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근대 서양화
선승혜 지음 / 국립중앙박물관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2008년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의 도록이다.

직접 가서 봤던 생각이 난다.

최근 일본에 가서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을 관람한 후 관심이 생겨 빌려 보게 됐다.

이왕가미술관에서 소장했던 일본 근대화들인 모양이다.

일본 역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후 모방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인상파 화풍들이 많았다.

일본 가서 서양화를 배운 우리 근대 회화들과도 비슷한 느낌이다.



<인상깊은 구절>

11p

근대 일본 서양화가들은 누드화를 통해 신체에 내재된 본질적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하는 유럽의 미적 가치관을 수용하였다. 그 결과 누드화는 직설적인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전통적인 춘화와는 달리, 감정이입을 제한하고 미적 거리를 유지하는 새로운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71p

이러한 산수화 전통에서 일본의 근대 서양화가들은 유럽 풍경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주의깊게 표현하지 않았던 하늘, 날씨, 빛이 풍경화의 주요한 요소라는 것은 매우 새로운 개념이었다. 빛의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유화 물감은 일본의 서양화가들이 전통 산수화에서 풍경화로 전환하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99p

일본 산수화의 전통에 날씨와 빛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었다. 이러한 산수화에서 풍경화로의 전환은 하늘이 天이나 神과 같은 신성한 존재이며, 날씨는 신성한 존재가 암시하는 의사라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하늘과 날씨는 무한히 변화하는 자연과학의 대상이라는 인식으로 전환되었음을 반영한다.

 문화는 열린 개념이며, 끊임없이 확장되는 영역이다. 하나의 문화권이 다른 문화권과 만나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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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한국인 - 푸른 눈의 영국 기자 마이클 브린이 바라본 한국의 모습
마이클 브린 지음, 장영재 옮김 / 실레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500페이지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라 며칠에 걸쳐 읽었다.

구한말부터 시작한 한국 현대사 분석이 흥미로우면서도 북핵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하고 있어 한반도 통일 운운하는 마지막 장은 매우 공허하게 들린다.

아마도 원고를 오래 전에 써 놔서 새로운 변화를 추가하기 어려웠던 게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한쪽 진영의 얘기를 참조해서 약간 기울어진 시각으로 한국 정치를 보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만은 국제적인 경험과 탁월한 외교 감각으로 보잘 것 없는 패를 가지고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이루어내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서 한국을 안정시켰지만 자신의 승리에만 집착한 나머지 민주주의적인 과정을 훼손시켰다고 평가한다.

대체적으로 지도자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됐던 시기에 민주공화국 제체를 지킨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으나 더 민주적이고 더 통합된 나라를 이끌지 못했음은 이승만의 개인적 한계라 아쉽다.

국민들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린 것은 박정희였고 분단 상황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역량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안타깝다.

저자는 한국의 엄청난 발전상에 놀라면서도 안보 문제가 발목을 잡아 권위주의를 청산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유교 문화라는 오랜 역사적 경험도 한몫 하겠지만 좀더 자유롭고 선진적인 나라를 만드는 것이 이제는 경제 발전보다 더 중요한 시기인 것 같다.

특히 저자는 민주주의의 완성에서 권위주의 타파와 함께, 표현의 자유를 중요시 했다.

과연 문재인과 현재의 여당이 역사적 과업을 이룩할 수 있을까?

가짜뉴스 단속한다면서 유튜브 등에 압력을 가하고 공수처 설치해서 고위 공직자 수사권을 가진 사람을 대통령이 임명하겠다는 현 정부는 자유를 확대시키고 있는가?

현재로서는 너무나 절망적인데, 그렇다면 야당은 가능할까?

국민정서라는 법 위의 군중심리를 제압하고 진정한 법치와 대의민주주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리더가 과연 나타날까?

지금으로서는 모두 요원한 문제 같다.

저자는 북핵 위협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가볍게 치부하는 느낌이지만, 성숙한 사회 변화는 차치하고라도, 당장 북한의 위협에서라도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인상깊은 구절>

5p

처음에는 북한 경제력이 더 강했고 사기와 자신감도 우위에 있었지만, 이제 북한은 통치자가 세계적 놀림감이 되는 고립되고 열등한 나라가 되었다.

 핵무기를 흔들고, 인종적 순수성을 내세우고, 외세로부터의 자립을 자화자찬하고, 국제 규범과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서, 동시에 항상 적들로부터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 북한이 저항적으로 보이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은 허풍쟁이들이다. 그들은 저항을 통해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한 손에는 깃발을 다른 한 손에는 동냥 그릇을 들고 서 있을 뿐이다. 저항을 활용하여 무언가를 이뤄낸 것은 남한 사람들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은 이러한 저항의식을, 통치자의 교체를 검토할 정도로 미국의 멘토들을 성가시게 만든, '북진'이라는 공허한 위협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저항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서 다시는 침몰하지 않을 국가의 건설 쪽으로 돌린 사람으 1961년에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23p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구세대 학자들은 남한의 민주주의에 대하여 거론하기를 꺼린다. 민주주의를 이룩한 주체가 정치적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은 세계대전 이후 남한의 건국 과정이 '순수하지 못했음'을 강조하고, 이어서 세계가 항상 북한을 잘못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가 제 발에 걸려 넘어져 코방아를 찧기 전인 호시절에는 자본주의가 저개발을 초래하고 사회주의가 더 정통적이라는 생각에 도덕적, 지적 설득력이 있었다. 공산주의의 흉악함도 자유세계의 일원인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쾌함만큼 강하게 인식된 적이 없었다. 그 정도까지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증거가 그들의 오류를 입증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박정희는 가망이 없었다. 그는 일본제국에 봉사했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대자를 고문살해했고, 미군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의 군대를 그것도 잘못된 편을 들어서, 베트남전에 파병했다. 북한에는 외국 군대가 없었고, 경제도 초기에는 남한보다 빠르게 성장했다. 김일성 체제에 호감을 갖기는 어려웠지만 이는 미래의 '진정한' 코리아로 가는 가파른 오르막일 뿐이었다. 이런 난센스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우리는 남한이 달성한 성취에는 눈을 감았다."

