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역사학 비판 - 『환단고기』와 일그러진 고대사
이문영 / 역사비평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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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만들어진 한국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역사학과를 나온 저자는 인터넷에서 널리 퍼진 환단고기에 대한 분노로 유사역사학 혹은 사이비, 아마추어 역사가들과 싸우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위서를 가지고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으나 학계의 이런 반응 때문에 대중들에게 한민족 지상주의가 의외로 널리 퍼졌던 것을 보면, 학자들이 대중과의 소통에 노력을 많이 해야 할 듯하다.

동이족이 곧 한민족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나라라는 주장은 많이 익숙하다.

환국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황당해 별 파급력도 없는 반면, 은나라가 동이족이고 곧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는 얘기는 그럴 듯해 보인다.

저자가 비판한 대로 고대 중국이 이룬 문화적 성과를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동북공정 못지 않은 동이공정이 아닌가.

민족의 역사를 허황되게 확대시키려는 극우파시즘과 유사역사학은 비슷한 점이 있는데 희안하게 좌파들도 좋아한다.

토착왜구라고 상대를 인신공격하고 반일을 외치며 정치적 주도권을 잡으려는 태도는, 역사학자들을 식민사관에 매몰된, 친일파 이병도의 제자들이라고 몰아세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화랑세기>에 대해서도 저자가 관심을 가져 주면 좋겠다.

이제 치우는 한민족의 조상이 아니고, 은나라 사람들도 동이가 아니며, 동이가 곧 한민족은 더더욱 아니며, 낙랑은 평양에 있었던 한나라의 군현이었으며, 백제는 요서땅을 경영한 적이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알겠다.



<인상깊은 구절>

23p

유사역사학은 "뒷받침하는 증거나 개연성이 없는데도 주로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목적으로 제시되는 주장"이라고 정의한다.

47p

"사이비역사가들은 증거를 선별적으로 채택한다.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는 것은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해주는 증거만을 사용한다. 사이비역사가들은 논리 전개 과정에서 가능성과 개연성의 구분을 흐려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일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는, 그런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났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발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반면에 '어떤 일이 개연성이 있다'고 할 때에는 일어났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사이비역사가들은 하고 많은 증거 중에서 하필이면 예외적인 것에 주목한다."

56p

자신들만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친일파와 노론에 의해 나라가 조종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사학자(친일파와 노론의 앞잡이)를 증오하고 이들의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믿으며 무책임한 인신공격을 가한다.

"대중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 "증거 하나만 대보라"고 요구하면서 증명의 부담을 자기 쪽에서 체제 쪽으로 돌리려 한다."

역사학은 단 하나의 증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증거들의 결합을 통해 귀납적으로 증명되는 학문이다. 이 증거들 가운데 한두가지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해서 전체 결론이 무너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역사학가들은 증거의 수렴을 거부하고 자기들 주장에 맞는 것만 취사선택하여 대중에게 알린다.

143p

역사학계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을 늘어놓아 시민들을 현혹하는 것이 유사역사학이 행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더욱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했던 약점을 가진 이병도를 공격하고, 역사학자들은 모두 이병도의 제자라는 어이없는 프레임을 제시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역사학자들(이기백, 전해종 등)까지 친일파 사학자로 몰아간다. 오히려 친일 행적이 뚜렷한 최동이나 문정창 같은 이들의 주장은 잘도 이용하면서 때로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시미치를 떼기도 한다.

174p

유사역사가들이 증오하는 식민사학은 진작에 죽어버렸다. 오히려 죽은 식민사학을 살리려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이 살아야 적대적 공생 관계를 끌고 갈 수 있는 유사역사가들이다.

 역사학계는 그동안 대중과의 소통에 힘쓰지 않은 점을 반성하고 더욱 다양한 방법과 경로를 통해 역사에 대한 시민사회의 인식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해나가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240p

치우는 우리 민족과 아무 관계없는 중국의 전설 속 괴물에 불과하다. 치우가 높이 평가받게 된 것은 중국 한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황제의 적대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에 대한 열등감은 집요한 보상 심리를 만들어냈고, 그 결과 황제의 가장 지독한 라이벌이었던 치우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탈바꿈시켰다. 

 그 최소의 작업은 <규원사화>에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자부심을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규원사화>는 치우를 우리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후손이 없는, 그러나 강력한 무력을 지닌 존재'는 후대에 이용해먹기 좋다. 유럽의 여러 국가가 트로이의 후손을 자처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똑같은 이유로 치우는 한민족과 묘족의 조상으로 둔갑해버렸다. 이를 첫 번째로 수행해낸 것이 바로 <규원사화>였다. 

278p

고대 중국은 우리 민족의 역사로 윤색된다. 고대 중국이 이룬 문화적 성과는 모두 동이족이 해낸 것이고, 동이족은 바로 한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고대의 모든 국가를 한민족이 세웠다면 대체 중국사와 한국사를 구분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미 유사역사학은 '동북공정'보다 더 심한 '동이공정'을 시행하고 있는 셈이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멸망했다. 왜? 그것은 조선이 유교 탓으로 문약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토에 엄청나게 집착하면서도 조선의 영토가 고려보다 더 확대되었다는 뻔한 사실조차 외면한다. 조선에 비하면 고려는 무수한 외침에 자주 시달린 편인데, 그런 점도 살피지 않는다. 일본에게 멸망당한 원죄는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333p

일본제국이라면 능히 이런 짓을 할 만하다는 확신이 괴담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해왔다. 쇠말뚝 괴담은 결국 강한 상대에 대한 피해 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으며, 상대를 바꿔가면서 계속 살아남았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이 했던 짓들 때문에 우리에게 인재가 없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증거도 없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허무맹랑한 미신을 일제의 만행으로 규탄할 때,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하고 규탄해야 할 만행은 오히려 잊힐 수도 있다.

372p

"전문 역사가들은 자기 영역을 그렇게 쉽게 넘겨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역사의 모든 풍부함과 복잡성 안에서 과거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 저기 바깥의 대중 영역에 있는 편향되고 틀리기까지 한 역사서에 맞서 싸워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의 지도자와 여론 형성가들이 역사를 악용해 거짓 주장을 강화하거나 어리석은 불량 정책을 정당화하는 것을 용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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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 일본 역사학자의 진짜 교토 이야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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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이 많이 생각났는데 광고를 보니 유홍준씨가 이 책을 참조했던 모양이다.

