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1
이영훈 지음 / 백년동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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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거부감이 들었던 책이다.

저자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에 경제사 전공이라는 약력만 보고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경제학자가 섣불리 주류 학계의 이론을 논파하는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너무 재밌고 인상깊게 읽었다.

세종이 추구했던 정책의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도 흥미롭지만, 뒷부분에 간략하게 나온 개인의 자유, 그리고 그 자유인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 인상깊다.

저자가 지적한 대로 나 역시 학교에서 한 번도 개인의 자유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서양은 개인주의가 만연해 이기주의로 흐르는 게 문제이고 우리는 그에 반대되는 집단주의 성향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재산권이라는 의미는 제대로 배웠던 기억이 없다.

막연하게 사유재산권은 도덕적이지 않다는 느낌마저 갖고 있었다.

사회주의에 대해 잘 모르면서도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개인이 사적으로 재산을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국가가 모든 국민들이 잘 살 수 있게 돌봐주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가장 핵심 요소가 바로 개인의 자유와 사적 재산권인데 그것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부족하니 21세기에도 여전히 전통사회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실려 있는데, 요즘 비난받고 있는 뉴라이트 학자인가 궁금해진다.

원래 대중은 어리석고 집단주의적 성향을 지니기 마련이니 책에 나온대로 창조적 소수가 전통문화와의 간극을 좁혀가며 선도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할 듯 하다.

세종은 과연 양반이 지배하는 예치주의 도덕주의 국가의 기틀을 만든 훌륭한 성군임은 분명하다.

저자의 평가대로 그런 국가 정책 덕분에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왕조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을 오늘날의 정치적 관점에서 성군으로 평가하는 것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조선과 대한민국은 전혀 다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서울과 교토의 1만년>이라는 책에서도 읽은 바지만,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동족이라는 북한과는 매우 상이한 체제를 가졌고 오히려 식민 지배의 경험으로 적대시하는 일본과 훨씬 동질적일지 모른다.

저자가 계속 책을 낸다고 하니 관심을 갖고 읽어 볼 생각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었던 점은, 과연 훈민정음의 창제가 단순히 중국어 발음을 정확히 표기하기 위한 발음기호의 발명인지이다.

세종이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내면화 시키고 국가 정책으로 공고화 시킨 것은 분명하니,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아닌 듯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어를 정확히 표기하겠다고 발음기호로 만들었다는 게 쉽게 수긍이 안 간다.

당시 중국어가 오늘날 영어만큼 일반에 널리 쓰인 것도 아니고, 학문이나 외교 문서 등에서 문자로써 통용됐을 뿐인데 굳이 새 문자를 만들어 발음기호까지 달아서 중국어를 표시할 필요성이 그렇게나 컸을까?

의도가 무엇이든 오늘날 한글의 발명이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훈민정음 하나만으로도 세종은 한국사 최고의 위인임은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51p

고려는 고구려의 천하관을 계승하였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자로 군림했던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자부하였다. 그것은 어느 한 나라가 주도하는 천하가 아니라 병존하는 다원적인 천하였다. 그 같은 천하관은 삼한 고유의 종교적 전통과 결부되어 왕권의 신성을 보증하는 정치철학으로 역할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중국 황제에 신속하였지만, 다원적 구조의 천하관에 상응하는 상대적 우열의 관계를 넘지 않았다. 후술하듯이 고려왕조는 독립국의 상징으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고수하였다.

 조선왕조의 건립자들이 고려라는 국호를 폐하고 기자조선을 잇는 취지의 국호를 명에 자청한 것은 한국문명사에서 더없이 큰 단절을 의미하였다. 이후 한국사는 중국사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누가 뭐래도 그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중국과의 사대관계는 정치군사적 명분을 넘어 인간, 사회, 국가, 세계를 포괄하는 형이상학의 질서로 내면화하기 시작하였다. 

153p

변계량은 우리 동방의 시조는 단군으로서 원래 천자가 분봉한 나라가 아니며, 지난 1천 년에 걸쳐 천제를 지냈다고 한 다음, 비록 천제가 천자의 예이긴 하나 심한 가뭄을 당하여 제후도 임시변통으로 행할 수 있는 예라고 주장하였다. 태종은 변계량의 주장을 받아들여 천제를 복구하였다. ... 변계량이 수천 년 동안 행해온 예를 폐함은 부당하며, 더구나 조선은 강토가 수천 리로서 중국 내의 백리 제후와 비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에 대해 세종은 "어찌 강토가 수천 리라 하여 천자의 예를 분수없이 행하리오" 하면서 다시 거절하였다. ... 천제는 하늘과의 관계에서, 종묘는 조상신과의 관계에서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대변하였다. ... 사대는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모두에서 정략적 관계이다. 조선 태종조까지의 사대가 그러하였다. 양국 간에는 군사적 긴장이 잠재하였다. 세종조에 들어오면 분위기가 바뀐다. 한마디로 세종은 지성으로 사대하였다.

