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백제사의 제문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총서 82
동북아역사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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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려워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비교적 평이하게,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다.

사료 인용 부분만 한자 때문에 다소 어려웠고 그 외 저자들의 설명은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하게 기술한다.


중국 동북공정이 백제까지 미치는 줄은 몰랐다.

만주에 위치했던 고구려 뿐 아니라, 부여에서 출자했다고 믿어지는 백제까지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황당하다.

부여가 만주에 있었고 전연에 의해 망한 후 옥저로 옮겨갔다가 낙랑이 고구려에 의해 사라지는 틈을 타 옛 대방고지에 세운 나라가 백제이므로 곧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삼국통일 때 백제를 당나라가 멸망시키고 웅진도독부를 설치했으며 그 유민들을 대거 중국으로 사민시켰던 점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중국 자료는 일본서기를 신뢰하는 바람에,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 같아 놀랬다.

백제가 문화를 전파하고 대신 왜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았다는 정도는 이해되는데, 왜의 부용국이었다고까지 주장하는 게 황당하다.

당이 백제를 멸망시켜 한반도에서 이익이 줄어들자 백촌강 전투를 일으켰고 거기서 패하자 비로소 당에 굴복해 견당사를 보냈다고 한다.

백촌강 전투라고 하면 우리는 부모의 나라인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일본이 온 국력을 다해 구하기 위해 달려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백제 왕실이 과연 부여에서 출자했는가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기로는, 백제는 주몽의 왕자인데, 유리가 부여에서 건너오자 어머니 소서노 부족과 함께 남하하여 세운 나라이고, 고구려 역시 부여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결국 백제와 고구려 모두 부여 왕실에서 기원했다.

백제는 성씨마저 부여씨를 쓰고 성왕 때 남부여로 국호를 바꾸기까지 했다.

그런데 고고학적 자료로는 4세기 이전에 한성 백제에서 국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뿐더러 부여계 유물은 더더군다나 없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재지계, 즉 마한계 유물만 발견되어 남조 역사서에 실린대로, 마한 54개국 중 백제국이 성장하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본다.

신라 왕실 역시 흉노 기마민족설이 부정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백제도 실제로는 북쪽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토착 세력이 성장하여 이룬 국가인지, 매우 흥미로운 문제다.

그렇다면 왜 백제는 부여 출자설을 대외적으로 선전했을까?

저자는 고구려와 경쟁하는 상황에서 대등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이 부분이 납득이 좀 안 됐다.

단지 고구려와 똑같은 위치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한 집안이었다고 선전했을까?

뭔가 관련이 있으니 그런 주장을 폈을 것 같다.


요서 경략설도 부여와 관련이 있다.

전연의 공격으로 부여가 망한 후 그 유민을 요서 지방에 사민시켰는데, 백제인들은 남조와 교류하기 위해 연안항로를 이용하면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실제로 요서를 지배하지 않았던 중국 남조에서 백제 요서 경략설을 유포시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른 책에서도 읽었던 것 같다.

간단히 말해 무역 등 문화경제적으로 요서와 관련있는 백제를, 실효지배 하지 않았던 남조에서 제대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혹은 북조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가 요서를 경략했다고 사서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어떤 저자는, 부여 유민이 일으킨 반란을 백제가 일으킨 것으로 오해했다고도 한다.

이런 것을 봐도 확실히 백제와 부여는 관련이 있긴 한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5p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나 전연에 백제가 공파되었다는 기록은 백제가 북방에 있었다는 중국 사료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난제에 속한다. 이들 사료의 자료적 성격을 짚어 기재 내용 그대로 이해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전연에 의해 요서로 강제 사민된 부여계 이주민의 존재가 이들 사료의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49p

1980년대에 서울 잠실 부근에서 몽촌토성과 석촌동고분을 비롯한 백제 왕도 관련 유적들이 대거 발굴, 조사되기 시작하면서 유적의 편년과 <삼국사기> 기록의 불일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각종 고고자료의 편년은 <삼국지> 기록과 더 잘 어울렸다

68p

백제가 "부여의 별종"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문헌자료에서는 부여와 백제의 계승관계가 각별하다. 그런데 고고자료는 그렇지 않다부여의 물질문화 특징에 대한 조사, 연구가 아직 미진하긴 하지만, 무덤 양식과 출토 유물 등 지금까지 알려진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부여와 백제 사이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고구려와 백제, 마한과 백제, 그리고 심지어 한군현과 백제 사이의 문화적 영향관계가 더 잘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백제의 부여 계승의식을 4~5세기경의 국제 정세가 반영된 관념상의 문제로만 보려는 견해도 있다. 한강 유역의 적석총에 묻힌 사람들, 곧 압록강 유역에서 살다가 남하하여 백제의 지배계층으로 부상한 세력이 4세기 이후에 그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와 격렬한 군사 경쟁을 벌이게 되면서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대등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원류인 부여를 더 중시하고 그것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한강 유역에서 적석총에 앞선 시기의 지배층 묘제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는 현상에 기초하고 있다.

 한강 유역과 그 인근 지역, 곧 석촌동 고분군을 비롯해 김포 운양동, 충북 오송 등지에서 부여 또는 부여계 집단과의 문화적 교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므로, 앞으로의 조사 결과를 조금 더 살펴보아야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 확인한 한성 지역의 백제 지배층 무덤이 대략 4세기대 이후의 것이라면, 또 아직 석촌동 일대의 움무덤에 관한 조사, 연구가 턱없이 미흡하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앞으로 부여 계통 물질자료가 더 늘어날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다.

80p

4세기 초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자 다수의 유민이 백제에 귀화하였을 것이고,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할 정도로 북진을 거듭한 근초고왕 재위 무렵에는 더 많은 낙랑, 대방 사람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근초고왕대의 박사 고흥은 아마도 그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근초고왕이 동진에서 받은 '낙랑태수'호는 황해도 일대에 살고 있던 낙랑계 주민을 회유하는 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옛 낙랑, 대방의 주민 중에는 여전히 중국의 정통 왕조인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백제는 고구려, 신라에 비해 제도와 문화 면에서 중국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에는 낙랑계 유민의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백제의 중국계 귀화인이 모두 낙랑계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한성도읍기에는 중국계 귀화인의 절대 다수가 낙랑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87p

고고자료에 대한 자연과학적 분석은 문헌자료의 편년 시비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데 아직은 기존 역사학의 연구 성과를 지나치게 의식하여 고고자료 자체의 과학적 요소를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고 일시적 또는 인상적 논증자료로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자못 아쉽다.

