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최혜진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의 삶이 부럽기도 하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 미술관 여행, 그림 감상하고 여행하면서 에세이를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삶.

기자라는 직업 특성상 이런 에세이스트로 쉽게 전환하는 것 같다.

부러우면서도 책 읽는 독자로서 냉정히 말하자면 훌륭한 에세이스트, 혹은 전문적인 필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독자에게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던지 혹은 수필로서 읽을 만한 글을 쓰던지 둘 중 하나가 되야 하는데 전공자가 아닌 경우 문필가로서 읽을 만한 책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에 살다 보니 블로그나 1인 미디어에 올릴 만한 잡스런 수준의 글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양서를 고르는 게 오히려 어려운 시대가 된 것 같다.

항상 감정의 과잉을 경계하자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도 감정의 과잉이 넘쳐나 만연체의 긴 글들이 가독성을 방해한다.

어쩌면 이런 예민한 감성들이 글쓰기를 직업으로 삼게 만든 원동력이었겠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많이 불편했다.

책의 주제와는 관계없이 페미니즘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 피해의식에 대해 생각해 봤다.

저자는 가부장제의 기억이 남아 있는 여성으로서 여전히 사회에서 여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공감이 어렵다.

나도 한때는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여성할당제에 공감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성, 특히 차별받는 여성, 약자로서의 여성이라는 범주화에서 벗어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교육과 경제력이다.

사회적 약자에서 벗어나려면 많이 배우고 경제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북유럽 여성 화가들도 작품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역사에 남겼다.

관심있던 스카겐 화파들의 그림이 소개되어 반갑다.

어찌 보면 세계 미술계를 선도하는 서유럽 회화에 비해 옛스럽고 시대에 뒤처진 느낌도 들지만 인간 본연의 따뜻하고 외로운 속성을 잘 드러내 주는 그림들이라 마음이 간다.

마지막에 실린 뭉크 그림은 여전히 가슴이 뛴다.

실제로 감상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뭉크 그림에서도 새삼 느낀다.

왜 뭉크가 유명한지 공감을 못했는데 한가람 미술관에서 뭉크 전시회를 본 후 완전히 빠져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작품들이 참 많이 왔던 것 같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지금도 왜 뭉크가 유명한지 전혀 몰랐을 것 같다.

유명하지 않은, 그렇지만 자꾸 보고 싶어지는 19세기 북유럽 회화들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187p

독실한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에게는 '광활한 자연경관'이 신비이고 경이였다. 자연이 곧 신의 뜻이라고 믿었다. 안개나 노을, 눈, 깊고 어두운 나무 숲 등을 통해 아득한 무한의 세계를 전달하려 했다. 장대하고 적막한 풍경 안에 고독한 사람을 놓거나 수도원, 공동묘지 등을 폐허로 그려서 신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과 불완전성을 표현하길 즐겼다. 덕분에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는 평을 들었다.

259p

"우리가 절망이라 명명하는 한계 상황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바로 그 한계의 돌파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징표다. 강한 자는 병에 걸리지 않거나 죽음을 초월한 자들이 아니라 병을 건강으로 가치 변환시키는 자들, 한계에 맞닥뜨렸을 때 그 한계에서 다시 시작하는 자들이다. 뭉크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강자였다."

-에드바르 뭉크, 세기말 영혼의 초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도학 지음 / 학연문화사 / 201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라 어려울까 봐 걱정했는데 교양서 수준으로 쉽고 재밌게 읽힌다.

특히 사진이 많아 지루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동어 반복이 많고, 과도한 논리전개로 간간히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나온 대로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이고 한 발 더 나가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아들이며 처가와 외가가 적국인 신라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더더욱 신라 공격에 앞장섰다는 식이다.

이미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와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아무 근거도 없이 그녀는 나중 부인일 것이고 선화공주가 첫번째 부인이며 의자왕의 생모라고 정황상 근거로 밀어부친다.

전공자의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친 논리 전개라 공감하기 힘들었다.

전설에 빗대어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삼국통일 후 신라와 대치 중일 때 피살됐다는 주장도 수긍이 안 간다.

당의 역사서에 버젓이 나와 있는 사망 기록은 개연성이 없다고 무시하고, 우리나라에 떠도는 전설을 근거로 소정방 피살설을 주장하는 게 의아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소한 부분이고, 그 외 대부분의 역사적 평가에는 많이 공감했고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인들의 명예를 되살려 준 점에 대해 감동했다.

삼한 통합을 이루려는 신라와, 옛 한사군의 땅을 되찾겠다는 당나라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한반도에 비로소 완전한 통일국가가 성립됐다.

단지 고구려 옛 땅을 잃었다는 이유로 한반도 최초의 민족국가 성립을 폄훼하는 요즘 대중들의 역사인식이 안타깝고, 소국이었던 신라가 지도층의 살신성인 정신과 놀라운 외교력, 그리고 외세를 몰아내고 하나의 완전한 국가를 이룬 단합력 등은 후손인 우리가 높이 평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춘추와 그 아들인 문무왕, 그리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일화는 읽을수록 가슴이 뜨겁다.