160p

고려왕조는 군사국가였다. 그 점에서 도덕국가인 조선왕조와 달랐다. 고려는 3만여 명의 중앙군을 보유하였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고 그로부터 세를 걷어 살았다. ... 고려왕조는 이들 중앙군을 핵심으로 하는 군사공동체였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지만 고려는 자력으로 격퇴하거나 오랫동안 항쟁하였다. 

168p

주자가례에 따른 3년상의 확산으로 인해 농촌 품관을 핵심 전력으로 하는 조선초기의 중앙군제가 약화되어 간 것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조선왕조는 군국의 수준조차 흉례가 지배하는 나라로 되어갔다. ... 세종은 천년 이상을 이어온 천제의 거행을 중단하였다. 하늘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포기함으로써 천명의 대리인으로서 군왕의 권위는 중국 황제에 대한 사대를 통해 확보될 수밖에 없었다.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늘이 내린 도로서 인륜이다. 세종은 스스로 인륜의 지극한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의 신료와 백성에 대한 군왕의 권위를 확보하였다. ... 조선의 국가체제는 제후 왕, 大夫 관료, 士 양반, 庶 상민, 賤 노비의 위계로 짜였다. 그 위에 중국의 천자가 놓임으로써 완성되는 위계였다. 이 나라는 점점 예의 질서로 유지되는 도덕국가로 순화되어갔다. 그럼에도 국가의 지배력은 강고하였다. 예의 질서가 천자를 정점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15~16세기의 천하는 명 제국을 중심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왕조가 구축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체제는 부동의 안정성을 구가하였다.

173p

세종이 독자의 문자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동시대 조선의 한자 발음과 중국의 그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 세종은 동시대 북경어 중심의 한자 발음을 정확히 표기할 목적에서 발음기호를 창제하였다. 그것이 훈민정음이었다. 통설대로 훈민정음은 하층 서민이 쉽고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개발된 문자가 아니었다. 한자를 사용하는 지배신분의 사람들이 동시대 중국의 기준에서 정확한 중국어를 구사하고 훌륭한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아름다운 시문을 지을 수 있도록 개발된 발음기호였다. ... 한문 밖의 일상의 조선어도 표기할 수 있음이 확인되자 훈민정음은 더 이상 발음기호가 아니라 표음문자로 바뀌어 보급되어갔는데, 그것을 가리켜서는 언문이라 하였다. ... 중화의 세계로 깊숙이 진입해가기 위해서는 언어, 문자 생활마저 중화의 기준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를 돕는 보조문자가 필요하였다. 다시 말해 세종의 한글 창제는 15세기적 국제질서에서 조선왕조가 소중화로서 추구한 개성적인, 그래서 역설적으로 민족주의적이기도 한, 문화정책이었다.

188p

조카를 몰아내고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군왕의 절대 권력을 확립함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강력한 개혁 의지는 백성에 대한 양반관료의 특권적 지배체제를 겨냥하였다. 세조는 기존의 호적을 모조리 불사른 다음 백지 상태에서 전국의 인구조사를 강행하였다. ... 나아가 세조는 양반관료에 지급하는 토지의 규모와 권리를 대폭 제한하였다. 이 일로 인해 세조는 신하들로부터 폭군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세종은 결코 그런 무리를 범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는 주로 학술, 신분, 예제, 외교를 대상으로 했으며, 그 방면에서 업적을 남겼다. 전술한 대로 그가 정비한 예의 국제질서로서 국가 체제는 이후 5세기를 뻗친 조선왕조의 기틀이 되었다. 

191p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농촌사회에 새로운 지배신분으로서 양반이 들어서고, 양반 지배 하의 노비 인구가 증가하고, 노비의 사회적 지위가 약화되고, 그 배경에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유교 이념이 있었다. ... 14세기까지의 고려왕조는 공동체사회임에 비해 15세기 이후의 조선왕조는 양반-노비를 축으로 하는 신분제사회라는 설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사학의 주류는 조선왕조를 유교국가로 설정하고 그 국가체제의 근세적 합리성을 부각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조선왕조는 유교적 민본주의 이념에 입각한 일종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며, 국왕과 신하의 권리는 상호견제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16세기 이후 중앙 정치에서 나타난 당쟁은 일종의 정당정치였으며, 농촌사회는 성리학의 보급에 따라 민권 의식의 고양을 보게 되었다는 것 등등이 한국사학의 주류를 점해온 담론이었다. 1980~1990년대 국사 교과서는 조선시대를 '근세 사회'로 시대 구분하였다. 한영우는 조선왕조를  '근세 관료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의 유교적 문민정치의 전통과 유산이 현대 한국사회의 역사적 바탕을 이룬다는 취지에서이다. ...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보급되 한국사 교과서에서 조선시대는 고려시대와 같은 시대로, 곧 '중세'로 구분되어 있다. 

