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100년 1
권영필 외 지음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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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래 전에 과천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흥미롭게 읽었던 책이다.

한국근현대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인데 흥미롭게도 전시회의 도록 형태이다.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게 됐다.

7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나 참고 문헌이 거의 100 페이지에 가깝고, 무엇보다 도판이 많아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미술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이 짧게 집필한 책이라 통일성이 다소 부족하나 대신 지루하지 않다.

사실 기대했던 분야는 최근의 미술 동향인데 아쉽게도 1960년대에서 끝나고 만다.

대신 19세기 후반부터 식민 시대의 현대 미술 태동에 이르는 전사 부분이 아주 흥미롭고 유익하다.

장승업에서 조석진, 안중식으로 이어지는 근대 미술의 흐름이 흥미롭다.

근대성을 확보하기도 어려웠을텐데 식민 지배와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져 해방 이후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미학을 정립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인상깊은 구절>

6p

초창기 화가들 간에 논란이 되었던 '서화'와 '미술'은 단순히 용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의 차이, 회화의 가치체계에 관한 문제였으며 환쟁이에서 화가로의 변화는 예술가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를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환쟁이나 화원에 비해 화가라는 말은 적어도 문인에 버금가는 존칭처럼 되었다. 서구의 미술가들이 피나는 투쟁과 노력으로 쟁취한 예술가의 자유와 그 사회적 지위를 우리 미술가들은 덤으로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p

서양미술사는 대체로 정반합의 발전 논리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보편적으로 통용되어온 회화가 '사실주의'란 이름의 양식인데 한국의 사실주의는 엄밀히 말하면 자연주의이며, 쿠르베가 들고 나왔던 리얼리즘은 아니다. 쿠르베가 말한 '산 예술을 만드는 것'이나 '당대 현실의 객관적 묘사'라는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방식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선전이 유도했던 심미주의 미술관에 기인했는지도 모른다. 그 밖에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 미술을 하나의 사상으로서가 아니라 양식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한다.

 이러한 현상은 20세기 전반의 모던아트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은 매우 복잡한 성격을 갖는데 흔히 말하듯 시각성의 혁명만이 아니라 당대 정치, 사회체제에 대한 반역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다다 이후 많은 아방가르드 미술이 크던 작던 그러한 성격을 띄었다. 그러나 한국 미술가들의 경우 그 혁명적 요소는 탈락되고 단지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조형, 예술로서 제작되고 평가되어왔던 점이 강하다. 더구나 모턴아트의 존재의의, 근대예술로서의 징표는 예술의 자유,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근현대 미술을 본다면 어찌되겠는가?

21p

한국이 근대세계로 진입해서 취득한 탈중국중심적 자주국의 위상은 한낱 형식적 조문에 그쳤으며,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서 여러 천년 동안을 속박해왔던 중국중심적 체제로부터 이탈했다는 점에서, 그뒤로 식민지 상태에서도 주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33p

양반 사대부 버금가는 학예세력으로 성장한 여항문인들은 지배층의 하부구조를 이루며 영달을 꿈꾸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독자적인 문화 수립보다는 문인화와 같은 주류를 추종했다. 

 김정희를 중심으로 조성된 북학주의에 동조한 이들은 청조 문화와의 교류에 앞장섰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이런 풍조는 개항기의 '왜양일체' 인식을 비롯해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등으로 야기된 반일 감정에 기대어 주류를 이루며 지속되었다. 

43p

초상사진 가운데에서도 어진은 나폴레옹 복제사진처럼 인기 브로마이드로 일반인들의 수집대상이 되었다. 고종과 순종의 초상사진은 국가 통치의 최고 수뇌인 근대적 군주상으로 개안되었는가 하면, 황실의 가족상과 부부상으로 제작되어 유포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와 시민사회의 기초 구성단위로 새롭게 부각된 부부 중심의 가정주의 인식을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53p

사진이 갖는 정확한 현실 재현력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고, 관념적 시각에 머물렀던 회화분야에 표현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했다. 한편 우리나라 서양화 정착은 초기 유학파 대가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 초기 서양화는 소위 말하는 선진화가 곧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등과 같은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정착된 것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이들 유학파 화가들의 국내 작품활동은 극히 미미했으며 당시 거의 모든 미술인들이 참가한 조선미전에서조차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지역단위로 대표적인 화가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단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가 의문인데, 각 지역별로 미술교사 등 일본인 화가들이 있었고 그들에 의해 그 지역 서양화 지망생들에게 전수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과 일본 화가들의 화풍이 유사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서양화는 특정 화가들에 의해서 화풍이 주도되어 정착된 것이 아니라 각 지역별로 일본 화가를 통하여 자생적인 발아가 이루어져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

67p

18세기 후반의 초기 북학은 보수화되고 경화되기 시작한 조선성리학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의미가 적지 않았고, 그 결과 정조대는 조선성리학과 융합되어 현실 반영적이고 현실 개혁적인 성과가 많이 나타났지만, 이러한 개혁의 기운이 마침내 체제를 흔들고 위협하는 데가지 이르게 되자 19세기 이후 그에 대한 역작용으로 경화 현상이 나타나며 현실 반영적인 경향보다도 현실 초월적인 경향이 강한 고증학과 금석학 및 중국 고전서화 중심의 서화일치와 화선 일치를 지향하는 탈속한 학예론으로 전화되기 시작하고, 19세기 중후반경에는 주로 척족 세도정국의 상층 귀족과 그 아래 부용적인 상류 중인들이 국제적인 취향의 문물을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적인 이념으로 변모된 채 오히려 우리의 당대 현실에 대한 진실한 시선을 차단하고 억압하며 소외시키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도 적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86p

새로운 기술 도입과 교육제도의 운영은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성리학적 말업관을 제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관립교육기관에서 관비로 교육을 실시하고, 상공업 계층뿐만 아니라 우수한 양반 자제도 다수 지원함으로써 공업기술분야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인 직업관이 부분적이나마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100p

한국에 대한 그들의 첫인상은 대개는 멀리서 보았을 때는 아득하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자연풍광을 지니고 있지만 상륙해서 보면 불결하고 낯선 곳이라는 것이다. ... 일부는 한국의 가정과 여성생활 그리고 아동들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살피면서 "한국에는 집은 있지만 가정은 없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서구 근대정치에 익숙해진 탓에 한국의 전근대적인 정치행태에 대해서는 모두 일갈하는데 가장 큰 병폐로 지배층의 학정과 무능을 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분개에 가까운 낱말들을 동원해서 질타하기도 한다.

