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사
이공범 지음 / 지식산업사 / 2003년 9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읽는 "너무너무 재밌는" 책이다.

개설서가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걸까, 감탄하면서 읽었다.

고대 사회의 지배계층과 사회경제 원리, 신분제, 특히 복잡한 남북조 왕조들의 흥망성쇠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하고 있다.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을 읽으면서 남북조 시대에 관심이 생겼고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당시 시대상에 대한 개념이 생긴 것 같다.

마지막에 실린 사회경제 부분은 전문적인 설명이 많아 다소 지루하고 어려웠지만 개략적인 틀을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한자가 거의 모든 용어에 다 병기되어 뜻을 이해하기 쉬웠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보고 싶은데 아쉽게 검색이 안 된다.

지금까지 중국사는 일본이나 서구에서 나온 책만 수준이 높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과문한 탓이었나 보다.

중국이 어떻게 호한융합되어 오늘날의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는지 그 과정이 자세히 나오고 균전법이 무엇인지 5호 16국 시대를 이룬 배경은 무엇인지, 또 문벌귀족이란 어떻게 형성이 됐고 몰락했는지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책바다에서 어렵게 빌린 보람이 있다.

많은 부분을 옮겨 적었는데 절반이 날아가 버려 허탈하다.

알라딘의 임시 저장 시스템이 불안정한 것 같아 불만이다.



<인상깊은 구절>

29p

청담파의 주벌은 정권쟁투의 결과이지 사마의 자신이 청담 귀족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마의는 위 왕실의 법가정책, 중앙집권정책에 반대하고 귀족중심의 정치를 수행하려는 처지였으며 이것이 당시 귀족의 지지를 받아 뒤에 사마씨 왕조 창건의 바탕이 되었다.

32p

손오 정권에는 당시 화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제도가 있었다. 그 가장 두드러진 것이 세병제이다. 이는 오의 장군들이 부자형제 사이에 휘하 군병을 세습적으로 계승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오 일대를 통해서 반세기 동안 제도로서 존속하였다. 장군이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세습적으로 계승하면 그 군대는 장군의 사병적 성격이 짙어져서 각 군단이 강한 독립성을 띠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은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손오 국가는 사병 집단의 연합체 성격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병 집단을 영도하고 있는 자는 회화 유역의 호족과 강남 토착 호족이었다는 것은 물론이다.

39p

진 사마씨가 위의 선양을 받게 된 것은 무제 사마염의 조부 사마의가 그 진영 안의 귀족 세력을 흡수하여 그것을 정치기반으로 삼은 데 있다. 따라서 진 왕조는 전쟁의 영웅이 일으킨 위 왕조와는 처음부터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진 무제는 관용, 仁恕 하다고 알려졌으나, 이는 그 개인의 성격보다는 왕조의 귀족적 성격에서 말미암는다고 할 수 있다.

53p

천하대란의 불가피성을 통찰한 그는 동해왕 월을 설득해서 그 동생인 왕징과 종제인 왕돈 두 사람을 각각 형주와 양주 자사로 추천하고 스스로는 태위로서 중앙에 위치하여 일문이 몰락하지 않게끔 남도 준비공작을 완료한 것이다. 왕도가 사마예를 받들고 남하한 것도 왕연의 계획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강남에서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주요한 양주와 형주를 왕씨 일족이 장악 지배하고 있는 바탕 위에서 왕도가 서진 왕족 출신인 사마예를 추대함으로써 명분과 정통성과 실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화북의 전란이 강남지방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서진의 강남의 행정, 군사기구는 그대로 존속하고 있어서 그 최고권을 장악한 사마예는 쉽게 강남 지역을 제압할 수 있었고, 양주, 형주와 같은 요충지는 北來 인사들에게 민정, 군사권을 위임하여, 일단 강남 통치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오주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으로 보강하고 북방에서 남하 피난한 북방의 호족과 전 관료 등 사대부 계층을 수용하여 문무관에 임명함으로써 그 통치기구를 강화하여 북래 인사들을 결집해서 집단세력을 형성하는 중추가 되었다. 사마예 군부의 상층부는 북래 출신의 문무관으로만 구성되었으므로 그 기초가 박약하여 강남 제압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처음부터 강남 토착 호족을 포섭하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사마예가 건업에 이진한 초기에는 강남 토착 호족들의 태도는 매우 냉담했으나 왕도는 강남 호족의 대표격인 고영, 하순을 포섭함으로써 강남의 명족 또는 호족의 지지를 얻어 그 구분에 흡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남의 호족 측에서도 삼국의 오가 멸망한 뒤, 이 지역 출신의 호족, 사대부들은 官界로부터 거의 배제되고 또 북방 명족으로부터 여러 가지 면에서 경시되어 왔다. 이런 강남 호족의 현실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이 진 왕실 일족이라는 정통성과 명분을 갖고 있는 사마예의 군부에 참여해서 문,무관직에 취임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예의 군부는 토착 세력의 저항 없이 강남에 세력을 부식하고 오히려 그들은 그 군부 세력 확대와 강화에 적극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71p

황제의 친임을 받고 있었던 단양윤 서잠지, 이부상서 강잠 등 문치파는 북벌에 찬성하나 오히려 무략으로 명성이 높았던 무장 심경지는 "밭 가는 것은 노에 묻고 길쌈은 비에 물어야 하는데 지금 폐하께서는 남의 나라를 치는데 백면서생들과 꾀하고 있으니 어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주전론에 반대하였다. 

73p

효무제는 말년에 물욕이 많아져서 이임해서 수도로 돌아온 州鎭 장관에게 헌납을 강요했다. 이리하여 送故의 錢物은 실제로 황제에게 그 일부가 헌납되었다. 여기에서 주진 장관은 사적 수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은 백성을 피폐시키고 나아가서 지방 관아의 정상적인 운영을 방해하였다. 효무제는 재고(황제의 私庫), 상고(황제 직속의 公庫)의 확충으로 사적 재정을 확보하면서 대사나 측근의 한문 출신 관료를 구사하여 직접적으로 국가 재정을 장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황제와 그 측근에 의한 재정 운영은 전통적 행정기구에서 유리한 황제 독주에 기울어지기 쉽고 여기에 대사의 횡포 등의 발생은 사회의 반발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帝權 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태로게 하였다.

74p

문벌귀족은 이런 제도로 보장된 고관 중위에 안주하여 현학이나 풍류를 추구하는 데 열중하고 吏治와 같은 실무는 오히려 경멸하였다. 여기에서 吏務 는 대각의 영사, 주서, 감수, 전첨 등 법을 아는 下吏 에게 위임하였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위 고관을 차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무에서 이탈하고 있으면서 황제 권한을 제한하고 있었다. 이미 송초 이래로 황제가 군주권을 행사하기 위해서 문벌귀족에게 명목상 고위직을 주고 국가의 중추적 실권은 한문 한인을 발탁, 등용하여 이들에게 위임하였다. 한인 대명보는 안팎의 여러 잡사를 담당하여 재상인 강하왕 의공과 안사백 등 귀족관료들은 공명만을 지켰을 뿐이다.

