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목소리 1 - 남성 성악가편
유형종 지음 / 시공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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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춘천으로 파견나가서 기숙사에 한 달 살 때, 한림대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읽은 기억이 난다.

1권은 남성 오페라 가수, 2권은 여성 편이었는데 그 때만 해도 오페라에 대해 전혀 모를 때라 인물 나열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오페라 가수들에 대해 조금씩 관심이 생겼고 지금도 잘 모르긴 하지만 약간의 배경 지식이 생겨 재독하니 훨씬 재밌다.

내가 알고 있는 성악가라고는 얼마 전에 타계한 루치아노 파바로티 뿐이라 아쉽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겨낸 불멸의 이름을 획득한 가수들이 실려 있다.

오페라 가수라고 하면 고음을 지르는 테너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베이스나 바리톤 배역들도 스타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또 몸을 쓰는 일종의 육체 노동이라 그런지 쇠퇴기가 빨리 오고 화가들보다 수명도 짧은 것 같다.

언어의 문제도 있어 다양한 오페라를 소화하기 위해 여러 언어를 잘하는 것도 유리한 듯 하다.

플라시보 도밍고도 잠깐 언급된다.

내가 이름을 알 정도로 현존하는 최고의 테너이고 무엇보다 아주 다양한 레파토리를 소화해 낸다고 한다.

유명 가수는 어떤 배역이든 다 잘하는 줄 알았는데 레파토리를 넓히는 것도 노력을 많이 해야 하는 큰 시도인 듯 하다.

여러 가수들이 다 흥미로웠지만 딱 한 사람을 꼽으라면 프랑코 코렐리다.

사진으로 보니 아주 잘 생긴 이탈리아 가수인데 뛰어난 자질을 가졌음에도 무대에 오르기 전에 끊임없이 긴장하고 자신을 채직찔하고 그럼에도 막상 오페라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훌륭하게 배역을 소화해내는 완벽주의적이고 강박적인 성격이 인상적이었다.

내가 강박적인 성격이라 이런 심리가 너무나 이해가 된다.

나는 비록 이런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훌륭한 성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고 스스로를 압박하는 그 심리를 잘 알 것 같다.

기악처럼 이른 나이에 데뷔한 사람보다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다가 성년이 넘어서 전문 성악가로 접어든 사람도 많아 놀랬다.

요즘말로 하면 아이돌 연습생 보다는 오디션에 합격해 가수가 된 경우가 가능한 모양이다.

그만큼 오페라가 일상화 되고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서구 사회라 가능할 것 같다.

심지어 어떤 가수는 옥스퍼드 역사학 박사학위까지 가지고 있었다.

같이 실린 사진들도 훌륭하고 글솜씨도 무난해 편하게 읽었고 올레 TV로 오페라를 감상해 볼 생각이다.


<인상깊은 구절>

196p

코렐리는 격정적인 음성이 뿜어내는 야성적 이미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굉장한 음성을 갖고 있는데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는 거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상태였으며, 무대에 올라서도 몸이 풀리고 제대로 연기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테발디는 준비가 끝났고 오케스트라도 스튜디오에 모였는데 벌써 도착한 코렐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 갔나 찾아보았더니 글쎄 로레타가 고개 숙인 남편의 등을 두드리며 이제 되었으니 스튜디오에 입장하라고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야 스튜디오에 올라왔는데,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끝내주더라고요!"

"나는 항상 긴장해 있었습니다. 데뷔 초기에는 높은 B나 C음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막상 높은 음을 잘 부르게 된 다음에는 그걸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공연이 없는 날에도 목소리가 제대로 살아 있을까 계속 의심했지요. 나는 내 모든 공연을 녹음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걸 듣느라 3시간이나 보냅니다. 지치고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못 했던 것이지요. 테이프를 듣고 만족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잠을 설치고, 그렇지 못하면 절망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슨 인생이 이렇답니까?"

201p

자기 과시적 태도를 지녔던 델 모나코와 달리 코렐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또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가수였다.

"수면 중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상시키고자 정진하기 때문에 절대 편안히 쉬지 않습니다. 만일 내게 완전히 자유로운 석 달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성악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데 쓸 겁니다."

225p

그가 택한 방법은 위대한 이탈리아 선배 테너들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란 네 사람을 선정해 그들의 레코드를 계속 들으면서 거의 독학으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현명하게도 베르곤치는 그들의 음성을 모방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연구한 것은 테크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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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3 0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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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학술총서
정재서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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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도교 관련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도록과 함께 전시됐던 책이라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 오랫동안 숙제처럼 갖고 있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편집이나 내용이 다소 옛스럽긴 하나 3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읽기 편하고 도교가 아닌, 한국 도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무척 신선하다.

도교도 모호한데 한국 도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고구려 고분 벽화에 도교적 색채가 보인다 정도 밖에 몰랐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도교는 고구려 영류왕 시절 당으로부터 전해진 역사적 기록 외에도 자생적 요소가 있었다고 본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한국 도교의 자생적 기원과 고유성을 밝히는 것이다.

화랑의 신선적 성향이나 고구려 벽화의 신선들, 백제의 금동대향로 등을 증거로 내세우고 최치원을 도교의 비조로 본다.