274p

산수를 그리는 오랜 전통이 존재하는 동양에서는 서구적 기법에도 불구하고 풍경화를 그리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현의 대상을 선택하여 그리는 과정에는 대상과 회화 사이의 관계를 규정짓고 대상을 의미화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의식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전통시대의 산수화가 자연의 단면을 즉물적으로 절취하여 모방한 재현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산수화는 도교적 관념이나 성리학적 도덕을 배경으로 하는 복잡다기한 의미망 속에서 재현되고 소비되었다. 전통사회의 문인들에게 시서화는 오늘날과 같이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서로 융합되면서 감상과 창작의 통로를 간섭하였던 까닭에 산수는 단지 시각적 정보로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시정의 문학적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고 감상되었다. 때문에 뿌리 깊은 산수화 감상과 창작의 관습 속에 내재된 고유한 전통적 가치관과는 이질적인 새로운 감성 및 형식을 가진 서구적 풍경화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285p

예술 활동은 투쟁의 일환이 되었으며, 그 결과 최악의 경우 작품이 없더라도 혹은 작품이 미적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의 '선전과 선동'만 되는 것이면 어떠한 종류라도 가능하게 된다. 

297p

신무용, 양악, 미술, 문학 등에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고급예술의 주체로 부상하고 장르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기생이 담당하던 시서화, 가무에 이르는 통합적 연희는 요리점 문화로 급격히 퇴락해갔다. 1931년 기생철폐론이 나오고 없어져야 할 서비스걸의 풍속으로 공공연히 비판받던 시기에 이번에는 고급미술 속에 기생 이미지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소재들은 한편에서는 조선미술전람회 일본인 심사위원들이 요구하는 지방색 또는 조선색의 구현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 고유의 전통으로 다시금 자리매김되었다.

334p

동아협동체 건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폐지하는 경제 통제의 구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와 상통하는 반 자본주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향한 사회주의자들은 동아협동체론이 암시하는 혁신적인 정치질서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가운데 내선일치론 역시 받아들였다. 내선일체는 일제의 조선 병합 이후 계속된 동화주의 정책의 새로운 버전이었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동아협동체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조선민족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일선 협동체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이 희망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헛된 것으로 판명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341p

이러한 행적 중에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순응한 사례가 적지 않지만 소신에 따라 열렬하게 투신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광수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제국의 총력전이 조선 민족에게 부활의 서광을 비춘다고 여겼다. 그들은 조선인이 전쟁의 승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천황의 적자로 인정받고 대동아의 신민으로 거듭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힘없는 민족의 마음 속에 자라난 힘에 대한 선망은 이렇게 민족 자신의 소멸에 대한 열광을 맣았다. 이광수의 도착된 민족의식은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인 사회를 휩쓴 파시즘적 광기의 하나였다.

391p

문제는 오늘날의 미술가가 유산계급을 패트런으로 삼아 생활하지 않으면, 생활을 성립할 수 없다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국민 전체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미술이 국민의 생활 전반에 스며들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그림이라는 것은 사회적 눈으로 보면,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면 사치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서, 자본가와 결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430p

미군정의 탄압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예술계장의 고문이었던 이승학은 1948년의 한 대담에서 한국미술계에 대해 "미술가들은 정치분야에서 활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술을 위해서만 산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524p

서글픈 사실이지만 대다수 관객은 남의 행복에 공감하는 힘, 그것을 상상하는 능력마저 잃고 도리어 불행한 운명에만 현실감과 공명을 느끼면서 거기에 눈물을 쏟고 카라르시스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굳이 말하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행복이란 오직 불행을 감수하는 체념과 자기 부정의 능력 속에 그리고 그럴 때 흘리는 눈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영화는 그 눈물을 상업적으로 이용, 신파물의 범람현상을 빚었는데, 그럼으로써 한국영화가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에 긍정적인 역할을 다하지 못했음은 밝힐 나위도 없다.

537p

전쟁이 끝났을 때 놀라울 정도로 사회는 평등화 또는 평준화가 이루어져 있었다. 노비나 천민이 수천 년 존재했고, 양반 상놈 차별이 유난히 심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 변화라고 할 만했다. 평준화가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도 한몫했다. 주요 관직은 일본인이 차지하고 한국인은 소수를 제외하면 모두 못살았기 때문에 정치적, 경제적 지위와 연결되어 있는 신분차별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여러 모로 큰 변화를 초래했다. 인민군이 들어온 지역에서 머슴이나 빈민들은 목청을 높일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부터 군인 수가 크게 늘었는데, 군대생활도 평준화에 기여했다. 사회가 평준화되고, 인구밀도가 높아서 자연히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국인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는데, 신분차별이 없어지자 교육을 잘 받았느냐, 일류 학교를 다녔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면서 교육열이 무섭게 불어닥쳤다. 해방 이후 교육의 기회는 크게 확대되었는데, 전쟁 이후 초중고 입학생은 더욱 늘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교육의 질적 측면은 돌볼 틈이 없었지만, 교육시설을 늘리는 데 적지 않은 투자를 해야 했다.