104p

전연 모용씨의 압박에 못 이긴 부여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동하여 마한 땅을 점령함으로써 백제를 건국하였고, 그 시기는 모용씨가 제국을 선포한 352년부터 백제와 동진의 교류가 시작된 372년 사이라고 추정하였다. 

109p

백제는 372년부터 373년에 연이어 동진과 통교를 하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당시 중국으로 이르는 길이 연안항로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간 기착지로서 부여 왕 현이 사민된 요서 지역 부근만큼 적당한 지점이 없었을 것이다. 중국 왕조가 안정이 되어 공식적인 교류가 허용되는 경우에는 항해가 어렵지 않겠지만, 혼란기에는 남조와 통교를 하려면 백제가 스스로 중간 기점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에 이러한 중간 거점이 없었다면 남천한 동진과 통교하는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으 앞의 사료는 부여인들이 사민된 요서 지역에서 활발하게 교류한 백제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된다. 백제와 부여의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백제의 침략을 받았다는 사실은 찬자 인식의 오류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110p

백제는 쇠약해진 부여 및 부여의 이주민들과 통교를 하면서 요서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전연의 수도에까지 이르렀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앞의 사료는 백제인들이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전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교류는 문제를 삼을 만한 사안이 아니며 경제적으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를 묵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인구가 급격히 팽창되자 전연 내부에서 식량 부족과 폭동의 가능성 등에 대해 나름대로의 방책이 제시되었을 것이다. 

113p

이와 같이 부여계 인물이 이 지역에서 활약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부여계의 세력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처럼 광개토왕 연간에 고구려 일파인 고운이 북연의 왕으로 추대된 점을 참조하면, 현재의 민족적 개념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세력을 얼마나 굳건히 유지하느냐 여부가 정치력의 관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117p

오히려 백제에서는 부여 출자의식뿐만 아니라 고구려 출자의식도 상존하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를 의식한 부여씨 사용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감안하면 근초고왕 때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고구려와 다투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그 시점부터 출자를 부여로 천명한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백제가 부여에서 유래하였지만 부여씨의 사용과는 별개로, 정치적 목적상 그 출자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고구려의 정벌을 요청한 개로왕 때 부여 출자설을 강조한 것은, 부여 출자설을 통해 부여의 정통 계승자임을 강조하여 고구려와 분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성왕 때 사비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칭하는 것도 그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근초고왕 때 부여 성을 사용한 것은 부여 출자설의 시작이며, 이는 고구려와 경쟁하고자 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인다.

118p

여울 등이 부여라는 족성을 사용한 것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행동이며 이는 당시 보편적 선진문화였던 한화의 표현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백제 왕의 부여 성씨 사용은 부여와의 친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요서 지역에서 활동 중인 부여계 이주민들과 같은 종족이라는 의식을 형성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23p

낙랑이 313년에 장통의 인솔로 대릉하 방면으로 옮긴 것도 주목된다. 이는 백제가 받은 낙랑태수 직과 요서 지역으로 옮긴 낙랑이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라 낙랑태수호를 고구려에 대한 억지력과 낙랑 유민에 대한 친화력의 근간으로 이용하려는 백제의 움직임이 남조 사가들에게 낙랑 교군에 대한 영유권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통해 백제의 요서 경략설이 등장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127p

이러한 배경으로는 남북조의 대치 상황에서 북중국의 땅은 남조의 영역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실제와 상관없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남조의 입장에서 요서 지역의 영유권 주장에 대한 인정은 북조와 백제의 대립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상황이다. 백제의 입장에서도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일정 정도 시대에 맞게 재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가 고구려를 의식하여 요서 경략을 주장하는 것은, 남북조 대치 상황에서 남조와 비슷한 상황으로 이해되어 남조 국가의 공감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이를 의식하여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치 상황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점이 사가들에게 강하게 인식되어 고구려의 요동 경략과 대구하여 백제의 요서 경략이 인정되었다고 보인다.

 백제가 요서 지역에 이른 것은 서진의 패망과 낙랑, 대방군의 퇴각 이후 중국과 교류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낙랑, 대방 문화를 접한 백제는 이들의 발달한 선진 문물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흡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본거지인 중국에까지 이르러 직접 수용하고자 노력하였다. 고구려 또한 요동 지역으로의 진출과 낙랑, 대방으로의 남하를 동시에 추진하였다. 이처럼 백제와 고구려는 양 방향에서 필사적인 노력을 강구하였고, 이러한 두 나라의 대립의식은 요서 경략설이 생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142p

대부분의 경우는 부여 왕실과 백제 왕실의 계승성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이지만, 이는 역사 기록이나 신화, 전승에서 가능하지, 고고학적 물질문화를 통해서는 쉽지 않다.

177p

"신라의 북변에 거주하면서 소규모 단위로 노략질을 하고 때로는 고구려의 부용병으로 동원되던 집단"이라는 공통성으로 인해 신라 통일기 이후 어느 시점에 예를 말갈로 개서하였다는 해석이 내려진 바 있다.

180p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백제 국가의 국민 절대 다수는 경기-충청-전라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후 장기간 성장한 주민집단이라는 점이다. 고구려의 기원을 고찰하면서 맥족 이동설을 부정하고 고구려의 등장에서 압록강 중류 지역과 혼강 유역에서 적석총을 조영하며 생활해온 토착민사회의 성장을 중시하는 견해는, 백제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를 준다. 설령 부여나 고구려에서 소수의 주민이 이주하여 백제 왕실 구성에 일조하였다고 하더라도 백제인의 주축이 재지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197p

백제는 <삼국지> 위지 마한전에 기록된 마한을 구성하는 부락 중 하나인 백제가 발전한 국가로서, 그 왕실에 부여 왕의 혈통이 있거나 혹은 부여 왕자인 구태가 남하하여 백제 부락의 추장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구태가 부여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백제국을 건설했다는 기록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백제 민족과 국가는 백제는 마한 영역에서 성장한 민족으로 고구려나 부여와 하등 관계가 없으며, 백제 왕실이 부여씨를 차용한 것은 그들의 지위가 고구려 왕과 동등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204p

백제가 졸본부여에서 출자했다고 주장하는 강유공 등은,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기사는, 졸본부여의 후예인 여암이 전진이 멸망하던 혼란기를 틈타서 일시적으로 요서를 점거했던 사건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했다.

