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경제 이야기 - 화폐통일 진시황부터 거시경제학자 제갈량까지
왕링옌.왕퉁 지음, 이서연 옮김 / 시그마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듣고 뻔한 역사 이야기인 줄 알았다.

특히 중국에서 출판된 책들은 가벼운 편집 위주의 책이 많아 깊이 면에서 늘 실망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밌고 훌륭할 수가!

제목을 너무 평범하게 지어 책이 가진 놀라운 재미와 깊이를 반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알라딘에 리뷰도 없어 홍보가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저자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로 사학자가 아닌 경제학자인데도 역사에 대한 깊이나 비평이 대단한 수준급이다.

단순히 경제적 현상을 역사적 사례에서 찾는데 그치지 않고, 경제학의 원리로 보는 역사를 아주 흥미롭게 설명한다.

나는 역사에는 관심이 많지만 경제 쪽은 주식의 원리도 다 이해를 못하는 편이라 경제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들이 다소 어렵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리에 눈을 뜬 기분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전근대 사회에서도 어떻게 재화를 획득해서 분배할 것인가, 또 그것을 바탕으로 왕조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했던 것을 보면, 인간은 정말 사회적 동물이고 경제적 존재인 것 같다.

무엇보다 공공지출에 대한 비판이 현 정부의 시책과 비교되어 많이 와 닿았다.

부자들은 권력과 정보가 있기 때문에 증세를 해도 자산을 잘 숨기고 정부가 원하는 만큼 많은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증세 정책이 강화될수록 노동으로 먹고 사는 중산층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그 돈이 가난한 계층으로 가지도 않을 뿐더러 결국 중산층도 붕괴되고 만다.

정부가 원하는 것이 건강한 중산층의 확대라고 본다면, 증세 정책은 사회를 안정적으로 만들지 못하는 셈이다.

또 정부의 효율성은 민간을 따라올 수가 없다.

정전제로 대표되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이를 설명한다.

자기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과도한 사회주의 경제정책들은 결국 모두를 가난하게 만들 수 밖에 없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입증하고 있으니 현 정부 정책자들이 한 번쯤 읽어 봤으면 싶다.

월급을 적게 주면서 청렴함을 기대할 수 없다는 주장도 아주 현실적이다.

옹정제가 양렴은을 지급해 관리의 부패를 막았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경제적 관점으로 보는 역사가 궁금한 분들이라면 필독을 권한다.

모름지기 책이라면 이 정도 수준은 되야 출판을 하는 것인데 가벼운 책들이 너무 많아 안타깝다.



<인상깊은 구절>

48p

화폐 통일을 구체적으로 실시하는 과정에서 보면 업적을 내세우기 좋아하는 진시황이 상당히 거칠게 일을 추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화폐 통일은 전쟁보다도 더욱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에 약간만 부주의해도 경제 발전에 큰 손실을 불러올 수 있었다. 

 설사 진나라가 모든 정치적 자원을 쏟아 부어 화폐 통일을 실행했다 하더라도 '말에 의지해 정보가 전달되고, 함성에 의지해 공지가 알려지고, 새김으로써 글을 남기던' 시대였던 만큼 수년, 심지어 수십 년의 세월을 쏟아 부어도 완성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더구나 진시황은 동쪽에는 만리장성을 쌓고 북쪽으로는 흉노족을 몰아내며 남쪽으로 월나라에 군사를 파견하고 서쪽으로는 파촉까지 길을 내는 등 대규모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화폐 통일 정책에 사용할 재정자원이 분명히 적었을 것이다. 더구나 짧은 시간 내에 화폐 통일을 강행해야 했으므로, 민간의 자원을 대규모로 수탈했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진나라는 6국 화폐 통일에 따른 적응 기간 동안 노역을 줄이거나 세금을 낮추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 진나라가 짧은 시간 동안 사방에서 전쟁이 계속됨에도 화폐 통일을 강행했던 것은 당장 혼란스럽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개혁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시황의 적지 않은 '정책 성과'와 개혁 정치는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백성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진시황 자신도 직접 누리지 못한 개혁의 성과는 다음 왕조인 한나라가 모두 갖게 된다.

56p

게다가 진시황은 큰 업적을 세우는 걸 좋아했다. 이 때문에 항상 정벌과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군대를 모으는 일이나 궁을 짓고 만리장성 쌓는 일은 모두 대규모 재정과 노동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백성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사회의 자산이 대량으로 소모되었다. 사실 이것은 과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른 후 유럽이 겪은 대공황 상황과 같았다. 백성들은 계속되는 각종 노역을 힘겹게 감당해야 했다. 더구나 강압적으로 6국의 화폐를 폐기한 뒤 일련의 적응 과정이나 보상 조치가 전혀 없어 대량의 민간 자본이 소실되었다.

