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미술관에서 보는 유럽사 - 유럽의 현재와 과거, 미래가 공존하는 기억의 장소들
통합유럽연구회 지음 / 책과함께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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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 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라 긴장하고 읽었는데 주제가 박물관 미술관이라 그런지 쉽게 잘 읽힌다.

유럽사를 전공한 학자들이 쓴 박물관 이야기라 당시 시대 배경과 역사적 의의를 잘 설명해 주고 있어 도움이 많이 됐다.

특히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같은 흔히 알려진 유명 미술관 외에도 현대에 세워진 박물관들이 흥미롭다.

독일에는 분단과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눈물의 궁전>, <독일역사박물관> <테러의 지형도> 같은 독특한 박물관들이 많다.

두 번이나 세계대전을 일으키고도 유럽 통합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이해된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당시 큰 전투를 기념하는 베르됭 기념관과 캉=노르망디 기념관도 인상적이고, 이민자들을 위한 국립이주사박물관이나 마르세유에 있는 유럽지중해박물관, 네덜란드 국립해양박물관 등도 독특한 컨셉이 기억에 남는다.

중세 문화를 보여주는 클뤼니 박물관이나 바티칸 박물관 같은 고전적인 박물관도 역시 관심이 간다.

아쉬운 점은 역시 도판이다.

박물관 소개보다는 그것을 둘러싼 역사에 중점을 둔 책의 컨셉상 화려한 도판을 싣기는 어려웠겠으나 컬러 사진이 단 한 장도 없어 매우 아쉽다.

한 국가의 국민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

왜 역사를 배우고 박물관을 세우는가?

유럽 연합이 탄생한 후 유럽인을 위한 박물관이 많이 세워지고 있는데 이것은 유럽인은 하나의 공동체라는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다.

우리 역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조상들의 유물이 있는 박물관에 간다.

아직은 세계시민주의 같은 거창한 목표에 도달하기는 어렵겠으나 역사와 국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책의 중간에,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을 북한의 3대 세습과 다를 바가 없다는 주장이 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에 대한 분노의 표현인 듯 한데, 명백하게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과 3대째 부자 세습을 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비정상적인 독재자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탄핵이 되어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해서 당선 과정마저 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가치 판단이 진행 중인 현대 정치사에 대한 섣부른 평가는 한 권의 책에서라면 매우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5p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상속녀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모든 예술품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녀는 예술적 감수성이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토스카나대공국의 새로운 통치자가 된 로렌가와 예술품 양도협정에 서명하며 몇 가지 조항을 내걸었다.모든 예술품은 가문이 아닌 국가에 귀속되어야 하고, 피렌체 시민들의 공익에 보탬이 되어야 하며,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항들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우피치는 단순히 가문의 영광을 빛내기 위한 전시 공간이 아닌 국가 소유의 미술관이자 시민들의 교육기관 그리고 외국인 관광을 촉진하는 경제적 자원으로 인식된 것이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미술품이 토스카나공국의 외부로 반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조항을 넣음으로써 새로운 왕가에 의한 컬렉션의 해체를 막았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 입구에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초상이 걸려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81p

프랑스의 국난 극복과 영광의 재현 과정에 초점을 맞춤에 따라 각각의 살상 무기들에는 단순한 전쟁 도구가 아닌 국난 극복의 수단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이 부여된다. 

 특히 전쟁 포스터들은 전시동원 체제의 단면을 보여주면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강조하는 포스터 속 구호들은 20세기 전반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을 법한 감정들을 현재에 다시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상징들은 프랑스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노동자와 군인이 함께 걸아가는 그림 아래 적힌 "함께 우리는 승리한다"라는 구호는 계급보다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국민 정체성을 강화한다. 

202p

정체성이나 정통성을 찾는 개인이나 집단이 주로 역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초하지 않은 정체성과 정통성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갖는 데 한계가 있으며, 가변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역사란 흔히 말하듯 '재미있는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적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며, 개인과 집단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 이들을 권위로 치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구다. 역사를 둘러싸고 국가 혹은 집단 간에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의 이러한 기능은 대중과의 소통 과정에서 이루어지며, 중등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과 박물관은 역사와 대중이 만나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두 공간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열려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활용을 의도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게 간주된다. 박물관은 다양한 형태의 유물 수집, 보존, 연구라는 전통적인 기능을 넘어서 상설 및 특별전시, 각종 역사 및 문화 관련 행사, 박물관 학습, 디지털 정보 제공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힘으로써 역사의 대중화라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209p

박물관의 현대사 전시는 과거와 현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대중이 접하는 역사란 과거 사료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주관적인 분석과 해석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시대의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현대사의 경우는 역사학자의 권위가 크게 약화된다. 그 이유는 특정 시대를 직접 경험한 개개인이 곧 역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집은 현대사의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관람객에게 정보를 전달하거나 역사학자의 해석을 학습시키기보다는 전시물을 보고 스스로 느끼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국가는 역사 없이, 역사로부터 얻은 경험 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민족이나 전통으로 표현되는 집단정체성은 흔히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인간은 놀랍게도 허구와 상상에 의존하여 집단의 결속을 추구한다. 인간의 이성은 적어도 집단의식에서만큼은 감성에 압도당하는 듯이 보인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에게서 볼 수 없는 대규모 집단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허구를 믿는 능력 때문이고, 이것이 인간을 지구의 지배자로 만든 비결이었다.

252p

가톨릭이 교회의 권위 회복에 집중하는 동안 신대륙 발견과 지동설을 둘러싼 갈릴레이와 교회의 갈등이 알려지면서 유럽은 자연스럽게 계몽 시대로 진입했다. 교황은 과학의 발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장식의 극대화를 추구한 바로크 예술과 건축에 대한 지원은 멈추지 않았다. 바티칸 미술관은 교회가 예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후원한 역사적 성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바티칸박물관은 단순히 교회 유물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98p

15세기 유럽에서는 성직자, 왕과 제후 그리고 귀족과 도시민들, 길드와 여러 단체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민들의 부는 예술작품 생산을 촉진했으며, 가구, 스테인드글라스 창, 식기와 게임 도구 등 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제작되었다. 15세기 내내 부르고뉴인들은 네덜란드와 부르고뉴, 이어서 스페인 사이에 예술가들의 작품활동을 고무했다. 