213p

4세기 중반 일본은 임나일본부를 건설하고, 이후 백제를 조공국으로 삼았는데, 고구려에 패한 후 한반도에서 세력이 위축되었다. 수당제국의 중국 통일과 고구려에 대한 공격은 한반도에서의 왜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 부흥운동을 일으키자 왜가 개입하였지만, 백강 전투에서 패한 후 당과 역량의 차이를 절감한 일본은 대륙정책을 전환하여 견당사를 파견했다는 것이다.

214p

왜와 백제의 관계를 종주국과 속국이라는 불평등한 관계로 파악하는 학계의 의견에 반대하고, 상호 전략적으로 이용하는 관계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백제가 왜에 대해 저자세 외교를 취한 것은 삼국간의 분쟁에서 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였다고 했다. 왜가 백제 일변도의 정책을 취한 것은 한반도 가야 지역에 대한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였지만, 왜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던 백제계 이주민들의 역할도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시기의 양국 외교관계의 특징은 백제의 선진 문화의 수출과 왜의 군사적 지원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230p

일제 강점기 때 행해진 일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를 비판하였는데, 특히 <삼국사기>의 역사적 지위를 높이고 중국 정사의 가치를 폄훼한 점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삼국사기>는 믿을 만한 역사서사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으며, 따라서 이를 기초로 한 연구결과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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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9-07-05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두고는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 얼마전에 개정판으로 나온 노중국 교수님의 백제정치사도 빨리 읽어야 하는데... 읽을 책들들은 많고 시간은 너무 부족하네요,

marine 2019-07-06 08:33   좋아요 0 | URL
저도 보관함 리스트가 1000권이 넘어갑니다.
신간은 계속 쏟아져 나오고ㅠㅠ
나이드니 눈 안 보여 책 못 볼까 봐 두려워요
 
조선 양반가의 치산과 가계경영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6
문숙자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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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책 속의 선비들은 실생활과 별 상관없는 고담준론, 형이상학만 논하길래 도대체 어떻게 가계를 영위했을까 궁금했다.

관료는 녹봉이라도 받을텐데 지방 사족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양반은 학문 이외에는 어떤 경제 활동도 하지 않고 학문 역시 돈을 벌기 위함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부인들이 삯바느질이라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갔던 것일까?

이 책은 양반가의 재산 형성과 유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단순한 추정이 아니라 재산을 나눠주는 분재기와 문서 등을 통해 분석하고 있어 현실적으로 많이 와 닿는다.

간단히 말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학문이나 정치만 했을 뿐 실제적인 노동은 할 필요가 없는 대지주들이었다.

토지 뿐 아니라 노비제를 통해 인신 구속까지 할 수 있는 지방의 대단한 세력가들이었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양반이 흔해지고 잔반도 생기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양반이라는 사족 계층은 노비와 전답을 엄청나게 소유한 귀족들이었던 셈이다.

책에 예시로 든 이맹현이라는 양반은 상속 노비가 무려 700명이 넘었고 전국 각도에 흩어져 신공을 바쳤다.

조선 후기의 윤선도 역시 500명이 넘는 노비를 자손들에게 남긴 엄청난 부호였다.

기본적으로 재산은 균분상속 됐으나 윤회봉사를 하던 전기와는 달리 장남이 제사를 지내면서 재산 역시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보통 재산의 영세화를 막기 위해 장자 상속을 했다고 하지만 저자는 그보다는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고 조상의 제사가 끊기지 않기 위한 노력으로 본다.

문중의 제사를 위해 따로 재산을 상속하고, 그 나머지를 자식들이 균분상속 하는 식이다.

윤회봉사가 사라지고 장남이 전담하게 되면서 종가의 재산은 곧 장남이 갖게 되고 가문은 재산의 집중으로 지역에서 위상을 잃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양반들의 나름 생존전략이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신 구속이 어렵게 되자 멀리 사는 납공 노비들은 점차 방매하게 되고, 토지에 더 비중을 둔다.

이 때 개간이 큰 역할을 한다.

간척지 등을 양반가에서 열심히 개간하는 모습을 보면 양반들 역시 그저 한가롭게 학문만 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개간한다고 무조건 자기 땅이 되는 것은 아니고 입안 등의 절차를 통해 소유권을 확정지어야 하므로 양인보다는 절차에 밝고 인맥이 넓은 양반들이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제사가 중요한지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인상 깊은 구절>

6p

가족공동체의 유지, 존속이 기본이고, 그 가족공동체의 위치를 지역 사회의 대중들과 비교하여 상대적 우위를 지닌 양반 신분에 두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것이 중앙의 권력집단으로부터 물러나와 지역에 세거하는 양반들이 지역 내에서 또 다른 권력을 보장받으며 대대로 살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소수의 양반 가계를 통해 살펴본 이러한 삶의 방식이나 이념들은 조선 후기를 지나면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전파되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혈연에 기초하여 가족공동체를 어떤 공동체보다 우선시하고, 자기 가계의 출발점을 조선시대 양반, 관료, 학자에서 찾으며 수백 년간 가계가 계승되어온 것으로 믿고 있다. 

25p

안동 중심의 영남 유명 가문들과 통혼 및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지역 내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36p

딸의 사망 후 처가와 의절하고 처가의 제사를 봉행하지 않은 사위를 상속 대상에서 배제한 것은 재산상속과 봉사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자식으로서 부모 및 조상에 대한 봉사 의무를 제대로 수행한 이들에게만 재산상속의 권리가 동등하게 주어졌다. 