83p

남조 역대 왕조는 끊임없는 찬탈혁명과 황족 종친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정국이 항상 불안정하여 정치의 권요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더 나은 영달을 가져오는 것보다 오히려 일신일족의 파멸을 가져오는 위험성이 더 많았다. 덧붙여서 송의 효무제와 같이 황제권력을 신장하기 위해서 귀족 세력을 억압하는 탄압 정치를 시행할 때는 귀족들의 지위는 매우 불안하게 되었다. 정치 사회적 지위가 보증된 문벌귀족은 거꾸로 불안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 정황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역사현상에서 그들이 터득한 인생철학은 '명철보신'이었다. 명철보신을 처세훈으로 하는 그들에게 정치라는 현실세계에서 도피하여 학문이나 시문 담론의 문화세계가 새로운 삶의 장이 되었다. 명철보신의 처세훈은 당시의 지식인에 풍미하고 있었던 현학과 결합하여 현허를 숭상하고 이치를 멸시하여 정치에 관심을 잃고 행동할 의욕을 잃은 무기력한 남조 사대부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문벌귀족은 한편으로는 고관 고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실제 이치에서는 이탈하고 있었다.

96p

무제의 근본 생각은 귀족제도를 존중하지만 귀족제의 존중은 귀족적 교양의 존중이지 현실의 문지의 존중이 아니라는이다. 따라서 문지가 낮더라도 귀족적 교양을 갖춘 자를 임관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런 무제의 새로운 정책은 학관 시험제도를 장려하게 되어 후세의 과거제의 유력한 연원의 하나가 되었다. 즉위한 뒤 곧바로 구품중정법이 설치된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한 데 지나지 않았던 수재, 효렴제를 다시 중시하여 시험으로 관리 등용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비록 관리 등용제로서는 부차적 위치를 차지했을 뿐이지만, 이 시험제도는 당대에서 시작되어 송대에 확립된 과거제의 선구가 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8p

양말 후경의 난과 진초 혼란기를 거치면서 명문세족들은 일족이 패망하거나 타향에 유랑하는 등의 인적 손실과 그 취약한 기생적 경제 기반의 괴멸은 이들의 정치 사회적 실력을 잃게 만들었다. 진대에 들어와서는 명문세족 출신들은 정권의 중추부에서 밀려나고 그 대신 남방의 토호나 한문층으로 대치되고 명문세족들의 잔영은 문화적 전통의 상징으로서 하나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후경의 난으로 남조 귀족제는 종말을 고하고 진대에서는 남방 토착세력인 토호, 한문층의 신흥 계급이 귀족제의 틀을 깨고 새로이 정치, 사회, 군사적으로 현저하게 대두한 시대이다.

109p

5호 16국 시대의 외민족의 정권수립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외민족 침입이라고는 말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한족 왕조의 외민족에 대한 군사적 침략에서 결과한 중국 내지에 강제 이주된 외민족이 한족 왕조의 분열과 약체화를 틈타서 민족적 자각과 한족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모순에 항거해서 스스로의 정권을 수립하였다고 풀이된다. ... 이런 동향이 마침내 수당시대에 완숙되어 호한의 혼혈로 內遷호족은 한족에 완전히 동화되어 한족화하고 생활문화의 각 방면에서도 호한의 구별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호한 양세계의 통합이 펼쳐진 것이다. .... 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 한의 통치자가 호족세력을 분산시키고 변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그들의 변경 지대 거주를 용인한 것이다.

118p

염민의 호족 살육책은 정치적으로는 호한을 아우르는 통일 보편적 국가를 수립하고 사회적으로는 종족주의를 초월한 호한 융합이라는 역사적 추세를 거역하는 지극히 반동적이고 성공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때문에 이 정책은 화북사회의 혼란을 부추겼을 뿐이고 이런 사회 혼란을 틈탄 인심 동요는 후조국의 내란에 무력간섭 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준이 하북에 침입해서 염민을 사로잡아 참살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202p

이들은 이미 강북의 본적지를 떠나 남쪽에 거주하고 있지만 여기에 그 출신 군명을 부쳐 이른바 교군을 만들어 각각 중정을 두어 일족 향당을 품정하여 관료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 아무런 경제적 기반 없이 타향에 머물러 살고 있는 이들은 오로지 정권에 기생하여 관료적 귀족, 귀족적 관료로서 지위를 사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이었다. 물론 관료라는 특권적 지위는 그들에게 토지나 기타 재산을 이룰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히 드물었다고 보인다.

207p

누층적 통혼집단은 사회적 신분을 계기로 형성된 것이고 또 이런 통혼 형태는 누층적 사회 신분 구성을 유지, 존속하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이다. 이리하고 남조의 혼인은 신분내혼제로서 '士庶不婚'을 큰 틀로 하면서 당시 분화된 통혼집단의 계층적 존재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209p

심약이 양 무제에게 혁명의 조기 결행을 권행하는 진언에, "사대부들이 반용부봉(용을 붙잡고 봉황을 따라간다, 훌륭한 사람을 쫓아 따라간다는 뜻) 하는 것은 척촌지공(조그마한 공)으로 복록을 보전하고자 함입니다"라는 어구가 있다. 여기에는 무제 거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심약 등을 포함해서 옹, 형주의 호족, 토호층이 문벌제의 굴레를 뚫고 정치, 사회적으로 상승하려는 염원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있다.

213p

서진 말부터 화북이 혼란에 빠지고 이 혼란을 틈타서 이민족인 오호가 화북에 각각 왕조를 세워 한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오호의 이민족 국가에게 고래로부터 화북에서 정착하고 우수한 문화를 지니고 절대 다수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의 존재는 실제 통치문제로서 경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족은 오호 국가에게 세를 공급하고 역역에 종사하는 필요불가결의 존재였다. 이런 한족을 지배하고 그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제지의 유력자인 호족의 경제력과 향촌에 대한 규제력을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오호 여러 국가가 이민족 정권이기 때문에 한족을 압박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오히려 한인 호족이나 명족을 존중하고 위진 시대의 사족의 호적을 부활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오호 여러 군주들은 그들 국가의 통치이념과 정책 입안 및 시행 등에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는 한족 사대부를 등용해서 그들을 국가건설에 참여시키고 있다.

