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회화 100선 - 1900~1960
국립현대미술관 엮음 / 얼과알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대규모 근대 미술전이 열렸었던 모양이다.

도록으로 출간됐는데 한 권의 책 형식이라 특이하다.

책 크기 때문인지 도판이 다소 작고 색감이 어두운 게 아쉽지만 1900년부터 1960년까지의 근대회화 초창기 시절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100점이나 실려 있어 미술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아쉬운 점은, 당시 전시를 주관했던 학예사 정준모씨가 다시 출간한 <한국 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과 거의 일치해 새로운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과 디자인만 바꾸고 내용은 똑같은 개정판 개념이었던 모양이다.

다시 보면서 정리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막연히 우리 미술은 서구에 비해 아류작, 지방 화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회화라는 양식을 완성하고 세계의 조류에 발맞춰 발전해온 역량을 새삼 확인했다.

특히 수묵화의 현대화는 동양적 전통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훨씬 더 드라마틱해 보인다.

고루하게만 느껴졌던 현대 수묵화의 변신이 정말 놀랍다.

이당 김은호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변관식, 노수현, 이상범, 허백련 등에 이어서 장우성, 장운상, 박소운, 이유태 등 여러 화가들의 현대적 감각과 기법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화가들은 대체적으로 장수해서 젊은 시절 그림과 노년의 그림들이 또 다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이런 걸 보면 이중섭이나 이인성 등 30대 요절한 화가들의 삶이 너무나 안타깝다.

젊은 시절에 이미 회화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였으면 노년으로 갈수록 얼마나 많은 작품과 창의성을 보였을까.

회화가 단순히 자연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가의 관념과 창의성을 녹여내고 다양한 미학적 실험을 하는 예술임을 새삼 깨달았다.

관심이 적었던 비구상 작품들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긴다.

정말 좋은 독서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0p

주로 문인사대부들에 의해 진작된 남종화는 고답적인 정신세계를 지향함으로서 화공들에 의한 기술적 바탕의 북종화를 천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와 같은 풍조는 아직도 전통화단에서 왼전히 불식되고 있지 않은 편이다.

1920년대에서 40년대에 이르는 사이 전통화단에 영향을 미친 일본화의 감성과 방법은 주로 진한 채색과 리얼리즘에 의한 현실경의 묘출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사생에 근거한 제작의 태도는 과거 관념의 유희로서의 작화방법과 대조를 이루면서 그만큼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다. 있는 것, 보이는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인다는 리얼리즘의 정신은 지금까지 관념의 체계로 이해하였던 동양의 회화관에 커다란 변화의 동인이 되었다.

16p

서양화에 대한 전통이 전혀 없는 한국에서 건너간 김관호가 이미 서양화의 전개가 반세기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의 학생들과 겨루어 당당히 1등을 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예외적인 사례를 제쳐놓으면 전반적으로 20년대 초까지는 습작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상이다.

72p

원경과 근경, 중경에 전통적인 방법으로 풍경을 배치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운필법을 통해 전통회화가 현대적 화법과 만나 전통 수묵산수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작품인 동시에 노수현 회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148p

우리 주변의 야일한 자연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첩첩산중의 폭포와 노송이 어우러진 중국의 전통산수화에 등장하는 소재나 구성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눈에 익은 일상적인 자연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을 그려내기 시작하였다.

162p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천재화갈 불리웠던 이인성은 1950년 비운의 죽음을 맞으면서 신화적인 인물로 미화되기도 하지만 반면 관전작가라는 이유로 비판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천부적인 예술적 감각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1p

장운상은 고운 필선과 밝은 색채로 그렸으며 이들은 모두 철저한 묘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회화는 어디까지나 대상의 재현이고 그것을 통해서 정서나 감동을 전하는 고전적인 미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류>

42p

김영기는 서울에서 청강 김규진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강은 김영기의 호이고, 아버지 김규진의 호는 해강이다.

162P

일본의 궁내성이 이인성이 같은 해 열린 <제13회 제국미술원 전람회>에 <여름 어느 날>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자

-><여름 어느 날> 이 아니라 <가을 어느 날>이다.

184p

박노수, 세세옥, 권영우 등이 그들이다.

->세세옥이 아니라 서세옥이다.

219p

소치 허련의 손자이며 그의 아버지 허영도 화가였다.

->허영이 아니라 허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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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모습, 한국의 아동생활 한말 외국인 기록 13
E.G.켐프 외 / 집문당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른 책에서 인용된 글귀를 읽고 구한말 아동들의 실태가 어땠는지 관심이 생겨 읽게 됐다.

오래 전 발간된 책이라 책바다를 통해 구했다.