교토의 역사, 특히 하타씨가 가쓰라 강의 제방을 쌓는 대목이나 고구려인들이 세운 야사카 신사 부분이 특히 그렇다.

다시 읽어봐야겠다.

확실히 일본인이 쓴 자국의 교토 이야기라 깊이가 다르다.

교토나 일본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부족해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천년 수도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경주 사람들이 이런 자긍심을 갖고 있을까?

경주는 고려 시대 이래 소외된 지역이라 교토와는 다를 것 같다.

일본 역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국과는 매우 다른 사회였음을 느낀다.

일본은 확실히 전통적으로 무사가 지배하고 상인들이 뒤를 받치는 사회였던 듯 하다.

점잖은 선비들의 나라였던 한국과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읽기 편한 판형이라 좋긴 한데 컬러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75p

당대 축성술의 정수가 녹아 있는 각지의 성들은 풍토와 조화를 이룬 조형미를 보여주며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녔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중앙의 획일주의로 칠해지고 있는 지금, 성이야말로 거기에 대항하는 지역주의의 위대한 상징이 아닐까.

133p

황후는 이곳에서 레이제이 천황이 앓는 정신병의 쾌유를 빌었다고 한다. 특히 족 사회는 영달을 위한 경쟁이 치열했던 만큼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정신까지 놓아버리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테고, 근친혼이 부른 비참한 결과로 비슷한 병을 얻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148p

섭관 정치의 바탕이 된 장원의 급속한 발달로 각 지방 관청의 수입이 줄자 수령이라고 불리는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황족의 미나모토라는 성씨를 하사받고 신적이 강하된 왕당파들을 앞세워 먼저 후지와라 씨와 관련이 적은 고산조 천황 밑에서 적극적인 장원 정리에 나섰다. 하지만 섭관가의 반발과 천황의 병환 등으로 좌절되면서 결국 율령제와 섭관제에 얽매지이 않는 새롭고 자유로운 권력 기구로서 등장한 것이 원정 정권으로 그 중심인물이 바로 시라카와 천황인 것이다.

 장원 정리를 명분으로 내세우다 보니 각 지방의 지방 관청과 장원 간의 분쟁이 급속히 증가했다. 그 결과 장원 영주의 중요한 세력 중 하나인 사찰, 특히 나라의 고후쿠지와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등의 원정에 대한 항의가 표면화되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이 승병들의 무력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게다가 이때는 장원이라는 영유 형태를 부정한다 해도 지방에서 성장한 강력한 부호층과 어떤 식으로든 담판을 짓지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원정 정권으로서는 무사단이라는 버팀목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원정 정권은 왕당파의 부활, 수령층의 진출, 무사단의 지원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필수 조건으로 성립했다. 따라서 그 안에는 율령 국가적 의식을 재현할 요소와 함께 중세 무가 사회로의 전망도 품고 있었다.

 호쇼지는 이런 원정 문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그 거대하고 기발한 디자인은 원정이라는 권력에 매료된 지방 호족들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176p

어떻게 이처럼 교토 안에 이질적인 존재감을 가진 선종을 전파할 수 있었을까. 교토는 비록 가마쿠라의 무력과 정치력에 굴복했을지언정 사상과 문화 면에서는 그리 쉽게 감화될 리가 없었다. 선종이 가마쿠라 막부의 힘으로 교토에 정착할 수 있었다면 그 이유는 에이사이가 늘 천태사문을 칭하고 겐에이 원년(1206) 도다이지의 조겐이 세상을 떠난 후 도다이지 부흥에도 힘쓰는 등 원,밀,선,계의 4종 겸학이라는 포용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천태종과 불교의 부흥이라는 에이사이의 높은 이상이 교토의 정신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또 에이사이가 가마쿠라 막부와 가까워진 것은 당시 이미 교토에 관심을 갖고 있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와 사네토모가 귀의한 것이지 호조씨 일문에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다. ... 숙취로 고생하는 사네토모를 위해 차 한 잔을 권하면서 이 책의 '차의 덕을 칭송하는 장' 한 권을 바쳤다고 한다. 사네토모가 이렇게 과음을 한 것이 어쩌면 호조 일문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폭 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그 시절 에이사이가 권한 차 한 잔에 담긴 그의 마음 씀씀이가 느껴지는 듯하다. 이런 에이사이의 마음이 곧 교토인의 마음이었다.

186p

교토에서 임제선의 교세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조동종이 기도 등의 행위에 따른 종교성이 강했던 데 비해 임제선은 교양적 요소를 지닌 문화성이 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앞서 겐닌지에서도 보았듯이 선종 사찰은 그리 친근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문화성은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 문화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가 차였다.

208p

마치슈들의 생활은 본래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쳤다. 게다가 몰락한 공가의 고전적 교양과 부유한 창고업자들의 경제력 덕분에 더욱 풍요로워졌다. 이렇게 연결된 마치 간에는 연대 의식과 동시에 경쟁의식도 강하다. 연대 의식이란 각자가 독립된 주체로서 동등한 경쟁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따라서 각 가문의 독립과 서로의 독립을 침해하지 않고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마치슈의 신조였다. 이런 정신을 기반으로 마치슈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221p

마치구미를 만든 주역은 본래 상,수공업자 중심의 마치슈들이었다. 특히 동업조합의 보호와 특권을 이용해 부를 쌓은 이들도 있었지만 총 대표를 맡은 창고업자들의 계보는 소시민 계층의 상승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들 중 다수는 남북조 이래의 내란기에 교토로 이주한 무사들이거나 데릴사위로 들어가 마치슈가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토의 상업적 발전의 토대가 된 조합 조직의 대표직을 매수하는 식으로 장악해온 것으로 보인다.

257p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난바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라는 절명시를 남겼다.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하에서 지잔과 전화 등의 불운을 겪다가 결국 허물어졌다. 후시미도 꿈속의 꿈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복숭아밭으로 변한 그 터를 '모모야마(桃山)'라고 부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알지 못했던 향기로운 봄꿈과 같은 이름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의 문화적 소산을 모모야마 문화라고 부르게 된 것은 황폐한 성터에서 화려했던 옛 명성을 그리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호화로운 양식에 걸맞은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모모야마 문화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황금이다. 그것은 금은 광산 개발과 함께 교토, 사카이, 하카타의 거상들이 떠받쳐온 정권의 월등한 경제력을 보여준다. 따라서 모모야마 시대의 유산은 단순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권력자의 힘만이 아니라 상층 마치슈로서 거상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면서 탄생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의 화려한 유산은 마치 안에 조화롭게 녹아 있다.