 한편 한족측에서도 서진 말기 문벌귀족의 경쟁과 궁중음모 등으로 혼란한 관계에서 뜻을 이룰 수 없었던 한족의 사인 가운데는 오히려 이민족의 신흥 실권자에게 소망을 걸고 그 밑에 들어가서 호족 군주의 모주가 된 자도 적지 않았다. 오호의 군주들은 이런 세력에 대해서 끝까지 반항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는 무력으로 억압하고 항복 귀순한 자에게는 종래의 사회적 지위 즉 사의 신분과 그에 따른 특권을 승인하고 호족국가의 관료로 받아들였다.

215p

호족 군주들이 한족 사대부들을 그 통치기구에 흡수하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호족 군주의 대부분이 한문화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아 학문과 교양을 습득하고 이해한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호족 군주들은 한족적 사상의 바탕 위에서 전제군주 체제와 중농주의적 국가창건을 국가이념으로 삼았다. 여기에서 이 국가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교의 정치사상을 표방하게 되고 이 실천을 위해서 유학의 지식을 갖추고 있는 인재가 필요하였다. 이런 요구에 응하는 적격한 인재들이 곧 한족 사대부들이다. 여기에서 오호시대의 한족 사대부들은 종족적 압박도 받지 않고 오히려 관료로 등용되어 향당의 지도자로서 재지 세력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223p

고환과 제휴한 산동의 명문 호족들은 적극적으로 향병을 초모하여 무력집단을 구성하고 그 將이 되어 전투에 참가하는 등 종래의 문벌귀족처럼 선조의 古骨을 팔아서 영화에 안주하려는 자세와는 판이하게 다르며 그들에게서는 세상의 난국을 헤쳐 나가려는 용기와 강한 의욕을 찾아볼 수 있다.

224p

정치의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귀족이라도 황제의 역린을 건드리면 지위 박탈은 물론이고 주살을 면치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무성제대에서 후주대까지 권세를 휘둘렀던 조정은 무성제에게 아첨함으로써 전대 효소제 때의 불우한 처지를 만회하고 또 본질적으로 제권에 기생하는 은행의 무리와 결합하여 반대당을 제거하는 등 귀족의 지위는 왕조에게 완전히 규제되어 귀족으로서 자율성을 잃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47p

<당률>의 부곡, 객녀에 대한 여러 규정을 통관하면, 그들은 노비와는 달리 인격을 갖고 있으나 주인에 대한 예속은 노비와 같으며, 대우는 노비보다 약간 양호한 편이고 또 그들은 인신매매한 것이 아니고 주가의 의식 급여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천하게 여겨졌으나 사가의 노비보다는 상급 천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64p

대규모의 수리관개 사업에 공권력이 필요하게 된 것은 그 방대한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많은 노동력의 동원과 편성은 도저히 민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권력에 의한 수리관개 시설의 설치로 경지화된 전토는 이때 대량으로 유입된 북래 난민들에게 분여되었을 것이고 이런 농민을 독립, 자영 농민으로 육성하여 안정된 소농 경영을 이루어 국가의 정치, 경제적 기초 확립에 공헌하였을 것이다.

297p

지방관의 불법이 끊이지 아니한 직접 원인으로는 이때까지 북위에서는 관리에 대한 녹봉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들은 인민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또는 상인들과 결탁해서 상행위를 하여 가산을 불리고 아울러서 녹봉에 대신하는 비용을 조달하고 있었다.



<오류>

66p

유유는 손은亂 토벌에서 무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이어서 환현을 멸망시키고 전연과 후진을 평정하여 새로운 왕조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는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 송의 유유가 토벌한 것은 전연이 아니라 모용초의 남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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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월지 - 중앙아시아의 수수께끼 민족을 찾아서
오다니 나카오 지음, 민혜홍 옮김 / 아이필드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월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은 오늘날의 민족국가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고대 세계에서만 존재하고 지금은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흉노도 실체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아득한 고대의 종족인데 그보다 더 먼저 중국 서쪽에 진출했던 월지는 너무나 모호하다.

이 책에 따르면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 살던 월지인들이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에 의해 동쪽으로 쫓겨 가 감숙성 일대에 정착하고 교역을 펼치다가, 새로운 세력은 흉노에 밀려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갔고 그 땅을 차지하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 박트리아를 멸망시키고 먼저 살던 원주민과 합해져 북인도로 내려가 쿠샨 왕조를 건설했다고 한다.

월지는 기마민족으로 호전적이었고, 간다라 미술을 만들고 상업 활동을 한 이들은 박트리아에 원래 살던 이들이라고 본다.

동쪽에 살던 월지가 흉노에게 밀려 서쪽으로 가 쿠샨 왕조를 만든 게 아니라, 원래 그 땅에 살던 월지가 중국에 진출했다고 다시 되돌아 와 쿠샨 왕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저자는 월지의 언어가 곧 박트리아어, 쿠샨어라고 본다.

스트라본에 따르면 박트리아라는 그리스 식민도시를 멸망시킨 것은 스키타이인이라고 한다.

중국측 기록에는 월지라고 되어 있고, 반고가 쓴 <한서>에는 새족이라 나온다.

저자는 스키타이가 곧 월지라고 생각한다.

스키타이가 새족, 혹은 색족을 가르킨다는 말도 다른 책에서 본 적이 있다.

과연 스키타이와 월지는 동일 종족일까?

혹은 스키타이인이 월지는 아닐지라도 서방측 기록에서 박트리아를 멸망시킨 종족은 월지가 맞다고 본다.

흥미로운 주장이고 다른 책도 참조해 봐야겠다.


<인상 깊은 구절>

17p

현재까지 연구된 바로는 흉노어는 고대 투르크어에 속하며 흉노는 투르크계 민족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26p

연대의식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방어하거나 보호하는 법을 망각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킬 줄도 모른다. 그들은 휘장, 의복, 승마, 무술 등으로 남들을 속이면 그럴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들 대부분은 후방에 있는 부녀자들보다 더 겁쟁이들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요구해도 그들은 물리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군주는 자기를 뒷받침해줄 보다 용감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게 되고, 많은 수의 가신과 추종자들을 고용한다. 

38p

월지의 주요 세력은 파미르 고원의 서쪽, 즉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남부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감숙의 서부에는 소수의 월지 세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이동한 월지를 '대월지', 감숙 서부의 월지를 '소월지'라고 부른다. 한 무제가 원교근공의 동맹 상대로 선택한 것은 대월지였다.

44p

서방측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세기 중엽 박트리아에 살던 그리스인의 도시가 시르다리야 강 건너편에서 침입해온 유목민족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리스인에게서 박트리아를 빼앗은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인이며, 페르시아식 표현으로는 '사카'라고 불렀다. 어쩌면 장건은 그 유목민족의 흔적을 좇아 아무다리야 유역, 즉 박트리아로 들어갔는지 모른다. 

(박트리아를 빼앗은 스키타이인이 바로 대월지인가?)