69p

대체로 한 집안에서 노비의 비중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줄고, 토지는 확대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재산에 대한 양반가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그들은 조선 전기에는 노비의 중요도를 높게 평가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노비보다 토지 소유 욕구가 증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그 배경에는 임란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는 노비의 유망과 조선사회의 전반적인 노비제 쇠퇴 분위기있었다. 이와 달리 토지 분야에서는 다양한 농법의 도입과 그로 인한 토지 생산성의 증대 이루어지고 있었다.

91p

하나의 입안문서에 나타난 토지가 이미 산록과 대로를 경계로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방대한 규모였다는 점이다. 윤씨가는 16세기 후반에 이미 개간을 전제로 많은 토지를 확보하였다. 그 후 17~18세기에도 같은 활동이 이어졌으므로 개간을 통해 확보한 토지가 실로 방대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거기에 덧붙여 입안을 받아두었던 토지에 대해 소유권이 상실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관리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0p

해남윤씨의 사례에서도 양안에의 등재 여부를 중시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양안에 현록하는 것이 소유권을 확고히 하는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04p

16~17세기는 재경, 재지사족은 물론하고 진전을 개간하여 토지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시기로 판단된다. 그들은 입안이라는 제도를 잘 활용하여 토지를 비교적 용이하게 확보해나갔다. 실제 해남윤씨가의 경우 해택 입안을 활발히 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위해 여러 경로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갑술, 경자양전 등을 대비하여 양안에 자신들의 이름이나 노명을 등재하기 위해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이는 토지의 일시적 확장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경영에도 그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105p

17세기 이후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전 개발도 얼마간의 노동력과 재력만 있으면 양인들까지 뛰어들 만큼 일반적인 현상으로 정착하고 있다. 

110p

거주율이 변화하여 처가살이나 처가 주변에 거주하는 관행이 점차 사라지면서 처가 주변에 위치한 토지의 관리에 부담을 느끼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처가 주변의 재산을 타인에게 방매하지 않고 이씨 가문의 종손인 이은보에게 방매한 사실이 중요하다. 이매를 통해 사위들이 처가로부터 멀어지는 현상과 함께, 종가 주변의 재산이 종손에게 집중되는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써 사위들은 처가 주변 재산뿐 아니라 처가의 제사로부터도 점차 멀어지고 있다. 

112P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를 집적하려는 노력이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점차 양반들의 세거지는 이성잡거 촌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사위들이 처가 주변의 재산을 처가에 되파는 재령이씨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점차 사위들은 처가 주변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특히 사위들이 이매를 이유로, 또는 봉사조 명목으로 내놓는 토지들은 처가의 장남에게 집중되었다. 거주지 주변으로 토지가 집적되는 현상은 한 걸음 나아가보면 종가 주변으로의 토지 집적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보다 직접적으로 종가에 토지를 집적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재산상속 시 종가에만 세전할 토지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118p

16세기 중반 이후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재산의 집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토지를 거주지 주변에 집적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고, 자연히 종가 주변에 아들이 모이고 그들만이 주변 토지를 소유하는 경향이 생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의 재편 방향은 장남 위주로 진행되었다. 종가 주변 토지, 선대 묘소 주변의 토지, 개간이나 매득 등의 집중 투자가 이루어진 토지는 분할하지 않고 장남 가계로만 세전하는 지침들이 여러 가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25p

봉사조가 장남의 소유재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봉사조의 증가를 종가의 재산집중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장자를 봉사자로 지칭하고 있는 사례에서 보듯이, 윤회봉사로부터 봉사의 중심이 장남에게 옮겨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봉사조는 장남의 개인 재산은 아니지만, 가계를 대표하여 장남이 관리해야 할 재산으로 정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양반들의 노비경영에 있어서 노비 가족은 일방적으로 해체되거나 보호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양반들의 재산 운용상의 필요에 따라 그것은 보호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체로 主家 에서 멀리 떨어져 거주하는 노비, 주가에 인신적 예속이 약한 노비의 경우 가족의 분할상속은 양반들의 노비 관리상 매우 필요한 방식이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집에서 수족처럼 사환하는 앙역노비, 가작 등 경작에 동원하는 노비 등은 오히려 가족의 안정이 노비경영상 유효하였을 수도 있다. 노비의 유망이 증가하는 16세기 후반 이후 노비 가족의 분할은 오히려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때부터 원방노비 수를 줄이고 거주지 주변으로 노비를 제한하려고 하는 양반가의 축소지향적인 노비 소유 방식에서 비롯된다.

148p

해남윤씨가는 이 시기 토지의 집중적 매입과 개간을 통해 해남현 내의 재산을 확장하였다. 토지의 확장과 함께 동일 지역 노비 역시 집중적으로 매입되고 있으므로, 토지 확장 경영과 노비 유입의 관련성 여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149p

주가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거주하면서 사환하는 경우 가족을 분산하려는 의지가 약한 반면, 원방에 거주하면서 납공노비인 경우 관리의 편의상 가족을 무시하고 단신 위주의 상속과 매매를 행하였다. 원방노비의 비중이 축소되는 16세기 중반 이후 가족 해체 비율이 낮아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59p

"앙역노비는 두터이 구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의 것을 덜어 아래에 보태는 道 를 써서, 주가에서 쓸 것을 줄여 노비의 의식을 보다 좋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나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로 하여금 고생스럽고 힘이 들어 원한을 품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간혹 크게 힘쓸 일 외에 사소한 잡역이나 일상적인 사환 등은 가내노비에게 맡기고 戶奴 에게 맡기지 말아서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지내며 스스로 본업에 힘쓰게 하여 삶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야 한다. 洞人을 종종 부리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이제 비록 배로 짐을 실어 나를 때 노비를 곁꾼으로 삼더라도, 앙역노 외에는 모두 때에 맞게 가감해서 格價 를 지급해야 한다."

(윤선도가 가훈으로 남긴 것들이다. 양반이라고 하면 노비를 착취한다고만 생각되는데 역시 그도 인정이 있는 사람이고 학문하는 사대부라 그런가 도덕적 인격도 높았던 것 같다)

189p

치산이재나 가계경영, 가계계승은 양반들에게 있어서는 재산상속을 원활히 하여 조상의 향화가 이어지도록 하려는 과정을 의미한다.

