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원의 석물
김이순 지음 / 한국미술연구소CAS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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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해보이고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충실하고 사진이 아주 선명하며 방계로의 왕위 계승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정말 유익했다.

보통 능에 대한 연구서만 있지 본격적으로 원에 대해 쓴 책은 못 본 것 같다.

원은 대부분 아들이 방계로써 왕위를 이은 후 그 사친을 나중에 추숭한 경우라 그 과정이 흥미롭다.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봉원한 것이 처음인데 대부분은 1870년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왕권강화 목적으로 봉원됐다고 한다.

왕위 계승의 정통성 확보와 사친 추숭을 통한 효의 실천을 위해 조선만의 새로운 궁원제가 생긴 셈이다.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출신 컴플렉스 때문에 영조가 소령원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43p

인조는 생부를 추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과 달리, 아들의 경우에는 '원'이라는 단어조차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사실은 소현세자의 아들 즉, 원손을 세자로 삼지 않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사실과 함께 인조와 소현세자 간의 갈등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 희빈 장씨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했다. 부대빈은 왕비보다는 아래지만 빈보다 한 단계 높은 지위로, 사친 추숭을 위해 만든 새로운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대빈의 작위를 받은 사람은 희빈 장씨가 유일하다. 숙종이 1701년에 내린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도록 하라"는 하교로 인해 왕비로 추숭은 어려웠다. 이때 묘를 원으로 추숭할 수 있었으니 봉원하지 않았고, 현재 서오릉 경내로 이장되어 대빈묘로 칭해지고 있다.

46p

정조가 즉위한 직후에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올리고 궁호를 경모궁으로 정했으며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추숭했는데, 이는 세자로서가 아니라 정조의 사친으로서 추숭된 것이다.

100p

능묘 석인은 점점 양식화되어 시각적인 사실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석의물로서의 전통에 충실했다.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는 것은 전통을 중시하고 국가적 역량이 모이는 왕릉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무덤이라 하더라도 원이나 묘는 능에 비해 사적이었기 때문에 왕의 개인적 의지에 따라 새로운 솜씨를 지닌 장인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7p

뒷면에는 음기가 새겨져 있는데 비문과 글씨는 모두 영조가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것으로 영조가 영빈 이씨를 얼마나 애틋하게 생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220p

동그랗게 뜬 눈과 삼각형 귀,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 등으로 무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려 시도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석양에 비항 실제감이 부족하고 조각 수준이 떨어지는데, 이는 호랑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로 보인다.

248p

이처럼 명성황후 사후에 실질적인 황후의 역할을 한 엄귀비가 고종의 계비인 황후로 올라가지 못한 것은 앞서 숙종이 후궁을 올려 정궁으로 삼는 것을 금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은 1870년에 세자묘를 승원할 때 후궁에게는 원호를 쓰지 못하게 했었다.

275p

원이 능에 비해 간소한 것은 영조가 소령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조선왕실의 엄격한 법도와 절제의 미덕이 낳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고종시대에 일어난 대규모 봉원은 정치적으로 불안하던 시대에 명분을 중시하고 왕권의 정통성을 부여받고자 하는 의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76p

원제 무덤의 대상 범위가 왕의 사친에서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세손까지 확대된 것은 원이 사친추숭 및 계승강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사친추숭은 임승대통한 왕이 어버이에 대한 효의 윤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궁극적으로는 유교 국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계승강조는 당연히 대통을 이었을 세자와 세손을 높임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종통이 이어지는 군주체제를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 대부분 합장이 아닌 단독 墳 으로 조성되었고, 순창원과 흥원만이 예외적인 경우이다. 이는 원의 피장자의 배우자와 사회적 신분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거나 배우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류>

105p

소령원 조성 시에 인조로부터 순혜왕후 공릉 문무석인 개수(1648)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릉은 순혜왕후가 아니라 예종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또 1648년 실록 기사를 찾아보니 공릉이 아니라 성종비 공혜왕후의 순릉 개수가 이뤄졌다. 

141p

조말룡은 순혜왕후 공릉이 문무석인 개수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 공혜왕후 순릉을 개수했다.

202p

영빈 이씨는 21세에 영조의 후궁이 되고 정2품 숙의에 봉해졌다.

->1696년생인 영빈은 31세가 되는 1726년에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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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술에 미치다 - 무색미학으로 본 한국인의 미의식
전기열 지음 / 아트북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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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특히 조선 백자에 대한 이야기다.