194p

1899년 고종 황제는 대한제국은 만세불변의 전제정치라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황제는 탐욕스럽게도 국가의 주권을 자기의 가산으로 움켜쥐었다. 불행하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 왕조는 망했으며, 2천만 생령을 다른 민족의 노예로 넘겨주고 말았다. ... 자유인이 자기 의지와 계산으로 노동하여 취득한 재산은 그 누구도 탈취하거나 처분할 수 없는 그의 절대적 권리이다. ... 먹고 살 만한 최소한의 재산은 인간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든다. 근대 국가는 '소유권 절대의 원칙'과 '계약 자유의 원칙'에 입각한 민법을 제정하여 자유인의 재산권을 보호하고 있다. 민법은 인간을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의 주체로서 자기 문제를 자율로 처결하는 '사적 자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 ... 오늘날의 세계는 이 같은 애덤 스미스와 칸트의 가르침에 따라 영구평화와 영구번영의 길을 걷고 있다. 바로 그 길이 지난 18~20세기를 이끈 세계 지성의 주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성립하고 오늘날까지 그런대로 볼만한 성취를 이룩한 것은 그 세계사의 주류에 훌륭하게 올라탔기 때문이다. 누가 그 길을 인도하였는가. ... 이 나라의 건국헌법은 그의 국민을 자유인으로 선언하였다. 다소간의 흠결이 없지 않았지만 이후 이 나라의 국민은 자유인으로서 그의 삶을 영위하였다. 그 역사가 거의 70년이다. ... 나는 교과서들이 우리 조상이 소년기에 읽은 <동몽선습>이나 <소학>의 현대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세계사적으로 '근대'라고 부르는 문명의 기초 요소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적 자치의 주체'로서 개인, 개인의 자유와 독립, 그 기초조건으로서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자유인의 정치적 통합으로서 민주공화국, 자유인의 경제체제로서 시장경제, 자유인의 국제질서로서 자유통상 등은 어느 교과서 어디에도 그림자초자 비치지 않는다. ...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개인'은 없었다. ...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가 지난 40여 년간 왜적과 쉬지 않고 싸운 것은 개인의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였다고 강조하였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독립운동을 하였던가. 그저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더욱 아니었다. 다름 아닌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위해서였다. 자유인의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 그 '개인의 근본적 자유'는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전통 성리학의 세계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만이 아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문명권 전반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정치철학의 범주는 결여되었다. 그것은 하늘이 달라져야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다. 서양도 종교개혁 이후에야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선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문명으로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 초대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초가 되는 정치이념이 서양민주국에서 유래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후 지금까지 어느 정치가도 역사와 국민 앞에서 이렇게까지 정직해본 적은 없었다. 이 나라는 서양민주국을 모범으로 하여 1919년 3.1운동 이후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꾸준하게 실천해온 결과로 세워진 나라이다. 이 나라는 앞으로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다. ... 이 나라는 미국과 같은 자유인의 공화국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상이한 이해관계의 인간들을 신뢰와 통합으로 이끄는 삶의 원리에 있어서 더없이 큰 변화의 선언이었다. 2천 년을 이어온 한국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 그럼에도 건국의 주체가 선택한 자유통상의 경제체제는 이후 50년간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체제 속에서 엄청난 물질적 성취를 이룩하였다. 경제성장은 민족중흥의 깃발로 추진되었으며, 민족의 우수한 역량으로 설명되었다. 개인과 그의 자유는 천박하게 들리는 이기심에 대한 매도와 더불어 슬슬 위축되었다.  "우리의 도덕적 개인은 서양의 이기적 개인보다 훌륭해." 앞서 소개한 유교국가론의 대두와 더불어 이런 이야기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덧 세종의 애민정치가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적 원류로 선양되기 시작하였다.



<오류> 

142p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아들이다"

-> 웃치긴은 칭기즈칸의 막내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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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쓴 인수대비 - 조선 왕실 최고 여성지식인의 야망과 애환
한희숙 지음 / 솔과학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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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식상한 주제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학자가 쓴 인수대비는 어떤가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못 지나치고 읽게 됐다.

조선 왕비를 대상으로 논문을 많이 낸 전공자가 쓴 책이라 역시 다르다는 생각이 들 만큼, 깊이있고 당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인수대비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 여성 교육의 선구자이자 여성 저술가로서의 인수대비.

