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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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역사학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 장에 실린대로 사이비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논리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는 역사적 자료만 찾아서 나열하기 때문에 연구라 볼 수 없고, 그래서 아예 대응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상대를 역사학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란 것이 결국은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광대한 영토를 꿈꾸는, 어찌 보면 제국주의적인 대중의 욕망과 맞물려 마치 그것이 진짜 역사인 양 오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들에 대해 보다 공식적인 반대의 책들이 많이 나와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 줘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논쟁많은 여러 주제들에 대해 알기 쉽고 명료하게 정리해 준다.

요즘은 도판 상태가 다들 좋은 것 같다.

책에 실린 지도의 선명함에 놀랬다.


1) 칠지도는 백제 왕이 일본에게 하사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선물이다.

2) 신라 왕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은 7세기 신라 왕족들의 족보 만들기에 불과하다.

3) 광개토왕비에 나온 일본의 한반도 남부 지배는 실제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고구려인의 눈으로 본 자국위주 역사관일 뿐이다. 고구려인에게는 신라나 왜나 둘 다 똑같은 외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왕비는 탁본 뜨기도 매우 힘든 아주 오래 된 거대한 비석으로 일본군 중위가 글자를 지우고 말 수준이 아니다.

일본군이 오기 전에 이미 청나라인들이 뜬 탁본들이 많다.

4) 김춘추는 요즘 시각처럼 매국노가 아니라 풍전등화의 신라를 외교적 힘으로 구해낸 뛰어난 지도자다.

5) 근초고왕 당시의 요서 진출은 남조 역사서에만 등장하는데, 실제로 지배권을 행사했다기 보다, 낙랑 유민들이 이주한 지역과의 교류였거나, 한인 이주 집단이 백제 영토 내로 들어 온 것을, 마치 요서 지역을 점령한 것인 양 부풀려 남조에 고한 것이다.

6) 낙랑군은 이덕일씨의 주장과는 달리 평양에 위치했고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


역사는 접하기가 쉽기 때문에 사이비 역사학자들이 대중에게 어필하지만, 원하는 쪽으로 입맛에 맞춰 해석하는 게 아니라, 논리와 증거가 필요한 엄연한 과학이고 학문이다.


<인상 깊은 구절>

93p

일각에서는 역사학의 연구 목적이 우리나라의 현재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만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어차피 고대사는 사료가 적고 정확한 실상을 알 수 없으니 우리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역사학은 현재의 가치관이나 당장의 정치적, 외교적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분야가 아니다. ... 역사 연구가 현실의 이해관계에 무조건 부합해야 한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엄연히 '퇴행적' 현상일 뿐, 결코 '진보적' 가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

173p

김춘추가 대야성전투 이후 외교적 해결책을 제안했을 때, 다른 정치 파벌에서조차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라 지배층들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위기 상황임을 공통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결국 김춘추만이 아니라 신라 지배층 전체가 백제를 멸망시켜야만 신라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공통적으로 인지하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독자적으로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신라는 주변국을 이용해 부족한 힘을 보충해서 살아남고자 했다.

175p

이때 연개소문이 대당 온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은 까닭에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대당 강경 노선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180p

신라는 거의 매년 당에 사신을 보냈지만, 그중에서도 김춘추는 최고위급 인물이었기에 당에서도 상당히 후하게 대접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당 태종과 개인적 친분을 맺는 데 성공해 태종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다. ...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의자왕을 비롯한 포로를 거느리고 당으로 돌아갔을 때 당 고종이 "어찌하여 이내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을 정도였다. ... 신라의 외교 방침은 자주나 사대 가운데 그 어떤 것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정책을 보여 준다. 오히려 신라라는 국가 관점에서 본다면 김춘추의 외교는 정말 자주적이며 실리적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나 백제, 왜, 당은 신라 입장에서 모두 외세였으며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고구려, 신라, 백제라는 삼국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216p

김씨 부인 세대 역시 당나라에서 나고 자란 교포 4세로서 중국과의 관계를 더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소호 금천씨와 김일제를 선조로 내세우는 점도 재당 신라인의 입장이 반영됐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요동(한반도)' 출신이기는 하지만, 먼 연원은 중원에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묘지명에서 '신라' 김씨가 아니라 당나라 수도인 '경조' 김씨라고 한 점을 봐도 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나라 사람이었다.