 큰 그림에 해당하는 문제 외에도 남한의 성장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는 작은 결점들이 있었다. 성장이란 단지 국가의 회계장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는 국가는 부유해질 뿐만 아니라 도덕적, 실천적, 전체적 건전성도 향상된다. 

31p

아직 한국의 리더십은 개인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명확히 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집단을 위한 희생에 가치를 두는 관념의 뿌리가 너무도 깊다.

32p

북한은 그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가 있다는 듯이 침략을 저질렀으며 이후에도 자신들이 더 순수하고, 합리적이고, 한국적이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북한은 일본 식민통치에 협력한 사람들을 숙청했고, 소련의 지시를 받지 않고 중국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척했으며, 주민이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모든 것은 북한이 인종적, 정신적으로 오염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런 주장에는 남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다소간의 국수적 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남한 사람들은 분노와 실용주의를 따라서 다른 길을 선택했다.

 위성사진의 한반도가 보여주는 것이 그 결과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더 발전했으며, 너희의 순수함이라는 기준은 환상에 불과하고, 우리가 진정한 코리아다.

53p

이들이 한국의 놀랄 만한 발전을 일궈낸 영웅들이다. 이 나라가 가진 것은 이런 사람들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되살려낼 산업의 역사나 자유의 경험이 없었다. 석유는 물론이고 땅에서 캐내거나 재배해서 팔 수 있는 천연자원도 전혀 없었다. 거의 모두가 전쟁이 끝난 후 휴전선 때문에 위축되지 않고 고향을 떠나 서울과 주변 위성도시로 몰려들었던 수백만 명의 이주민에 합류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으며 집단적 도전이 된 삶을 추구해 나갔다.

 이런 사람들이 한국의 유일한 자원이었다. 그들에게 깃들인 찬란함의 실체를 깨닫기 위해서 그들이 겪은 고난, 고된 일, 학대, 사회적 사다리의 아래쪽으로 밀려난 일 등을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승리자들이기 때문이다.

70p

자신은 회사의 파산에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당연히 복직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이 자동차업계 근로자들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보다 못한 시 공무원들이 마침내 시위대의 텐트를 철거했을 때 나는 당연한 조치를 왜 그렇게 오래 끌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내 가족과 동료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한국인이 정부가 한 일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놀랐다.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시가 취한 조치는 나중에 불법으로 판결되었다)

 전통적인 권위주의 가족문화와 수백 년을 이어온 교육에 대한 견해, 즉 교육은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전지전능한 교사가 무지한 학생에게 전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온다. 오늘날 학교에서조차 론이 부족하고 설명과 설득의 기술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인은 성인이 되어서 상호간에 원활하게 협력하면서 일할 수 있는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 두 사람 이상이 함께 하는 모든 일에는 리더가 있어야 한다. 토론을 해본 경험이 부족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의견에서 편견과 감정을 배제하는데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장 동료나 가까운 친구가 아닌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한국인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는 쪽을 선택한다. 당신의 의견에 대한 한국인들의 존중 때문에 당신의 생각이 실제보다 더 뛰어나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당신의 한국인 배우자는 당신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파트너를 사랑하는 사려 깊은 파트너는 머지않아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방어하려는 시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73p

명확성의 부족에 대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설명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권력자는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가 아니면 언론에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기자들을 다루기 위해서 다루기 위해서 지명한 대변인은 정부부서나 기업의 계층구조 상의 위치가 너무 낮아서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83p

필자는 때로 선의와 목표의식을 갖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사상에 열광했던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14세기의 공산주의자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가 그랬던 것처럼 일단 권력을 획득하자 그들의 종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도 그와 같은 시스템은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유토피아적이었을 것이다. 유교의 혁명가들은 가장 현명하고 품위 있는 사람이 지배하는 고결한 사람들의 국가를 꿈꾸었다. 이를 위해서 시, 서예, 도덕에 중심을 둔 교육체계를 확립하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결과는 부패가 만연하고, 정의가 실종되었으며, 계급체계가 고착되고, 편협하고 악의적인 법이 시행되는 국가였다. 그들은 경쟁적인 주장을 내놓고 파당을 조성하여 야만인들같이 서로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유교사상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더 깊이 한국의 심층부로 들어갔으며 오늘날에도 조상을 기리는 제사나 수직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에 확실히 남아 있다. 또한 성 차별 문제에도 유교의 영향이 명백하게 나타난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필자는 유교의 영향이라고 생각한 한국인들의 정중함과 예의바름에 끌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사람들의 저속함과 마주쳤다.

86p

20세기 초까지도 행인들은 망자의 가족이 묏자리를 물색하는 동안에 거적에 말린 채로 햇볕 속에서 부패하고 있는 시신과 마주치곤 했다. 불안정한 혼령을 매장하는 것은 질병의 위험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매장 공간이 부족해짐에 따라 남한 정부는 화장의 선호도를 높이는데 성공했다.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은 종교마다 다르지만 한국인의 공동적 관심사는 망자의 자손이 조상에 대한 공경심을 갖게 하고 혼령이 외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92p

한국인들은 종교에도 무속신앙적 열정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그들은 유교의 적용에서 종주국 중국을 능가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에 대한 공산주의적 개인숭배에 있어 스탈린과 모택동을 능가했으며, 그는 마치 샤먼왕처럼 북한을 통치했다.