정확히 이해는 못했지만 산을 숭배하고 수련을 통해 신선을 지향하고, 성황신이나 칠성신, 조왕신 같은 무속적인 것도 자생적 도교의 속성으로 보는 것 같다.

샤머니즘이나 무속이 곧 원시 도교라 할 수 있을까?

중국은 도교가 하나의 종교나 학파로써 명확히 실체가 있는데 한국의 도교는 저자의 책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도교가 발해만 주변의 동이에서 비롯된 변방적 성격의 사상으로써 중원과 다르다고 강조하는데 동이가 곧 한민족도 아니고 중원이 아니면 중국이 아닌 것도 아니니 공감하기가 어렵다.

조선 시대 단학파에 대한 고찰이 무척 흥미롭다.

주자학 일변도의 시대라 다른 학문이라면 기껏해야 실학이나 양명학 등 유교의 다른 갈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적 수련을 통해 신선의 경지에 오르려는 단학파라는 흐름이 있었다는 게 신선하다.

김시습, 정렴, 정지승, 권극중 등이 소개된다.

또 최제우의 동학이나 증산도, 원불교 등도 수련을 통한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불교는 이름 때문에 막연히 불교 계통인 줄만 알았는데 저자의 평대로 다원주의적 세계관과 평화를 추구하고 생태계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사상 같다.


<인상 깊은 구절>

67p

한국 도교에서 성립된 복원궁, 소격서 두 도관의 경우를 볼 때 이들은 결국 왕실과 국가의 도교 의례를 담당하기 위한 공적 기관이었지 도교 수행 자체를 목적으로 한 조직은 아니었다. 따라서 본래 중국 도관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 중의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족 계층에는 도관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으나 소규모의 자발적인 수련 조직 및 집단은 적지 않게 존재하여 그들 나름의 계보를 갖고 계승되어 왔던 것 같다. 

79p

한국 도교 자생설은 단군 신화 및 고구려 건국 신화에 대한 도교적 윤색 내지 재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민족 의식이 기본 정서로서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민족 의식의 정도는 후대로 내려갈수록 높아지는데 이는 종주국이었던 명이 망한 이후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소중화적 자존 의식, 점차 기울어져 가는 국세에 대한 우국적인 정서의 표출 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90p

전국 시기에 발해만 일대라는 변경에서 일어났던 문화 현상을 단원론적 문화사관에 의거, 오로지 중국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논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중국과 주변 문화와의 관계를 과연 오늘날의 배타적인 국가, 영토 개념으로 규정해도 좋은 것일까? 국경과 문화의 경역은 역사적으로 유동적이어서 일치할 수도, 서로 넘나들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은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후에 확립된 것인데 우리는 은연중 이 개념을 고대 중국 문화에까지 연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배후에 중국을 고정불변한 실체로 보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속지주의적인 문화사관은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만 하면 과거의 현상일지라도 모두 '중국적'인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대륙 학자들의 '토생토장'이라는 관습적인 표현은 이러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근래까지도 중국은 문명의 외래설, 특히 서방 기원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부심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 문제에 있어서는 이른바 화이론적 사고로써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홀시하고 그것을 모두 중국으로 환원하려는 이중적인 문화사관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역외의 학자들 역시 이러한 입장을 답습할 뿐 주변 문화의 변별적 자질을 읽어 낼 시각이 부재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발해나 고구려 역시 과연 한민족의 역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에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고대사 전체를 현재의 영토 국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다)

104p

당 황실은 원래 서방의 이민족 출신으로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풍조에 따라 자신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노자를 원조로 모시게 되고 이에 도교는 국교가 되어 불교, 유교의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당대의 관방 도교는 도교와 황권의 완벽한 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목적과 긴밀히 상관된다. 첫째로 이미 말하였듯이 당 황실은 도교의 신권을 빌어 자신의 출신을 윤색하고 건국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당시 왕성해 있던 불교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일정한 정도의 사회, 경제적 효과를 도모하였다. 즉, 사원 경제력의 환수로 인한 국가 수입의 증대, 승려의 환속으로 인한 노동력의 증가 및 세수의 증대 등이 그것이다.

123p

도교는 중원 지역에서 자생한 문화라기보다 변경으로부터 유입된 외래의 이족 문화로서의 성격이 짙다. 초기 도교의 경전들이 모두 동방의 방사 계층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전설 및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도교가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주변적, 이족적인 속성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인 가치성을 지향하게 되므로 한국 문화와 쉽게 동화되면서 자연스레 자주 의식의 입장에 선 대외 자세를 갖게 된다. 고구려의 당에 대한, 고려의 주변 강국들에 대한 도전적인 입장들과 같이 역사상 도교와 자주 노선의 정책과는 긴밀한 상호관련이 있다. 근래 천황제와 도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진 바 있었지만, 관방 도교의 강력한 영향하에 성립된 일본의 왕권이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자주성은 이 문제에 대한 유력한 좌증이 될 것이다.

