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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큐레이터, 예술가를 말하다- 큐레이터 캐서린 쿠가 사랑한 20세기 미술의 영웅들
캐서린 쿠 지음, 에이비스 버먼 엮음, 김영준 옮김 / 아트북스 / 2009년 5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원(1% 적립)
2019년 12월 27일에 저장
절판
고대로부터의 통신-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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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왕국- 북한산성이 전하는 스물여섯 가지 한국사 이야기
조윤민 지음,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 엮음 / 주류성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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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문하면 "1월 2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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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화자기- 대륙의 역사와 문화를 담는 그릇
황윤.김준성 지음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19년 12월 05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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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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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인 줄 알았더니, 기존의 답사기에서 사찰 부분만 따로 묶어서 펴낸 책이다.

그래도 사찰이라는 주제로 잘 응집되어 재밌게 읽었고 무엇보다 표지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눈이 시원해진다.

그런데 정작 책 속의 사진들은 선명도가 떨어지고 크기가 작아 도판이 아쉽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라 그런가?

저자 특유의 편안한 문체와 과하지 않은 감상 덕에 우리 절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고향이 전라도라 책에 나온 절들을 어려서 자주 갔었다

그 때만 해도 절이 이렇게 문화재로 훌륭하게 대접받지도 못했던 것 같고 어려서 그런가 시시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불교 사찰을 제외하면 가볼 만한 문화유산이 없다면서 지금은 불교가 많이 쇠락했어도 문화재로서의 사찰은 아주 중요하다고 했던 아빠 말도 떠오른다.

저자가 자세히 묘사한 산사 들어가는 길의 아름다운 풍경과 감상을 읽으니, 아빠와 함께 다녔던 어린 시절들이 떠올라 잠시 행복했다.

서울로 올라온 후 1년에 두 번, 명절 때나 고향에 내려갈까, 그것도 하루는 시댁에서 보내야 해서 아빠랑 드라이브 한 번 가 본 적이 없어 아쉽다.

마지막 두 편은 북한에 있는 묘향산의 보현사와 금강산의 표충사였다.

북한의 큰 절들이라 그런지 사진으로 보는 절 모습이 무척 시원하고 장대하다.

꼭 가보고 싶다.


<오류>

233p

41세 때는 과부가 된 단의장 옹주가 자신의 봉읍에 있는 현계산 안락사에 주석을 부탁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44세 때는 단월옹주가 농장과 노비 문서를 절을 위해 바치자 이를 받아들였으며

->檀越은 절에 시주하다는 뜻이라 앞서 언급한 경문왕의 누이 단의장 옹주가 지증대사에게 단월했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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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란 무엇인가 - 우리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대니얼 록스턴 지음, 김옥진 옮김 / 두레아이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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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제목만 보고 어린이 책인줄 모르고 신간 신청해서 어린이 열람실에서 빌리게 됐다.

겨우 55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지만 진화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어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스켑틱이라는 잡지에서 나온 책인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진화는 품종 교배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서도 계속 보고 있다.

가축이나 농작물이 대표적인 예이다.

세대가 짧은 동식물을 원하는 형질끼리 교배시켜 인간에게 유용한 특성을 지닌 종으로 바꿔 오고 있다.

같은 종이란 간단히 말해 교배하여 후손을 볼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DNA가 후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자연 돌연변이가 발생하는데 생존에 유리할 때는 더 많은 후손이 살아 남아 그 특성을 전달시킬 것이고, 불리한 돌연변이라면 후손을 남기지 못해 사라질 것이다.

진화는 갑작스런 변화가 아니라 조금씩 수정하는 땜질 과정이라는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런 차이가 계속 누적되다 보면 어느 순간 교배가 불가능한 다른 종으로 분화하게 된다.


