양사인만큼 저자는 비시 정부 치하의 나치 협력자들과 조선의 대일 협력자를 비교해서 설명한다.

4년과 36년은 너무나 큰 시간차이고 2차 대전 승리에 큰 기여를 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조선의 해방은 연합군에 의해서 가능했고 그 결과 분단이 됐으니 이른바 친일파 처결이니 역사 바로 세우기니 하는 논란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레지스탕스 신화 해체와 주변부의 협력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유럽 학계와는 달리, 여전히 한국은 민족주의 사관에 매몰되어 나아가지 못하는 듯 하다.

보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눈으로 자신을 보기에는 아직도 우리의 내적 역량이 부족한 탓일까 생각해 본다.

윤치호의 일기에도 너무나 리얼하게 나오지만, 자주 독립과 근대화에 성공하기에는 최고 지도자였던 고종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고, 한술 더떠 망국에 일조한 민비를 일제에 맞서 싸운 국모로 추앙하여 뮤지컬로 떠받들여졌으나 요즘은 다시 냉정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현실론자였던 윤치호는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급진적인 느낌이 들 정도니, 20세기 초 조선사회에서는 얼마나 독특한 인물이었을까 싶다.

전통주의적인 가치에 매몰되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왕조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시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듯 하다.

당시 시대 분석과 한 인물의 평전이 잘 어울어진, 무엇보다 흡입력 있는 이야기체의 아주 재밌는 책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징병제를 지지했던 행동은 친일파로써 비난받아 마땅할 듯 하다.

그는 호전적 정신을 조선 젊은이들이 징병을 통해 배우기를 진심으로 바랬다고 하는데 매우 잘못되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던 듯 하다.

망해가는 일본 제국이라는 배에 타고 있으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착각을 했던 게 아닌가.

만세 운동이나 임시 정부 등이 명분론적 입장에서는 조선 민중의 저항적 의지를 보여 줬을지 몰라도 실제로 독립에 별 도움이 안 되고 교육을 통해 조선 사회를 변혁시키고 국제 성세를 잘 이용하자는 그의 현실적인 주장에는 많이 공감하지만, 영제국이 인도의 은인이라던가, 징병을 통해 젊은이들이 호전 정신을 길러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주장 등은 동의하기가 힘들다.

아무리 훌륭한 제국 안에 있더라도 결국 차별받는 2등 신민에 불과하고 더군다나 일본은 2차 대전의 전승국인 영국이나 미국도 아니고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인상깊은 구절>

11p

현대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태도를 이른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상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한 결과,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18p

주민의 다수는 현실과 타협해야 했으며, 적극적이지는 않아도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조선의 경우에도 일제가 이식한 경제질서와 사회적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대중의 수가 적지 않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일제에 협조하지는 않았다. 단지 어쩔 수 없기에 점령자-지배자들과 거래하였고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그리하였던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러한 유형을 "중립적 협력자"로 정의하고 그들을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으로 분류한다. ... 저항만이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협력은 자립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아예 포기한 행동이었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는 사실이 지적되었다. 양측 모두 자립을 목표로 했지만, 단지 그것을 성취하려는 수단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저항자는 지배세력을 즉각적으로 제거하거나 파괴하려 했지만, 협력자는 강제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그것을 길들이거나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협력자도 자유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의 '비용'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25p

쿤 데 괴스테르는 한국사를 도덕적으로 해석하려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소장파 사학자나 구세대 사학자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민족주의적 접근법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며 윤치호가 처했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점을 지적한다.

32p

윤치호를 다른 조선인들과 구분하는 특징은 무엇보다도 그의 자유주의적 사고였다. 동시대 조선의 지식인들도 서구 자유주의에 감명 받았지만 그들 사고의 틀은 여전히 유교적 전통 속에 남아 있었다. 이 점에서 윤치호는 다른 지식인들과 달랐다. 철저하게 유교적 틀에서 벗어났던 그는 개인을 중시하였으며 자유와 독립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그처럼 유교를 혐오하고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도 자유주의적 가치 때문이었다. 한데 그에게 자유는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었다.

35p

윤치호는 일본이 결코 조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국제정세가 제공하는 기회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에서 누구보다도 국제관계의 작동방식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조선인들이 볼 수 없었던 세상을 보았고, 단순히 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혹은 망명정부를 수립한다고 해서, 혹은 변경지역에서 사소한 무력투쟁을 벌인다고 해서 조선에 독립이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윤치호는 현실주의자였다. 유영렬은 현실과 타협했다는 이유로 윤치호를 비난하지만, 현실주의자라는 이유가 비난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43p

식민지 지배자로서는 협력자들이 너무 강력해지거나 너무 불만에 차면 이들에 대한 후원을 철회해 다른 집단으로 옮겨야 한다. 여기서 로빈슨은 어떤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유럽인들의 정복에 더 쉽게 노출된 것은 그 사회의 내적 허약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영국인들이 식민지 사회를 '분열해서 지배'하려 했다는 주장은 잘못이며, 정확하게 말한다면 종속민들이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통일되지 못했기에 제국적 지배가 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60p

그것은 카뮈가 협력자들보다 사형을 더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카뮈는 이 세상을 "선과 악, 신도와 이단, 우리와 그들로 나누는 이데올로기적 세력"에 반대하였고, "어떤 이데올로기건 그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는 것을 인정하고 정당화하고 그것에 참여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협력자에 대한 많은 재판이 1945년 5월 독일의 완전 패망과 더불어 전쟁이 종결되기 전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일종의 전쟁 행위였음을 말해 준다. 

