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 최신개정
김태만 외 지음 / 다락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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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일본의 이해>가 백과사전식 나열이라 지루했던 반면, 이 책은 중국 문화의 여러 측면들을 비교적 흥미롭고 깊이있게 잘 풀어쓴다.

여러 전공자들이 함께 쓴 책이라 그런지 분야별로 잘 요약이 되어 있고 특히 현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 측면이 도움이 됐다.

중국의 명승지 소개하는 대목이 흥미로웠다.

가본 곳이라고는 북경 밖에 없지만 만리장성이나 만력제의 정릉 관람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중국 관광지에 대한 이미지가 좋게 남았다.

한반도의 44배 크기라고 하니, 과연 다양한 자연환경의 명승지가 존재하고, 5천년 역사가 어우러져 인문기행지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하다.



<인상깊은 구절>

47p

국민당은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었음에도 항일전쟁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방대한 국토와 인구를 기반으로 장기전을 펼칠 경우 일본에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종전 후 공산당 섬멸을 위해 국민당군의 전력 보전에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1p

문화대혁명이라 불리게 된 연유가 바로 이러한 문화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도시 청년들을 홍위병으로 조직하는 대중 동원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의 폭발을 촉진했다. 홍위병은 당정기관과 공장을 습격하고 열차에서 무기를 약탈하여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이는 민간에 뿌리박힌 마오쩌둥 개인숭배 사상과 사인방 세력과 결탁한 군부 린뱌오의 암묵적 지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텐안먼 광장에 몰려든 수많은 홍위병의 연호 속에서 마오쩌둥은 다시 베이징에 입성할 수 있었다.

98p

안사의 난 이후에도 140년간 당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전란의 피해가 화북에 집중된 반면 강남 지역의 피해는 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절도사 휘하의 사병화된 군사 집단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져 이를 막기 위해 당제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게 되었다. 

 절도사의 횡포와 더불어 조정에서는 환관의 전횡이 날로 극심하였다. 환관이 추밀사에 임명되면서 국가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지방군을 감시하는 감군도 맡게 되었다. 그들은 안사의 난 이후 금병 통수권도 장악하여 그 세력이 더욱 막강해졌다. 마침내 더 이상 환관의 전횡을 참지 못한 조정에서는 환관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또 다시 절도사의 도움을 얻어야 했다. 당 말기에 시행했던 소금 전매는 농민의 난을 자초하여 '황소의 난'을 야기시켰다. 그 이후 환관과 관료의 대립이 더욱 극심해지자 재상 최윤은 절도사 주전충으로 하여금 환관세력을 제압하게 하였으나, 907년 주전충은 당의 마지막 황제인 애제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여 후량을 세웠다.

121p

중국의 전통 수학은 실용에 중점을 두어 발전하였기에, 추상적인 이론 체계를 구축하는 것에 있어서는 많이 부족하였다. 다시 말해 천문학적 예측이나 상업 등의 실제 적용에 힘쓴 것이다.

138p

한대 이후 중국의 사상은 당대에 불교사상이 성행한 것을 제외하면, 청대까지 유가사상의 재해석이라는 사상의 흐름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139p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한 증거로서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욕망 때문에 사회혼란이 끊이지 않는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을 하늘의 일부로 여긴 맹자와는 달리 순자는 하늘을 '자연적인 하늘'로 파악하여 그것에는 아무런 도덕적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인의 예로써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로 잡고 사회기강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유가사상의 큰 변화를 보여주었고, 이렇나 사상은 법가사상에도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141p

위진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세력이 출현하게 되는데, 호족의 등장으로 황제지배 체제가 약화되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짐이 따라 생사의 초월적 세계나 사후세계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던 유가사상은 쇠퇴하고, 인간의 고뇌와 갈등을 해소해 준 노장사상과 불교가 발전하게 되었다.

147p

한대에는 학자가 곧 관리가 되었고, 관리가 관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에서 다시 학자로서 학문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 속에는 '교육의 목적'이 관리가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유교 이념에 따른 교육은, 소인을 군자로 교육하는 것이고 군자가 되면 관료로서 입신양명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과거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당시 관학교육은 관료가 되는 과거 시험의 교육이 되었기에, 순수학문이나 진리탐구의 교육은 아니었던 것이다.

148p

송대의 학교 교육 역시 문신관료제의 발달로 인해 과거 시험의 합격에 중점을 두었기에, 일반교육이나 학문연구로서의 진리탐구는 어려웠다

 고대 관학교육은 조정에서 직접 관할하여 '사서'와 '오경'을 위주로 한 유가경전을 가르쳤고, 이를 통해 통치에 적합한 인재를 배양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유가사상을 기반으로 한 통치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발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가 학문연구를 할 만한 여건이 보편화되지 못한 이유로는, 종이가 발명하기 전이었으므로 책의 보급이 어려웠고, 또한 문자가 통일되지 않아 지역마다 차이가 있어서 지식 획득이 쉽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따라서 사학교육의 보급은 스승이 말하면 제자는 질문하는 형식이었는데, 바로 <논어>가 그 대표적인 강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학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도 스승의 절대적 권위가 확립될 수밖에 없었고, 스승의 학설을 무조건 순종하는 학풍이 지배했다. 이러한 사학의 영향은 중국에서 객관적인 학풍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76p

루쉰은 아큐를 통해 중국인이 수천 년 동안 살아오면서 버리지 못한 비열한 근성인 '정신승리법'을 들추어냈다. 아큐는 영원히 패배자의 지위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신뢰감도 주지 못하며 자기변명이나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살아간다. 

206p

송 왕조의 후예였던 그가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에서 관리로 등용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인품을 중시하는 서법의 특성상 예전부터 조맹부의 글씨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313p

오늘날 중국에서 기공이 성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요인 중 첫째는 의료의 혜택이 미비한 상황에서 전통적인 건강 요법은 자신의 건강을 지키는 첩경이 된다는 점이다. 중국 사회의 획일적인 체제에서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지향하기에 적합한 사상적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기공 수련은 자신의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적 위안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전히 활성화되어 있다.

322p

사회주의 국가에 속하는 중국은 대중의 건전한 오락을 유도하기 위해 비용이 많이 들지 않으며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와 놀이를 국가적 차원에서 적극 권장하였다. 중국에서 태극권이나 사교춤, 탁구와 배드민턴 같은 활동이 활성화되었던 것도 그러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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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왕의 초상화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10
조선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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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초상화에 대해 사회적 의미와 그려지는 과정, 방식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도판이 선명해 어진을 감상하기 좋았으나 6.25 당시 화재로 남아있는 유물이 몇 점 되지 않아 아쉽다.