한반도의 어떤 왕이 나라를 위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전을 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김춘추는 통일 전쟁을 위해, 아들인 문무왕은 당을 몰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김유신과 화랑도는 과연 신라가 통일을 이룰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26p

고구려가 국왕 주도하에 말갈병과 더불어 요서 지역을 공격한 배경도 재해석이 가능하다. 수 문제 이래의 고구려 침공 배경도 고구려의 침공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수대에 고구려 서쪽 영토가 갑자기 넓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가 고토수복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침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와의 전쟁 전 고구려 영토가 요서 지역에 소재했다는 것이다. 수가 붕괴되고 당이 들어선 후에는 고구려와 관계 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러한 차원에서 경관을 허물어 적대 의식을 청산하였다. 동시에 천리장성도 축조하여 고구려의 서쪽 계선을 명확히 했다. 요서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군진이 일제히 요동으로 철수한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 집권 후 당의 내정간섭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써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양국 간의 공지였던 영주와 지금의 천리장성 사이를 석권했을 수 있다. 이 구간은 거란이나 해와 같은 유목민족들이 이동하거나 잠주했던 곳이었다. 당으로써는 이를 고토수복론의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131p

경관을 헐게 된 배경에는 고구려측의 양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와 당 간의 화평의 표지로써 경관을 헐고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한 것으로 보겠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함으로써 중국을 넘볼 일이 없음을 가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598년 고구려군의 요서 기습과 같은 침범이 재현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즉 중국에 대한 불가침 표지라고 하겠다. 동시에 당으로 하여금 요동에 대한 고지수복론을 재론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고구려와 당이 각자 절충하여 타협하는 선에서 고구려의 서계가 설정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양국 간의 화평을 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화평 관계는 642년에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파견한 연개소문이 그래 10월 영류왕을 시해하고 집권함으로써 파탄 상태에 빠졌다. 화평의 표상인 천리장성 축조에 파견된 이가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그에 대한 불만으로 대당 유화론자인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당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침공을 막아낸 후에 천리장성이 아무런 상징적 구실도 못한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요서 지역의 거란이나 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을 영향권에 넣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고구려의 지배권이 요하 서쪽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고 본다.

151p

연개소문의 위세가 비록 하늘을 찌르기는 했지만 복종하지 않는 세력이 지방에 여전히 온존했음을 뜻한다. 아울러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을 통해 일정 기간 고구려가 내전 상태에 놓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연개소문의 지배 체제를 강고하게 만든 것이 당군의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군을 파견하여 지원했다. 이러한 비상시국의 전쟁 극복 과정을 통해 연개소문의 지배력은 자연히 지방 말단까지 미치는 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연개소문 아들에까지 권력이 승계되는 세습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193p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의 장수 유원외가 선조 앞에서 한 말이 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으로 불리었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고 잘타했다. 고구려로 인해 강국 이미지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229p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의 공격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신라는 바다 건너의 당과 제휴하게 되었다. 백제와 연화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세력이 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231p

반란군의 기세에 여왕은 무서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김유신이 여왕을 뵙고 말하기를 "길흉은 무상하여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른 것입니다. 덕이 요사를 눌러 이길 수 있으니 星辰 의 변이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즉시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게 하였다.

(과연 삼국을 통일한 명장의 언사답다. 선덕여왕은 이런 용장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을까!)

238p

전통적 권위의 위광을 지닌 정치적 수반으로서의 신라 왕, 쟁란의 시대를 군사로서 직접 지배하는 김유신, 그리고 국가존망에 깊이 관련되는 외교를 짊어진 김춘추의 3세력이 결합하여, 신라 독자의 권력집중 방식을 성립시켰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 후에 전개된 삼국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친당자립의 장기적이고도 공고한 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실제 신라는 곡절 많고 복잡한 삼국통일 과정에서, 친당책을 추구하면서도 자립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백제 고토를 회복하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을 옹호한 김춘추와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김춘추의 극적인 혼인담은, 지방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야심 많은 김유신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제약을 깨고 신라 중앙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할 목적으로, 김춘추의 '등'을 빌리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로 인한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적인 결속은, 7세기 한반도와 만주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 받을 수 있다. 

249p

당은 고구려 침공과 그 지배를 위한 명분으로서 역사적 근거를 자주 들먹였다. 이러한 실정이니 고구려 패망 후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에 선선히 넘겨 줄 이유가 없었다. 신라로서는 현실적으로 당의 지원이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타협하고 절충하는 선에서 '평양 이남' 지배로 선을 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신라는 삼한 영역의 당초 북계인 임진강을 넘어섰다. 즉 대동강선까지의 고구려 영역을 지배하는 발판을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이 점은 주시할만한 대목이다. 요컨대 신라 삼국통일의 영토적 불완전성은 통일 과정에서의 역부족이 아니었다. 당초부터 내재된 이러한 약정의 산물이었다. 아울러 신라는 통일의 정당성과 명분의 확보에서 중요한 소재를 개발하였다. 즉 "삼한을 합쳐서 한 집을 이루었다"는 표제인 것이다. 분열을 청산한 통합은 분명 성과요 위업이라는 긍정적 기제의 극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당은 고구려 영역 가운데 위대 이후의 요동군과 과거 한4군 영역을 수복지로 지목하였다. 당 태종은 "요동은 옛적에 중국 땅이었다. 짐은 장차 가서 이를 경략하려 하는 것이다"고 했다. 