59p

항우는 대적할 수 없는 용맹한 무장이었다. 하지만 장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적을 무찌르는 용맹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수하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군대의 사기를 고무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몇 배에 달하는 진나라 군대를 보면서 항우 자신은 두렵지 않았을지 몰라도 수하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전투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만약 모든 병사와 군관이 한마음 한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싸운다면 승리할 확률이 가장 높아진다. 하지만 경험이 많은 장군이나 정예병도 상황이 수시로 변하는 전장에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병사들은 승리할 것이란 희망보다는 자신이 전장에서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심리적으로 붕괴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는 빨리 전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이다.

 게다가 옆의 사람이 도망을 가면 원래 싸우려 했던 사람도 심리적으로 붕괴되면서 덩달아 함께 도망치게 된다. 그렇게 후퇴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던 병사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적에게 등을 보인 채 도망친다. 그렇게 진영이 무너진 병사들은 추격해오는 적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도륙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에 맞는 선택을 한다면 결국 최악의 결과로 치닫고 만다. 그러므로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기를 올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전투를 하기 전에 사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승리에 대한 주관적 확신을 심어놓는다면 전투 중에 힘겨운 상황을 만나도 도망치지 않는다. 이것이 고대에 장군들이 사기를 목숨과 같이 생각했던 이유이다.

150p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기 아까워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설령 모든 재산을 자기 나름대로 성실하게 신고한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목적을 가지고 악착같이 파고들면 어디선가 고발당할 거리가 나오게 마련이다. 

 이런 법제들로 무제의 국고는 풍족해졌지만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사마천의 묘사에 따르면 당시 중산층 이상 상인들은 대부분 파산했으며, 사람들은 돈이 생기면 쓰려고만 할 뿐 돈을 벌거나 모아두려고 하지 않았다. 고정자산이 생기면 재산세를 내야 하고, 돈을 벌면 소득세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생해서 번 돈이 자신의 삶을 보장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화로 돌아올 수 있다면 무엇 하러 부지런히 일을 하겠는가?

154p

현실 사회에서의 이러한 교환은 상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교환 과정에서 숙달되는 전문성을 고려해 본다면 최종적인 개선 효과는 놀랍다. 오늘날의 생활조건이 한나라 때 황제보다도 좋은 것은 상인의 분담과 기술 향상이 가져다준 이득이다. 그렇다면 전문적인 업무분담이 기술 향상을 촉진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전문 업무가 분담되어야 연구원들이 충분히 높은 보수를 받으며 연구에 매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나라에도 총명한 인재는 있었다.

157p

민영기업은 국영기업보다 항상 효율이 더 높다. 첫째 이유는 국영기업의 경영인은 회사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투지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국영기업은 여러 비경제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69p

정부가 국민을 '힘들게 한다'는 것은 종종 정부가 거액의 자본을 하나 또는 몇 개의 항목에만 집중해서 투입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고대에는 주로 두 가지 방면에 집중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군주 개인의 향락이다. 화려한 궁전을 건설하거나 정원을 조성하거나 진귀한 금은보화를 총애하는 신하나 후궁에게 하사하는 등 제한 없이 지속적으로 많은 자본을 소모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외 전쟁이나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한 군비 지출이다.

 일반적으로 향락으로 국고를 탕진한 군주는 '혼군'이라 불렸고, 군비 지출로 국고를 소진한 국고는 만약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고 국가가 발전 단계에 있었을 경우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람들은 이러한 군주를 '웅대한 포부를 지닌 지략가'라 평가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대개 시호에 '武'자가 붙었다. 반면 운이 부족해 직접적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경우 시호에는 '桀'이나 '煬'과 같은 글자가 붙었고, 이후 사관들은 이런 군주들을 '폭군'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사료를 보면 이런 군주들에게는 항상 '천하를 궁핍하게 만들었다'는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2p

적합한 공공 프로젝트가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케인스는 정부가 사람을 고용해서 아무 의미 없는 구덩이 파고 메우는 일이라도 시켜여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임금을 받아 소비하고 기업이 상품을 판매해야 자금이 돌아가 전체 경제 불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군주의 사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도 이재민의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의미하에 구덩이를 팠다가 메우는 케인스의 방법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겠다. 시키는 일을 해야만 최소한의 임금이라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재민은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위험이 줄어들고 노동의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힘겨운 시기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혼군일 경우 국가는 큰 불행에 빠질 수 있다. 이런 군주는 농민이 바쁘든 한가하든 상관없이 내키는 대로 인력을 동원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 든다. 송휘종의 화석강이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동원은 농민들의 농사주기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사회 자산에 직접적인 손실을 초래해 천하를 궁핍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184p