<인상깊은 구절>

25p

다리가 네 개라는 계획은 진화를 통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증된 기본 계획을 통해 일단 확립되면 고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화는 대부분 그저 생물을 땜질할 뿐입니다. 자연선택 과정을 통해 말은 발가락 다섯 개에서 한 개로 진화했는데, 인느 말을 훨씬 더 크고 빠르고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말의 다리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네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종은 급격하게 재설계된 것이 아니라 그저 최신판으로 고쳐진 것일 뿐입니다. 공통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공통적인 몸의 기본형식(체제)를 둘러싼 작거나 중간 정도의 수많은 변화인 이런 땜질 효과가 바로 지금 가동되고 있는 진화의 수리 공장입니다.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양서류는 크기, 형태, 색깔이 다 다르지만 뼈대는 같은 방식으로 한데 조립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앞쪽에서 머리, 뒤에 꼬리, 팔다리 네 개, 눈구멍과 턱이 있는 두개골, 유연한 척추, 장기를 보호하는 갈비뼈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비슷한 이유는 포유류, 파충류, 조류, 양서류는 모두 아주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하나의 기본적인 몸의 형식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진화는 그런 몸의 기본형식을 여러 번 땜질하여 생쥐, 벌새, 코끼리만큼이나 서로 다른 동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벌새의 날개 뼈도 육상동물의 다리뼈를 수정한 것에 불과합니다.

28p

진화는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동물, 또는 어딘가로부터 에너지를 얻을 필요가 없는 동물처럼 불가능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물리학과 공학의 균형은 또 다른 한계를 안겨 줍니다. 

46p

많은 동물들이 나무에서 삽니다. 그런데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질 때 어떻게 벽돌처럼 그대로 뚝 떨어질지 생각해 보세요. 그런 다음 얼마나 멀리 떨어지거나 뛰어내릴지 어느 정도 조절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큰 장점인지 상상해 보세요. 

 다람쥐 같은 동물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대담하게 나무에서 나무로 뛰어다닙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다람쥐 같은 포유류들은 몸을 활짝 펴고 낙하산처럼 내려옴으로써 떨어지는 것을 늦추는 최소한의 능력을 발달시켰습니다. 몇몇 동물에게서는 더 나아간 '진화 도약'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다리 사이에 펼쳐지는 피부판을 써서 우아하게 활공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대부분은 하늘을 나는 것이 거의 마술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날아다니고 활공하는 것은 자연에서 놀랄 정도로 흔한 일입니다. 인간이 이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비행기와 같은 형태의 발전된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진화는 동물의 왕국의 수많은 생물에게 날 수 있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50p

모든 나무들이 지금 높이의 딱 절반 크기라면 훨씬 더 나았을 것입니다. 절반 크기의 나무 모두 지금과 정확하게 똑같은 양의 햇빛을 받겠지만 키가 크게 자라는 데 에너지를 그렇게 많이 써 버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동식물이 큰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에서 모든 것은 자신이 차지한 작은 풀밭 위에서 그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바삐 일합니다. 나무들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다른 나무를 해치는 일일지라도 말이죠. 그 결과 모든 나무들은 자원의 상당 부분을 높이 자라는 데 쓰게 됩니다. 심지어 키가 작은 게 숲 전체에 더 나은 경우에도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듯이 "너무 무의미하고 너무 낭비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게 자연입니다. 자연선택은 완벽한 세계를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선택은 수십만의 개별 생명체들 모두가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맹렬히 경쟁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자연선택은 엄청나게 낭비가 많은 관계를 낳기도 합니다.  이 거대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경쟁은 놀랄 정도로 안정된 생태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균형을 잡습니다. 종들 사이의 경쟁이 길고도 긴 무승부로 잦아들 때, 이를 '생태적 균형'이라고 말합니다.

52p

과학은 자연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는 가장 믿을 만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발견이 정신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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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치니 - 토스카나의 새벽을 무대에 올린 오페라의 제왕 클래식 클라우드 5
유윤종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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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여행 컨셉이 낯익다 했더니만,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연재된 "김태훈의 책보다 여행"을 책으로 엮은 시리즈였다.

300 페이지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에 책값이 18,800 원이라 좀 과한 느낌도 있으나 표지나 디자인, 판형 등이 감각적으로 잘 만들어져 읽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오디오 클립에서는 무척 흥미롭게 들었던 내용인데 책으로 엮으니 귀로 들었을 때보다는 어쩔 수 없이 수준이 가볍다는 느낌이 든다.