'4천만의 저항한 프랑스'라는 신화를 전복시키는 작업은 네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첫째는 프랑스의 해방에 기여한 저항운동의 역할을 축소하고 연합군의 노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저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들의 수가 극히 미미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대부분 프랑스인이 뚜렷한 대의를 믿지 않고 단지 승자 편에 섰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많은 프랑스인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것은 대체로 날조된 이야기이며 특히 드골이 그러한 신화의 원천이라는 사실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사실 이러한 비판 가운데 어느 것도 새로운 것은 없고 모두 그전에 제기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25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이 그러한 폭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82p

조선의 해방은 유럽의 해방과 다른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유럽에서는 연합군의 상륙에서 전쟁이 종결되기까지 1년의 시일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레지스탕스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조선의 경우,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은 크게 기여한 바가 없었다. 윤치호는 그 상황을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애국지사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란 점"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한동안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승전군의 통치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적어도 그들의 대일 협력이 일신상의 영화를 누리겠다는 단순한 동기에서 기인하지 않았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 1937년 이후 시기에는 일제에 마지못해 따르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으며, 일제는 전쟁 명분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공연한 동조를 강요하였다. 육체적 고통을 당하거나 지하로 잠적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협력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 일제치하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식민지배의 현실에 분노를 느꼈지만, 그런 단순한 분노가 자동적으로 모든 조선사람을 민족주의적 애국자로 만들었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외국의 지배는 확실히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지만, 사회 하층민들에게 그것은 "억압의 또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104p

윤치호는 이 세상이 잔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일생 견지하였다. 그리고 이 세상이 그처럼 절망적이기게 신에게 의지하였다. 윤치호는 내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험한 현세를 살아가기 위하여" 신이 필요하다고 믿었고 "우리는 신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토로한다. 윤치호는 강한 자가 약자보다 도덕적으로도 더 우월하기에 강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 기억할 것은 힘이라고 할 때 윤치호가 상정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 힘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진정 중요시한 것은 '호전적 정신'이었다. 윤치호는 개인이나 민족이나 성공하기 위해서는 호전적이어야 하며, ... 그가 망국에 비애를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은 고종 통치기의 극도의 실정에 대한 비판의식에 근거하였다. 1880년대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미국 공사의 통역관이라는 자리에서 왕을 가까이 하였던 윤치호가 조선왕조에 내린 평가는 엄정하였다. ... 러일전쟁 중에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니는데 "존경할 만한 황제"는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궁궐의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이나 하느라고 바쁘다는 것이었다. ...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 왜 이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나라에 살면서 그렇게 형편없는 진흙으로 된 초가집을 짓고 사는가? 그것은 조선에 온 외국인들도 종종 품은 의문이었다. ... 조선왕조의 교육이 쓸데없는 철학과 도덕에 몰두했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였으며 당장 조선에게 필요한 것은 실용적인 교육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 그가 공산주의를 비판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것이 아카데믹한 이상에 불과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죽었을 때 윤치호는 그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지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평가하면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학술적 이상을 비현실적인 결론으로 이끌기 위하여" 위대한 국가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비극이었다고 한탄한다.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의 독립 역량을 과소평가하였다. 