103p

이런 방식으로 신흥종교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할, 천재적 예술가사 어떻게든 사름들의 영혼 즉 시대정신에 다가서는 것과 비슷한 역할을 했다. 예술가는 단지 자신이 시대정신에서 발견한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려 하는 반면에, 신흥종교의 지도자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사회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서 시대정신을 활용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 종교 또는 다음에 나타날 종교의 임무는 행복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111p

오늘날 그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여론 조사원에게 자신이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경쟁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서 필요한 학력을 취득하는 길은 소수의 일류대학을 통하는 좁은 길이다.

 오늘날 한국의 당면 과제는 성공에 이르는 길을 다변화하고 사회적 서열을 자존감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사회적 서열에서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타인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판단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바뀔 수 있는가는 볼 때마다 놀랍다.

112p

나는 측정할 방법이 있다면 한국인이 예컨대 아이디어보다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고 확신한다. 

 계급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일찍부터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정보를 모으고 책략을 꾸미는 것을 배우게 된다. 대화하는 사람의 수준과 그들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중요할 뿐 대화 자체의 즐거움은 없다.

 서구인이 이해하기 힘든 한국인의 특성, 즉 침묵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성향이 거기에서 나온다.

117p

한국인들은 격정적이면서 또한 매우 예민하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미묘한 느낌에 대한 타인의 이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기분(느낌 또는 마음의 상태)'은 대단히 중요하다. 기분이 좋으면 건강에도 유익하다. 기분이 나쁘면 사업제안서를 퇴짜 놓거나 아내나 비서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나쁜 행동도 정당화된다. 

131p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인이 예컨대 영국인보다 훨씬 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최소한 30대 이상의 한국인은 그렇다. 그보다 젊은 세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들은 휴대전화와 PC에 푹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 든 한국인들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사람들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으며, 부모와 시간을 보낸다는 생각에 눈을 치켜뜨지도 않는다. 그들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에게는 고정된 취침시간이 없다. 밤을 절반쯤 새우며 당신과 대화를 나누다가 지쳐서 바닥에 누워 잠이 들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서 출근한다.

 우리는 동아시아인이 대체로 보수적이고 서구인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주관적 경험으로는 한국인들이 훨씬 더 차이를 잘 받아들이고 포용적이다. 나는 기독교와 법에 기초한 서구문화 때문에 서구인은 옳고 그름의 문제, 선과 악의 문제에 더 관심을 갖는 반면, 유교적인 한국인들에게는 사람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 한국인은 덜 비판적이다.

135P

한국의 아기들은 자신을 억제하기보다는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길러진다. 즐거움을 미루는 것을 배우지 못한 소년들은 표가 난다. 성인이 되어도 그들은 모든 것이 즉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이와 같은 보편적 패턴을 목격한 서구인은 한국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자식에게 훈계하지 않는다. 사실상 설명조차 많지 않은 편이다. 

137p

사실대로 말하자면 한국인들에게는 애국심의 부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민족주의와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있을지 몰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없다.

138p

오늘날까지도, 비록 전적인 중매결혼은 매우 드물지만, 가족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따라서 결혼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은 대단히 타산적인 결혼과정을 거치게 된다. 

"낭만적 연애로 변화하는 추세는 대중문화가 암시하는 것처럼 크지 않을 수 있다."

"소득, 집안 배경, 키, 심지어 혈액형 같은 스펙이 매우 중요하다. 중매결혼의 사고방식과 가족의 영향력은 이들 요소에 여전히 남아 있다."

147p

한국의 교육이 지향하는 방향에는 한 가지 바람직스럽지 않은 특징이 있다. 아이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려는 것보다는 학력과 자격을 취득하는 방향으로 몰고가는 것이다. 

171p

초기의 조선은 금욕적인 국가였다. 과시적 소비는 금기시되었으며 사회적 위치가 높은 사람들도 그런 행동을 삼갔다. 발전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이 성공적인 통치의 지표로 여겨졌다. 성리학자들은 완벽한 사회는 체제가 아니라 군주의 도덕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으며 부도덕한 리더십이 불안정을 초래한다고 믿었다. 

 유교 교육에서는 윤리도덕이 가장 중요했으므로 이론상으로는 국가가 가장 도덕적인 젊은이들을 미래의 결정권자로 선발하는 것이 셈이었다. 15세기 관료제도의 배후에 있는 이런 관념은 오늘의 한국에도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75p

최하층민에는 천민과 함께 정부와 개인이 소유한 노비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조선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을 외세의 피해자로 보는 오늘날의 관점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179p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는 불공정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부도덕한 경우도 흔했다. 감옥은 "인간 고통의 지옥"이었으며, 유죄판결을 받은 중죄인, 전문적 범죄자, 초범, 심지어 증인에게까지 고문은 기본이었다. 처벌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급료를 받지 않고 피해자 가족의 뇌물로 살아가는 일도 흔히 있었다.

 유교사상이 지배한 한국에서는 하위계층은 그 출신성분에 맞게 태어났으며, '氣'  또는 정수가 열등하여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동정심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동정심의 부재를 오늘의 북한에서도 볼 수 있다. 북한 정권은 조상 때문에 "동요"나 "적대" 계층으로 분류된 많은 주민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180p

실제로 일본 침략군은 백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필요한 도움을 얻었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사실이다. 일본군을 저지한 결정적 요인이 거북선이 아니라 중국 명나라의 개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군은 1593년의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1596년까지 조선군을 도와서 침략자들을 남해안까지 밀어냈다.