꼭 6.25 때만이 아니라 수많은 어진들이 그려졌으나 여러 차례의 화재로 끊임없이 소실되고 다시 그려지는 과정이 되풀이 됐음을 알게 됐다.

목조 건물이다 보니 화재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어진 자체를 왕과 동일시 하여 마치 임금을 보듯 초상에 사배를 했다는 점이 독특하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 망한 이후에도 감히 사진 촬영을 못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이 추모와 기념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조선은 어진을 위패처럼 제사의 의미로 숭앙했고, 실제 모습을 그리긴 했으나 사후 그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우 도식적이라 서양의 초상화처럼 예술적인 느낌이 없고 하나의 기념 사진 같다.

미술사적 의미 보다는 역사적 의미가 부각되는 것 같다.

어진의 제작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으나 다소 지루했다.



<인상깊은 구절>

7p

신선원전에 모셔졌던 어진들은 전혀 촬영되어 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우리 민족의 어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사고에 기인하였다. 다시 말해 어진이란 단순히 왕을 그린 '그림'이 아니라, '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궁궐의 행사 장면을 그려 낸 기록화 어디에도 왕의 모습은 형상화되어 있지 않다. 왕 그 자체로 인식되었던 초상화에 있어서랴. 일제강점시대에도 함부로 사진기를 들이밀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외방에 있던 준원전이나 경기전 어진들은 촬영되어 있지만, 가장 본거지였던 이왕직 산하의 창덕궁 선원전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78p

고려시대 사원에서의 왕 및 왕비의 진영 봉안은 사적으로 명복을 빌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으나 조선왕조의 진전제도는 초상 봉안 처소로서의 보존 및 제사, 이를테면 기념적 성격이 보다 짙은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선조의 내세에서의 명복을 천도하고자 하는데 그 주된 의도가 있었으며, 후자는 어진 봉안 처소로서의 기념적 성격 내지는 제사를 통한 결속이라는 현실적 의도가 주목적이었다고 판단된다. 

81p

미천한 신분인 화원들은 비록 그림 재주는 훌륭했지만 임금 앞이라 너무 긴장하고 용안을 우러러보기 미안하여 자주 실수를 했다. 그러자 대신들은 사대부 화가인 조영석이 임금을 자주 뵈었으니 그에게 초본을 내게 하여 이를 화원들이 참고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논의를 했다. 그러나 조영석은 펄펄 뛰면서 '화기는 천기'이므로 자신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다 결국 의금부에 잡혀가기도 했다. 이런 일화는 당시 사대부 사회 일각에서 그림 재주에 대해 얼마나 경직된 사고가 팽배해 있었던가를 말해 준다.

115p

그 당시 조석진은 상중이었지만 그의 화법이 가장 정묘하다고 판단되어 결국 기용하였다. 숙종 때 김진규의 경우, 친부모의 상에는 차출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를 보인다. 이것은 조선조 말기 유교의 전통적 관념이 해이해진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대부 신분인 김진규와 화원 신분인 조석진의 차이를 말해 주기도 한다. 참고로 채용신의 경우, 1901년 9월 부친인 채권영의 상을 당했을 때 그는 바깥 활동을 일체 거부했는데 여기에는 그가 철두철미한 유교적 기상을 지닌 화가라는 개인적 성향에 더해 50세까지만 해도 직업화가가 아닌 무관으로서 정산군수까지 지낸 이력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석진과는 달랐던 그의 신분이 행동방식에 영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141p

숙종의 이런 처사는 겸양과 검소를 중시하던 조선조 선비들의 눈에는 지나친 처사로서, 상소가 잇달았다. 그중 사간 윤성교의 상소를 보면 비난의 요지는, 아직 건강한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에 모시고, 장녕전이라는 전호까지 내린 것은 지나친 일이라는 것과, 강화도로 봉안함에 있어 승정원이나 의정부도 모르게 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숙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 장녕전을 지어 자신의 어진을 봉안한 것은 전대 임금들이 줄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데 그친 것과 비교할 때 참으로 과감한 처사였다. 하지만 장녕전이라는 새로 건립된 외방 진전에 숙종어진이 봉안되면서, 그 후 영조 역시 '계술'이라는 명분하에 만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함으로써 결국 외방에도 현왕의 존재감이 확대되어 가는 효과가 이어졌다.

148p

이제까지 세초해 오던 초본을 굳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하는 문제와 또 어진을 백관이 봉심할 때 절을 하도록 한 조처를 둘러싹도 사간원과 사헌부는 상소를 올렸으며, 특히 어유구는 숙종의 이런 처사를 빗대어 "스스로 명예를 좋아함이 지나치면 나중에는 무궁한 우려가 된다"라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의 말에 빗대어 후대에 미칠 폐단을 심히 경계하였다. 하지만 숙종은 자신의 고집을 철회하지 않고 그대로 밀고 나갔다.

153p

임금 역시 그 초상화도 이미 보였으며, 또 그 형(조영복)의 초상도 보았는데, 아주 흡사했다고 하면서, 조영석에게 직접 붓을 잡으려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조영석은 이미 붓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성교를 듣고 열심히 감동 일을 하고 있다고 아뢰며, "대저 기예를 가지고 위를 섬기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 사류의 반열에 끼지 못 한다"라는 <예기> 왕제에서의 구절을 빌려, 국가에서 신하를 부리는 데는 각기 방도가 있으니 도화서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 이것은 사대부가 그림 재주로 임금에게 봉공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조영석의 논지와 상통하는 것으로서, 당시 사대부들의 그림에 대한 의식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63p

정조가 표면적으로는 31세 영조어진 모사가 31세 정조어진 도사의 근거라고 했지만, 사실은 정조어진 도사가 먼저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 또 정조가 80세 영조어진에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실제로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의 중심은 자신의 어진 도사였음을 말해 준다고 풀이했다. 이런 면은 특히 정조가 영조의 어진 이모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어진 도사에서는 대신들과 직접 봉심을 거듭하고 7번이나 고쳐 그리게 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점은 숙종과 영조의 선왕 어진 모사에 임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인 것이었으니, 즉 숙종이나 영조 연간에는 선왕의 어진 모사를 주로 먼저 진행하고, 자신의 어진 도사는 후에 진행했으며, 선왕의 어진 모사는 도감을 설치하여 장대하게 치르는 한편, 현왕의 어진 도사를 국왕권이 안정되었던 정권 말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공식적으로 진행하였다는 점 또한 지적하였다.