앞서 읽은 클림트 편은, 화가 이야기다 보니 도판의 질이 문제였지만 이번에 푸치니는 음악가인지라 사진만으로도 충분하고, 표지가 참 잘 만들어졌다.

저자의 글솜씨도 매끄러워 푸치니라는 위대한 음악가의 삶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작곡한 12개의 오페라 대부분이 여전히 활발하게 상영되고 있다.

내가 직접 본 오페라만도 토스카, 라 보엠, 잔니 스키키, 투란도트, 나비부인 등 절반이나 된다.

가히 베르디, 바그너와 더불어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라 할 만 하다.

만약 그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면 혹은 좀더 뒷 세대에 태어났다면 오페라 대신 교향곡 작곡가로 남았을 것이라는 평도 인상적이다.

결국 그가 속한 시대와 사회가 개인을 만드는 모양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김홍도와 거의 동시대 사람인데 김홍도도 서양에서 태어났다면 저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구도와 색채감을 갖는 화가가 되었으려나 생각할 때가 있다.

요즘은 영화관에서 오페라 상영을 해 줘서 접근성이 높아진 것 같다.

사진으로 보는 푸치니는 무척 댄디한 신사인데 살아 생전 큰 부를 누렸고 여자 문제로 부인을 힘들게 했다.

결혼부터 동급생의 아내를 피아노 과외하다가 임신시켜 오랜 시간 동안 사실혼 관계로 지냈고 중간중간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사생아도 있다.

1858년 생이면 철종 시대인데, 어제 읽은 조선 풍속사에 따르면, 간통은 곧 사형이니 조선에서 예술가가 나오긴 확실히 힘들었을 듯 하다.

 

<오류>

69p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바흐에게 '음악의 헌정'을 쓰도록 한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기도 했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이 아니라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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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풍속으로 본 조선 여성의 삶 - 혼인.이혼.간통.성폭행으로 읽는 조선시대 여성사
장병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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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도 흥미롭고 내용도 알차다.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자료 인용이 많아 가독성이 다소 떨어지는 부분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조선 시대 혼례와 이혼, 정절 이데올로기, 간통 등에 대해 많은 지식을 얻은 좋은 시간이었다.

비단 성리학의 교조화 때문에 여성들을 정절 이데올로기에 묶어 놨던 것은 아니고, 전세계의 전통 사회는 대체적으로 여성들을 옥죄었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집권층의 국가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여성의 성적 규제를 통해 통치를 공고히 하려 했다는 분석이 신선하다.

간통이나 강간은 현대 사회에서도 처벌받는 범죄이긴 하나 조선 시대에는 곧 사형에 처해졌다는 점이 놀랍다.

조선 전기에는 사족 여성이나 친족간의 간통 같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형에 처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풍속의 교화를 위해 법을 넘어서는 가중 처벌이 많아졌고 심지어 사적 복수마저 허용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특히 간통을 저지른 여자와 남자를 모두 사형에 처하자 더욱 밖으로 노출시키지 못하고 가족 내에서 친족을 살해하는 일이 늘어났고 국가에서는 이를 허용하게 된다.

여관 주인이 팔을 잡았다고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석하여 팔을 자른 여인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바로 조선 시대였으니 확실히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사회다.

후대로 갈수록 강간을 당한 여성을 비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혹은 마을의 이목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족 내에서 살해당하기도 하는데, 가족 살해 후 법정에 세워진 경우도 정상 참작하여 방면되었다.

이른바 풍속의 교화라는 명목으로 영정조 시대 때 특히 이런 사면령이 많이 내려진다.

