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가족의 출생과 성장 - 책례가례등록 고전탐독 6
김지영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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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미시 생활사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흥미롭다.

야사 위주의 가벼운 책들이 아니라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교양서들이라 신뢰가 간다.

이 책의 주제는 왕실 구성원들의 의례, 곧 관례와 혼례, 책봉례의 자세한 절차와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바지만 조선은 현대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유교적인 사회였고 의례의 복잡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관혼상제야 말로 사람 일생의 가장 중요한 축이었고 사대부들은 이런 유교적 의례를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적으로 노력을 기울였던 듯하다.

예송논쟁이 과연 일어날 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6p

적장자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와는 별개로 적처가 아들을 낳기란 쉽지가 않았다. 조선 사람의 일상적 삶에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횟수가 많아지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삼년상을 치르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적장자를 낳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그 기간 동안에 의례의 중심에 서 잇는 적장자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재계 기간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특히 부인과의 성적인 접촉을 피해야 했다.

 의례가 일상인 왕의 경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재계하는 날이 점점 많아지면서 성적인 금욕 기간이 늘어나 왕실은 저출산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23p

다음은 연산군이 원자를 얻고 신하들에게 한 말이다.

"지금 원자가 탄생하여 국본이 이미 정해졌으니, 이보다 큰 경사가 없다. 설사 내가 아들이 없다손 치더라도 어찌 사왕이야 없겠느냐. 그러나 적장으로 계승하는 것이 순한 일이다. 구차하게 지손으로 입승하면 나라가 편안하겠느냐. 백년의 사직이 나에게 와서 뒤가 없다면 그 한을 어찌 견디겠느냐?"

 연산군의 말대로 자신의 혈육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더라도 왕위를 계승할 다른 방법은 있다, 그러나 왕비가 낳은 적장자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무런 탈 없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최선이다. 연산군이 신하들에게 내비친 속내가 바로 조선의 왕들이 밤낮으로 원하던 바였다. 

29p

상례에 수반되는 행위 규제는 의례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위반했을 때에는 형사적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60p

조선 후기 유교사회의 심화에 따른 예학의 발달이 왕실과 사가에서 유교의례를 보다 세밀하게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즉 유교의례를 일상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각각의 의례가 갖는 본래의 상징성을 의례 세부 절차와 사용되는 기물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예를 구현하는 수단으로서 으뜸으로 활용된 기물이 복식이었다.

85p

복식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장인이 아닌 예를 아는 신하들이 형태를 고증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엄격한 신분제가 적용된 전통사회에서 왕실의 복식은 반드시 예와 법도에 맞아야 했다. 왕, 왕세자, 왕세손 등 군주이거나 장차 군주가 될 신분은 신하와 차별화되는 복식을 통해 그 신분적 특권을 가시화했다. 

156p

이렇게 관례에서 자를 지어주는 이유는 성과 명으로 구성된 이름을 공경하기 때문이다. 이름은 누구나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금과 아버지만 이름을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자를 불렀다. 이름은 조상과 가문의 존귀함 및 당사자의 존엄함을 표상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별명으로 자를 지어주었던 것이다.

183p

삼간택에 의한 배우자 선택은 왕가의 특권이었다. 효령대군이 이 방식을 써먹은 것은 예법에 어긋날 수밖에 없었는데, 출궁한 왕자는 사가로 보는 것이 당시의 인식이었다.


<오류>

171p

숙신옹주는 태종이 열세 번째 딸이다.

-> 숙신옹주는 태조의 딸이고, 태종의 열세 번째 딸은 숙순옹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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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하는 법 - 넘치는 책들로 골머리 앓는 당신을 위하여
조경국 지음 / 유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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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주제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대출했다.

200 페이지의 아주 가벼운 책이라 정말 30분만에 읽은 것 같다.

책이 너무 많아 헌책방 주인이 된 저자의 약력이 독특한데 에세이 보다는 좀더 실용적으로 책 보관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애서가를 둘로 나눈다면 나는 장서가 보다는 독서가 쪽이다.

그렇지만 항상 책 소유에 대한 욕심은 있다.

어려서는 돈이 없어 못 샀지만 지금은 공간의 문제 때문에 구입을 못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빌딩이 나오는데 그도 책을 처분하지 않는 인간이라고 한다.

