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반도로 온 사람들 - 다양한 종족이 세력을 겨뤄온 고대 한반도 이야기
이희근 지음 / 따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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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었던 저자의 전작 <우리 안의 그들 역사의 이방인들>과 내용이 겹쳐 개정판인 줄 알았다.

좋은 책은 재발간 되어 다시 주목을 받으면 좋긴 한데, 이름만 바꿔 같은 내용을 또 출판하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약간 실망스러웠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너무 재밌고 고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맥이 잡힌다.

230여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인데도 너무 알차고 무엇보다 저자의 논지와 근거가 확실해 중언부언 하지 않아서 이해하기가 무척 쉽다.

저자의 다른 책, <산척, 조선의 사냥꾼>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내가 혼란스러웠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저자의 주장은 서문에 나온다.

한반도는 한민족이라는 단일 민족이 아니라 많은 외부의 유이민들로 이루어진 이주민의 터전이었다.

이주민의 가장 큰 핵심은 바로 중국으로부터의 망명 세력이다.

한반도 북부에 예맥족이 살았다. 남쪽에는 韓人이 살았다.

고조선이 평양으로 밀려 내려왔다.

연나라 유민 위만이 고조선을 점령하자 준왕은 남부로 내려가 마한에 정착했다.

진시황 통일 이후 진나라 유민들이 한반도로 내려와 진한과 변한이 세워진다.

기존의 한은 이들과 구별되어 마한이 된다.

이들이 내려오기 전에 이미 왜인도 한반도에 정착하고 있었다.

이 부분이 제일 인상적인 주장이었다.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3세기~6세기까지의 왜인들의 정체를 인정한다.

당연히 광개토대왕비의 <신묘년>조 기사, 왜인이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를 공격했다는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만큼 왜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원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 속에서 왜는 그 세력을 잃고 처음에는 가야, 즉 임나를 지배하고 신라와 백제를 괴롭혔으나 5세기에는 금관가야에 정복되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일본부는, 결국 지배체가 아닌 외교기관 정도로 전락했다고 파악한다.

그렇다면 5세기 전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던 왜인들은 본토의 야마토 정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일까?

저자는 5세기 이후의 임나일본부는 그저 외교기관 정도에 불과하고 야마토 조정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기구였다고 하면서도, 실제 지배권을 행사하던 그 이전 시대의 왜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본토와의 관계를 명확히 서술하지 않아서 헷갈린다.

저자는 또 변진한이 진나라 유민들이 세운 나라인 것처럼, 부여 역시 이주민이 건국한 나라로 본다.

부여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데,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나,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지린시 근처에 부여를 세웠고, 그들에게서 쫓겨난 예맥족 일파가 압록강 인근에 고구려를 세웠으며, 결국 한반도 북부를 전부 통합했다고 본다.

이들 중 일부가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세운다. 

저자는 예맥이 곧 말갈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원주민은 예맥과 한인 두 부류였고, 환웅 집단이 토착 예맥족과 세운 나라가 고조선이고, 고구려, 백제, 말갈 등이 이에 속하고, 한반도 남부는 원래 있던 마한과, 진나라 유민이 세운 변진한, 그리고 왜인들로 구성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 한반도라는 공간으로 보니 보다 명확하게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의 기자동래설 비판도 아주 흥미롭다.


<인상 깊은 구절>

66p

최근 중국에서 고대의 연대 체계를 세우려고 추진한 대형 학술 프로젝트인 '하상주단대공정'에서도 요의 시대는 아예 논의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통시대, 특히 송나라 시대 중국 학자들이 요 임금의 실존을 가정해 추정한 그의 즉위 연대를 수용하는 현대 중국 학자는 전혀 없다. 이러니 요의 즉위 연대를 토대로 도출된 단군의 개국 연대는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128p

예맥족의 한 분파인 고구려족이, 초기에는 예맥족의 영역 내에 자리한 소왕국에 불과했지만 대체로 광개토왕 시절에 예맥족 전체를 통합해 그 생활공간마저 모두 차지했다고 볼 수 있다. ...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 집단은 부여에서 나왔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여족도 예맥족의 일원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 현재로서는 부여족의 원래 근거지는 알 수 없지만 부여족은 예맥족의 터전으로 이주해 와서 부여를 세웠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주몽으로 대표되는 계루부는 신화의 내용과는 달리, 부여족의 일파가 아니라 부여족에게 쭃겨난 예맥족 분파로 볼 수 있다. 부여가 건국된 뒤에도 부여의 영역 내에 예성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사실로 보아, 부여 일대의 예맥족이 모두 주몽을 따라간 것은 아니고 그 상당수는 부여의 영내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55p

기존 한국 학계는 일본 열도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간주된 전방후원분 등 왜 계통 고분이 한반도 남부 일대에도 산재해 있는 상황에 대해, 그 존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부정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왜가 고대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65p

이처럼, 당시 한반도 남부의 왜는 백제와 신라를 영향력 아래 두고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운 강력한 정치체였다. 왜가 백제 및 신라와의 역학 구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정보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고 있으므로, <광개토왕릉비문>의 신묘년 기사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 학계의 일반 견해는 이들 침략의 주체인 왜인이 그저 물품이나 인간을 약탈하는 해적 집단이라고 치부해왔다. 광개토왕이 회군 때 원정의 전리품으로 포로를 끌고 오는 행위는 '대고구려'의 상징으로 간주하고, 왜의 이런 행위는 해적질이라고 폄하한 학계의 견해 역시 자국사 중심 역사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왜와 관련된 기사가 <삼국사기>에서 장기간 사라진 이유는, 이 무렵부터 왜가 한반도 내의 역학 구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물론 왜의 세력이 추락한 주된 원인은 고구려와 두 차례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는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 현재 가야 영역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애초에 왜와 가야가 공존하다가 왜가 먼저 패권을 장악했지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오히려 가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비록 가야의 통제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남부에 존속해온 왜라는 정치체는 어느 정도 독자성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 마침내 송 왕조는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을 관할하는 '도독 6국 제군사'라는 장군호를 왜 왕에게 수여해 한반도 남부의 연고권을 인정했다. 5세기 전후 고구려, 백제, 왜 등은 중원 왕조에 조공하면서 경쟁적으로 작호의 제수를 요청했다.