그녀는 왕실 여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여성 교육서인 <내훈>을 발행했다.

내용이 가부장적이라 오늘날에는 크게 의미부여를 못하고 있지만 저자의 평가대로 책 한 권 내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절에 왕실 최고 여인이 교육서를 발간한 것 자체가 큰 의의가 있다.

가부장적 여성상이야 당대의 이데올로기였으니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야 너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여러 책에서 좋은 구결을 따온 편집본이긴 하나 그만큼 많은 책을 읽고 유교적 소양이 풍부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배경에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두 고모의 영향력을 들고 있다.

사실 이 고모들에 대한 조명이 무척 신선했다.

알려진대로 한확의 두 누이는 공녀로 선발되어 영락제의 후궁이 된 여비와, 선덕제의 후궁이 된 공신부인이다.

여비는 불행히도 영락제 사후 순장됐지만 공신부인은 선덕제 사후 손자인 성화제를 보호한 공으로 78세에 사망할 때까지 명 황실에서 존숭을 받았다.

조선에서는 그녀를 외교 채널로 삼아 세조의 등극과 성종비 윤씨의 폐위 등을 주청했고 한확이 큰 역할을 한다.

명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하사받은 집안에는 중국 서적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 집안에서 자란 인수대비는 당대 최고의 여성 지식인이 되어 훗날 저서까지 편찬하게 된 것이다.

21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오직 자녀 교육에만 힘쓰고 시부모를 한결같이 받든 인수대비의 입장에서 첩을 질투하여 남편과 불화하는 며느리 윤씨를 용납하기는 어려웠을 듯 하다.


2) 드라마에서 보면 정희왕후는 문자를 몰라 며느리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권을 넘기는 것처럼 묘사되나 사실 정희왕후는 남편 세조의 반정에 적극 협조하고, 아들 예종과 손자 성종 대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휘두른 여걸이었다.

인수대비는 아버지 한확이 죽고 남편마저 세상을 뜨자 오직 시어머니인 정희왕후에게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처신한다.

정희왕후 역시 며느리를 존중하여 성종이 왕위에 오른 후 그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고부간에 잘 협력하여 어린 왕의 치세를 안정시킨다.

단종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성종이 주변 종친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편안한 종사를 이어간 배경에는 이들 고부간의 화목도 크다고 할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적장자를 낳고도 왕실의 불화를 일으킨 며느리 윤씨를 대비들이 받아들이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훗날 왕비가 되는 정현왕후가 정희왕후의 일족이고 그 아버지가 조정의 고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폐비 윤씨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그늘막이 되어 줄 친정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그녀 역시 종 2품 숙의로 입궁한 간택후궁이었기 때문에 양반가의 여식이었으나 집안이 어려웠다.

연산군을 낳은 뒤 4개월 만에 폐비 논의가 있고, 둘째 아들이 태어난 직후 문제를 일으켜 쭃겨난 걸 보면 산후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특별히 폐비 윤씨만 불쌍한 것은 아닌 듯 하다.

세종은 단지 며느리가 남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이상한 방술을 행했다는 모호한 이유로 세자빈을 폐출시켰고 다음 며느리 역시 동성애라는 큰 잘못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또 쫓아냈다.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처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시아버지 세종에 의해 쫓겨났고 제안대군의 처도 시어머니 안순왕후에 의해 쫓겨났다.

이혼당하면 재혼할 수 없는 사회에서 특별히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다른 곳도 아닌 왕실에서 처를 쫓아내는 사례들을 보면 연산군이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원수를 갚겠다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탓에 폐비 윤씨 사건이 크게 각인됐을 뿐이지 폐비 사건이 아주 이상한 경우는 아닌 듯 하다.

숙종도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 경종의 어머니를 자신이 직접 죽이지 않았는가.


<인상 깊은 구절>

58p

그러나 한확은 명나라 사신에게 베푸는 잔치에는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서 한확의 뛰어난 처신술을 볼 수 있다. 한확은 명의 정사임을 내세우지 않았고, 황친이 되었다 하여 결코 오만하지 않았으며, 조선의 신하임을 잊지 않았다. 세종 역시 이러한 점을 높이 사서 그를 중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가족을 더욱 우대했다. 한확은 청주 한씨 가문의 위상을 거가대족으로 확실하게 굳혔다.

84p

아버지 한확의 죽음은 수빈 한씨에게는 매우 큰 슬픔과 타격을 주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것이다. 친정 부모를 모두 잃은 수빈 한씨는 미래의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왕후를 잘 섬겨야 함을 왕실 생활 속에서 이미 체험했다. 문종의 두 부인이 세종의 눈에 벗어나 쫓겨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조 내외를 부도로써 섬기며 효부가 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했다.