책 보관을 위한 작은 빌딩에는 20만권이 있다고 하니 왠만한 도서관 보다 훨씬 많다.

바로 내가 책을 처분하지 않는 인간이라 대학교 때 내 돈 주고 책을 산 이래 단 한 권도 버리지 못하고 수많은 이사 과정에서 이고 지고 다닌다.

공간의 문제 때문에 새 책 구입을 못한다.

이 책에서도 튼튼한 책장에 대해 나오는데, 적어도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던 게 틀림없는 아빠의 책장을 물려받아 아직도 많은 책을 꽂아놓고 잘 쓰고 있다.

어려서 이사를 많이 다녔는데 포장이사도 없던 시절 이사 한 번 가려면 아빠가 본인 책들을 박스에 넣고 직접 지고 가서 정리하느라 한나절이 걸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행히 나는 수집벽은 없어 도서관을 활용해 공간의 문제는 자유롭지만 도록은 구하기가 힘들어 사다 보니 벌써 책장이 꽉 찼다.

1년에 150권을 읽는다고 하면 10년이면 1500권, 20년이면 3천권이니 이 정도는 충분히 집에 보관할 수도 있을 것 같긴 하다.

나는 책값이 다른 수집품에 비하면 아주 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책값 부담은 없지만 어디에 보관할 것인지가 문제인데, 저자는 사무실을 빌려서 서재로 썼다고 한다.

시골이라 그런지 모르겠는데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8만원!

7평 정도 공간이었다고 한다.

사실 요즘은 공간 문제보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긴 하다.

직장 그만두고 자영업자가 되면서 절대적으로 일하는 시간이 늘었을 뿐더러 집에 오면 아이들을 돌봐줘야 해서 11시 이후에나 겨우 짬을 낼 수 있다.

주말은 애들이 학교에 안 가기 때문에 오히려 더 바쁘다.

독서는 은퇴 후에나 가능할까.

그런데 노안이 와서 그 때는 책을 못 보면 어쩌나 걱정된다.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고 대부분 빌려 보기 때문에 기록을 해놔야 겨우 흔적이 남는데 알라딘 서재 기능이 참 유용하다.

따로 블로그에 정리할 수도 있지만 내 서평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서평도 같이 읽을 수 있고 관련 주제의 책들도 볼 수 있어 참 좋다.


<인상깊은 구절>

189p

하지만 평생 좋아하는 작가들만 읽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좋아하지 않는 작가의 전기는 뭐하러 읽겠는가.

(정말 200% 공감한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죽을 생각을 하면 너무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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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9-05-20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었습니다. 공감가는 글이네요. 저도 책을 못 버리는 1인 입니다. 저도 장서가보다는 독서가 쪽인데 요즘 책을 사기만 하고 읽질 않고 있어서 점점 장서가가 되어가네요ㅠㅠ
 
러시아 문화예술의 천년
이덕형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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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결국 절판되버렸다.

책바다를 통해 구해 봤더니 무려 830페이지에 이르고 사이즈도 매우 커서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잘 읽힌다.

철학적인 부분은 다 이해하지 못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러시아 문화예술의 기본적인 개념을 접했다.

간단히 말해 러시아는 동방과 서방 혹은 범신론과 기독교라는 이중신앙체계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범신론은 자연을 숭배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거대한 국토 면적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10세기부터 동방정교를 받아들인 후 기독교가 사회의 근간이 되었으나 서구와는 달리 동양의 禪 적인 면을 중시하는 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러시아만의 독특한 생활양식이 성립된 듯 하다.

러시아의 이콘을 보면 마치 우리의 불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서구의 르네상스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콘화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고 그 안에서 빛과 색을 통해 명상하고 신의 초월성을 관조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비언어성의 시각중심주의 문화라고 설명했다.

논리를 통해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정의할 수 없는 신의 초월성을 빛과 색을 통해 직관적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동양의 선불교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개혁하면서 동양성을 벗고 서구쪽으로 방향을 틀었던 배경이 이해된다.

러시아에서 봉건국가가 형성된 키예프 루시의 정체가 바로 스웨덴의 바이킹인가 하는 점이 흥미로웠다.