194p

균분상속과 윤회봉사로 대표되는 조선 전기의 가계운영 양상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노비나 토지 경영의 변화 양상, 봉사 방식의 변화와 봉사조의 증가,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주체를 아들, 나아가 장남으로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가훈 등의 이념이나 분재기 등의 실상에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을 성리학의 도입이나 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 등 형이상학적인 부분에서 찾기 이전에, 근본적으로는 사회 변화 속에서도 가계의 존속을 사명으로 인식한 양반가의 현실적 생존 본능이 자리 잡았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오류>

23p

그는 태종의 친왕자 인(姻)의 외손녀이며 대문벌인 파평윤씨와 혼인했는데, 처가의 위상은 그의 사회, 경제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 태종의 친왕자 이인은 바로 함녕군인데 한자가 姻 이 아니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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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밥상 - 발기 속 음식 172
정혜경 지음 / 푸른역사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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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걸맞는 좋은 책이다.

조선 왕실에서 만들어진 밥상을 실제 요리로 재현하고 요리법까지 상세하게 기록했다.

요리에 관심이 없어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눈으로 직접 요리 사진을 보니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일상 수라 뿐 아니라 각종 연회와 제사 음식까지 재현해 책값 45000원이 수긍이 간다.

서양의 요리처럼 아주 장식적이지는 않지만 전통 음식만의 단정한 멋이 있고 보기에도 담백해 보여 부담스럽지 않다.

27개월의 상례 기간 내내 하루 세 끼를 전부 실제 밥상처럼 만들어 신주 앞에 차렸다는 사실이 놀랍다.

어차피 산 사람들이 먹을 음식이긴 하지만 과연 유학의 나라라 봉제사 접빈객이 사대부 여인의 가장 큰 의무였다는 게 이해된다.

조선은 확실히 조상신을 숭배하는 유교의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인상깊은 구절>

51p

현재 종가의 제사상차림과 상당히 유사했는데 오히려 최근의 상차림이 좀 더 화려하다. 사실 조선 전기와 중기의 제례상차림은 채소 찬 위주로 차리는 소식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고기는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 차원에서 탕에 사용한 정도였다. 그러니 다시 검박했던 과거의 전통에 따라 간소하게 차리는 것이 오히려 더 조상을 위하고 전통에 맞는 상차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74p

특히 고종과 순종의 탄일발기는 다수가 전하는데 조선 후기 왕실에서 설 다음으로 큰 명절이었다고 한다.

107p

음식을 올리는 의식은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는 시점을 기준으로 奠과 祭로 구분했다. 하관 이후부터 제가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망자를 산 자가 아닌 조상의 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이나 제와는 별도로 매일 식사 시간에 올리는 상식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 사회에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올리는 경우 상식을 생전과 똑같이 봉양하는 효의 실천으로 간주하여 매우 중요시했다. 보통 27개월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바쳐 망자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다했다. 이러한 상식례는 상주로 하여금 효의 실천을 통해 죽음의 충격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걸 보면 유교에서 조상은 단순히 공경하는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 신이었음이 분명하다. 산사람에게 식사를 봉양하듯 3년 동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실제 음식을 차려서 바치다니, 단순히 혼령을 위로한다면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377p

왕실의 선조 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賓을 대접하기 위한 大享이므로 제물 진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497p

일반적으로 귀족의 상징은 육식이었다. 정치 권력의 표현 수단으로서 향연이 열렸으며 이를 통해 권력을 과시하고 봉건적 결속력을 유지했다. 장식적인 요리도 매우 발달했다.

519p

무사 정권은 검소한 것을 善 으로, 사치를 敵 으로 보는 금욕주의에 충실했다. 이는 요리에도 반영되어 막부의 향연 요리는 미식을 추구하지 않았고 금욕을 중시했다.

 현대 일본의 세련된 식생활 문화를 창조한 것은 궁궐이나 무사가 아니라 에도 시대의 부유한 시민들이었다. 일본에서는 17세기 후반이 되면 도시의 상인들이 지배계급인 무사보다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시회적 실력을 갖춘다. 이 시기에 외식 산업의 발달이 눈부시게 이우어져서 일본의 대도시에는 동시대 유럽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식당이 집중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반 시민을 고객으로 하는 도시의 고급 레스토랑이 최상의 일본 음식 문화를 만들어냈다. 



<오류>

61p

저경궁, 대빈궁, 정호궁과 선희궁에서 춘분과 추분에 지내던 제사상에~

-> 정호궁이 아니라 진종의 생모, 정빈 이씨의 사묘인 연우궁이다.

269p

도판 - 순명효황후 민씨

-> 사진은 순명효황후가 아니라 순정효황후이다.

281p

왕대비는 효종황후다.

-> 왕대비는 효종이 아니라 효정왕후다.

497p

당대의 화려한 왕실 연회식은1368년 이탈리아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의 결혼식 연회와~

->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는 1350년에 결혼했고, 아들인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는 1360년과 1380년 두 번 결혼해서 연도와 안 맞다. 검색해 보니 1368년 갈레아초 비스콘티 2세 시절에 밀라노에 스포르차 성이 세워졌는데 혹시 이 때 연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499p

1378년 1월 6일 샤를 5세가 샤를 4세, 보헤미아 황제와 그의 아들 바츨라프, 로마인의 왕을 위해 연 연회를 묘사한 그림이다.

-> 샤를 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고 샤를 5세의 할아버지 뻘이라 1328년에 이미 죽었는데 보헤미아 황제라니, 도대체 누군가 싶어서 찾아 보니, 카를 4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고 보헤미아 국왕인 카를 4세이다. 카를이 프랑스어로 샤를이지만 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 카를 4세로 고쳐야 할 것 같다.

502p

리젠트 왕자 시절에는 물이 흐르는 상태에서 살아 있는 어류를 저녁 식사로 대접하는~

-> 리젠트 왕자가 누군가 했더니 섭정왕자라는 뜻이었다. 즉, 조지 3세 시절에 미친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한 조지 4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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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미술과 후원자 - 개정판
이은기 지음 / 시공아트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2016년도에 읽었던 책인데 표지를 바꿔 재간행된 책이라 처음에는 몰라 봤다.