137p

동학은 강일순이 최제우를 선도의 종장으로 칭했을 정도로 도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최제우가 득도를 자각하게 된 신비로운 체험부터 이미 상당히 도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어느 봄날 최제우는 갑자기 몸이 전율하며 자칭 상제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의 계시를 듣게 된다. 최제우의 이러한 종교 체험은 오두미도의 장도릉, 신천사도의 구겸지 등 중국의 초기 도교 교주들의 득도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교주들은 신비 체험 중에 신인(대개 천상노군)으로부터 교법이나 경전은 전수받는다. 최제우와 도교 교주들의 이러한 공통적 체험은 양자의 뿌리가 무속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동학의 교법 중에서 가장 민간 도교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부주의 사용이다. 이른바 영부는 최제우가 앞서의 명상 체험중에 상제로부터 받은 것으로 동학교도에게 있어서는 도교의 불사약이나 선약에 상응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75p

도교의 한국 신화의 전유가 명조의 붕괴 이후 조선 후기의 지식계층 사이에 대두한 문화적 자존의식의 한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도교에서 보여지듯이 한국 신화가 한국 도교의 내용이나 특성을 구현함에 있어 자발적인 전변 과정을 거쳐 왔는지 구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4p

"도가적 인생관이 현실 도피만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한 현실 참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이에 따라 가령 정렴의 도교 수행을 가세의 변동으로 인한 개인적 굴절로 보기보다는 본래부터 있었던 '일가의 학풍'에 바탕한 자연스러운 처신으로 인식했다. ... 이제 우리는 조선조 단학파의 성격이 종래의 피상적 소견과는 달리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띠고 있으며 그것의 이념적 내용은 민족주의라든가 자주적 역사의식과 상관됨을 알 수 있다.

253p

최치원 도교학의 훌륭한 점은 그가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후 신라에 자생하고 있는 민족의 선도를 재인식하고 그 지위를 중국 도교보다 우위에 둔 점이다. 그는 <난랑비서>에서 고유의 선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표명하였다. 결국 최치원은 중국의 내단수련법을 체득하고 이를 다시 풍류도의 삼교합일 체계 안에 수용함으로써 한국 수련 도교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낸 것이다. 최치원 도교학의 이러한 경지는 이후 이자현, 이명, 김시습, 정렴 등에 의해 계승되어 고려, 조선 시기 문인, 사대부 수련 도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최치원을 한국 도교의 비조라고 일컫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58p

"그대는 이미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모름지기 세상 밖의 일을 행하게나"

마지막 두 구절은 노인이 김시습에게 당부한 말이다. 이제 수양대군에 대한 분노, 단종 복위에 대한 열망은 세상 밖 사람이 된 김시습에게 있어서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이란 '세상 밖의 일' 즉 수련을 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다. ... 그러나 이러한 유불도 3교합일의 성향은 김시습 개인 학문의 특성이 아니라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 古仙道의 전통이다. 한국 고선도 즉 풍류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는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자주적 역사 의식이다. 

268p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렴의 막내 아우 정작이 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 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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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권 2024-12-27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내용입니다. 도움이 많이 되어 감사합니다. 조선선비들은 은밀하게 도교수련을 많이 했다고 봅니다.
 
아프리카를 말한다 - 아프리카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
류광철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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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인 저자의 현장 경험과 학구적인 열정이 잘 녹아있는 책.

아프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을 하나로 묶다 보니 피상적인 고찰도 가끔 있으나 거시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자신의 외교적 경험을 살려 각국의 정치 상황도 같이 기술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아프리카라고 하면 너무나 먼 곳이라 쉽게 눈에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몇 권 읽다 보니 감이 좀 잡힌다.

가벼운 책들을 좀더 읽고 보다 깊이있는 책으로 도전해 보려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무엇보다 시장 경제의 중요성이었다.

아프리카가 독립할 당시만 해도 무한한 광물 자원 등으로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기대가 컸으나 독재자로 인한 정부의 실패, 국유화, 종족주의 등으로 그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결국은 최빈국으로 몰락하고 만다.

식민지로부터 같이 독립했던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밖에다 팔 자원이라고는 없었던 한국은 그야말로 맨손에서 일어선 놀라운 공업국으로의 변신인데 오늘날 진영논리에 휩싸여 정작 국내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이 쿠데타로 쫓겨나기 전까지 독재정치를 했고 부패했으며 국가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좋은 정부란 시장의 규제를 최소화해서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비효율의 극치인 국영기업과 엄청난 수의 공무원들이 등장한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공무원이 최고의 직장으로 선호되고 정부는 계속 늘리고 있으니 과연 바람직한 정책인지 의심스럽다.

간혹 양심적인 지도자들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사회주의를 선택해 결과적으로는 폐쇄되고 고립되어 더 가난한 나라로 몰락하고 만다.

탄자니아의 니에레레나 가나의 은크루마 등을 들 수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일지 몰라도 시장의 가치와 효율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을 더 가난하게 만들고 만다.

왜 자본주의가 승리했는지 역사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젊은 인구가 많은 곳이고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에 좋은 정부가 들어서면 얼마든지 성장 가능성이 있고 중국은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

저자의 지적대로 중산층이 성장해 구매력이 상승한다면 10억 인구의 큰 시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와의 교류 방향도 흥미롭게 읽었다.