전에는 고려 시대 청자를 만들던 훌륭한 기술이 조선 건국 직전 혼란한 상황을 거치면서 맥이 끊겨 더이상 만들이 못하고 분청사기와 백자로 돌아섰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자사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고려와 조선은 추구하는 미학과 감성이 달랐기 때문에 선호하는 그릇의 형태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단 도자기 뿐이 아니라 조선은 사치를 배격하고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담박한 미학의 사대부 취향의 문화를 추구했던 듯 하다.

요컨대 화려한 고려청자 보다는 단아하고 자극적이지 않는, 이 책의 저자의 표현대로 튀지 않는 색감의 중간색을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조선 백자의 단순미, 소박미, 자연스러움 등에 공감이 가고 비단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 같은 하층민 뿐 아니라 나라를 이끌어 가는 상층의 사대부들이 추구하는 미학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일본의 일기일회, 다선일미 문화에 대한 설명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왜 일본에서 이도다완 같은 평범한 막사발을 국보로 숭앙하는지 이해가 안 갔는데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아 그렇구나 무릎이 쳐진다.

조잡한 그릇에 와비의 정신을 구현해 가치를 만드는 차인을 통해 그 미학이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은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달린 것이고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미학은 없는 것일까?

솔직히 저자의 백자 예찬론에 공감이 가면서도 중국 도자기를 낮게 보는듯한 발언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다.

중국 도자기를 접할 기회가 없어 잘 몰랐는데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펴낸 중국도자도록을 보고 정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비단 중국 도자기 뿐 아니라 유럽 도자기 등도 그 놀라운 형태미와 색채감, 세련됨에 정말 감탄했다.

비교 설명은 이해를 돕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만든 예술작품에는 나름의 철학과 미학이 베어 있을테니 다른 문화에 대한 섣부른 비판은 삼가해야 할 것 같다.

저자는 조선 도공이 이름을 남기지 않는 것을 두고 허명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해석하던데 이 문장에도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저자가 앞에서 설명한대로 조선 사회에서는 공예품이나 예술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가치를 크게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이름을 남긴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이 오늘날 조선 백자가 전통문화에 함몰되어 실생활에서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박물관의 유물로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조선 백자가 평등을 추구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구현했다는 말도 공감이 어려웠다.

조선이야말로 신분질서를 예로써 표현하는 사대부들의 나라가 아니었던가.

오히려 무애심이라는 표현이 더 공감된다.

저자가 다완이나 자기를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실생활에서 직접 사용하면서 그 멋과 맛을 음미하는 점도 인상깊다.

저자의 표현대로 원래 우리 자기는 감상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실생활에서 사용할 때 가치가 배가될 듯 하다.

마지막 장에서 자신이 소유한 여러 자기들을 소개하면서 품평한 것도 인상깊게 읽었다.

자신만의 애장품에 대해 이렇게 깊은 철학을 가지고 음미하는 글을 쓸 수 있는 수집가는 얼마나 행복한가.


<인상깊은 구절>

65p

동양의 화가들은 오래전부터 여백을 편재하는 氣의 표상으로 여겨왔다. 편재는 '두루 遍'자, '있을 在'자를 쓰는데, 말하자면 널리 퍼져 있음을 뜻한다. 위아래, 동서남북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함을 의미한다. 바로 이 '두루 존재함'에서 여백은 중국의 화가들이 산수를 그릴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산수의 '기상'을 표현한 의도적 장치로 사용했다. 이 시기의 여백은 한 방울의 먹을 사용함에도 심사숙고하는 惜墨이나 사물의 본바탕을 간결한 필치로 그려내는 동양화 화법 가운데 하나인 減筆과 더불어 표현 억제의 의미로도 쓰였다.

105p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원색 계통의 화려하고 강렬한, 즉 눈을 자극하는 색상 사용은 무척 꺼린다. 색깔 종류는 다양하게 구사하지만 거의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중간색 계통만을 쓴다. 

137p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사회의 '이치고이치에 一期一會' 문화는 다선일미의 진리를 실천하는 문화다. 우리는 일본인들이 만남이나 헤어짐에 있어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불편할 정도로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습성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친절심에 나온 것이 아니라 이치고이치에 정신의 직접적인 발현임을 알 수 있다. "본래 다도의 모임은 이치고이치에라고 해서, 여러 번 같은 주객이 서로 만났다 하더라도 오늘 모임은 일생에 단 한번뿐인 만남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다도 모임의 정신을 풀이하고 있다. 이 정신에 의해 일본인은 매번 눈이 마주치는 순간마저 생애에 단 한번뿐인 만남이라 여겨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하는 것이다.