300p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의 아픔을 딛고 6세기에 다시금 꽃을 피웠으며, 관산성전투로 인해 오랜 회심이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다시금 중흥의 기치를 드높였다. 역사에서 구조와 여건은 좌시할 수 없는 요소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백제는 장기간 패권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 처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 속에서 끊임없이 절치부심한 흔적을 엿볼 수도 있다. 이것이 백제사를 감상하는 한 지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는 그저 적막한 어둠일 뿐이지만, 이미 그 아래에서는 뜨거운 기운을 품은 해가 나설 채비를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전성기의 화려함에만 매몰되기보다는, 그 공동체가 그다지 빛나 보이지 않는 시기의 면모까지도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321p

짐짓 9000년의 역사를 아우르는 유라시아의 규모로 역사와 영토 부풀리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정작 당대의 역사를 가장 크게 규정하던 냉전 질서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둔감한 점은 흥미롭다. ... 역사 속 자료는 풍성해서,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주장에 맞는 자료만 골라서 인용해 서술한다면, 그걸 보는 사람은 마치 실제 역사가 그렇게 존재했다고 착각하기 쉽다. ... 역사 연구자라면 누구나 과거 자료를 뒤지면서, 자기주장 바깥에 흘러넘치거나 오히려 반대되는 증거를 심심찮게 만난다. 그것들을 직면하면서 자기주장을 끊임없이 상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연구자 스스로 역사의 이해와 사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역사학의 기능이다. 일관된 논리로 매끈하게 작성된 한 개인의 회고록을 역사가들이 좀처럼 믿지 않는 이치와 같다. 이는 <환단고기>를 비롯한 사이비 역사가들의 글을, 기존 사학계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연구'로 대접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답이다. 


<오류>

172p

김춘추를 지지하던 선덕여왕(재위 632-347)

->347년이 아니라 647년이다.

210p

미추이사금은 석씨의 마지막 임금인 첨해이사금이 죽고서

->석씨의 마지막 임금은 12대 첨해가 아니라, 16대 흘해이사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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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
한정희.최경현 지음 / 돌베개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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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3국은 유교 문화권이나 중화문명의 향유자로서 유불선 사상을 받아들여 문화에 녹여 왔다.

저자들은 이러한 사상적 토대가 미술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더불어 17세기부터는 서학의 수용 과정도 같이 탐색한다.

복희, 여와로부터 20세기 상해파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를 시대별로 잘 설명하고 있어 사상사와 미술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본문에 언급된 그림들이 빠지지 않고 도판에 모두 수록되고 매우 선명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중국이 유교와 불교, 도교가 다양하게 나타난 반면, 역시 한국은 성리학 일변도라 수용폭이 좁은 게 아쉽고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거리상 떨어져 있어서인지 독자적인 미술사를 갖고 있는 점이 신선하다.

특히 우키요에 부분은 소략됐으나 실학을 바탕으로 당시 유행하던 실경산수화 열풍과 관련 있음을 알게 됐고, 나중에 따로 관련 책을 더 읽고 싶다.

서예는 잘 모르지만 문자 예술 측면에서 관심이 생기고 특히 명청대 중국 수묵화의 다채로움은 눈길을 확 끈다.

미술의 긴 역사와 동아시아 그림을 잘 엮어 낸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207p

'성리학자는 도덕성을 갖춘 군자가 되기 위해서 독서나 수양을 통해 순간적인 욕망이나 불순함을 억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지속해야 한다'는 도덕적 실천의 철학적 근거를 여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론으로 격물치지를 제시하였으나, 대개 학문적 접근에 치중하면서 지식의 습득에만 그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 주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성리학은 僞學이라 박해를 받았으며, 원대에 이르러 관학이 되고 주희가 새롭게 해석한 <사서집주>가 과거시험 교재로 채택되어 명대 문인들의 주요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일상과 문예창작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이와 같이 조선 건국 초기에 성리학은 백성을 통치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治人之學이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이르러 정치 세력으로 성장한 사림 계열 성리학자들에 의해 점차 修己之學으로 바뀌어갔다.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수기의 전제 조건인 인간의 본성, 즉 사단칠정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우주의 근원을 설명하는 태극론이 주로 논의되며 차별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 특히 이이는 주자에 대한 맹신을 거부하고 왕도정치의 시작을 기자로 설정하여 주체적인 입장에서 조선식 성리학을 토착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사람 계열의 성리학자들은 대의와 의리를 중시하면서 일상에서 도학의 실천을 통한 자율적인 향촌사회 운영과 가족 질서의 수립에 중점을 두었다. ...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금욕주의적 수양론을 배경으로 단아하고 기품 있는 백자가 생활 공예품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또한 16세기에는 사림 계열을 중심으로 주자를 존경하고 그의 행적을 일상에서 적극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연 풍광이 빼어난 곳에 다수의 서원이 건립되어 향촌 자치기구로서 기능하였다.