72p

서방 사료에는 박트리아 왕국이 그 후 약 1백 년 동안 번영을 누리고, 기원전 2세기 중반 북방에서 침입한 스키타이(사카)에게 멸망했다고 한다. 그것이 한문 사료에 나오는 대월지의 서천 및 대하의 정복에 대응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93p

나는 스트라본이 말한 동방의 스키타이(사카)인이 기원전 160년경 흉노에게 쫓겨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하를 정복한 대월지라고 주장한다.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대월지와 '塞'를 스트라본이 박트리아 왕국을 멸망시킨 4부족의 하나로 동정하려고 시도했지만 확실성이 없었다. 새족의 존재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설명했지만, 만일 실재했다고 해도 사료에 나타난 것은 대하의 정복과는 관계가 없다.

 반면, '대월지-=스키타이(사카)'라고 하면 동서의 역사기록은 잘 맞아떨어진다. 아이하눔 유적의 발굴결과에서 시사하는 '그리스인 도시의 멸망=기원전 145년경'의 시기도 스트라본이 기록한 박트리아 왕국의 멸망과 <사기>, <한서>에 나오는 '대월지의 대하 정복' 기사와 아무런 모순점이 없다. 기원전 129년경 장건이 아무다리야 남쪽의 대하에 이르렀을 때 이미 대월지는 그곳을 정복했으며, 그리스 박트리아 왕국은 멸망한 후였다. 그곳의 토착민인 대하인은 집과 도시를 만들어 정착하고 도시마다 소군장을 세워 통치하고 있었다. 대하의 인구는 100만에 달했고, 전쟁보다는 상업에 소질이 있었다고 한다.

112p

분명히 박트리아어는 박트리아 정착민의 말이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언어를 가진 유목민도 존재한다면 혹시 그 유목민이 쿠샨인이 아닐까? 만약 쿠샨인의 원래 고향이 아무다리야 유역이라고 한다면 월지와의 관계는 어찌될까? 월지의 이동은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민족 이동이 아니라, 본래 중앙아시아에 본거지를 둔 월지가 동방에 진출해 있다가 철수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흡후(야구브)가 유목민 고유의 지배제도를 가리키는 용어라면, 귀상(쿠샨) 흡후는 결코 정착민인인 대하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따라서 쿠샨인은 대월지, 또는 적어도 그 일부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혹시 쿠샨인은 유목민으로서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대하인과 함께 중국과의 무역에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동방으로 진출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9p

동아시아 유목세계에 이러한 새로운 동물 디자인이 도래한 것에 대해 번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에 의해 박트리아 주변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밀려났던 데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기마민족이었다, 그 가운데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고 지배한 세력이 월지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기사 전수를 보급시키고 동물 의장 벨트 등을 가지고 들어갔다. 

211p

귀상 흡후가 다른 흡후를 병합하고, 간다라와 인도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기마민족의 무력과 기동성이 필요하다. 이는 '장사에는 재주가 있지만 무용이 없다'는 대하의 정착민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쿠샨 왕조의 주체는 유목민 월지일 것이다. 그러나 간다라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쿠샨인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서 중국 서북 변경의 유목민이었다는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아무다리야 유역(박트리아)의 주민일 가능성이 크다. (박트리아어을 사용했다는 점, 죽은 사람의 입속에 화폐를 넣는 습속이나 복장 등에서 그렇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월지와 쿠샨 왕조 모두 아무다리야 유역을 본거지로 한 동일한 유목민 집단이었다. 그들의 일부분은 기원전 3, 4세기경 유목민족으로서 중국의 서부 변경에 진출하여 유목보다도 상업활동에 전력을 쏟았다. 그러던 중 흥세력 흉노에게 패해 기원전 2세기 중반, 원래 거주지인 아무다리야 유역으로 세력을 옮겼다. 그 후 남방으로 눈을 돌려 박트리아, 그리스인의 흔적을 쫓아서 인도와 관계를 맺었고, 인도를 통해 지중해의 로마 세계와 연결을 갖게 되었다.

 이상이 내가 본 쿠샨 왕조의 발흥 배경이다. 쿠샨 왕조는 로마와 인도, 중국을 잇는 국제무역 중개업으로 거대 제국으로 성장했다. 동서 문화를 융합하는 간다라 불교미술이 탄생한 것도 그런 쿠샨 제국이 처해 있던 국제적 환경 때문이었다. 따라서 월지와 쿠샨인은 실크로드를 빛나게 했던 최초의 기마유목민족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박트리아 지방의 유목민족이 동쪽으로 쫓겨가 그들 가운데 일부가 중국 서북 변경을 정복하게 되는데 흔히 그들을 월지민족으로 본다. 비록 알렉산더에 의해 쫓겨났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그들은 중국 북변에 호복과 기사 전술을 보급시키고 지배력을 강화해나간다. 그리고 훗날 그 동쪽에서 굴기한 흉노와 이 지역의 패견을 놓고 일대 접전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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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 명화를 만나다
국립현대미술관.조선일보 엮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2013년도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던 전시회였던 듯 하다.

못 가 봐서 무척 아쉬웠는데 드디어 도록으로 만나 봤다.

소장 도서관도 적을 뿐더러 책이 커서 대출 불가인 곳이 많아 책바다를 통해 몇 번이나 시도해서 빌린 책이라 더 반갑다.

가끔 서양 유명 화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 화가들의 작품도 딸려 오는데 그 때는 별 생각없이 지나쳤지만 자국에서는 나름 명망있는 화가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린 우리나라의 유명 화가들 역시 프랑스로 많이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열린 전시회에도 작품들을 열심히 출품했다.

지금도 유학이 쉬운 일이 아닌데 1950년대에 이미 프랑스로 떠난 화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깜짝 놀랬다.

이런 세계적인 화단과의 교류를 통해 국제적인 안목을 갖고 성장하는 것 같다.

도판이 훌륭해 그림 감상하는 즐거움이 크다.

해설에 나온 바대로 眼福 을 누렸다.

처음 근대 회화들을 접할 때만 해도 화가들의 이름도 생소하고 처음 접하는 작품들이라 큰 감흥이 없었는데 자주 보다 보니 눈에 익어 새롭게 다가온다.

특히 현대 수묵화의 놀라운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여전히 추상화, 비구상은 감상하기가 어렵지만 김환기나 이응노, 유영국의 작품 등은 눈길을 끈다.



<인상깊은 구절>

26p

반인상파의 기류가 포비즘, 에콜 드 파리풍, 추상미술로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논리적, 이지적인 큐비즘과 추상-창조로 연계되는 경향은 극히 한정된 소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우리 미술의 특징이다. 논리적, 이지적 작풍의 빈곤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미의식과도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에 익숙해있었던 한국인에게 논리적인 해체와 구성의 경향은 쉽게 수용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감성적인 포비즘이나 에콜 드 파리풍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원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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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8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20-04-29 08:32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입니다.
 