141p

우리 생각에는 일본 차인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 다완이고, 와비차의 핵심 매개체라는 점에서 오오이도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사정이 그렇지가 않다. 즉 차와 와비의 미를 모르는 조선시대 초기의 이름도 알 수 없는 도공이 만든 그릇을, 차와 와비의 미를 알고 있는 일본 차인이 그 조잡함을 발견하고 그냥 취했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이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오이도를 우리 선조가 만든 것이란 이유로 민족적 우월감 내지는 자족감에 들뜨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와비차는 본래 그렇게 시작한다. 정말 보잘것없는 것에서부터 도구를 찾는다. ... 오오이도는 조선에서 만든 조잡한 그릇이지만 일본의 차인이 가치를 추구하는 다완으로 채용함을써 훌륭한 그릇이 되었다. 만약 그 그릇이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가면 어찌 될까? 다시 조잡한 조선의 사발이 된다

 미의식에 불교를 담은 와비관은 다실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초라한 누옥이지만 그 속에서 차회가 열릴 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치 충만한 공간이 된다. 와비차의 다실에서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귀하고 천한 신분에 상관없이 니지리구치를 통해 낮은 자세로 기어들어 갈 수밖에 없다.

145p

일본인의 미관은 그야말로 내용이 충실하면서도 품격까지 갖추었다. 이민족의 그릇에서 자기 민족의 가치관을 찾아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술을 스스럼없이 사랑하고 존경할 줄 아는 미덕도 갖추었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조선 예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민족은 정작 우리가 아니라 일본인이 아닐까 싶다.

166p

우리 민족은 본래 다른 민족과 달리 고미술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전래 유물이 극히 드물다는 것은 유물의 가치 인식에 대한 역사가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일본인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갑자기 조상의 유물에 대한 가치가 인식되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보물이 되고, 환금성이 생기면서 전국에 골동성이 우후죽순으로 들끓었다.

229p

가령 차 문화에 지도적 입장에 있는 차 선생이나 사기장은 녹차와 다완을 매개로 하여 우리 차 문화가 고급 전통문화라 자랑하기를 좋아하나, 나는 그들이 왜 우리 민족이 녹차의 맛을 소중히 여겨야 하고 다완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매개체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도, 미관도 부재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전통만을 강조한 격이다. 일본 다도는 가치관과 행다법을 통해 깨달음에 들어서는 고급 정신 문화로서 굳건히 전통의 길을 이어가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차 문화에는 도무지 이렇다 할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다. 굳이 평하자면, 그저 차맛을 음미하고 차맛의 깊이를 논하는 樂 정도라 할까. 조선시대 풍류를 즐기는 선비의 유희 수준에 머문 것이라 하겠는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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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삶, 풍속화로 만나다 아름답다! 우리 옛 그림 4
윤진영 지음 / 다섯수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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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이 시리즈는 조선 시대 그림들을 주제별로 나누어 큰 도판과 함께 그림 내용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무엇보다 판형이 커서 도판을 시원하게 볼 수 있어 참 좋다.

풍속화라고 하면 김홍도와 신윤복만 생각했는데 계회도 같은 관인 풍속화도 함께 실려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후기로 올수록 구도가 역동적으로 바뀌고 인물들의 묘사와 색채감이 화려해져 기록화 수준을 넘어 감상하는 맛이 난다.

특히 김홍도의 풍속화는 단순히 인물과 장면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구도가 활발해 좋고, 신윤복은 색감이 화사하고 신선하다.

의외로 조영석이나 윤두서 같은 사대부 문인 화가들이 풍속화에 관심이 있었던 점이 신기하다.

조영석은 영조의 어진을 그리라는 명도 자신을 잡기나 그리는 화가로 본다고 불명예스럽게 여겨 거부할 정도로 사대부로서의 자부심이 높았는데 여러 풍속화를 남긴 점도 참 흥미롭다.

사생의 욕구를 참기에는 화가로서의 열정과 능력이 넘쳤던 것 같다.

김홍도의 서당 그림을 설명하면서 조선 후기에는 평민도 글을 배워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되는 피상적인 이야기다.

문과는 물론이고 중인들이 나아가는 잡직마저도 대부분 한 가문이 독식해서 후기로 갈수록 평민의 과거 급제는 불가능했고 그런 사례도 없다고 알고 있다.

평안감사 환영도가 김홍도 그림이라고 알려져서 이상했는데 저자도 김홍도 화풍을 닮은 화원의 그림으로 생각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도국가첩>과 <석천한유>의 싱그러운 담채 색감이 기억에 남는다.