 결국 이런 면은 정조의 자기중심적 성향도 한 원인이었지만, 이제 숙종과 영조를 거치면서 어진 도사가 이미 공식적인 국가 행사로 정립되었고, 정국도 좀 더 안정된 국권을 보여 주게 되었으며, 현왕의 존재감 역시 점점 더 굳혀져 가고 있었다고 해석된다.

190p

의정부의정 이근명은 이 행렬을 이끌고 11월 추운 겨울에 평양에 가서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 행렬을 보호하고 호위한다는 명분하에 일어난 폭행 사건, 물가상승과 잡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더 커졌다. 즉 러일전쟁이 진행되고 있고 가운데, 물가가 오르고 수많은 세금 문제가 민생고를 가중시키는 상황에서 내탕금까지 쏟아부어 아직 황실이 건재함을 보여 주려 했으나 결코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백성들로부터 충성심을 끌어내지도 못했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고종의 황제권 타령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195p

일본인 관료들은 조선왕실을 위하는 제스처로서 지속적으로 어진 화가를 추천하거나 제작에 관여하고자 하였다. 이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고종은 1912년 서회미술회에 갓 입학한 김은호가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재능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반신 사진 한 장을 김은호에게 주어 어진 초본을 그려 오게 하고, 그 결과에 상당히 만족했던 고종은 당시 이왕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있던 순종어진을 도사할 것을 명하였다.

235p

원칙적으로 어진이란 단순히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전통적인 사고하에 구본과 함께 세초하였다. 그러나 고종 연간부터는 어진에 대한 이런 관념은 상당히 희석되었으며, 고종의 경우 자신의 어진을 비공식적으로 그려 낸 화가 채용신에게 초본을 궁궐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허락한 바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는 아마도 어진에 대한 엄중한 고정 관념은 더욱 취약해졌을 것이라고 보며, 당시 일본 유학을 다녀와 최고의 화가로 자타가 공인했던 김은호의 경우, '작가'로서의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을 터이니, 자신이 그린 초본을 소지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245p

모두 공신호는 삭훈되었지만,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에 의해 조상의 초상화는 보존되어 왔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초상화를 단지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조상 그 자체로 여겼던 우리 선조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333p

중국 황제상 중 무엇보다도 조선이나 일본과 너무나 다른 것은 분장 초상화일 것이다. <윤진행락도> 화첩에서 드러나듯 이 황제 초상은 당시 중국이 처해 있던 다종족과 다문화 현상을 반영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있던 한족에 대항하는 통치자로서의 모습, 자신의 혈통인 만주족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활쏘기와 말타기 명수로서의 모습, 우위에 선 자로서 포섭 대상이었던 인도, 무굴, 티베트, 터키인으로 분장한 모습, 심지어는 서양인으로 분장한 모습 등 청나라 황제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소화해 가면서 화면에 등장했다. 이런 분장 초상화는 하나같이 우의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상당히 정치적 선전성이 강한 작품들이다. 

 일본 천황상 역시 생전에 연고가 있던 사찰 내 영당이나 신궁에 봉안되었지만, 조선이나 명, 청대와는 달리 메이지 천황 전까지는 국가적 관리나 황실 전체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보다는 추모나 기념적 의도가 강했다. 따라서 화폭도 그다지 크지 않으며, 위풍당당한 군주의 모습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조선시대 어진 그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 '터럭 한 올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였다. 이 말은 중국 송대의 정이가 주창했는데, 원뜻은 제사를 지낼 때 초상화는 똑같이 그리기 어려우니 신주로 대체하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일반인들이 조상의 초상화를 모시기 위해서는 비용이 많이 들며, 또한 초상화는 조상과의 닮음 여부로 시비도 많았으므로, "조금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초상화를 제작하지 말고 나무로 만든 위패를 모시기를 권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러나 원래의 이러한 제의적 명제는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결국 조형적 명제로 바뀌어 버렸다. 우리 화가들은 실제로 초상화를 그려 낼 때 털끝 하나라도 다르지 않게 대상 인물을 화면에 충실히 재현하고자 진력해 왔다. 보는 이들 역시 초상화에 대한 감식안은 참으로 엄격하였다. 당대 최고의 화가가 동원되고 그야말로 거국적 사업이었던 어진 제작에서조차 '칠분모(7할의 완성도)'면 가장 잘된 작품이라고 보았다. 이런 엄격한 잣대로 인해 초상화의 예술적 성취도는 더욱더 고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338p

일본의 경우, 천황상 제작에 동원된 화가들 모두가 중국이나 한국처럼 초상화 전문 화가들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에도 시대 이후에는 직업화가가 아닌 황자나 황녀들마저도 천황상 제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이들 아마추어 화가가 그린 작품들 대부분이 공식적으로 궁내청이나 근세 천황상 봉안처인 센뉴지에 당당히 봉안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은 취신(取神)에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완성도 면에서는 아무래도 상당히 부족해 보인다. 이것은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의례용 군주상이라 하더라도 국가적 차원의 행사보다는 사적 추모에 비중을 두었던 일본 특유의 사고에 기안한다고 생각된다.

340p

조선시대의 어진을 성격 짓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어진을 하나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왕 그 자체'로 보았던 선조들의 인식이다. 어진 제작은 열과 성을 다한 국가적 행사였다. 매 단계마다 길일과 길시를 택하여 왕 이하 대신들이 봉심하였고, 진전에 봉안하기 위한 어진의 행차는 거의 실제 임금을 모시는 수준이었다. 어진 제작 때 초본이 너무 핍진하면 차마 세초하지 못하고 궤에 넣어 봉안하였으며, 또한 초본을 견본에 옮겨 그리는 상초 작업이 끝나 왕의 모습과 자못 닮게 되면 하루 일이  끝나고 물러날 때 어진 제작 관련자들은 모두 이 상초본에 대해 사배례를 올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젠 더 이상 '그림'이 아니라 '임금님'이었기 때문이다.

 '어진은 곧 왕 그 자체'라는 인식은 '어진은 바로 그 왕조의 상징'이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이런 인식 아래 조선시대에는 전 왕조인 고려시대의 어진들의 보존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려 군주 초상이 발견되면 모두 세초하거나 묻어 버리도록 명했다. 조선시대 임금 중 가장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는 세종이야말로 바로 전 왕조에 대한 이런 조처를 가장 가차없이 밀어붙인 왕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류>

100p

선조의 증손인 낭원군 간은 ~

-> 낭원군은 선조의 아들인 인흥군의 차남이므로 증손이 아니라 손자이다.