142p

조선 사람들에게 저주가 된 것은 아무도 정치 외에는 나라에 봉사할 수 없다고 믿는 관습이다. 교회를 메우는 젊은이들은 설교에 정치적 발언이 없으면 들으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입맛에 맞추려고 너도나도 종교에 정치를 섞는다. 윤치호가 보기에 조선의 기독교인 가운데 '나의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는 예수의 심오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 조선 사람들에게 정치적 독립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비효율성을 없애고 도덕적 개선을 이루는 일인데도 말이다. ...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를 싫어한 이유를 그의 보수적 성향에서 찾지만, 사실상 그 혐오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는 데 있었다. ... 윤치호는 대중이 사실상의 기아상태, 그리고 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볼셰비즘은 뿌리뽑히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 실력양셩론을 비판하며 무력투쟁을 주장한 사람들에 의하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제는 조선이 독립할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니 무력을 통하여 독립을 얻어야 한다는 것인데, 윤치호가 볼 때 군사적으로 그처럼 강력한 일제에 맞서는 것은 더욱 허망한 일이었다. ... 민원식이 양근환에게 암살당했을 때, 윤치호는 그와 동의하지 않으면 그뿐이지 자신과 동일한 생각을 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다며 양근환의 행동을 비판한다. 그에게는 양근환처럼 교육받고 뚝심 있고 용감한 젊은이가 암살자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한탄할 일이었다. 윤치호는 조선의 독립이 암살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는 결코 확보될 수 없다고 믿었다. 윤치호는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에 대하여 대단히 비판적이었는데 그는 그들을 "선동가"라고 부르고 그들이 "산적"같이 행동한다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모두 입으로만 독립을 외치면서 막상 독립국가를 감당할 준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 윤치호의 판단이었다. 게다가 "다스릴 국민도 없으면서 정부 간판을 내건 채" 끊임없이 국내에 있는 조선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도 비난받을 짓이라고 생각했다. ... 한마디로 이들 "애국자"는 "질 나쁜 강도"들이라는 것이 윤치호의 결론이었다. 해방 후에 쓴 글에서도 윤치호는 소위 "애국지사"들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해방이 된 듯 자만하는 태도에 일침을 놓았다. ... 많은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증오하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것처럼 생각할 때 윤치호는 증오를 통하여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므로 증오는 나쁜 것이라고 훈시하였다. 

162p

윤치호는 소위 '친일파'와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이완용을 멀리하였는데, 훗날 자신이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친일파의 거두로 비난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무덤에서도 놀랄 것이다. ... 윤치호는 민족 정체성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 윤치호는 일본이 모든 것을 일본화하고 획일화하려는 데 반대하였다. 일본이 위대한 제국이 되려면 많은 인종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그들을 모든 면에서 똑같이 만들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어리석은 정책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일본제국은 영제국이 아니었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점에 윤치호의 한계가 있었다.

170p

창씨개명에 동조한 것도 "내 아들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 그는 일본 지배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처신했지만, 식민시기 내내 일본 당국은 윤치호를 감시하였다. ... 윤치호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현실주의자였다. ... 윤치호는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든가 아니면 유럽이나 미국이나 천당으로 옮겨 가든가" 결심해야 한다고 한탄하였다.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184p

윤치호는 영국이 다른 어떤 나라나 마찬가지로 사악하다는 사실에 경악하였으며 인간 본성이 어디서나 똑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 그에게 충격적인 사실은 우선, 조선에서 그처럼 위세를 부리는 청나라가 서양으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전사적 기질의 찬양에서 보듯 그에게는 원래 파시즘에 쏠릴 수 있는 성향이 있었다. ... 그러나 윤치호 자신에게도 일본 민족은 이해하기 대단히 어려운 대상이었다. 그는 그처럼 꽃을 사랑하고 예술적인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205p

이제 서양에서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 강제력에 대한 협조는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받게 된 것이다. 협력은 복잡한 이슈이며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는 사실도 당연시된다. 우리 사회에서 발견되는 "저항하지 않으면 다 협력자"라는 식의 이분법적 판단은 서양 학계에서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다. ... 비록 저항은 점령자를 몰아내는 수단으로서 많은 것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협력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음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이 저항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윤리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더구나 짧은 군사 점령기가 아닌 장기적 식민지기에는 적응과 타협이 더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 윤치호에게 중요한 실체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이었다. 그는 조선 인민이 조금이라도 대접받고 조금이라도 더 잘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려고 평생 고민하였다. 그는 그 방법을 정치적 저항운동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고 육영사업과 YMCA 활동을 통하여 대중의 지적 수준과 삶의 질을 높이는데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윤치호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대일 협력의 길을 걸었다. 윤치호의 현실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안목은 그로 하여름 민족 저항 운동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단하게 하였다. ... 그러나 윤치호의 문제점은 일본제국은 영제국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그가 1930년대 말에 도달한 결론과 달리, 제국주의는 '다 마찬가지'가 아니었다. 윤치호 자신도 인정했듯이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에서나 살아남고 위대해질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만약 간디가 일본 지배하에 태어났더라면 싹부터 잘렸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 그러면서도 그에게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이는외에는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210p

그런 식의 비판이 내포한 오류는 민족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데 있다. 윤치호를 위시한 당대 지식인들에게 민족과 국가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었고 설사 국가가 사라진다 해도 민족은 보존될 수 있는 개체였다. 윤치호에게도 국가와 분리된 조선 민족의 실체는 분명하였다. 비록 윤치호가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였지만, 그는 분리된 조선 민족이라는 개념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 민족이 일본제국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였지만, 두 민족의 통합에는 반대하였다. 문제는 일본에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윤치호에게 국가는 중요성에서 개인을 앞서는 개념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는 개인에게 최상의 충성심을 요구하는 이념이며, 거기서는 어떠한 개인도 민족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당연시하듯이 개인이 민족에 함몰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포악한 정부라도 동족의 정부면 좋다는 절대적인 믿음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가? 윤치호에게는 개인의 복리가 국가의 존재보다 더 중요하였으며 그는 민족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에 거부감을 느꼈다. 윤치호에게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안녕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이고, 따라서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차라리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윤치호는 후일 그런 관대한 통치를 하였다고 믿었던 영제국조차도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제의 통치는 더군다나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한다는 윤치호의 신념은 개인이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 개념에 함몰된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되새길 가치가 있는 식견이었다. ... 그가 좀 더 담대하고 자신에 찬 지도자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히 조선 민족의 불행이었다. 그 자신은 현실주의자로 자처했지만,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자질에 대한 그의 판단은 이상적의적 관점에서 나온,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역사 발전에 대한 그의 믿음은 영국과 같이 점진적 진보를 경험한 선진사회를 기준으로 한 것이었기에 격동의 시기를 거쳐야 했던 조선 사회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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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 AKS 인문총서 15
심재우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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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적인 책이라 나같은 평범한 독자가 재밌게 보기는 어려워 아쉽다.