241p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중국인보다 주자에 대한 존경이나 추숭이 매우 각별했다. 이는 주희가 무이산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함과 동시에 구곡계를 주유하며 지은 <무이도가>를 통해 심신 수양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적극 수용하고 실천하려는 일련의 역사적 행보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258p

감옥에서 출옥한 1575년 서위는 55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사회적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살인자라는 낙인 때문에 재기가 불가능하였다. 이로 인해 그의 60-70대는 극도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며 심리적으로 처절하게 무너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 이러한 그림들에 자신의 굳은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기보다는 가난하고 무기력한 모습이 투영되면서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사군자의 권위를 상실하면 전혀 다른 형태로 표현되었다. 특히 그의 매화나 대나무 그림 위애 적힌 제시들에 등장하는 눈, 비, 바람 등은 사군자의 강인한 생명력을 증명해주는 보조적 역할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림 속의 매화나 대나무는 군자의 당당함이나 강인한 의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 화면에 거침없이 휘두른 필묵이 만들어낸 추상적 조형성은 현대회화에서 순간의 행위를 통해 우연의 효과를 추구했던 액션페인팅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283p

황종희는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 대신에 신하의 권한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서구의 입헌군주제와 유사한 논리로 근대 계몽주의적 요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결론적으로 중국 실학은 전제군주에 대한 비판에설 출발하였기 때문에 체제 개혁을 다루었으며, 이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실학에는 없는 내용으로 커다른 차이를 보인다. ... 하지만 중국 실학에서는 최고 목표인 正德이 실현되어야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이용이 가능해지고, 마침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후생의 단계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경제적 이윤이나 생산력 증가를 도덕 기준과 동일시하는 이윤후생은 크게 부각되지 못하였다. ... 일본의 실학은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실업의 학문'으로 조선이나 중국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본에서 성리학은 조선이나 중국처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불교, 양명학, 난학 등과 같은 학문의 하나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 때 조선인에 의해 일본에 전래된 성리학은 인간이 지켜야 할 일상의 윤리 규범 정도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일본의 실학은 성리학의 부정정 측면을 다루며 대안을 제시하려는 정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국가 발전이나 백성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했던 순수 학문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327p

서학에 대한 조선 왕실의 부정적 입장과 소현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서구 과학 서적이나 문물 등의 수용은 실학자들 사이에서 개인적으로만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황실과 막부라는 공적 영역에서 서학을 수용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 특히 조선에서 서양화법의 수용이 지체되었던 이유도 이러한 정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일부 유학자의 천주교 교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자생적 신앙으로 발전하였고... 천주교가 일반 백성에게 확산되고 유교 제례를 부정하는 등 신앙의 독자적 고유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1801년 신유교옥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는 조선 사회를 위협하는 반역 세력으로 규정되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 왕실과 서교의 정면 충돌은 서구 제국의 문호 개방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876년 일본에 의해 조선의 문호가 강제로 개방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336p