<인상깊은 구절>

26p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의 협조로 이루어졌으므로 흑인 노예사냥꾼과 백인 노예상인 모두 재산을 축적했다. 따라서 노예무역을 전적으로 백인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43p

아프리카에서 가족관계는 단순히 성적 결합으로 인한 자녀의 생산과 양육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다. 가족은 노동력을 제공하는 일종의 단체이므로 구성원의 숫자가 많을수록 세력이 큰 집단이 되었다. 이 때문에 양자, 하인, 노예들도 가족의 개념에 포함되었다. 사람을 많이 거느린 가장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48p

아프리카 여성의 출산율을 5~8명에 달하지만 도시지역에서는 출산율이 낮다. 그것은 생활비와 양육비가 많이 들므로 아이들이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농촌 지역의 아이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일해야 하는 어머니의 노동 부담을 덜어주는 자산이 된다. 또한 애들은 여성의 노후를 위한 일종의 보험이다. 어머니가 늙으면 자식들에게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아프리카의 출산율, 특히 농촌지역의 출산율은 아직도 매우 높다.

57p

남부아프리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음베키 남아공 대통령이 에이즈 문제에 대해 과학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고 이를 불결한 환경 때문이라고 하여 문제의 본질을 빈곤으로 몰아감으로써, 사람들의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이 느슨해졌고 이 결과 보다 많은 사람이 희생되기도 했다. 음베키는 HIV와 에이즈 간의 상관관계를 부인하고 남아공에서는 전통적인 질병이 에이즈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음베키는 에이즈가 섹스보다 빈곤과 더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음베키는 또 서양 제약회사들이 아프리카인을 모르모토로 삼아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하는 음모론도 주장했다. 그는 에이즈 약 공급을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생물무기 연구'에 비유했다. 그러나 음베키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빈곤층보다 부유층이 에이즈에 더 취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더 많은 섹스 파트너와 관계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아공 정부는 국민에게 에이즈를 예방하기 위해 비트 뿌리나 마늘을 먹으라고 권고함으로써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63p

아시아 국가들이 눈을 크게 뜨고 세계시장 진출을 모색한 반면 아프리카 국가들은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이들은 자급자족과 수입대체 산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을 뿐 수출 증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수출품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겼다. 반면 아시아 국가들은 공산품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진했을 뿐 아니라 영역을 넓혀 아프리카가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수출품 농산품 시장에도 끼어들었다. 불행하게도 아프리카에는 한국의 박정희나 싱가포르의 리콴유 같이 뛰어난 비전과 애국심 그리고 추진력을 가진 지도자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67p

중국인이 이러한 자질을 충분히 이용한 것은 1980년대 등소평이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풀고 자유시장경제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잠재력만 있었을 뿐 중국은 이러한 자질을 경제발전에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 한마디로 말해 아프리카의 경제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사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국가의 발전보다 개인의 이익을 더 중시했다. 지도자는 자신을 전통적인 부족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번 정권을 잡으면 놓지 않는 풍토에서 지도자를 끌어내리려는 야심가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쿠데타밖에 없엇다. 이것이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아직까지도 간헐적으로 쿠데타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다.

71p

서방 경제학자들은 1960년대에는 아프리카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정부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들은 오히려 정부를 경제 실패의 주역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구조 조정과 함게 민간 부문을 육성하여 시장경제의 메커니즘이 작동토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 중의 하나는 방만한 국영기업을 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국영기업을 민간에 이양하는 척만 했을 뿐 실제로는 이를 권력과 연계된 사람들에게 인계하고 중간에서 이윤을 취했다. 또 공무원들은 아무리 비효율적이라도 공기업을 국가 주권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공기업은 우대하면서 민간 기업은 멸시하고 차별했다. 

84p

국가 재원이 거의 거덜난 짐바브웨 같은 나라에서 이와 같은 고액봉급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로 인해 사람들은 국영기업의 병폐가 얼마나 심각한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한편, 정치인은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아직도 국유화, 자원 민족주의 등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구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나라의 발전에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87p

지난 30년 간 5000억 불이 넘는 막대한 원조가 서방으로부터 아프리카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 원조가 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서는 원조는 실패했고 무용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에 비하면 미국 원조로 시작한 한국의 경제 발전은 얼마나 위대한 성취인가!) 

반대로 컬럼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 같은 원조 옹호론자는 외국의 원조를 비약적으로 증가시키는 것이 '가난의 함정'에 빠져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을 빈곤으로부터 탈출토록 하는 가장 중요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삭스의 주장은 대규모 원조가 투입될 경우 가난한 아프리카인도 저축과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어 나중에는 스스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삭스는 후진국이 가난의 함정에 빠지는 원인을 저소득뿐 아니라 보건과 지리적 여건 그리고 자원이 가지고 있는 저주적인 측면에서 찾았다. 험한 지리적 여건을 가진 나라들은 도로나 철도와 같은 인프라를 구축하기 어렵기 때문에 시장을 형성할 수 없고 이로써 고립되어 가난이 걔속된다고 주장한다. 

118p

노예 상인들도 많이 죽었다. 험악한 기후와 자연 환경으로 인해 질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아프리카 해변에 거주하는 백인 상인 중 매년 절반이 죽었으며 대서양을 오가는 선원 중 5분의 1이 죽었다. 그러나 노예거래는 이익이 많이 남는 장사였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되었다. 배로 싣고 가는 도중 많은 노예가 죽는 이유는 수송선의 열악한 환경 때문이었다.  