92p

그녀는 세조 부부에게 신임을 얻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에게 더욱 더 잘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저 사람의 타고난 복과 나라에서 주는 녹봉은 數가 있는 것이며, 재력은 오로지 백성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사치를 숭상하면 반드시 재물을 다하는 데 이를 것이다." -세조실록

'엄격' '강직' '강인' 이런 단어들은 자식을 둔 양반가 과부들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 '애비 없는 자식' 과부 자식'에 대한 편견과 상실감을 극복하는 길은 어머니의 강한 도덕성과 자식에 대한 엄격성에 있었다. 

102p

단종의 폐위를 직접 경험했던 정희왕후는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왕실의 안정을 위해 원상 한명회의 힘을 필요로 했다.

154p

여성 교육에 목적을 둔 책이지만 제시된 구체적 사례들은 상당수 아들이 그 부모에게 효도한 이야기들을 서술하고 있다. 그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할 것과 아내를 잘 관리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165p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는 후궁을 대접함에 있어서도 너그럽고 대범하여 도에 맞았으며 양로연이나 설과 같은 내전의 연회 때에도 의례가 모두 법도에 맞아 모두 칭찬했다고 한다. 최고의 가문을 친정으로 둔 권세가 한명회의 딸답게 자신감 있는 의연하고도 기품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윤씨는 아버지 없는 가난한 집안의 후궁출신이었기에 자신감 부족인 듯 내명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성종의 후궁들로부터 최고의 권위와 존경을 받기에는 아직 일렀다. 또한 20세 초반의 한창 젊은 성종은 산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왕비보다 후궁들을 더 총애했다. 윤씨는 이러한 성종의 행위를 참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위치가 다른 후궁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피해의식까지 느꼈다. ... 내명부와 외명부의 귀감이 되어야 하고 왕실 여성들의 기강을 다스려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갖고 있는 왕비가 투기를 일삼는 것은 왕권 강화에 흠집을 내는 것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8p

대간들의 주장이 이렇게 강한 것은 대간제도를 통하여 유교적 이상 정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정치의식이 확대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국왕이 반대하는데도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성종대의 대간은 유교적인 이상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다. 이러한 이념적이고 이상적인 당위성에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국왕조차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213p

그녀는 왕비가 되고, 대비가 되어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치지 않았으며, 결코 최고의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수렴청정을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로 물러날 여성이 아니었다. 남편 세조와 함께 한 세월 속에서, 그리고 아들 예종이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녀는 현실 정치 속에서 많은 것을 터득하고 단련했다. ... 정희왕후는 인수대비에 대해서 매우 우호적이었고, 그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 애썼다. 정희왕후는 시어머니였지만 인수대비의 든든한 지원자였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은 며느리로서의 효도와 임무를 다했다. 두 사람은 성종을 사이에 두고 왕실의 안정과 왕권강화를 위해서 서로 조력자였다. ... 왕실은 계급질서로 운영되는 곳이다. 인수대비는 웃전인 정희왕후를 믿고 의지했고, 정성을 다했으며 한시도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으며, 그녀의 뜻에 순종했다. 그것이 왕실의 권위와 안녕을 지키는 길이자 곧 자신과 자식들을 보호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296p

정통성이 부족한 채 왕위에 올랐던 성종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대간들과 치열한 정쟁을 했듯이, 폐비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무시를 당해야 하는 능상지풍의 분위기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연산군은 대간들과의 정쟁 속에서 폭군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성종과 대간들의 대립 속에서 왕권 강화를 위해 단행되었던 폐비 사사 사건은 연산군을 폭군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인수대비의 노년은 불행했다.

301p

효를 강조하는 유교 문화 속에서 연산군이 어머니의 신원을 회복시키는 것은 곧 효의 실천이었고, 어쩌면 당연한 과정이었다. ... 그의 아버지 성종이 대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생부인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생모 수빈 한씨를 인수대비로 추숭한 것과 같이, 연산군 역시 많은 반대와 제지에도 불구하고 생모 폐비 윤씨의 신원을 회복시키기 위해 추존, 추숭 사업을 적극 시행했다. 

329p

여성 참여가 부정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녀 역시 모든 여성들이 그랬던 것같이 정치적 훈련을 받을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다. 대비로서 막상한 권력을 갖고 왕실의 공적 기능과 사적 기능의 혼재 속에서 국정 참여에 있어 정치적 미숙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것은 그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들의 입을 통해서만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남성 중심적인 시대의 유산이자 여성이 처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류>

191p

도표에서 윤번의 둘째 아들은 윤사균이 아니라 윤사윤이다.