19세기 말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들의 기록은 피상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이 많아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곤 하지만, 우리 전통사회의 모습을 현대인이 아닌 당대인의 눈으로 직접 관찰한다는 부분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책에 나온대로, 기독교 국가과 비기독교 국가의 차이를 가장 저명하게 보여 주는 부분이 바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아닐까 싶다.

기독교 유무보다는 오히려 전통 사회와 근대 사회의 차이 같아 보인다.

여성 선교사의 눈으로 묘사해서 그런지 당시 조선 여인들은 마치 가정의 노예와 같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들 역시 방임과 학대에 노출되어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어에는 home이라는 단어가 없고 house 만 존재한다고 했다.

서구인의 오리엔탈리즘 운운할 수도 있겠으나 확실히 전통사회, 특히 주자학이 지배했던 폐쇄적 신분제 사회의 여성의 지위는 종속적 존재에 불과했던 듯하다.

여전히 명예살인이 용인되는 오늘날의 이슬람 사회를 보는 느낌이다.

이른바 메갈페미니즘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21세기의 대한민국과 100년 전의 조선은 확실히 전혀 다른 사회 같다.



<인상깊은 구절>

35p

대체로 한국인들은 유럽의 어떤 나라와도 필적할 정도로 정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옷을 하얗게 하고 잘 세탁하는 데 가장 원시적인 도구를 가지고 끝없는 시간과 정열을 쏟는다

40p

한국의 여성들은 이름이 없다는 이상한 결핍증으로 상처를 입는다. 여자들은 애칭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나 이름은 없다. 

44p

한국의 많은 맹인들은 불쌍한 사람이다. 그들의 생계 유지 수단은 점을 치는 것이다.

윤치호는 전직 학부대신으로서, 토착 교회의 지도자이며 교양 있고 세련되어 어떤 나라에도 자랑할 만한 사람이다. 그는 교회의 엄청나게 빠른 성장에 기인하는 위험을 지적했으며, 교회의 성장에 따른 책임과 더불어 교회에 대한 바람직한 신뢰를 주장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배움에 대한 소질과 함께 교육열이 매우 높으며, 성경 공부에 엄청난 정열을 바쳤다.

한국 교회의 또 다른 인상적인 측면은 그들이 <기도>에 집착하고 기도의 효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점이다. 새벽 기도 모임에 대해서는 벌써 언급했지만 나는 우리 모국의 교회에서는 이와 유사한 행렬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극도로 가난하다는 것과 그들이 몸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원하는 일의 양에는 엄청난 자기 희생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전교 초기 시절부터 확실히 한국은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호발할 성향이 다분했던 듯하다)

59p

친자이든 양자이든, 조선에서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것이 모든 자식들의 의무로 여겨진다.

한국의 양반 사회에서 딸들은 아버지에게,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이 예절이다. 또한 가라거나 혹은 앉으라고 할 때까지 선 채로 있어야 하는 것이 예절이다. 

64p

일본 국내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특징인 공손함을 한국 내 일본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가 없다. 일본 정부는 불안을 야기시켜 온 사람들을 철수시키고 좀더 훌륭한 공무원을 공직에 앉힐 시도를 꾸준히 할 것이 요망되고 있다. 한국인들은 국제 조류의 기회를 무시하고 고집스러운 쇄국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 그러마 그 대가는 너무나 쓰다.

 한국인들이 최근에 겪은 가장 슬픈 손실의 하나는 이토 히로부미 공작을 잃은 것이다. 그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친구였던 일본의 공작을 살해한 사람은 다름아닌 한국인이라는 사실에서 운명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현대 일본을 찾아서>에서도 이토가 그나마 조선에 호의적인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안중근의 암살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무지한 테러였다고 말이다. 제 3자와 한국인의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67p

작년 서울에서 콜레라가 발생했는데 일본인들의 놀라운 노력에 의해서 약간의 희생자를 내고 퇴치되었다.

76p

논은 경작지이 중 부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며 소가 논을 일구고 있었다. 목장인 땅은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한국에 온 이래 한 마리의 양도 보지 못했다

87p

통행 수단에 대해 말하자면 단지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첫째로는 조랑말인데 느린 걸음으로 인해 누구든 몹시 지친다. 둘째로는 가마인데, 그것을 타고 있는 동안 줄곧 가마꾼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비록 주씨가 한국인들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나 그의 존재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에게 확실히 가치있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을 크게 존경하기에 우리의 작은 일행에 위엄을 심어 주었다. 주씨와 같은 인물을 우리가 밑에 사람으로 데리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우리를 고관대작으로 보고 있었다.

88p

우리는 한국에서 만연하고 있는 그 절망적인 비능률적 습성을 다시 한번 기꺼이 감내해야만 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편안하게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었다. 