301p

고전고대와 중세 예술품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17~18세기 일부 특권층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예술품 전시를 공개하는 교육적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는 근대적 박물관과 문화재, 문화유산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특히 '가르치는 국가'의 이념을 선포한 프랑스대혁명 후 근대 박물관은 국가가 주도하여 관장하는 곳이 되었다. 

 19세기는 공공박물관의 전성기였으며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전시를 통한 교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상주의의 확대 및 세계무역의 발달과 더불어 도시가 빠르게 번영하면서 도시민들의 교육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이를 수용하는 데 있어 근대 박물관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오늘날 클뤼니박물관은 프랑스의 박물관들의 지지와 후원 아래 서양 중세에 대한 이해와 유럽인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과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열정적이고 지속적인 역사적 건축물에 대한 관심과 손길은 클뤼니박물관의 위치를 돈독하게 할뿐더러 이 박물관의 다양하고 풍분한 컬렉션은 존재감을 돋보이게 한다.

319p

집단투쟁, 군대, 특히 족외혼으로 꾸려진 가정은 새로운 국가에서 정착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1920년대부터는 학교가 부모를 따라 이민 온 아이들을 새로운 사회에 통합시키고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중국적제도가 시행된 1889년부터 국적을 쉽게 얻게 된 이민자들은 프랑스 정착에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이후 세대를 거치며 프랑스는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나라가 되었다.

<스포츠>와 <종교>, <문화> 또한 이민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스포츠에서는 1998년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우승을 이끈 알제리 이민자의 아들 지단이 결정적인 장면을 연출했따. 한편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이슬람은 '세속국가' 프랑스에서 이민자들의 정체성을 강하게 내비치는 요인이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신도 수가 많은 이슬람은 급속히 증가하는 모스크의 건설과 대외 긴장관계로 세속주의자들과 상당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주사박물관의 상설전시에서는 식민지 출신 이주민의 역사가 다른 유럽 지역 출신 이주민의 역사와 특별히 다르게 취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초대 관장이 말한 "그들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다"라는 취지의 발언이 어느 정도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329p

필진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학자로 구성되었으며, 양국의 언어로 동시에 출간되었다. 양국의 국가수반 모두 공동 교과서가 "양국의 더 친밀하고 긍정적인 관계" 개선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자찬했다. 프랑스는 공동 역사교과서 집필이 "프랑스와 독일 간 화해를 다짐하는 상징적인" 일이라며 높게 평가했다.

(우리도 일본과 이런 날이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웃과 친하게 지내기란 참 어려운 일인데 두 나라의 성숙한 시민의식이 놀랍다)

335p

변화가 제한적이었던 까닭은 베르됭기념관은 프랑스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1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인 반면, 캉-노르망디 기념관은 1940년 6월 22일 파리가 나치에 함락당하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비시 괴뢰정부가 수립되는 등 프랑스가 큰 위기를 겪었던 2차 세계대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캉-노르망디기념관의 콘셉트 변화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독일에 의한 점령 시기에서 독일과의 화해로 나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며 예산도 국가와 민간부문의 공동 재원 마련으로 형성되었던 만큼 아직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남아 있는 민간부문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알 수 없었던 것이다.

(4년 점령도 여전히 적개심이 남아 있다면 36년 식민 지배는 앞으로도 쉽게 화해하기가 어렵긴 할 것 같다 ㅠㅠ)

343p

연방의회는 통일 독일 수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중심부에 대규모의 돌무덤과 같은 추모 조형물을 세움으로써 전 세계에 그들 스스로 자초한 서구 문명의 파국과 단절을 상징적으로 질료화하는 동시에 독일이 저지른 일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에의 의지를 다시 한 번 국내외에 알리게 되었다. 이로써 독일 통일로 인해 불안해하는 이웃나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독일의 위상을 높이는 등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이 식민 지배나 난징 대학살 등에 대해 이 정도의 강력한 반성을 표현하기는 어려운 일일까?)

351p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말~21세기 초 '기념비적인 조형물'을 통해 한 시대를 기억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선보임으로써 국가적, 국제적 차원에서 홀로코스트 투어리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세월호도 그렇게 되려나?)

378p

과학은 주로 자연에 대한 심도 깊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과 부유층에 의한 체계적인 지식이지만, 기술은 편리성을 추구하는 장인계층의 경험과 사고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실상 별개의 분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18세기 말 상업 발달로 형성된 자본이 기계력과 공장제 생산에 기반을 둔 경제체제와 결합하면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 그리고 자본이 융합되었다. 

 유럽에서는 대부분의 학문이 수도원과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과학은 학회라는 집단을 통해 발전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닌 사상적 집단에 대한 통제와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에 대한 종교계의 억압 및 실험을 도입한 갈릴레이의 현시적 변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전통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학회는 곧 소멸되었다.

385p

그레구아르 신부는 과학기술박물관이라는 장소가 프랑스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술공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문화적 개념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산업을 박물관과 연계시킨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을 인간 정신행위의 산물이 결집된 장소라고 했던 근대 계몽주의의 백과전서식 정신에 기반하여, 과학박물관은 문화적 기능과 교육적 기능 그리고 유희적 기능을 종합적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19p

뮈셈이 바라본 소통과 상호작용의 장인 지중해는 난민들의 사고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되고 있다. 아무리 뮈셈이 박물관의 구성을 통해 유럽과 지중해 문명의 상호작용을 자연스럽게 설명하면서 관람객에서 다가간다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민족주의적인 세계관, 다양한 문화의 공존을 불편하게 여기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이 대중의 공감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를 일순간에 제거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다.