 

<인상 깊은 구절>
35p

양천상혼의 금지가 노와 양녀의 혼인규제에 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상위신분의 남성이 하위신분의 여성을 농락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하위신분의 남성이 상위신분의 여성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신분적 위협으로 받아들여 금기시하였기 때문이다. 같은 양천상혼이라도 일반양녀가 관계된 경우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은 반면, 사족의 부녀가 관계되었을 때는 혼인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음은 물론, 사사로운 간통의 경우에도 <대명률>의 형량을 넘어서는 극형으로 처벌되었다. 사족여성의 성이 침해받았다는 사실을 지배층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43p

처의 친정 가족은 인척으로서 남편의 친족이 되어 오복제에 편입되었다. 이에 반해 첩의 가족은 남편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는 있겠으나 법제적인 친족으로 인정될 수는 없었다. 처는 가부장적 가족질서 내에서나마 가모로서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의무이자 권리를 가졌다. 처첩의 지위 차이는 특히 관인의 집안에서 현격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관인의 처는 '사족부녀'로서 남편의 정치,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지위를 향유했기 때문이다.

150p

이혼절차를 밟지 않은 채 간통한 남성과 동거하는 경우에 교수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났던 것은, 조선시대에 부인이 남편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이혼할 수 있는 합법적인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이러한 경우의 대부분 법규정대로 조처한 것은 남편을 배반하고 개가한 행위를 가부장적 가족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164p

이렇게 남편의 구타에 관용적인 불공평한 처벌은 처를 남편의 소유물로 보는 가부장적 질서의 산물이고, 시대나 지역을 초월해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이다. 조선시대 남편으로부터 구타당한 것을 이유로 부인이 이혼을 요청하여 성사된 사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 조선 후기에 이르면 간통 이외의 다른 이혼조건들은 거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이혼이 더욱 제한되었다. 이는 사료의 누락 때문일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가정의 안정을 깨드리지 않으려는 개국 이래의 기본정책과 함께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사족녀를 보호하고 가문과 가문의 결합을 끊지 않으려는 지배층의 계급적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인다. 또 성종 16년 <경국대전>의 반포와 함께 마련되었던 재가규제책의 제정도 이혼을 억제하는 기능을 했으리라 보인다. 이혼당한 후 재혼이 억제된 여성들이 양산될 경우 국가에서 이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183p

국가의 이혼 억제책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결과적으로 조선의 여성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사족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조선에서도 피지배층들의 이혼은 당사자 사이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고, 국가에서도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족층의 이혼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단호하고 일관된 태도를 보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의 이혼 억제책은 사족여성의 정처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87p

조선은 이혼을 강력히 억제했을 뿐만 아니라, 소박행위를 강상죄로까지 언급하며 규제할 것을 공식화했다. 이혼 억제책은 성종대를 지나며 재가규제책이 강요되면서 더욱 강고해진다. 여성의 수절에 대한 국가의 배려라는 측면에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닌 한 이혼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다. 

215p

조선시대의 이혼제한 정책은 처가 부당하게 이혼당하는 피해를 줄여 정처로서의 지위를 안정되게 유지케 하는 데 공헌하기도 하였으나, 불법적 이혼행위에 대해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버림받은 여성들의 처지를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성리학적 윤리에 입각해 처첩관계에까지 개입함으로써 정처를 보호하려 했던 국가권력이, 불법적으로 정처를 축출하는 행위에 대해 점차 무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이혼제한 정책의 목표가 여성의 열악한 지위를 개선시키려는 데 있었다기보다, 형식적인 혼인관계의 유지 그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218p

역사적으로 간통행위에 대한 처벌은 가장이 전 가족에 대한 전제권을 행사하는 가부장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었다. 사유재산제의 발생과 함께, 남성의 혈통을 보존하고 남성의 적자에게 분란 없이 재산을 상속시키기 위해 여성의 간통은 금지되어야 했다. 혈통보존을 불확실하게 만드는 유부녀의 간통은 가부장제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했던 것이다. 거의 모든 전통사회에서 간통죄의 처벌기준을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하고 있었었 것도 그 때문이다.