"서양 학문의 장점은 측량과 계산에 있고, 단점은 천주를 숭상해 인심을 현혹시키는 것이다"라고 서술한 내용이 주목된다. 이는 동시기 중국 문인들의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대변한 것으로, 기독교 화보집이 포교라는 신앙적 측면보다 서양 회화와의 조우라는 미술사적 측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사실에 좀 더 설득력을 더해준다. ... 이처럼 안면에 서양화법을 적용하는 획기적인 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전신사조를 중시하는 초상화 전통, 즉 인물의 정신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모습도 객관적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불변의 원칙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들은 서양화법으로 안면의 사실성이 배가된 새로운 형식의 초상화를 칭찬하였는데, 이는 증경의 새로운 초상화법이 그들의 높은 인격적 자존감을 충족시켜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351p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통 산수화에 본질적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은 그리는 사람의 인품이나 마음이 그림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문인화론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선교사 화가들의 사망과 귀국으로 중서합벽의 그림이 빠르게 소멸한 것은 황제의 개인적 취향과 후원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러한 서양화법은 부분적인 수용에 머물며 삼국의 전통회화를 대체하지는 못하였다. 그 이유는 서양화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서구의 과학, 의학, 역학, 지리 등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흥미나 관심을 배경으로 서학 또는 난학이라는 학문의 일종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72p

이처럼 고관의 후원으로 고증학이 저변화되었다는 사실은 민간에서 성장한 고증학이 체제를 유지하는 교학의 범주에 편입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동시기에 이만수, 정약용, 홍석주 같은 대부분의 사대부는 성리학을 추숭하였기 때문에 고증학의 반주자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名物 훈고의 문헌 실증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며 소극적이거나 보수적이었다. ... 이는 고증을 의리 해명을 위한 수단 또는 방벙이라 생각한 것이며, 청대 고증학자들이 고증을 本, 의리를 末이라고 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견해이다. 

407p

화단에서는 19세기 후반 이후 상해에서 조지겸이 금석화파를 개척하였고, 오창석은 그러한 화풍을 계승하여 화훼화를 雅俗共賞의 현대적 문인화로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모두 전각과 서예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 그러한 성취를 회화 창작에 적용한 것이었지만, 근대 한국화단에서는 서예나 전각에 대한 선행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오창석의 화풍을 표현 기법으로 수용하는 정도에 머무는 한계를 보였다.


<오류>

151p

북위에서 338년 조성된 건무4년명 금동여래좌상이 대표적이다.

->건무는 북위가 아니라 후조 석륵의 연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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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빌라이 칸, 그의 삶과 시대
모리스 로사비 지음, 강창훈 옮김 / 천지인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은 너무 인상적인데, 평전이라 한 개인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이 지루해 처음에는 몰입이 힘들었다.

마치 표트르 대제 평전을 읽을 때의 지겨움과 비슷하달까?

전투가 벌어지면 그 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넘어가면 좋겠는데 무수히 많은 지명과 인물들이 등장해 지루해지는 식이다.

그렇지만 곧 책에 빠져 들었고 분량도 360 페이지 정도로 많지 않아 뒤로 갈수록 흥미롭게 읽었다.

개인적인 일생에 관한 사료가 적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역사 속 이미지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서양 학자의 눈으로 본 쿠빌라이는 단순히 중국 문명에 경도된 외국인 지배자가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려는 보편주의자의 모습을 보인다.

마치 청나라의 위대한 황제들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족의 군주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고 책에서 강조한 바대로 실용주의적이고 관용적인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한족을 차별하고 노예화 시켰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비중국계에게 실무를 맡겨 이들을 우대하는 포용성에 초점을 맞춘다.

오늘날의 전문가 집단, 이를테면 금융인, 상인, 장인, 의사 등이 우대받는 사회라는 게 무척 색다르게 느껴진다.

고려 이야기도 나와 흥미로웠다.

그는 대몽골 제국을 통합하는 군주가 되고 싶으면서도 중국을 포용하는 유교적 통치자의 모습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통합성이 원나라를 제국으로 유지시켰던 것 같다.

일본과 동남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무리한 공공사업 등으로 적자에 시달렸으며 당시로서는 너무 오래 산 나머지 말년에는 오판을 계속해 그의 사후 원나라는 겨우 75년을 지속했을 뿐이다.

이런 것에 비하면 청나라의 후계자들은 훨씬 노련했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42p

남송이 존속하려면 탈세를 막아야 했다. 이전 중국 왕조들과 같은 패턴으로, 남송 역시 황실 구성원들 사이에서 만연한 권력에 대한 무절제와 욕심 때문에 신음하고 있었다.