<평안감사 환영도>의 엄청난 환영 인파와 수많은 횃불을 밝힌 한밤중의 뱃놀이를 보면 당시 지방관의 위용과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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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2 - 정수일의 세계문명기행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2
정수일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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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은 더 쉽게 읽힌다.

1, 2권 모두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인데 내용은 편하게 쓱 읽을 만한 수준이라 금방금방 넘어간다.

1권은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를, 2권은 중앙 아프리카, 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로 내려간다.

1960년대 독립을 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 치하의 오랜 착취가 안타깝지만 사회주의를 선택한 일당 독재자들 때문에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어왔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한국과는 달리 자원이 풍부한데 왜 뒤쳐지게 되었을까?

여전히 모든 문제점의 근원은 19세기 제국주의의 착취 때문인가 의문이 생긴다.

독립 후 사회주의를 선택한 아프리카 나라들은 전부 일당 독재로 귀결됐고 경제적으로 실패했다.

탄자니아의 국부로 소개된 니에레레의 예를 봐도 예외없이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 일당 독재로 치달았고 국유화와 집단농장화를 강제 시행하여 결국은 자신이 인정한 것처럼 처음보다 훨씬 가난해졌다.

인간의 본성은 사유재산과 경쟁심을 통해 발전하는 자본주의에 더 맞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독립 당시 똑같이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의 지도자들이 미국 편에 붙어 자본주의를 택한 것이 오늘날의 부유함을 이룬 원동력이 아닐까?

가나와 콩고, 남아공, 에티오피아, 모잠비크. 탄자니아, 케냐 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의 역사와 현대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다.

참조 목록으로 나온 책들을 읽어 볼 예정이다.

다른 나라들은 전통 왕조의 역사가 훨씬 재밌는데 아프리카는 현대사가 더 흥미롭다.

저자가 인류의 기원인 아프리카의 유적지에 대해서도 빼놓지 않고 지면을 할애하여 설명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 부분도 더 읽어 볼 생각이다.

다른 리뷰를 보니 참조 도서를 그대로 옮겼다고 비판하기도 하던데 일단 내가 그 책들을 읽어 보고 판단하려 하고, 기본적으로 매우 성실한 여행기라 생각된다.

가벼운 감상을 기술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나라가 갖는 여러 중요한 가치들에 대해 매우 성실하게 잘 기술하고 있어 과연 학자는 다르구나 싶다.


 

<인상깊은 구절>

137p

예나 지금이나 언약궤의 진품은 누구도 볼 수 없으며, 그 존재와 힘에 대한 믿음은 전설과 사제들의 설교에 의해서만 유지될 뿐이다. 종교가 종교임을 그만두기 전에는 종교의 성물에 대한 믿음과 이해란 다 이러한 식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은밀서(書)'를 생명으로 하는 종교가 유지되는 법이다.

149p

기독교와 같은 보편종교는 자연이나 혈연 구조에 입지한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 추구하는 노력, 즉 전도를 통한 전파가 간단없이 끈질기게 진행된다. 이와 같은 종교의 전파는 필연적으로 전달과 변용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타지에 대한 종교의 전파 시원은 의당 초전(初傳) 단계인 전달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초단계적으로 변용을 그 시원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요컨대 종교의 전파는 전달에서 비롯되는 초전과 변용을 수반하는 공전(혹은 公許)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기독교의 경우도 분명 초전과 국가의 공허에 의한 공전의 두 단계를 거쳐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외래 종교는 이질감에서 오는 냉대 때문에 쉽게 수용되지 않고, 그 전파 과정에서 오랜 시간 우여곡절을 겪게 마련이다. 모든 종교 전파사가 실증하다시피, 한 종교가 공허나 공인에 이르기까지는 초전자들의 헌신적인 포교가 필수다. 엄격히 말하면 이 전달 단계에서 이들 초전자들의 포교 활동 개시가 바로 해당 종교의 전래 시원이며, 그들이 바로 다름아닌 전파의 시조인 것이다. 초전자들은 사회적인 비난과 저항 속에서 비밀리에 포교 활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공개되는 일이 적고, 기록 또한 남지 않게 된다. 그 때문에 그들에 의한 전래의 시원이나 과정을 구체적으로 추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 결과 흔히 초전(전달) 활동이 무시된 채 기록, 그것도 공전을 기준으로 한 기록에만 의존해 전래 시원을 판단하는 편향을 범하게 된다. 이러한 이론을 전제로 한다면 기독교의 에티오피아 전래 시원은 국왕 에자나의 공허 시점이 아니라, 그 이전 상당한 기간의 초전 단계의 기점으로 거술러올라가 추정되어야 할 것이다.