186p

<일본서기> 흠명기에 따르면, 임나일본부는 임나(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 집단이다. 그 실체는 기껏해야 가야 지역에 잔존했던 왜인 집단의 대변 기구에 불과하다. 이들의 구체적인 활동 역시 모두 임나의 부흥 및 가야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외교 활동뿐이었다. 가야 제국, 특히 안라국 역시 백제, 신라, 왜와의 외교 교섭에 일본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열도의 야마토 조정과 원활한 관계를 맺어 백제와 신라에 대해 야마토 조정이 자신의 배후에 있는 양하여 양국의 침략을 회피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기록대로 금관가야는 5세기 중엽 인근 지역의 왜를 정복했다. ... 한때 한반도 남부의 왜인 세력은 가야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라를 압도할 정도로 그 세력을 크게 떨쳤다. 이런 왜도 고구려와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큰 타격을 받아 크게 약화되었다. 마침내 452년 무렵, 한반도의 왜 세력은 한때 자신들이 지배했던 금관가야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그 이후 금관국은 이들을 통제할 기구가 필요했다. 가야가 이들 왜인을 직접 통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면, 간접적으로 통제할 기구라도 필요했다고 판단된다. 가야의 왜 통제기구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부'가 아니었을까.

194p

12세기, 즉 고려 중기까지만 해도 고려의 지배층은 자국사가 단군조선이 아니라 기자조선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당연히 시조는 기자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관은 1055년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외교 문서 중 "우리나라는 기자의 나라를 계승하여 압록강으로써 경계를 삼았다"라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이 정보에 따르면, 14세기 초반까지는 단군이 고려 전체의 시조가 아니라 그저 평양 지역의 선조에 불과했다. 고려 지배층에게 단군이 건국한 나라로 알려진 고조선은 자국사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 시조가 단군이라고 주장하며 인용한 <고기>, <단군본기> 등은 고려 지배층 전체가 아닌 평양 일대에 거주했던 고조선 계통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던 전승을 기록한 문헌 자료였을 가능성이 크다. 

201p

주나라에 의해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가 그 일족을 데리고 피신한 지역이 바로 대릉하 유역이었다는 해석을, 이들 청동기가 가능하게 해준다. 기자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을 거쳐 정착한 곳은 산둥성 일대로 보인다. 그럼 왜 '기자산동설'이 아니고 '기자조선설', 즉 기자동래설이 퍼졌을까? 그것은 아마도 기자가 잠시 중국의 동북 지방, 즉 랴오닝성에 망명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대로, 기자와 그 일족이 대릉하 연안 지역에 잠시 동안 거주한 뒤 동북 지방에는 기자가 망명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기자 일족의 주력은 산동 지방으로 이주했을지라도 그 일부는 고조선 지역으로 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고조선 주민 가운데 기자의 후예를 자처한 집단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 사실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시기인 기원전 11세기에는 조선에 관한 정보가 중원에 전혀 없었다. 중국 문헌 자료 가운데 조선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는 최초의 문헌은 <관자>와 <산해경>이다. 이들 문헌에 담긴 고조선에 관한 정보는 한대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대의 문헌 자료에서 비로소 기자가 조선에 망명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한대 지식인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한나라 지식인들이 기자동래설을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 중원 왕조는 옛 조선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려면 무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대 명분론에 입각한 이념적 통치 방식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상나라 멸망 후 기자의 막연한 행적에 착안해 조작해낸 논리가 바로 기자동래설이었다. ... 이렇게 조작된 기자동래설을, 고려 이래로 한반도의 소중화주의자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중국에서 일찍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기자가 조선에 와서 백성을 교화해 문명국가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자랑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중국이 최고의 문명을 구가하고 있다고 인식한 소중화주의자들이, 자신의 나라도 중국식 모델을 받아들여 또 다른 중화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심지어 그들은 원 제국 역시 중화 제국으로 인식했다. ... 흔히 일연은 김부식과 달리 자주적 인물로 알고 있지만, 그 역시 소중화주의자에 불과했다. ... 일연과 이승휴는 평양 일대 고조선계 주민들의 전승을 기록한 <고기> 등을 가지고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선조들이 나라를 세워 중국 못지않게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냈다. 더구나 요와 순의 관계처럼 단군에게 선양받은 기자에 의해 선조들의 첫 나라가 중국과 같은 문명국가, 즉 소중화가 되었다는 자랑스러운 역사상을 창안해냈다. 앞서 말했듯이, 일연과 이승휴는 부여나 고구려에 흡수된 고조선 계통의 일부 유민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부루나 주몽을 단군의 후손으로 조작한 전승 기록을 토대로 부여와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역사 체계를 만들어냈다. ... 신화에 불과한 고조선 건국 연대를 정부가 나서서 역사적 사실로 강요하는 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 정체성 정립, 남북 동질성 회복, 나아가 남북 통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서, 단기를 정부의 공용 연호로 채택해야 한다는 국수주의 연구자들의 주장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오류>

164p

신라의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인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고서야 왜와 화친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성왕이 미사흔을 보낸 것은 맞는데, 내물왕의 아들이자 미사흔의 형은 눌지왕이다.

저자는 혹시 실성왕을 내물왕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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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재미난 이야기라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역사책 재미난 이야기 역사책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도서관에 신간 신청을 하고 막상 받아보니 너무 크기가 작아 가벼운 역사 에피소드 나열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정말 흥미진진하고 전근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저자의 전작 "역자학자 정기문의 식사"도 예상 외로 재밌게 읽었고, 이 책은 더 재밌다.

역사적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역사학자답게 그 사건들이 갖는 의의와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설명해 준다.

전근대인은 집단으로 존재했고 우리처럼 시각에 민감하지 않았으며 수명이 짧았고 무엇보다 자연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식이 부족했다.

지금 생각하면 중세의 마녀 재판이 황당하지만 왜 갑자기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휩쓸고 갔는지를 모르는 14세기 사람들로서는 무엇인가 원인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너무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죄다 옮겨 적고 났더니 시간이 꽤 걸렸다.

다만 두가지 부분에 동의하지 못했다.

첫째는 남녀의 기계적 평등 부분이다.

저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억압되어 온 여성들의 편을 들어 그녀들이 남성에 비해 얼마나 훌륭한 자질을 가졌는지 강조하고 각 분야에 여성 비율이 높아지도록 할당제를 실시하자고까지 주장했다.

그렇지만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여성들이 특별히 사고방식이 유연하고 언어 능력이 뛰어난 만큼 육체적으로는 남성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논리로 좀더 나아가면, 각자의 특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오히려 제약을 두는 게 합리적일 수도 있게 된다.

의사나 판검사를 여성 할당제로 뽑지 않듯 군인이나 경찰 등도 결국은 같은 조건에서 채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정말 체력적으로 부족하다면 특정 분야에서 특정 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초등 교사 역시 임용고시에 주로 여성들이 합격하면 여교사가 많아지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사립 여학교를 다녀서였는지 중고교 때 여교사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사춘기 아이들이 주로 남교사에 의해 교육받는 건 별 문제가 없고 꼭 초등생은 남녀 교사가 함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두번째는, 출애굽을 역사적 현실로 가정하고 글을 쓴 부분이다.