164p

일부는 마음속으로 여전히 남송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몽골의 통치를 관철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몽골이 정복한 영토들 가운데 남송만큼 인구가 조밀한 곳도 번영한 곳도 없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될 것처럼, 쿠빌라이의 정책 덕분에 몽골은 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으며, 이것은 결코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성공 스토리이다. 몽골인, 비몽골인을 막론하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의 성공적인 남송 통치는 눈부신 것이다.

171p

일본 해적들은 몽골이 고려를 정복하자, 한반도에서 자신들의 행위가 더는 관철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습격을 중단했다. 따라서 고려인들로서는 몽골이 일본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계획에 동참할 이유가 없었다.

176p

두세충과 하문저가 이끄는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더 이상의 군사 행동 없이 원하는 바를 얻고자 했다. 얼마 전의 승리에 고무되어 자신들을 구해준 신들을 굳게 믿게 된 일본 당국은 이 불운한 사절단을 처형함으로써, 일본과 중국 왕조 사이에 벌어져 있던 간극을 더욱 벌였다. 이는 몽골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공격 가운데 하나였다. 쿠빌라이는 이 괘씸한 행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177p

자신의 입지에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 고려, 일본과는 대조적으로, 권좌를 내놓으라고 주장할 수 있는 적대적 도전자 한 사람이 반기를 들었다. 쿠빌라이는 고려와 일본에서 몽골의 영토적, 경제적 이득을 구체화하고 팽창하려 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그의 적이 쿠빌라이의 몽골 선조들이 획득한 영토를 분할해 빼앗고자 했다. 그의 주요 경쟁자는 몽골인이었을 뿐 아니라 대칸 우구에이의 자손으로 황가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그 위협은 훨씬 컸다. 쿠빌라이가 동아시아의 이웃들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을 통치자로 형식상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일단 이러한 서약이 이루어지고 나면, 동아시아 나라들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앙아시아는 쿠빌라이의 영지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고, 동족인 몽골인들이 통치하고 있었다. 이 광대한 영토를 제어하거나 적어도 평화롭게 유지하지 않는다면, 북서중국에 있는 쿠빌라이의 변경은 내륙아시아 유목민들이 해마다 중국 농민들을 괴롭혀 온 방식인 게릴라식 공격에 시달리게 될 터였다. ... 전통적인 몽골 본토는 중앙아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매우 취약했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원래부터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211p

쿠빌라이는 차별적인 관행들을 일소하고 중국인 왕조 치하에서 그리 잘 대접받지 못했던 전문 직업군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는 비록 농민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농업 생산을 부양했지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상인, 의사, 과학자는 더 큰 혜택을 입었으며 조정으로부터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쿠빌라이는 자신의 중국 통치에 그들이 힘을 실어주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몽골인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은 대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층이었다. 기존에 중국을 지배했던 학자 관료의 태반이 이 계층에서 배출되었다. 과거 시험을 치룰 수 없었던 중국인 엘리트층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일부는 몽골인들에게 복종하며 복무했고, 어떤 이들은 공공 생활을 접고 은둔하거나 예술에 탐닉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인느 정부 조직들을 존속시켜 학자 관료들에게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222p

특히 태묘는 유학자 엘리트를 포섭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가장 잘 반영한다.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조상 숭배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태묘의 건설은 쿠빌라이가 제례를 조상 숭배와 연결지으려 했음을 증명해준다. 비록 그 자신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중국인들이 조상 숭배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는 분명 보수적인 몽골인들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반대 세력이 불만을 보여도 쿠빌라이는 무시해버렸다. ... 쿠빌라이는 조상들이 인간 세상의 일들을 중재해줄 수 있으며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중국인들의 믿음을 지켜주었지만, 의례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대신 중국인 참모들과 왕자들을 참석시켰다. ... 쿠빌라이는 다음과 같은 점을 거의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중국 고전을 잘 배우고 중국 규범과 예를 잘 익히며, 중국인 교사로부터 유교와 기타 중국의 종교들을 잘 배워 흡수하기만 하면, 몽골인은 중국인의 신망을 얻을 수 있어며 자신은 그들의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중국 신민들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금을 이러한 방식으로 교육시켰다. 그가 유학자들의 지지를 얻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알릴 수 있도록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는 중국 작품의 몽골어 번역을 시도했다. 그의 실용주의적 성향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번역하고자 한 자료들은 몽골 엘리트들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유교 문헌의 번역도 지원해야 했다. ... 쿠빌라이는 신유학을 열렬히 지지하는 박식한 학자들을 기용하여 후원하기도 했다. 점차 영향력을 더해가는 이 집단의 환심을 계속 사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몽골인들에게 종사하기를 거부한 반면, 일부는 북에서 온 유목민들의 '문명화'를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 쿠빌라이와 몽골 조정을 더욱 기쁘게 한 것은, 허형의 가르침이 실용적인 업무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신유학자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글이나 언설 속에서 탈속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았다. 그가 몽골 조정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일이나 '고차원적인 무언가'에 빠져들이 않았다"는 데 있었다.