나열된 여러 자료들을 모아 당시 시대상과 법률적 환경, 의의 등을 고찰하는 대중서로 나오면 좋겠다.

박지원의 형정론이 기억에 남는다.

책에 따르면, 연암 박지원은 요즘에 알려진 분위기와는 달리. 주자학을 비판한 노장 철학자나 양명학자가 아니라 인간의 교화를 추구한 주자학자였다.

이는 정약용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현대의 관점으로 당대를 보는 오류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보수적인 주자학자들에게 개방을 요구하고 염치를 지키라고 주장했다.

이름을 중시함으로써, 즉 평판에 신경쓰는 문화를 만들어 악한 일을 막고 선한 일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인간의 명예욕을 꿰뚫어 보는 주장이라 신선했다.

허생전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긍정하면서도 적절한 도덕적 제재를 통해 자율적 도덕공동체를 추구한다.

인간의 선한 본성을 믿고 형벌보다는 예교로써 나라를 다스렸다는 조선이, 서구에 비해 인권이나 자연법이 발달하지 못하고 촌락에서의 폭력이 일상화 되고 특히 여성이 극단적으로 억압됐던 것을 보면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인 욕망 내지는 이기심을 부정하는 근본주의적 태도가 현실에서는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이를 보면 명예욕을 긍정하고 악행을 막기 위해 허용 가능한 선에서 좀더 강한 수단을 강구하자는 주장이 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런 그도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는지, 음란한 짓을 한 여동생을 물에 빠뜨려 죽인 오빠를 인간적 관점에서 감형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슬람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명예살인이 아닌가.

여동생을 죽일 때 오빠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는지를 감형의 근거로 삼자는 것이다.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노파를 칼로 열 여덟 군데나 찔러 죽인 여성을 의인으로 칭송해 방면한 정조의 판결도 확실히 오늘날과는 조선이 매우 다른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인상 깊은 구절>

20p

범죄는 당대 사회적 관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회적 일탈행위를 말하며, 국가에 의한 처벌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33p

<심리록> 수록 사건들에서 자신이 선별한 살인사건 사례를 통해 촌락사회에서의 폭력 문제, 소문의 기능, 아전의 부패상, 술과 범죄의 연관성, 법에서의 여성 문제 등 법과 사회의 제 양상을 검토했다.

36p

조선의 재판제도는 법률이 정한 기관, 법률의 규정, 법률이 정한 절차가 아니고서는 어떠한 인신에 대한 구속도 불법인 근대의 재판제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고 따라서 재판과 형법체계는 본질적으로 중세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김선셩은 기본적으로 조선시대 재판을 인민이 항거할 수 없는 법적 강제력으로 파악하고 있다.

44p

분석 결과 그는 당시 여성의 성,정절이 가부장제를 중핵으로 한 사회적 관계망에 의해 전유되었고, 이 관계망의 감시와 처벌이 살인까지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여성의 일상생활 전체가 국가, 사회, 가족 등에 감시받았다고 주장했다. ... 인명사건에서 가족, 친족 간의 갈등과 배우자 살인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는데, 특히 가족 내 여성이 범죄 희생자로 등장하는 사례에 주목함으로써 여성의 위상과 열악한 가족 내 지위를 파악하고자 한 연구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 이들 연구는 조선후기 가부장 질서의 강화 속에서 폭력에 노출된 가족 내 여성의 취약한 지위, 법률과 판결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사례 분석을 통해 살펴보고 있다. ... 그는 검안이 실린 사건의 원인을 유형화하여 당시의 사회상을 광범위한 폭력, 취약한 여성의 지위, 윤상과 소문, 이권으로 인한 갈등, 새로운 문제들이라는 범주로 나누어 각각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당시의 사회구조에 대한 인상으로 사적인 폭력의 광범위한 유포를 꼽았다. 그리고 음주로 인한 적지 않은 사고의 발생, 취약한 여성의 지위 문제도 사건에서 드러나는 당시 사회상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 이들은 가족간 갈등의 핵심은 부부 관계이며 또한 부부 간 폭력 발생의 핵심적인 원인이 남편의 아내에 대한 성적 독점욕인데, 이것이 배우자 살해를 초래하는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105p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신장, 압슬, 낙형 등이 형신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물론 요즈음의 시각으로 보면 이는 강압적이고 불법적이며 고문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합법적으로 간주되었다. ... 1646년의 강빈 사건처럼 자복하지 않더라도 억지로 결안과 조율을 거쳐 처형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사실 이러한 사건은 대부분 강제로 죄명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추국이 형신 아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복했다고 해서 모두 죄를 인정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자복하지 않더라도 결안을 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는 자복하지 않는 혐의자를 먼저 처형하고 후에 결안을 작성하는 사례조차 있었다.