경기불황에 따른 지원금만 제공하고 실질적인 생산활동은 보장해 주지 않는 일부 부적절한 복지 지출은 거액의 공공자금을 소모한다. 이러한 지원은 겉으로는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책임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이렇게 재정을 갉아먹을 경우 정부 재정예산이 더욱 악화된다. 더구나 힘든 상황에 처한 기업과 기업주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면서 사람들의 직장을 구하려는 적극성은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지출은 반드시 줄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의 투자 확대와 지출 감축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 경제위기일 때도 생산 연구개발과 상업유통 방면의 투자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비생산적인 복지와 이전지급 방면은 절약해도 괜찮다. 한마디로 경제위기에 처한 국가는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읽어봐야 할 대목 같다)

189p

강충 등의 사람들이 감히 태자 유거를 모함할 수 있었던 것은 태자의 생모이자 황후인 위자부가 세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남동생인 대장군 위청이 병사함으로써 더 이상 지지해 줄 세력이 없는 데다가 황제의 총애를 잃고 있었다. 이 반란 사건으로 위청의 아들도 화를 입어 죽임을 당해야 했다. 안타까운 점은 위청은 생전에 무제를 위해 전장에서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생전에 죽음을 무릅쓰고 흉노족과 치열히 싸우며 한나라를 지켰지만 정작 사후에 가족을 지킬 수는 없었다.

 이처럼 한나라가 공신과 그들의 후손을 푸대접하는 일은 이전부터 있어왔다.

193p

천하가 안정된 후에 공신들이 반란을 계획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공신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공을 인정받아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가업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황제는 공신을 제거하고 싶어 하지 않고, 공신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황제와 공신이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는 비극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일까? 바로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황제는 공신을 잘 대해주고 싶지만 만약 공신이 정말로 찬탈을 하려고 하는 경우에는 먼저 제거해 후환을 없앨 수밖에 없다. 황제에게는 자신의 황위와 가문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이고, 군신의 모범을 세우는 일은 부차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누가 정말 충성스러운 공신이고 누가 찬탈을 꿈꾸는 공신인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두각을 나타낸 공신의 경우 자연스럽게 권력과 명성을 가지게 되면서 황제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이에 황제가 진정한 충신을 가려내는 일은 더욱 더 어려워진다.

 공신의 입장에서 보면 황제가 자신을 시험해 본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신호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잘못 대처할 경우 감옥에 갇히거나 자신과 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처한 이상 자신이 바라는 조용하고 안락한 삶은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리느니 아예 박차고 일어나 위험한 도박을 해보는 게 나았던 것이다.

 더구나 충성심이 강한 신하들은 황제가 자신을 의심할수록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고 빈틈없이 일을 처리했다. 그러한 행동이 오히려 의심을 악화시킨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은 알지 못했다. 황제가 신하을 의심하는 것은 신하가 명성과 권력, 민심을 가지고 있어 자신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훌륭한 처신과 뛰어난 능력으로 명성을 쌓을수록 황제의 의심도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원칙을 크게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위신을 떨어뜨리는 잘못을 저지르는 게 나았다

204p

정전제로 인해 일부 토지를 잃는 대지주들에게 다른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고, 아울러 토지가 그다음으로 많은 중소지주와 자작농에게도 일부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그런 뒤에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제공해 상황을 개선시키는 것이다. 한나라는 황제의 힘이 수도에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주와 지방 호족의 지지가 필요했다. 그러니 황제가 지주와 지방호족이 받는 손실을 충분히 보상해 주어야만 비로소 정전제를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한날에서 이러한 이익 교환 방법을 생각해 낸 황제는 없었으며, 성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이 개혁은 시작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존중하는 것은 개혁이 본래 의도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조건이다. 

205p

두 정당의 토론에서 민주당은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이익은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부자들의 이익만 돌보려 한다고 공화당을 질책하면 공화당은 '우리는 결코 중산층과 저소득층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증세야말로 중산층에게 더욱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반박한다. 부자들은 다양한 자산과 해외 계좌를 가지고 있다. 즉, 세금을 많이 걷을수록 부자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더욱 노력한다는 것이다. '반면 중산층의 경우 대부분 자신의 일을 통해 수입을 얻기 때문에 세금을 피할 방법이 거의 없다. 그리고 세금을 많이 걷는다고 해서 반드시 세금의 총액이 증가해 저소득층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중산층의 세금 부담을 가중시켜 양극화를 가속화시킬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점을 보면 성현의 생각이 짧았다고 탓할 것도 없다.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기 상쇄'의 문제점은 해결되지 못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현의 사회실험은 이후 황제들에게 신선한 교훈을 주었다. 그 이후로 어느 왕조, 어떤 황제도 다시는 정전제를 실시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209p

상나라, 주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나라는 이미 사유재산권에 대한 의식이 분명했다. 상고시대에는 협력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앙의 왕전을 농민들이 힘을 모아 함께 경작했다. 하지만 한나라의 경우 계속 정전제를 실시한다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이득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히려 '공유지의 비극'이 심각해져서 정전제의 협력 체제가 비효율적이 될 수 있다.