조선 왕실여성들의 삶 한국사연구총서 98
박주 지음 / 국학자료원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그래도 일반 여성들에 비하면 역사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왕실 여성들의 삶에 대한 학술적 책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소현세자빈이나 정순왕후, 순원왕후 등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인데 비해 은언군의 처 송마리아의 순교 내용이나 영조의 딸 화순왕조, 화완옹주 편은 새로운 내용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남편을 따라 죽는 열녀를 표창까지 하면서 숭상했으면서도 막상 자기 딸이 순절하자 인간적인 고통에 괴로워 하는 영조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아들 상계군이 역모 모의에 휩싸여 죽임을 당하고 폐족이 된 후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천주교에 의지하게 된 두 왕실 여성들, 송마리아와 신마리아 고부간의 사연도 애닯다.

인간적 우수를 잊기 위해 천주교에 입문했다고 진술했음에도 전혀 상관도 없는 역적 모의죄를 뒤집어 씌워 남편 은언군까지 죽여 버린 정순왕후의 처사도 너무나 잔인하다.

유교적 가부장제가 여성들을 얼마나 옭죄었은지, 왜 남인과 여성들이 천주교인이 되어 죽어갔는지 당시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가 충분히 이해되는 바다.



<인상깊은 구절>

29p

강빈은 뛰어난 경영능력으로 국제무역과 농장 경영을 통하여 큰 재물을 모았고, 이 자금으로 조선인 포로들을 속환시켜 농장 일꾼으로 고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경제활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경영능력 뿐만 아니라 당시 역관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역할이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7p

요컨대 소현세자와 소현세자빈 강씨는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하는 동안에 국내의 극도의 반청적 정치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귀국 후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여 결국 의문의 죽음과 사사를 당하였다. 넓게 보자면 소현세자빈 강씨는 병자호란 패전으로 인하여 억울하게 희생된 비운의 세자빈이었다.

51p

요컨대 정조대에는 왕대비로서 정조의 대를 이을 왕위계승 문제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을 역적으로 몰아 토벌에 앞장섰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언교를 하교하며 정치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조와 끊임없이 대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수렴청정을 할 때면 정치적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서라도 친정 집안이 예외없이 득세했다. 남성중심 사회였던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후계자 임명권과 수렴청정의 권한을 여성에게 주었던 것은 왕위찬탈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궁궐에서 언문은 대왕대비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의 의사소통 도구였다. 대비나 중전은 한자를 알고 있을지라도 항상 언문을 사용하였으며, 특히 교서나 교지는 꼭 언문으로 작성하였다.

64p

정순왕후는 친자식이 없는 가운데 계비로서의 지위를 누리기 위하여 자신의 친정 가문의 소속 당파인 노론 벽파를 이용하여 지위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녀는 계비로서 단순히 왕을 보필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노론 벽파 등 정치세력을 유지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정순왕후는 영조 정조 연간 정치권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신임의리와 임오의리 문제를 선왕(영조)의 유지라는 명분을 가지고자신의 뜻에 맞게 해석하였다. 선왕의 유지를 따르는 것은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에게 정치적 명분으로 중요하였다. 그 결과 정조대에 측근으로 활동하였떤 인물들은 의리를 어겼다는 죄목으로 제거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의 인물들이 의리를 지킨 사람으로 다시 등용되어 정국을 주도하며 정국의 변화를 가져왔다.

정순왕후는 총명하고 논리적이고 결단력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 경험으로 정치 감각이 있었고 늘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영정조대에는 미약하였으나, 순조대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녀의 정치적 리더십이 일반 백성을 위한 여러 정책에 발휘되었다면 후세 그녀에 대한 평가가 좀 더 긍정적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녀의 리더십은 궁궐안의 정치권력에 한정된 리더십이었다는 것에 큰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78p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여성의 정절과 순종은 더욱 강화되었다. 17세기에 들어오면 가문의식으로 열녀 이념이 더욱 규범화, 경직화 되었던 것이다. 같은 열녀라도 순절은 수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는 순절(자결)의 유형으로 목매어 죽는 경우, 굶어 죽는 경우, 물에 빠져 죽는 경우, 독약을 마시고 죽는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서 목매어 죽는 유형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이 굶어 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영조의 딸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병사하자 너무 슬퍼하여 단식하여 남편을 따라 죽어 합장되었다. 왕실에서는 처음 있는 烈行이었다. 따라서 영조의 슬픔은 그만큼 매우 컸던 것이다.

"내가 왕세제로 책봉되어 세제가 되어 대궐에 들어갈 때에 효장과 네가 나를 따라 들어왔다. 그 겨울을 견디며 이후로 믿고 의지할 사람은 단지 나뿐이었다. 효장이 먼저 가고 너는 다시 형제가 없는 외로운 몸이 되었다. 임자년에 혼례를 하여 월성위를 사위로 맞이하게 되었고 이 뒤로 내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낙태가 원인이 되어 기운이 더욱 떨어져서 지금까지 온 것만도 의외였다. 월성위가 죽은 뒤에 늘 몸이 약한 네가 지나치게 애통해 하면서 초상을 치룸이 매우 걱정되어 근심이 깊었었다. 어찌 지난 날의 쇠약한 몸으로 도리어 강단지게 칠일동안 먹지않을 것을 생각이나 하겠는가? 자기 생각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내가 직접 가서 음식을 권하기는 하였으나 성의가 모자라서 너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였다. 어느덧 열흘이 지나 장문의 편지로 다시 타일렀다. 내 생각에는 이 정도면 네 마음을 감동시키리라 여겼는데 전혀 동요되지 않고 끝내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아! 슬프다. 백발의 늘그막에 네가 절개를 세운 것을 보고 열녀가 있다고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아! 네가 월성위의 유지를 받아 그를 따르려는 뜻이 있다고 해도 백발의 네 아비가 의지하려는 뜻을 생각하고 또한 네 아비가 직접 네 집에 갔던 때를 생각했다면 어찌 한결같은 절개를 지켜 끝내 마음을 돌리지 않았겠는가! 아! 슬프다. 이것인 모두 내가 자애롭지 못한 때문이고, 내가 자애롭지 못하여 초래한 것이니 어찌 너에게 유감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 슬프다. 끝내 어찌 돌아보지 않는가! 아! 멀리 떠나는 길에 후회를 할 수 있겠는가? 후회를 해도 후회가 어찌 미치겠는가? 적막한 야차에서 백발을 돌아보며 그 아비는 반드시 눈물을 삼킬 것이다. 한밤중에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아! 슬프다. 내게 열녀의 딸이 있으니 어찌 유감이 남아있겠는가? 멀리서 바라보니 눈물이 쏟아진다. 제문을 내가 부르고 쓰게 하여 초상을 주관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반우 뒤에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겠다. 화순옹주여, 화순옹주여, 나의 뜻에 감응하여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고 나의 이 잔을 흠향하기를 바란다. 아! 슬프다. 아! 슬프다."