272p

세상에는 성인과 현인의 길을 배운다면서 실은 처세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고에쓰는 평생 처세법을 알지 못했다.

 '처세법'이란 바꿔 말하면 봉건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권력에 순응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일 것이다. 고에쓰는 이런 현실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저항하진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무시하고 도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사귀었던 소안 등은 하나같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은 교토의 상층 마치슈들이었다. 

279p

전국 시대에 궁정은 완전히 쇠퇴하고 어소는 서쪽에 발달한 6조 마치의 주민들이 지키며 공경들도 마치슈들 사이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부터 궁정과 상층 마치슈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294p

"메이지 황제께서 도쿄로 행차하시어 교토가 정치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우리 교토 시민 특히 니시진의 방직업 종사자들은 폐하가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소 주위를 수없이 돌며 기원했다."

 교토가 왕성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자 앞으로의 산업을 이끌 니시진이 가장 크게 좌절했다. 이 또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공존하며 서로 협력해온 교토의 특성일 것이다. 교토 부지사는 천황이 하사한 금 15만 냥 중 3만 냥을 떼어 니시진 물산회사를 창립하고 직조소를 18개사로 나누어 니시진 부흥에 나섰다. 

 니시진 물산회사는 처음부터 중개상으로서가 아닌 오직 니시진 직조소의 흥망을 걸고 세워진 회사로 원사의 집약적 구입을 통해 생사 업체의 지배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했다. 종래의 니시진의 약점을 철저히 개선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천황이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하면서 황궁 주위를 돌았다는 교토 시민들의 마음이 너무나 애잔하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엄청난 변혁의 시대를 맞아 천황이 위로금으로 하사한 돈을 허튼데 쓰지 않고 산업 구조를 바꾸는데 투자한 교토 정치인들의 자세가 놀랍다.)

300p

기타가키 지사가 펼친 두 정책의 성공과 실패 속에는 교토의 산업이 가진 안팎의 이면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것은 중공업을 키우지 못하는 교토의 민간 자본의 약소성과 항상 역사의 첨단을 달리는 교토 시민들의 진취성이다. 전자는 중세의 마치구미 이래 유지되어온 시민 생활의 균등성이 전후좌우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산업 면에서는 출중한 산업의 진출을 방해해 소위 도토리 키재기 식의 현상을 초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니시진 일대의 거대 포목상들도 그 자본을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교토를 떠나버렸던 것이다. 한편 후자는 천년의 왕도라는 자존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토 시민들에게는 도쿄에는 질 수 없다는 강한 자의식이 흐르고 있다. 대립 의식 같은 대등성조차 거부하는 그 정신은 때로는 중화 의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회의 동향에 무척 민감하고 역사의 진보에 뒤처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메이지 7년경 <도쿄신문>은 '도쿄 천도 후 이내 쇠퇴할 것이라는 서민들의 우려는 의외의 번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그야말로 위기에 직면한 교토 시민들의 자의식의 발로였다.

323p

보통 상인들의 세계에서 매사를 보는 관점은 대개 관념적이기보다는 경제적이고 형식보다는 실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주자학과 같은 관념적인 사상 체계가 관학으로서 자리를 굳히고 있는 한 마치의 학문이 성장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토 진사이가 고기학을 통해 학문적인 입장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사상의 속박을 벗어던진 많은 학문들이 자유롭게 성장하게 되었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조선에서 상업이 번성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주자학과 상업은 상극이다)

339p

지금까지 교토시가 국제 문화관광도시의 미명 아래 강력하게 추진해온 관광 지상주의에 대해서는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계절마다 열리는 교토의 다양한 종교적 행사를 하나같이 관광 자원으로만 소비하는 정책은 종종 논란이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신앙과 관광의 타협점은 오로지 문화의 존중이라는 점이었다. 문화관광도시를 자부하는 이상 문화가 관광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문화도시로서의 철저한 자각이 관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교토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공업도시화도 논의되어왔다. 하지만 그것도 근접지역을 합쳐 공업지대를 조성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세수를 늘리기 위한 타력본원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경주나 부여 같은 한국의 관광도시도 비슷할 것 같다. 단순히 관광만을 위한 도시가 아닌, 도시 자체의 정체성과 발전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오류>

282p

간에이 6년 도시히토 친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에이 18년 도시타다 천황에 의한 가쓰라 이궁의 제 2차 공사가 시작되었다.

-> 도시타다 천황이 아니라 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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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 지음, 정지인 옮김 / 원더박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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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얇은 문고판 정도의 분량에 비해 가격이 높게 책정된 것 같은데 편집 디자인이 산뜻하고 무엇보다 책 내용이 너무 좋다.

비평가가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만드는 생산자의 목소리로 듣는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 신선하고 역시 깊이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는 터너상을 수상하고 국가에서 훈장까지 받은 유명한 도예가라고 한다.

표지 디자인이 너무 가벼워 보여 뻔한 이야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오랜만에 예술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한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다.

저자는 대중에게 어려운 내용을 흥미롭게 전달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 듯하다.

다만 한국어 제목이 책의 매력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

고흐처럼 정식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예술계의 별로 우뚝 선다는 것은 그야말로 거의 불가능한 신화에 가깝고 예술가 역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고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성실한 직업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혁신적 사고나 시도를 모두 받아들여 이익을 내는 사업으로 바꿀 수 있는 상업주의 능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파격적인 시도도 결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파격적이지 않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는 시대에 과연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의 경계선, 기준은 무엇일까?

동료의 인정, 평단의 평가, 거물 수집가들의 취향 등이 모두 어우러져야 하지만 결국 예술가는 항상 진지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이 인상적이다.

아무리 상업주의에 휩쓸려 좋은 작품의 기준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도 예술가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핵심적인 방법은 바로 진지하게 작품에 임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이후 예술과 비예술의 기준 자체가 모호한 요즘 시대에 동시대 미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예술가의 정체성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숙고해 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26p

우리가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그것이 어떤 고유한 아름다움의 특질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서 그 무언가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데 익숙해진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아름다움은 익숙함,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각을 강화해 주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30p

자의식에 기초해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뿐 아니라 '예술이라 불리는 이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까지 성찰하는 것이다. 이러니 예술가의 역할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38p

어떻게 해서 어떤 예술이 다른 예술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지느냐? 대부분의 미술관과 갤러리의 회전교차로를 포함한 예술계의 주류에서 무엇이 예술의 질을 가르느냐? 그것을 이해하는 핵심은 '가치 입증'이다. 그리고 그 입증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 입증을 하는가. 누가 자신의 호의적인 의견과 돈과 주의와 시간을 투자하는가. 누가 특정 예술가와 예술 작품들에 가치를 부여하는가이다. 이 드라마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술가와 수집가, 스승, 딜러, 평론가, 큐레이터, 언론... 아, 그리고 어쩌면 대중들까지도.