241p

환관은 외부 선택도 매우 적다. 황제는 거의 어떠한 보수도 지불하지 않은 채 환관을 자신의 옆에 묶어둘 수 있었다. 천자가 바뀌면 아래 신하도 바뀌던 시대에서 황제와 운명을 같이하는 환관으로서는 현재의 황제 말고는 의지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반면 권력을 휘두르는 외척과 관리들은 설사 황제가 바뀐다 하더라도 일부를 제외하고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직접 황제를 옹립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정치 풍파에 휘말릴 확률이 낮았다. 게다가 황제가 외척에게서 권력을 다시 되찾아 오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시도였다. 그래서 황제는 가능하다면 뜻이 맞는 관리와 함께하고 싶어 했지만 조정 관리들은 자신과 후손의 안전, 그리고 다른 관리들과의 정치적 관계까지 모두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상당히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황제가 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 대가는 황제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부분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관은 황제에게 가장 좋은 동맹자가 되었다. 더욱이 환관과 황제는 밤낮으로 함께 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고 친해질 수 있었다.

 권력을 가진 황제의 경우 주로 조정 관리들과 함께 일을 처리한다. 왜냐하면 관리의 경우 교육 수준도 높고, 선발 구조도 환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체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역사적으로 태평성대의 시기라고 부른다. 반면 권력을 가지지 못한 황제의 경우는 과감한 시도를 할 때 주로 환관의 힘에만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 환관은 어떠한 의미에서 보면 권력을 잡지 못한 황제의 마지막 선택지였던 셈이다.

254p

동한 시대에 이러한 금은보화를 살 수 있는 대상은 황제의 친척과 외척 그리고 거상들이었고, 현대 짐바브웨에서는 부유한 백인 지주들이었다. 무력을 사용해 부유층을 청산한 동탁과 무가베는 자신이 몰수한 금은보화를 구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구입할 사람이 없다면 금은보화는 단지 장부상의 자산일 뿐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277p

유럽에서 십자군이 1차 원정에 나섰을 때 신앙심을 가지고 있던 영주들은 서유럽에서 출발해 지중해의 가장 동쪽 끝까지 가서 셀주크 투르크족과 지난한 전투를 치렀다. 굳건한 신앙심을 가진 십자군과 투르크족 모두 절대 질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멀리 원정을 온 십자군에게는 전투에서 진다는 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전군의 몰살을 의미했다. 

303p

이렇게 둔전한 토지는 모두 국가가 소유했다. 둔전병이나 농민이 둔전에 경작을 할 경우 생산된 곡식을 국가가 비율에 따라 병사나 백성에게 분배했다. 국시대에는 군대 체제하에서 군사와 백성 모두 태평성대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분배 제도가 실행될 수 있었다. 둔전제가 실시된 이후 위나라의 식량 문제는 상당 부분 해결되었고, 군량미가 부족해 군대가 퇴각하는 상황도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둔전제가 지속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바로 사람들이 적극성을 잃어나 게으름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등애는 장수인 자신도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일개 군인과 농민들이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319p

사실 위나라와 진나라는 동한 시대보다도 중앙 권력이 약했다. 각 지방의 권력은 모두 호족과 사대부들이 쥐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 조정의 관리들도 모두 그들과 같은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결탁되어 있어 황제가 상황을 전환시킬 방법이 없었다.

 이 때문에 무제 사마염은 위나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교훈으로 삼아 주나라 제도를 모방해 친척들을 제후왕으로 임명했다. 친척들에게 주요 지역을 맡김으로써 군권을 장악해 명문 사대부와 지방 호족 세력에 맞서려 한 것이다. 사마염이 제후왕을 봉한 일이 훗날 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는 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당시에 틀린 결정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마염은 제후왕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보다는 진나라 조정의 권위를 보호해 주는 수호자의 역할을 더 크게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바랐던 대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321p

무제가 비록 슬기로운 군주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국군주로서 패기와 열정으로 진나라의 내외적인 문제들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제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유는 훗날 황위를 물려받아야 할 태자 사마충이 '심각한 바보'였기 때문이다.

 사마의, 사마소, 사마염과 같은 영제들 속에서 어떻게 사마충과 같은 바보가 태어나게 된 것일까?

332p

아무런 이상이 없다 하더라도 정보 소통의 장애 때문에 관계가 갈라질 수 있으며, 결국 한쪽에서 완전한 우위를 차지해 반대쪽에서 반항할 마음을 접을 때 양쪽은 오히려 소통하며 오해를 풀 수 있다. 바로 제갈량과 유선의 관계처럼 말이다. 유비가 임종을 앞두고 있을 때 제갈량은 능력과 덕망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의와 실권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쪽에서 대의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양측이 함께 협력하기는 힘들다. 