222p

간통죄 처벌에 적용된 쌍벌주의는 남녀동등의 외관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남녀에게 동일한 형량을 부과한 것은 양성평등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리를 손상시킨 처의 행위에 동참한 남성을 공동정범으로 취급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의 권리를 손상시킨 미혼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녀평등처벌을 표방한 현대법에서도 간통처벌의 표적이 된 것은 사실상 여성이었다. 남성은 쉽게 처의 간통을 고수한 반면 경제적 능력이 없는 여성은 현실적으로 이혼이 전제되는 고소를 꺼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간통죄의 처벌은 원래가 유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이고 유부남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한 것도 남녀평등을 표방하는 현대 간통법의 허구성을 지적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간통죄에 대한 처벌의 초점은 여성에게 맞추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41p

간통의 정황이란 간통 당사자와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이나 본인의 자백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여기서 본인의 자백은 고문에 의해 이루어진다. 비록 고문할 때 사용하는 매의 크기나 대수 등이 <경국대전>에 법으로 규제되어 있기는 하였으나, 물리적 강제에 의한 본인의 자백만으로 범죄를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전통사회의 전근대적인 법적용의 일면을 볼 수 있다.

245p

이 사건은 유생들의 공론이 초법적으로 사회를 휘젓던 당시의 실상을 보여주며, 후기에 일어날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간통죄의 처벌에 현장확인을 요구했고, 최소한 정황증거에라도 근거하고자 했던 전기와 달리, 시대가 내려갈수록 간통죄의 구성요건이 완화되어 간통죄가 적용되는 사안이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났던 것이다.

246p

영정조 대에 들어오게 되면 이제까지의 증거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여성의 나쁜 품행 자체를 간통행위로 받아들이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주관적 심증주의가 마침내 국왕의 교서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이 영조 34년과 정조 14년의 교서였다.

250p

이렇게 후기에는 간통사건을 취급하면서 간통사실의 확인에 노력하기보다는 여성의 온당치 못한 처신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에 역점을 두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간통의 혐의를 가질 수 있는 정황이라는 것만으로도 간통죄에 준해 처벌하는 등 간통죄의 구성요건을 폭넓게 설정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나쁜 품행을 가진 처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대응은 뒤에서 검토할 간통남녀에 대한 사적 징벌 범위가 확대되는 일련의 조처와 궤를 같이한다.

259p

간통행위에 대해 여타의 집단과 달라 사족집단에 대한 제재가 강하였던 것은, 명분상으로는 사대부집단의 높은 도덕성을 표방하기 위하여 사족남녀 모두에게 도덕적인 순결을 요구하는 양상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사족녀의 정절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는 신분적 차별을 사회기강의 핵심으로 삼았던 고려사회와 달리 도덕적 우월을 지배의 명분으로 들고 등장한 사대부가 신분적 차별보다는 가족윤리 쪽으로 시회기강의 핵심을 변화시킨 데서 비롯된 것이다. 

 도덕적 우월을 뒷받침할 덕목으로 남성에게는 학문에 의한 수양을, 여성에게는 정절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족녀에게 강요되었던 정절은 보다 왜곡된 형태의 성차별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으니, 이것은 '사족녀'라는 우월한 지위를 획득한 대신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였던 것이다.

265p

사족녀의 간통에 대한 처벌규정이 강화되어 사족녀만이 아니라 상대 남성까지 교수형으로 처벌을 받게 됨에 따라 간통행위의 노출 자체가 최대한 기피되었을 것이다. 또한 정표조차 가문을 빛내는 도구로 활용되던 시기에 간통의 추문에 휘말리게 된다는 것이 가문의 존립에 치명적이라는 점도 간통행위의 은폐에 일익을 담당했으리가 보인다. 여성의 정절을 극도로 숭앙하게 된 조선 후기에 일단 간통혐의를 받게 된다는 것은 행위당사자만이 아니라 가문의 명예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사족 가문에서 가족이 간통에 연루되면 사건이 발각되기 전에 여성을 강제로 자살시키거나 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275p

근대 형법에서는 모든 범죄에 대한 사적 보복이 금지되고 공적 처벌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간통남녀를 처벌할 수 있는 것도 국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87p

정절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법을 초월하면서까지 풍속을 교정하려 한 정조의 편집증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조선 후기에 와서 남편에 의한 '현장포착'과 '현장살해'라는 원칙을 벗어난 사적 징벌을 허용하게 되면서, 현실에서는 사적 징벌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었다. 법에서 용인한 남편이나 아들 이외에 아버지, 오뻐, 시집식구 등이 간통남녀를 살해하는 것까지 용인하기에 이르렀다. ... 개인의 복수를 개개 친족에게 양여하여 사적 보복을 허용하는 경향은 간통죄에서만이 아니라 일반 형사범죄에서도 나타난다. 