125p

아프리카인의 자발적 협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유럽인이 노예를 확보하려 해도 한계에 부딪쳤을 것이다. 부족장이나 부유한 엘리트들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권력과 지위 그리고 영향력을 이용하여 노예를 잡아들이고 이들을 유럽 상인에게 넘겼. 이들은 지역 경제를 진흥시킨다는 이유를 내세웠으며 또한 아프리카에는 원래부터 노예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노예상인들은 노예가 전통적으로 아프리카 사회의 한 요소라는 사실을 기초로 노예거래를 정당화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이나 부끄러움이 없이 자신의 형제, 사촌, 이웃들을 잡아다가 유럽인에게 넘겼다. 유럽인이 직접 내륙으로 깊이 들어가 노예를 잡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유럽인은 대개 해안에서 배를 정박하고 중간상인들이 내륙으로부터 노예를 데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해안에서 노예를 구매하는 것보다 내륙에서 노예를 구하는 것이 훨씬 비용이 덜 들었기 때문에 유럽인 중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내륙으로 노예사냥을 나가는 사람들도 간혹 있었다. 

133p

소위 합법적인 무역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하다 보니 이제 아프리카 내에서 노예거래가 성행하게 되었다. 바다를 건너가는 노예무역 대신 아프리카 내에서 노예를 공급하는 비즈니스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들 노예들은 농업은 물론 군인, 경호원, 수공업 근로자, 목축 노동자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에 서부 아프리카에서 노예거래가 어려워지자 대신 사헬과 사하라를 지나 홍해를 건너 아랍으로 향하는 노예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86p

종주국 프랑스는 여전히 아프리카 식민지를 '大프랑스'의 일부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식민지 국민의 정치적 권한이 커진다는 것은 자치를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아프리카인이 프랑스 의회에 진출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영국은 아무리 이탈을 막으려고 해도 시대적 조류에 따라 민족주의가 발흥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상반된 결론을 내렸다. 영국은 1946년부터 아프리카인이 스스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도록 승인하는 계획을 세웠다. 

192p

드골 신봉자인 우푸에부아니는 독립 후 스스로 헌법을 기초하여 1인 통치를 확립했다. 우푸에부아니는 "민주주의는 성숙한 국민을 위한 제도이다. 아프리카와 같이 젊은 국가에서는 당분간 절대 권력을 가진 추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197p

유럽 국가들이 의도적으로 아프리카의 발전을 방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프리카는 산적한 내부 문제로 인해 낙후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잘못된 통치 방식과 그릇된 정책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대표적인 것이 국영기업이다. 국영기업은 비효율과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정치인들은 국영기업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수탈했다. 

203p

니에레레 자신도 1981년 독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지금의 우리는 1972년에 비해 더 가난하다"라고 말함으로써 경제정책의 실패를 시인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몽상에 빠진 니에레레는 사회주의 정책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다. 비록 경제 정책에서는 실파했지만 부정부패 없이 강직하고 엄격한 정책을 펼친 결과 교육, 보건 등 사회 분야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214p

아프리카 지도자들은 야당은 아프리카식 관행으로 보아 이질적인 것이며 잘 운영되기만 하면 1당 체제가 보다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의 철인으로 알려진 탄자니아의 니에레레도 1당 체제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양당 체제는 서방에서 사회경제적 계층 간 정쟁의 결과로 인한 산물인데 아프리카 사회는 본질적으로 무계급사회이기 때문에 양당 체제를 취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당 체제는 정권에 대한 반대세력을 제압하고 독재자를 권좌에 오래 앉아 있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238p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비롯한 몇몇 권위주의 국가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룸으로써 과연 경제발전과 민주화 간에 상관관계가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 일었으며 이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상관관계가 명백하다. 아프리카에서는 실증적으로 민주화가 뒷받침이 되어야 경제발전을 이루는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46p

무학인 이디 아민은 교육과 경험이 풍부한 관리들을 멸시하고 혐오했으며 학식이 높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불신했다. 그러나 서방세계에서는 아민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행동이 경멸의 대상이었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영웅 취급을 받았다. 아시아인들 대거 추방함으로써 서방 제국주의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행동이 아프리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299p

소년군인 중에는 자발적으로 가담한 애들도 많았다. 군에 가입하면 무엇보다 굶을 걱정이 없고 하는 일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 무기 다루는 훈련을 받으면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훨씬 빨리 대가를 얻을 수 있었다. 식량, 돈, 따뜻한 목욕, 어른 대접을 받는 것 등이다. 그리고 동료들이 잃어버린 가족과 친구를 대신해주었다.

313p

주목할 점도 있다. 그것은 중국 기업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이다. 후진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누군가 앞에서 끌고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지인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파상적인 공세, 적극성, 밀어붙이기, 이러한 공격적인 요소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아프리카에 진출한 중국 기업인들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318p

막대한 자본을 배경으로 하는 이들은 어떠한 자원에도 거침없이 투자할 수 있다. 놀랄 만큼 공격적인 이러한 국영회사의 뒤에는 중국정부가 있다. 중국은 서양에 비해 기동력이 빠르다. 서양의 고급 인력은 높은 임금, 보험, 의료, 좋은 집과 하인, 비즈니스석 비행기표, 사륜구동 차량 등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국 근로자는 거주할 곳만 있으면 나머지 조건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서양회사는 여론에 민감하므로 사회적, 환경적 규범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나 중국 회사에게 이러한 부담은 거의 없다. 중국인은 심지어 전쟁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2007년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사막 지역에서 9명의 중국 석유노동자들이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나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곳에서 일했다. 서양회사였다면 아마 현장으로부터 즉시 철수했을 것이다. 서양이 아프리카 국가의 부패, 인권, 환경침해 등에 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것도 중국에게는 플러스 요인이다. 내정불간섭 원칙을 고수하는 중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고마운 존재이다. 