193p

이토는 수상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한 메이지유신을 이끈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한국을 합병하는 계획에 반대했으며, 한국의 위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할 수 있는 보호국 지위를 선호한 인물이었다. 그의 암살은 일본이 합병 계획을 밀어붙이고 한국에 대한 공식적 지배권을 주장하기로 결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이 참담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암살자 안중근은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196p

한국인들은 일본의 행위를 공격적인 찬탈로 받아들였지만, 일본의 행동은 여러 면에서 볼 때 자기 방위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 클럽에 가입을 꾀하면서 사실상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려 했다. 그들은 식민주의자로서는 후발주자였으며, 식민지를 단지 원자재의 공급원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이웃을 식민지화한 후에 산업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이례적이었다.

203p

상업 부문의 엘리트 계층은 일본 통치의 혜택을 입은 반면, 가난한 농민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지금도 한국사회에 스며 있는 사회적, 이념적 분열을 초래했다. 이제 좌파 세력은 부자들 중에 부역자가 있었다고 비난한다.

207p

오늘날의 인식과는 반대로 1943년까지 군복을 입은 청년들은 지원병들이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청년들이 입대를 거부하자 "자원하라"는 압박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에 8만 명의 자원자 중에서 실제로 입대가 허용된 사람이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한국인에게는 일본인보다 까다로운 조건이 요구되었다. 이는 한국인의 충성심에 대한 의문과 아울러 천황을 위한 전쟁에 다수의 한국인을 투입하면 그들이 전쟁이 끝난 후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입대를 위한 조건 중에는 언어능력도 있었는데, 한국인 중에서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4분의 1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입영을 피할 수 있었다.

209p

일본 정보는 1995년에 처음으로 공식적 사과를 표명했다. 그러나 보상과 관련해서는 1965년에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 식민통치의 피해자 모두에 대한 보상금을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한국 정부는 이 돈을 개인들에게 지급하기보다는 국가적 프로젝트에 투입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한국 정부와 보상 문제를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불편한 진실은 20세기 초,중반의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여성 학대가 별로 특별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한국의 권력자들이 위안부 문제를 일본인보다 더 특별한 문제로 지목할 가능성도 낮았다는 사실이다. 또한 인신매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지방정부가 할당된 인원을 채우라는 요구에 내몰린 지역에서는 팔려가지는 않았더라도 가족의 권유에 따라 위안부가 된 여성들이 많았다.

 세련되고 민주화된 사회의 운동가들이 이 경우처럼 파시스트적인 민주화 이전 시기의 적에게 21세기의 거울을 들이대면 거기에는 자국이 근대화되기 전의 모습도 비치게 된다는 점이 어려운 점이다. 이것이 진실의 추구를 더욱더 어렵게 한다. 


<오류>

172p

태조의 셋째 아들인 이방원은 정도전이 다른 왕자를 후계자로 선호했다는 이유로~

->셋째가 아니라 다섯째 아들이다.

173p

스물네 글자 중 일부는 왕비에게 여러 가지 소리를 내보게 하면서 입과 혀의 모양을 관찰한 왕이 직접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 왕비가 아니라 정의공주로 알고 있다.

174p

양민 간에도 등급의 구별이 있었으며 장인이 가장 높이 평가되었다.

->장인이 아니라 농민이 가장 높게 평가되었다.

177p

연산군의 마지막 만행은 미망인이었던 백모를 강간한 것이었는데, 자살한 백모의 오빠는 왕실 호준의 지휘관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또 하나의 고약한 인물을 17세기의 군주이며 세자의 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부왕을 독살한 것으로 알려지는 광해다.

-> 연산군이 큰어머니를 강간했다거나 광해군의 선조 독살설은 야사에 불과하다.

또 박원종은 월산대군 부인의 오빠가 아니라 동생이다.

440p

여러 사람이 같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술잔을 교환하는 식으로, 이는 B형 간염의 발병률이 높은 원인으로 지적된다.

->B형 간염은 술잔으로 옮는 것이 아니라 수혈과 성교 등을 통해 전염될 수 있다. 술잔 돌리기는 A형 간염을 전파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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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들 - 개정판
주원준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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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책이지만 성경에 대한 인식을 바꿔줬다.

제목만 보고 막연히 구약시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판하는 책인 줄 알았다.

구약은 절대적인 경전이라기 보다는 사실은 근동의 여러 종교와 문화가 섞여 있는 일종의 신화라는 식으로 비판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저자는 개신교가 아닌 가톨릭 계열의 종교학자이고 기독교의 근본주의나 성경 문자주의 같은 저급하고 편협한 해석을 경계하고 수천 년 전 고대 근동인의 눈으로 성경에 그려진 절대신을 해석한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탈신화화, 재신화하라고 설명한다.

성경은 과학과 합리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의 언어로 쓰여진 게 아니라, 수천 년 전 자연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근동인들의 언어로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을 설명한 경전이므로 신화의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 즉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바로 탈신화화다.

지구 6천년 설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은 기겁할 소리일 것이다.

고대 근동인들은 자연에 인격을 부여해 신으로 섬겼고 이스라엘인들은 그 신들을 모두 야훼 하느님의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하늘을 신으로 섬기는 주변 민족들과 달리, 이스라엘인들은 하늘이 장소에 불과하다고 표현했다.

이러한 절대자, 유일신 사상은 당시로 보면 너무나 놀랍고 독창적인 관념 같다.

또 그 신적 개념이 보편적인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끼치는 종교가 됐을 것이다.