저자는 이 의견을 지지해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던 흑해 인근의 동슬라브인들과 결합해 세운 나라가 바로 러시아라는 것이다.

이 바이킹들은 무조건 남하한 것이 아니라 고대 수상 무역로인 강을 따라 내려와 터를 잡게 된다.

러시아인의 민족적 기원이 흥미로웠다.

책이 워낙 커서 도판도 정말 훌륭하다.

특히 러시아 그림들을 마음껏 볼 수 있어 눈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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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비 기록으로 만나다 고전탐독 8
이현주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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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비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알려져 있고 식상하지만, 여러 전공자들이 쓴 책이라 기대감을 갖고 읽게 됐다.

조선 왕실 가계도 시리즈를 출간했던 지두환씨는 역시나 실록과 행장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와 장렬왕후 편이 지루했다.

인물에 대해 평가하고 역사적 배경을 같이 기술해 주는 평전 식 서술이 흥미로웠다.

역사학자들이다 보니 한정된 자료로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기는 힘들지만, 대신 신뢰할 수 있는 인물평이다.

원경왕후와 며느리 소헌왕후의 결혼생활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흥미로웠다.

이방원은 젊은 시절 과거에도 급제하고 아버지가 나라를 세우는데 앞장서고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오직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느라 여색도 멀리하고 자신을 음으로 양으로 뒷바라지 해 준 아내 민씨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무려 11명의 자녀를 낳았다.

여장부였던 원경왕후는 친정의 배경도 훌륭해 남자 형제들과 힘을 합쳐 남편을 왕위에 올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왕이 된 태종은 누구와도 권력을 나누려 하지 않고 결국 동지였던 아내를 유폐시키고, 처남들을 전부 죽이고 만다.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에 뜻이 잘 맞을 때는 의기투합 했으나 생각이 틀려지자 최악의 상태로 변해버린 것이다.

믿었던 큰아들 양녕대군의 폐위도 부부관계 악화에 일조했을 것이다.

반면 며느리인 소헌왕후는 시어머니처럼 친정이 풍비박산 나고 심지어 어머니는 노비로 떨어지기까지 했으나 남편 세종을 도와 10명의 아이들을 낳고 왕실 가족들을 보살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룬다.

세종의 훌륭한 치세는 아내의 내조도 크게 기여했을 것 같고, 진심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명성왕후 부분에서 애매한 점이 있다.

저자는 명성왕후가 미신을 매우 싫어해 숙종이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데도 친정에서 굿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무녀를 궁으로 들여 아들의 병을 쫓기 위해 자신이 한겨울에 찬물로 목욕제계를 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사극에 나온 야사일 뿐인지, 역사적 기록이 있는지 궁금하다.



<인상깊은 구절>

58p

태종은 소년 시절에 학문에 심취했고, 과거에도 급제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정몽주를 격살하는 등 역성혁명을 주도하고 형제의 난을 극복하는 등으로 야심차고 분주한 날을 보내면서 별로 여색에 탐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경왕후는 두 번이나 위기를 겪으면서 남편이 실패할 경우네는 따라 죽을 준비도 하고 있었고, 무당을 불러 몇 번씩 점을 치기도 했다. 이를 보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간절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65p

소헌왕후는 왕비가 된 직후 친정의 풍비박산을 겪는 등 결코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공손하면서도 부지런하며 스스로를 계칙한다"는 세종의 평가처럼 그녀는 자기통제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74p

세종이 즉위한 1418년 8월부터 1422년까지 약 5년간 인사권과 군사권 등 핵심 권력은 상왕인 태종에게 있었다. 이때 세종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집현전 학사들과 학문 토론을 하는 일 외에는 거의 없었다. 세종은 자기 처가가 풍비박산 나도 항의 한마디 못하고, 부왕의 권유에 따라 밤늦게까지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94p

그럼에도 소헌왕후는 행복한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행복의 근원은 역시 남편 세종의 사랑이었다. 세종은 1408년 두 살 연상의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시종 공경과 사랑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왕비 가문이 몰락한 다음에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왕비를 가까이했다. 또 세종은 아낌없이 소헌왕후를 인정하고 칭찬했다.