 테이트 갤러리의 관장에 따르면 입증에는 네 단계가 있었다. 먼저 동료들의 입증이 있고, 다음에는 진지한 평론가들의 입증, 그다음에는 수집가와 딜러의 입증, 마지막으로 대중의 입증이다. 

 인정을 받는 것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며, 동료들이 가치를 입증해 주는 것은 정말 기분 좋은 영예다. 

 클레멘트 그린버그 같은 평론가가 한 예술가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하던 시절은 지났다.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이들에게서 호평을 받는 거야 좋은 일이고, 예술가들은 아주 한심한 글이라도 그들이 쓴 평을 글자 그대로 인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언론은 예술계의 다양한 목소리들 중 그저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수집가에 대해 얘기하자면, 예술가라면 언제나 거물급 수집가가 자기 작품을 사 주기를 원한다. 그게 자기 작품에 영예를 더해 주기 때문이다.

44p

오늘날 한 예술 작품에 붙일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아마도 '미술관에 걸릴 만한 수준'이라는 말일 것이다. 한때는 작품에 신임을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그 작품의 의뢰자들,그러니까 왕과 교화와, 그 뒤를 이어 귀족과 부자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입증자 계급 구조의 꼭대기에 있는 이는 아마도 큐레이터일 것이다. 독일의 예술 평론가인 빌리 본가르트가 "예술의 교황들"이라 불렀을 정도로 큐레이터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개인 컬렉션을 위해 작품을 수집하고 구매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이 직업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분야의 일을 개인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 강령의 제약을 받는다. 그런 일을 한다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주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46p

오늘날 공공 미술관에 자리 잡게 된 예술 작품은 대중의 투표로 그곳에 간 게 아니다. 그러기까지 그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사적인 감상과 판매와 아트 페어라는 일련의 비공식 심사를 거치면서 좋은 평가와 인정한다는 윙크를 받았다. 이런 식의 합의는 필수적이다. 예술계에는 완전히 새롭고 예리한 안목을 가졌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거나 라벨에 붙은 이름을 읽지 않고도 어떤 예술 작품에서 수준 높은 질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예술계에는 많지 않다

 물론 한 번 쌓인 명성이 계속 유지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성공한 예술가에 대해서는 결국 합의가 형성된다. 바라건대 여러 다른 맥락들에서도 계속해서 검증된 합의이기를, 그런데 그 합의의 본질은 뭘까? 여러 측면을 고려하고서 나는 그것을 '진지함'이라는 한마디로 결론 내렸다. 진지함이야말로 예술계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통화다. 

52p

1960년대 팝아트는 소비주의를 미술에 접목시킨 것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예술처럼 보였다. 오늘날에는 데이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등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 브랜드가 하나 생겨났는데 그 특징은 호사스러운 마무리, 이해하기 쉬운 형상, 터무니없는 가격이다. 이런 예술품들은 소비재가 맞다. 이런 예술가들은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소비주의를 한껏 포용하고 직원을 있는 대로 고용한다. 무라카미 다카시는 조수가 100명이 넘는다.

 비교적 소박한 재료로 소비재 상품을 모방했던 팝아트와 달리 제프 쿤스는 비싼 재료를 쓰고 대단히 공을 들인 마무리를 보여 준다. 고가의 사치품처럼 말이다. 나는 제프 쿤스의 '공기 주입식' 금속 조각품들을 마치 자동차를 평가하듯이 평가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한다.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벼락부자 수집가들은 예술품을 사는 것을 페라리나 핸드백을 사는 것과 비슷한 일로 여긴다. 은행들도 예술이 견고한 자산군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65p

물론 자기가 하는 활동이 예술로 불리기를 원하는 매우 강력한 이유 중에는 경제적인 것도 있다. 미술 시장에는 엄청난 거액이 출렁대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이라고 부를 꽤 멋진 동기다.

77p

무언가를 예술이라는 틀에 집어넣는 것은 어떤 곤란한 상황에서든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통행권을 얻는 일이자 일종의 선점이고, 다시는 기량 부족에 대해 비난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 일이 되었다.

 '예술 프로젝트'라는 게 이제는 쓸모없고 서투른 아마추어 활동을 가리키는 상투어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알다시피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그리 잘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고, 히트곡을 낼 만큼 딱히 작곡 실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아트 밴드를 만든다.

113p

예술은 여전히 창의력의 각축장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혁명과 반란과 대격변이 예술을 정의하는 개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100년 전에 예술은 혁명이라는 개념과 거의 동의어였다. 현대 미술 전시회에 간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불쾌함을 느꼈으며 그림을 "야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개념으로부터 1세기나 지난 시점에 있다. "이제 아방가르드는 특정 시대에 속한 양식이 되었다."

124p

1950년대에 '해프닝'이라는 행위예술 개념을 정립했고, 당대의 진정한 최첨단 인물이라기에 손색이 없던 앨런 캐프로는 예술가들이 원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이라고 단정했다. 당시 온수도 안 나오는 소호의 다락방에 살던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꽤나 짜증나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는 예술가라는 직업이 다른 전문직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편 예술계에서 전복적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예술계는 정통을 꽤나 중시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예술가가 한 가장 반항적인 행위가 있다면 트레이시 에민이 보수당을 지지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창의적인 반항아들은 흔히 자신이 권력자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창의적이고 독창적으로 살아감으로써 자신들이 실은 자본주의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아이디어야말로 자본주의의 생명줄이니까. 동시대 미술은 자본주의를 위한 연구개발 부서와 같다. 칼 마르크스는 진보 혹은 참신함에 대한 이 욕구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본성"이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욕구를 인정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고 상품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해주므로 자본주의는 억압적인 사회주의와 달리 21세기를 지배하고 있는 게 아닐까?)