비판적인 눈으로 성경을 볼 때는 성경이란 고대 근동의 잡다한 문화의 짜집기가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다신론적인 강대국들 사이에서 매우 작은 왕국이었던 이스라엘인들이 유일신 개념을 어떻게 보존하고 지켜 왔는지를 알 수 있는 놀라운 경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전에 믿었던 내 믿음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친절하게 어려운 개념들을 설명해 준 저자에게 감사하다.



<인상깊은 구절>

19p

신약 시대와 현대는 다르다. 과학과 기술 등이 발전하지 않았던 2천년 전 신약 시대 사람들은 신화적 세계관에 젖어 살았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신화의 언어에 퍽 익숙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성경도 그런 옛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쓰였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과학과 합리주의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이 고대의 신화적 언어는 무척 낯설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현대인의 눈으로만 읽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과거 신화의 언어에 담겨진 속뜻을 잘 새겨서 이해해야 한다.

20p

볼트만은 신약 시대의 세계관이 신화적임을 지적했다. 이런 세계관은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과 크게 차이 나므로, 일종의 해석학적 여과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이 오해 없이 성경을 이해하려면 이런 신화의 언어를 벗겨 내서, 곧 탈신화화해서, 그 알맹이를 합리주의과 과학에 익숙한 현대인의 언어로 설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의 껍질을 '탈각'하고, '해석'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학계에 폭넓게 받아들여졌고, 현대의 성서학에서 꼭 가르치고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개념이다)

22p

성경의 언어는 태어날 때부터 객관과 증명에 기반한 과학의 언어와는 거리가 한참 멀고, 의미를 담아내는 신화나 이야기의 언어와 가깝다는 주장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성경의 언어는 신화의 언어와 일맥상통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부한 상징을 담고 있는 신화적 언어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절하고도 유용한 수단이다.

23p

하느님은 작은 나라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이 백성은 수천 년에 걸친 고대 근동의 패권전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이름을 올려 놓지 못했다. 그들의 조상은 보잘 것 없는 떠돌이였고, 한때는 제법 번듯한 왕국을 세웠지만, 늘 큰 나라들의 눈치를 봐야 했고, 얼마 가지 못해 분단되었으며,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제 힘으로 지켜 내지 못했다. 이런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을 견뎌 내는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문물을 적잖게 받아들였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것이 구약성경에 고대 근동 신화의 자국이 크게 남은 이유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만은 독특했다. 주변 강대국의 신화에서 많은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야훼 신앙에 맞춰 섭취하고 소화하여 자신의 종교를 지켜 내고 심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를테면,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하늘신'은 최고신이었지만, 유배 이전에 이스라엘인들은 언제나 '공간'의 의미로만 사용했다.

27p

종교사적 '지식'이 신자들의 '신앙'과 대립하거나 충돌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보완하여 상승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신앙과 지식은 본질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 보완하고 상승 작용을 일으키는 관계라는 성찰은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깨달음이다.

48p

이처럼 구약성경의 저자는 하늘이 인격화되는 표현을 삼간다.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고려할 때, 인격화된 하늘은 곧장 신격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말하였다' 대신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렇게 하늘을 장소로 이해한 까닭은 하늘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82p

예언자도 달신 숭배를 경고한다. 대표적인 신명기계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예레미야는 일월성신을 섬겨 봤자 아무 소득도 없이 죽으리라고 경고한다.

89p

창세 1장은 이런 큰 신들을 한낱 피조물로 만들어 버렸다. 야훼 하느님은 단 나흘 만에 대제국의 높으신 신들 대부분을 '만드셨다'. 아무리 그들의 권능이 대단해 보여도 그것들은 그저 피조물일 뿐이다. 약소국 이스라엘의 사제계 신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90p

창세기 1장을 '창조주를 찬미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로 서술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느님의 창조는 이성적, 과학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찬미할 대상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창세 1장을 '큰 의미의 본문'으로 읽었다.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야훼 하느님의 창조 행위와 함께 그분의 크나큰 권능을 '노래'한 것이다. 

116p

현대인과 고대인의 종교심은 어떻게 다를까? 현대인은 '나일 강'과 '나일 강의 신'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강이라는 '객관적 실체'와 그 객체를 신화화해서 태어난 '상상의 세계', 곧 '강의 신'을 구별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대 근동인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늘신 없는 하늘'이나 '강의 신 없는 강'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은 '의미 없는 세상'이나 '사랑 없는 연인들'과 같은 말이다. 이런 심성을 공유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게 '이 세상'과 '이 세상을 만드신 하느님'의 관계를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창조주 하느님 없는 세상은 의미 없는 세상이다. 이렇게 고대 근동인들은 구체적인 강들, 이를테면 나일 강이나 유프라테스 강에서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129p

인간의 의식 체계는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의 결과'를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를테면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을 할 때늘 생각해 보자. 제비뽑기의 과정이 극도의 우연성을 보장한다면, 이른바 '죽음의 조'에 걸리더라도,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런 극도의 우연적 결과에 천문학적인 돈의 운명을 맡기기도 한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지역에서 다양하게 치러지는 로또를 보라.

157p

구원의 피가 온 세상과 온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 셈족의 종교심을 공유하는 신약시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가르침을 퍽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예수님도 이런 상징으로 구원의 신비를 가르치셨고, 그 가르침에 따라 신앙 공동체는 지금도 성찬례를 올린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런 셈족의 상징을 몰랐다. 로마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한다. 그들은 구원자의 피로 온 세상의 죄가 씻긴다는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부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다. 곧, 성찬례를 '인육식사'로 오해하였고, 그런 오해가 흉한 소문을 낳았으며,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결국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로마의 박해가 촉진되었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반드시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비셈족에게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많은 애를 썼고, 성찰을 심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학이 발전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박해를 받는 입장이었던 그리스도교는 피에 대한 성경의 상징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잔인한 박해에 맞서 흘린 '순교자의 피'로 우리 모두가 깨끗해진다고 새롭게 고백하였다. 이는 교회의 '순교 신심'의 기반이 되었다.