340p

아프리카 최고 부자인 당고트는 권력층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세간의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비지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당고트는 성장하고 있는 아프리카 경제에서 하나의 독자적인 모델을 형성하고 있는 기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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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외면당한 역사의 진실
이희근 지음 / 책밭(늘품플러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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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저자의 다른 책, <산척, 조선의 사냥꾼>과 많이 겹친다

백정에 관한 책을 먼저 내고 그 후에 따로 사냥꾼 편만 모아서 다시 출간한 모양이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조선 포수들의 장렬한 전사 장면은 다시 읽어도 감동스럽다.

이런 애국적이고 장렬한 최후가 우리 민족의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동을 받은 적국 군인들의 기록으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백정은 후삼국 시대 이래로 거란과 전쟁을 거치면서 한반도에 정착한 거란의 후예들과, 원 간섭기 때 정착한 몽골인이 시초라고 한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후 유랑 생활을 하는 이들 수렵인들을 농토에 정주시키려는 많은 노력들이 있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사회 최하층민인 백정이라는 별개의 집단으로 남게 된다.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양인들 사이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았던 걸 보면 신분제가 매우 공고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렵인의 전통을 살려 호랑이를 잡는 사냥꾼이나, 도축업자, 갖바치, 유기장, 유랑 재인 등을 하면서 삶을 영위해 갔다.

동화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얼마나 극단적이었는지 자기들끼리 혼인도 못하게 하고 유랑을 막기 위해 옆 고을로 이동할 때는 관에서 여행허가증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 조금 완화되어 3일 내의 여행은 이장에게 보고만 하면 가능했다는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던 서양 중세 농노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고려가 불교가 국교였던 터라 식육을 금기시 했던 반면, 유교가 국시였던 조선에서는 죄책감 없이 쇠고기를 먹게 되자 농사에 쓸 소가 부족해 도살을 금하게 된다.

그런데 고기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지고 가죽 제품의 수요도 늘어 밀도살이 성행한다.

저자가 한탄한 바대로 수요가 늘면 소를 많이 키우는 방법을 연구할 일이지, 금령을 강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심지어 나중에는 소를 죽이면 사형당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수요는 더욱 늘고 금령으로 값이 크게 뛰자 관리들까지 끼어들어 밀도살과 판매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재수없이 걸리면 백정은 사형당하지만 그것을 주도한 양반들은 유야무야 넘어갔으니 제대로 정책이 실행됐을 리 없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는 사회는 발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조선시대 근엄한 성리학자들과는 조금 다르겠으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도 비슷한 맥락 같다.

조선시대의 소 도축 금지는 미국의 금주법을 보는 느낌이다.


<인상깊은 구절>

57p

본래 양인 신분이었던 자가 고려 말 사회적 혼란기에 압량, 투속 등의 방법으로 천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361년 홍건적의 개경 점령 때 호적이 없어지면서 이들의 본래 신분을 판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왕국은 양천 신분이 분명하지 않을 때 양인 신분을 인정하면서 그들을 특수한 직임에 충당시켰다. 출신은 양인이면서 특수한 일, 나아가 일반인들이 꺼리는 천한 일을 하는 사람, 즉 신량역천인은 그로 인해 다수가 생겨 나고 있었다. 이들 신량역천인은 일반인들이 천하게 여기던 일을 하고 있어서 천인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113p

농업을 보호해서 국가재정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조정이 나서서 소 부족사태를 예방해야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 사육을 장려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농상만이 하늘이 부여한 직업, 즉 천직이라 여긴 위정자들에게 요즘 말로 축산업 활성화대책은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해결책은 하나였다. 수요야 어찌되었든 소 도살을 금지하면 그만인 것이다.

147p

무분별한 백정의 동원이 계속되자 끝내 조정 대신들의 비판마저 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은 상소를 올려 이름만 군사훈련일 뿐이며, 그 실상은 사냥놀이판이 되어 버린 실정을 개탄했다. 왕국의 신민에게 귀감이 되어야 할 지존 및 왕족들이 경비마저 지출하지 않으면서 사냥놀이판을 벌였으니 그 수하들이라고 별 다를 게 있었을까?

218p

수요가 있으면 소 사육을 장려해서 필요한 만큼 공급하면 된다. 사육된 소가 늘어나면 굳이 '牛 금령'을 내릴 필요가 없게 되니 범죄도 줄게 된다. 위정자들이 입만 열면 떠들어 대던 교화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도축 관련 산업도 크게 성장할 수 있으니 신민의 생활여건도 한층 나아질 수 있다. 가령 고기 공급이 늘어나 식생활을 개선시킬 수 있다. 이러면 저들이 그토록 외친 민본주의도 실현된다. 