117p

박지원은 부끄럽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에 기댄다면 질서 유지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일종의 명예욕을 활용하여 선한 행위를 장려하고 악행을 못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형별과 포상의 정치는 결국 한계가 있는 방법이요, 명예를 장려하는 정치는 어디서든 제한이 없다." ... 그는 스스로 명예를 알고 욕망을 추스를 줄 아는 자율적 도덕성을 기대했다. 이른바 주자학이 기대하는 '자율적 도덕공동체'의 기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암의 이러한 주장은 개인의 욕망(이기심)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공감에 기초하여 개인의 이익 추구에 도덕적 제재를 가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아담 스미스의 사고를 떠올리게 한다.

144p

주자학자들 역시 식색을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으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만일 삶의 욕망과 의리가 마찰을 일으키고 생리를 의리에 앞세우기 시작한다면, 주자학의 도덕정치는 근저에서 붕괴할 것이 명백했다.

167p

<은애전>은 복수 행위가 법적으로 허용되었던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김은애의 복수 살인은 사실 지나치게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행위는 노파를 난자해 온통 피범벅이 될 정도로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과도한 것이기는커녕 조사관들의 감탄과 공감을 자아낼 만한 정당한 행위로 미화된다. 반면 피살자인 안 여인은 창기 출신인데다 천성이 '간사하고 거짓말을 잘하는' 성격으로 감히 양가집 여자를 무고했으니, 정조의 표현대로 "정말 살을 발라 죽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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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역사상의 한국 석학인문강좌 64
김한규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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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인문강좌> 시리즈는 제목 그대로 한 분야의 석학들이 평생 연구 주제를 압축하여 대중들에게 높은 수준의 강의를 들려주는 정말 유익한 기획이다.

광고를 좀더 많이 하고 편집 디자인을 산뜻하게 했다면 이런 훌륭한 시리즈가 훨씬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을텐데 정말 아쉽다.

저자는 중국사 전공자답게 전통 시대의 한반도를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바라본다.

국수주의나 자국 위주 역사관에 함몰되지 않고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눈으로 동아시아사 속에서 한국이 점한 위치와 중국과의 관계를 조망해 보는 매우 의미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다소 지루했지만 한 권을 읽다 보니 중국사 전체를 심도있게 훑은 느낌이다.

특히 요동사에 대한 고찰이 인상깊다.

저자는 당시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중국이 주변 민족들과 조공-책봉 체제를 통해 호혜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강조한다.

한국이 중국의 번국이 됐던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집단 안보 체제에 들어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최상층의 문화를 수용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중원 국가와는 기꺼이 조공 책봉 관계를 맺고자 했고 요동에서 일어난 요, 금, 원, 청 등의 이족 국가와는 관계를 거부하여 침략을 당했다.

요동 국가들은 한족과의 호혜적 관계와는 달리 신속과 많은 세폐를 강제하는 약탈적 관계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민족이 중원을 차지하면 침략을 받았다.

저자는 한국의 강한 문화적 정체성이 중국과는 다른 역사적 공동체를 이루어 오늘날의 독립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이는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다.

베트남은 심지어 자국 내에서는 칭제건원하는 자주성까지 보여준다.

만약 중국식으로 세계화가 됐다면 보편 문명을 뒤쫓던 조선 역시 서양처럼 근대화에 성공해 주도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을까?

중국도 서세동점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전통국가의 멸망으로 19세기를 마치고 말았으니 결국 오랫동안 독립국가를 유지해 왔던 한반도는 20세기에 들어서 줄을 잘못 선 셈이다.

그나마 해방 이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자본주의 노선을 붙잡은 게 다행이라고 할까.


<인상깊은 구절>

113p

조선인들이 '동방예의지국'이라 스스로 자랑한 것은 바로 기자에 의해 중국화한 나라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기자가 조선인에게 가르쳤다는 '예와 의'란 곧 중국의 고유한 전통적 가치와 문화 그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한국인은 "예의" 즉 중국의 가치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하려 노력했다. 한국인이 백의를 숭상하는 기풍은 흰옷 착용이 기자 이래의 습속이라는 믿음이 일반화된 결과이기도 했다. ... 오늘날 한국인들이 서구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아 기자 조선을 자국의 역사 체계에서 철저하게 배제하려 하는 상황에서는 기자 조선의 의미와 위상이 재평가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하겠다.