159p

고대 근동인들은 의미의 세계에서 살았다. 신화가 제시하는 의미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산의 푸른 나무 또는 길가의 큰 나무를 그저 '식물자원'이나 '목재' 따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 나무에 어떤 거룩한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나무에 어떤 '마음'이 서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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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은 암흑시대였는가? - 중세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3
박용진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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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사회와 정치 구조에 대한 가벼운 고찰.

앞서 읽은 절대왕정의 기원은 작은 분량에 불구하고 무척이나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이번 주제는 피상적인 느낌이라 아쉽다.

중세 천 년을 120 페이지로 담기는 무리였나 보다.

흑사병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 더 이상 영주들이 농민들을 인신 구속할 수 없어 임대료를 받고 시장에서 재화를 구입하는 시장경제체제로 돌아섰다는 내용은 익히 알려져 있어 새롭지 않았다.

백 년 전쟁을 치루는 동안 국가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국왕은 신민에게 자원을 징발하고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이 때 삼부회가 이를 추인하는 역할을 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국왕의 권한이 커지고 조세는 항구화 되어 절대 왕정이 성립되는 과정은 앞의 책에서도 본 바다.



<인상깊은 구절>

65p

도시민들 대부분이 가까운 농촌 지역 출신이며,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많은 수가 이주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더라도 "뿌리 뽑힌 자들"이 교환하는 물품의 양보다 주변 농촌의 농민들이 거래하는 상품의 양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따라서 상인이란 뿌리 뽑힌 자들이나 편력 상인보다는 주변 농촌 출신으로서 상업에 재능을 가진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도시가 발전하는 초기 단계에서는 원래부터 거주하던 토박이들이 도시의 유력자들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외부에서 들어온 상인들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94p

노동력은 부족해져서 임금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주는 임금 노동자를 이용하여 자신이 직접 경영하던 토지를 운영하기 힘들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토지조차도 농민에게 임대해 주게 되었다. 대신 영주는 농민들로부터 농산물로 받아 오던 토지 임대료를 화폐로 내도록 하였고, 이 화폐 수입으로 시장에서 농산물을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영주는 굳이 농민들을 속박시켜 놓고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렇게 되자 영주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농민들을 각종 부담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게 되었다. 이제 영주는 농민에 대해 경제적 권리인 임대료만을 받게 되었고, 과거처럼 농민을 신체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권리는 갖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영주는 소작농들로부터 임대료를 받는 단순한 지주로 변화하게 되었다. 

97p

시행정관은 상층 시민들이 독점했으며 이들은 혼인 관계를 통해 강하게 결속했다. 이들의 목표는 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미 그 이전 시기에도 농촌의 토지를 구입함으로써 귀족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을 분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귀족 작위를 받기도 했다. 14세기에 들어서 귀족이 될 수 있는 다른 길이 열렸는데, 그것은 관직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권력이 확대되면서 많은 관료가 필요해졌는데, 이러한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귀족이 될 수 있었다. 

100p

기존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으므로 기존 교회를 배척하고 개인적인 경건성을 추구하거나 이단이 나타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네덜란드와 북부 독일 지방에서는 신도가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류를 할 수 있으며 개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운동이 널리 퍼졌다. 

120p

중세 말 국왕은 재정 수입을 늘리기 위해 성직자, 봉건 영주, 그리고 시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를 소집하여 과세에 대한 국민의 협찬을 얻어 재정 수입을 확보했다. 이러한 제도가 가장 먼저 생긴 곳은 영국이었다. 

 프랑스의 경우 1304년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교황과 대립하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세 신분으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삼부회였다. 프랑스의 삼부회는 백 년 전쟁 내내 전비 마련을 위해서 소집되었고, 국왕의 재정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삼부회는 15세기 말이 되어 왕권이 강해지자 소집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소집된다고 하더라도 세금을 인정해 주는 거수기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절대 왕정의 한 요소로서 상비군과 관료제를 떠받치는 조세 제도의 확립을 들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백 년 전쟁은 큰 기여를 했다. 14세기 이전까지 프랑스에서는 신민 전체에 항구적으로 부과되는 세금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국왕은 자신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국왕은 왕국을 방어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모든 신민이 기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민의 기여, 즉 세금은 전쟁과 같이 '명백한 필요'가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어서, 처음 세금이 징수되었을 대에는 그 기간을 일 년으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지 않자 세금은 연장되었고, 빈번한 세금의 연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세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국왕이 "그 자신의 뜻에 따라"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동안" 그의 신민에게 과세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든 현실이 되었다.

 백 년 전쟁은 과세의 확립과 더불어 관료제의 확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세금은 세 신분의 대표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삼부회에서 결정되었는데, 삼부회는 과세를 인정해 주는 대신 세금의 징수를 국왕 관료에서 맡기지 않고 삼부회에서 선출한 사람들에게 맡겼다. 조세가 항구화의 길로 접어들었던 14세기 말부터 징세원은 일종의 관료가 되었고 실제로 국왕에 의해 임명되곤 했다. 이리하여 백 년 전쟁이 끝난 이후 프랑스와 영국은 강력한 국민국가로의 첫걸음을 내디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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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절대 군주는 어떻게 살았을까? - 근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8
임승휘 지음 / 민음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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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분량의 책이지만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에 대해 명쾌하고 깊이있게 설명한다.

이런 문고판들은 수박 겉핣기 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아주 만족스럽다.

제목만 보고 유럽 절대 군주들의 일상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오히려 제목을 "유럽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이라 붙여야 할 것 같다.