209p

단종 즉위년(1452)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기 위해 거사를 하려 할 때

->계유정난은 단종 1년, 즉 1453년에 일어났다.

245p

인수대비는 자신보다 먼저 죽은 딸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도 슬펐다. 이때 인수대비의 나이는 43살이었다.

->명숙공주는 1482년에 사망했고, 인수대비가 1437년생이므로 딸의 사망 당시 나이는 43세가 아니라 46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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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프로젝트 - 무엇이 인생의 차이를 만드는가
헬렌 피어슨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과 주제는 흥미로운데 내용은 출생 코호트 연구 과정이라 당황스럽다.

독자는 이해하기 쉬운 단순하고 명확한 결론을 원하는 반면, 저자는 이 연구의 어려움과 위대함을 비롯해 지난 70여 년 간의 긴 과정을 설명하는데 전 페이지를 할애한다.

원래 과학이란 간단 명료한 당위적 주장은 아니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1일 1식, 이런 식의 주장이야 말로 사이비 과학의 특징이니 진정한 과학이라면 모호한 여러 증거들을 복잡하게 보여주는 수밖에 없을 듯 하다.

그렇지만 평범한 독자들을 위해 좀더 단순하고 알기 쉽게 주제를 요약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제 <무엇이 인생의 차이를 만드는가> 의 답이 들어 있는 줄 알았다.

출생 코호트는 출생 당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의 삶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삶을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거대한 작업이다.

수십 년에 걸쳐 추적 관찰을 해야 하니 보통 어려운 일은 아닌 듯 하다.

더군다나 국가에서 어서 연구하라고 자금을 넉넉히 대주는 것도 아니고 책을 보면 그야말로 사명감을 가진 연구자들의 눈물나는 노력으로 연구가 이어져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갈수록 사회적 이동은 어려워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계급의 고착, 빈부격차의 확대가 강화되는 것이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가가 그 사람의 사회적 계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팩터가 됨을 연구에서 보여준다.

간단히 말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계속 가난한 상태에 머물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약간의 희망이 있다면 부모의 양육태도도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처럼 교육열이 높은 사회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듯 하다.

거기에 학교의 교육 의지가 있다면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출생 코호트의 결론이 복지제도 확대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난이 계급 고착의 결정적인 요소임은 분명하니 저소득층에 대한 지원, 특히 양육 부분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중요하긴 할 듯 하다.

사교육의 병폐만 듣고 사는 나라에서 노동계층 부모의 무관심이라는 주제는 생소한 느낌마저 든다.

이미 알고 있는 육아 상식, 이를테면 임신 중 흡연은 저체중 출생아를 낳게 하고, 엎드려 재우는 것은 영아 돌연사 위험이 있고 하루 한 시간 이상 밖에서 놀게 하는 것이 신체 발육에 중요하다 등이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출생 코호트라는 긴 시간의 대규모 연구를 통해 밝혀져 오늘날 의학 교과서에 실리게 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현대의학의 강점은 실험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 생각된다.


<인상 깊은 구절>

287p

부모의 직업, 학력, 소득보다는 부모가 좋은 '학습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아이의 지능과 사회성 발달에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밀레니엄 코호트는 '훌륭한' 가정교육의 범위를 더 넓히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대화하면서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따뜻하게 반응해 주고, 규칙적인 식사 시간과 취침 시간을 정해 주고, 부모의 권위를 지키며 훈육하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더 밝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체벌 같은 가혹은 훈육은 나쁜 결과를 낳았다)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의욕이 그 실행 방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이들을 격려하고 책을 읽어 주고 밖으로 데리고나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은 학군으로 이사하는 것보다 결과적으로는 더 이득이 된다. ... 이미 부모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코호트 연구들이 대개 그렇다. 새로운 법칙을 만들어 내기보다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등)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해 준다. 과학적 근거를 아는 것만으로도 부모의 결심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 대개 과학은 단순한 핵심 메시지를 알려주거나 어떤 결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310p

영국의 출생 코호트들이 아직까지 무사히 존재하는 이유는 연구자들이 영국인답게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해 왔기 때문이다.

359p

과학자들은 인내심이나 끈기와 같은 자질들이 성공의 결정적인 예측 변수이기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행복하고 건강하고 부유한 인생을 살려면 지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서적인 기술까지 기르고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직업에서 성공하고 삶의 난제들은 잘 해결하려면, 그저 머리가 좋기보다는 근면하고, 신뢰감을 주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어야 한다.

362p

한 연구에서, 16살에 매일 신체 활동을 한 사람은 성인이 됐을 때 정신적으로 더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예측 가능한 연관성이지만, 확실한 데이터가 더해지면 그 위력은 훨씬 강해진다. 지금 연구자들은 10대들이 언제, 얼마나 자주 남들과 교제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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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리 오디세이
호아상.팽안옥 지음, 이익희 옮김 / 일빛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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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신선해 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연수도서관에서 발견하고 읽게 됐다.