특정 종교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되려면 보다 많은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경:고고학인가 전설인가"를 읽은 후부터 나는 그 책의 저자 주장에 동의하여 최소설을 지지하게 됐고 출애굽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출애굽을 이집트 역사에 끼워 맞춘 부분은 전제가 틀렸으니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 외 부분들은 정말 재밌게 읽었고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제목이 너무 길어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아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43p

'시각적 후진성'을 갖고 있었던 전근대인들은 거울을 보는 데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한 초상화나 영정도 개성보다는 신분에 따른 전형적인 헝태로 그려지곤 했다. 12세기 말 어느 수녀원장이 남긴 수녀 60여 명의 초상화는 밑에 새겨진 이름을 보지 않고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과 표정이 똑같다. ...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근대 초기인 16~17세기에도 화가는 원래 모습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은 대로, 혹은 기억나는 대로 초상화를 그리곤 했다. ... 전근대인들은 가족과 친족을 행동과 판단의 중요한 준거로 생각했다. 물론 이는 전근대인들의 삶이 친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80p

유대인들은 어차피 '지옥 불에 떨어질 존재'여서 고리대금이라는 또 하나의 죄를 보탠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고리대금이라는 말 자체를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 중세에는 아무리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더라도 고리대금이었다. 중세에는 돈을 빌려주는 일에 위험이 많이 수반되었기 때문에 이자율이 낮기 어려웠다. 특히 정치가나 귀족들은 상황이 어려울 때 돈을 빌리고, 나중에 지위를 이용해서 돈을 갚지 않으려고 했다.

83p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후에 클뤼니 수도원장 피에르는 유대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사라센보다 수천 배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은 죄가 많은 불신자들을 우리 곂에 놔둔 채, 사라센과 싸우기 위해 인명과 돈을 그렇게도 잃어가면서 세상 끝까지 가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111p

그리스 로마의 부자들은 이렇게 공공 행사나 건축, 시민들을 위한 축제에 돈을 기부함으로써 자신들이 평범한 시민과 다른 존재임을 확인시켰고, 이를 통해 신분을 유지했다. 이는 동료의 질시를 막는 방법이기도 했다. 고대 국가에서는 국가의 공권력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시민들의 미움을 샀다가는 언제 어떻게 해를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 그런데 그리스나 로마의 부자들은 외부인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즉 그들은 시민권을 가진 자만을 자기와 같은 인간이라고 여겼으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복 전쟁을 벌여 외국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부리는 것을 정당하게 여겼던 사회에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 사회의 시민이었기 때문에 부자들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이다.

114p

성경에는 병을 고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병자들이 병을 고치고 싶어 했던 이유는 단순히 온전한 육체를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병을 고쳐야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의 믿음 때문이었다. 예수도 병은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가난과 자선을 예찬함으로써 예수는 가난한 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 ... 로마 시대의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이 아니라 수많은 빈자와 장애인을 거느린 구호 집단이었다. 이 때문에 로마 시대 기독교는 '가난한 자들의 종교'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신론(기독교)이 갈수록 팽창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낯선 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죽은 자의 무덤을 돌봐주고, 경건한 생활을 하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도 구걸하러 다니지 않고 저 불경스러운 갈릴리인들(기독교도들)이 자기들 종파의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다른 종파의)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우리들이 서로 돕지 않고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 말은 비시민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로마인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가 이 점에서 자기들의 관습, 제도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 중세 기독교는 이렇듯 예수와 빈민들을 일치시키면서 빈민들에게 베푸는 자선이 단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원과 직결된 문제라고 가르쳤다. ... 12세기 이전에 지어진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담은 추운 겨울에 속옷만 입고 맨발로, 언 땅에 삽질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졌다. 반면 13세기 이후에 아담은 따뜻한 봄날에 좋은 옷을 입고 쟁기를 끌거나 포도밭을 경작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노동이 죗값을 치르는 참회의 수단에서 숭고한 행위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모든 기독교인은 노동을 해야 하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직업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 성직자, 놀고 먹는 지배자, 부자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정신에 따라 서양인들은 자기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높아졌다. 이러한 심성 변화가 농업과 수공업 발전을 가져왔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추동해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에 너무너무 동의한다. 나 역시 재산 여부와 관계없이 노동이야말로 소중한 것이고 직업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직업 대신 건물주 부모와 돈많은 남편감을 찾는 세태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161p

왜 아담은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악행'에 동참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이 하와가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즉 하와의 길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처벌을 받는 것보다, 하느님의 길을 가서 혼자가 되는 게 더 두려웠을 거라는 말이다.

165p

오웰은 2개월간 광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느낀 점을 그대로 표현하면서, 사회주의 지식인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자본가가 주도하는 현재의 문명을 전복하려 하면서도 노동자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엘리트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이게 바로 강남 좌파 아닌가?) ... 이때 오웰은 절대 권력과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절절히 체험하고 (공산주의 사회 체제는 우리가 혐오하는 파시즘과 너무나 닮아 있다) ... 그는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이상으로 꿈꾸고 있지만, 현실사회주의 체제, 특히 중앙집권화된 경제체제가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부패한 권력이 되기 쉽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201p

여기에는 티스로 대변되는 민중과, 재판관들로 대변되는 엘리트의 갈등과 대립이 나타나 있다. 원래 민중은 태곳적부터 여러 민간신앙을 갖고 있었다. 고대 말에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면서 민중은 그런 신앙을 '기독교화'했다. 즉 자신들의 원래 신앙에 기독교의 색채를 입히고는 그것이 하느님이 허용한 신성한 관습이라고 주장했다. ... 기독교를 받아들인 로마인은 이 관습을 버리지 않고 조금 수정해서 유지했다. 그들은 음주를 약간 줄임으로써 그 관습을 하느님이 허락했다고 생각했다. ... 중세 지식인들은 이런 민간신앙을 크게 제어하지 않았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신교 지도자들은 중세 가톨릭 내에 존재하는 이런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뿌리 뽑으려 했다. 가톨릭 지도자들도 신교의 이런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으며 중세 민간신앙 가운데 존재하는 '미신'을 철폐하려고 했다. 물론 근대 초에 벌어진 이 민간신앙과 엘리트 신앙의 전투에서 승자는 지배층이었다. 엘리트들은 민간신앙을 천박하고, 사악하며, 근거 없는 미신으로 규정해버렸다. 그리하여 민간신앙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색채를 띠게 되었다.