434p

유럽이 하나라고 하는 공동체적 '유럽 인식'은 공동의 역사의식과 정체성 없이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법과 규정만으로는 장기적인 결속을 다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유럽인이라는 인식을 통해 앞으로 공동체의 발전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향후 공동체 발전을 주도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통합의 동인을 분명 정치적, 경제적 통합 논리만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450p

박물관과 유로피아나라는 2개의 플랫폼은 모두 지식 자체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강조하며, 이곳에서 벌어지는 담론들의 유용성이 사회적 관계에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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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9-01-1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둘러보네요. 여전히 즐독하시는군요. 건강히 잘 지내시길요^^

marine 2019-01-16 16:20   좋아요 0 | URL
아, 반갑습니다~~
열심히 읽고 싶은데 사는 게 바빠 한동안 못 보다가 새해맞이로 열심히 읽고 있어요^^

여울 2019-01-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직장생활은 어떠신지요^^ 즐거운 독서되길 바랄께요~~~^^

갈릴레이 2019-03-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감상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중세 유럽의 문화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49
이케가미 쇼타 지음, 이은수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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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런 짧은 분량의 일본 문고들을 보면 확실히 일본 사람들은 오타쿠적인 기질이 있고 우리보다 훨씬 더 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으며 무엇보다 대단한 출판 대국인 것 같다.

trivia 라는 시리즈 제목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궁금한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풀어 놓는다.

사실 다른 주제들, 이를테면 영국 집사나 메이드, 귀족들의 삶, 정원문화 등은 아주 재밌고 유익했는데 이 책은 밀도 면에서 다소 떨어지긴 하다.

분량도 230 페이지로 짧은데 한 쪽은 정리를 한답시고 이상한 도해와 요약문을 실어서 난삽하다.

고등학교 문제집도 아니고 왠 요약본인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인들의 기본적인 가치관과 당시 시대상을 쉽게 설명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국가의 치안이 발달하고 이성적인 개인들이 사는 오늘날과 전통사회는 확실히 매우 달랐던 것 같다.


<인상 깊은 구절>

24p

현대 사회에서도 자연 재해와 화재, 그리고 그에 따라 일어나는 기근과 혼란은 극복할 수 없는 비극이다. 하물며 간단한 기계 장치와 인력, 동물의 힘에 의존하며 정보전달 수단도 발전하지 않았던 중세 세계에 있어서 재난은 거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대처하기 힘들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강대한 부조리함에서 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내려진 신의 경고 또는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회와 수도회는 이러한 재난을 교묘하게 자신들의 강론에 도입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를 봐도 당시 사람들이 재난에 대해 취할 방도가 신에 대한 속죄밖에 없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기도와 의식은 사람들의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교회와 수도회가 행하는 빈민 구제는 재난으로 인해 집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다. ... 사람들은 기근을 신의 시련이라 생각하여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단식과 청빈한 생활을 장려했다. 이는 실제로 기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특훈이기도 했다.

30p

중세 초기에 일어나는 범죄에 대한 대처는 국왕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각 지자체가 주최한는 재판소에 판결과 형의 집행을 맡겼다. 또한 무력으로 자신의 영역을 소지하는 자가 자신의 영역을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 의무이기도 했다. 설령 빈곤한 집안의 가장이라 해도 자유민으로서의 신분이 보증되어 있다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권리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경찰권이 발달하지 못했고 재판에 죄인을 출두시키려면 원고 측과 그 친족이 추적해야만 했던 상황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복수를 무조건 허락해버리면 피해자 간에 피튀기는 혈투가 끊임없이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착안해낸 것이 보호 구역이라고 하는 일종의 안전 지역이었다.

32p

중세 세계의 형벌은 범죄자를 갱생하여 범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범죄를 억제하는 형태였다. ... 조사능력이 부족했던 중세 세계에서는 공정한 판결이 내려졌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고문에 의한 자백과 결투 재판, 신명 재판 등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징역 같은 자유형은 없었으며 감옥은 재판이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범죄자를 구속하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위생이 불량하고 식량 사정이 나빴던 감옥 생활은 수감된 범죄자를 크게 괴롭혔다. 

182p

로마 가톨릭 교회를 시작으로 하는 그리스도 교회는 그 신앙을 확대하기 위해서 예부터 내려온 이교적 신들에 대한 신앙을 타파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는 고대 신앙을 축소하여 자신들의 가르침 안에 도입함으로써 고대 신들을 믿던 민중을 그리스도 교도로 개종시켰다. 원래 우상 숭배가 금지된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와 마리아상을 세우게 된 것도, 부활설제 수목을 이용하는 것도 이교적 신앙 의식을 도입한 여파이다. 유일신 외에 성인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신앙도 이러한 이교적 문화의 흔적 중 하나였다. 성인은 각 지역마다 숭배하던 신들의 흔적 또는 민간 설화 등의 주인공이다. 그들에 대한 전승은 그리스도교적 훈화로 바꿔치지 당했으며 그 기적은 신의 힘이 초래한 것으로 변했다.

190p

로마 가톨릭 교회가 유럽을 지배했던 중세는 다수의 신학자들이 세계와 사상의 모순을 해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연구와 해석을 하던 시대이기도 하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다고 일컫어지는 연옥도 그러한 신학자의 몽상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세계였다. 연옥의 존재는 신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커다른 구원을 가져왔다. 그리스도교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고리대금업조차 생전의 선행에 따라서 정화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것이다. 또한 당연하게도 죄를 씻고 연옥에 들어가도록 중개해주는 성직자들의 지배력이 강화되었으며, 수입 또한 증가하게 되었다.

192p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해낸 위대하고도 선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는 수많은 부조리함과 악의가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고통을 신이 자신들에게 내린 원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여 그 모순을 해소하려고 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의 악을 짊어져야 하는 존재를 몽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악마였다. ... 다양한 자연재해와 전염병도 종종 신의 분노가 아니라 악마의 소행으로 여겼다. ... 현대 시점에서 보자면 히스테리와 정신 착란 부류라 생각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악마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악마 퇴치는 어디까지나 의식에 지나지 않지만 정신적인 안정을 주어 실제로 효과도 봤다. 

196p

애초에 기사는 혈통으로 이루어진 귀족 계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직무에 의해 귀족 계급으로 편입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206p

광대는, 태어나면서부터 핸디캡을 안고 있는 인간을 왕과 영주가 소유물로 삼은 경우와, 그들의 몸짓과 언동을 흉내 내는 직업 광대가 있다. 광대는 멍청하다는 인식이 있기에 왕이라 해도 무례한 발언이나 비판이 허락되었다. 교회는 순진무구를 가장하여 저속한 기예를 하는 직업 광대를 악덕한 존재로 치부한다. 