 위의 제문에서 "아! 슬프다"는 문장이 여섯 차례나 반복되어 나옴으로써 영조는 한달사이에 딸 화순옹주와 사위 김한신의 죽음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슬픔의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기 이전부터 평소에 몸이 병약했음도 알 수 있다.

(아버지 영조의 슬픔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제문이라 가슴이 먹먹하다. 높은 절개와 같은 대의명분은 애닯은 육친의 정 앞에서는 다 부질없는 것 같다.)

85p

정조는 고모 화순옹주의 집 마을 어귀에 정문을 세우고 "열녀문"이라 명명하라고 한 후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사람이 제 몸을 버리는 것은 모두 어려워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하가 그리했을 때는 충신이 되고 자식이 그리했을 때는 효자가 되고 부녀자가 그리했을 때는 열녀가 되는 것이다.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여염의 일반 백성들도 어렵게 여기는데 더구나 제왕의 가문이겠는가? ... 아! 참으로 매섭도다. 옛날 중국 제왕의 가문에도 없었던 일이 우리 가문에서만 있었으니, 동방에 곧은 정조와 믿음이 있는 여인이 있다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요컨대 화순옹주는 남편 김한신이 죽자 왕녀의 신분으로서 유일하게 남편의 뒤를 따라 자진을 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자란 슬픔, 오라버니 효장세자의 죽음, 無子, 자신의 병약 등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서 화순옹주는 사랑하는 남편마저 갑자기 병사하자 14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하다가 끝내 순절하였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삶이다. 겨우 두살 때 생모를 잃고 9세 때 하나 뿐인 동기간인 효장세자가 죽었고 자식도 없고 본인은 몸도 약해 의지할 곳이라곤 오직 남편 뿐이었을텐데 허망하게 가고 나니 세상 천지가 다 막힌 절박함이 들었을 것 같다. 아버지인 영조 입장에서는 어미 없는 첫 딸이 저리 허망하게 죽고 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차마 열녀문을 세워 위로할 수 없었을 것 같고, 한 다리 건너는 조카 정조 입장에서는 여염에서도 하기 힘든 기개높은 헌신적인 행실을 왕가에서 이루었으니 자랑스러워 표창했을 것 같다.)

92p

일찍이 김한신은 화순옹주에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자산이 부귀하다고 해서 남을 업신여기기가 쉽습니다. 옹주는 절대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거처하는 집과 쓰는 물건이 나라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왕가의 후예로서 향곡에 몰락한 자로 충의군과 같은 부류는 거술러 올라가면 본래 한 뿌리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뜻이 가슴속에 늘 있은 뒤에야 덕을 쌓는 도가 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152p

신유박해 때 많은 여성들이 참수되거나 유배되었다. 특히 여성들은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예속적 지위에 대한 현실적 불만과 사후 구원에 대한 확신으로 교회 설립 초기부터 많이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던 것이다. 

163p

송씨와 신씨는 "인간의 우수를 잊지 위해" 입교하였다고 한다. 즉 나인 강경복의 취조에서 송씨와 신씨가 천주교를 믿게 된 동기는 아들과 남편을 잃고 슬픔과 비탄에 빠져있을 때, 이를 잊고 영혼을 구원받기 위한 것이었는데도, 추국을 맡은 관리들은 정치적 음모가 숨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 은언군 이인이 그 음모의 주동자라고 주장하였다. 결국 은언군은 실제 천주교를 믿지 않았는데도 그 상소로 인하여 사사되었다.

180p

순원왕후는 헌종대에 또 다른 외척인 풍양 조씨와 협력을 이루며 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안동 김씨와 헌종의 외가 풍양 조씨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인사와 정책으로 정국에 대립을 가져오지 않았다. 이는 순조가 헌종의 보도를 풍양 조씨 조인영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순원왕후는 선왕의 유지에 따라 선대부터 이어온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두 가문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89p

새로 즉위한 철종은 촌동이나 다름없고 수렴청정을 하게 된 자신도 아는 것이 없어 나라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은 위태롭기 그지 없으니, 재종동생 김흥근이 친동생 김좌근과 함께 힘을 합쳐 나랏일을 도와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한편 순원왕후는 혜경궁 홍씨의 삼촌 홍인한의 죄명을 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순원왕후는 홍인한이 억울하게 죄를 입었으며 정조도 생전에 홍인한을 단죄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분명하게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이라 강조하고 있다. 

(시할머니 혜경궁 홍씨 친정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남편의 사후에도 노력하는 순원왕후의 성품이 인상깊다. 한중록을 읽고 감격한 것인가!)

194p

순원왕후는 김정희가 헌종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중하지 않고 분수에 넘게 행동하다가 귀양을 가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의 성품이 조급하고 재주가 덕보다 뛰어난 인물이라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순원왕후에게 진종 조천의 문제는 단순히 진종의 위패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였던 것이다.

 한편 순원왕후는 집안에 혼인, 회갑, 과거급제 등의 경사나 상사, 병고, 유배 등의 흉사가 있을 때 가족들에게 편지로 축하를 하거나 위로를 하였다. '육가 육종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를 맞이한 순원왕후는 집안 조카들의 대과 급제라는 경사를 맞이한 기쁨과 더불어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강조하였다.

(개인적으로 보면 순원왕후의 성품은 자상하고 다정다감하며 분수를 잘 지키는 조신한 스타일이었을 것 같다. 원치 않게 남편과, 아들, 손자를 다 앞세우고 정치적 전면에 나서 문정왕후나 정순왕후처럼 권력을 휘두르기 보다는 왕조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느낌이다.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말이다)

221p

천주교는 당시 남녀관계와 부부관계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동정녀들은 결혼을 거부하고 스스로 동정을 택했다. 그들은 동정을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머리에 쪽을 올리고 자신을 과부라고 하던가 또는 허가 또는 오가의 아내라고 거짓으로 칭해야 했다. 그리고 남녀가 반드시 혼인하여 자녀를 낳고 기르는데 힘쓰며 효를 행해야만 한다는 성리학적 가족질서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또한 이들 여성들은 집에서 가출하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여성들끼리만 함께 생활하고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했다. 유교사회에서 동정녀들이 결혼을 거부함은 당시의 가부장적 유교 질서를 뿌리채 흔드는 것이었다. 천주교도들의 집회가 열리면 신자들간에 남녀유별이나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나란히 앉아 강론을 듣고 첨례나 송경에 참예하였던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을 어기고 남녀가 뒤섞여 집회를 갖거나 내방에 외간 남자를 들이는 것은 당시 유교적인 사회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졌다. 