233p

중세에 책은 이렇게 귀하고 어렵게 얻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세 책에 담겨 있는 화려한 그림들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비싼 필기 재료에 고가의 채색비가 더해지고, 거기에 필사하는 사람들의 수고비가 더해졌다. 그 모든 것이 비쌌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경 한 권의 값은 보통 크기의 장원에서 얻을 수 있는 1년 치 수입에 해당했다. 지금으로 설명하자면 작은 기업의 1년 치 수입이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248p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온갖 나쁜 짓을 해가며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억울하면 결투를 신청하라고 말한다.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는 이렇게 나쁜 제도를 인정했고, 결투로 인해 사람을 죽이더라도 죄로 처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신이 결투의 승부를 결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51p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존하던 사고방식은 17세기에 이르러 극복되기 시작한다. 17세기 서양에서는 천재들이 연달아 등장하여 우주를 새롭게 설명했다. 과학혁명은 과학기술상의 몇 가지 발명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갈릴레이와 뉴턴은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사람들은 비가 오거나 안 오는 현상이 단순한 자연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자연의 움직임에는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알아낼 수 있는 고유한 법칙이 있다.

(근본적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성리학자였다는 것과 매우 비교된다)

266p

사람 안에 '신적 존재'가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육체를 완전히 부정함으로써 이 신적 존재를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철저한 금욕주의를 주창했다. 인간은 신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므로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다시 천사, 혹은 천사보다 더 높은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사실 이것이 기독교 신자들이 원하는 바다. 기독교 교리에 따르면 최후의 날에 신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구원을 받으면 천사처럼 영적인 몸을 입게 되고, 하느님의 자식으로 인정받아 천사보다 더 높은 존재가 된다. 그런 날이 과연 올까?

272p

부르주아는 재산이 넉넉해서 하녀 여러 명을 두고 집안일을 시켰다. 그 덕분에 그들의 아내는 집안일은 물론 육아에서도 해방되었으며, 그 전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따.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사치와 낭비는 남편들이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아내를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만들수록 자신들의 부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내에게 성적 매력이 넘치도록 최대한 미모를 가꿀 것을 요구했다.

279p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근대 초 서양인의 종교적 열정은 약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졌다. 종교개혁을 전후해서 서양인들은 교리에 따르지 않는 삶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했다. 16~17세기는 진정 '신앙의 시대'였다. 청교도혁명, 30년 전쟁 등을 생각해보면 이 시기 서양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혁명을 일으키고 전쟁도 불사했다는 사실이 분명히 와닿을 것이다.

299p

서양에서는 가부장제와 기독교가 함께 발달하면서, 동양에서는 유교가 생활 속에 침투하면서 여자의 삶이 더욱더 고통스러워졌다. 남자들은 바람을 피우고 사창가를 들락거려도 별 문제가 도지 않았지만, 여자는 강간을 당해도 사회적인 멸시를 면할 수 없었다.

329p

이렇게 기하급수적인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는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전근대의 모든 사회는 자체적인 인구 조절 시스템을 갖춰야 했고 이 시스템에서 많이 이용된 방법이 유아 살해, 특히 여아 살해였다. 이렇듯 고대인들이 유아을 살해했던 것은 인구 조절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그들을 잔인하거나 무지한 사람들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유아 살해를 당연하게 생각하면서도 고대인들은 결혼할 때면 아이를 많이 낳기를 빌었고 고대의 통치자들은 끊임없이 아이를 많이 낳으라고 장려했다. 이런 모순적인 일이 왜 일어났을까? 고대인들이 인구 과잉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인구 부족에 대한 우려를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대사회는 현대의 가장 미개하고 못사는 나라보다도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 따라서 끊임없이 후손을 생산하지 않는다면 고대사회는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고대인들은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자손을 낳고 그중 가장 튼튼한 놈이 살아남는 자연의 법칙을 수행했던 것이다. 물론 고대인들이 아이를 많이 낳고 싶어했던 것이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와 필요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등 종교와 부활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동양인들은 후손에게서 자손이 계속 이어진다고 믿었다. 즉 후손은 또 다른 자신이고 대를 잇는 것은 자신이 소멸하지 않고 영원이 사는 것이었다. 기독교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서양인들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339p

배나 체리를 훔쳤던 청소년들은 또래 집단이었고, 그런 '사소한' 범죄 행위는 집단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다. 그들은 같이 어울려서 사회가 금지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즉 범죄나 일탈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들이 공동 운명체이며, 다른 누구보다도 친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청소년들은 간절히 친구를 원하고, 혹시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하며, 친구의 관심을 얻기 위해 그리고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청소년기에 친구가 갖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거나 과소평가하곤 한다. ... 어른들은 이런 청소년의 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대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보다 자신들이 소중한 존재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의 정과 친구의 정은 다르다.

356p

전근대에는 시각의 비중이 근대보다 훨씬 작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었고, 영상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인은 때때로 시각을 경시하면서 시각을 잃은 것을 곧 신비한 능력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예언자나 주술자 가운데 시각 장애인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전근대에는 근대보다 청각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인은 책을 읽었지만 전근대인은 시장이나 마을 공터에서 떠돌이 이야기꾼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364p

세계의 주요 종교는 모두 고대에 만들어졌고, 고대인은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 창시자, 계승자, 사제는 모두 남성이고, 여성을 종교 생활에서 종속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교회, 성당, 절에 가면 신자들 대부분이 여성이다. 여성들이 스스로 주요 종교를 찾아 자신을 비하하는 설교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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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33fr 2022-05-12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검색하는 책 리뷰에서 몇번 마주친 후, 책에 진심인 분인것 같고 어느새 marine님의 리뷰가 책 고르는 기준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폭넓은 독서를 통해 남긴, 백여개가 넘는 리뷰를 골라 읽는것 또한 즐거움입니다^^

marine 2022-05-13 11:13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요즘은 먹고 사는데 바빠 책을 못 읽고 있어요.
 
조선관청기행 - 조선은 어떻게 왕조 500년을 운영하고 통치했을까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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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좋은데, 역시 비전공자의 한계가 느껴진다.

중앙 관청 부분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내용들이라 지루했고 뒷부분 지방 관청이 오히려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에 근검절약을 숭상했고, 그럼에도 지방을 중앙에서 통제했기 때문에 그 운용비용을 전적으로 지방민이 알아서 부담했던 것 같다.

맨 마지막에 아전들의 농간은 민란을 야기할 정도로 심각했지만 국가에서 돈을 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사적 관계에서 비공식적으로 착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옹정제가 관리들의 수탈을 막기 위해 양렴은제를 시행한 까닭을 알겠다.

조선 관청에 대해서라면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관아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생활사"가 훨씬 우수하다.

이런 좋은 책들을 묻혀 버리고 가벼운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널리 읽히고 참 안타깝다.


<오류>

41p

원래 나인이 임금과 합궁하면 후궁의 작위를 받지만, 상궁이 임금의 승은을 입은 경우에는 작위를 받지 못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나인이 시간이 지나 상궁이 되는 것인데,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48p

저경궁, 대빈궁, 연우궁(延禑宮), 선희궁, 경우궁을 옮겨와 육궁이라 불렀습니다.