238p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고, 둘째 능양군은 훗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이며

->능양군 즉 인조는 1595년생으로 정원군의 장남이고, 서자인 능풍군은 1596년생으로 둘째이다.

255p

숙종의 비는 김민기의 딸 인원왕후(1687-1757)이다.

->인원왕후는 김민기가 아니라 김주신의 딸이다.

271p

순조는 풍원부원군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

->조만영은 풍원부원군이 아니라 풍은부원군이다. 류성룡이 풍원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278p

익종은 1819년 영돈녕부사 조인영의 딸과 가례를 올려

->조인영이 아니라 조만영의 딸과 혼인했다. 조인영은 조만영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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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충청도 선비의 생활기록 - 조극선의 인재일록과 야곡일록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7
성봉현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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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황윤석의 유고인 <이재난고> 해설본을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이 책은 그보다 한 세기 앞선 17세기의 일기이다.

무려 27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성실하게 일기를 쓴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치열한 학자적 자세가 놀랍다.

지방 관리를 지낸 사대부의 일기를 통해 17세기 양반가의 생활상을 구현해 낸다.

개인의 소회보다는 하루 일과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일록이라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17세기 조선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현물 경제, 혹은 선물 경제 같다.

화폐가 유통된 것은 그보다 후세대이고 조선 중기만 해도 쌀, 포, 종이 등이 화폐 대용으로 쓰였고 당연히 장시도 활발하지 않아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선물 형태로 주고받았다.

선물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볼 수 있다.

요즘은 돈으로 부조를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는시장에서 물건을 살 수 없고 자급자족 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직접 현물로 부조를 한다.

예단도 그런 과거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책의 주인공인 조극선은 개국공신인인 조온의 후예이고 지방 수령을 지냈으며 기호학파의 일원으로 지방 사족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로부터 선물을 받아 가계를 경영했다.

선물은 단순히 청탁의 의미인 뇌물이라기 보다는 상호부조 성격이 강했다.

사대부였기 때문에 특히 종이가 중요했는데 여자들이 집에서 베를 만들어 교환 수단으로 쓰듯, 조극선도 직접 닥나무를 벌초하여 나무를 쪄서 인근 가야사로 운반해 종이를 가공하는 과정에 참여했다.

이런 예를 보면 확실히 조선은 자급자족 시대였던 듯 하다.

조극선은 여러 차례 사마시와 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시 급제는 실패하고 만다.

그럼에도 공신의 후손이자 학행으로 추천되어 중앙 정계의 하위직 관리를 지냈고 지방 수령도 역임했다.

문과 급제가 이토록 어려웠던 것을 보면, 역사책에 이름이 등장하는 고위 관료들은 최상위 엘리트들이었던 듯하다.

17세기 사대부가의 일상을 일기라는 원사료를 통해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측면으로 재구성하여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자칫 지루하고 어려울 수 있는데도 짜임새 있게 교양서 수준으로 잘 쓰여진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68p

사림은 의리를 중시하는 인간집단으로 개념화되는 과정에서 그들의 언행과 사유 또한 의리의 틀에서 집단적으로 미화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고, 그런 흔적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문집' 또는 '유고'라 불리는 문헌이다. 문집은 편집된 기록, 특히 사회적 합의를 거친 공간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혐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비해 조극선의 일기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못 실상에 가까운 심리와 언행을 담아내고 있다. 일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스승은 모두 네 사람이지만 그는 '三師'라 하여 세 사람만 인정하고 있다. 한 사람은 감추고 있는 것이다. 감춤과 드러냄의 실리는 '義' 보다는 '利'의 작동임에 분명하다. 의리의 시대에도 이해관계는 향존했고, 조극선의 일기는 그것의 실체를 보여준다. 

83p

김장생에 대해 존모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조극선의 태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김장생이 학덕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초반 기호학파의 영수라는 현실적 위망과 결코 무관치 않다. 그(김장생)와의 가까움은 그 시대 사람들이 외면하기 어려운 '利'였기 때문이다.

124p

조선은 신분사회인 동시에 경쟁사회였다. 과거는 경쟁 및 능력사회로의 이행을 단적으로 보여준 제도였고, 상속의 한 형태인 '별급' 또한 경쟁과 능력을 부추긴 사회문화적 관행이었다. 학문의 영역도 이와 별개일 수는 없었다. 뛰어난 석학에게 줄지어 입문하여 사제관계를 맺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었다. 그 이로움은 '지식과 학문'의 영역을 넘어서는 산법의 결과일 공산이 컸다. 아무리 의리를 강조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利'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이를 추구하는 자를 '모리배'로 지목하여 그 명예를 훼손시켜도 '利'가 종식될 수는 없다. 

 도학과 의리로 포장된 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너무 미화된 측면이 있다.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과거를 통한 영달을 포기했다는 기사는 개인 전기류의 공통 테마를 이루었고, 가난, 검소, 청백은 지선의 정신사적 가치로 고착화되었다. 모든 선비가 학문에 종사하고, 모든 사람이 가난해야만 비로소 조선은 문명국가가 되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156p

그가 이렇듯 문과 합격을 위해 노력한 것은 무엇보다도 부친 조경진의 뜻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양반의 지위를 지키고 문과 출신이어야만 청요직에 나갈 수 있는 조선 사회 분위기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를 포기할 수 없었던 집안과 주변의 암묵적인 요구나 사회 분위기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167p

조극선은 지방 유생으로서 경제적으로 경학과 제술에만 전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3명이나 있었으나, 규칙적인 학업이 불가능하였다. 또 박지계와 조익을 만나기 전에는 6년 넘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과거에 합격할 때까지 경서 공부와 제술을 끊임없이 익혔지만 결국 과업을 성공적으로 매듭짓지 못하였다.

195p

사진향은 왕실의 가족을 근간으로 한 친인척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 간의 친밀함은 왕실을 지탱하는 가장 큰 연대감이었으며, 국장에서 그들의 연대감은 사진향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204p

조극선은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과거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과거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그의 관직생활은 충신의 후예라는 사회적 조건에 부분적으로 의존하였다. 물론 처음으로 입사한 동몽교관의 자리는 그의 학자적 모습을 잘 보여주며, 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충신 자손이 많은 세자익위사에 나아간 것이나 인목왕후 국장 중 충훈부 진향에 참여한 것은 충신의 후예로서 자의식을 잘 보여주었다.