(진심으로 부럽다. 세종은 정말 인간적으로도 군자의 기질을 가졌나 보다)

102p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어머니를 잃은 단종이나 갓난아기를 남겨둔 채 저승으로 떠나는 현덕왕후, 이 모자의 슬픈 운명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세종은 상례라도 최고로 정성스레 치르고자 했는데, 당대 최고의 학자들은 세종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는지, 현덕왕후의 비석에 이렇게 새겼다.

"원손이 탄생하여 울음소리 황황하니, 종묘에 경사가 넘쳤고 기쁨이 조야에 가득한데,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이를 안 주셨나이까. 자는 듯 세상을 떠나시매 복을 누리지 못하셨도다. 슬픈들 어이하리 말씀이나 돌에 새기리라."

(며느리들을 두 번이나 내쫓고 간신히 얻은 손자를 낳은 지 하루 만에 저승길로 간 세자빈을 안타까워 하는 시아버지 세종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110p

정순왕후 송씨가 단종의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영응대군의 부인이 된 고모 송씨의 존재, 수양대군이 각별히 사랑한 영응대군의 처조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밝힌 바, '송현수는 나의 오래된 친구'라는 말에서 보듯 송씨 집안에 대한 수양대군의 친밀감은 남달랐다. 게다가 송현수는 상대를 위협할 정도의 인물이 아니었기에 별도로 관리할 필요가 없는 외척일 수 있었다. 단종의 혼인은 전적으로 수양대군이 강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비로 간택되었으나 결국 사위와 남편의 편에 서서 멸문이 된 송씨 가문이 안타깝다)

162p

당시 16세인 월산군의 처부 박중선보다는 세조의 오른팔이자 예종과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를 왕실의 든든한 방패막으로 내세워 왕권을 보호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정희왕후는 한시라도 왕의 자리를 비워두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예종의 상례에 앞서 그날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즉위시키는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숙부에게 왕위를 뺏기고 죽임을 당한 단종과 비교해 볼 때 겨우 한 살 더 많았던 성종을 즉위시킨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참으로 과감하고 정확했던 듯 하다. 정치적 감각이 매우 노련했고 그 덕분에 조선 전기가 안정되었을 것이다)

205p

<내훈>을 편찬한 직후에 소혜왕후는 자신의 높은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던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시켰고 결국 사사시키는 불행한 일을 자행했다. 

235p

전근대 사회를 지배한 근본 원리는 신분이었다. '몸의 구분'이라는 그  뜻대로, 신분은 혈통이라는 단일하고 변경할 수 없는 조건 아래 그 밖의 거의 모든 사항을 귀속시켰다. 고귀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탐스러운 가치를 독점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예외도 있지만, 그는 정치적 권력을 행사했고 경제적 풍요를 누렸으며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했다. 

 전근대의 보편적 정치체제였던 왕정은 이런 신분제도의 원리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집약한 제도였다. 국왕은 그야말로 배타적 권력을 행사했고 가장 큰 부자였으며 호사스러운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근대 사회에서 일차적 차별은 성별이 아니라 신분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여성은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훨씬 큰 현실적 지위를 누렸다. 그런 여성들의 정점에 왕비가 있었다.

328p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나서 '그때부터 后는 더욱 더 자신을 억제하고 조심하면서'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분명 그 이전보다 더 조심했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게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봤으니 어떻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조심 또 조심'이 이해된다. 사실 왕실의 모든 여성들이 인선왕후처럼 '경계 또 경계'하면서 산 것은 아니었다. 당장 며느리인 명성왕후만 봐도 인선왕후와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342p

아버지 현종이 대단히 온건하고 우유부단한 성품을 가졌던 데 비하면 그의 품성이나 기질은 외가인 청풍김씨 일가에 훨씬 가까웠다

 숙종이 즉위 초에 일으킨 엄청난 정국 변화는 김석주와 같은 외가와 남인의 지원을 받았지만 사실 그 뒤에는 명성왕후의 후견이 있었다. 그녀는 비록 수렴청정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실 정치에 민감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친정의 이해 문제와 아들의 성공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외가와 어머니의 지원이 없었다면 당시의 정치적 회오리는 14세의 숙종이 아무리 총명했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명성왕후나 숙종은 일찍부터 송시열 일파의 서인들에게 깊은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350p