137p

周人은 商人과 마찬가지로 제사와 점복을 통해 天과 교감했고, 천은 마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처럼 주인의 생활에 직접 개입하여 일일이 간여했다. 특히 정치에 대한 천의 간섭은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상,주혁명'에 대한 개입이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주인은 군주인 상왕 주를 죽인 것을 천명으로 이해했다. ... 공자에게도 천과 천명은 여전히 존재하는 실체였다. 그러나 공자는 천이나 신과 같은 비합리적인 존재를 자신의 합리적 논의에세 배제할 것을 선언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인간과 신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위대한 인문학의 전통이 전개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공자의 인문학은 상주 시대의 전통적 문화, 즉 예를 체계화하는 것이었으며, 그의 연구 자료는 그 이전에 존재해 온 고문헌들, 예컨대 <시>와 <서>. <예> <악> <역>과 같은 것이었다. 공자는 이러한 고문헌을 정리하여 체계화하고 그 결과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는데, 그의 교육 목적은 이상적 '군자'를 양성하는 것, 즉 '내성외왕'이란 이상적 인간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맹의 사상이 긴 생명을 잃지 않은 것은 그들이 설파한 가치가 곧 동아시아인들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147p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해 온 이웃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중국은 이미 선진 시대부터 신분제 사회에서 벗어나 탈신분제 사회로 이행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역사적 과정에서 상앙의 변법이 수행한 역할은 가히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165p

진시황이 마지막 순수의 과정에서 당한 객사는 제국의 모든 권력을 직접 장악하여 행사하려 한 과로의 결과였고 제국의 급속한 부오기와 전면적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6p

'위만=조선인'설의 한 가지 논거는 위만이 요동을 경유하여 왔는데, 당시 요동은 조선인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에 위만이 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요동은 이미 연국에 의해 점유된 지 2백여 년이 지난 뒤여서, 그가 연(지금의 북영 일원)에서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위만인이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 <사기> 등 사서의 도처에서 이때 연, 제, 조 등 중국 동북의 거주민 수만 명이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 방면으로 '유망'했음을 기술하고 있으니, 위만은 이들 유망민을 대표할 뿐, 그가 중국인인지 조선인이었는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을 중요시하는 것은 오직 '민족' 개념을 우선시하는 현대 한국인의 관점일 뿐이다.

187p

특히 선거제의 확장을 통해 문학지사들이 대거 관료 조직의 상층부로 진입하는 상황에서 임협지사의 개절은 자연스러운 추세를 이루어,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각국의 관료 제도에서 문관 위주의 특징적인 측면을 형성했다.

190p

그러나 무제 치세기의 대부분 기간에 지속된 흉노에 대한 군사적 공세는 흉노의 항복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재정적 소모와 국력의 낭비를 가져와서 한 국가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렸다. ... 부호들의 호응이 부족하자 고민령을 발포하여 재산의 신고를 의무화하고 감춘 재산을 고발하는 자에게 포상하여 수많은 부호를 파산하게 했다. ... 실제로 무제 시대에 모색된 제국 체제의 확립을 위한 각 방면의 정책들은 대부분 유가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법가적이었으니, 무제 시기의 '견지법' 실행은 이 시기의 중국이 법가적 분위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는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사실 한 고조 유방이 관중에 들어가서 '약업삼장' 했다고 선전되었지만, 실제로 한 제국이 '삼장으로 축약한 법'에 의해 통치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 국가는 언제나 전국 시대부터 축적되어 온 방대한 규모의 율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근래에 선진 시대 진국의 어느 법리의 무덤에서 발견된 운몽진간은 중국의 법률 체계가 이미 선진 시대부터 얼마나 고도한 수준으로 발달되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다만 한대의 중국인들은 법치의 진 제국이 단명으로 끝나는 장면을 목도했기 때문에 유술로써 법치를 적절하게 포장하여 융통성 있는 제 3의 이념 체계를 창출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을 뿐이다.

214p

왕망 시대의 중국인들이 고대 중국인의 꿈이었던 정전제의 실현을 선언하고 중국과 이적의 수직적 관계를 선포한 것은 현실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도발이었다. 왕망은 아마도 심리역사학적 접근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연구 과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극단적인 이상주의적 사고와 행태는 복고적 제도의 제정에 대한 집착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18p

장제 시기에 반초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출현하여 아무런 국가적 지원과 명령 없이 홀로 남로와 북로의 서역 제국을 모두 제압하고 흉노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성공하여, 한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서역과의 제도적 관계를 복구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처럼 서역과 한의 관계가 변화무쌍했던 것은 서역의 존재의미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흉노 등 북방 유목민과 장성 이남의 남방 농경민 사이의 역학적 관계에 의해 이용되었기 때문이니, 이러한 서역의 존재의미는 전통시대 내내 유지되었다.