 왕도는 충성심으로 가문의 지위를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명맥도 유지했다. 동진은 이후에도 소준의 난과 비수대전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하지만 동진은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강력한 종실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족의 추대에 의지해야 했다. 그리고 이 점은 당시 권신들이 계속 등장하게 된 원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진의 권신들은 최소한 황실에 대한 굳건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344p

조조는 중원을 누비며 천하 통일의 야심을 드러내면서도 헌제를 보좌하며 맹세한 '한나라의 신하로 살며 찬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평생 동안 지켰다. 하지만 조비의 경우 조조의 정치적 유산은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한나라 신하가 아니었기 때문에 황제에 오를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사람들도 모두 천하의 8할을 차지한 것은 한나라 헌제가 아니라 조씨 가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헌제를 폐위시킨 뒤에도 조비는 자신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헌제를 잘 대우해서 아직도 한나라에 충성심이 남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새로운 왕조의 넓은 도량을 과시하는 게 좋다.

366p

높은 봉급을 준다고 해서 모든 관리가 청렴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낮은 봉급을 주면서 청렴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이룰 수 없는 꿈과 같다. 더욱이 감찰 제도의 개혁 성과가 크지 않고 대량의 사회 자본을 소모하고 있을 때는 차라리 '높은 봉급으로 청렴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경제에도 효과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376p

물론 이 점은 고양에게 너무 지나친 요구이다. 사실상 역대 황제들 중에서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귀족과 지주는 농촌 안에서 엘리트 계층이었다. 황제가 바라는 것은 귿들을 통해 사회 질서가 유지되고 국가의 정책이 집행되는 것이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보자면 지방의 명사나 지주들은 황제의 통치 기반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스스로 자신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390p

이와 같은 업적을 남긴 수문제는 또 상당한 애처가였으며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제왕은 천명을 받아야지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여러 저술을 남긴 공자도 분명 제왕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명을 받지 못했기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군이라 할 만한 업적을 남긴 수문제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수문제는 뭐든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393p

일부 작은 범죄를 저지른 백성과 관리들의 경우 약하게 처벌해서 이후 자신의 직책과 생활에서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하지만 수문제는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조정과 시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더욱 심각한 점은 수문제가 법률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가중 처벌을 함으로써 관료들에게 전략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사람은 법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기분을 이용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천거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음해해 해치워버릴 수 있었고, 이에 조정이 권력 투쟁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권신과 간신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397p

수문제가 실시한 업무 효율 향상 시스템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행정 권한을 이용해 곡식을 채우는 게 고생스럽게 헌납을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빠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관리들도 도덕자본이 상당히 높지 않은 이상 자신의 승진을 위해서 백성들을 압박하고 희생시키기 쉽다. 그러니 수문제가 실시한 상벌 제도는 사실상 관리들에게 잘못된 동기를 불어넣어 준 셈이다.

401p

동한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위 관리들이 일식,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 때문에 파면당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동한 정부는 어째서 재해민들을 구제하지는 않고 총리나 국방장관과 같은 관리들을 문책한 것일까? 이것은 사실 동한 정부가 미신을 지나치게 숭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자연재해가 하늘이 노여워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고위 관리를 파면시켜 하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에서 동한 시대에 외정을 책임지는 재상은 권력이 분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권도 별로 없는 상태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고위 관리의 파면으로 미치는 정치적 파장을 동한 정부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409p

재산권을 명확히 한다면 거래비용을 소홀히 할 수 있다. 시작할 때 누구에게 재산권을 부여하든 시장은 항상 효율적인 균형, 즉 가장 최적의 배치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코스의 정리는 정부의 간섭이 없는 상황에서도 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류>

177p

육성장후 유정은 자신의 당숙이자 한나라 천자인 무제가 중요한 제사를 개최한다는 말을 듣고 

-> 유정은 경제의 손자로, 무제는 유정의 당숙이 아니라 삼촌이다.

362p

전연의 개국황제 모용수 역시 참합피 전투에서 패하고 얼마 뒤 병사했다.

-> 전연의 개국황제는 모용황이고, 모용수는 그 아들로 후연의 개국황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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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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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은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

순수한 돈황 기행문이라 답사기 성격에는 맞지만 정보를 많이 주지는 않아서 아쉽다.

1권에 막고굴 편만 추가해서 냈으면 더 밀도있는 구성이 됐을텐데 아쉽다.

저자 입장에서는 따로 시간을 내서 돈황을 두 번이나 답사했으니 한 권으로 끝내기가 아쉬웠을 것 같긴 하다.

돈황 문서와 벽화를 약탈해 간 서구 학자들의 행태는 문화재 도굴범으로만 보기에는, 돈황학 창시라는 엄청난 학문적 유산이 있으니 비난만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알고 생각하는 문화재 도굴범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놀라운 학문적 열정과 식견으로 문서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내 체계를 세웠다.

자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고 학자로서 추앙받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오타니가 수집해 온 유물이 있어 세계 돈황학회에 한국도 역할을 하고 있다.

서구 학자들의 모험심, 학문적 열정 등은 경전을 찾아 머나먼 인도로 떠난 중국의 스님들을 연상시킨다.