224p

싸우는 사람들이 권력자였던 사회에서 전쟁은 일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보는 국가 간의 섬멸전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중세 전쟁은 대부분이 소규모였다. 페데(사적 전투)라 불리는 복수권을 방패로 삼는 약탈은 많은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중세시대를 관통하는 경제 활동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강해지자 십자군 등의 종교 전쟁, 국내외의 주권 분쟁도 벌어지게 된다. ... 이문화권과 이단에 대한 공격을 제외하면 전쟁은 유희적인 면도 보였다. 야전이라면 회전할 지역과 시간을 지정하여 상대하고 일몰이 되면 자신의 진지로 물러났다. 또한 몸값을 받을 수가 있기에 전투 중에 사망한 것만 아니라면 기사는 산 채로 생포됐다. 경기같은 느낌이 나는 야전에 비해 농성전은 지혜와 무력을 집중하는 총력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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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 아름다운 우리 땅 그림 순례, 도원을 꿈꾸다 조선 땅을 만나다
이태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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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 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에 비해 이야기는 술술 잘 읽힌다.

제목만 보고 단순히 옛 그림에 나오는 명승지를 찾아 가보는 답사기 같은 포맷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에 대한 본격적인 회화론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정선으로 대표되는 18세기의 진경산수화는 그 전의 관념산수화와 달리 우리 땅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여 관념성을 탈피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는 정선의 그림들이 실제 풍경과 거의 일치하지 않음을 지적한다.

정말로 사생에 중점을 둔 실경산수화는 그 다음 세대인 김홍도에서 만개한다.

정선은 화원이 아닌 사대부였기 때문에 풍경을 똑같이 그리기 보다는 신선이 살고 있는 선경이라는 이상향을 추구했고 명승지를 본 후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의성에 중점을 뒀다.

저자는 옛 그림과 실제 풍경을 카메라로 비교하여 얼마나 비슷한지 통계를 내기까지 한다.

진경산수화라는 정선의 경우 실제 풍경과의 일치도가 50% 미만이고 김홍도는 80%가 넘는다.

저자는 정선이 단순히 풍경을 사실대로 묘사하지 않고, 풍경에서 받은 느낌을 확대시켜 그 뜻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음을 지적한다.

소재는 조선 땅이었으나 여전히 풍경 그 자체보다는 성리학자가 추구하는 정신 세계의 조화로운 추구가 목표였던 셈이다.

책에 잠깐 언급되지만 세잔의 생 빅투아르 산 풍경화와의 비교가 인상적이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 문인화가들은 예술 자체의 표현보다는 그 정신에 더 중점을 두는 오늘날의 추상화와 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김홍도의 그림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수많은 그림들이 소개되는데 도판에 절반도 실리지 않아 너무 아쉽다.

강희언이나 이인문 등의 산수화도 정말 훌륭하고 후대의 소정 변관식와 청전 이상범의 현대적 금강산 그림도 너무나 인상적이다.

채색을 겸비한 현대 수묵화의 매력이 대단하다.

마지막에 실린 선조의 사위 신익성에 대한 화론도 흥미롭게 읽었다.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의빈이었으나 대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기 때문에 경화사족으로써 시서화에 탐닉하고 문화를 후원하면서 예술을 즐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소개된 그림 솜씨도 남다르다.

좀더 많은 자료들이 발굴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19p

겸재가 그린 진경의 현장을 답사하다 보면 과연 실제로 그곳을 보았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닮게 그린 예가 거의 없다. 심지어 가까이 살던 장동팔경을 그린 작품도 실경과 크게 차이가 난다. 보지 않고 그리거나 감정이 지나쳐 과장이 심한 '구라체'라 일컬어도 될 정도다. 혹은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데서 오는 기초 묘사력의 결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 이로 보면 겸재가 실제 풍경을 통해 현실미보다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 소동파가 '회화에서 대상의 닮음, 곧 형사를 강조하는 것은 어린애 수준'이라 폄하했던 점이나, '神似'나 '寫意'의 정신성을 강조한 문인화론으로 접근할 수도 있겠다. 겸재 진경 작품의 변형미를 대할 때면, 군자가 산수를 사랑하는 까닭을 설파한 곽희의 '산수 보는 법'이 떠오른다.

24p

'우리 19세기 회화가 단원 화풍을 한 단계 발전시켰더라면' 하는 가정을 떠올릴 만큼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단원 이후에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가 대표작으로 손꼽히듯이, 망막에 어리는 대상보다 심상을 표출해야 한다는 서권기, 문자향의 남종문인화풍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39p

우리의 수묵산수화는 그 재료가 갖는 생래적인 특성 때문에 대상 풍경의 색감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재 심사정은 <삼일포>를 그릴 때 물과 하늘색을 고려했는지 푸른 옥색 종이를 선택했다. 하지만 갈필의 피마준 선묘와 엷은 담채로 그린 화면에서는 막상 그런 미인의 맛이 나지 않는다. 실경에서 만나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 녹색 숲, 그것들이 비친 호수의 색감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선이나 심사정이 그린 삼일포 그림의 약점은 1999년에 서양화 재료로 그린 강요배의 <삼일포>와 비교하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이런 강요배의 채색화가 삼일포의 아름다움, 그 진경의 맛을 보게 해준다. 서양화 안료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44p

먼저 대상의 외모를 재현하는 일이다. 동양회화론으로는 '형사'에 해당하겠다. 다음으로 그보다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 드러내기, 곧 표현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대상에서 받은 감정표출을 중시하는, 동양회화론의 '사의' 개념과 흡사하다. 이렇게 보면 기억으로 그리는 일은 사의성에 치우치기 쉽다. 반면 실경 현장에서 스케치한 그림은 형상을 닮게 그리는 형사 기량이 중요하다. 

87p

뛰어난 회화성은 선배인 정선이나 동료화원 김홍도의 총석정 그림에 뒤지지 않는다. 먼 수평선부터 총석정까지 일렁이는 동해의 파도를 생생하게 표현한 그림이다.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인 화원으로 김홍도의 명성에 가려 있다. 하지만 <단발령망금강>과 <총석정> 두 진경 작품들의 조형미를 보면, 이인문이 김홍도보다 낮게 평가받을 이유가 없다.