293p

16세기의 선물경제는 양반관료와 사족의 이중적 지배구조 속에서 형성, 유지된 경체체제로, 정확한 가치 환산보다 선물 제공에 따른 보상을 중요시하는 교환체계로 이해된다. 그리고 선물은 개인의 관직, 그리고 그가 지녔던 친족망과 교유관계를 바탕으로 한 '양반 상호공조의 관행'으로서 녹봉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던 시기에 양반사회를 존속시키는 새로운 방책이었고, 양반관료들이 자신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16세기 조선사회의 선물경제는 세계사적으로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였으며, 그 주체가 구매력이 높은 양반관료였다는 점에서 장시 활용을 제한하여 시장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16세기의 주요한 재화 획득 수단이었던 선물교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상품교환의 비중이 증가하여, 19세기가 되면 선물교환은 의례적인 영역으로 축소되고 있음을 제시한 것도 역시 일기를 통한 연구였다.

294p

선물경제의 이해는 개인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호혜성의 원리, 국가 및 관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재분배의 원리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호혜성의 규범에 대한 강조는 도덕경제의 사회로까지 나아간다. 결국 선물경제는 도덕경제의 한 형태로서, 전근대 한국 사회는 '호혜-재분재의 통합구조'에 기초한 도덕경제가 가장 잘 실현되던 사회 가운데 하나라고 간주하기도 한다.

 '선물경제'에서 바라보는 선물은 시장을 대체하는 것으로, 교환이나 거래가 아닌 정치적 혹은 정서적 호혜를 바탕으로 한 경제활동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선물의 이해는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주기와 받기 그리고 답례라는 삼중의 의무를 수행하는 행위로서 선물을 파악함으로써 물건 그 자체뿐 아니라 당사자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301p

<인재일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재화의 교환은 대부분 선물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매매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다. 또한 화폐도 널리 쓰이지 않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시장이 충분하게 발달하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수도 있다.

303p

가계부가 아닌 일기라는 자료적 성격으로 인해 매매행위가 의도적으로 배제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조극선이라는 인물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로 인하여 매매활동 자체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즉 조극선을 포함하는 사족층의 남성들이 시장과 매매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노비와 전답과 같은 주요 거래에 있어서도 노비의 이름으로 매매문서를 작성할 정도로 매매활동 참여를 기피하였다. 더불어 가정을 운영하기 위한 재화의 구입은 대체로 여성의 몫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305p

포틀래치로 대표되는 호혜에 있어 '주어야 하는 의무'와 '받아야 하는 의무', '답례의 의무'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다만 가족과 같이 매우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순수한 선물'의 경우는 일반적 호혜성의 영역으로 직접적인 물질적 보답의 기대는 적절하지 않고 기껏해야 암묵적인 기대만이 가능하다.

326p

인근의 지방관으로 부임해 있을 때 조극선가에 대한 선물의 집중적으로 제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덕산현과 같은 농촌사회에서 권력에 근거한 호혜로서의 선물이라 할 수 있고, 관직에 올라 권력과 부를 소유한 사람에게 요구되는 '친족의 의무'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역시 일반적 호혜성의 범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족 내 및 가족 간의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이루는 호혜성의 규범과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로 작용하는 생계에 대한 권리라는 두 가지 도덕적 원리가 친족집단 내에서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으로, '도덕경제' 사회로서의 조선사회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331p

덕산현과 같은 향촌사회에서 국가권력의 대행자인 지방관에 대한 개인의 위치는 절대적인 약자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나름 지역 내에서 유력 사족의 한 구성원인 정자익이 군정 차출과 관련하여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히는 상황이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일방적인 관과의 관계를 볼 때, 충청도 병사 현즙과 가까운 일가인 조극선가에게 제공하는 선물은 단순한 관계의 유지 이상의 분명한 목적성과 대가성을 내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36p

선물의 종류와 양에 있어서도 대단치 않았다. 이것은 당시 사제관계가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도학과 의리를 함께 하는 학문공동체의 근간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호혜성을 수반하지 않는 상품과 달리 선물은 물건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물건을 교환하는 당사자 간에 긴밀한 상호관계가 형성되고 있다는 인식까지도 함께 교환하는 효과를 발휘함으로써 사회적 결속력을 강화하는 핵심 요인이 된다.

341p

박주인가의 선물은 이와 같이 목적성이 분명하였지만, 선물에 대한 대가는 직접적이지 않았고 부채의 계산도 노골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절대적인 권력자인 관으로부터 위험에 대비하고, 나아가 그 권력을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는 드물고도 중요한 기회 앞에서 선물은 보다 적극적이고 관대하게 일반적 호혜성의 모습으로 제공되어야 했다.

350p

실제로 승려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조극선가에 예속되어 선물과 사역을 제공하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승려들이 노비들에 비해서도 훨씬 많은 역과 물종을 극선가에 바치고 있는 것으로, 이는 한편으로 극선가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에 기대어 다른 곳으로부터 추가적인 침해를 막고자 하는 의도일 수도 있다.

 1620년 전반 무렵에 가야사가 궁가의 원당이 되자, 가야사 승려들의 조극선가에 대한 태도는 돌변하였다. 더 이상 상전가에 공손하지도 않았고, 극선가의 종이 제작 요구를 무시하기까지 하였다. 

 승려들이 극선가에 제공한 선물과 사역은 한편으로는 예속에서 말미암은 의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선가의 관대함과 보호에 대한 기대로 제공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속관계가 소멸하고, 관대함과 보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더 이상 선물과 노역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360p

16세기 조선을 선물경제로 설명하는 "선물수수는 대단위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선물을 주고받는 당사자도 도덕적으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필요로 하는 물자를 요구하였으며, 상대가 호의적이었을 경우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라는 말은 마르셀 모스나 칼 폴라니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음직한 인류학적 언설로, 자본주의 이전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근대 사회를 호혜에 기초한 보편적인 경제체제로 설명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조선은 상당히 고도화된 법과 관료체계를 갖춘 중앙집권적 사회였다.

 조선시대에 존재한 공, 사의 불분명은 공, 사 개념의 미발달이란 측면도 있겠지만, 제도적 한계 및 행정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법적 투명성을 집행하기 어려운 현실적이고 시대적인 한계도 분명히 내재하였다. 중앙정부의 공식적인 입장과 처벌은 물론 조극선의 부끄러움에 대한 인식을 볼 때, 양반관료의 수증과 위헙청탁은 합리적인 경제행위라기보다 익숙해진 '일상 속의 불법'으로 보는 것이 정확한 시각이다.