-> 혼용되는 연우궁의 우는 책에 나온 禑가 아니라 祐이고, 실록의 맨 처음 용례로는 祜이다. 그러므로 연호궁이 맞다.

204p

과전은 관리로 일할 때는 받았다가 퇴직하면 나라에 되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이 직전법은 거듭되는 흉년과 임진왜란을 전후로 나라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과전은 1대에 한하여 수조권을 인정하는 제도로, 퇴직 후가 아니라 본인이 사망하면 반납했다.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는 제도는 그 다음 제도인 직전법이다. 이것도 토지가 부족해지자 성종 때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거둬 나눠주는 관수관급제로 바뀐다. 직전법은 임진왜란 전후가 아니라 명종 연간에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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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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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도서관에서 <완당평전> 세 권을 읽고 김정희에 대해 알게 된 기억이 있다.

그 후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어 저자가 새로 책을 낸 모양이다.

580 페이지 정도의 두꺼운 책인데도 마치 소설을 읽듯 술술 잘 넘어간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저자의 필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다만 한문이나 서예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특히 글씨에 대한 미학적 설명은 많이 공감을 못했다.

너무 사변적이랄까?

직관적으로 아, 좋구나 이런 울림이 없었다.

저자가 설명한 대로 추사의 글씨는 怪라는 단어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말로 하면 추상성이라고 할까?

인간 김정희에 대한 일대기를 작품과 함께 보여주는 구성이, 저자의 편안한 글솜씨 덕분에 흥미롭게 잘 읽힌다.

중국에서 태어났으면 보다 큰 평가를 받았을 것이고, 후손들이 이렇게 잘사는 덕분에 그의 작품세계가 깊이 조망되고 있는 듯 하다.

연경에는 단 한 번 갔을 뿐인데 말년까지 편지로 교류하고 청나라에서 발간된 여러 서적과 글씨들을 구해 보는 정성이 놀랍다.

역관들이 그런 일을 담당했을 터이니, 미시사적 측면에서 조선 후기 청과의 문화 교류는 좀더 연구해 볼 주제 같다.

마네가 젊은 시절 스페인에 가서 벨라스케스 그림을 보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들을 모사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김정희도 북비남첩론에 공감하여 끊임없이 옛 글씨들을 감상하고 임모하면서 연습했다.

역시 많이 보고 접해야 경지에 오르는 것 같다.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는 과정이 좀 모호한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 효명세자 집권 시절 세력을 잡았던 권돈인 등을 공격하기 위해 안동 김씨인 김홍근 등이 그와 친한 김정희를 유배보낸 것으로 나오던데 책에는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그를 도울 수 없었다고 나온다.

김유근은 김정희와 매우 가까운 사이로 나오는데, 그 역시 동조하는 입장이었나 궁금하다.

저자의 평대로 김정희는 금석학과 글씨 등에 두루두루 능한 예술인이었을 듯 하다.

한글 편지를 보면 자상하기 그지없고 초상화의 눈매도 선해 보인다.


<인상깊은 구절>

228p

우봉 조희룡은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기는 대단한 구도의 난초 그림을 잘 그렸다.

물론 추사가 조희룡을 실제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소지는 있다. 무엇보다 조희룡에게는 중인 출신이라는 신분적 약점이 있었다. 또 조희룡이 비록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고는 있었지만 추사가 보기에는 정작 그 품격을 지탱해줄 학식이 부족했던 것 같다. 학문적, 정신적 깊이가 모자라면서 형식만 그럴듯한 것이 추사는 늘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가지, 대개 자기를 흉내 내는 사람은 낮추어보게 되는 인간 본연의 생리적 반응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을 추종하더라도 뭔가 다른 면을 갖고 따를 때 그를 더 아끼고 대견해하는 법이다. ... 추사는 영정조시대에 이룩한 진경산수와 문인화풍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그림의 본령에 다가서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추사가 사대주의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는 국적을 떠나 예술 자체의 높은 경지를 지향했던 국제주의자였다.

267p

그는 유배지에서도 자나 깨나 집안의 대소사와 제사를 걱정하고 편지마다 그런 내용을 담았다. 거기에는 점점 몰락해가는 귀족이 갖는 비애의 감정이 절절히 배어 있다.

272p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는 반대로, 추사는 격조를 먼저 의식하고 그림을 그린 면이 강하다. 머리와 눈이 너무 앞서서 손의 일이 더 중요한 화가는 되기 힘들었다. 추사는 오히려 그런 기교가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293p

"화의가 이러해야 形似의 길을 벗어난 것이 된다. 이러한 의취는 옛날 유명한 화가들 중에도 터득한 자가 극히 적었다."

304p

추사는 영이와 번박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엄청란 역량을 가진 청나라가 한낱 영이, 불랑, 미리견의 공격에 무너지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중국이 안심이니 우리도 안심이라는 식이었다. 추사는 여전히 청나라가 문명의 이상적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추사 인식의 한계였다. 추사는 설혹 번박들이 쳐들어온다 해도 그것은 '먼 장래의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먼 장래의 일'이 너무도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416p

추사의 글씨를 가우디의 건축에 비유하자면,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괴가 아니라 필획의 글씨 구성의 힘에 있는 것이다.

431p

추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존경하지 않는 입장에서는 <불이선란>의 화제에 나타난 추사의 희열과 자부심 같은 것이 오만으로 보였던 것이다. 예술가의 개성이란 인격자의 평상심과는 정녕 통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그러니 참으로 어려운 것이 빼어난 자, 개성이 강한 자, 능력 있는 자의 처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457p

대부분의 역사지리학자들이 그렇듯이 추사에게도 강한 민족정신이 있었다. 추사는 흔히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 때문에 국제적 감각의 지식인, 심지어는 모화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있던 지식인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나 또한 한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는 민족적 자부심이 대단히 강하고 우리 민족의 대륙적 기상과 북방적 기질을 사뭇 동경해온 분이었다.


<오류>

22p

정순왕후의 사촌오빠로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 등은

->김관주는 정순왕후의 6촌오빠다.

425p

사도세자의 형이 진종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왕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고 가통으로 따지면 4대조가 된다.

->가통으로 따지면 진종은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조가 아니라 3대조이다.

426p

권돈인은 진종은 우리 임금(철종)의 고조에 해당하니

->고조가 아니라 증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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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무인의 역사, 1600~1894년
유진 Y. 박 지음, 유현재 옮김 / 푸른역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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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학자가 쓴 한국사는 항상 신선하다.