94p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는 조선의 대지, 나아가 조선의 명승을 통해 더 나은 이상을 꿈꾼 자들의 회화형식이다. 그 중심이념은 물론 성리학이었을 터이고 정선이 역리를 원용하여 그림을 그렸다는 증언과도 맞물린다. 또 정선이 고위관료로서 당시 집권층인 서인-노론계 문사들과 친밀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130p

정선의 금강산 전경도나 부분 명승도들이 실경과 다른 것은, 앞서 설명한 것처럼 외형보다 현장에서 느낀 감정의 리얼리티와 첫인상을 형상화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감식 화면구성과 대담한 변형과 생략, 리듬감 있게 반복되는 붓질은 천석의 울림, 즉 기암 사이에 부는 바람소리와 계곡에 여울지는 소란스런 물소리를 화면에 담으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이는 신선이 사는 선경을 의미하는, 그래서 당대 사대부들의 은일와유 취미에 걸맞은 진경산수 개념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140p

진경산수와 남종화풍을 개성미 넘치게 융화시켰던 18세기 선비화가들은 19세기 중엽 이후 구체적인 대상 없이 중국 문인화를 모델로 관념적 사의와 문기만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버린 김정희 일파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252p

그렇게 도형화된 지도가 진보한 만큼이나 회화에 버금가는 그림지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지닌다. 도형식 지도가 과학화되면서 그림지도의 형식미는 산천을 사람의 몸과 같이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인식했던, 인간과 땅을 동일시했던 전통적인 자연관을 더욱 잘 반증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우리 국토 곳곳을 빠짐없이 서술한 크고 작은 그림지도가 현지 많이 제작되었다. 나름대로 보기 좋고 이해하기 수월한 그림지도 방식을 창출한 까닭에 당대인들이 추구한 자연과의 친화력을 읽을 수 있다. 

267p

이처럼 정선은 실경을 형사하기보다는 실경에서 받은 감정적 사의를 중시했다. 대상의 외형은 닮게 그리지 않았지만, 실경에서 받은 인상을 정확히 쏟아내려 했던 것이다. 

327p

김윤겸은 명문세도가에서 서얼로 태어나 서출의 사회적 자각과 진출이 두드러지는 18세기에 활동한 화가다. 서출에 대해 개방적이고 학예에 돈독했던 집안의 영향 아래 다행히 화가로서 자신의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김윤겸이 기행과 사경으로 진경산수에 일가를 이룬 것은 집안에 전승해온 유묵, 그리고 아버지 김창업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명승기행과 세속을 벗어나 자연에 은거했던 사상적 배경도 간과할 수 없겠다. 당대의 능력 있는 사얼 중 일부는 사회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데 비해, 김윤겸 또한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행적이나 기록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얼들의 소극적 행동반경과 그가 화업에 열중한 대신 학문이나 문학 분야에서는 두드러진 존재가 아니었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431p

이들에 의해 일반화되어 유지해온 김홍도 화맥은 근대회화에서 실경산수가 부흥하는 데 기여한 비중이 자못 크다. 즉 말기에 침잠한 상태로 계승된 김홍도의 진경 표현감각이 근대에 향토적인 소재와 색채를 구사한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에게서 새로운 양식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488p

17~18 세기에 새롭게 변신, 창출되는 실경산수는 중국에서 명과 청이 교체된 이후 조선에서 형성된 주자종본주의 내지 소중화적 자긍심으로, 정권의 중심세력에 부각된 서인-노론이 이를 자극하고 발전시켰음을 무시할 수 없게 한다. 17세기 실경산수의 사례가 서인-노론에 집중되고 특히 작품으로 남아 있는 사례가 안동 김씨 집안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과 정선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정선이 화가로서 위치를 다지게 된 계기가 김수항의 장자이며 집권 노론계의 주요인물인 김창집과 이웃하여 살면서 그의 천거를 받아 비롯되었다고 전해오기 때문이다.

533p

신익성이 17세기 변혁기 새로운 문예의 움직임을 선도한 문인 중 한 사람임을 적절히 시사한다. 평생 유람객으로 자연에 대한 흥신을 녹여낸 시와 기행문, 명대 문예풍 수용과 개성, 그리고 장서와 서화수집 취미, 여기에 덧붙여 서화론과 서화작품은 신익성의 문예사적 위상을 재론케 한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로서 격변기를 겪었다. 대내외로 복잡하게 얽힌 정세변화 속에서 인조반정 참여와 척화로 정치적 명분을 세우고, 조선 후기 사족문화의 한 전형이 되었다. 관료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연에 귀의하여 탈속한 삶으로 문예에 대한 끼를 맘껏 쏟아냈던 것이다. 또한 이는 탈속한 물외인으로서 이룬 것만은 아니었다. 광주 별서의 논밭과 두미 어장의 튼실한 경제적 기반 아래 '반은 사림에 반은 저잣거리'에 걸쳐 있던 현실인이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생각한다.

536p

진산수 사생론과 실경화 <백운루도>는 인조 연간을 대표할 만한 회화 사료다. 한국회화사에서 신익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새로이 짚어보게 한다. 또 이들의 참신한 시각과 예술적 성과, 신형식 창출은 커다란 변혁기인 17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신익성이 역사의 소용돌이를 딛고 전국 명승을 유람하고 광진과 두미 사이 한강을 오가며 성리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서화비평가와 수장가로서, 서화가로서 조선 문인의 자긍심을 꾸준히 절차탁마한 결과일 터이다. 신익성은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던 문인화가지만, 조선 후기를 그가 활동했던 인조 연간부터 잡아도 될 만큼 재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537p

이미 16세기 후반에 경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구체제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한 바 있는 율곡 이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이 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조선 후기 사회를 예시하고 있었다, 뒤이어 일어난 병자년(1636)으로 인하여 일시적 좌절이 있었지만 순정 성리학도를 자처한 사림이 정권 담당자가 됨으로써 양란으로 구체제가 와해된 조선사회를 순수 성리학 이념으로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림이 되는 일차적 요건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있었기 때문에 신분적 한계나 혈연과 가문이라는 요소가 이차적으로 밀려난 느낌마저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제시된 제반 사회경제정책이 모두 이들의 정치이념에서 도출되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이야말로 조선 후기의 기점이 될 수 있는 내재적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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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수 전쟁 - 변경 요서에서 시작된 동아시아 大戰 경희 고고학 고대사 연구총서 4
이정빈 지음 / 주류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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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페이지 정도 되는 작은 분량인데 사료 인용이 많고 한자어를 그대로 표기해서 읽는데 다소 어려웠다.