147p

두꺼비처럼 예술계 전체에 올라타 버티고 있는 거대하고 지배적인 것 하나는 두말할 것 없이 상업주의다. 상업주의는 현재 진행 중인 매우 막강한 예술운동이다. 

 나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저 전 세계의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재료들을 가지고 다양한 수준으로 실험하는 다양한 현장들이 있을 뿐이다. 그 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대부분이 쓰레기지만 그건 언제나 그래 왔다. 그래도 그중 일부는 정말로 경이롭다.

164p

물론 아웃사이더 예술가라는 정말 멋진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술 대학에 가지 않아도 예술가가 될 수는 있지만, 대학에 가지 않는다면 예술가로서 직업적 경력을 쌓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도 무척 어렵다

 이제는, 특히 서구에서는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천재란 진기한 옛이야기에나 나오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직 전개 중인 동시대 예술의 분야들에는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비서구권의 천재들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 서구에서는, 예술 학교에 다녀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탁월한 동시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조금은 이상하고 순진한 생각이다.

169p

예술 대학의 관대하고 수용적인 품 안에 들어가는 것은 가족이나 사회와 잘 어울리지 못한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심오한 경험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차이와 상상력을 인정받고 허락받는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은 당대의 예술과 예술가임이 의미하는 바를 아주 미묘한 방식으로 온몸으로 이해하게 된다.

 테크닉을 배우는 것 또한 큰 기쁨이다. 일단 어떤 테크닉을 배우면 그때부터는 그 테크닉 안에서 사고하기 시작한다. 나는 새로운 테크닉을 익힐 때마다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 확장되었다. 기술들을 배우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어떤 기술을 다루는 실력이 향상될수록 자신감이 더 커지고 더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나는 느긋하되 능숙하게 무언가를 하는 상태를 좋아한다. 어떤 영역에 들어가 몰두해서 1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정말로 능수능란해지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기술들일 수도 있지만, 주차장에서 벌어진 시비를 중재하는 기술이나 트위터를 통해 사람을 모으는 기술이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끝나면 학생들은 자신이 독특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기를 고대하며 학교를 나온다. 그러나 옛말에도 있듯이, 독창성이란 잘 까먹는 사람들의 것이다!

 물론 독창성은 분명 존재하며, 독창성을 대면할 때 느끼는 충격적 즐거움은 예술에 관심있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 중 하나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예술가도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까지 꽤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예술에서 경력쌓기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니까.

175p

내가 만나 본 성공한 예술가들은 대부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잡힌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 약속을 정확히 지키고 많은 시간을 일에 쏟아붓는다. 예술가란 모두 조금은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신화일 뿐이다. 예술가들은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하는 건 예술가인 것이 아니라 예술을 만드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이 떠오른다. "옛날에 그들은 지혜를 사랑했다. 오늘날 그들은 '철학자'라는 칭호를 사랑한다."

176p

마르셀 뒤샹은 말했다."내가 10년 동안 10만 개의 레디메이드를 손쉽게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그건 모두 거짓된 것이었을 터이다. 과잉 생산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평범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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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들이 말해주는 그림 속 드레스 이야기
이정아 지음 / 제이앤제이제이 / 2018년 12월
평점 :
품절


생각보다 알찬 내용의 책이었다.

이 출판사의 다른 책들은 도판의 질이 떨어져 실망했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은 도판이 정말 훌륭하다.

출판사에서 도판에 신경을 아주 많이 쓴 것 같다.

미술사적으로는 덜 알려진 그림들을 많이 소개해 주고 도판 또한 매우 선명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저자가 전공자가 아니라서 가벼운 가쉽거리 수준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서양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의상과 당시 시대상에 대한 많은 정보를 준 성실한 저작이라 만족스럽다.

아름답게 치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채색 물감이 발달했던 곳이라 당시 시대상을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여준다.



<인상 깊은 구절>

9p

이러한 분위기는 과거 일부 상류층에 국한된 미술품의 주요 소비 계층이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촉진됐다. 부르주아의 취향은 일상과 현실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평소에 입고 있는 옷과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공간, 아웃과의 만남, 거리의 풍경 등 현실이 그림에 담기길 바랐다. 소비계층과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더 많은 현실의 패션이 그림에 담기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를 생물학적 본능이라 정의하며 인간의 본질을 호모 에스테티쿠스로 보았다. 미학적 인간이라는 뜻이다. 인간을 미학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을 넘어 아름다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재현하기 때문이다. 그림과 패션이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즉각적이고 실존적인 행위라는 말은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특성을 바탕으로 한다.

35p

의복의 예의범절은 당연하게도 많은 지출과 시간, 노력을 필요로 했지만 그만큼 여유 있고 한가하다는 반증이었다. 꼼꼼한 몸단장과 이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느덧 품위와 에티켓으로 굳어졌다.

72p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들의 모든 행동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다고 했다. 성적 충동과 위대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이 그것이다. 

90p

제인 오스틴조차 여자 조카에게 보낸 편지에 "무서운 일이지만 독신 여성은 가난해지기 십상이다. 이것은 결혼을 선호하는 강렬한 이유가 된다."고 썼을 정도다.

160p

파리와 런던에 불어 닥친 자포니즘 열풍은 17~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시누아즈리 열풍을 능가한 것이었다. 시누아즈리가 어마어마한 가격을 자랑하며 상류층 문화로만 소비된 반면 자포니즘은 부르주아 계층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일상 속으로 퍼져나갔다. 

195p

플래퍼는 흔히 20세기 초 미국의 흥분과 쾌락을 대변하는 이미지로 간주된다. 실제로 그들은 물신주의와 소비주의에 빠져 있었고 매사에 진지하지 못했으며 정신 없이 놀고 별로 이룬 것도 없다. 그러나 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지 못한가에 대한 사회적 자국을 요구하며 전통적인 성역할에 반기를 들었다. 