인문지리학인 줄 알았는데 과학적 내용도 많이 포함되어 다소 지루하기도 했다.

내가 관심있는 분야는 중국의 지리가 아니라 지리로 보는 중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한국은 유교적 전통이 강해 서양의 자연과학적 탐구와는 다르게 인문적 자연 관찰이 대부분이었던 듯 하다.

이런 전통 속에서 북송의 심괄과 명나라 서하객이라는 지리학자의 자연과학적 지리 탐사가 인상적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특출나게 뛰어난 천재들이 있는 모양이다.

이른바 움직이는 호수라는 롭 노프와 누란 왕국, 황하와 양자강의 발원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벳 고원, 히말라야 산맥, 정화의 원정, 법현과 현장의 서역기행 등을 흥미롭게 읽었다.

땅덩어리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만큼 중국은 비교적 균질적인 한반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변화무쌍 하고 다채롭다.

대부분 재밌게 읽었는데 마지막 장의 서복과 아메리카 발견설은 책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심각한 문제다.

서복이 동쪽으로 가서 일본에 정착하고 야요이 시대를 열었으며 그가 곧 진무 천황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야요이 시대라면 한반도의 도래인들이 일본에 문화를 전해줬다고 국사책에서 수도 없이 배우던 내용이 아닌가.

중국인 저자의 책이라 그런지 야요이 시대는 곧 중국의 진한 문화와 일치한다고 쓰여 있다.

아무리 한반도의 중계지 역할을 강조한다 해도 한반도 역시 중국으로부터 문화를 전수해 받는 입장이니 근본적으로는 중화 문명의 이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복이 곧 진무 천황이라니 견강부회도 너무 심하다.

전설을 역사로 만드는 것이 아마추어 역사가들의 특징이 아닌가.

그래도 서복은 좀 낫다.

다음 장의 아메리카 발견설은 낙랑이 북경에 있었다는 주장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어느 사회나 얼치기 재야 사학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5세기에 법현이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서 돌아올 때 해류의 흐름을 타고 멕시코의 아카풀코라는 곳에 갔다는 것이다.

그 증거라는 것이 여행기에 나온 태평양을 시사하는 문장들과 그들이 도착했다는 야파제라는 곳의 지명과 아카풀코가 유사하는 것 뿐이다.

반박하는 주장에 따르면 태평양의 심해를 의미한다는 문장들은 인도양에 대입해도 아무 문제가 없고, 야파제와 아카풀코는 전혀 다른 고유 명사일 뿐이라고 한다.

심지어 베링 해협을 통해 아메카 인디언들이 북미로 들어온 후에도 태평양 한가운데를 건너 은나라 사람들이 중미로 넘어가 올멕 문화를 일구었을 가능성을 논한다.

그러면서 이런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사고 훈련이 될 수 있는 좋은 과제라고 넘어간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무책임한 발상이라니!

역사는 엄연한 과학이고 엄격한 논증을 거쳐 연구되어져야 하는 학문이다.

이런 식의 무책임한 주장은 올바른 역사 발전에 매우 해가 된다.

가끔 우리나라 역사책을 읽을 때도 그렇지만 중국 역시 여전히 자국 위주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넘어서지 못하는 느낌이 든다.

서양 저자의 책들은 좋은 책만 번역돼서 그런지 몰라도 훨씬 객관적이고 민족국가에 함몰되지 않아 읽기가 편하다.


<인상 깊은 구절>

159p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고대 지리학의 발전 속도는 비교적 느렸다. 걸출한 지리학자들은 대거 배출되었지만 그들의 지리 고찰 활동은 종종 정치와 종교 등의 목적을 위한 부산물쯤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제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다른 측면에서 중국 고대의 일부 지리서는 작가가 직접 연구와 경험을 통해 저술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으로 관련 있는 문헌 자료나 소문을 채집해 만들었기 때문에 사실적인 지리적 면모를 갖출 수 없었다. 서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천하 지리의 형세를 머리와 손으로만 연구하는 방법은 당시 중국에서 상당히 유행처럼 퍼졌고 상당 부분 중국 고대 지리학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162p

서하객의 유람이 특별한 것은 일반 문인의 단순한 '산수 유람'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장건이나 법현처럼 정치나 종교적인 목적에서 유람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자연을 탐구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모든 지리적 흔적을 대단히 세심하게 수집해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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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우위의 중국문화기행 1 - 세계문화산책 01
위치우위 지음, 유소영.심규호 옮김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확실히 중국인 저자의 책이라 그런지 한국 사람이 쓴 중국문화기행과는 깊이가 다른 느낌이다.