대중서로 펴낸 게 아니었는지, 한자가 한글 표기 없이 그대로 인용되어 당황했다.

<돌궐유목제국사>에서도 읽은 바지만, 유목민족들의 교역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고구려와 수의 전쟁도 요서 지방의 교역권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요서라는 지역 설정이 중요하다.

저자는 국경 대신 변경지대라는 표현을 썼다.

전에 다른 책에서도 이런 용어를 본 적이 있다.

고대 사회는 오늘날처럼 국경 개념이 확실한 것이 아니고 특히 민족국가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민족들이 혼재해 변경 지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하의 동쪽, 즉 요동은 고구려의 지배권이 확립됐으나 그 서쪽인 요서, 즉 동으로는 요하로부터 위로는 시레무렌까지, 서로는 난하까지 영역에서는 거란, 말갈, 돌궐 등의 여러 민족이 혼재되어 있었고, 북위 시절에는 고구려도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때 유목민족과 교역권을 갖고 있었다.

그 후 수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요서로 밀고 들어와 돌궐을 복속시키면서 고구려의 교역권을 침해하자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으로 대표되는 신진귀족 세력들이 이에 반발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영양왕도 전쟁을 막기 위해 조공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수 역시 북방을 평정하기 전에는 잠시 평화 모드를 유지했으나 계민가한의 돌궐이 수의 세력으로 들어온 후 태도를 바꿔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했다.

계민가한의 장막에서 마침 순행을 나온 수 양제와 고구려 사신이 마주쳐 조공 체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 정책을 펴는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 사건은 유명하다.

저자는 꼭 이 사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게 아니라 돌궐 복속 전에는 수가 잠시 침공을 보류했고 이들을 평정한 후 공격의 명분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계민가한 역시 수나라와 고구려 양쪽을 저울질 하다가 고구려 사신을 수 양제에게 오픈시켰다고 본다.

고구려 원정은 결국 을지문덕과 당시 왕제였던 건무, 즉 영류왕이 잘 막아내 오히려 수나라가 망하고 만다.

재밌는 것이, 원정의 보급을 맡았던 사람이 당 고조 이연이었다고 한다.

그 후 당이 중원을 통일하면서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고 당 태종 역시 실패한 후 신라와의 협력을 통해 마침내 그 아들인 고종 때 망하고 만다.

요서라는 변경지대의 정의와, 유목민족과 농경국가의 교역권이라는 관점에서 본 고구려-수 전쟁이 무척 흥미롭다.

특히 수나라 침공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만 유명한데, 다음 왕위 계승자였던 영류왕이 500 결사대를 이끌고 10만 대군을 평양성에서 막아낸 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과연 왕위를 이을 만한 지도자인데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살해당하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유목국가의 군주권은 물자의 분배권을 통해 확보되었고, 따라서 군주권의 확보를 위해서는 교역이나 약탈과 같은 대외적인 성과가 요구되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해 보면 타발가한 재위 무렵 5가한 내지 그의 지지세력은 대외적인 성과를 과시해 차기 군주로서의 적격자임을 내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경쟁이 주변 세력과의 갈등으로 표출되었다고 해석된다.

93p

평원왕은 수 문제의 새서를 받고 외교문서를 보내 사죄하고자 하였고, 곧이어 즉위한 영양왕은 수의 책봉을 수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고구려의 행동은 수의 우위를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수의 고압적인 태도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권을 보장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층 수세적인 입장에서 기존의 세력범위를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590년 수 문제의 새서를 받은 이후, 한동안은 수와의 관계개선에 노력하였다고 판단된다.

116p

590년대 중반 수의 지배층은 요서의 경제적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일찍이 지적된 것처럼 요서는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구려는 요서의 동부에 세력범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볼 때 수의 관롱집단이 고구려 공격을 구상한 것은 요서의 교역권과 관련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5세기 이후 고구려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적 국가로서 주변 諸國의 교역권을 장악하고 있었다고 보면, 관롱집단은 비단 요서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교역권까지 장악하고자 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598년 고구려의 요서 공격에 수의 관롱집단이 즉각적인 반격을 주장하였고, 대규모 전쟁에 나섰다고 해석된다. 

122p

고구려는 요서를 통해 내륙아시아의 유목세력과 교섭하였는데, 수가 요서를 장악하고 내륙아시아의 제세력을 통제한다면, 고구려는 국제적으로 고립될 처지에 놓이게 될 수 있었다. 더욱이 5세기 이후 요서는 고구려의 안전판에 비견되듯이 그의 상실은 고구려의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주총관부의 세력확장은 고구려를 압박했다고 생각된다. 즉 요서에서 고구려의 군사력 실력과 세력을 내보임으로써 제종족의 이탈을 방지하고, 고구려와 내륙아시아 유목세력의 통로를 유지하고자 하였다고 이해된다. 

138p

603~604년 이후 수는 요서에 진, 수를 설치, 정비하며 동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598~607년 고구려와 수의 우호관계는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한다. 수의 동진은 고구려의 세력범위를 잠식해 감으로써 가능했을 것으로, 고구려의 위기의식은 차츰 고조되고 있었고, 이로 인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605년 수 양제가 즉위하면서 양국 간에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었다.

144p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이 수를 자극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수는 고구려와 동돌궐의 교섭을 공적 조공책봉질서의 외부에서 진행된 사적 외교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사적 외교행위를 묵인한다면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앞으로도 계속 도전받을 수 있었다. 

156p

계민가한은 고구려의 사신을 숨기지 못해 양제에게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보다 계민가한은 양제가 방문할 때까지 고구려 사신과 교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는 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고구려의 사신을 공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 고구려는 동돌궐을 통해 변경지대의 제종족과 불필요한 갈등을 없애길 바랐을텐데, 그래야 서방 변경지대에서 진행되고 있던 수의 동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돌궐과의 확고한 동맹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대립은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166p

요서의 진, 수는 '유성 밖의 둔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진, 수의 설치와 같은 수의 요서정책은 북방정책의 일환이었다고 이해된다. 그 목표는 동북 방면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였을 것이다.