201p

1929년 경제대공황이 시작되자 플래퍼, 가르손느, 게르다로 이어진 광란과 전위의 패션은 조용히 막을 내렸다. 여성들은 검정, 회색 같은 어둡고 재미없는 색상의 튼튼한 옷을 입고 공장에 나갔다. 이러한 내핍 시대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214p

100년 동안 이어진 혁명으로 의복의 계급은 완전히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계급에 따라 옷을 입도록 강요받지 않았고 마침내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가 동시에 찾아왔다. 새로운 권력자가 된 이들은 몰락한 귀족이나 노동자 계급과 구별하는 새로운 옷차림을 원했다. 남성 부르주아지가 양심껏 도덕성을 강조한 검은색 슈트를 선택하고 신사가 되었을 때 여성 부르주아지는 귀족에 대한 선망을 대놓고 드러내며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을 압도할 우아한 옷과 사치품은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232p

혁명기를 거치며 사회의 주역으로 자리잡은 부르주아 남성들은 화려한 의복과 사치를 타락한 귀족 문화의 일종으로 여기고 경멸했다. 건강한 정신을 가진 신사라면 멋을 부리거나 물건을 고르고 흥정을 하는 하찮은 일 대신 사회적, 정치적 발전 같은 공공 영역에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전반에 팽배했다. 절제, 근면, 성실은 부르주아 남성의 덕목으로 존경받았지만 과시적 소비는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다. 구시대적 유물 같은 몇몇 귀족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류층 남성들은 절제된 검은색 양복을 유니폼으로 선택했다. '남성의 위대한 포기'의 시대였다.

 남성들의 억눌린 소비 욕망은 여성들을 통해 배출되었다. 남성들은 자신의 아내를 통해 경제적 능력과 사회적 성공을 드러내고자 했고 여성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남성보다 감성적이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진 여성들의 사치는 사회의 너그러운 이해를 받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일종의 의무가 됐다. 여성들은 사회에서 배제된 채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남성들이 포기한 레이스와 보석으로 치장하며 자의반 타의반 남성의 트로피가 됐다. 가부장적 사회는 여성들의 경제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오직 소비하고 순종하는 현모양처의 삶을 강요했다.

235p

그의 주장대로 당시 여성의 사치는 남편이 특별하고 부유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로만 이해됐는데 따라서 미혼과 미망인 상태에서 사치는 허용되지 않았다. 허용된 사치는 남성의 후원과 보호 속에서 꾸준히 육성됐다.

256p

이런 분위기에서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에 오른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성공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과거 귀족들의 과시적 욕구, 구별의 욕구와 같은 맥락이다. 이들 마음에는 근면, 절약, 경건을 기본으로 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위엄, 기품, 엄격 같은 귀족적 덕목을 선망하는 부르주아의 욕구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들에게는 우아하게 격식을 차리면서 종교적 경건의 윤리에 위배되지 않으며 나와 같은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줄 새로운 패션이 필요했다. 그들의 선택은 중세 귀족들이 썼던 검은 모자였다.


<오류>

15p

도판 -브레아 미술관, 이탈리아 밀라노

-> Pinacoteca di Brera, 즉 브레라 미술관이다.

17p

신성로마제국의 궁정 화가 야콥 자이제네거가 그린 훗날 페르디난드 2세가 되는 15세 소년의 모습에 코드피스가 선명하다.

-> 도판의 주인공은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드 1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의 대공 페르디난드 2세이다.

본문 설명만으로는 황제 페르디난드 2세를 가리키는 것 같아 오해의 소지가 있다.

69p

도판 - 폴 제사르 엘뤼, 마틸드 씨의 초상 1530

-> 1530년이 아니라 1910년 작품이다.

131p

도판 - 겔빈그로브 미술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Kelvingrove Art Gallery , 즉 캘빈그로브 미술관이다.

150p

루이 14세는 '자기의 트리아농'을 만들었고 그의 아들 루이 15세는 파리 근교 샹티이 성에 중국식 운하를 만들었다.

->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아들이 아니라 증손자이다.

190p

오귀스트 르누아르 (1841-1917)는 변모하는 근대의 삶과~

-> 르누아르의 생몰연도는 1841-1919년이다.

253p

도판 - 랭부르 형제,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1404-1409,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국 뉴욕

-> 랭부르 형제는 두 편의 그림을 남기는데 한 편은 "Tres Riches Heures de duc de Berry (1415~1416), 즉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이고 프랑스 샹티이 성의 콩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한 편이 바로 도판이 실린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즉 "베리 공작의 아름다운 시도서"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분관인 클로이스터즈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의 제작 연도는 1405-1408/1409 이다.

한글 제목이 잘못 번역되어 있다. 

274p

도판- 랭부르 형제,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 "The Belles Heures of Jean de France, duc de Berry" 1412-1416,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미국 뉴욕

-> 이 도판은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시도서"가 맞는데 불어 제목이 틀렸다. 위의 제목은 앞의 도판에 나와 있는 "베리공의 매우 아름다운 시도서"이다. 또 이 작품은 메트로폴리탄이 아니라 프랑스 샹티이 성의 콩데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베리공의 시도서는 두 권이 있고 각기 다른 곳에 소장되어 있는데 저자가 착각한 것 같다.

277p

메리 스튜어트는 결혼 한 달만에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친척 언니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청하게 위해 잉글랜드로 찾아가지만

->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스튜어트의 언니가 아니라 당고모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아버지인 헨리 8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할머니인 마거릿 튜더가 남매였다.

322p

도판 - 클로드 모네,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쿤스트할레, 독일 베를린

-> 모네의 이 그림은 베를린이 아니라 브레멘의 쿤스트할레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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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재미난 이야기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역사책 재미난 이야기 역사책
정기문 지음 / 책과함께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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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도 재밌게 읽었는데 2권도 아주 재밌다.

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에 책 판형도 작아서 침대에 누워 소설책 읽듯 금방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다.

역사에 대한 별다른 지식도 없이 그저 야사 위주의 가벼운 에피소드들만 양산하는 어설픈 책들 말고, 역사학자들이 대중을 위해 이렇게 흥미로우면서도 수준있는 책들을 많이 써 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의 스승이었다는 페리클레스의 아내 아스파시아나 네로를 위한 변명,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황후였던 테오도라 편은 좀 심심했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아주 재밌었다.

콜럼버스가 단지 신앙과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 신세계로 떠난 것은 아니지만, 또 그가 노예무역과 황금 약탈 등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반인륜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해도, 그가 궁극적으로는 중세인이었고 마법적 사고가 여전히 지배하던 시대에 신념을 가지고 바다로 나간 점을 공정하게 평가한 저자의 시각에 깊이 공감한다.

한 개인이 시대를 거슬러 보편적인 찬사를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당시 여자들처럼 결혼에 얽매이지 않고 대서양 무역이라는 새로운 길을 뚫은 덕분에 대영제국의 영화가 시작되었던 것을 보고 한국의 지도자에 대해 생각해 봤다.