제 3자적인 관점이 익숙한 현상과 통설들을 다르게 보는 역할을 해서 무척 흥미롭고 무엇보다 민족주의적인 당위론에 함몰되지 않아 객관적인 느낌이 들어 읽기가 편하다.

오래 전에 읽었던 던컨 교수의 <조선 왕조의 기원>과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조선의 건국 이후 혁성혁명으로 이질적인 지배층이 들어선 게 아니라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져온 가문이 여전히 집권층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이 책에서는 조선 건국 이전에 과거를 봐서 중앙으로 진출한 향리들은 양반, 즉 귀족이 됐으나 1392년 건국 이후는 그 통로가 막혔음을 지적한다.

이 부분이 정말 새로웠다.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고려 시대의 향리가 과거를 통해 중앙으로 진출했다는데, 이들이 조선의 아전 계층과 같다는 얘기인가 항상 모호했었다.

고려 전에는 가능했던 중앙으로의 진출 혹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조선 건국과 함께 닫힌 셈이다.

더불어 강력한 중앙 집권제로 인해 지방에서 자율성을 유지했던 향리층은 중인 피지배층으로 떨어지고 만다.

또 양반을 분명하게 귀족이라 명시한 점도 흥미롭다.

양반은 서양의 귀족과 어떻게 다른가, 의문이었던 점이다.

저자는 태생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양반을 귀족이라고 정의했다.

보통 양반이라고 하면 고정된 신분층이 아니고 관료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계층으로 유동성이 있다고 여겨졌는데 이 책에서 보면 양반은 조선 말기까지 그 태생에 의해 다른 계층과 구별되는 확실한 상위 신분, 즉 귀족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중앙 권력은 극소수의 서울 관료 가문이 오랫동안 독점하여 마치 지방 양반들이나 무인 관료들과는 다른 신분인 것처럼 보일 정도이나, 이들은 서로 통혼했고 양자를 들일 정도로 같은 신분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양반의 특권인 면세를 위해 경제적 관점에서 함께 싸웠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면세층이 늘어나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고 국고가 줄어 민란이 발생하게 된다.

또 항상 의문이었던 점이, 조선은 양란을 거치면서도 체제가 전복되지 않고 어떻게 오랜 기간 존속했을까였다.

중국이라는 강력한 제국의 번국으로서 안정을 취한 점도 있겠으나 저자는 국가 자체 내에서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를 무과 급제를 통해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줬다고 본다.

과거가 실제로 관료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다기 보다는,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위신재 내지는 문화자본의 역할을 한 것이다.

관직 매매인 공명첩도 마찬가지 작용을 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 엄청난 인원의 무과 급제자들이 생겨 단순히 급제했다고 양반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고 무엇보다 피지배계층의 지위 상승 욕구를 충족시켜 궁극적으로는 불만 세력의 완충재가 된다.

이미 가치가 하락해 버린 무과 급제를 갈망하는 하층민의 욕구를 부르디외의 이론을 빌려와 지체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여전히 중앙 귀족들은 문과 급제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무과 역시 위상이 살아 있었다.

조선이 얼마나 내부적으로 안정된 사회였는지 새삼 깨달았고 일본에 의한 강제 개방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통제력을 가진 국가로써 기능했을 듯 하다.

조선 사회 계층과 이동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책이고 무엇보다 번역이 정말 훌륭하다.

뒤에 꼼꼼하게 단 역자주는 말할 것도 없고 번역투의 어색한 문장이 거의 없이 아주 매끄럽다.

기본적으로 역자의 문장력이 좋은 것 같다.

230 페이지 정도의 작은 분량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고, 무엇보다 조선 사회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는 훌륭한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7p

조선 후기에 소수의 벌열 가문이 중앙 문관직을 차지하게 되면서 그 밖의 양반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다. 이때 중앙관직에서 소외된 몇몇 가문들은 무과를 통해서 정치적으로 문반보다 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던 무반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관이 되는 대가로 국가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과 문관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삼남지방에 거주하는 양반들도 중앙정치의 장에서 그들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무관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처럼 문반과 차이가 나는 무반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남지방의 귀족가계와 중앙의 문무관 후계가문들은 여전히 서로를 귀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 한국의 역사학자와 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정치적 참여를 하고자 하는 사회적 세력을 국가가 수용하지 못해 통일신라가 멸망했다거나 조선과 같이 체제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 계급은 현대 미국에서 사용하고 있듯이 직업과 그에 따른 수입이라는 기준을 사용해서 다른 방식으로 정의할 수 있으나 특권이라는 요소는 계급을 정의하는 데 고려하지 않았다. 

16p

필자는 조선 초기의 최상위층이 고려의 귀족층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한다. 조선의 귀족들은 문과를 통해 상당한 명예와 주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을지라도 지방에서 실질적으로 세습적 지위를 누렸던 향리 같은 기득권층을 권력구조에서 제외함으로써 고려의 귀족보다 더욱 엄격하게 권력을 독점하였다. 조선의 귀족 신분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었고, 1392년에 귀족의 지위를 얻지 못한 그룹은 이후에도 귀족이라는 지위는 얻을 수 없었다. 조선이 개국하기 이전에 최상위층에 속하게 된 귀족층들은 그들이 포함된 최상위층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과거급제, 관품 혹은 관직 등이 없어도 되는 세습적 지위를 영구화했다. ... 한국에서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사회적으로 新鄕, 구체적으로는 요호부민의 등장을 봉건질서의 해체에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 있지만, 서구의 한국사 연구자들은 양반층이 중심이 된 구체제의 안정이 적어도 19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 조선의 정규군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여러 봉기들을 진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스템 아래에서 그들은 서구나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에나 공화정을 요구하기보다 근면한 성리학적 군주가 당색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왕정을 요구했다.