222p

요동의 변군은 형식만 군현의 형식을 취했을 뿐, 실제로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城의 형태로 존재하는 군진과 다름없었다.

225p

환관은 주로 극빈한 소농민의 자제 출신이 많아, 교육을 받지 못해 탐욕의 인간적 본성을 절제하거나 포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한대에는 황제의 직접, 개별적 인민 지배를 위해 집단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기 때문에, 黨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 일 자체가 배척되고 규탄되어야 할 범법 행위로 간주되었다.

237p

인간과 인간 관계를 다루는 사회학이라 할 유학의 종사자들이 초자연적 세계를 광범하게 논의하고,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국가 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결했다는 사실은 전한 말 후한 초라는 특수한 시기에 유학이라는 학문이 유교라는 종교로 이행되는 과정을 밟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46p

청담을 집대성한 유송의 유의경이 지은 <세설신어>에는 현학에 대한 고담준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인물에 관한 평가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청담'이 문자 그대로 세속을 초탈한 깨끗한 담론이라기보다는 향품을 정하는 자료를 제공하여 명사를 만들어 내고 청의를 형성하여 여론을 장악하는 과정이었음을 의미한다. 흔히 청담과 관련하여 이른바 '죽림칠현'을 거론하지만, 죽림칠현으로 지목된 완적 등 일곱 명의 인사는 모두 당대 최고급 청류 출신의 명사로서 7인 모두 <진서> 열전에 입전될 정도로 현실 정치와 사회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따로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청담이란 '깨끗한 담론'이라기보다는 '청류의 담론'이었다. 청담에서 흔히 논의된 현학의 명리승부와 인물 평가는 모두 명사를 배출하여 청류의 家格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251p

북위의 부병제는 원래 전투와 생활이 일치되었던 선비의 부락 조직에 기원을 둔 제도였으나, 이후 농업사회에 정착하면서 점차 병농일치의 중국적 제도로 발전하여, 균전을 지급받은 정남이 그 반대급부로 일정한 기간 병역에 복무하게 되었다.

272p

하안이나 왕필 등 현학으로 이름난 명사들, 심지어는 완적 등 청담으로 유명한 죽림칠현과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저명한 청담가들조차도 모두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다만 이들은 한대 유학의 형식주의적, 신비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형이상학에 논리적으로 접근한 <도덕경>이나 <장자> 등을 연구하여 유학을 보완하려 했을 뿐, 유교가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리로서 작동되어야 함을 거부했던 것은 아니다. 유교의 경전은 여전히 국가와 사회의 기본 원리를 담고 있는 성전으로 간주되었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은 국가와 사회에 의해 허용되지 않았다. 청류의 담론인 청의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여전히 유교적 예절이었고, 청의에 의해 배척되거나 비난받은 행위는 주로 유교적 예절에 어긋난 행위였다.

286p

수와 당이 이토록 집요하게 국운을 걸고 고우려를 여러 차례 침공한 까닭은 하국의 백제나 신라와 달리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국제 사회를 구성하여 중국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 한국사에서는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그 수도인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인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퇴각한 것처럼 서술되었다. 그러나 실제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퇴각한 가장 큰 이유는 토욕혼을 사이에 두고 토번과 당이 벌인 대비천 전쟁에 안동도호부를 지키던 당군이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 사실상 도호부의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 안동도호부는 유명무실 그 자체였으니, 안동도호부의 명목상 관할 지역 안에 신라와 발해라는 독립 국가들이 엄연히 존속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 두 인적국을 패망시킨 뒤에 신라는 그 고지를 당과 무력으로 다투었지만, 발해가 중국의 산동과 요서를 침공했을 때 원군을 파병해 준 대가로 732년에 당이 대동강 이남의 땅을 신라의 영토로 공인했다. 이 사건에는 신라가 당과 국경선으로 구별되는 독립 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았을 뿐만 아니라 삼한의 고지를 모두 정치적으로 통일했음을 확인한 획기적 의미가 있다. 한국은 이때부터 비로소 하나의 국가에 의해 통일적으로 통치되는 역사공동체가 되었으며, 통일 한국은 이후 고려와 조선 등의 시대를 경유하면서 전근대 시대 내내 중국 국가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가장 중요한 구성원으로 참여했다.

307p

다만 정치적 자립도나 자주성에 있어서는 베트남이 한국보다 몇 발자국 앞서 갔으니, 베트남은 한국과 달리 자국에서는 제국을 자칭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송과 명, 몽원, 프랑스,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등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들이 침략할 때마다 완강하게 저항하여 물리쳤다. 베트남인의 높은 자긍심의 바탕이 되는 이처럼 독특한 역사적 경험은 10세기 베트남의 독립으로부터 비롯되었다. 