중세 봉건주의에서 어떻게 왕이 모든 권력을 갖는 절대 왕정으로 넘어가게 됐을까?

저자는 16세기 군사 혁명 때문이라고 본다.

군비 경쟁이 일어나고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 하는 제도가 바로 관료제이다.

어떻게 세금을 걷을 것인가, 혹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자원을 어떻게 동원할 것인가로 정치 체제가 결정된다.

폭압적으로 국내에서 자원을 강탈한 프랑스나 독일 등은 절대주의 왕정을 거쳐 왕의 목이 잘렸으나, 자본이라는 형태를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또 지리적 여건 덕분에 대륙의 군사 경쟁에서 빗겨나 있던 영국은 중세 의회의 전통을 살려 민주정으로 안착된다.

군사적 경쟁을 무시해 버린 폴란드 같은 나라는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절대 군주제를 확립한 중국 같은 동아시아 세계와 유럽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중국은 오래 전부터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은 황제라는 절대 권력자가 온 나라를 장악했고 과거라는 경쟁을 통해 귀족들을 관료제 안으로 흡수했다.

한국 역시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여 오래 전부터 절대 군주정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왜 세계화의 시대가 되면서 동양은 서양에 패배하고 만 것인가?

한국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절대 강자의 우산 안에 너무나 오랫동안 안주했기 때문에 군사적, 산업적 경쟁력을 잃어버린 것 같고, 중국 역시 유럽 대륙이 치열한 군사 경쟁을 통해 성장하던 시기에 정체됐기 때문에 몰락하고 만 것인가?

중국과 유럽의 절대주의 체제 비교도 흥미로울 것 같다.

저자는 유럽의 절대주의가 군사적 긴장을 통해 유지된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럽은 이런 군사적 경쟁을 통해 국민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19세기에 전 세계를 침략하러 나선 것인가?

절대주의 왕정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5p

경제적 위기나 전쟁, 지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의 반복과 같이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들은 절대 왕정을 위한 토대이다. 특히 중세의 신분제 국가에서 절대 왕정 국가로의 이행을 촉발하는 가장 좋은 계기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집단, 혹은 여러 집단들의 결합이 전체를 위협하는 경우일 것이다. 왕국의 한 신분 집단이 모든 이익을 독점하려 하고, 다른 신분 집단들은 이를 막을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면, 그들은 군주에 의지하여 지휘관으로서 그의 능력을 이용하고, 자신들이 지닌 권력의 중요한 부분을 포기하면서까지 왕의 개인적 위신과 신성한 국왕권에 도움을 받으려 할 것이다. 

21p

리슐리외 추기경의 오랜 바람대로 에스파냐 왕국이 무력화되었다고 해서 평화가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17세기인들, 그중 특히 귀족들은 전쟁을 혐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전쟁에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기회를 보았고, 실제로 많은 가난한 귀족들이 참전했다. 게다가 전쟁은 이제 17세기 유럽의 여러 국가가 주관하는 일종의 기업 활동이 되었고, 이로써 전쟁과 관련된 산업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농민 대중에게서 걷은 세금의 대부분이 군사 작전과 상비군의 유지를 위해 지출되었다. 평화는 언제나 무장 상태의 대치 상황을 의미했다.

32p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이후, 신자들의 구원을 책임지던 교회가 미신과 농촌 사회의 비정통적 형태의 신앙을 없애기 위해서 악마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신교적인 감성을 축출하고 무서운 유일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전통적인 민중 문화의 일부가 사탄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 그토록 많은 마녀를 처형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처형의 주체, 즉 국가 공권력이 그만한 힘을 지녔고 동시에 문제에 개입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녀사냥은 절대 왕정의 이념이 현실로 나타나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사적인 권력 행사가 공적인 국가 권력으로 대체되는 과정이며, 사회적 범죄와 그에 대한 공적인 처벌 방식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국왕의 사법권을 행사하는 법관들은 종교적 일탈 행위에 강력하게 대응했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단일한 질서를 확립할 의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마녀재판과 처형을 통해 마법에 대한 교회와 국가의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농촌 세계에 뿌리내린 오랜 전통을 붕괴시켰다. 중세의 농촌은 각 공동체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지만, 절대 왕정의 등장으로 이러한 관행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 

64p

군대는 국민의 복종을 담보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게다가 군대는 왕권 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가난해진 귀족들은 국왕을 위해 봉사하기를 희망했다. 대선제후는 귀족들을 군 장교나 행정 관료로 등용시켰다. 브란덴부르크의 귀족들에게 군대에서의 진급과 성공은 최고의 영예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선제후는 효율적인 조세 제도를 시행하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관료제를 발전시켰다. ... 유럽의 다른 절대 왕정 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에서도 농민은 거의 모든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이러한 정책이 성공할 수 있던 주요 원인은 융커 계급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무력화시킨 데 있었다. 1651년 이래 대선제후는 더 이상 어떤 참사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요한 국가 사안들은 밀실에서 처리되었다. 개인 통치가 시작된 것이다. 대선제후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처럼 집무실 통치를 수립했다. 군주는 이제 그의 동료들로부터 분리되었고, 자신의 집무실 비서를 통해 명령을 하달했다.

68p

프리드리히 빌헬름1세는 칼뱅파 교회에서 자극받아 금욕주의적 개혁 운동을 펼친 루터파 경건주의자들의 도움으로 공공 교육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수행했다. 그것은 유용하고 순종적인 신민을 만들어 내기 위해 도덕적 감독과 신체 단련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비밀은 칼뱅교회에서 먼저 실험된 규율 전략을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적용시켰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의 관찰자들은 프로이센을 '북구의 스파르타'로, 또는 거대한 감시자가 중앙에 위치하고 수감자들이 관리되는 거대한 감옥인 파놉티콘(벤담)에 비유했다.