해방 이후 이승만이 사회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의 길을 선택했고 뒤를 이어 박정희가 단순히 군사 독재자에 머물지 않고 수출 위주의 자본주의 정책을 도입해 오늘날 한국을 만들었다.

이제 21세기의 한국을 선진국으로 이끌 지도자가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적어도 지금 청와대에 앉아서 적폐 타령하고 있는 현 대통령 세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맨 마지막 로베스피에르 부분이 가장 흥미로웠다.

막연히 공포정치가로만 생각했었는데 그의 일생을 통해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프랑스 혁명사에 대해 기본적인 개념을 알게 됐다.

구체제의 전복이라는 엄청난 일을 해낸 당시 프랑스 지도자들을 오늘날의 시선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공정한 평가에 깊이 공감했다.

혁명은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무수한 조상들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인류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정말 의미있는 독서였다.



<인상깊은 구절>

55p

이렇게 기원전 10세기 예루살렘이 작은 도시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원 지대의 산간 마을에 점처럼 흩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다윗의 거대한 왕국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다윗은 예루살렘이라는 작은 도시에 근거지를 둔 부족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100p

철학가 세네카는 부와 돈을 경멸하면서, 재산은 사람을 돈의 노예로 만들고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정작 자신은 돈을 모으기 위해 가혹안 고리대금을 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세게카가 위선자라고 해서 죽여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네로도 그런 이유로 스승을 죽이지는 않았다.

109p

푸주간에 걸린 짐승들의 사체를 보고 섬뜩함을 느끼는 현대인들이 로마의 도살 의식에 참가했다면 어떤 느낌을 받을까.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동물들의 피비린내가 역겨워 구토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동물들이 전차에 묶여 끌려다니다가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117p

동양의 황제들이 임금도 주지 않고 요역을 통해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인 반면, 로마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구성된 국가여서 시민들을 강제로 데려다가 노역을 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민들은 네로가 대규모 공사를 발표할 때마다 크게 환영했다.

143p

만약 평민들이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상실했다면, 굳이 '빵과 서커스'를 주어 달랠 필요가 있겠는가? ...  이렇게 먹여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로마 시민이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자유로운 시민이었고, 로마의 권력이 자신들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191p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처럼 떠받들었기에 그가 제시한 지구 구형설을 대개 알고 있었다. 이슬람 학자들도 일찍부터 지구 구형설을 믿고 있었다. 따라서 12세기 이후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대부분 지구 구형설을 믿었음에 틀림없다.

 14세기 이후에는 두 가지 사건이 지구 구형설을 보편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나는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탐험을 비롯한 탐험의 증대였고 다른 하나는 프톨레마이오스 저작의 복원이었다.

197p

콜럼버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성경 지식에 매우 밝았다. 성경을 읽으면서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항해가 가능하다는 암시들을 찾아냈고 그 암시들을 확대해석했다. 종말이 가깝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콜럼버스는 종말이 오기 전에 기독교를 널리 전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위원회 위원들은 콜럼버스가 성경을 너무나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과대망상에 빠져 있음을 간파하고, 그의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합리적으로 판결했던 것이다.

 콜럼버스는 단지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거리를 두고 당대 학자들, 성직자들과 싸웠을 뿐이다. 콜럼버스가 아니라 당대 학자들과 성직자들이 옳았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완벽한 논리와 증거를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왕과 귀족들의 모험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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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콜럼버스는 중세적 인물이었다. 그는 합리성과 과학성으로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의 시대에 새롭게 발달하고 있던 지식은 아직 중세적 세계관을 깨뜨리기에는 미약했다. 나름 합리성을 추구한 지식인들도 여전히 중세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콜럼버스에게서도 이런 측면이 강하게 관찰된다. 그는 중세에 만연했던 전설, 신화, 주술을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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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여러 차례 목숨을 건 모험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도 종말론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중세적 세계관에서는 종교와 미신이 자연 현상과 인간사를 설명하는 기준이었다. 그 시대에는 자연 현상이 그 자체로 이해되지 않고, 신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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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은 우주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의 고유한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운동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제 별들의 세상에 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가 오거나 안 오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일 뿐이다. 구름도, 별도 하나의 물체일 뿐이다. 그것들이 움직이고 작동하는 것은 고유한 법칙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서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신에게 기도할 게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그 운동 법칙을 알아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이성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사람들은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력을 키우게 되었다.

 콜럼버스에게서 발견되는 '이중성'은 바로 이런 시대 상황에 기인한다. 그는 여전히 종교, 즉 기독교를 모든 지식과 판단, 행동의 기준으로 생각했고, 중세에 만연했던 미신과 주술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새 세상을 열망했고, 새로운 시도에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세상은 그처럼 열정적인 사람에 의해 변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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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내내 교황과 군주는 싸우다가 화해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신학적인 문제는 의원들의 관심이 아니었고, 현실 정치에서 누구의 세력이 우세하게 돌아가는지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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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아들들이 후계자로 부상된 적은 거의 없었다. 유럽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난 아이를 사생아로 규정하고, 그에게 어떤 법적 지위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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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외국 사람과 결혼하든, 국내 유력자와 결혼하든 통치권을 남편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권력욕이 대단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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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대항해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선진적인 농업 기술, 특히 관개 기술을 받아들여 농업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목축업도 발달하여 좋은 질의 양모가 생산되었다. 이렇게 국력이 강해지고 생산이 늘어나자 상업이 발달했다. 두 나라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베네치아 사람들과 경쟁했고, 북쪽으로 진출하여 대서양 무역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서양 시대의 주역이 되지는 못했다. 새로운 항로를 발견했지만 그들은 지중해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에스파냐 자본가와 상인들이 대서양에 눈을 돌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지중해에 투자했다. 그들에게 지중해는 아직 포기할 수 없는 바다였다.