31p

무관 지도자들은 기존의 관료구조를 버리거나 문관들을 숙청하지 않는 대신 무관 독재자들 자신이 문관의 지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를 거치면서 무관들은 문관들과 협력하며 혼인관계를 맺었고 문무관을 구별하는 오래된 사회적 차별은 모호해져, 귀족가문에서 문무관리가 모두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 1506년과 1623년 두 차례의 반정으로 국왕이 폐위되었던 사실은 군의 실질적 통수권이 임금으로부터 유력한 대신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당시 개혁적인 신진사대부 관료들은 대부분 문무과가 과하게 시행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왕과 공신들은 이 시험들이 단지 일종의 자격을 조금씩 나누어줌으로써 사람들을 달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체적으로 이를 장려했으며 실행에 옮겼다. ... 16세기 조선의 주된 근심은 백성들의 빈곤이었는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노비로 전락하여 군대에 병사들이 제대로 충원되지 못하는 상황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15세기 조선의 건국과 중앙집권화 정책은 지방 향리와 같은 사회집단을 희생시켜서 국가와 양반에게 이익을 주려는 것이었다. 16세기에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양반들이 국가와 양인 납세자들의 희생을 통한 이득을 보기 시작했다. ...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무술 실력을 갖추어야 했지만, 급제자들이 일반 병사들과 확실히 구별되었던 특징은 지휘관과 관리로서의 가능성이었다. 무과 장원급제자들은 무관직보다는 문반직 6품에 해당하는 품계를 받았는데, 이는 이들 급제자들이 병법과 경서 그리고 법전을 기반으로 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군대 지휘권자가 될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전 세기에 이루어졌던 국가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과급제자들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장군이나 관리자가 아닌 군사훈련만 익힌 병사로서 인식되었다. ... 중앙귀족들은 서북지역을 양반이 없는 곳으로 간주했고 문화적으로 뒤처져 있다고 생각하여 지역차별을 하였다. 17세기부터는 북쪽지방 출신들이 문무과시험에서 경쟁력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북쪽지방이 문화적으로 세련되어지고 여러 왕들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인재들을 활용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 기본적으로 양반에게 중요한 것은 이후 어떤 관직에 진출하느냐가 아니라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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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 시행이 논의될 때 양반에게도 세금을 징수할지 여부가 논란의 중심이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양반들은 세금을 면제받는 것이 자신들의 신분상 특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영조는 최초로 양반에게 세금을 걷는 것을 찬성한 왕이었으나... 조일전쟁 직전의 무과가 1592년 조일전쟁 당시 왜군에게 대적했던 조선의 초기 군사력을 향상시키는 데 특별한 효과가 없었던 것처럼, 조일전쟁 이후의 무과도 만주인들과 싸우는 전장에서의 효울성을 높이는 데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 1681년 청나라가 난을 진압하고 마침내 명나라에 충성하던 대만을 통치하게 되자, 조선은 18세기까지 청에 대한 적개심을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군사적으로 맞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 만약 일본군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동학농민군은 정부를 압박하여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 후기 빈번히 시행되었던 대규모의 무과들이 군대를 유지해서 작은 규모의 봉기들을 무산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사회적 불만이 위험수위에 다다랐던 19세기 말로 갈수록 그 효용성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이미 살펴본 것처럼 외세의 군사적 위협이 줄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선 후기 대규모 무과가 자주 치러진 이유로 볼 수 없다. 조선 후기까지 대규모 무과를 존속시켰던 좀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은 내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유능한 무관들을 필요로 했고, 19세기까지 조선은 성공적으로 필요한 무관을 선발하고 있었다. ... 무과급제자들의 평균연령이 30대 초반이었음을 볼 때 무과급제는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이루기 힘든 성취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남성들이 대부분 10대에 결혼하여 30세 즈음에는 여러 명의 아이를 낳아 기르던 사실에 근거해 본다면, 무과에 급제하려면 보통 10년 이상 공부하고 수련을 해야 하므로 근근히 먹고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무과급제는 더욱더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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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소외된 양반들이 당당하게 관직에 오르는 방법이자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를 보여주는 수단으로써 무과급제를 바라보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많은 가문의 후손들은 스스로가 걸출한 가문의 후손임을 주장하기 위해 족보를 점점 더 세밀하게 고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그중에는 중국에서 기원한 조상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가문도 있었다. ... 소양을 갖춘 귀족들이 계속해서 생원, 진사시에 응시하고 합격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이 시험 자체의 권위가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권위는 당시로서는 확실히 가치가 떨어져 버린 관직에 이름을 올리는 일과 구분되었다. ... 이렇게 압도적인 개성의 상업적 역할은 1882년 이후 조선이 무역 상대국들에게 경제적 침탈을 당하기 전까지만 계속되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며 개성상인들이 변화된 조선의 근대적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중앙에서는 해당 지방에 '상무'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풍이 성장하여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커졌고, 서원에 사액을 요구하던 문사가 앞장서서 성리학적인 문화와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 필요하다면 조선 초기의 중앙이나 영호남 지방 양반가와 연결고리를 상상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선이 초기에 영호남에서 북부로 옮긴 이주민들은 대부분 소작농이나 병사, 피지배층의 범죄자 등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몇몇 족보는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 관서지방민들은 중앙의 소수 양반가문이 장악한 관료사회라는 장벽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이 장벽은 영호남 지방의 양반들조차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 ... 조선 군사체계의 주안점은 전반적으로 군사의 징집과 훈련보다는 과세제도로 옮겨갔다. 무예가 뛰어난 자들이 나중에 정말 무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가와 관계없이 무과는 그들에게 그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분증명서를 발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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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사 연구자들이 양반을 관직에 종사하는 중앙관료가 아닌 세습되는 신분집단으로 간주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한 예로, 송준호는 향반 출신의 무과급제자들 및 무관들이 문무와 관계없이 다른 지방 양반들과 사회적으로 동등한 대우를 받았음을 밝혔다.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양반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으로, 출생은 그러한 지위를 취득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더 나아가 별다른 관직이 없는 향반 전체도 대체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위를 얻고 있었다. ... 이에 대한 답례로 지방의 양반은 자신들의 연줄인 한양의 양반에게 많은 선물을 했으며, 이는 나라에서 주는 급료만으로는 사치스러운 삶을 향유하기 힘들었던 한양 양반들의 수입을 충당해주는 역할을 했다. ... 관직을 가진 중앙의 양반들조차 결집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습되는 정치적 분열, 피비린내 나는 숙청, 학파와 사승관계에 따른 서원의 파벌화 등, 양반사회는 특히 정치적으로 결집력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는 훨씬 큰 동질성을 보인다. 중앙과 지방 귀족층은 모두 자신들의 토지와 노비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지키는 동시에 군역을 면제받으려 했다. ... 조선 후기 문무과 급제자들은 극소수 가문들이 통혼권을 유지하면서 중앙 관직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 후기에는 어떠한 양반가에서도 서얼이라는 이유로 혈통상 문제가 있는 (중인이나 향리, 평민, 노비 등은 말할 것도 없이) 가문의 자손을 양자로 맞아들이는 것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생각해보면, 중앙 문관, 중앙 무관, 영호남 지방의 양반가문들 내에서 서로 양자가 오고간 것은 이 세 집단이 서로를 동등한 양반 신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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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의 가격이 연 천 석을 수확한 이의 한 달 수입과 맞먹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당시 명확하게 중앙 정계에 몸담지 않았던 후손들이 각각의 족보에는 중앙관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경우 그들은 평범한 소작농이거나 가난한 양반은 아니었다. 곡식을 기부한 비양반층들은 관직이나 직위 그 자체에 체화된 보상에 더욱 끌렸을 것이다. 양반과 평민 사이의 간극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분명했을 확률이 크다. 특히 귀족층이라는 유리한 위치에서 봤을 때, 양반이 아닌 자들이 그 자리로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매관을 통해 얻은 관직에 비교적 경외심을 가졌던 평민들조차 자신들이 관직을 산다고 해서 양반 신분으로 상승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불행히도 조선 후기에 아무기 관직을 돈으로 산다고 해도 진정한 양반이 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많지는 않더라도 관직이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몇몇 양반들에게는 비양반층의 시각에서 볼 때에 아직 그들이 명망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많은 지방 향리들은 수준 높은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문화적 소양도 갖추고 있었다. 향리들 중 지식층은 단순히 그들의 고유한 역사와 그들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기보다 양반과 기원이 같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 왕조대에 지방 향리들도 과거에 통과하면 중앙 공직에 들어가 중앙 귀족사회에 합류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물론 이렇게 양반이 되었던 가문의 자손들은 자신의 가문이 지방 향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척했다. 뿐만 아니라 향리 지식층들은 그들 또한 양반과 다를 바 없이 유교적 예를 중시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로 세습적 지방 향리들은 직위를 세습했던 경아전들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유교적 예우를 양반들에게 받고자 했다. 이러한 주장과는 상관없이 귀족층은 계속 기술직 중인과 지방 향리를 하대하였다. ... 신헌이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위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중국 이외의 다른 나라들을 상대적으로 하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와의 외교관계에서는 조선 대표로 훨씬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문관들이 임명되었던 사실을 보면 이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헌의 이런 행보는 조선 후기 무관의 궁극적 성과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즉, 소수의 문관 출신 가문들이 압도적이었으며 따라서 무관에 대한 제재가 심했던 궁중에서, 유장으로 낼 수 있었던 최대의 성과였던 것이다. 양반 무관이 유장으로서 군주를 충실히 섬기는 것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한다면, 조선의 전체적인 관직체계 안에서 무관들이 이런 이상에 환멸을 느낄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무관들은 각자 적절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 이와 같이 19세기 한양의 무인 귀족층은 국가 내부의 반란과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국가에 계속해서 공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7p