이렇게 장희빈을 두고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더구나 경종이 즉위한 후에 신임환국이 일어나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주로 숙종의 과격하고 변덕스러운 성격과 당파 간의 투쟁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장희빈이 뿌린 씨앗의 요인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뒷날의 역사 흐름을 음미하면, 명성왕후가 일찍이 말했던 "만약 그녀가 총애를 받게 된다면, 국가의 재앙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알 수 있다. 명성왕후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사람을 꿰뚫어본 통찰력은 인정할 만했다.


<오류>

192 p

사실 그 때 자을산군도 14세로 어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자을산군, 즉 성종은 14세가 아니라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215p

연산군의 비였던 폐비 신씨(1476~1557)는 연산군이 폐위되자

-> 폐비 신씨의 생몰연도는 1476~1537년이다.

240p

중종은 <고려사>의 "명종기"를 진강하다가 임금이 왕비를 폐출했다는 부분에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고려 명종 때 임금이 왕비를 폐출한 것이 아니라, 며느리였던 태자비 이의방의 딸(훗날 사평왕후로 추존)을 폐출한 것이다.

364p

어머니와 아버지는 인현왕후로 인해 여흥부원군과 은성부부인에 봉해졌으며

->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여흥부원군이 아니라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여흥부원군은 원경왕후 민씨의 아버지 민제이다.

407p

효장세자는 1719년(영조45) 2월 당시 왕자 신분이었던 연잉군과

-> 1719년은 영조가 아니라 숙종 4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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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화 속 현대 미술 읽기
존 톰슨 지음, 박누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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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현대 미술에 대해 겨우 이름만 알 때라 무척 힘들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본문에 나온 작품이나 화가들, 소장처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일일이 찾아보느라 한 시간에 겨우 20 페이지 정도 밖에 못 읽어 며칠 동안 붙잡고 있었던 책이다.

몇 년 만에 재독하니 처음보다는 훨씬 쉽고 무엇보다 모방과 재현을 벗어난 현대 미술의 개념과 철학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됐다.

그림이라고 하면 르네상스 시대의 라파엘로나 바로크의 루벤스처럼 정밀하고 똑같이 아름답게 그리는 게 명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들 낙서 같은 현대 미술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회화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특히 사진기가 발명된 후 회화가 구성으로부터 벗어나 색채와 구도, 색조와 같은 본질적인 것들을 추구하게 된 과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현대 미술은 어렵고 특히 20세기 이후의 개념미술이나 팝아트, 미니멀리즘 같은 것들은 공감이 어렵다.

색면 추상주의도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개최했던 로스코 전을 본 후로 거대한 색면이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감동하여 호기심이 생기긴 했다.

또 덕수궁 미술관에서 주최한 조르디 모란디의 정물화 전을 우연히 본 후 묘한 감동을 받았었다.

이 책에도 소개됐는데 도판만 봤다면 전혀 감흥이 없었을 것이다.

추상 미술은 특히 직접 작품과의 대면이 중요한 것 같다.

책은 장점이 많다.

도판이 다소 어둡긴 하지만 본문에 나온 그림들을 가급적 전부 실어주고, 화가들의 생몰연대와 작품의 크기, 소장처, 제작년도 등도 소상히 밝히고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다만 현대미술의 개념 자체가 어려워서인지 문장이 쉽게 읽히지가 않는다.

번역서의 어쩔 수 없는 한계 같아 우리 저자들이 쓴 현대 미술서를 읽어 볼 생각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색조라는 개념이다.

와토의 <제르생의 상점 간판>이라는 그림의 해설에서 색조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 평면성과 색채인데 두 색채간의 대비 혹은 조화, 전체적인 분위기를 뜻하는 색조가 매우 중요한 요소 같다.



<인상깊은 구절>

22p

모로는 신비주의의 회귀를 부르짖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오직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인상주의에 탄력이 붙고 있던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예술의 본질은 물론, 그 문화적인 목적의 측면에서도 과격하리만치 시류에 반하는 발언이었다. 새로운 상징주의 예술은 문화의 소양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기능이었다. 모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거장들은 물론 인도와 중국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인상파식 축소지향적인 언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식적인 디테일의 소멸보다는 '선, 아라베스크, 인위 예술에서 가능한 모든 장식적 장치를 통해 생각을 환기시키는' 그림으로의 회귀를 원했다.