 근대 초 유럽에서 중세 때부터 내려온 의회 전통이 그토록 완전히 붕괴되고 국앙 중심적 행정이 그토록 공고히 관료제화된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100p

사실 절대주의는 전쟁의 산물, 다시 말해 군사적인 우월 의지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진 대외전쟁은 국왕으로 하여금 예외적인 자금 조달 방법을 선택하게 했고, 전쟁과 그것이 수반하는 사회적 긴장이야말로 절대 왕정의 필수 조건이었기에 예외적인 방법은 반영구적 체제로 고착되는 경향이 짙었다. 즉,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은 예외적인 조건을 창출하며, 일상적 관행으로부터의 단절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절대주의 체제란 비정상적, 예외적 상황이 영구화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조세의 측면에서 이 점은 명확하다. 

 결국 절대 왕정이 추구한 왕권의 절대화는 결코 보편적인 원리가 아닌 예외적인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절대 군주의 권력이 절정에 달할수록, 그것이 지닌 예외적인 상황 또한 극에 달하는 셈이었다. 중상주의 정책도, 과도한 세금도 엄청난 전쟁 비용을 감당해 내지는 못했다. 그 결과 절대주의가 사회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절대 왕권의 절대성은 언제나 파산의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할 수밖에 없고, 전쟁 수행을 위해 끊임없는 재정 압박에 힘겨워 한 절대 왕정하에서의 국왕은, 몽테스키외의 말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함은 말할 나위도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13p

절대주의의 기원은 인구 과잉과 과잉 정착이 귀족이 토지를 장악하는 힘을 약화시키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14세기 서유럽 봉건제의 위기에 있다. 동시에 상업이 부활하면서 새로운 도시 상인 계급이 흥기했는데, 이들은 귀족이 정치권력을 독점하는 것에 도전했다. 이렇듯 농촌과 도시에서 농민과 상인들의 위협을 받자, 서유럽의 귀족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과 프랑스, 잉글랜드와 오스트리아에서 성립된 일련의 새로운 왕조들은 농민과 상인들에 맞서 귀족과 결탁했고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앤더슨에 의하면 절대주의를 가능하게 한 사회적 토대는 바로 이러한 결탁이었다. 절대주의 국가는 "재충전되고 전환된 봉건적 지배 기구"였다. 반면 동유럽에서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명백히 달랐다. 미개척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고 인구는 분산되어 있었으며 도시는 허약했다. 따라서 봉건제를 뒤흔든 것은 자생적인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서유럽의 절대주의가 제기한 군사적 위협이라는 외래적 요인이었다. 이러한 위협에 응답하기 위해 동유럽의 지배자들은 상비군을 건설하고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자원을 끌어 쓸 수 있는 추출 기구를 집중시켰다. 그러나 농민과 상인 계급이 허약했고 절대 왕정의 이러한 맹습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절대주의는 특별히 거칠고 전제적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서유럽에서 절대주의가 귀족들에게 점차 쇠락하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을 보상해 준 반면, 동유럽에서의 절대주의는 재판 농노제를 통해 귀족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시켰다. 앤더슨은 국제적인 군사 경쟁이 행한 일정한 역할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근대 초 국가 형성을 기본적으로는 사회 경제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116p

"전쟁이 국가 형성과 변화를 이끌었다"는 제도주의자의 주장을 확인하면서, 이와 동시에 경제 발전의 수준이 군사 동원 전력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에서 국가는 중앙 집중화된 추출 기구들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로부터 필요한 자원을 직접 추출해 낼 수밖에 없다. 반면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 즉 경제적으로 앞선 지역에서 지배자들은 자본가들의 협조하에 필요한 자원을 끌어낸다. 일부 가장 강력한 국가들은 경제 발전의 이익과 국가 행정의 중앙 집중화를 성공적으로 결합시켰다. '국민 국가'의 형태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버텨 낼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근대 자유 민주주의의 뿌리가 대부분의 유럽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중세의 헌정주의'(영국 의회는 이러한 중세 헌정주의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즉 지방 정부와 의회기구 그리고 법치라는 전통에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나라에서는 헌정주의가 살아남아 민주화를 위한 기초를 제공했고,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사라져 독재정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 다우닝에 의하면 문제의 전환점은 바로 상비군의 창설을 유도한 16세기의 '군사 혁명'이었다. 용병으로 구성된 상비군을 일으키고 유지하면서 근대 초의 지배자들은 엄청난 조세 압박을 받았다.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과 같이, 국내에서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려는 곳에서 신분제 국가의 대의 제도는 파괴되고 국왕의 통제하에 중앙 집중적 관료제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군사 관료제적 절대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반대로 잉글랜드처럼 지리적인 이유 때문에 군사 혁명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곳, 또는 자원 동원을 위해 다른 수단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곳에서는 헌정주의적인 제도들이 살아남아 19세기의 민주화를 위한 제도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국제적인 군사 경쟁의 필요성을 단순히 무시했던 폴란드와 같은 국가들은 정복당하고 파괴되었다. 결국 다우닝의 결론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기원이 사회적인 것도 정치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각 국가가 16세기 군사 혁명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달려 있었다.


<오류>

91p

그가 1740년 부친의 왕위를 물려받고 프리드리히 3세로 등극하자, 세계는 왕위에 앉은 철학자를 환영했다.

-> 프리드리히 3세가 아니라 2세다.

111p

반란을 응징하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제임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하는 것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 제임스 1세가 아니라 그 아들 찰스 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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