제물포 사람들은 항만 안에 있던 러시아전함들이 일본전함과 맞서기 위해 만 밖으로 나오다가 격침되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은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그것을 지휘했던 백전불굴의 용기 -그것이 두 나라 군대의 특성이다-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7p

한일합방 이후 일본 총독부는 전반적으로 볼 때 조선의 물질적인 개명과 향상에 많은 일을 했다.

25p

영어의 가정(home)이라는 것과 의미가 상통하는 어휘가 없는 민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한국어에는 집(house)이라든가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댁(宅)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지붕이 있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가정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한국인들은 참으로 가부장적인 사람들이어서 가장이 능력만 있다면 8촌까지의 권속까지 같은 울안에 들어와 산다.

조선의 가옥에 관한 문제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난방에 관한 문제인데, 그 방법이 비록 경제적이라고는 하더라도 통풍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아주 비위생적이고 치명적이다.

31p

한국 여성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그들은 지적으로나 지위,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그들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자라 온 오라버니들보다 더 열등하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가 생활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고자 한다면 일찍 결혼해서 남편과 시어머니께 철저하게 복종해야만 한다.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은 그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시갓댁 조상을 받들어 모실 아들을 낳음으로써만 좀더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사내아이를 가진다면 그의 가정 생활은 정말 행복하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언제인가 그도 자기의 며느리에게 차례로 고된 일을 넘겨주고 며느리에게 똑같은 복수를 하며 그 자신이 종살이에서 벗어나 이제는 종을 부리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여인네들의 엄격한 폐쇄성은 여전히 원시적인 고집과 밀착되어 있으며, 이는 그들을 일종의 가사 노예와 고된 일은 물론 무지와 미신 속에 묶어 두려는 데에 그 책임이 있다. 

사실상 여성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불신하도록 하기 위해 여인들은 무지와 가정이라는 좁은 공간에 구속당한다. 서양인인 우리는 여성에 대해 그러한 대우에 대해 분노를 느끼기 쉽지만 여인네들의 조심스러운 폐쇄성은 오히려 자신을 좀더 많이 드러냄으로써 부딪칠 수도 있는 부도덕한 상황들에 대해 최상의 보호책이 된다.

39p

불교는 한때 왕실에서 숭배하는 국교이기도 했으나 일본에서처럼 국민들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불교와 유교 두 신앙으로부터 나온 많은 신념의 요소들은 원시적인 신의 숭배와 혼합되어 종교적 신념들의 이상한 잡신의 모습을 형성해 놓았으며 그 결과 모든 한국인의 정신을 복잡하게 해놓았다. 

"한국인의 본질적인 신앙은 영혼 숭배라고 할 수 있다."

46p

귀중한 생명이 그토록 많이 죽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조건하에서 생존하고 성년기까지 성장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48p

호랑이는 한국에서 알려진 동물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기 때문에 가장 두렵게 생각되며, 호랑이가 이야기꾼에게서 가장 빈번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53p

기독교 국가와 비가독교 국가를 비교함에 있어서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비교보다 더 명확히 양자 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방법은 없다.

(그보다는 근대 사회와 전통 사회의 비교라는 생각이 든다)

60p

그 가정이 부유하고 노예나 하인들을 거느렸다면 젊은 신부가 반드시 고통을 겪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보통 가정은 안락한 생활 수단도 갖기 못해서 모든 가족들은 언제나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어린 신부가 이런 집으로 갈 경우 장래는 어둡고 슬픔으로 가득할 것이다.

63p

당신은 온갖 종류의 무서운 질병과 그것을 잘못 취급하고, 늙은 무당들이 그들에게 행한 무시무시한 일들로 인해서 일어난 상처로 고통받는 많은 어린이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개한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무서운 광경들 중의 하나는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불필요하게 고통받는 환자이다.

80p

가련한 형수, 그 당시를 회상해 보면, 형수의 운명은 확실히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다른 불친절이 없다 하더라도 형의 잔학함과 사악함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의 연약한 육체는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딘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자포자기하여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절망적인 고통과 불행을 끝냈다. 가련한 형수!



<오류>

37p

1907. 왕은 일본의 압력으로 그의 조카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조카가 아니라 아들이다.

50p

주문모가 순교할 때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주문모는 1752에 태어나 신유박해 때인 1801년에 순교했으므로 25세가 아니라 49세 때 사망했다.

51p

1861년에 다섯번째로 조선 교회의 밀사가 북경에 도착했다. 주교는 밀사의 긴급 요청에 못이겨 그들에게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약속했다.

->주문모가 신유박해 때 순교 후 다시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한 것이 1836년이므로 문맥상 1861년은 잘못 표기된 년도 같다.