29p

훗날 자신의 작품이 코로의 바로 옆에 걸려 있는 것을 본 모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여기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은 내 인생의 가장 슬픈 날이다."

31p

휘슬러는 그림을 통한 도덕적인 설교나 감상적인 내러티브에 기울어진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 반대했다. 그는 '모던'하고, 형식적으로 엄격하며, 음악처럼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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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는 빛의 특정한 분위기나 부수적인 효과, 그리고 색채를 띤 표시의 질서정연한 배열로서의 인지를 추구했다. 사실, 모네는 회화적 추상의 새로운 본질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런던에 있는 동안 제임스 애봇 맥닐 휘슬러의 <야상곡> 연작 중 초기작을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과격한 이미지의 단순화까지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해도, 사진 기술의 지속적인 발달과 직면하면서 자주적인 시각 언어로서의 회화 진화의 중요성은 이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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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는 특히 드가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가처럼 마네도 모티프로부터 직접 작업하는 것의 효율성에 전적으로 납득하지는 못했다. 제대로 미술 교육을 받은 살롱 화가였던 마네는 프랑스 미술의 위대한 전통을 존중했으며, 여기에 새로운 무언가를 더하면서 계속 그 연장선상에 머무르고 싶어 했다. 마네가 한 번도 다른 인상파와 함께 전시회를 연 적이 없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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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란, 지배색과 특정한 빛의 영향으로 인하여, 충돌하는 비슷한 색조, 색상, 그리고 선 요쇼들이 명랑하거나, 차분하거나, 혹은 슬픈 조합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조르주 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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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르쥐에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고갱의 요구 -모방을 벗어버리고 그 내면의 논리와 상징의 함에 따라 순수한 색채를 사용하라는-에 대한 응답으로 해석된다. 사실 한 점의 회화로서의 <부적>은 고갱이 시도했던 그 무엇보다 훨씬 전체적으로 추상적인 회화 언어를 포용하고 있다. '평면성'이 고갱의 작품에서는 형태가 채색된 형상으로 강조되기 이전에 이미 선에서 생성되는 반면, 세뤼지에의 작품에서는 붓질의 분산만으로도 생겨나, 채색된 영역과 형태와 대비를 이루는 표현 위에 뭉치거나 퍼진다.

66p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일상을 공유하는 실험은 감정의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감수성 면에서는 두 사람이 막상막하였지만, 고갱의 지배적인 성격이나 하늘을 찌르는 자존심에 고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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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기였던 반 고흐처럼 고갱도 점묘법을 시도하면서 독학으로 색채 이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고갱은 과학보다는 직감을, 광학적 진실보다는 상징적인 힘을 더 선호했다. 고갱은 마침내 색채를 단순한 표현에서 분리하게 되고 바로 이 때문에 19세기 후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하나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미래로 향한 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81p

"나의 예술의 유일한 목표는 관객 안에서 불확정의 세계와의 산만한, 그러나 강렬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오딜론 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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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데는 말했다. "원형이나  모델 없이... 명확한 정의 없이... 빛과 색채의 모호한 감각만으로도 충분하다... 혹은 그림은 혼자 힘으로 그 형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113p

채도가 높은 색채의 평평하면서도 서로 겹치는 채색면을 강조함으로써 마티스는 -폴 고갱의 발자취를 따르며- 유럽 회화의 색채에의 근대적 접근을 정의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마티스는 미국 추상화, 특히 채색면을 강조한 추상화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4p

기성작은 뒤샹으로 하여금 '미적인 숙고가 더이상 손의 능력이나 재주가 아닌, 정신의 선택에 불과하게끔' 만들어주었다.