 조선 후기 동정녀들은 성리학적 사회 질서와 윤리도덕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지배층뿐만 아니라 사회 일반으로부터도 심한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비록 스스로 원하여 자발적으로 동정을 지키며 살아갔지만 이로 인하여 그들이 기존에 누리고 있던 신분적 특권이나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포기하였던 것이다.

224p

이순이는 천주교를 믿게 된 후 동정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당시 유교적인 관념으로서는 사대부가문의 처녀로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집안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사회적인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유중철 요한은 향반계급에 지나지 않아 서울에서도 높은 사대부 가문이었던 이순이와의 결혼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주문모 신부의 주선에 대해 과부였던 이순이의 어머니 권씨는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곧 동의하였으나 친척들은 유중철의 집안의 격이 너무 낮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권씨는 자기 처지가 어렵기 때문에 부잣집 사위를 얻는 것이 이롭다는 구실을 내세워 친척들을 설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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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의학을 믿으시나요? - 자연치료라는 달콤한 거짓말
폴 오핏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구미에 딱 맞는 책이었다.

어려울까 봐 걱정했는데 300 페이지가 채 못 되는 분량으로 쉽고 편하게 읽힌다.

의학과 의료 산업을 선도하는 미국인 만큼 그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인 대체의학 산업도 아주 활발해 사회적 문제가 되는 모양이다.

어려서는 미국에서도 동종요법과 침술 등이 인정받는다고 하면 내가 모르는 의학적 의미가 있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 미국은 과학 교과서에 진화론과 창조론이 공평하게 들어가야 한다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나라였다.

선진국에서도 하고 있으니 옳다는 주장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한국으로 치자면 대체의학의 범주에 한의학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침술이 왜 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분석이 인상깊다.

혈자리니 경락이니 하는 소리는 그저 치료사에 대한 신뢰감을 높이기 위한 언변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피부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든 우리 몸의 엔돌핀이 분비되어 몸이 이완되어 치유감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라 비싼 돈을 들였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플라시보 효과인데 저자는 이것이 의학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설명한다.

환자에게 플라시보 효과를 줄 수 없는 의사는 병리학자가 되야 한다는 말이 정말 인상적이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의 작동 기전에 대해 신체만큼 잘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사람들은 대체의학을 찾고 카리스마 있는 무면허 치료사들에게서 위안을 얻고 엄청난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치료사들의 특성은 개인적인 카리스마가 매우 강하고, 환자에게 1:1로 접근하기 때문에 신뢰감이 높다.

물론 뛰어난 상술가이가도 하다.

저자는 대체의학 종사자들이 거대 제약회사를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면서도 보건 당국의 감시는 환자 선택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빠져 나감을 지적한다.

대체의학 치료사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인정하고 보건 당국의 규제와 감시를 수용한다면 적은 돈으로 환자들이 큰 부작용 없이 위안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인정할 수도 있으나, 절대 그렇지 않다.

진심으로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고 사람들은 플라시보 효과 운운하는 제품에 절대로 돈을 많이 쓰지 않는다.

자궁경부암 백신이 도입되어 청소년들에게 무료 접종이 시행되고 있다.

이 백신은 다른 백신에 비해 원가 자체가 매우 높은 편으로, 개인이 돈을 내려면 십여 만원이지만 국가에서 무료로 접종해 주면 맞는 게 당연히 이익이다.

그러나 인터넷 괴담이 돌아 불임이 된다는 둥, 근육마비가 온다는 둥, 지능 저하가 된다는 둥 보호자들의 두려움 때문에 접종률이 매우 낮다.

예방접종으로 자폐가 됐다는 괴담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결국 저런 국가 예방접종은 국민의 세금으로 무료 공급이 되는데 정작 사람들은 제약회사가 국가와 결탁해 이익을 올린다는 의혹만 사고 있으니 이래서 작은 정부가 좋은 건가 싶기도 하다.

책표지에 나온 말이 주제를 함축한다.

"대체의학은 없다. 치료하는 의학과 치료하지 못 하는 의학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이런 말도 추가하고 싶다.

"한의학이나 서양의학은 없다. 전통의학과 현대의학이 있을 뿐이다"



<인상깊은 구절>

13p

나는 전통적인 치료 방법들이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다 하더라도, 대체의학에 무임승차권이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치료에 동일하게 높은 시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 책의 목적은 대체의학 분야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검토하고, 사실과 미신을 구분하려는 것이다. 사실상 전통의학, 대체의학, 보완의학, 통합의학, 전일론적 의학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려낼 가장 좋은 방법은 과학적인 연구 결과들을 신중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터넷 채팅방이나 잡지 기사 혹은 친구와의 수다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37p

기원전 2세기에 중국의 치료사들은 질병이 에너지의 불균형에 기인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중국의 치료사들은 살갗 아래에 여러 개의 가느다란 침을 놓음으로써(침술) 이 불균형을 치료했다. 그러나 중국의 의사들은 인체 해부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신경이 척수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신경이 뭔지도 몰랐다. 척수가 뭔지, 뇌가 뭔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들은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마치 강이나 노을처럼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것을 통해 해석했다. 중국의 의료진들은 인체의 에너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긴 곡선을 따라 이어지는 12경락을 관통한다고 믿었는데, 이는 중국에 12개의 큰 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라고 하는 생체 에너지를 발산시키고 음과 양이라고 하는 경쟁적인 에너지 사이의 정상적인 균형을 회복시키기 위해, 이 경락선을 따라 피부 아래에 침을 놓았다.

51p

여드름과 자폐증에서부터 궤양과 하지정맥류에 이르기까지 온갖 질병들을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일러준다. 낱낱의 모든 일에 올바른 방법과 잘못된 방법이 있다는 걸 알기만 해도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더구나 이 책들은 사람에게 걸릴 수 있는 모든 질병들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굉장히 단정적이고 대단히 명쾌하게 설명해 놓아, 거의 사이비 종교집단과 다를 바 없는 열렬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해라. 그리하면 더 오래 살고, 더 깊이 사랑하며,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한 자녀를 키우리라. 인생이란 본래 제멋대로에 어디로 튈지 모르며 도무지 예측 불가능한 것이라 이런 책들을 읽으면 상당한 위안을 얻기 마련이다.

 대체의학의 또 하나의 유혹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현대 의학을 공부한 의사들은 냉담하고 무심해보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환자들은 자기가 한 사람의 개인이기보다는 숫자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바로 이 틈새를 대체의학 치료사들이 파고들어 온 것이다.