 에스파냐는 지중해에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대서양과 지중해 양 지역을 모두 장악하기 위해 힘을 분산시켰다. 그렇지만 서서히 세계의 중심은 대서양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6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은 지중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피하느라 대서양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영국에게 커다란 축복이었다.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 될 대서양이라는 발판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엘리자베스는 운이 좋았다. 남동생 에드워드와 언니 메리가 빨리 죽은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고, 메리가 워낙 통치를 엉망으로 한 뒤라 조금만 정치를 잘해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업적을 가능케 한 것은 각고의 노력과 야심 찬 비전이었다. 바다로 진출해 국부를 키운 에스파냐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영국도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는 비전을 가졌다. 그 일환으로 해적 드레이크를 후원하고 북아메리카를 개척했다. 엘리자베스가 기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영국은 대서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지도자의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21세기 한국에 과연 이런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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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최고 가문 자제들이 입학했던 이 학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가장 가난했지만 공부를 가장 잘했고 생활에서도 가장 반듯한 모범생이었다. 학창 시절에 그는 이미 성직자처럼 경건하고 살았고, 동료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을 경멸하고 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로베스피에르는 그들과 어울리려 해도 어울릴 수 없었다. 대다수 학생들이 귀족의 자제로 부유했던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베스피에르는 몹시 이지적이어서 말 붙이기도 쉽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일단 맡으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낼 사람, 아무리 강한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고 대의를 지킬 사람, 개인의 이익을 추호도 구하지 않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를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절대 부패하지 않을 청렴지사'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274p

프랑스 농민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8세기에 프랑스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인구 증가에서 나타나는데, 1700년경 2천만 명이었던 인구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28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프랑스의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농업 혁명이 일어나 농업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고, 대서양 무역이 발전하면서 상공업이 성장한 덕분이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농민의 상황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좋았다. ... 프랑스 농민들은 이런 '봉건적 강제 규정'으로부터 거의 모두 해방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농민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자유로운 농민이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중세 농노에게 부과되었던 인신적 구속은 거의 사라졌지만, 농노가 져야 했던 경제적 부담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농민에게 가장 무거운 부담은 지대였다. 

278p

이렇게 왕실의 낭비가 지속되는 가운데 프랑스의 국고를 결정적으로 파탄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 쟁에 참전한 것이다. 여기에 쏟아부은 돈이 무려 20억 리브르였다. 4년치 수입을 한꺼번에 쏟아부은 것이다.

 재무 대신들은 세금 징수액을 늘리고 부채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근본적인 제도 개혁 없이 세금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재무 대신 칼론이 성직자와 귀족의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칼론의 제안을 거부하고 제1,2 신분은 납세할 의무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후 귀족들은 왕의 명령에 공공연히 항의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려면 삼부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루이 16세는 할 수 없이 1788년 8월 8일 삼부회의 소집을 결정했다.

286p

혁명 초기에는 왕을 처형하거나 공화제를 실시하자는 주장은 없었다. 기묘하게도 혁명 초기에 왕권은 오히려 강해진 측면이 있었다. 혁명 전 왕권을 견제하던 귀족 세력이 거의 완전히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에 반대하는 견해를 공공연히 표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들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 혁명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다. 

295

국민공회가 30만 징집령을 내리자 여러 지역의 농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중세 이래 유럽 농민은 군대에 가지 않았다. 프랑스가 세워진 이래 무기를 들고 싸운 자들은 오직 귀족뿐이었다. 농민에게 입대는 낯설었고, 더욱이 농사철에 토지를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농사철에 농사짓지 않는 것은 곧 굶어 죽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많은 농민들이 혁명의 대의에 찬성하면서도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297p

흔히 혁명은 기존 체제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이 단어는 긍정적인 희망의 색채를 띠고 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강렬한 폭력의 냄새 안고 있다. 기존 체제를 뒤엎으려면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저항할 것이다. 그동안 누리던 특권, 재산, 심지어 생명과 자유를 빼앗기는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을 지배층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그들은 많은 군대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제거하려면 폭력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도 끊임없는 폭력의 연속이었다. ...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한 후 시민군이 끔찍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시민군의 학살은 혁명에 동조하는 인사들마저도 치를 떨게 할 정도였다.

300p

당통이 대담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연설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파리 시민들은 정말 대담해졌다. 그들은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내부의 적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면서 낫과 몽둥이를 들고 감옥으로 향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죄수들을 끌어내어 잔인하게 죽였다. 당시 당통은 법무장관으로서 치안을 유지할 책임이 있었지만, 민중을 선동했을 뿐 아니라 민중이 학살하는 동안 전혀 말리지 않았다. 

302p

혁명재판소는 이른바 '자유의 독재'를 행하는 주요 기구가 되었다. 혁명 세력의 중추인 국민공회가 판사와 배심원 임명권, 그리고 기소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판사와 배심원이 혁명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결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한국의 이른바 민주 세력들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독재가 같은 맥락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려는 공수처라는 것도 적폐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자유의 독재를 실행하기 위한 기구가 아닐까?)

 당통이 주도한 국민공회는 혁명재판소 설치에 이어 '자유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조치를 취했다. '혁명감시위원회'는 혁명에 반대하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조처를 취했다.

312p

흔히 학살의 주도자가 일본군이었다고 말하지만, 고종을 중심으로 한 조선 관료들은 수십 차례 이상 대책회의를 했고 고종은 여러 차례 토벌군을 보내 동학 잔존 세력을 토벌하게 했다. 따라서 당시 최고 주권자였던 고종이 농민 20만 명을 학살한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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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와 이탈리아 전선, 그리고 지중해 해상에서도 프랑스군은 우위를 확보했다. 반혁명의 위협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치명적 오류가 있었다. 그는 혁명을 완수하려면 더 단호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지속되고 있는 반혁명 음모를 격파하고, 내부에서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분파 운동을 제어해야 하는데, 공포정치를 그만둔다는 것은 시기상조였다. 그러나 외부의 위협이 급격히 약화되자, 공안위원회 의원들조차도 공포정치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국민공회 의원들 다수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되자, 로베스피에르의 반대파는 국민공회를 움직여 그와 그의 일당을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공포정치가 끝나고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측근들이 처형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다시 온건한 길을 가게 되었다.

323p

다윗 이야기의 저자를 셰익스피어에 비유했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를 소재로 다양한 사극을 만들었듯이, 성경의 저자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소설처럼 각색한 게 성경이라는 의미다.

337p

프랑스 서부의 주민들이 혁명정부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들이 혁명정부에 맞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국민공회의 30만 징집령이었다. 주요 원인으로 이 지역이 산업화가 더뎌 농촌 문화가 강고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구체제의 모순을 강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자유와 평등의 모토 아래 억압과 모순을 철폐하자는 혁명에 적극 동의했지만, 파리의 혁명 세력과 갈라서게 되었다. 이 지역의 농민들은 가톨릭 신앙이 매우 두터웠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가톨릭 신부와 교회를 통제하려 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선서하지 않은 성직자들이 옳다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주민들은 이들을 적극 지지하면서 혁명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792년 8월에는 수백 명이 이들을 지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모두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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