59p

대비 홍씨 : 헌종의 계비였던 정효왕후를 의미함

->정효왕후가 아니라 효정왕후이다.

65p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자는 일본에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일본이 아니라 중국의 뤼순에서 재판하고 사형당했다.

89p

그것을 지휘했던 백절불굴의 용기

->백전불굴의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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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주제가 칭기스 칸이 아닌 그 딸들이라 너무나 읽고 싶던 책이었다.

인천시는 관내 도서관끼리 상호대차가 안 돼서 서구도서관까지 직접 가서 빌린 책이다.

잘 몰랐던 칭기스칸의 딸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칭기스 칸의 환생이라 일컬어지는 만두하이의 일생까지 흥미롭게 읽었다.

당시 상황을 이야기식으로 재구성하는 부분이 흥미를 돋우기보다는 몰입을 방해하는 듯해서 아쉽다.

칭기스 칸은 여덟 명의 딸들이 있었는데 역사 속에서 많이 지워졌다고 한다.

그녀들은 사위국으로 시집가 아버지의 정복 사업을 뒷받침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는데 아버지 사후 남자 형제들 특히 우구데이에게 핍박을 받고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칭기스 칸의 사위는 구레겐이라는 지위를 받고 몽골의 동맹 세력이 됐는데 전장에 끌려 다녀 일찍 사망하면 딸이 통치를 하게 된다.

그런데 고려는 흥미롭게도 부마국이면서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았고 덕분에 원의 공주들이 고려를 좌지우지 하지 못했다고 나온다.

몽골인이면서도 한국인이었던 고려 왕들의 인간적 고뇌가 잠시 나와 인상적이었다.

칭기스 칸 사후 몽골의 대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서 며느리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북원으로 쫓겨간 이후 분열된 몽골을 통일한 다얀 칸과 왕비 만두하이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보르지긴 가의 후손들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살해된 칸의 미망인 만두하이는 권력있는 장군과의 혼인을 거부하고 유일한 적손 바얀 뭉케를 칸으로 세우고 혼인한다.

7세의 어린아이가 칸이 되고 16세 연상의 만두하이는 남편을 앞세우고 오이라트 부족과 반란자들, 명나라를 제압한다.

둘은 이상적인 부부가 되어 무려 8남매를 낳는데 특이하게도 세 번이나 쌍둥이 형제를 낳아 보르지긴 가문은 번창하게 된다.

그녀는 35년간 전투 현장에서 남편과 생사를 같이 하고 70대에 자연사한다.

가히 복된 삶이고 영웅이라 할 만하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 성화제는 19세 연상의 만귀비 치마폭에 빠져 살았으니 극명하게 대조적이다.

원나라 이후 북원의 역사가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72p

칭기스 칸에게는 튼튼한 말과 궁술이 뛰어난 탁월한 기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스텝 지역은 지난 수천 년 동안 이런 말들과 궁수를 자랑해왔다. 그의 독특한 성공은 어떤 비밀스러운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독특한 카리스마와 사람들을 조직하는 능력에서 나왔다.

77p

칭기스 칸은 추종자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을 스텝 지역에서 나는 것들로만 충당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 평화, 우유, 고기를 누리게 되었으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동경하게 되었다. 

172p

어떤 알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의 게르를 마구 찢는 술 취한 자처럼, 보르지긴 가문은 자신들을 장엄하고 권세 있는 집안으로 만들어준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들은 한때 영광스러웠던 몽골 제국의 부서진 파편들에 둘러싸여 천천히 퇴락의 과정으로 추락했다.

174p

그의 후계자들은 할아버지 칭기스 칸의 정신을 계속 숭상하고 또 그를 사실상 신격화했지만,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그것을 파괴하면 할수록 칭기스 칸을 더욱더 의식적으로 소중한 경배 대상으로 만들었다. 

180p

보르지긴 가문의 남자들은 아직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통지했지만, 이제 반드시 필요한 군사 장비를 구하는 일보다는 새로운 천막을 설계하고 장식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194p

칭기스 칸 시절의 구레겐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로 시집간 몽골 왕비들은 알라카이 베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고려 왕들은 몽골어를 잘하고, 몽골 친척들도 많았으며, 몽골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몽골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 궁정의 상전들이 볼 때 몽골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은 동시에 한국어를 했고, 한국 친척들이 있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은 고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의 이런 정신분열적 생활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요구했다.