인간이 원래 호기심의 동물인가 싶기도 하다.

중앙아시아가 청나라 때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독립적인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곳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돈황 벽화를 임모한 장대천, 상서홍, 한락연에 대한 소개도 신선했다.

장대천은 제백석이나 서비홍 등과 비견되는 유명한 화가라는데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청록 산수 느낌이 현대적이고 감각적이다.

사진 속의 상서홍은 키가 크고 파리에 유학까지 다녀 온 엘리트 화가인데 사막 한가운데 돈황 석굴에 일생을 바친 열정이 놀랍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의 그림은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인상깊은 구절>

304p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힘은 총칼보다 돈(자본)과 신앙(종교)에서 더 강력하게 발현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서역과 중국을 연결하는 관문이 바로 양관과 옥문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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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이야기 - 만주의 눈으로 청 제국사를 새로 읽다 경계에서 중국을 보다 1
이훈 지음 / 너머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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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다.

저자가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라는 책을 번역한 분이었다.

그 때도 유목민이 교역을 통해 어떻게 국가로 발전했는지를 인상깊게 읽었고 번역이 참 매끄럽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만주사와 만주어를 전공한 학자였다.

청나라 보다는 만주족이라는 민족에 초점을 맞춘 책으로 깊이있는 교양서로 부족함이 없다.

여진이 어떻게 만주로 바뀌게 되었을까?

누르하치에 의해 통일된 이후 홍타이지가 여진의 제 부족들과 주변 민족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만주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내세웠다고 설명한다.

100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1억 명이 넘는 한족을 어떻게 장악했는가, 오늘날의 거대한 중국 영토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저자는 만주족이 병영국가였음을 지적한다.

모든 만주족은 기인으로, 팔기에 속해 있고 전업군인이었다.

상무정신과 군사문화로 중앙아시아를 점령해 갔고 비록 근대화에 실패해 서구 열강에 몰락하고 말았지만 거대한 다민족 영토국가로서 오늘날 중국의 정체성은 만주족의 업적이다.

만주어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다.

청의 황제들은 만주족이 거대한 한족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만주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무엇보다 동족들을 한족과 분리거주 시켰다.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 알렉산더 대왕은 본인부터 외국의 신부들을 맞아 혼혈정책을 폈는데, 만주족의 분리 거주 정책이 수백년간 이어져 온 것이 신기하다.

그래서인지 만주족은 통념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고 현재 한족 다음으로 많은, 천만 명의 인구수를 자랑한다.




<인상깊은 구절>

131p

누르하치가 여진 세계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후금이 복속된 지역을 통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통된 여진에 대한 후금의 지배는 영역적 지배라기보다는 복속된 인민을 후금의 중심지인 허투알라 일대로 이주시켜서 사람을 통치하는 인민 지배의 성격이 강했다.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영역 지배의 성립이 근대국가의 출발점이라면 후금은 확실한 전근대국가였다. 보통 청나라나 만주족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만주족 대부분이 중국으로 이주한 1644년 이후에 만주 지역이 인구가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변했다고 알고 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만주 지역은 이미 누르하치 통치기부터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정복한 만주 지역 곳곳의 인구를 건주여진의 중심지인 현재 요령성 동부에 집결시킴으로써 팔기의 몸집을 불리고 명과 정면 대결을 지속할 수 있엇다. 그 대가로 입관하기 수십 년 전부터 요령성 동부를 제외한 만주 지역 곳곳은 인구가 사라진 황무지가 되어 갔다.

133p

<만주실록>은 여허가 멸망하는 최후의 순간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멸망한 여허를 애도하거나 추념하는 데 있지 않고 청 황실이 조상의 전승을 기념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실록>이 후금과 여허 사이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며 왜곡 없이 사실을 전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기록만큼 이날의 사실을 상세히 전하는 기록도 달리 없다.

135p

후금군은 사다리와 방패차를 내성 앞에 배치한 후에 긴타이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긴타이시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우리는 漢人이 아니다. 사나이다. 너희에게 항복하느니 싸우다 죽겠다." 후금군은 즉각 공격에 돌입했다.

138p

긴타이시는 소수의 병사들과 함께 마지막 전투를 준비했다. 후금군은 도끼로 누각을 찍어 부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긴타이시는 누각에 불을 질렀다.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적에 맞서다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태에서 최후로 선택한 방법이었다. 

167p

홍타이지가 계승한 국가는 팔기의 연맹체였고 그것은 여덟 개의 대부족이 연합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버지 누르하치는 창업 군주였고 자신이 아들들과 조카들을 팔기의 버일러에 임명했기 때문에 권력과 권위를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아버지와 같은 창업 군주가 아니었다. 홍타이지는 자신과 함께 후금의 최고 권력자였던 다이샨, 아민, 망굴타이의 양해를 받아 한의 지위를 계승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처럼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고 무형의 권위도 없었다. 홍타이지가 아민과 망굴타이를 제거하고 다이샨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거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것은 1631년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라이벌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체계적으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홍타이지에게 필요한 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중국식의 정치 방식이었다.