555p

한국미술가협회의 이탈은 조형이념적 갈등에서 빚어진 건전한 분파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적 감정의 대립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작품 이념이나 행동 및 작가정신의 대결과 가치평가에 의한 지향의 방법을 내걸고 일으켜진 건전한 분립이 아니라 집단행동이란 하나의 이념에서 또 하나의 집단행동이란 이념을 내걸고 분열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590p

우리 민족의 주정주의적 성향이 주지주의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큐비즘의 수용을 어렵게 하였다는 논지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613p

이들 모두가 개화화이면서도 한편으로 자강론자들이었던 데서 미루어볼 수 있는 것은 미술에서 민족성을 강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친일파가 아닌 다음에야 일제의 침략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요 시대정신의 영역에도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을 강조하는 미의식이 환영받을 수 있었다. 김석준이 옛 법을 견지하는 관점을 강조했던 일이나, 장승업과 안중식이 고전 화풍을 추구해나간 것 또는 김석주의 비평을 대물림하여 오세창이 조선 미술사학 저술에 심혈을 기울인 일은 모두 시대정신 및 예술정신의 발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념과 미학은 탈정치성을 바탕으로 하는 이상주의 및 심미론과 기예론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이었다.

617p

이 같은 모더니즘마저 조선성, 동양성으로 흡수되어갔던 것은 고유섭, 오지호, 윤희순과 같은 논객들로부터 워낙 거센 비판을 받아서이기도 하지만 이미 시대가 파시즘이 횡행하던 전시체제였던 터에 모더니즘을 전개해 나갈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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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2-04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 주네요!ㅎ
 
베르디 오페라, 이탈리아를 노래하다
전수연 지음 / 책세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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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도에 읽었던 책인데 푸치니 전기를 읽다가 선배 베르디 얘기가 나오길래 다시 읽게 됐다.

푸치니는 후대 사람이라 특별한 언급은 없어 아쉽다.

음악가가 아닌 역사학자의 눈으로 보는 베르디라는 관점이 흥미롭다.

주제가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베르디라고 할 수 있다.

총을 들고 독립 전쟁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 음악으로서 이탈리아의 독립을 지지했고, 지방분권으로 나눠져 있던 이탈리아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정신적 지주가 된다.

독립 운동과 오페라라니, 과연 음악의 나라답다.

위인의 찬양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을 입체적으로 분석하여 흥미로웠다.

베르디가 두번째 아내 주세피나와 바로 결혼하지 않고 오랜 동거 끝에 전쟁이 일어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후에야 비로소 혼인신고를 한 점은 독특했다.

우리 정서 같으면 당장 결혼을 해야 아내의 지위가 튼튼해질텐데 왜 굳이 10년을 넘게 동거한 후에야 비로소 결혼했을까?

그 동거 때문에 아버지와 진짜로 호적을 정리하기까지 했으면서 말이다.

주세피나가 낳은 사생아들 때문이었을까?

그에 대한 언급이 특별히 없어 호기심이 생긴다.

푸치니 역시 친구의 아내와 야반도주 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어 대조된다.

그러고 보니 바그너 역시 후배의 아내이나 친구의 딸인 코지마를 데리고 도망쳤다.

과연 열정적인 음악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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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자기 여행 : 에도 산책 - 일본 열도로 퍼진 조선 사기장의 숨결 일본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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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읽으면서 도자기, 즉 식기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도자기라고 하면 박물관에 있는 고려청자 같은 유물인 줄만 알았지 우리 실생활에 쓰는 그릇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릇에 관심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식당에 가면 스테인리스 그릇에 밥을 주고 좋은 레스토랑에 가도 예쁜 식기는 본 기억이 없다.

어제 간 커피숖도 아메리카노 한 잔에 6천원을 받는 곳인데 아무 문양도 없는 투박한 흰색 컵을 주길래 깜짝 놀랬다.

커피맛은 차치하고라도 이 정도 가격의 커피를 마시려면 그래도 좀 괜찮은 컵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다.

책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

맛은 기본이기 때문에 요리의 완성은 식기라고.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도자기, 곧 그릇은 바로 우리가 영위하는 문화라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의 고려청자, 조선백자가 박물관에서나 자랑스러워 하는 전통유산에 그치지 않고 일본이나 유럽처럼 여전히 우리가 향유하는 경쟁력 있는 공예품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책에 실린 수많은 일본의 자기들을 보면서 눈이 호강했고 감탄의 연속이었다.

유럽이나 중국의 화려한 도자기와는 또다른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들이 참 많았다.

수많은 도자기 사진들을 실은 저자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다만 색감이 좀 어두운 점이 아쉽다.

일본어가 익숙치 않아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이나 지명 읽을 때 좀 어려웠다.

저자도 기왕이면 많은 가마들을 소개시켜 주려다 보니 약간 난삽한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매우 성실하고 재밌는 일본 도자기 책이다.

우리도 이런 훌륭한 식기 문화가 일반화 됐으면 좋겠고 이번 일본 여행 때 여기 소개된 미술관과 그릇샵들을 방문해 보고 싶다.

오사카에 갔을 때도 저자의 책을 읽고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갔었다.

이번에도 도쿄에 가면 책에 나온 미쓰비기념미술관과 이데미츠 미술관에 갈 생각이다.


<인상깊은 구절>

183p

결코 포기하지 않은 다미키치의 불굴의 의지도 칭찬할 만하지만 일면식도 없는 타지 사람을 오직 추천 서신 하나만으로 믿고 끝까지 책임을 진 당시 일본 사회 승려나 사기장들의 신심도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혼탁한 세상이기는 했지만 신뢰가 사회 밑바당에서 그 만큼 중요한 가치로 존재하고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43p

아마도 후루타 오리베의 이런 인기와 질시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 호방함, 전국의 다이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다도 사범이라는 사실 등이 막부에 부담이 되어 스승 센노 리큐와 마찬가지로 할복 명령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262p

로산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요리와 그릇의 일체, 요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 연구에 평생 매진했고, 결국 그런 그릇을 직접 만들고자 도예가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요리 미학의 종점은 맛이 아니라 (맛은 기본이고)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느냐로 완성되는 것이다.