203p

중국에서 하마하여 그곳에서 1세기 이상 살아온 몽골 인들은 가혹한 몽골의 생활 조건에서 살아남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들에게 사냥은 정교하게 의식화된 스포츠일 뿐 생존 기술이 아니었다. 사냥이라고 하면, 수송용 코끼리를 준비하고, 지루한 저녁을 즐겁게 해줄 무희들을 동원하고, 사냥감을 대신 쫓아줄 숙달된 전사를 대동하고, 몰이꾼을 시켜서 왕실 가족이 궁수를 데리고 기다리는 곳까지 사냥감을 몰아주면 천천히 쏘아 잡고, 그 다음에는 그 사냥감을 대기 중인 요리사에게 주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오락용 행사였지 생존을 위해 힘들게 뛰어야 하는 생계형 행사는 아니었다. 그들은 야생 동물을 뒤쫓는 방법을 몰랐고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말리는 법은 더더욱 몰랐다.

220p

몽골 족은 지난번 중국 통치에서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중국을 통제하기보다는 정복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몽골 족은 중국을 점령하거나 경영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23p

이 피비린내 나는 학살극 때문에 민간에는 이런 말이 생겨났다. "귀족들은 모이면 죽고, 개들은 가뭄이면 죽는다." 이런 속담은 세력 있는 자들에게 위협 혹은 경고가 되었다.

247p

소규모 몽골 야영지들을 정복하는 것은 첫 싸움에 나선 젊은이와 모험을 전혀 해보지 못한 노인에게는 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정복당한 부족들은 하나같이 가난했다. 본격적인 침략과 약탈을 하려면, 그들은 고비 사막 남쪽의 실크로드와 중국 도시들을 목표로 삼아야 했다.

250p

몽골족과 명 조정은 서로에 대하여 또 자기 자신에 대해여 엉뚱하면서도 때때로 어리석은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모든 사회는 나름대로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대한 일련의 거짓말과 망상을 만들어낸다. 이런 것들은 명백하게 모순되는 증거가 나타나는데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몽골 족은 자신들이 완전히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고비 사막 북쪽으로 쫓겨간 후에도 자신들이 중국과 세계 대부분 지역의 적법한 통치자라고 생각했다.

299p

몽골 사회에서 개인은 친인척에 기대어 필요한 지원을 얻어가며 인생을 살아나갔다. 친인척으로 된 연결망 바깥에서는 종교, 시장, 형제적 조직 등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불행은 가족이 없는 것이었다. 몽골 신화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고아였다. 고아의 슬픈 운명과 공허한 미래를 슬퍼하는 노래나 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두 번째로 비극적인 인물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면서 재혼할 만한 친척을 뒤에 남기지 않은 과부였다.

303p

전임자들, 특히 남편의 증조부인 에센은 중국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런 사례들은 몽골 족에게 중국의 대군과 요새 도시들을 정복할 군사적 힘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칭기스 칸은 이미 당대에 화약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줄 알았지만 무기의 발전은 몽골의 가장 중요한 자산인 마상에서 활을 잘 쏘는 능력을 빛바래게 했다. 아무리 훈련을 잘 받고 실전 경험이 많다고 할지라도 활과 화살을 사용하는 전사는 대포와 소총을 상대로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정주 문명은 유목 문명보다 화약을 더 잘 다루었다.

305p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대칸이었으므로 전쟁은 그의 직업이 되었고, 전쟁 기술은 아무리 빨리 배워도 빠른 것이 아니었다.

328p

그녀는 황금 왕자의 부정적인 사례로부터 고비 북부의 몽골인들과 남부의 몽골인들을 단합시켜 공동의 노력에 나서도록 하는 게 아주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사 남북 몽골인이 단합한다고 하더라도 중국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 세대의 스텝 통치자들이 선호했던 영토의 점령 및 확대 정책과는 다르게 만두하이는 지역적 선별 전략을 추구했다. 불복종하는 백성들로 구성된 거대 제국을 정복하고 조직해서 통치하기보다는 몇몇 거점 지역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331p

전쟁에서의 승리는 그 어떤 정통성 주장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는 법이었다. 전쟁에서 이긴다면 베그-아르슬란은 얼마든지 몽골 역사의 천명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336p

변경 위수병 중에는 사회 부적응자, 유배자, 범죄자들이 많았다. 이런 병사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정은 때때로 민간 행정관을 변방에 보내어 이런 병사들을 잘 교육하고 단속하여 적진으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명나라 군대에서 출세길은 병기보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변방의 장교들은 세련된 글쓰기 솜씨를 연마했고 군사적 승리보다는 어휘와 비유의 기교를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었다. 베이징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던 교양있는 관리들은 이런 문학적 군사 보고서를 아주 매력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362p

만두하이 부부는 상대방을 제거하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함께 지냈으며 서로에게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부부간의 금실도 아주 좋았다.

364p

칭기스 칸도 말에서 추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몽골의 역사 기록에서 연대기 작가나 관찰자들은 칸이 말에서 떨어진 사건을 결혼, 전투, 정주민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기타 사건들보다 더 자세하고 심각하게 다루었다.