134p

칸딘스키의 추상 이론에서 핵심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예술 작품의 외형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는 '내적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란 우선 자신의 '내적 소리'를 확립하고 지속적인 접촉을 가짐으로써 그 시각적인 면을 형태와 색채로 캔버스 위에 풀어놓는 것이다. 간신히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의 존재를 암식하는 자연 질서와 유사한 이미지들-파란 부분은 하늘처럼 보이고, 어떤 형상은 인간이나 물고기처럼 보이고-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화가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160p

1920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본 뒤 그는 형이상학파와 결별한다. 모란디는 예술계나 예술 시장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볼로냐 아카데미에서 조판을 강의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제1타 세계대전 이후 밀려온 볼셰비즘의 파도에 겁에 질린 많은 이탈리아 중산층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처럼 모란디 역시 정치적으로 우파에 섰다. 1920년대 초반, 즉 독일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수년 전에 이미 무솔리니의 지지자였으며 파시스타당의 정식 당원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결국 파시즘에 환멸을 느끼고 무솔리니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돌아선 후, 모란디는 1930년대 초 이후로는 정치적 발언을 중단했으며 교사화 화가로서의 일상 이외에는 공적인 자리를 점점 피하게 되었다. 

165p

"회화적인 표현이 변했다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고속 열차로 풍경을 가로지를 때, 그것은 조각조작나 묘사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대신 합성적인 가치를 얻는다. 열차의 차칸 문이나 자동차의 차창을 통해 바라본 경관은 속도와 조화를 이루어 사물의 일반적인 시각을 완전히 바꾸어놓는다." -페르낭 레제

191p

브라크는 자신이 생각하는 성공작이란 모든 개념이 지워지고 오직 불안정한 느낌만이 남아있는 '지적 공허'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물:그 날> 같은 작품을 보면 그에게 있어 느낌이란 색채의 상호작용과 보기드문 색상조합의 창조에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210p

<신부의 단장>은 매우 디테일하고 환상적인 에른스트 초현실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그가 전통적인 회화 기법 전반 -바탕 채색, 색채 조합, 색채에 광택 입히기 등-에 얼마나 능숙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14p

발튀스는 그 자신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조르지오 데 키리코처럼 기법상의 이유로 동시대 화가들에게 거부당했으며, 옛 거장들의 작품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탄식했다. 무엇보다 발튀스는 당시 화가들이 회화 공간에 언어 -과도한 설명과 화려한 언변의 비평 논쟁-를 삽입하기 시작한 것에 깊은 불신을 품었다. 대신 그는 바꿀 수 없고, 옮길 수 없는 회화 이미지의 시각적 풍부함을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근대적'인 것은 아니다. 발튀스의 작품들을 자세히 관찰하면 다소 구식인 연극조-부르주아들의 예의범절-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야말로) 발튀스가 오늘날 사회적-성적 노이로제의 예라한 관찰자였음을 보여준다. 

221p

1960년대 이후 날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쇠퇴하는 성적 능력에 신경을 쓰는 것이 회화와 에칭에 그대로 드러냈던 피카소와는 달리 보나르는 자화상에서 점점 내향적으로 변하는 자신의 성격을 표현한 듯하다.

271p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관계없이, 기대하는 그 자체가 멋지다. 이것이 나의 친구 알베르토 자코메티와 나눈 긴 대화의 주제였다." -앙드레 브르통

297p

그는 추상 표현주의의 감정적 과잉과 단절하여 '예술 그 자체로의 회귀'를 무엇보다 원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라인하트에게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라인하트는 그림이 한 덩어리의 벌거벗은 시각적 요소들로 줄어드는 것 역시 원하지 않았다.

301p

"예술가의 부름은 삶에 대한 태도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를 끌어안는다. 동작 하나하나가 선해야 한다. 도덕주의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단 반 골덴

315p

뒤샹에게게는 아무리 열렬한 예술 애호가라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는, 예술가만의 영역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공간이 있다.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리고 관객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오직 소수의 예외적인 개인만이 공명할 수 있는 사물들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술의 경험은 '종교적 신앙 또는 성적인 매혹과 유사한 구석이 있다- 미적인 반향이 그것이다.'


<오류>

46p

1860년대, 이제는 나폴레옹3세가 된 조르주-외젠 오스망 남작은 파리의 중심부를 바꾸어 놓기로 결심했다.

-> 나폴레옹 3세가 오스망 남작에게 지시했다는 표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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