 오직 농상만이 천직이라 여긴 위정자들은 소 사육을 장려해서 이런 식의 해법을 모색할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常人들의 가죽신과 긴요하지 않은 피물은 마땅히 금해야 합니다"는 우의정 맹사성의 견해가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정책 입안자들은 잔꾀를 부려 평민의 가죽신 금지령 등 온갖 금지령만 양산하려 했다. 이러니 범죄를 줄이지도 못했고 민생도 개선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본주의는 커녕 교화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가죽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도축업은 성장하고 있었으니, 필연적으로 백정의 도축행위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249p

임꺽정과 그 무리가 장기간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백성들이 그들을 의적으로 여겨 정보와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시 백성들이 이들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명종실록>에 따르면 자신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의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들의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65p

조선조 500년이 엄격한 신분질서를 근간으로 이어져 온 일방적 '차별과 멸시'의 시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신분이 양반 계급에 속하지 못했던 상민이나 그 아래의 천민들은 좀체 자신의 자위를 상승시킬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오로지 나라가 뒤집어지고, 조정이 존망을 다투는 화급한 위기에 놓이는 그런 전쟁의 시기만이 유일했다. 신분으로써 모든 것을 강제하려는 조정과 양반계급에게 목숨을 바치는 이른바 '혈세'를 바침으로써 그 바라던 신분상승의 효과를 거두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노비, 나아가 그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의 백정에게는 전쟁이 가문을 일으키는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270p

"이미 등과한 뒤에 한품서용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듯하다. 그리고 전시에 이와 같이 한다면 이들이 싸움에 임하여 누가 힘을 다해 싸우려 하겠는가."

이렇게 한품서용을 둘러싼 조정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법령상, 그리고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결론은 선조의 교시가 그 길을 명확히 하고 있다. 선조는 사실상 모든 관직을 허용하며, 만약 한품서용을 하게 된다면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할 자가 없을 것이라 강변했다.

272p

샌즈는 자신의 책에서 두 차례의 양요 때 백정 출신 사냥꾼의 영웅적인 행위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사냥꾼은 비록 권력자 앞에서 비굴하게 굴었지만 비겁자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토록 불충분한 화승총을 들고 팔이 닿을 만큼 호랑이에게 접근하여 쏴 죽이거나 쇠몽둥이로 때려잡는 그들이 비겁자라는 말을 나는 믿을 수 없다. 호랑이를 때려잡은 직후 그 사람은 권위 앞에 비굴하게 굽실거릴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군은 화승총과 후강포를 가지고 미국 해군과 대적했으며 미군이 총을 쏘아 그들의 옷을 뚫어도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죽었다."

심지어 조선군에게 패배한 프랑스 수병들조차도 조선군을 비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군은 그저 서툰 전사였고 무기가 구식이었을 뿐이었다.

282p

"왜 이 나라가 이토록 황폐한가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설명은 참으로 한국적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가능한 한 외국 사람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연안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내륙에는 호랑이를 몰아내기 위해 숲을 불살랐고 언덕은 그 정상에 있는 토양이 씻겨내려 오래도록 헐벗겨 있었다."

호랑이로 인한 인명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부러 숲에 불을 질렀고, 이런 극약처방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었을 정도로, 한반도에 호랑이가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295p

너무 쉽게 많은 승리로 정신력이 해이해진 프랑스군은 대포도 없이 경무장한 채 정족산성을 공격하다가 호랑이 사냥꾼들, 즉 산행포수들의 매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조선의 군인을 우습게보았던 탓도 있었으리라.

299p

강원도 각 고을에 차출된 관포수를 비롯한 지방군의 향포수는 양헌수의 증언대로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규율이란 찾아볼 수 없었으며, 가장 기본에 해당하는 나아감과 물러섬의 진퇴에 관한 신호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병력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로는 뚜렷했다. 비록 기본적인 군율조차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대열에 합류해 싸움에 나섰지만 이들은 어쨌든 자신들의 무기를 휴대하고 멀리서 강화로 옮겨 와 서울을 넘보던 '오랑캐'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퍼붓는 데 성공했다. 조선을 정복한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었던 프랑스군은 호량이 사냥꾼들에게 일격을 당한 후 강화도에서 서둘러 철수했다.

306p

"광성보를 함락함에 있어서 미군에겐 힘겨운 것이었다. 이곳은 강화의 여러 진 가운데 가장 요충지이기 때문에 조선 수비병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더군다가 이 성 안에는 범 사냥꾼이 있었는데, 만약 이들이 적이 두려워서 도망간다면 조선 백성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과 검으로 공격했다. 그러나 대부분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는데, 모래를 뿌려 미국 침략군의 눈을 멀게 하려 했다.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였고, 수십 명은 탄화에 맞아 강물 속으로 뒹굴었다. 부상자의 대부분은 해협으로 빠져 익사했다. 그동안 조선 진지로부터 '침울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임전태세는 대단히 용감한 것처럼 보였고, 조선 수비병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흉장 위로 상체를 노출시킨 채 항전하고 있었다."

수륙양면의 무자비한 폭격 속에서도 호랑이 사냥꾼을 비롯한 조선 수비대는 제 위치를 사수하려고 처절하게 버텼다. 총을 재차 발사할 기회가 없어 미군 상륙부대와 육탄전으로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할 수밖에 없었다. 틸톤은 그의 아내에게 마지막까지 제 위치를 지키며 죽어 간 조선 수비병의 이야기를 편지에 담아 보내기도 했다.