377p

만두하이는 몽골 역사의 흥망성쇠를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제국의 외양을 꾸미거나, 중국이나 무슬림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갈 의도가 전혀 없었다. 만두하이는 몽골 백성과 그녀의 자녀들을 위해 안전하게 보호된 유목 국가 몽골을 추구했다. 도시와 낯선 땅으로 이루어진 제국은 그녀의 목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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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
정준모 지음 / 컬처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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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한국 미술 100년>을 너무나 흥미롭게 읽어 근대 미술을 정리하는 목적으로 읽게 됐다.

108점의 많은 그림들을 양질의 도판으로 소개하고 간략하게 화가들의 일생에 대해서도 언급해 정리하는데 도움이 됐으나 시대상과 작가 나열이라는 지루한 집필 방식이 아쉽다.

앞서 읽은 책처럼 당시 시대 분위기와 예술 작품이 갖는 시대사적 의미에 대해 보다 깊이있는 분석이 주가 됐다면 훨씬 의미있는 책이 됐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근대미술가 개론 편은, 시대사적 사건과 화가들만 잔뜩 나열해서 지루했고 식민당국인 일본의 예술 정책을 평면적으로 비난하는데 그쳐 아쉽다.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서양의 대가들을 먼저 접했고 모더니즘으로 범위를 넓히다 보니 이제는 우리 미술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우리 근현대 미술의 다양함과 완성도에 대해 너무 무지했던 탓에 막연히 서구에 비해 내세울 게 없다고만 생각했다.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근대 회화전을 관람하면서부터 조금씩 관심이 생겼고 이번에도 책에 나온 작가들의 그림을 검색해 보면서 눈길을 끄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났다.

특히 고루하다고만 여겼던 수묵화가 현대적인 미의식과 만나 얼마나 세련되고 개성있게 변모되는지 새삼 감탄했다.

이당 김은호에서 시작되는 신감각주의 영향으로 박노수와 장우성, 장운상 등의 수묵채색화가 마음을 끈다.

근대 화가들의 대부분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서화가 아닌 미술을 받아들였고 프랑스와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았다.

단순히 아카데미즘에 그치지 않고 앵포르멜이나 큐비즘, 표현주의, 야수파 등 당시 유행하는 시대적 흐름을 자기화 하는 여러 화가들의 노력과 성과가 대단하다.

재불 화가 이성자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세 아이를 떼어놓고 프랑스로 유학갔다고 나와서 찾아 봤더니 남편의 외도로 이혼 후 아이들과 생이별 하고 떠난 아픈 사연이 있었다.

검색해 보니 책에 소개된 작품 보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그림들이 많다.

또 요절한 화가들도 있지만 의외로 장수한 화가들도 많아서 놀랬다.

피카소가 92세까지 살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손동진이 98세, 문학진이 96세, 김병기가 무려 103세로 여전히 생존 중이고, 한묵이 103세, 장발이 101세, 채용신, 김흥수, 이성자, 김영기, 김인승, 장우성, 전혁림, 천경자 등도 90대까지 장수했다.

장수와 화가는 흥미로운 관계 같다.

서양 미술은 쉽게 관람하기 어렵지만 우리 근현대 미술은 당장 미술관에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좋다.


<인상깊은 구절>

222p

남종화의 정신은 사실적 정신이 아니라 관념적인 것이다. 따라서 대상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보다는 대상이 담고 있는 뜻의 전달이 중요시된다. 그런 뜻은 손끝의 재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극히 담백한 정신의 표출이 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교에 앞서 뜻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남종문인화의 시조라 불리는 당대의 왕유가 말한 것처럼 의재는 평생 이 가르침을 지켰다.

245p

이 논쟁의 요지는 임화의 '예술 운동이 정치 투쟁 전선에 적극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 김용준이 '프로다운 예술 형식을 먼저 창조할 것'을 요구하면서 비롯되었다. 김용준은 계급 해방의 수단이자 이를 촉진하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예술로서의 기본 형식과 내용을 갖춘 프로 미술을 통해 본질을 잃지 않는 정신주의적 프로 미술을 주장하고, 기능론에 편중된 프로 미술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며 마르크스주의 미학, 볼셰비키 예술론을 비예술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용준은 가장 근본적인 것은 프롤레타리아 의식의 문제이며, 자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무정부주의, 사회주의가 출현했다면, 예술에서 반 전통은 반 아카데미즘이고, 따라서 반 전통적인 입장에서 출현한 미래주의, 입체주의, 표현주의, 러시아 주성주의를 프로 미술의 형식으로 제시했다. 김용준의 주장은 임화를 비롯한 프로 미술계로부터 무산계급적 현실 인식에 기반하지 않은 데카당한 이론이란 지적을 받았지만, 심영섭, 김주경 등은 김용준과 같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오류>

22p

대조전에 오일영과 이용우가 그린 <봉황도>와 <백학도>

-> 오일영과 이용우가 <봉황도>를 그렸고, 김은호가 <백학도>를 그렸다.