 

<오류>

162p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스페인 국왕 구스타브 3세는 기괴망측한 인체 실험을 고안해냈다. .. 이를 계기로 스페인의 1인당 커피 소피량은 일시 세계 1위로 급부상했다고 한다.

->구스타프 3세는 스페인이 아니라 스웨덴의 국왕이다. 이를 계기로 스웨덴의 커피 소비량이 급부상했다.

351p

1858년 2월에 동아프리카 대열곡에 있는 여러 호수 가운데 하나인 탄자니아호에 도착했다.

->탄자니아호가 아니라 탕가니카호이다. 탄자니아는 탕가니카와 잔지바르가 합해지면서 만들어진 국명이다.

458p

중국 명나라 의덕(宣德) 연간에 제작된 청자 접시와

->의덕이 아니라 선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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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5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1 - 정수일의 세계문명기행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1
정수일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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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0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비해서는 비교적 쉽고 빠르게 읽힌다.

깊이 면에서는 본격적인 아프리카 이야기라기 보다 여행기 쪽이지만 전작인 라틴 아메리카 편보다는, 훨씬 많은 정보를 준다.

아마도 저자가 이집트에서 유학했고, 모로코 대사관에서 일했던 젊은 시절의 경험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이 많이 녹아있는 듯 하다.

특히 아프리카의 여러 정치가들에 대한 현대사 이야기가 유익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알고 있었는데 알제리의 벤 벨라, 세네갈의 상고르, 코트티부아르의 팰릭스 우푸에부아니는 이 책이 아니면 어디서 볼까 싶다.

모로코가 여전히 왕정이라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여러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들의 특징은 전부 일당 독재자이고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가기 어려운 것인가?

이승만과 박정희도 독재자였지만 건국의 아버지였고 경제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오늘날 독재자로만 비난받고 있을 뿐이다.

한국은 아프리카에 비해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룩했는데도 그들은 오직 과만 비난받는 반면,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은 이렇게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단지 외국인의 눈으로 피상적으로 보기 때문인가? 혹은 이른바 진영 논리로 자본주의는 나쁘고 사회주의는 훌륭한 것인가?

만연체라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으나 찬찬히 여행 일정을 편안한 문체로 서술하여 흥미롭게 읽었고 무엇보다 새벽 4,5시면 일어나 일정을 시작하는 저자의 체력에 놀랬다.

벌써 80대인데 대단한 열정이다.

이런 학자가 간첩이었다는 것도 정말 놀랍다.


<인상깊은 구절>

242p

사극에서 보다시피, 한니발은 용감하고 걸출한 군사가이며, 부하들에게 신망 높은 군통수였다. 진지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자고, 전장에서 진공시에는 맨 앞장에, 후퇴시에는 맨 뒤에 서는 솔선수범의 지휘관이었다. 그가 세계 戰史에서 영웅의 반열에 오르게 된 이유다.

485p

"네그리뛰드란 흑인 민족과 흑인 문명의 독특한 공헌과 가치 및 특징을 옹호하는 흑인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 직접 만들어낸 말이었다. 네그리뛰드는 지적인 측면에서 민족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라고 말했다. 사실 이 운동은 흑인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 및 존엄성을 말살하는 프랑스 식민정책의 핵심인 문화주의에 반발해 생긴 자각적 운동으로서 프랑스나 유럽 문화의 우월성이나 배타성을 부정하면서 아프리카 문화의 전통적 가치와 우수성, 그리고 인류 문화에 대한 기여를 주장했다.

524p

지난 세기 1960년대에 독립을 쟁취한 대부분 아프리카 나라들은 독립 직후 약 20~30년간은 독립의 후광 속에 사회 전반에 걸쳐 일정한 변혁을 일으켰으며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독자적 국가 운영에서 일련의 실패와 미흡, 부정이 노정된데다가 국제적으로 금융위기 등 악재가 겹치면서 난관에 부닫치자 외세에 의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이 시기에 코코아와 커피, 목재, 팜유, 고무 등 생산품의 세계적인 수출국이었다. 한마디로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사회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의 급성장에 매료되어 외국 자본의 유치나 외국 영향을 줄이면서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한 것이 문제였다. 민간경제 토대가 거의 없는 이 나라에서 이러한 시책은 정부의 주도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정책 시행 과정에서 실정과 부패가 발생했고, 다변화한 기업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외국으로부터 유치하지 못하였다. 방만한 경영으로 인해 부실기업이 생기고 적자가 누적되어갔다. 긴축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국민의 불만을 야기했다.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ㄷ되다보니 국고는 거덜이 나고, 민생은 불안하고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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