366p

호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물질 이득의 대가가 아닌 사회적 신용을 획득하려는 행위로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미덕을 과시적으로 행하게 되면, 그것이 상호성의 원리에 따라 결국 자신의 가족에게 혜택이 돌아오게 된다고 본다. 이 같은 상호 간에 선물을 나누는 형식으로 존개되며, 시간적으로 동시적이 아니라 모두 단절되어 실행된다.

 재분배의 원리는 집단의 농작물 중 상당 부분이 추장에게 전달되고, 추장은 이를 비축했다가, 모든 공동체 활동에 중심을 이루는 공동체 전체의 행사와 그 속에서 관습에 따라 모두에게 보내는 선물에 의해 재분배가 이루어짐을 말하며, 여기에서 중심성의 패턴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나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관과 깊숙하게 연결된 사족들의 사적 행위 -그것이 칭념이건, 선물이건- 가운데 이와 같이 공동체를 전반적으로 아우르는 중심성의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특정한 대상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선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재분배 원리와는 상치되며, 국가적 단위에서 제도적으로 재분배해야 할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특정 소수에게 집행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재분배의 성격을 훼손하는 행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90p

오달제는 1633년 문과 초시에서 행전에 대한 대책을 제출하였다. 여기서 그는 당시 행전이 성공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행전의 목적이 국왕과 국가의 '이해'에서 출발하는 데 있다고 지적하면서 <맹자>의 구절을 인용해 '인의'에서 답을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인의'에 바탕을 둘 경우 전문의 유통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오달제를 비롯한 당시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오류>

190p

세 번째 언덕엔 인원왕후의 능인 유릉이 있었고,

-> 유릉은 인원왕후가 아니라 의인왕후의 능이다.

197p

의성왕대비(명종비 인순왕후), 명종대왕, 인순왕대비(인종의 계비, 1532-1575), 공의왕대비(인종비, 1514-1577), 의인왕후

->의성왕대비가 인순왕후로, 인종의 계비는 잘못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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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과 장부 - 경제 세계화 시대,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와 상업
리보중 지음, 이화승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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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언제 시작했을까?

더 정확히 세계화의 정의는 무엇일까?

저자는 상품의 교류가 전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는 시점을 세계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 책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초기 세계화에 대해 중국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440페이지로 두꺼운 편이지만 번역도 매끄럽고 편집도 보기 좋으며 무엇보다 경제적, 현실적 관점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저자의 집필 방향이 너무나 흥미롭다.

전에는 중국에서 번역된 책들이 서양책들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했었는데 양서들이 많이 번역이 안 되서 그랬나 보다.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고 자본주의는 최근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재화의 교환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태초부터 시장의 형태로 존재해 왔고 교통과 기술의 발달로 그 범위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됐을 뿐임을 알게 됐다.

제목이 "조총과 장부"여서 사내대장부라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회계장부를 뜻한다.

이슬람이 한 손에 코란, 한 손에 칼이라면 네덜란드 상인들은 한 손에 장부, 한 손에 총을 외쳤다고 한다.

뼛속까지 상업적인 민족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중국에 사대하는 조선의 모습에 분통이 터지곤 했는데, 특히 망해가는 명나라를 끝까지 섬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전통 세계의 중국이 얼마나 엄청난 국가였는지 실감했다.

당시 우리 조상들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는 강대국이자 문명국이었을테고 조공 시스템 안에서 평화를 유지하면서 국제 질서에 잘 적응했던 셈이다.

명나라가 한줌 밖에 안 되는 만주족에게 망하리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밖에 없다더니, 과연 일본의 국력은 과거부터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인구는 세계에서 세 번째에 달했고 은광이 전 세계의 1/3을 생산해 구매력이 높았으며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대의 수준이 높아졌으니 밖으로 뻗어나갈 만 했던 것이다.

명군이 한반도에 들어와 피해를 주긴 했으나, 만력제를 조선의 황제라고 비난했던 당시 명나라 신하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로 명나라로서는 원병 파견이 큰 부담이었다.

주제를 확실하게 드러내자면 제목을 "무기와 무역"으로 바꾸어도 될 것 같다.

전통 무기가 아닌 대포와 조총 같은 화기는 군사적 살상력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였고 이것을 전파시킨 것이 바로 상인들의 무역이다.  

상인은 이익 추구를 위해 국가를 초월해 거래하기 때문에 최신 무기들은 전 세계로 퍼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만 동아시아 무역 시스템에서 제외된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무역 시스템을 통해 국가의 부를 창출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데 중국의 조공 시스템에만 안주했던 조선의 안이함이 안타깝다.

너무 재밌게 읽은 책이고 경제적 세계화 관점에서 보는 역사가 궁금한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인상깊은 구절>

17p

스스로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성공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제갈량이 <출사표>에서 "성공과 실패, 유리함과 불리함에 관해서는 신의 지혜로도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다.

40p

중국이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황쥔제의 주장은 일리가 있지만, 이렇게 넓은 영도를 보유하고 지역 간 큰 차이를 보이는 중국이 그럼에도 내부 결속이 느슨한 나라는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 이전 수많은 제국이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었던 것과 달리 중국은 어느 정도 '지리적 특수성'이 있었다. 역사학자 존 맥닐은 "중국은 세계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고 내륙에 수로 시스템을 가동해서 공간을 연결시켰다. 기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운송비용 측면에서 세계의 어떤 육지 운송 네트워크도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중국은 수로 시스템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통일된 시장을 갖추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 세력, 사회를 창조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도 수로 시스템으로 연결되는 한 생산 방식, 토지 이용, 자원 개발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국가 형성과 발전 과정이 매우 특수했다. 秦 나라 이래 오랜 기간 통일된 중앙집권제 국가 체제를 유지하고 하나의 정치, 경제, 사회 제도를 실행함으로써 '국가'를 초월하는 정치, 사회,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 초기 경제 세계화 시대의 동아시아는 중국과 중국 이외의 지역 이렇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중국 중심론'에 따라 구분한 것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51p

중국 교과서엔 "자본주의의 여정에는 무기와 폭력, 피와 눈물로 가득 차 있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세계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무기와 폭력'이나 '피와 눈물'로 가득한 정복과 약탈이 근대 초기에 서유럽이 해외로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는 정복과 약탈로 가득차 있었다. 그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칭기즈칸과 그 자손들이 벌인 전쟁이다. 몽골인들은 이 정복 전쟁을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실체인 몽골 제곡을 건립했다. 정복과정에는 '무기와 폭력'이 동원되었고 피정복지역의 백성에게서 엄청난 '피와 눈물'을 자아냈다. 또한 중국과 유럽 여러 지역의 역사를 변화시킴으로써 어떤 의미로는 세계사의 '대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피정복지역의 사회,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는 바꾸지 못했고 위용을 자랑하던 몽골 제국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으며 몽골의 언어와 문화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전통적 관점으로는 이 책에서 말하는 '대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대변화'는 이전 시대와는 성격이나 영향력 면에서 완전히 다른 역사적 전환이다. 대변화는 바로 경제 세계화의 시작을 가리킨다.