277p

이용우, 보성전문학교 창설

->이용우는 화가이고 보성전문학교 창설자는 이용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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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미술 - 미술사 연구총서 4
김이순 지음 / 서울하우스(조형교육)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저자의 신간 <조선왕실 원의 석물>을 너무 재밌게 읽고 다른 책도 찾아 보게 됐다.

2007년에 출간된 책이라 시의성에 떨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도판이 정말 훌륭하고 조각, 특히 용접조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좋은 기회였다.

저자의 전공이 조각이라 그런지 한국의 근현대미술이라는 제목보다는, 한국의 조각미술사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용접조각이란 무엇인가, 구상조각이 사실 재현 조각과 어떻게 다른가, 이우환의 모노파가 한국 단색주의에 미친 영향, 설치 미술과 영상 미술의 특성, 조각가 김복진과 권진규의 예술관 등에 대해 정말 흥미롭게 읽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철학적인 내용, 특히 실존주의와 한국적 미니멀 조각에 대한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의 미니멀주의와 한국의 미니멀 조각이 어떻게 다른지 막연히 느껴지긴 하지만 정말 작품에서 평론가들이 말하는 그런 추상적인 사고는 전혀 와닿지가 않는다.

전통 미술이 대상의 재현에 초점을 맞춰 얼마나 똑같이 묘사하는지 기술적 부분을 중시하므로 장인이라 불린 반면, 현대의 예술가들은 구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그 형식이 어떻든 간에 작가의 내면을 표현하는 정신성의 추구가 가장 크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철학자라고 해야 할까?

예술가란 기술적 측면보다 정신의 표현이 훨씬 본질적인 것 같다.

그렇다면 조영남 대작 사건도 현대미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해프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지막에 실린 권진규 조각가에 대한 대담이 인상적이었다.

한 작가의 일생을 전기가 아닌, 작품을 통해 돌아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임을 느낀다.

우리나라 미술사가 좋은 게, 평론을 읽고 당장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미술 향유층이 두터워져 좋은 미술가들이 많이 나오고 평론이 활발해져야 대중들도 미술 작품을 많이 감상할 수 있을 듯하다.


<인상깊은 구절>

32p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1868년에 설립한 게이오 의숙 같은 교육기관을 통해 민간 계몽활동을 벌이는 한편, 이러한 계몽은 정부의 혼자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기에 지식인 등 사회의 엘리트층이 정부와 협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근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집권적 정부 하에어 이를 지지할 근대국민의 형성이 필요했고, 또 이러한 일에 앞장설 민간 지도력으로서 관료주의를 벗어난 지식인과 기업가들의 후원이 당시의 과제였던 것이다.

75p

동경미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김복진이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의식을 갖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99p

일제가 1930년대 후반의 전시체제에서 한국 여성들에게 근검절약하여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할 것을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병사가 될 국민'을 낳아 키우도록 촉구했다는 직접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1938년부터 비상시국임을 강조하며 한국 여성들에게 강요한 것은 후방에서의 노동과 의식주의 긴축, 절미 등의 근검절약이었다. 1942년 이전에 일제는 우리에게 황군에 지원하기를 권장하기는 했지만, 현실적으로 내선일체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보낼 정도로까지는 조선인의 충성심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101p

일제가 한국작가들에게 특별히 시국미술을 제작하도록 강요했다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실제로 한국작가들이 시국미술을 적극적으로 제작한 예도 드물다. 실제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한국작가들이 시국색을 직접 띤 작품을 제작하기를 기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자연 연구와 함께 고전 연구를 통해 로컬 컬러를 띤 작품'을 제작하여 문화를 개척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당시 신문 사설에서조차 한국 미술가들에게는 여전히 '반도의 전통과 풍속'을 통해 향토색을 표현하고, 각자 자신이 타고난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하여 작품제작에 전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113p

서양미술에서 베르트 모리조, 케테 콜비츠, 모더존 베커 등의 여성미술가들이 어머니로서 경험과 자의식이 반영된 초상적 성격의 모자상을 제작했던 경우와 달리, 앞서 살펴본 작품들은 대부분 남성작가의 작품이었고, 이옥순 같은 여성작가의 작품조차 일반적인 남성작가의 모자상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183p