295p

이 사건을 다루면서 홍문관 수찬 정익조차 "연이가 비록 奸夫가 있다 해도 이는 관청의 婢에 불과한데, 무슨 대단한 실행이라고 칼로 동생을 찌를 수 있겠는가? 이미 동생을 칼로 찔렀으니 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분개할 정도였다. 이제 간통에 연루된 여성들은 위로는 사족녀, 아래로는 천녀에 이르기까지 신분, 계층을 불문하고 가족, 친족, 이웃의 살해위협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간통이 실제로 이루어졌는가의 사실 확인이나, 만약 간통이 이루어졌다면 당연히 뒤따라야 할 상대방 남성의 처벌에 대한 관심은 적어지고, 간통한 여성의 처벌에만 관심을 보이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사회의 안정기에는 남녀쌍벌죄로 처리함으로써 남녀 모두에게 도덕적 모범을 요구하던 간통죄가, 사회의 파탄기에 이르러 여성에게 처벌의 초점을 맞춤으로써 비로소 '남성의 혈통보존'이라는 간통죄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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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사대부계급이 자신들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덕적 수범 방안의 일환으로 사족녀에게 전 시대보다 가일층의 성적 규제를 가하게 되었는데 반해, 조선 후기에는 체제의 위기에 봉착한 지배계급이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들의 위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성적 규제를 강화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 기강을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성리학의 논리를 억지로 끌어다 여성 일반에 대한 성적 규제를 강화했던 것이다. 국왕 역시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이러한 세태를 적극 활용하였다. 영정조는 '好生의 덕'의 풍모를 과시하면서 법을 초월해 풍속을 교정하려는 조치를 곧잘 내렸다. 간통혐의만으로 여성들을 죽음으로 몰아세우고, 부당하게 사적 징벌을 가했던 남성들에게 호생의 덕을 빌미로 관용을 베푸는 일을 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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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대부터 강간범죄를 취급하면서 정절을 잃은 강간피해자의 죽음을 요구하며 심지어 죽지 않은 피해자를 문책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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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사건에 연루된 후 피해자가 자살하지 않을 경우 화간으로 몰려 마을에서 생활하기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여성을 자살로 밀어 넣은 요인이 되었다. 강간의 성립 여부와 관련 없이 성추문에 일단 휘말리면 피해자 여성이 화간의 혐의를 받게 되었던 정황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결국 자살만이 자신의 지조와 결백을 밝히고 가해자로 하여금 엄한 처벌을 받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진보적 인사로 꼽히는 정약용조차 단호히 "도적이나 오랑캐를 만나 겁탈당하여 몸을 더럽히게 된 자는 죽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다"라고 말했으니 한마디로 몸이 더럽혀진 여성은 생존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당시 일반 남성들의 사고방식이었다. 위의 정조의 표현대로 일단 성추행의 대상이 되면 사방에서 옥죄어오는 억압 때문에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강간이라는 행위를 응징하는 것보다 피해여성이 얼마나 철저히 절개를 지켰는가에 초미의 관심을 둔 것이 조선 후기의 분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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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이 약화되면 가해사족의 특권의식은 강해질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범법행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며 처벌은 더욱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사회기강의 해이를 바로잡기 위한 고육책이 여성의 강한 저항을 칭송하여 정절관념을 강화하는 것이었고, 국가 책임의 방기에 대한 대안이 가해자에 대한 사적 보복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사대부층이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성도덕의 기강을 확립하고 강간범을 엄벌하였다면, 후기에는 여성의 극단적 정절수호를 통해 국가통제력의 약화와 사대부층 남성의 도덕성 실추를 만회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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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30 08: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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