314p

"조선군은 결사적으로 장렬하게 싸우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다가 죽었다.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국민을 다시 찾아볼 수 없다."

광성보 전투에서만 조선군 350명이 희생당했다. 미군 전사자는 단 3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호랑이 사냥꾼을 포함한 무명의 용사들이 치른 목숨의 대가로, 미군 역시 통상조약 체결이라는 원정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오류>

71p

이후 947년에 태종이 후진을 멸망시키고 나라 이름을 대요로 고쳤으며, 4대 왕인 성종이 982년 즉위와 동시에 나라 이름을 거란으로 바꾸었다.

-> 성종은 6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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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후궁 장희빈 - 한국의 인물 2
지두환 지음 / 역사문화 / 2002년 12월
평점 :
절판


왕실 친인척 계보를 분석한 책들을 여러 권 낸 저자의 책이라 무척 기대를 하고 책바다를 통해 빌려 읽었다.

나중에 나온 <조선의 왕실> 시리즈는 좀더 저자의 해설이 들어있는데 이 책은 순수하게 실록 기사로만 구성되어 있어 편하게 읽히지가 않는다.

한글로 번역이 되어 있으나 요즘에 거의 쓰지 않는 어휘들이 많고 대화도 비유법이나 고사를 인용해 에둘러 말하기 때문에 무슨 얘기인지 쉽게 감이 안 온다.

이렇게 훌륭하고 자세한 실록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이를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면 참 좋을 것 같다.

어렵게 읽고서 느낀 바로는, 숙종은 정말로 감정이 쉽게 격분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남편이 한 명의 후궁도 두지 못하게 했던 명성왕후 김씨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장희빈을 총애하여 수많은 신하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귀양보내 왕비로 세웠으면 그대로 잘 살 일이지, 불과 5년만에 다시 폐위하여 전 부인을 불러 들이고 그녀가 사망하자 이제는 장희빈 탓이라고 기어이 죽게 만드는 것은 뭔가.

더군다나 다음 왕위를 이을 세자의 친모인데 말이다.

아들이 있다 할지라도 남편 마음에 안 들면 왕비의 지위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 걸 보면 왕비 역시 아내이기 전에 왕의 신하가 아니었나 싶다.

연산군의 부인 폐비 윤씨가 그랬고 장희빈도 그렇고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역시 하나뿐인 유일한 아들인데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가.

인현왕후는 아들도 못 낳으면서 친정 세력을 등에 업고 후궁과 불화하는 것이 꼴보기 싫어 무리해서 폐위를 시켰다지만, 그렇게 힘들게 왕비를 만든 장희빈을 특별한 사건도 없이 느닷없이 다시 폐위시킨 것도 이해하기 참 어렵다.

이러니 환국에 여자를 이용했다는 말이 나올 것 같다.

책에도 중간 과정이 생략되어 있고 갑자기 장희재를 유배보내고 중전을 다시 희빈에 지위에 놓는다고만 되어 있다.

옆에서 받들어 모시기 참 힘든 왕이었던 게 분명하다.

박태보의 고문 장면은 너무나 참혹해 읽으면서도 눈쌀이 찌푸려졌다.

그런데도 저렇게 의연하게 답변할 수 있다니 확신범이라는 생각에 좀 무섭기도 하고 좋게 보면 선비의 기상은 군왕의 폭압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

75p

귀양갈 때 김만중의 모친인 윤부인이 전송하면서 말했다.

"영해로 귀양을 가는 것은 선현들도 면하지 못했던 바이니 가거라. 몸 조심하고 내 걱정일랑 말아라"

 이 말을 들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110p

전에 이르기를, '부모가 사랑하던 것은 나도 사랑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아들이 자기의 아내가 마땅하지 않더라도 부모께서 <나를 잘 섬긴다>고 하면, 아들은 부부의 예를 행하여 일생토록 변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내전의 처사가 성심에 합하지 못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우리 선후(先后)께서 당시에 돈독히 어루만져 사랑하시던 일을 생각하신다면 전하의 효성으로 어찌 차마 폐절한다는 뜻을 어려움 없이 가할 수가 있겠습니까?

113p

숙종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비망기의 내용은 전혀 살펴 유념하지 않고서, 기필코 부인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기 위해 도리어 내가 참언을 들어주어 무죄한 사람을 폐출하려 한다고 하니,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139p

성상은 총명이 전고에 없이 뛰어나고 또 영단이 있는데, 단지 한때의 사적인 총애에 빠져 위호를 폐치할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빨리 결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동방은 중국과 달라서 열성들께서 비필(妃匹)을 중히 여겨 반드시 명문 귀족 가운데서 대대로 부덕이 출중한 사람을 선발해 왔다. 임금이 어렵게 여기고 있는 것은 희빈의 출신이 미천하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이에 권대운 등이 장현에게 상을 내릴 것을 청하면서 대신의 은례에 따르게 하였고, 또 장희재를 무신의 극선인 무고와 태복의 자리에 올려 놓았으며, 이에 계속 제수하여 순월 사이에 마구 뛰어 올랐다.

 아, 정사에 주의가 있음으로부터 어찌 후궁의 형이요 여항의 미천한 자가 이 직임에 제수된 적이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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