19세기에 귀족들의 향청 지배가 약화되었고 수령이 향임을 일방적으로 임명하면서, 수령과 향리들이 백성과 지역의 자원들을 착취하는 문제는 예전보다 더욱 악화되었다. 향리에 대한 인사권이 전적으로 수령에게 있었던 만큼 세습적인 향리가문들도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양반이라는 호칭은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에 오른 사람들에게만 가능했는데, 조선 개국 이전에 중앙관직자가 되지 못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얻을 수 없는 호칭이었다. 

203p

지배층은 자신들과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회의 차이를 유지하려고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부르디외는 교육받은 정도와 그리고 신분에 따라 습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능력을 발휘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능력이 발휘되는 방식은 '상징적 의사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데, 마지막에 이것의 의미와 가치는 능력을 갖춘 당사자와 그 능력을 소비하는 당사자가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 문화적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분에 따라 더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피지배층이 사회계층에 대해 도전하지 않도록 하면서 흔쾌히 신분에 대한 성취를 인정해주고 있다. ... 군주가 무과에 표시한 두터운 신망을 생각할 때에 피지배층들이 무과에 급제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220p

국가와 귀족들이 피지배층의 '성리학화'를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성리학은 비록 피지배층 사이에서 형식적인 예절로 적용되었지만 잠재적으로 피지배층에게 문화자본으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판소리와 한글소설에서 그려진 피지배층의 영웅적인 모습은 성리학적인 미덕이 더 이상 귀족들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에게도 공유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무과제도는 국가의 주요한 제도로서, 무관직이나 중앙관직에 새로운 관원을 모집하는 본래의 기능은 유지하면서도 점차 다양한 사회 기반을 가진 지원자들에게 직위를 수여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중의 기능은 전체적으로 피지배층과 권력에서 도태된 양반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현존하는 정치사회적인 구조의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극소수의 양반들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들은 최고의 사회신분은 누리고 신유학적 가치와 수사에 기반을 둔 관료문화를 고수하였으며, 농업경제에서 상업화로 진행되는 가운데 확대되어 가던 자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대다수 사람들은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인, 왕으로 상징되는 국가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국가는 새로운 집단이 충분한 자원을 대안이나 일련의 스키마 주변에 수집하는 것을 못하지 않는 한, 피지배층의 신분이 상승하여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고려 후기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귀족층과 평민의 입장에서 지배층을 거역하는 혁명적인 세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19세기 무렵의 봉기는 과도한 세금, 만연한 관의 부정, 현실 속의 계급차별에 반발해서 일어났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왕조를 대체하거나 왕정을 없애려는 방법을 생각한 것은 극소수뿐이었다. 이후 조선에 공화정이 도입된 것은 고종이 1919년에 서거하고, 1910년 일본에 병합되고 난 이후였다. ... 지방 귀족들이 여전히 현존하던 사회체계 내에서 혁명세력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반면, 가치가 낮아진 신분이라도 구하려던 피지배층은 자신들에게 백패나 홍패와 같은 임명증서를 내주던 국가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다. 문화자본을 가진 이들은 누구나 충분히 지위를 얻을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국가를 법적인 규제와 도덕적 지침의 자연적 수호자로 여겼다. 교육의 기회가 한참 배제되었던 소작농들조차 비록 부패한 귀족과 관리가 아주 많기는 했지만, 아득히 멀게 느껴지는 나라의 수장인 왕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 물론 무과에 급제하거나 혹은 가치가 낮아진 그 어떠한 자리라도 대다수의 피지배층들은 그 자리를 얻는 방법조차 알 수 없었을 것이다. 19세기까지 많은 수의 평민들은 18세기 영조와 같은 군주들의 경장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조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다. ... 한국의 근현대사 과도기를 거치며, 박성빈의 신분상승에 대한 바람이 초라하게 마무리된 반면, 그 아들인 박정희는 최고의 국가권력을 손에 넣게 되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대격변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241p

조선 초기 과거제는 관념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모든 사회계층에게 열려 있었던 사실을 강조하고 문과에 합격했던 비양반계층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등극하게 되면 그들은 후손들이 특권을 영속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따라서 비양반층이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있다. ... 본질적으로 훈구파와 사림파는 사회적 배경이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학문적 성향과 정치적 수사법에 있어서 신유학의 신봉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



<오류>

105p

특히 외척이었던 안동김씨와 평양조씨 같은 가문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평양조씨가 아니라 풍양조씨다.

207p

화성능행도병의 4천 낙양헌방방도

->낙남헌방방도이다.

218p

소녀의 부친은 개국공신이었던 권근으로, 살아남은 딸을 남이 장군과 혼인시켰다.

->권근의 손자인 권람의 딸이 남이와 혼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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