표지 디자인은 강렬하고 잘 만든 것 같다.

무엇보다 도판이 너무 훌륭하다.

22000원이라는 가격이 싸게 느껴질 정도로 도판의 질이 좋고 본문에 나온 작품들이 99% 실려 있다.

미술사 관련 책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의 노력은 들여야 할 것 같다.

작품의 제작연도와 소장처까지 모두 기재되어 있어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저자와 출판사의 성실한 태도에 박수를 보낸다.

처음 읽었을 때 썼던 리뷰를 보니 익히 알고 있던 내용이라 시시하다고 되어 있는데, 그 때는 아마도 책을 대충 읽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군주들이 예술을 선전 도구로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세기 이후 순수미술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회화와 조각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승격했지만, 그 전 시대만 해도 오늘날의 미디어 같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 경쟁적으로 수많은 회화와 조각들을 만들어 내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평처럼, 이런 세속적이고 노골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의 상상을 뛰어넘어 훌륭한 예술품을 만들어 낸 많은 천재 화가들의 업적이 경이롭다.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위대함 때문에 오늘날에도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리라.

르네상스 시대상과 미술의 역할에 대한 좋은 책이다.



<인상깊은 구절>

125p

이러한 소식망에 의해 이사벨라의 관심의 방향이 정해졌으리라. 이사벨라는 르네상스의 여걸이며 옛 미술품의 이름난 수집가였으나 작은 도시의 안주인으로 고대의 원작을 갖기에는 재력과 권력이 부족했다. 그는 만토바라는 주변 도시에서 로마와 피렌체를 중심에 놓고 바라보고 있었으니 독자적인 수집 성향을 가질 수도 없었다. 따라서 그녀가 수집한 다양한 모조품들은 고대 조각이 갖춘 건강하고 균형 잡힌, 또는 격동적이고 숭고한 맛은 사라지고 궁정 취향의 공예품 수준으로 전락한 셈이다. 고대 조각의 수집은 고대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기보다 상류층의 유행이어서 로마와 피렌체의 중심 문화권 취향을 모방하는 고급 키치로 변모한 것이다.

134p

18세기 말과 16세기 당시의 진열에도 큰 차이가 있으니 바로 보석과 메달들이 없어지고 회화와 조각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은 회화, 조각을 주로 한 순수미술과 공예품이 주를 이루는 응용미술을 구분하던 19세기에 더욱 본격화되어 오늘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 16세기 말 메디치 가에 의해 수집된 고대 조각은 자연과 예술의 알레고리를 드러내기 위한 많은 수집품 중 일부였으며 이들은 군주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수집은 더욱 유행하고 진품을 갖기 위한 발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대 조각이 수집가의 목적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조각상들의 기능은 변모되었다. 고대 조각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이후 아름다움의 전형, 또는 사실 묘사의 연습 대상이 되어 21세기 초의 한국에서도 이 상들의 석고를 데생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 과정에서의 고대 조각은 단순한 미적 대상이 아니라 이미지 전달력을 지닌 시각 매체였다. 르네상스 시대 고대 조각은 첨단의 사조였던 고대 문화를 연상케 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러나 일단 첨단 취향이 되어 수집의 대상이 되자, 고대 조각이기 때문에 숭상하기보다는 상들이 환기시키는 부과 이익, 즉 지적인 모습으로 포장된 부와 권력의 과시가 수집의 더 큰 목적이 된 것이다. 로마의 품위 있는 조각 정원, 이사벨라의 서재, 메디치 가의 트리부나는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문화적인 공간이지만 수집의 원동력은 과시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시대에 신전에 모셔져 신을 대신했던 신상과 로마 시대의 황제 초상은 르네상스 때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수집되더니 순수미술을 숭상하는 19세기 이후에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전시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의 역사 속에서 고대 조각은 제작 당시의 목적을 넘어서 조각상 자체가 문화적인 전달력을 지닌 이미지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42p

한 은행가 집안이 지속적인 권력을 갖기 위해서 행했을 수많은 권모술수는 가려지고 교회와 자선 단체 그리고 인문주의자들에게 아낌없이 후원하고 훌륭한 건축 공사를 함으로써 돈을 건강하게 쓰는 모습만 보인 것이다.

157p

로렌초 마니피코는 피렌체를 주무르고 있었지만 공식적인 직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막후에서 조정하는 실권자였으나 "겉으로는 공식적인 기관을 통한 것처럼 보여야 했고 또 자유가 지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달리 시뇨리아가 된 적이 없었다. 21세에 집안의 長이 된 그는 젊지만, 집안의 지위를 보았을 때 시뇨리아 이하의 직책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뇨리아는 45세 이상이어야 했으니 21세부터 43세에 죽기까지 22년 동안 실권을 쥐고 있었던 그의 권한은 비공식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뇨리아는 되지 못했지만 정계와 제계의 많은 사람들과 다양한 망을 형성함으로써 시뇨리아를 손에 넣은 대부가 된 것이다.

172p

공화정 치하의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건전한 취향으로 사회에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했으나 공국 형태의 16세기 후반에는 권위를 강조할수록 체제 유지에 효과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피렌체와 베네치아, 시에나 등의 공화제 국가들이 독자적인 예술의 발전을 이루었음은 우연한 현상이 아닐 것이다.

191p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특수한 목적으로 사용되던 이탈리아 옆면 초상과 플랑드르 미술의 특징인 세밀함, 그리고 원경의 배경을 절충시킴으로써 당시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차별화된 초상화를 그려냈다. 세부 묘사를 충실히 함으로써 실제 인물의 현존성을 전달했으며, 또한 완벽한 측면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의 순간을 초월한 영원함과 기념비적인 성격을 동시에 나타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러한 세부 묘사와 모뉴멘탈함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업적은 미술사 연구의 초기부터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화가가 왜 이러한 방식을 창안하였을까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술이 순수예술로 취급되기 이전인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언제나 주문에 의해 제작됨을 고려한다면 아마도 초상화 주인공의 주문 내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뒷면에 그려진 승리의 비유는 이를 간접적으로 증거해 주고 있다. 