169p

조선은 일본과 달리 서양의 화기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매우 인색했다. 서양인과의 접촉도 늦었고, 화기 기술에도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174p

동북아시와는 달리 동남아시아에서는 화기가 냉병기의 보완재로 사용되었다. 이는 선진 화기를 사용하는 서양인들이 아주 적은 병력으로 손쉽게 이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 통치를 할 수 있게 만든 요인이었다. 

199p

국가가 더 이상 군사 기술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초기 경제 세계화의 주역인 상인은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져와서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상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고객에게 이를 판매했다. 

220p

원의 통치자들은 유가의 학설을 이용해서 통치를 공고히 하려고 했지만 다른 왕조들처럼 유학을 존중하지는 않았고 바얀 등 권신을 특히 배척했다.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의 사회적 지위도 아주 낮아 정소남은 <심사>에서 '사회적 신분상 유사가 9등이고 그다음 거지가 맨 아래였다'라고 할 정도였다.

226p

당대의 경교처럼 원대의 기독교 선교활동 역시 조정의 지지 하에 진행되었고, 신도가 주로 외래 소수민족이어서 중국의 기층 사회에 뿌리내리지는 못했다. 조정의 지지가 점차 사라지자 교회도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되고, 교파 간의 싸움이 일어나 기독교 발전을 저해했다. 무엇보다도 이민족 통치 하에서 박해받던 한족이 여러 특권을 누리던 몽골인과 색목인, 그들이 숭상하는 외래 종교에 호감을 가질 리 없었다. 원나라가 망한 후 기독교 세력도 함께 사라졌다.

235p

동남아시아 많은 지역이 빠르게 이슬람화된 것은 현지 무슬림 통치자들이 당시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인 오스만 제국과 그 동맹자인 인도 무굴 제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에 귀의한 이후 이들로부터 군사 기술이나 군비 지원을 받았다. 이것이 이슬람 세력이 힌두교/불교 국가와의 투쟁에서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결국 승리로 이끈 배경이 되었다.

240p

알단칸이 장전불교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은 중국에 큰 의미가 있다. 판원란은 당대 토번이 서역을 점령한 것에 대해 "이 새로운 형세는 토번이 무력으로 선교를 하는 무슬림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한족 문화가 파괴되는 것을 막은 셈이다. 훗날 회홀이 서쪽으로 이주해서 천산남북 지역에 정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국 역사에 대한 커다란 공헌이다"라고 했다. 

241p

미얀마와 시암국 모두 인도차이나반도에 위치한 강국이었다. 이들이 불교를 신봉하면서 불교 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이로써 중국 남쪽에서 올라오는 이슬람의 세력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몽골, 신장 북부, 칭짱고원까지의 지역에서 불교는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서, 북, 남을 에워싸는 이른바 '불교장성'을 쌓은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 특히 중국에서 이 '불교장성'은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불교장성이 형성되면서 이슬람의 동쪽 진출을 막았고, 중국은 인도와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243p

"송,명 유학은 왕권 통치와 결합하거나 관리들의 치적을 기술하는 '관학으로서의 유학'에서 탈피하고, '교화를 우선'하는 세속적인 인문 전통을 실천함으로써 점차 '교화의 유학'의 역할로 변했다. 유학은 의장, 사창, 보갑, 서원, 향약 등의 각종 제도 및 사업을 통해 사회에 공헌했다. 송, 명 이후 세족 문벌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점차 평등하고 느슨해져 조직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유학에 따르면 사회의 모든 공공사업에는 반드시 '이끄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만약 사대부가 사회에 관심을 쏟지 않고 관리가 된 후 자신의 출세와 부귀만을 좇는다면 반드시 부패하고 만다. "사대부 집단이 위로는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아래로는 농촌 사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유학은 송대 이후 1000년 동안 중국 역사에서 안정적이고 지도적인 역량을 갖게 되었다."

254p

"첫 번째 파도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자신들의 종교를 포함해 서양 문명을 비교적 완전하게 수출한 것이다. 모든 문명에서 민족 종교는 핵심이다. 역량을 갖춘 비서유럽 민족들은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이런 시도에 저항했다. 두 번째 파도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도 지역에서 네덜란드인, 프랑스인, 영국인이 서양 문명을 전파한 것이다. 이들은 문명을 선별한 다음 수출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인과 관료는 선교사들의 활동에 전전긍긍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17세기 인류 세계에 침투한 서양 문명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종교가 아니라 기술이다. 그중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 기술이었다."

301p

"남양 군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독특하다. 이곳의 특징은 삼림과 바다가 공존한다는 것인데, 삼림 지대 때문에 육로로는 접근이 어려운 반면 해양은 사통팔달이어서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아라비아인, 서양인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이 개방된 공간은 외래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경쟁하는 장소가 되었다.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서 장벽 같은 방어 시설이 없었고, 유럽인들은 이곳을 그저 '촌락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고 여겼다." 앤서니 리드의 분석대로 남양 군도는 군사력이 약했기에 유럽의 강력한 전함을 당해내지 못했고, 아주 쉽게 서양의 식민 지배자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305p

중국은 영토, 인구, 경제력, 정치 제도 등 모든 면에서 특수하기 때문에 어떤 나라와도 비교가 불가능하다. 이 특수성을 기반으로 조공 시스템의 중심에 중국이 놓인 것이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했고 인접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여러 자원(제도, 과학 기술, 문화 등)을 받아들였지만, 반대로 중국이 이들에게서 얻은 것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은 오래전부터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전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국제관계 시스템은 중국의 외교 전통 위에 세워졌다. 

308p

명나라는 이에 따라 조공 시스템을 운영하고, 조공국 간의 다툼이 중국에 위협을 가하지만 않으면 무력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명대 후기의 문인 원굉도는 조선과 일본이 충돌했을 때 "이웃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데 나는 자식을 내보내 돕고 있으미 어찌 곤혹스럽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이는 이웃 나라의 분규에 대한 중국의 난처한 입장을 잘 표현한 말이다.