276p

가토 다쿠오는 자신의 책에서 1961년 테헤란의 박물관에서 러스터와 처음 만난 것을 회고하면서 '나는 현란하게 빛이 나는 러스터웨어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래서 내 손에 저 도자기를 꼭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기술했다. 그의 손자로 역시 도자기를 굽고 있는 가토 료타로는 "할아버지가 백혈병 투병 이후 자신은 오래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은 후에 무언가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매우 강했다"로 회상한다.

 그는 책에서 '나는 누구도 하지 않았던 무엇인가를 하기 원했다. 러스터웨어 복원이라는 아주 특별한 꿈이 없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일찍 세상을 떠날까 봐 걱정했지만 이처럼 일에 몰두하고 즐긴 덕택에 그는 88세까지 살았다. 삼채와 러스터의 준 축복이었다.

297p

버나드 리치는 도자기를 예술과 철학 그리고 디자인 및 공예의 결합으로 보았다. 게다가 도자기를 라이프 스타일 그 자체로 생각했다.

311p

일본에는 '미타테'라는 고유의 미적 수사가 있다. '미타테'는 '다시 본다', 즉 '새롭게 본다'는 뜻이다. 사물을 처음 보듯 새롭게 보는 것이 미타테의 핵심 속성 가운데 하나다. 

 다도의 가치 또한 미타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차를 끓이며 정성을 다해 한 잔을 따라 내는 다도는 매번 반복되는 행위이지만 처음이라는 마음가짐을 지키지 않고서는 좋은 차를 우려내기 힘들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중들의 작품이 갖는 소박한 외연 안에 잠재된 깊은 예술적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미타테의 관점으로 이들을 보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야니가 무네요시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민예운동의 핵심이다.

482p

쓰타야 서점의 기본 철학은 '책이 아닌 라이프 스타일을 판다'는 것이다. 그런 철학이 시대에 걸맞은 혁신의 아이콘이 되었다. 쓰타야 서점에서는 심지어 일본도도 판매한다. 일본도에 관한 책들 옆에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일본도들이 놓여 있다.

 사실 시대는 모든 것이 섞이고 융합하는 '울트라 퓨전'으로 가고 있다. 도자기라고 해서 인사동 구석에만 있을 필요는 없다. 팔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관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504p

이토록 대대적인 외국 시찰단 파견은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만큼 일본은 서구 문물 배우기에 절실한 반면 우리는 서양을 철저히 배척하겠다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일본이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던 그 해에 말이다!



<오류>

102p

가와다 사토미의 꽃으로 둘러싼 용 그림 도기 상자

->설명과 사진이 매치되지 않는다. 사진은 꽃과 여우 그림이다.

244p

자신에게 다도의 가르침을 배웠던 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잔당과의 내통을 이유로

->이에야스는 1대 쇼군이고 2대 쇼군은 그의 아들인 히데타다이다.

400p

'숀즈이'는 명나라 마지막 숭정 연간에 구워진 청와백자 도자기의 일종을

->청화백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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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전쟁 378~1515
찰스 오만 지음, 안유정 옮김, 홍용진 감수 / 필요한책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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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인데 너무너무 힘들게 읽었다.

예쁜 책표지만 보고 가벼운 중세 전쟁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무려 19세기에 출간된 책이었다.

저자가 1860년생인데 1885년에 이 책이 나왔다고 하니 겨우 스물 다섯 살의 나이로 쓴 책이고, 옥스퍼드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찾아 보니 1920년에 같은 주제로 좀더 자세하게 쓴 책이 나왔다.

말하자면 이 책은 중세 전쟁의 개요인 셈이다.

의외로 많은 리뷰가 쓰여 있고 다들 흥미로운 책이라고 한데 비해 나에게는 너무 어렵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됐다.

중세는 특히 내가 약한 시대이기도 하고, 전쟁사는 거의 처음 읽는 분야라 더 그런 듯 하다.

얼마 전에 읽은 <백년전쟁 1337-1453>도 어렵게 읽었는데 다시 재독을 해봐야겠다.

감수자가 전공 학자라 정말 꼼꼼하게 세세하게 주를 달아줘 중세 서양사 이해에 큰 도움이 됐다.

출판사의 성의가 넘치는 책이다.

그에 비해 번역체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이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전쟁을 단순히 국가 간 폭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략과 전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특히 봉건제 하에서 중세 전투가 근대 국가의 총력전과 어떻게 다른지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더불어 보병과 기병의 전투 대형 변화, 쇠뇌와 미늘창, 장궁, 파이크라는 장창 등 무기의 변천사 등도 흥미롭게 읽었다.

스위스라고 하면 막연히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에서 양치고 살 것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인데 어떻게 그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유럽의 용맹한 용병이 되었는지, 장창부대의 놀라운 전투력과 정신력에 감탄했다.

수많은 중요 전투들이 예시로 등장하는데 거의 다 처음 들어보는 것들이라 일일이 찾아 보느라 시간이 정말 많이 걸렸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중세라는 사회 구조에 대해 감을 좀 잡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구절>

25p

고트족은 그들의 튼튼한 창과 좋은 말 덕분에 자신들이 밀집한 로마 군단을 돌파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트족은 전쟁의 지배자가 되었고, 중세 시대 모든 기사들의 직계 조상이 되었으며, 앞으로 천년 동안 계속될 전장에서의 기병이 가지는 지배적 우위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 게르만족 지도자들은 단순히 로마 제국에서 주는 직위와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충성을 바쳤다.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이후 불과 6년이 지난 시점에 4만 명의 고트족, 그리고 다른 게르만족 기병대가 지신들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동로마 제국 안에서 군사력을 제공했다. 