우리의 실존주의는 진정한 저항과 참여의 기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박서보가 강조하는 저항이나 부정의 개념은 진정한 현실참여나 저항의 의미라기보다는 전통과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과 저항이었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지극히 미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190p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혈통과 가문을 귀중히 여겼지만 진작 우리의 전통 미술에서 가족을 주제로 다룬 작품을 찾기가 어렵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들은 대를 이어가는 엄숙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여 있는 듯하며, 가족간의 단란함이나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207p

<길 떠나는 가족>에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가장의 모습과 가장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행복해 하는 식구들의 모습은, 현실적으로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돌보고 가족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 가장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며, 이는 전후 사회에서 가장들이 이상적으로 바라던 가족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236p

이우환은 "최고의 표현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보다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빗겨 놓음으로써 세계를 좀더 신선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심문섭은 "자연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정하지 않고 표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사이에 끼어들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주 약간만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조각가의 역할이다"라고 피력한 바 있다. 

245p

예술가의 몸을 승화된 신체로 보았다는 니시다는, 작가에 의한 표현 작용(예술 행위)이 없으면 세계와의 만남이 불가능하고, 예술작품으로 성립하려면 사실상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物과의 대립을 통하여 자연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우환의 모노하 작품을 보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제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작가가 매우 신중히 선택하고 배열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위적으로 사물을 가공하지는 않더라도, 작가의 적극적인 개입 ('모노'의 선택과 배열, 장소 선정 등)을 통해 작품이 성립됨을 의미한다. 작가의 철저한 개입에 의해서만 '있는 그대로의 모노(物)'가 '미술작품'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우환의 논리로 보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작가의 개입여부에 달려 있다.

254p

이우환은 미술가들이 선망하던 비엔날레 출품의 기회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 자신의 모노하 이론에 부합하는 작가를 선정함으로써 이우환과 모노하는 한국화단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되었다. 

262p

전후 파리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앵포르멜 미술뿐만 아니라 구상미술로 전쟁의 잔혹성을 표현했는데, 작가의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이러한 작품들은 사실재현적인 미술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279p

구상조각은 삶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을 드러내는 요소가 결여된 추상조각에 대한 반발을 토대로 형성된 미술인만큼, 현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은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구상조각은 전통의 사실조각이나 추상조각과는 다르다. 

282p

인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서양식 조각개념은 불상조각이나 장승 등 전통조각에서처럼 인체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던 조각개념에서 벗어난 것으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인체를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치중했던 우리의 근대조각은 아직 작가의 내면의식을 직접적으로 담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때문에 김복진이 사상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이념을 조각 작품으로 구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294p

풍속, 기법, 유물 등 소재적인 측면에서 전통의 요소를 찾거나 타자에 의해 발견된 정체성을 내면화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때로는 서구를 '물질주의'로 타자화하여 정신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주를 이뤄왔다. 한국적인 미술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사항이지만, 사실 전통을 계승하여 현대화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에릭 홉스봄이 '전통'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창조물'로서 국민을 결집시키기 위한 국가 이데올로기였다고 주장했듯이, 애초 '한국적인 것'이라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한국인의 의식을 결집시키기 위한 가상의 표상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320p

미국은 록펠러 재단 같은 탄탄한 후원에 의해 새로운 비디오 아트를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선보일 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세계 강대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예술에 뒷받침이 충분하지 못했던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까지도 비디오 아트가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없었다. 끊임없이 첨단의 장비가 요구되는 영상미술은 적극적인 경제적 지원에 의해서만 작가들의 샘솟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구체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59p

권진규 스스로 자신을 장인이라 일컬은 것은 상징적 의미도 있겠지만 그의 꼼꼼한 석고취형 과정과 성형과정에서 드러나는 치밀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356p

"권진규의 작가정신이야말로 한국미술사에서 그가 갖는 중요한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주문제작, 시류, 모방에 머무는 작가들과는 대별되는 것이지요. 그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해석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의 모노노 아와레(아름다움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비애, 주변에서의 소외 등의 도식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권진규의 죽음의 이유를 이제는 가난과 질병, 사회적 소외로 집약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작가로서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의 필연적 선택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전증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렸을 때 작가로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이지요."

"작가정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데 한계를 느꼈을 때 조용히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의 자살은 현실 도피적인 방식으로서의 생의 마감이 아니라 진정 작품을 사랑한 작가였기 때문에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단절되어 도피의 방식으로 생을 마치는 작가가 아닌 것이죠.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지라도 그것은 창작을 이룰 수 없었던 작가에게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권진규에 대해 환상을 깔고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담아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현대 시기를 살아간 작가가 이룬 독보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권진규에 대해서는 이제 자살의 비애보다는 작가정신이 살아있는 작가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야 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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