자국인을 위한 책이다 보니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히 나오지 않아 중간에 검색을 자주 했다.

중국 여러 지역의 역사적 내력을 쉬운 필체로 소개하고 같이 실린 사진들도 볼만 하다.

소동파나 주희 등 유명 학자들도 당대에는 이른바 소인배들의 심한 투기 질투에 시달렸고 결코 인생이 녹록치 않았음을 확인했다.

중국인 저자라 그런지 당대의 정치 현실과 더불어 실감나게 위인들의 심정을 잘 풀어낸다.

강희제의 피서산장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근면하면서 비상한 두뇌의 탁월한 지도자를 가진 국가는 얼마나 행복한가를 보여준다.

하나같이 형편없는 명나라 후대 황제들과, 뛰어난 청나라 초기의 황제들은 극명하게 비교되어 과연 명의 국운이 다할 수밖에 없었음이 실감난다.

구한말에 고종이 아닌 강희제 같은 뛰어난 지도자를 가졌다면 조선은 식민지를 피할 수 있었을까?


<인상 깊은 구절>

34p

강희제는 수리에 반대하는 조서를 내렸다.

"진이 장성을 축조한 이래, 한, 당, 송 역시 항상 수리를 하였는데, 그렇다고 어찌 당시인들 변방의 환난이 없었단 말인가? 명말 나의 태조께서 대병단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돌격하니 모든 길이 무너지고 이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이로써 오직 덕을 쌓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국토 수호의 유일한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백성의 마음이 기쁘면 나라의 근본을 얻게 될 것이니, 변경이 절로 굳건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리의 뜻이 모여 성을 이룬다"는 의미로다. 고북, 희봉구 일대는 짐이 모두 순시해 본 곳으로 훼손된 부분이 많긴 하나, 지금 이를 수리하려면 노역을 동원해야 하니 어찌 백성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장성은 남북 수천 리에 달하니 병사들을 얼마나 양성해야 이곳을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뻔한 말 같기는 한데, 나라를 굳건히 만든 황제의 말이라 그런지, 애민 정신과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느껴진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지만 역사에 획을 긋는 위인들은 범인과는 다른 뛰어남을 가진 듯하다)

102p

차이위안페이는 20세기 초엽에 이른바 예술 교육으로 종교를 대치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나는 최고의 예술 교육 역시 종교의 풍모를 지닌다는 것을 바로 이곳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178p

객관적인 경물은 단순히 심미적인 부분을 제공할 뿐이다.소동파는 자신의 정신적 역량을 통해 황저우의 자연 경물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의미 부여를 통해 생명이 없던 자연 형식이 아름다움으로 번한다. ... 현대의 신문들이 충분히 직업적 도덕의식을 갖추지 못한 데다 이에 상응하는 법적 규제가 없는 상황에서 마음대로 찬사와 비난을 일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해를 입은 사람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고,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신문의 내용이 바로 여론이라고 생각한다. 

310p

집단적 성향이 강한 문화적 인격체는 나날이 진부해지고 암담해졌다. 문화는 별다른 목적 없는 낭비로 변하고 꽉 막힌 도덕적 완성의 추구는 오히려 총체적인 부도덕을 낳는다

360p

그 사회에서 개인이란 별 의미가 없었다. 단지 왕조의 총애를 받거나 유배된 신하, 아비의 아들이나 아들의 아비, 친구 사이의 친교관계에 속한 한 점, 뭇 사람의 입방아에 기진맥진한 육신, 상하 좌우로 배열된 어느 한 곳의 좌표, 사회라는 거대한 물결 속의 한 방울, 온갖 윤리 관념의 조합과 집합이 있을 뿐이었다. 이렇듯 생명의 실체는 있을 수 없었으며, 개인의 영혼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10년 동안 유배되어 장안으로 돌아오라는 조서를 받고 기뻐서 먼 수도까지 상경했더니, 기다리는 것은 황제의 신임이 아니라 더 먼 곳으로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결국 당의 위대한 문장가 유종원은 당시로서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광서성의 류저우에서 생을 마감한다. 왕조시대의 백성은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존재하고 주체성을 갖고 살기가 참 어려웠을 듯하다)

403p

그는 단식 끝에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임종 직전 그는 자신을 위해 직접 명정을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성, 미성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氣라도 산하가 되어 본조(송조)를 강건케 하리라."

(진회에 의해 하이난 섬으로 유배되어 가족에 대한 핍박을 피하기 위해 단식하다 죽은 조정이라는 이의 글이다. 뻔한 수사 같아도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라 비장함과 기개가 있고, 죽기 직전까지 국가에 대한 강렬한 충성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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