(대규모 전쟁의 승리 이후에 게르만족이 보인 이러한 경향은 의아할 수도 있으나 당시 로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앞선 문명 중 하나였고 전쟁에서 졌어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아직 제대로 된 통일 국가로서 성립하지 못한 게르만족의 한계 또한 작용했다. 그래서 게르만족의 로마를 향한 열망과 인식은 전쟁 후 포이데라티의 형태로 나타난다.)

34p

유스티니아누스 형제의 군대와 그들의 성취는 모든 면에서 진정 찬사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거둔 승리들은 스스로 얻은 것이며, 패배들은 대부분 황제의 참담한 정책기인했다. 황제는 지휘권을 여러 사람에게 분배하기를 고집했고 이로 인해 군사적인 복종은 지킬 수 있었지만 군사적 효율성을 잃고 말았다. 게르만의 코미타투스 (종사제) 체제, 그리고 개개의 병사들과 개인적으로 엮인 지도자가 이끄는 전쟁 공동체 체제는 제국의 군대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6세기의 군주들은 직속 사령관에 대한 병사들의 충성심이 너무 높아져 자신들에 대한 충성심보다 더 커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황제는 군대를 이끄는 장군과 불화가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이는 많은 경우 매우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49p

이러한 승리들을 가져다 주고 유럽 대륙을 야만과 북쪽과 동쪽의 이교 문화에 다시 빠져들지 않도록 막아준 힘은 갑옷 입은 기병대였다. 만약 동시대인과 후계자가 이들을 평범한 전사로만 추켜세웠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군사적 효율성에 대한 소구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400년 동안 봉건 기사도가 지속된 역사는 이들이 중세 시대 말까지 얻어낼 수 있었던 승리들 덕분이었다.

76p

7세기에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와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아랍인들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을 때, 그들이 거둔 승리는 무기가 월등해서도, 조직력의 탁월함 덕분도 아니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의 광신적인 투지는 무장과 훈련 면에서 더 우월한 군대와도 맞설 수 있게 만들었다. 그들이 새로운 영토에 자리 잡으면서 과거의 폭발적인 투지는 사라졌지만. 이전에 자신들이 무찔렀던 적들에게서 전략과 전술을 배우는 일에는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의 군대는 이 칼리파 군대의 본보기가 되었다. 레온 황제가 저술하기를, 그들은 무장과 전술 면에서 '대부분 로마의 관습을 따랐다.' 그들은 제국의 장군들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창병에 주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83p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기사의 전문성에 기반한 자부심이 풍부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기사도 자체에 대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승리를 거두기 위한 전사의 조건에 용기가 포함되기는 하지만 유일하거나,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다루지 않았다. 레온은 대규모 전투 없이 진행된 군사 전술을 가장 낭비가 적고 만족스러운 전쟁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는 남자들이 싸움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호전적인 열정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멍청한 야만족의 특성이자 전투 지휘를 하며 허세를 부리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치명적인 자질이라고 보았다. 그는 책략과 매복, 그리고 후퇴하는 척하는 방법을 매우 선호했다. 가능한 우위를 접할 수 있는 요소를 우선적으로 확보하지 않은 지휘관은 레온의 가장 큰 멸시 대상이었다. 이와 더불어 오직 상대편 군대의 숫자와 실력을 알아보기 위한 방책으로 軍使 에게 임무를 어떻게 수행할지 지시를 내리는 일을 지적인 자부심으로 삼았다. 10세기경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해했던 것처럼 '전쟁의 기술'은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학문적 가치를 지닌 책략이었고 16세기까지 이에 맞설 만한 상대가 없었다.

101p

군사 무기를 사용하는 기술적인 요령은 비잔티움 군대가 다른 호전적인 이웃들에게 발휘한 지배력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한 우월함의 원천은 이들이 지닌 과학과 규율, 전략과 전술, 전문적이면서도 국가에 속한 군대, 그리고 군사 교육을 받은 상위 계층이 존재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귀족이 단순히 왕에게 아첨하는 역할만 할 때, 외국의 용병들이 이사우리아인 궁병과 아나톨리아인 기병을 대체했을 때, 전통적인 로마의 조직이 단순한 중앙집권화에 자리를 내주었을 때, 아무리 전투 기계를 다루는 뛰어난 기술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십자군전쟁이 시작하면서 드러난 서유럽 기사들의 용맹은 무슬림 제국과 스비아토슬라프 1세가 달성하지 못한 과업(비잔틴 제국 정복)을 성취하도록 했다.

108p

지휘 체계의 기반은 전문적인 경험보다는 사회적 지위였기에 가장 큰 분견대를 끌고 왔거나 가장 높은 계급에 위치한 자는 본인이야말로 총사령관의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노련한 군인들은 전장에서 겨우 몇 개의 창만을 쥘 뿐, 상관의 지휘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용맹함이 기술과 경험보다 앞설 때, 전술과 전략은 모두 사라진다.

114p

심지어 두 세력이 실제로 근접해 있더라도 전투를 시작하려면 때때로 사령관이 가진 능력보다 더 높은 능력이 필요햇다. 그들이 서로를 발견했을 때, 그들 사이에 모라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적군을 마주하고 강을 건너는 것은 13세기의 사령관에게는 능력치를 아득히 벗어나는 임무였다.