246p

쿠빌라이가 이처럼 종교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마도 이들 기독교 현자들을 기용하여 자신의 신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였다기보다는 중국 영토를 통치하는 데 필요한 인재들을 모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폴로 형제에게 그와 같이 요청한 것은 전문가를 얻기 위한 책략이었다. 기독교인을 채용하고자 했을 뿐, 자신의 신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마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는 폴로 형제와 기독교 당국에게 자신의 신민들이 기독교로 인도될 수 있도록 학식 있는 유럽인들이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점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283p

그는 종종 자신을 당 태종과 같은 중국 역사 속의 위대한 황제들과 비교했다. 양자를 결합시킴으로써 자신에 대한 중국인들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지역 사람들에게는 그는 만국 통용 문자를 선전하고 중국 내 외국 장인들을 후원하는 세계주의자였다. 그가 원대의 문화에 불어넣은 세계주의는, 중국보다 더 광대한 영토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영광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다.

301p

문화적 또는 국가적 측면에서 몽골인들에게 반대했던 그들은 나름대로 실리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은둔하여 회화, 희곡 등 사적인 활동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었다. 몽골에 가담하는 것을 피하고 개인적인 지적 관심사를 쫓아 학문에 매진한 이들도 있었다. ... 비록 소수의 남송 지식인들이 몽골에 종사하긴 했지만, 쿠빌라이는 남부의 일부 영향력 있고 저명한 학자들의 협력은 이끌어내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남중국 지식인들이 납세의 의무를 다 하는 한 그들에게 활동의 자유를 보장해주었지만, 북중국에서 그랬던 것만큼 그들을 장악하지도 그들의 충성을 얻어내지도 못했다.

327p

쿠빌라이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아흐마드, 노세영, 상가 등 세 명의 대신에 의존했다. 이들은 강제로 세수를 늘림으로써 중국인들의 원성을 샀다. 그럴 때마다 쿠빌라이는 학자 관료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결국에는 환멸을 느껴 이들을 해고하거나 처형했다. 중국인들의 적대감은 일시적이고 득 될 것이 없는 반이슬람교도 정책을 야기하기도 했다. 세 명의 대신과 불교도 등 새로운 지도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쿠빌라이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359p

칭기스 칸의 어머니 호엘룬부터 차비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해온 몽골 여성들과 달리, 쿠빌라이의 딸들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들은 여성에게 가혹한 속박을 가하고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중국의 문화적 기준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아니면 쿠빌라이의 딸들은 단순히 정치에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366p

그는 당시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가장 인구가 많은 제국을 단순히 착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통치하고자 했다. 유목적인 유산을 이어받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비전을 지녔던 그는, 타문화에 대한 배려가 거의 드물었던 시기에 다종다양한 신민들의 행복을 지키고 그들의 이익을 촉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수많은 위대한 통치자들의 제국처럼, 그의 제국도 그의 사후 오래 가지 못했다. 외국 원정 실패, 과도한 재정 적자, 그리고 개인적인 퇴보가 쿠빌라이의 위대한 비전을 뒤흔들었다. 할아버지 칭기스 칸을 비롯한 그의 몽골 선조들은 당시까지 알려진 세계 전체를 통합하여 통치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후계자들도 이러한 비전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세계 제국을 향한 쿠빌라이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의 영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오류>

50p

구육의 미망인 오굴 카이미쉬는 차가타이의 아들 부리와 손잡고 

->부리는 차가타이의 아들인 바이다르의 아들, 즉 차가타이의 손자다.