311p

책봉-조공 관계란 운명을 함께하는 국제 사회의 중심 국가인 중국과 주변 국가인 四國이 서로의 국제적 위상을 승인하는 호혜적인 관계였다. 그러나 10세기 이후부터 중국을 지배한 통합 국가들은 주변 국가들에게 책봉-조공 관계를 강제하여 책봉을 신속의 수단으로 삼고 조공을 약탈의 방법으로 이용했으니, 쌍방적이고 호혜적인 책봉-조공 관계가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관계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314p

그러나 고려는 번번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니, 거란의 침략을 비롯해서 여진의 침략이 잇따랐고, 그 뒤에는 몽골의 내침까지 당해야 했다. 이처럼 고려가 잦은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까닭은 요동에서 일어난 통합 국가의 본성 때문이다. 거란과 여진은 요동을 통일하고 중국으로 진출하기 전에 먼저 한국을 침략했는데, 그 까닭은 중국과 한국의 밀접한 정치, 군사적 관계를 소멸시켜 '후고의 화', 즉 뒤돌아봐야 하는 걱정거리를 예방하려는 조처였다. 이는 뒤에 몽골의 고려 침략과 만주의 조선 침입에서도 되풀이되었다. 

318p

명조를 세운 주원장은 빈농 출신으로 처음에는 홍건 농민 반란군에 참여했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토호, 지주 집단의 무장 병력과 민병 조직을 지휘했고, 1368년에 남경에서 명조를 건립한 뒤에는 지주 계급을 대거 포섭했다. 또한 그는 농민 반란군의 지도 이념인 백련교와 결별하고 정통적 체제 이념인 유교를 수용하고 儒士를 대거 등용하여 士庶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농민이 피지배층으로서의 분수를 알고 지킬 것을 강요했다.

321p

요, 금, 원 등은 조선 등 외국에 대해 책봉-조공 관계의 형식을 빌려 '신속'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조공의 형식으로 물자를 약탈했지만, 명은 조선 등을 기미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호혜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통해 事大字小 관계를 실현하려 했다. ... 임진왜란 때 명군이 '항왜원조'의 기치를 내걸고 조선에 출병한 명분은 바로 사대-자소에 있었다. 조선이 그동안 예로써 명을 섬겼기 때문에, 이제 대국인 명이 약소국인 조선을 왜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371p

티베트는 국제연합에 호소했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중국을 자극할 수 없었던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이를 외면했다. 고립무원의 티베트는 결국 인민해방군의 라싸 진군을 저지할 수 없었고, 14세 달라이 라마는 1959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379p

국민당 정권이 타이완으로 축출되면서 대륙의 최고급 문화재를 대량으로 가져가서 대북의 고궁 박물관에 쌓아 두었는데, 이제 그나마 남아 있던 문화재조차 닥치는 대로 파괴되었으니, 역사에 대한 이처럼 잔혹한 테러 행위를 인류 역사에서 다시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 티베트인의 불행은 단순히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했다는 데 있지 않고, 티베트가 중국과는 정치 체제와 사회질서, 문화 양식이 전혀 다른 별개의 역사공동체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의 동화를 강요받았다는 데 있었다. 정교일치의 오랜 전통이 강제 폐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유물론에 의해 티베트인의 신앙이 치명적으로 탄압되었다. 그 단적인 증거가 바로 문화 대혁명이다. 문화 대혁명은 중국의 권력 투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티베트가 중국의 일개 자치구로 편입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불똥이 티베트 고원에까지 튀어서 8쳔여 불교 사찰이 대부분 파괴되고 승려들은 강제 환속되는 등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피해를 입었다.

386p

오랫동안 독자적인 역사공동체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인과의 일체감은 매우 희소했다. 국민당 정권도 정복자와 같은 자세로 타이완인을 대했으니, 이는 타이완인들이 저항한다고 해서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2만여 명이나 학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 지향성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형성하여, 그 역사공동체를 지켜나가는 데 근원적 힘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세계의 전통시대를 마감하게 된 서세동점의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한국인은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된 국가를 상실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으니, 일제에 의해 지배를 받은 36년간의 세월은 한국인의 삶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과 변화를 강제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이 '해방'과 '독립'이라는 선물을 받은 직후에 만난 '한국 전쟁'이 한국인에게 안겨 준 충격에 비한다면 '한일합방'은 아주 약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의 강제 합병으로 인해 한국인들이 잃은 인명과 재산도 적지 않았지만, 한국 전쟁으로 인해 잃은 2백여만 명의 인명과 전 국토의 초토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류>

188p

무제는 자신의 능묘인 두릉을 지키게 함으로써~

->무제의 능은 무릉이고, 두릉은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의 능이다.

209p

왕망의 고모 왕태후는 성제의 부인으로

->왕태후는 원제의 부인으로 성제의 어머니다. 성제의 부인은 유명한 조비연이다.

313p

남송을 세운 고종과 그 측근은 정치적 이유로 휘종과 고종의 송환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휘종과 흠종의 송환을 원치 않았다.

387p

한국이 기원전 3세기에 중국 한의 침략을 받아 군현이 설치됨으로써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의 침입으로 고조선이 멸망했으니 기원전 3세기가 아니라 2세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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