118p

황제의 엄격하고 위엄있는 카리스마로도 복종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그보다 약한 통치자들에게는 이러한 과제가 거의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다수의 군주들은 다른 종류의 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은 사기 면에서 제국의 군대보다는 열등했지만 규율 면에서는 더 다루기 쉬웠다. 바로 12세기 중반 이후부터 용병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고귀한 목표와 용기 같은 가치를 몰랐고 종교와 이웃의 적이었으며 유럽 내에서는 미움 받아 마땅했지만, 군주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전쟁이 단순한 변경 침입에 그치지 않고 봉건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긴 시간 지속되는 양상이 되지 그저 봉건 군대에만 기대는 게 불가능해져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병대에게 지급할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지의 문제는 늘 명확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각 기사들의 복무 대신 징수한 병역면제세였다. 이로 인해 대다수의 소작인들 또한 각 기사의 병역면제세를 채워줌으로써 자신은 징병의 의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호전적인 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넉넉한 수의 용병을 이용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전제정은 군주가 거느리는 강력한 세력이 국가에 대한 열망이나 감정을 품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하기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당시 유럽의 폭군은 고용한 외국인 병사들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았다.

133p

스위스인은 초기 로마인처럼 강한 애국심을 지니면서도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전투 계획 면에서는 어설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두 나라 모두 (군사적인 면에서) 진정으로 훌륭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두 나라 군대 모두 꺾일 줄 모르는 용맹과 고귀한 자기희생의 열정, 그리고 극심한 흉포함, 냉정함, 상대에 대한 무자비함이 뒤섞여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맛본 승리 덕분에 호전적인 자부심을 지녔고, 정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전쟁에 나섰다. 적들에게 이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한 존재였다. 그런데 국가적 이익이 아니라 그저 싸우기 위해 전투에 나설 때에는 살육을 일삼는 그런 잔악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마련이다. 피에 굶주린 로마인들이 전장에서 보인 역겨운 행태는 16세기의 수많은 전장들에서 스위스 용병이 보인 불필요한 잔혹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스위스 연방군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정비를 완료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인으로서의 영광이 인생을 가치있게 만든다고 믿으며 두 번 다시 출정하지 못할 것처럼 싸웠다. 그들은 모두 동족 또는 이웃 사람들로, 각자의 고향 마을이나 출생지를 상징하는 깃발 아래 굳건히 서 있었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의 결집력을 높이기 위한 피곤한 동원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 스위스 사령관들은 모두 동등한 수준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만약 한 사령관이 다른 사령관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계급보다는 인간적인 힘이 우위에 있어야만 했다.

"자비는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생명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무차별적으로 살육했다. 오스트리아군 보병대는 가장 용감한 기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고 스위스 연방군의 잔혹함에 질려버렸다. 이들은 스위스연방군의 무시무시한 무기에 맞아 죽으니 물에 빠져 죽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167p

아마 어떤 지휘관이라도 병사들이 이런 식으로 수치스럽게 도망치리라고 처음부터 예상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 그래도 강력한 적을 상대로 결속력이 떨어지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음에도 극히 정교한 움직임이 필요한 작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샤를은 책임을 면할 수 없다.'후방으로 빠지는 전략적인 움직임'은 병사들이 정말로 퇴각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병사들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한 최대한 피해야 한다. 

 스위스군에게는 거시적인 전략이 전무했다. 일단 적군에 맞서 팔랑크스 대형을 만들어 어떤 적이든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돌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186p

스위스 군대는 자신들이 군사적 규율에 따르는 집단이 아니라 군사 작전을 수행하는 민주적 집단이라고 여겼다. 이들은 스스로를 무적이라 생각하며 헛된 자신감에 차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명령은 무시했다.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면 상관에 대한 표면적인 복종까지 집어던졌다. 비코카 전투에 앞서 이들은 "지휘관, 연금 수령자, 두 배의 급료를 받는 자들이여 어디에 있는가? 이리 나와서 한 번이라도 돈을 정당하게 벌어보라고 하자. 그자들은 오늘 맨 앞에서 전투를 치러봐야 하리라."라고 외쳤다. 그 오만한 요구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바로 요구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지휘관과 대들은 앞으로 나와서 종대의 맨 앞줄을 구성했다. 이들은 전투 중에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선봉대를 지휘했던 운터발덴의 빈켈리트는 창에 맞아 가장 먼저 전사한 지휘관이 되었다. 짐승 같은 괴력과 눈먼 투지만이 유일한 장점인 스위스군은 이제 전쟁의 새로운 흐름을 공부한 과학적인 지휘관들이 이끄는 군대와 맞서야 했다. 한때 유럽에서 숭배되었던 파이크 전술은 이제 너무나 전형화되는 바람에 한물 가버렸고 스위스군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보병대라는 자랑스러운 지위를 잃게 되었다.

217p

잔 다르크의 공적은 새로운 전술적인 시스템의 도입이 아니라 민중의 열망을 일깨워 잉글랜드가 더 이상 프랑스 영토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음에 있다. 작은 국가가 큰 국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도 점령당한 국가의 국민이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으면 장악하기가 어렵다. 만약 점령당한 큰 나라의 국민이 나태함을 털고 일어난다면 -상대방의 군사력이 더 우월하다 하더라도- 점령은 불가능해진다. 

 비록 프랑스 영토에서의 잉글랜드군 축출은 군사 전략보다는 정치적인 이유가 더 크게 보이지만, 15세기의 프랑스군 지휘관들이 마침내 잉글랜드군의 주도권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228p

워릭 백작의 전체 업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훌륭한 지휘관이라기보다는 배후에서 조종하는 데 뛰어난 정치적 인물, '그의 시대의 가장 교묘한 사람'이었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250p

세르비아와 헝가리군에는 페르시아나 맘루크 군대와 같은 믿음직한 보병대가 없었다. 규율이 잘 잡힌 예니체리군 앞에서 이들은 어설프게 무장한 혼란스러운 무리에 불과했다. 전투가 아무리 예측할 수 없이 흘러도 예니체리는 말뚝 뒤에서 바위처럼 버티고 서 있었고, 과연 쓰러지기나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 못한 몇몇 전투에서는 적어도 자신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부대의 명예를 지켰다. 처절했던 앙카라 전투에서는 튀르크군이 도망가고 나서도 한참 후까지도 버티면서 죽음을 택했다. 이들보다 더 굳건한 부대는 유럽의 어떤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류>

101p

1세기에 유명했던 비네아(vinea)와 투석기 발리스타(balista)는 10세기에도 여전히 명성을 자랑했다.