178p

쿠빌라이의 사촌 카이두는

->카이두는 우구데이의 손자로, 쿠빌라이의 당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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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영웅들 - 우리가 몰랐던 세계사 속 작은 거인
문수인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5년 8월
평점 :
품절


거창한 제목에 비해서는 주마간산 식 나열이라 아쉽지만, 모르는 동남아 위인들에 대해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270페이지 정도의 얇은 분량이고 저자가 전문학자가 아니라 마치 신문 연재 기사를 읽듯 가벼운 필체로 서술하고 있어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다.

특히 역사 속 위인들에 국한하지 않고 현대사의 인물들도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말레이시아의 외과의 출신 총리 마하티르 빈 모하메드는 신문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올해 93세인데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가 됐다는 기사를 보고 놀랬다.

이런 노익장도 가능하구나 싶다.

식민주의 경험이 있다 보니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세운 이들이 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실린 필리핀의 스페인 지배 시절 독립 운동가 호세 리잘이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에 유학한 의사였고 소설가였으며 간디처럼 비폭력 투쟁을 주장했으나 서른 다섯의 나이로 총살되고 만다.

같은 시기에 무장 독립을 주장했던 보니파시오는, 어처구니 없게도 식민 당국인 스페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료인 아기날도 세력에 의해 처형당한다.

동남아는 그저 휴양지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오랜 역사를 가진 유구한 전통의 나라이고,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는 현대사도 무척 흥미롭다.

뒤에 소개된 참조 도서를 읽어봐야겠다.


<인상깊은 구절>

266p

리콴유는 국가 통치에 있어 엄격성은 유별났다. "공산주의자든, 종교적 극단주의자든, 우월주의자든 상관없다. 재판 없이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가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는 파괴된다." ...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 언론에 대해서도 강경했다. "언론의 자유는 싱가포르가 최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실용주의자에 속할 것이다. 내가 관심을 두고 살펴보는 것은 오로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질적인 아이디어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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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근현대사 - 제국 지배에서 민족국가로
오승은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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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다.

흥미로운 주제를 보여주는 제목에 끌려서 선택했다.

복잡하게만 느껴지던 동유럽사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적은 분량 탓인지 소략하는 느낌이지만, 동유럽 지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세울 수 있었다.

동유럽은 합스부르크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끼어 수많은 민족들이 뒤얽혀 살아 왔으나 이 거대한 제국들이 사라진 후 민족국가라는 새로운 정치체제 수립에 진통을 겪고 거기에 소련식 사회주의까지 더해져 몹시도 복잡한 역사를 이뤄왔다.

마지막 장에서 모든 문제의 근본은 신자유주의, 동등한 관계를 맺지 않는 서유럽 중심주의로 기술하고 있지만 너무나 피상적인 느낌이다.

지정학적 특성을 언급할 수는 있겠으나 국제사회에서 타국의 배려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같다.

민족주의는 비단 극우 파시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좌파 사회주의에서도 매우 유용한 전략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17p

산적들은 18~19세기 발칸 민요에서 의적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나, 실상은 무슬림 관리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기독교 농민들을 착취하는 도둑이었다.

219p

어떤 정권이 됐든 폭력적, 억압적 수단에만 의존해서 권력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정통성이란 통치권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근본적 믿음으로, 이것이 확립돼야 국민이 법을 지킬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며, 집권세력이 내린 명령과 지시사항이 하부로 내려가 효율적으로 집행될 수 있게 된다. 특히 20세기 대중정치의 시대에서는 정통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요건이었다.

241p

헝가리 혁명 진압은 개혁파의 요구가 좌절됐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흐루쇼프 개혁정책의 한계와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흐루쇼프는 개혁을 표방했지만 제국주의 정책 기조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277p

동유럽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업, 가난, 경제적 계층화'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라는 민주주의 파괴자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둔갑하면서 생긴 결과였다.

286p

포퓰리즘 정당의 주요 공략 대상은 체재이행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실존적 가난과 심리적 공포다. 우파는 동유럽 사회가 두 개의 적대적 집단, 즉 가난하고 힘없는 다수의 민중과 기득권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고, 자신들은 부패한 엘리트들에 맞서 민중의 보편의지를 대변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대중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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