 양제의 북방정책은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될 만큼 국가운영에 큰 부담이었다. 예컨대 청해성, 신강성 지역의 진, 수는 둔전만으로 유지가 어려웠고, 이에 서북의 군현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고, 그 결과 서북 군현의 농업생산마저 곤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점은 동북 변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그렇다고 하면 양제대의 북방정책은 변경지대의 정치, 군사적 안정만 아니라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즉 서북방으로는 토욕혼을 공격함으로써 서역과의 교역로를 개척하고자 하였다면, 동북방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함으로써 서역부터 동북아시아에 이르는 교역로, 다시 말해 실크로드-오아시스로를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74p

수에서 교역과 대외전쟁에 적극적이었던 것이 양제만이 아니었다. 예컨대 598년 고구려에 대한 반격시도나 605년 임읍 공격은 관롱집단이 주도하였다. 

 하지만 양제의 즉위 이후 대외전쟁은 대부분 그가 주도하였다. 이를 통해 양제는 관롱집단을 비롯한 주요 정치세력을 통제하고 집권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양제는 제위계승 분쟁을 통해 즉위하였고, 이에 정통성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유목사회 계통의 군주는 이러한 불안정한 제위 계승의 한계를 대외적인 성과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양제의 고구려 공격 역시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수의 고구려 공격계획은 관롱집단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이제 양제의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전유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수 양제의 고구려 공격은 동북아시아 교역권의 장악을 목적으로 구상되었고, 그 안에는 황제권의 강화란 양제의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양제는 612~614년 고구려 공격이 실패하고, 신료의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된다. 황제권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228p

619년 당은 장안을 비롯하여 중원지역의 요지를 차지하였다. 그런 만큼 중원지역 안의 여러 세력과 비교해 상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동아시아 최강의 강자는 당이 아니라 동돌궐이었다. 

 사실 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십여 년을 제외하면, 6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중원왕조가 아니라 돌궐이 주도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당이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주도하리란 전망이 확고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구려는 동돌궐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국제질서가 확립되는 데에도 경계심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고구려와 당의 우호관계는 동돌궐 견제란 공동의 목적 속에서 수립되었다고 생각된다. 

247p

책봉호의 수여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조응한 것으로, 이제 당은 명실상부한 책봉-조공관계를 요구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고구려에 당에 책력을 요청한 사실은 그와 같은 대외정책의 변화에 호응한 것으로, 이로써 양국 관계는 점차 변화하였다고 파악된다. 특히 620년대 후반 이후 당이 동돌궐을 제압하고 동아시아 최강자로 떠오르자 고구려는 한층 순응적인 모습을 보였다. 경관의 철거는 그 연장선생에서 양국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판단된다. 

254p

요서 서북부의 거란 諸部 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수가 경쟁하였다. 그럼에도 요서 제종족에 대한 수의 영향력은 차츰 증가했다. 양국과의 우호관계 역시 지속되기 힘들었다.

 590년대 후반 고구려는 요서에서 수의 세력확장을 경계했다. 수의 세력범위에 속한 제종족에 대한 군사행동까지 취했다. 그러나 수가 진까지 병합하고 동아시아 최고의 강국으로 부상한 589년 이후 고구려의 요서정책이 팽창 위주의 것이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고구려는 수의 우위를 인정하고 양국관계의 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기존의 세력범위를 보장받고자 했다. 

255p

607년 고구려는 동돌궐과 교섭했다. 이는 수 중심의 조공책봉질서를 위반한 사건으로, 향후 수의 전쟁의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수의 전쟁 명분이 곧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아니었다. 수는 고구려의 동돌궐 교섭에 위기의식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을 내비치면서 고구려 국왕의 입조를 요구했다. 위기의식을 가진 쪽은 고구려였다. ... 고구려의 여러 귀족세력은 전쟁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인력과 물자를 부담하였는데, 이는 요서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세기 이후 영역확장과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한계를 보이며, 요서정책과 요서를 통한 교역의 중요성이 한층 높아진 까닭에 전쟁을 감수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이다. 고구려-수 전종앤 수의 고구려 공격에서 비롯되었지만, 한편으로 고구려 지배층의 정치적 선택이 작용하고 있었던 셈이다. ... 645년 고그려-당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당의 동진은 급진적이지 않았다. 고구려 역시 무리한 세력확장은 피했다. 변경 요서를 사이에 둠으로써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요서를 둘러싸고 고구려와 당 또한 경쟁했고, 이는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 

283p

이와 같은 병력규모의 증가는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를 기반으로 하였다. 3세기 중반 이전까지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병력을 구성하였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병력동원의 대상을 일반 民으로 확대하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시대의 병종구성은 신분과 무관치 않았다. 대체로 기병은 지배층이 보병은 피지배층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4~5세기 새롭게 병력으로 동원된 민은 주로 보병을 구성하였다고 짐작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이후 고구려 병력동원 대상의 확대는 보병의 증원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추정은 4~5세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보병과 기병의 비율이 3:1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다. ... 6세기 중반 이후 쇠뇌와 아울러 장궁이 보급되고 운용된 것은 보병의 수적 증가만 아니라 그 전술의 비중도 높아진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 이와 같은 보병의 확대는 중앙집권적 군사조직의 정비를 전제로 하였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고 운용하기 위해서는 중앙의 통제력이 요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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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attack 2019-06-13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리즈 명칭대로 ˝연구총서˝니까요.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 개정판
김봉렬 글, 관조스님 사진 / 안그라픽스 / 201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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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좋고 글고 간결하고 읽기 편안하다.

보통 저자가 직접 사진을 찍는 경우가 많아 이런 종류의 기행문은 사진이 아쉬운데 이 책은 전문 사진 작가에게 따로 의뢰해서인지 절을 소개하는 사진들이 아주 시원하고 좋다.

다만 큰 사진은 한두 장이고 나머지는 도판들이 작아 아쉽다.