 조공 시스템은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면서 동아시아는 평화를 유지했다. 

 명대 후기, 동아시아에 새로운 강자들이 등장하면서 중국의 지위에 도전하고, 심지어 직접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전까지의 국제질서는 유명무실해졌고, 명 조정은 새로운 국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3p

히데요시의 야심은 미친 자의 망상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에서 인구가 세 번째로 많았고, 전쟁에 필요한 인원을 충분히 징집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무역에 필요한 경통 화폐인 백은을 대량 생산해서 전쟁에 필요한 군비와 물자를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다. 조총 제조와 사용 기술이 대단히 뛰어났고, 수차례 내전을 겪으면서 풍부한 실전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명나라의 영토와 인구가 일본보다 10배 이상이었으나 일본은 명나라를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25p

중국의 인접국은 경제적으로 그에 미치지 못해 중국인들은 그들을 가난한 나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접국을 정복한다고 해도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중국의 지리 환경도 대외 확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페르낭 브로델에 따르면 "국은 대외 개방을 하지 않고 자급자족에 의존하는 국가다. 그리고 출구라고는 사막과 해양 오직 두 곳 밖에 없다. 그나마 잠재적인 무역 파트너가 있을 때만 이 출구를 활용했다." 이 두 개의 출구는 정확히 말하면 '서역'과 '남해'로, 중국이 영토를 넓히려면 이 지역 먼저 정복해야 했다. 동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바다인 태평양이 있고, 서쪽에는 높고 넓은 고원인 칭짱고원이 있으며, 북쪽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동토 지대인 시베리아가 있고, 남쪽에는 열대 지대가 있어서 중국은 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없었다.

331p

동아시아의 중심인 중국은 영토를 확장할 생각이 없었고, 조공 시스템은 다른 나라들의 주권을 보장하면서 서로 이득을 얻는 일종의 호혜관계였다. 누군가 조공 규칙을 어긴다면 중국이 경고를 하기도 했으나 무력을 사용해 타국의 영토를 뺏지는 않았다. 중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서 전쟁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중국이 인접국과 전쟁을 벌일 때도 그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영토를 빼앗으려는 목적은 없었기에 국지전 수준에 그치거나 비교적 강도가 약해 근대 유럽의 상황과는 크게 달랐다. 페어뱅크는 "중국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은 여러 비폭력 방법을 포함한다. 전쟁의 목적은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물리적 전과보다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함이다"라고 했다.

364p

척계광의 훈련법이 확산되기 이전에는 군대가 개인의 무예를 중시해서 무기를 제멋대로 다루면 영웅처럼 대접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무술가, 염효(소금을 몰래 팔던 사람들), 승려, 소수 민족이 군대로 들어갔다. 이들이 잘 조직된 왜구에게 추풍낙엽처럼 무너지자 비로소 전투의 승패는 개인의 무예 실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416p

과거 몽골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송과 전투를 벌인 것과 달리 청이 이렇게 순조롭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청조 건립 초기, 프랑스 선교사 조아킴 부베는 이렇게 분석했다. "사실 타타르인(만주족)은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지만, 한인들은 서로를 죽였고 심지어 용감한 한인들은 오히려 만주족을 위해 자신들의 민족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가장 용감한 한인'은 누구였을까? 한학자 마크 엘빈은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한 것이 아니라 오삼계, 홍승주 등 한족의 반란 세력이 만주족을 대신했다"고 했다. 또한 "1640년대 만주족의 작전능력은 명나라 군대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기 때문에" 만약 한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만주족의 힘만으로는 중국을 정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분석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청군이 비교적 쉽게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오삼계, 홍승주 등의 한족의 반란 세력 때문이 아니라 청조에 항복해서 팔기에 편입된 명나라 군대인 한군 팔기, 특히 덩저우 대포 부대 때문이었다.

432p

경제 세계화의 초기에는 상업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었다. 국제 무역의 무대가 넓어졌지만 아직 규칙이 정해지지 않아서 상인들의 탐욕은 무법천지에서 노출되었으며 이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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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이해 글로벌지역학총서 (한국학술정보) 8
김상규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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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나 표지는 격조있고 괜찮은데, 내용이 너무 지루하다.

전반적인 일본 문화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백과사전 보는 기분이다.

특히 일본 역사서에 나오는 민담이나 문학 작품들을 설명하는 부분이 너무 난삽하고 지루하다.

다른 책에서는 접하기 힘든 흥미로운 민간 전승들이긴 하지만 한번에 와닿지 않아 아쉽다.

겐지모노가타리나 야스나리의 문학 작품들은 관심있게 읽었다.

또 일본의 전통 연극인 가부키, 노가쿠, 교겐, 조루리 등의 설명도 흥미롭다.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성이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노벨상 수상자들이 많은 것을 두고 노벨상과 인연이 많다는 식으로 가볍게 넘기는 대목은 좀 황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등 과학 분야에서 스무 명이 넘는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엄청난 국가의 저력 아닌가?


<인상깊은 구절>

254p

로드리고는 개종에 이르는 길을 똑같이 괴로워한 주의 존재를 아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설령 자신이 속한 교회는 배반하였을지라도 신을 배반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침묵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으며, 이제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주를 사랑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기교자란 교회에 있어서는 썩은 사과이고, 언급하고 싶지 않은 존재이지만, 그들이 기교하게 된 동기와 심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교회의 관심 밖에 있어서 연구 대상조차 안되었다. 이리하여 약자가 된 그들은 역사학자나 정치가들로부터도 침묵으로 묵살당했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그때까지 자신들의 이상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배반했을 때의 눈물과 회한은 누군가 닦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개종한 이후 굽은 손가락을 모아 말로서는 표현되지 않은 기도를 올렸다고 생각하면 나의 뺨에도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고 토로하고 있다.

(배교자들에 대한 마음씀이 인상깊다. 배교자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신과 동료들을 배신했다고만 비난받았지만, 지금까지 진리와 이상으로 믿었던 것들을 버릴 때의 그 연악한 마음을 누군가는 닦아 주어야 하고 그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인지도 모르겠다)

 엔도는 기독교가 가진 최대의 구제능력은 성서에 그려진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죄인으로 고문 끝에 더러워질대로 더러워진 자신을 결박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게다가 뭇사람들이 지독하게 욕설을 퍼붓는 모습은 역사상 가장 비참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인간이라고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더럽고 참담한 자신을 어디까지나 끝없이 곁에 있으면서 지켜주는 사람, 그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특징적인 기독교 해석은 높은 평가와 함께 이단으로 간주하는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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