275p

황제들은 만주족에게 무예만이 아니라 문화 면에서도 일정 수준에 이르기를 원했다. 옹정제가 만주족에게 한인 문사들을 흉내 내서 한어로 얼치기 시를 짓고 논다고 호되게 비판한 사례를 보면 황제는 만주족이 지나치게 한어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는 만주족이 한어에 지나치게 무지하여 한인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았다. 시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만주족 통치자들이 만주족에게 원한 것은 그들이 만주어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대해 한인을 통치할 수 있는 정도로 한어를 적당히 익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안에서 중국 문화를 접하고 수용하며 살아가면서 주 언어를 만주어로 유지하기에는 만주어 사용자의 수가 부족하고 어휘도 너무 부족했다.

291p

순치제는 명의 환관 조직을 부활시켜 십삼아문을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한인 관료와 중국 문화에 대해서도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성향이 반드시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의 감정에 기인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심했던 순치제가 오랜 역사를 통해 제도적으로 황제권을 강화해 온 중국의 방식에서 만주족 지배층의 분권적 권력 구조를 타파하고 황제 일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순치제의 중국 문화에 대한 친화적인 태도로 인해 만주족 제일주의를 고수하던 보수적인 만주족 지배층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보수적 지배층에게 다행스럽게도 순치제는 십삼아문을 설치한 후 6년이 지난 1661년 1월 7일 스물넷의 나이에 병사했다.

347p

여기에서는 정복전을 벌인 동력의 하나로 청의 군사 문화를 거론하고자 한다. 청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지배 민족인 만주족 전체가 팔기에 속한 군인이자 군인 가족이었다는 전제를 알아야 한다. 만주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팔기에 속한 기인이었다. 심지어 만주족 가족에 속한 노복까지도 기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만주족의 모든 성년 남성은 전업 군인이었고, 그에 딸린 모든 가족은 군인 가족이었다. 하나의 민족 구성원 전체가 농업, 공업, 상업 등의 생산에 종사하지 않고 전업 군인으로 생계를 영위하며, 수백 년의 장구한 시간 동안 자신들을 먹여 살리는 방대한 인구의 타민족을 지배한 것은 인류사에 드문 사례이다. 이 독특한 만주족의 업종과 만주족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의 피지배 민족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과정이 청나라의 정복왕조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자극하고 상무성을 존숭하는 관습을 만들어 냈다.

363p

칼카나 코르친 몽고의 주요 인물을 황제의 지근거리에 배치하고 시위처의 대신으로 근무시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청 황제의 신뢰를 보여 주는 표시이기도 하고, 청조와 외번 몽고인을 정서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청 제국의 질서에서 이탈할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충성심을 창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370p

청에 대한 저항이 심한 지역에서는 대규모의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만주족은 정복자를 자처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의 농민반란군이 빚어 낸 혼란 속에서 중국의 질서를 재건한 구원군을 자임하며 명조의 계승자로 자신을 선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복에 대해 한어로 '정복', 혹은 만주어로 '다일람비'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산해관을 통해 진입했다는 의미의 '입관'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를 고수했다. 그것이 중국인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주족은 자신들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없애거나 개조해야 하거나 신설해야 할 부분이 아니면 가급적 명의 각종 제도를 그대로 이어서 사용했다.

417p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야 하고 지루하며 고단한 일이다. 그래서 사전을 집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타언어를 더 잘 이해하려는 집필자의 열망에서 비롯되며, 이차적으로는 자신의 지식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는 열망과 공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420p

만주어-영어 사전을 만든 제리 노먼의 묘비명에 그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지식을 얻는 것은 놀랍도록 달콤하고 즐거운 일이다."

(책에 탐닉하는 인간의 본능인 지식욕을 이렇게 잘 표현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정말 놀랍도록 달콤한 기쁨이다! 천국은 거대한 도서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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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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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유홍준 교수의 책답게 이름값을 한다.

책 판형도 좋고 디자인이나 종이 질감, 표지도 정말 마음에 든다.

편안한 글솜씨로 둔황 지역의 역사를 잘 버무려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준다.

중국 문화는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그런지 일본 편에 비해 미적인 설명은 적지만 대신 복잡한 5호 16국 시대를 알기 쉽게 한번에 정리해 줘서 이해하기 쉽다.

중간 중간 소개되는 한시도 참 좋다.

중국 문화의 강점이자 멋 중 하나가 한시인 듯 하다.

곡조를 붙여 부른다면 책에 나온 바대로 멋진 노래가 될 것 같다.

이민족 왕국이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한 점도 특이하다.