책이 200 페이지 정도로 적은 분량이라 사진을 좀더 큼직하게 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저자가 불교 신자인 듯 한데, 절을 단순히 기행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불교라는 종교적 관점과 사찰을 함께 생각해 글마다 애정이 있고 불교에 대한 이해도 같이 전달하고 있어 유익했다.

특히 불교와 조형예술이라는 마지막 해설이 참 좋았다.

저자의 표현대로 유교는 형이상학적 관념성, 추상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사실적 조형주의를 추구하는 불교와는 전혀 다른 미감을 갖고 있었듯 하다.

화려한 고려 청자가 담박한 조선 백자로 변하는 것만 봐도 쉽게 이해가 된다.

앞서 읽은 "조선왕실 원의 석물"에서도 느낀 바지만 확실히 조선은 조각 측면에서는 수요가 적어서인지 기술적인 면에서 많이 퇴보한 것 같다.

석굴암과 능에 서 있는 석물을 비교해해 보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 수 있다.

서양에서 조형미술이 발달한 것도 기독교가 숭배의 대상을 눈으로 보여주는 종교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103p

일본의 사찰들에도 내부에 토착적인 신사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초심자들은 불교의 종교적 정체성이 무엇인가 의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그만큼 너그러운 포용력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토착 신앙들을 흡수할 수 있었고, 국제적 거대 종교로 성장하면서도 기존 사회와 충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지역의 주도적 종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도적 종교로 성장한 것은 그 종교가 보편성이 있고 고등종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토착화 문제는 포교에 도움이 되나 교리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 가톨릭이 처음에는 제사 문제와 충돌하지 않고 중국에 선교 사업을 진행했으나 후에 우상숭배로 여겨져 박해를 받았던 것과 비슷한 예이다.)

성리학적 이상을 통치 이념을 삼았던 조선시대가 되면, 한국 불교는 극심한 탄압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고려시대의 불교적 전통만을 고수한다면, 교단은 물론 개개 사찰마저 사라져 버릴 환경이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불교의 포용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서산대사는 선교 합일은 물론, 유불선 삼교의 통합 이론까지 제창했다. 이미 세속의 사상과 풍속이 유교화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유교를 포용하려는 노력을 불교의 변질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는 대승적 목표를 생각한다면 사회와 유리된 불교란 무의미하다. 따라서 서산대사의 삼교합일 노력은 불교 자체의 생존 전략일 뿐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중생 구제라는 불교의 존재 목적을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107p

흔히 조선 후기는 불교의 쇠락기로 여기기 쉽고, 따라서 이 시기의 불교 건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보잘 것 없다고 평가하기 쉽다. 그러나 현존 불교 건축의 95% 이상은 모두 임진왜란 이후의 것으로, 조선 후기를 불교 건축의 또 다른 융성기였다. 물론 불교시대인 고려조와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불교계에서는 자발적인 노력으로 많은 가람과 불전들을 재건했었다. 흔히 조선 후기의 불교는 종파도 교단도 없고, 계통적인 법맥도 찾기 어려운 통불교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한다. 그만큼 불교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들이 극한적으로 어려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찰 내에는 대중적인 모든 신앙들이 수용될 수밖에 없었고, 그래야만 몇 안 되는 인근 신도들의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사찰의 면모를 지킬 수 있었다. ... 이러한 수탈 속에서 사찰이 살아남는 방법은 조직화된 수도 생활뿐이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가급적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도록 건물들을 방어적으로 지울 수밖에 없었다.

117p

이 지적인 보살은 원래 귀족적 풍모가 강했다. 조선시대에 오면, 불교의 주 신도층을 구성했던 농민들은 지식적인 문수보살보다 대중적인 관세음보살에게 더 큰 의지를 했고, 관세음을 위한 원통전이나 관음전은 지어졌지만, 문수전은 극히 드물었다.

175p

이전의 사찰들에서는 (불국사가 대표적으로) 가람 전체가 불국토를 상징하도록 구성되었지만 이제 그 상징화의 범위가 법당 내부로 축소되었다. 그만큼 불교세가 위축되었음을, 그러나 정토에 대한 희구는 본질적인 소망임을 보여준다.

196p

선암사의 승방들이 보존된 것은 스님들의 생활이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암사 스님들의 노력과 수행 생활이 없다면 선암사의 그 아름다운 승방들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승방 건축은 왜 아름다운가? 거기에는 스님들의 치열한 수행과 체계적인 생활과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204p

이 사회적 사상은 불교의 자비 정신으로 승화되었고, 고대 인도의 재편기에 사회적 실세였던 거상들과 부호들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새로운 사회적 이상으로 수용되었다. 이 자비와 평등의 사상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치면서 '대중구원, 사회구원'의 대승불교로 심화되어 소수 지식층의 종교가 아닌 대중 종교로 확대되었다.

207p

사찰의 건축 구성이 복잡하고, 건물의 장식이 화려한 까닭은 조형적 감동을 통해서 종교적 신심을 끌어내기 위함이다. 물질과 관념을 엄격히 구분했던 유교적 세계와는 달리, 불교도에게 물질은 곧 관념이고 관념이 곧 물질이다. 존재와 무 사이의 차별이나 물질과 관념 사이의 이원론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적 인식론은, 감각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조형 예술을 발전시킨 근원적인 이유가 되었다. 

223p

조선 사찰은 외래 종교 건축으로서의 이국성을 탈피하여, 한국 고유의 성격을 획득한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시기의 한국 건축계는 외국과의 교류가 거의 단절된, 가장 폐쇄적인 시기였다. 그러한 폐쇄성은 역설적으로 한국적 고유성을 형성하게 된 동인이 되었다. 그 폐쇄된 세계 안에서 한국 불교의 신앙과 건축은 자생적인 변화를 겪어 하나의 유형을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 유형의 건축적 완성도와 보편적 가치는 별개의 차원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오류>

89p

지리산 화엄사는 544년 (신라 진흥왕5) 연기 조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연기조사는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었으나 1979년 '신라백지묵서대광불화엄경'이라는 사경이 발견되면서 발문에 연기가 황룡사 출신의 승려이며 경덕왕인 8세기 무렵 인물이라는 사실이 고증됐다. 그러므로 진흥왕 5년에 연기가 창건했다는 기록은 오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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