220p

미술작품을 순수한 애호나 문화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면 미술의 주문과 수집은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닌 활동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미술은 어디까지나 이미지를 통한 전달의 매체였음을 염두에 둔다면 사회적 해석의 중요성이 커진다.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행위는 엘리트 지식층이 누리는 인문주의의 향유와 희귀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하였으며, 레오나르도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게 함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나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와 견줄 수 있는 가문임을 뜻했다. 이사벨라는 정치와 외교에 뛰어난 현실적인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60대에 제작된 자신의 초상에서는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후작부인이기를 바랐다. 미술품의 주문과 수집은 애호를 넘어선 이미지 정책이었으며,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25p

페루지노는 이사벨라 데스테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단지 자기 그림이 걸릴 자리 옆에 이미 있는 만테냐 그림의 인물들 크기를 물었다. 함께 걸릴 때 서로 어울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이사벨라의 실제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사벨라에게는 페루지노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화가였음이 중요했으며, 그의 화풍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29p

희귀한 고대 조각을 수집하는 일은 원하는 것을 당대의 화가에게 주문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더구나 이탈리아 동북부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만토바는 로마와 같은 유적지도 없고 피렌체의 메디치 가와 같은 재력도 없었다. 

259p

이교의 신이 주관하는 시의 세계는 의인화가 내건 표어에서 보듯이 바로 '신성함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루어진다. 곰브리치가 간파한 대로 이 방에 그려진 '인간의 지적' 활동은 이교의 신이 하는 일까지도 '하느님으로부터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63p

16세기의 지식인 화가 바사리에게는 이교의 학문을 연구하는 인문주의와 신학이 전혀 상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벽화의 도상들은 인간의 지식은 모두 신의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라파엘로의 조화로운 화풍은 이들이 이룬 질서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보여 주고 있다. 

277p

교황과 수도원장은 공통점이 많은 파트너였으니 둘은 모두 "추상적인 아이디어에 대한 관심과 실천적인 가능성을 절충하는" 성격을 지녔으며 "강한 스태미너와 낙관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279p

이러한 전통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반대하였던 다신교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기서의 플라톤은 신약을 준비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플리토니즘은 오히려 그리스도교에 대한 철학적 의문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신학의 체계에 흡수되어야 함은 물론이었다.

283p

그들은 고대 학문을 부흥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고대와 현대, 신학과 인문학을 조화롭게 절충시킨 긍정적 세계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모두 줄리오 2세의 설교자였으며, 모두 교황의 황금시대를 노래한 낙관론자였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신학과 인문주의, 교황의 암시적인 목적을 아주 효과적으로 시각화하였다. 그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고대를 상상케 하였고, 중앙 집중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다양한 활동을 하나인 신으로 귀결케 하였다. 

284p

로마 교회가 인문주의자들을 후원함으로써 로마는 문학과 예술의 면에서 전성기 르네상스에 유럽의 중심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황청이 궁극적으로 얼마나 좋은 역할을 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인문주의 수사학으로 정교히 짜놓은 희망찬 미래는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혁명이라는 최악의 현실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현실을 개혁하기보다 이미지와 개념을 미화시킴으로써 유지하려 했던 그들의 정책은 정치가와 그 주변 인물들이 빚어낸 일종의 망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망상은 1527년 소위 '로마 약탈'에 의해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교회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미화가 아니라 개혁이었을 것이다.

291p

초상화가 오늘날과 같이 다른 작품들과 나란히 박물관에 걸려 있는 회화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원래의 위치인 귀족의 저택이나 궁정에 걸려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초상화는 예술품이기보다 가족과 친구,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20p

마키아벨리는 그의 <군주론>에서 "행운에 의해서가 아니고,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지도자들이 있다. 그중 가장 탁월한 사람은 모세 같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모델 중 으뜸으로 모세를 삼은 것인데 그 이유는 모세가 자기 국가를 위해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훌륭한 지도자는 항상 위기의 상황에서 나오며, 위기는 바로 군주에게는 기회이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하는 데 힘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모세는 코지모에게는 가장 완벽한 모델이 된 셈이다. 

 모세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듯이 피렌체의 악조건은 바로 메디치 가에게는 호조건이니 기회를 잡으라는 정치 이론가의 권고다.

332p

프로그램이 정해지고, 이를 총괄하는 미술가가 있으며, 화가는 이를 그림으로 실행시키는 코지모 1세의 조직화된 미술 주문 양상은 당시 미술가들의 세계와 미술의 성격도 바꾸어 놓았다. 정치적인 전시 효과의 프로그램들은 전승 기념이나 결혼식 등의 행사 위주여서 규모는 거대하지만 기간은 촉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거대한 규모를 짧은 시간 내에 완성하기 위해서는 총책임자가 있고, 조직이 필요하며, 화가나 조각가가 일하는 공방에서는 필요에 따라 적합한 화가를 공급해야 했다. 이제 화가는 화가로서의 능력만으로는 유능한 작가가 될 수 없고, 어느 상황에나 자신을 잘 맞추는 미술가여야 했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러한 요구를 탁월하게 수행한 미술 행정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상황에 적응하는 화가는 궁정적인 생활을 하는 명예 있는 화가가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화가는 개인의 사회 부적응을 심리적으로 해소하는 매너리스트가 되었다.

344p

18세기 중엽까지 우피치는 미술관이라기보다 귀중한 것, 희귀한 것의 수집관이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당시의 미술품은 독립된 미적인 영역이기보다는 과학과의 연관성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350p

현대의 미술관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 희귀한 것들의 모음이 박물관 역사의 시원이었다. 예술적인 가치보다 '특이한 것', '희귀한 것', '호기심 있는 것'을 모았다는 점에서 현대인으로부터 평가 절하되어 왔으나 이는 20세기 눈으로 인식한 잘못된 평가다. 르네상스인에게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가장 큰 배움의 동기였으며 이의 수집과 전시는 필요 불가결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집 행위는 소우주에서 대우주를 발견하고자 하는 호기심의 실천 과정이었으며, 전시는 대우주를 소우주에 질서화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360p

차마부에의 <옥좌의 성모자>를 다음과 같이 감상하라고 권하고 있다.