->발리스타의 철자는 ballista 이다.

112p

시몽 드 몽포르는 프랑스 귀족 출신이나 어머니가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이었던 어머니 쪽 가문을 승계하였으며

-> 역주에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가 아니라 그 아버지 대 시몽 드 몽포르이다.

대 시몽 드 몽포르의 어머니가 3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몬트의 딸 알미시아였고 아들인 대 몽포르가 5대 레스터 백작위를 계승했으며 본문에 나온 시몽 드 몽포르는 그 아들로, 6대 레스터 백작이다.

234p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전쟁으로 잉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교전 중 전사했으나 전투는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가 아니라 스코틀랜드 왕이다. 잉글랜드 왕은 헨리 8세였다.

235p

1492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브리타니 공이 전쟁을 벌이자 브리타니 공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적이 있다.

-> 브르타니 공, 즉 프랑수와 2세는 프랑스와의 전쟁(1485-88) 중 1488년에 사망했고 딸인 안 드 브르타뉴가 뒤를 이었으나 1491년 샤를 7세가 쳐들어와 강제로 혼인했다. 브르타뉴를 지키기 위해 헨리 7세가 군대를 파병해 1492년에 에타플 조약이 체결되어 배상금을 지불하고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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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 - 미친 듯이 웃긴 북유럽 탐방기
마이클 부스 지음, 김경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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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페이지에 달하는 긴 분량의 책이라 시간이 꽤 걸렸다.

앞의 덴마크 편은 부인이 덴마크인이고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서인지 정말 그 사회를 들여다보는 깊이있는 분석들이 흥미로웠는데, 뒤로 갈수록 가벼운 여행기 수준이라 몰입도가 다소 떨어졌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글을 잘 쓰는 칼럼니스트고 번역도 저자의 유머 코드를 잘 살려서 매끄럽다.

다른 리뷰를 보니 번역이 형편없다는데 문장 연결이 안 되는 비문 투성의 책들을 아직 못 접해 본 모양이다.

스칸디나비아의 큰 형님 격인 스웨덴에 대한 분량이 가장 많고 복지제도와 사회주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봤다.

아이슬란드가 북유럽 연합에 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고 (화산과 빙하는 꼭 한 번 보고 싶다!) 노르웨이가 석유 때문에 중동 산유국과 같은 벼락 부자가 됐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석유가 북해에서 쏟아지는 노르웨이와 다른 나라들은 근본적으로 사회 구조가 다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우리가 참조해야 할 모델이 노르웨이는 분명히 아닌 듯 하다.

역사책을 보면 덴마크 왕실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지배한 적도 있어 오늘날의 작은 영토와 맞지 않는 듯 해 참 이상했는데 영토를 빼앗기고 쪼그라든 슬픈 역사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잔에 아직도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위로하면서 주변국들과 잘 지내고 복지국가를 만든 긍정성이 놀랍다.

아직도 만주는 우리 땅을 외치고 일본과 철천지 원수인 불같은 성정의 한국인과는 매우 다른 민족인 듯 하다.

핀란드는 이 나라들과 언어나 민족이 다르고 훨씬 오랜 기간 지배를 받았으며 소련과 대적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지킨 놀라운 국가였다.

sisu 라는 그들의 정신력이 정말 매혹적이다.

북유럽이라고 하면 복지국가를 지구상에 실현시킨 최고의 이상형인 줄 알았는데 국가관료주의와 획일성, 높은 세율, 보조금에 기대려는 인간의 심성 등이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여전히 세계 어느 국가보다 사회 안전망이 잘 되어 있는 곳이겠으나 자유와 평등이 사실 양립하기 어려운 대립적인 개념인지도 모르겠다.

정규재 칼럼니스트가 어떤 토론에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인생은 고단한 것이다.

이 말이 스칸디나비에도 여전히 유효한 말인 것 같다.

스웨덴과 덴머크, 노르웨이의 왕실은 민주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이런 국가들과 참 어울리지 않는데 저자 역시 이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또 북유럽 다섯 국가의 연합체를 제안하는데 마치 한중일이 유럽연합 같은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인구수가 너무 적어서인가 이 나라들도 이민자들과의 통합을 골머리를 썩고 있다.

요즘 문제가 되는 난민이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자국민이 꺼리는 일을 하러 오는 비서구계 이민자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합해져 큰 문제가 되고 총기 사건도 종종 일어나는 모양이다.

다섯 개나 되는 많은 나라들을 이렇게 깊이 있게 분석하고 지루하지 않고 신나는 여행기를 쓸 수 있는지 감탄했다.

모름지기 이 정도는 되야 여행기라고 출판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 비하면 요즘 범람하는 여행기들은 발로 쓴 게 아닐까 싶다.


<인상깊은 구절>

40p

과거에 누린 유럽의 열강 자리에서 내려온 덴마크는 안으로 틀어박혀 현저히 줄어든 영토 안에서 얼마 되지 않는 자원을 끌어모았고, 다시는 그쪽으로 욕심을 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다음으로 실행에 옮긴 전략은 '긍정적 편협주의'라고 볼 수 있다. 덴마크는 잔이 반이나 찼다는 세계관을 취했다.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잔이 '그때' 반이 차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세계관이 오늘날까지 떠들썩하게 치켜세워지는 덴마크 사회의 성공 비결로 보인다. ... 덴마크인은 이런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위로받았다. 덴마크인은 지금도 누구보다 잘하는 일을 배우는 중이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원을 감사히 생각하며 최대한 활용하고, 공동체의 소박한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들의 덴마크스러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독일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것.