96p

FDA 국장은 건강기능식품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이 열거된 도표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처방약의 절반은 식물이 원료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약물이 우리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거라고는 누구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엄격한 테스트를 고집함으로써 허용할 수 없는 독성물질이 포함된 약물을 가려내기 때문이지요. 식물이 치료 목적의 건강기능식품으로 판매되는 상황에서 모든 위험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100p

이 법은 주요 재료들 -비타민, 무기질, 허브, 아미노산- 외에 다른 재료를 첨가해 아무리 인공적으로 만든 제품이라 할지라도, 제조업체들이 '건강기능식품'이라고 부르면 그냥 건강기능식품으로 규정하도록 허용할 것이다. 예컨대, 약이나 음식에 새끼 양의 뇌를 넣으면 안정성과 효과를 입증하기 위해 수백만 달러를 들여 수년에 걸쳐 연구할 각오를 해야 하지만, 건강기능식품에 이것을 넣으면 아무것도 증명할 필요 없이 순조롭게 허가를 받게 될 것이다.

103p

건강기능식품 산업은 관련 법아니 건강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권을 갖기 위한 것이라고 믿도록 사람들을 교묘하게 조종했지만,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자유란 무지한 상태에서 누리는 자유일 뿐이다. 아는 게 힘이라면, 건강기능식품 건강교육법은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 것이다.

120p

"효과 있는 대체의약품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약이라고 불립니다."

173p

"과학적인 과정은 민주적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가장 많은 득표수를 얻는다고 과학적인 사실이 되는 건 아니다. 과학적인 사실은 증거의 질, 증거의 영향력, 증거의 재현성과 관계된다.

226p

"뇌 손상은 일단 그 원인이 제거되더라도 증상이 당장 역전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제닝스와 부타르 박사는 제닝스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킬레이션 치료만 받았는데 건강이 나아지기 시작했으며, 36시간 안에 증상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발표한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이 회복 과정이 나에게는 그녀의 증상들이 무엇보다 심인성이었다는 단적인 증거로 보인다."

229p

결정적으로 역설적인 점은 부타르가 자신은 효과가 입증되지 않아 허가도 받지 못한 약품을 팔아 큰돈을 벌고 있으면서 대형 제약회사를 비난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의 동기는 연구개발에 자금을 대는 것입니다. 그래야 독점권을 챙길 수 있고 또 그래야 거약의 돈을 벌 수 있으니까요." <뉴요커>의 기자는 사람들의 모순된 행동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대형 제약회사를 싫어한다. 그러면서 대형 플라시보의 품 안으로 뛰어든다."

241p

노벨라는 침술이 그 자체로 가짜, 속임수, 사기라고 믿긴 했지만, 침술이 효과가 없다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그는 침술이 왜 효과가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침술은 치료사의 위로와 보살핌이라는 긍정적인 치료적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한 일종의 의식이다. 환자들은 30분 내지 1시간 동안 긴장을 이완시킨다. 바로 이때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지, 사실상 피부 속에 침을 찔러 넣기 때문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다분히 플라시보 효과라는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를 사소한 것이라며 무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243p

침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상충되는 사실에 부딪친다. 1)침술은 인습적이지 않다. 2)침술은 비싸다 - 한 번 침을 맞는 데 65달러에서 120달러의 비용이 들고, 자주 여러 차례 맞아 하며, 종종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이 갈등을 가장 잘 해결하는 방법은 침술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인지부조화 이론' 이라고 불렀다. 이 이론에 대한 가장 좋은 예로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포도>를 들 수 있다. 여우는 포도가 실 거라고 스스로를 납득시킴으로써 이 갈등을 해결한다.

245p

대체의학 치료사는 독특한 분위기가 주는 치유력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말 좋은 치료사입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입니다. 당신이 도움이 필요해서 나를 찾아왔다면 당신은 곧 낫게 될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래왔습니다. 결국 이건 사실상 침술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치료는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블로는 이렇게 썼다. "환자들에게 플라시보 효과를 주지 못하는 의사는 병리학자가 되어야 한다."

249p

첫째, 침술은 속임수다. 침술사들이 정직하다면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침술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2천 년 동안 내려온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을 모두 무시하자. 사실 중국인들은 해부학을 믿지 않았고 신경계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해 아는 바도 없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이 중국의 강과 음력에 기반을 둔다는 그릇된 가정을 하게 되었고, 피부 속으로 되는대로 침을 찔러 넣게 된 것이다. 기나 음과 양, 경락을 무시하라. 피부를 살짝 찔렀다가 다시 나오는 침을 사용해도 침술의 효과에는 변화가 없다. 침술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만으로도 엔도르핀은 충분히 분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뱉는 순간 플라시보 반응이 사라질 게 분명하기 때문에 침술사들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음, 양, 기에 대한 심상이 치료 과정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말은 플라시보 반응을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치료의 필수 요소가 속임수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생명윤리학 교수 아트 캐플런은 플라시보 약물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위험성이 낮은 상태에서 저렴한 비용과 낮은 부담으로 환자를 속이는 것은 윤리적이다. 그렇지만 먼저 그들은 의학 보고서에 자신들의 의료 행위를 보고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플라시보 효과가 강력하다는 사실을, 어떤 것들이 플라시보 효과를 유발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의학이 플라시보 효과를 가장 잘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보고해야 한다."

(과연 이렇게 양심적이고 지각있는 대체의료 치료사들이 있을까? 그 정도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대체의학에 종사하지도 않을 것이다)

266p

"전일론 의학 치료사들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깊이 전념하는 경향이 있어 유능한 사업가가 되기 어렵다는 견해는 거짓임이 밝혀졌다. 머콜라 자신은 '탐욕에서 비롯된 의료 분야의 모든 과장 광고'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는 가짜 약장사로 유명한 1800년대의 불행한 전통인 자신의 사업을 키우기 위해 전통적인 마케팅이며 인터넷 직거래며 할 것 없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판매왕이다."

268p

"의학이 증거에 기초하지 않은 대체의학 제품들을 가까이할수록 결국엔 의학에 피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왕이라는 잘못된 전제를 신봉한다. 물론 나는 의료도 일종의 산업이며 대체의학이 산업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의학과 대체의학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전문가적 규범과 전문가적인 가치와 전문가적인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의료는 시장에 불과하고 환자는 고객일 뿐이며 환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외친다면, 결국 고객의 요구 앞에 전문성이 무너지는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우리는 환자가 유혹에 약하지 않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를 도와줄 전문성으로 똘똘 뭉친 지지자가 없다면 좋은 환자가 되기 어렵다.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울 치료사들만 득실거릴 것이다."

270p

애석하게도 마법적인 생각은 해가 없지 않다.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의학적 지식의 격차는 에너지장이나 경락이나 점성술이 아니라, 이른바 과학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기준 아래에서 의미 있는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채워지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무지, 더 나아가 과학에 대한 부정을 조장한다면 환자들은 질병에 대해 왜곡된 인식을 갖게 되어 마침내 최악의 돌팔이 의사들에게 쉽사리 걸려들고 말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과학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과학만능주의라며 진리를 공격하고 현대의학을 서양의학이라고 폄훼한다. 의학은 가치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란 사실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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