"프리미티브한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그림의 미숙함에 당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패널화를 멀리서 바라보면 그런 일종의 미숙함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물론 이 패널화가 원래 자리인 산타 트리니타의 제단에 있었을 때는 비례와 형태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충분한 거리도 없었고, 교회 자체가 너무 넓어서 이런 것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림에서 조형성을 중요시하던 20세기 전반의 순수미술 경향은 그 기준을 근대 이전의 종교 회화에도 적용하여 작품을 감상하는 데 충분한 거리와 적당한 아늑함으로 요구한 것이다. 20세기 중엽 전쟁이 끝나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박물관들은 관람객의 감상 조건을 최대한 고려했다.

377p

그러나 놀라운 것은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에도 이를 충족시킨 미술가가 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제약이 어떤 화가에게는 장애가 되었지만 어떤 화가에게는 새로운 기법을 창안해 내는 기회가 되었다. 미켈란젤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티치아노 등 세기의 걸출한 작가의 경우, 현대가 아무리 천재를 부정하는 시대라 해도 그들의 탁월한 해결 방법에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은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심을 용해시키고 요구를 뛰어넘는 작품을 생산해 내었다.

 서양의 변혁을 가져온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이 역사의 주역이 되면서 미술 또한 대중의 것이 되었다. 왕궁은 박물관으로 변하고 귀족 소유의 미술품들이 공공의 소유로 이전되었다. 새로운 사회라 해도 미술이 부의 곁을 떠난 적은 없지만 그러나 그 양상은 획기적으로 변하였다. 새 시대의 자본가들은 아무리 권세가 크다 해도 개인의 목적에 따라 미술품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19세기에는 계몽의 이름으로, 20세기에는 기업 이익의 사회 환원이라는 차원에서 미술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도시마다 공공미술관들이 들어섰으며, 후원자는 이름을 남기되 미술의 향유자는 다름 아닌 대중이 되었다. 세계 곳곳에는 재벌의 거대한 자본으로 세워진 쾌적한 미술관이 무수히 많고 서민은 단지 몇 천 원으로 작품을 향수하고 있다. 현대는 아마도 인류의 역사 이래 자기 소유의 미술품이 아니어도 이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대가 아닌가 싶다.



<오류>

127p

아들 프란체스코 1세로 이어진 수집의 역사는 1589년 코시모 1세의 손자 페르디난도의 결혼식에 맞추어 일단 완료되었다.

->프란체스코 1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페르디난도 1세는 코시모 1세의 손자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다.

132p

이탈리아에 와 본 일이 없는 영국의 샬롯 여왕(Charlotte d'Inghiltera)은 영국 화자 조파니에게 <트리부나>를 그려오도록 주문하였다.

->샬롯은 여왕이 아니라 조지 3세의 부인이므로 샬롯 왕비라 번역해야 하고, Inghiltera의 스펠링도 Inghiterra가 맞다. 또 요한 조파니는 영국에서 활동했으나 독일 출신의 화가다.

160p

1515년 로렌초의 큰아들인 조반니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메디치 가의 권력은 다시 정상에 올랐다.

->조반니는 1475년생으로 로렌초의 둘째 아들이다. 큰 아들은 로렌초의 뒤를 이어 집안의 수장이 된 피에로 2세로 1471년생이다.

210p

페데리코 는 결혼한지 11년 동안 여덟 명의 딸을 두었고 1472년 1월에 귀한 후계자 아들을 얻었다.

-> 위키에 의하면 페데리코는 여섯 명의 딸을 두었다.

211p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는 통치자가 된 지 17년 만에야 정통성을 갖춘 셈이다. 그리고도 9년을 기다려서야 아들 구이도발도를 낳았다.

-> 페데리코는 1444년 통치자가 되었고 1461년에 교황의 승인을 받아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1472년 아들을 낳았으니 9년이 아니라 11년을 기다렸다.

294p

코시모 1세는 외교적으로 아들 프란체스코 1세를 황제 카를로 5세의 사촌 조반나와 결혼시킴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 조반나는 페르디난트 1세의 딸이고, 카를로 5세는 사촌이 아니라 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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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한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지음 / 미술문화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덕수궁 미술관에서 20주년 기념전을 했던 모양이다.

당시 도록인가 싶은데 전시작은 90점인데 비해 해설은 1/3도 안 되어 있어 아쉽다.

매력적인 표지 그림은 장운상의 미인도이다.

뒷쪽에 실린 전시작 중 이신자라는 작가가 있어 누군가 찾아봤더니 뜻밖에도 장운상의 부인이었다.

섬유예술가라고 한다.

자녀 넷이 전부 예술 쪽 교수이고, 유영국 화백과 같은 고향(울진) 사람인데, 이 분의 딸도 서울 미대 교수라고 한다.

우월한 유전자 탓인가, 부모가 길을 빨리 제시해 줘서인가 기사 찾아 보니 부러웠다. 

대부분 아는 그림이긴 하지만 도판이 너무 작아 아쉽다.

미술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소장과 전시인 만큼 예산 확보야 말로 좋은 작품을 구입하기 위한 필수 조건인 것 같다.

덕수궁미술관만 해도 건립된지 20년 밖에 안 되는지라 가격이 많이 오른 근대 회화 구입에 어려움이 있었고, 유족과 화랑의 기증을 통해 많은 부분을 해결했다고 한다.

매우 감사한 일이다.

월북 작가 부분도 참 안타깝다.

변월룡이라는 연해주 출신의 화가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국립레핀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교수까지 됐는데 해방 후 북한으로 건너갔다가 숙청됐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사실주의적 회화가 매력적이다.

이쾌대나 김주경, 김용준, 배운성 등도 월북 내지 납북되어 작품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

식민지배와 더불어 남북분단도 한국인들에게 엄청난 불행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송수남이나 이응노 등의 수묵 추상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어떤 재료를 가지고 어떤 주제를 풀어내는가, 라는 점에서 회화는 참으로 매력적인 장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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