서역의 많은 석굴 사원들은 쉽게 뚫을 수 있는 자연환경도 있었지만 북방 유목민들의 신앙이 불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송나라 이후로 중국은 유교화 되고 중앙아시아는 이슬람화 되어 지금은 그저 옛 문화로만 남아 있지만 중국의 역사가 가진 다채로운 불교 문화 유산가 놀랍다.

맨 마지막의 명사산과 월아천은 역사적 의미가 적어서 그런지 다소 지루했다.

시간이 된다면 답사 여행에 꼭 참석해 보고 싶다.

역사와 문화가 주제가 되는 여행이라니, 얼마나 멋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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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열전 - 영웅부터 경계인까지 인물로 읽는 고려사
박종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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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려 인물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다.

저자가 전공자라 기대를 했는데 다소 맥빠지는 가벼운 구성이긴 하다.

다만 고려 역시 사대관계로 원나라를 섬겼고 그것은 당시 국제질서에 맞는 보편적인 유교이념이었다는 평가가 인상적이다.

고려의 사대외교를 비난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20세기적 관점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무신정권과 원 간섭기 때 득세한 환관 등 하층민 출신의 권력자들이 과연 역사에 신분철폐라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느냐는 생각해 볼 문제같다.

무신 정권기에 고려 사회가 역동적으로 변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인상깊은 구절>

144p

원나라가 고려를 지배한 시기에 고려 출신 환관들이 원나라에서 크게 득세한 까닭은 무엇일까? 고려의 주요 정책은 물론이고 국왕의 즉위와 폐위까지 원나라 황제와 황실의 제가를 받게 하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 방식이 환관 득세의 원인을 제공했다. 고려 국왕은 국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인 출신 환관을 통해 황제와 원나라 고위 관료에 접근했다. 원나라 황실에 요청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황실 사정을 잘 아는 고려 출신 환관을 통해 접근했다.

162p

<춘추좌전>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이소사대를 유교의 예의질서로 규정했다. 즉, 큰 나라와 작은 나라의 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해 이익을 주고받는 호혜적인 상호보완의 관계였다. 유교이념에 충실한 당시 지식인들은 사대관계에 대해 유교의 예의질서가 국가 간의 관계로 확대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대관계를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본 신채호의 생각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대두한 20세기 초의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김부식은 동아시아의 보편 이념인 유교이념으로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려 했다. ... 이과 같은 형제맹약은 보주를 고려의 영토로 확정하기 위해 고려가 취한 실리적인 사대외교이지 굴종적인 사대외교가 아니었다. 김부식은 형제맹약을 결정한 인종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금나라와의 사대를 직접 견문한 김부식의 시각은 오늘의 우리와 커다란 차이가 있다. 자주와 사대의 단순한 잣대로 평가하는 방식을 뛰어넘어 김부식과 <삼국사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70p

고려의 문화와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에 깔고 있는 문명의식은, 고려는 중국과 문화 수준이 대등한 나라라는 뜻의 소중화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참고로 소중화는 조선시대에 더 많이 사용된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명나라의 멸망과 청나라의 등장으로 조선 지식인들은 중화문명의 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조선이야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라며 소중화임을 자처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사용된 소중화 개념은 중국 한족을 중화문명의 중심으로,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화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즉, 천자국 중국의 문명을 동경하고 그것을 제후국 조선에 실현하려는 노력이 소중화 의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고려의 문화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는 뜻의 소중화 개념과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176p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창조적이고 자존감 넘치는 자의식에서 비롯된 점도 없지 않았지만, 크게는 고려 중기 이후 문물과 예악이 풍성하고 뛰어난 인재가 배출된 전성기 고려의 시대적 산물이기도 했다. 고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의 원천인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갖춘 몽골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179p

13세기 전반 몽골 항쟁기를 거친 고려는 13세기 후반에 몽골의 제후국으로 전락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천하 중심'이라는 다원적 천하관과 '고려는 중국과 문명 수준이 대등하다'는 소중화 의식은 변절을 강요당한다. 이규보의 문명의식은 그 분기점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규보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다. 고려 중기 지식인의 문명의식 자체가 크게 변질될 수밖에 없었다.

194p

<제왕운기>는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출발점으로 보았고 중국과 구별되는 우리 역사의 독자성을 강조했는데, 연구자들은 그동안 이 점에만 주목했다. 한편,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원나라와의 우호관계가 시작된 원종과 충렬왕의 역사를 강조했다. 특히 충렬왕 대에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고려가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이승휴가 원나라의 고려 지배를 현실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적대적인 서술을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단군조선을 강조한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일까? 이승휴가 다원적인 역사인식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군조선과 원나라를 함께 강조한 그의 역사서술은 결코 모순적이지 않다.

 이승휴의 다원적인 역사인식은 여러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이지만, 두차례 원나라 사행이 그의 세계관과 역사인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분명하다. <제왕운기> 속에는 단군을 강조하는 자주의 측면과 원나라를 상국으로 인식하는 일종의 사대적 측면의 역사서술과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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