65p

고도의 숙련을 요하는 산업 역시 훨씬 더 앞서간다. 숙련도가 높은 직무일수록 직원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워 신뢰는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위급 컨설턴트, 건축가, IT 전문가, 화학공학자는 일을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기가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그래서 신뢰가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 때문에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처럼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가 제약, 전자공학 같은 선진 산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이 분야의 외국 기업들을 유치할 수 있는 것이다. ... 덴마크인은 언제나 신뢰 수준과 사회적 결속력이 높았으며 복지국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그랬다고 주장한다. 이 진영의 최우선 과제는 그들이 보기에 지속 불가능한 덴마크의 사회복지 혜택을 줄이고 세율을 낮추는 것으로, 이들은 경제 평등 회복보다는 돈 잘 버는 기업들을 독려해 덴마크의 낮은 생산성 증가율을 높이는 데 주력한다. 이들은 북유럽의 사회복지제도가 덴마크와 다른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오늘날 누리는 경제 평등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더 광범위한 사회저 평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적 평등은 공공 부문과 높은 세율이 정착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 바이킹은 덴마크의 뛰어난 평등의식의 가장 유력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은 세금이 열심히 일할 의욕을 꺾고 야망과 혁신을 가로막으며, 복지제도가 빈대 근성을 가진 무기력한 하층 계급을 양산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와 한 끗 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역사, 심지어 유전학을 들먹이며 북유럽의 기적을 설명하는 편이 훨씬 더 흡족하다.

(높은 세금은 정말 일할 의욕을 확실하게 꺾고 탈세를 양산한다. 자영업 해 본 분들은 무슨 얘기인지 알 것이다. 정부의 바램과는 달리 세금을 많이 책정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여 실제로 많이 걷기도 힘들 뿐더러, 그도 저도 못하는 평범한 자영업자들은 결국 근로 시간을 줄여 버린다.)

89p

많은 덴마크인에게 높은 세금은 집단적 희생의 궁극적 상징처럼 보인다.

"나 세금 많이 내, 라는 자부심의 문제입니다. 자선처럼 지위의 표현이죠. 그래서 외스테르브로(코펜하겐의 중산층 보헤미안들이 사는 동네)에 사는 사람들 30%가 적녹연맹당(덴마크의 극좌 주요 정당)에 투표하는 겁니다."

(불행히도 한국은 세금을 많이 내는 계층이 사회적 자부심을 느낄 수 없는 분위기로, 그 정도로 돈을 벌면서 겨우 그거 내냐는 온갖 비난만 받을 뿐이다. 고소득자들 세율이 소득의 절반이 넘는데도 여전히 집단적 희생의 상징으로 보기는 커녕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들을 질시하고 비난할 뿐이다. 복지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더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들 나는 아직 세금을 많이 낼 정도로 여유가 없고 내 위의 계층부터는 더 내야 한다고 믿는다)

"덴마크는 심하게 높은 세금으로 골치를 썩는 나라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이 온갖 방법으로 탈세 한다. 이 모든 조세 제도는 도덕성에 기대서는 지속 불가능하리라 본다. 세금 부담은 이미 너무 커서 덴마크인은 자신들의 나라를 침략자로부터 지키기보다 차라리 침략당하길 바란다. 잃을 재산이 없기 때문이다."

101p

공립기초학교가 덴마크의 사회적 결속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덴마크의 학교들이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잠재적 성과를 중하위권 학생들을 위해 희생시킨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업 수준을 낮춰 최하위권 학생들을 수업에 참여시키고 시험은 등한시한다. 이런 말을 하면 정신나간 반동주의자처럼 들린다는 점을 알지만, 실제 교육은 뒷전이고 사회성에만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부부는 결국 아이들을 사립학교로 전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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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인은 자랑하는 사람을 특히 경멸하는데, 평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사회와 비슷한 수렵채집 사회는 대단히 평등합니다. 누군가 더 지배적 위치에 서기 시작하면 놀림감이 되거나 비웃음을 당하거나 무리에서 배척당합니다. 이를 반우월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더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는 거죠."

 아마 이 때문에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고, 그렇게 이룬 성공을 과시하는 행동을 그토록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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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덴마크인이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 독일과 이웃한 작은 나라이기에 국가 정체성을 표출해야 할 필요성이 훨씬 더 크며, 그래서 점점 더 국기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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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내고는 있지만 여전히 북유럽 나라들이 다른 어떤 유럽 나라들보다 더 큰 동지의식을 갖고 있으리라. 끊임없는 다툼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지역은 발칸반도의 전철을 밟을 것 같지는 않다. "아시겠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가 아닙니다."

 사실 스웨덴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 여정은 수십 년 전에 실패로 끝났다. 당시 스웨덴의 경제 상황은 악화됐고, 이에 스웨덴 정부는 상당히 급진적인 민영화 계획을 도입했으며 세금과 복지 혜택의 범위를 줄였다.

"이 복지국가 스웨덴은 지나치게 관료주의적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정부에서 일합니다. 수천 명이 실업수당으로 살 수 있다는 실은 물론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런 의존 시스템은 바람직하지 못하죠. 저는 스웨덴을 떠났고 제 일을 해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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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계층 이동성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학교다, 수준 높은 무상 교육 제도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자주권은 북유럽 지역의 경제 평등과 폭넓은 사회복지 안전망만큼이나 중요하다. 스칸디나비아의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일 뿐 아니라 교육의 기회는 모두에게 무상으로 주어진다. 이것이 북유럽 예외주의의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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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통합이 시간은 걸릴 것이다. 미국은 수 세기 동안 노력해왔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과 북유럽의 실용주의가 공포와 편견을 극복하기를 기대해보자.


<오류>

127p

"오스카상을 받은 영화감독 빌레 아우구스트가 대표적입니다."

-> 빌레 아우구스트는 <정복자 펠레>를 만든 감독인데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번 받은 기록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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