250p

고구려 영역 가운데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로 마무리하고, 중만주와 동만주 일대가 방치된 것은, 이러한 당의 영역관에 기인하였다. 그랬기에 방치된, 즉 신라나 당으로서는 일종의 무연고지였던 동만주를 기반으로 발해가 흥기할 수 있었다. 요컨대 당의 고구려 침공은 고토탈환전이었고, 신라로서는 삼한통합전이었다. 고구려 멸망은 이념적으로는 중국인들의 누대 숙원과 신라인들의 삼한통합대망론의 귀착점이었다.

 신라인들은 자국 영역의 북계인 대동강을 삼한의 북계로 인식했다.

276p

의자왕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음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알코올 중독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잔치에 참여한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을 조성하여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의자왕이 성충이나 흥수의 간언을 배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었던 요인도 술에 기반하였다. 술의 힘을 빌어 단호하게 정적들을 제거했다. 의자왕은 신라와 당의 침공 대비라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자신은 신라와 당의 협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았다. 그럼에도 경고긔 비상 나팔을 불어대자 짜증을 낸 것이다. 의자왕이 현실을 잊거나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술을 이용한 측면도 배제하기 어렵다. 

282p

진덕여왕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것'은 신라이고, '큰 것'은 백제를 가리킨다. 이에 김유신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라는 것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나이다"고 했다. 

(死卽生 生卽死 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난세의 영웅들은 범인이 근접할 수 없는 담대하고 초연한 기개를 가진 듯하다)

310p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했다.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인해 천시를 어길 수 있으리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라고 말하고는 이내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자, 새는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327p

의자왕은 종전에 백제가 취해 왔던 것과는 달리 당에 크게 양보하면서 적극 예속되는 선에서 타협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의자왕은 예하의 신료들과 무력 수단을 당군에 깨끗이 헌납하는 항복의 길을 통해 멸망의 기로에 선 국가의 활로를 트고자 했다. 의자왕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소정방의 경우도 백제와 기를 쓰며 싸워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당의 숙적은 고구려지 백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은 신라 왕실의 숙원이었다. 당은 궁극적으로 고구려를 장악하기 위한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참전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당은 백제 공략전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345p

신라와 당군에 힘차에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다. 그런데 신라측에서 백제의 존속을 용납하지 않았다. 신라로서는 숙원의 백제 멸망을 손아귀에 넣었는데 포기할 리 만무했다. 결국 신라의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고구려 정벌에 필요한 신라로부터의 병참 지원 문제도 따랐다. 당은 백제 멸망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454p

김부식은 고구려가 패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중국의 동북 모퉁이는 난세에는 영웅들이 많이 일어나 격동치는 곳이니 '두려움이 많은 땅'이라고 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맺고, 또 중국의 군현에 들어가 살았으니 전쟁이 언제나 끊이지 않았고 편안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오만한 고구려의 몰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부식의 평가는 틀리지 않다. 고구려는 수,당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국력이 피폐해져 있었다. 614년 수의 제2차 침공시 고구려는 "우리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고 실토했다. 고구려는 수, 당의 침략을 모두 격퇴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은 중국에 빼앗겨 줄어들었다. 고구려로서는 실리를 챙기지 못한 승리였다. 오히려 패배한 중국이 실리를 챙긴 측면도 있었다.

 김부식이 지적한 고구려 패망 요인 가운데 '겸손의 뜻이 없고'는 굽히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재현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멜로스인의 당당한 태도는 국가 파멸로 이어졌다. 유연성을 잃은 연개소문의 굽히지 않는 태도 역시 이와 동일하였다.

462p

"당군이 우리를 위해서 적국을 멸망시켰는데, 도리어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소?" 김유신인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물게 되니 어찌 국난을 당하고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대왕은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넌 9월 이후 신라는 당초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당을 실력으로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신라는 고구려의 재건을 명문으로 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였다.

476p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 한 사람에게 지나친 편중을 보여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유신에게 이다지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을까?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김유신의 생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는 한 시대의 권화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김유신이 출생하여 15세에 화랑이 된 후 79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일생 기록인 김유신전은 멸사봉공과 위국충절로 일관되었다. 특히 신의가 크게 돋보이고 있다.

 가령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당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신라 군대가 나섰다. 그런데 엄동설한이라 군사와 우마들이 얼어 죽는 형편이었다. 이때 칠순을 바라보는 대장군 김유신이 어깨를 벗어 붙이고 앞으로 달려가니 젊은 장병들이 힘을 다하여 달려가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못하였다. 그 밖에 국운을 건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군대가 계속 패하여 밀리자 김유신은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는 단기로 고구려군 진영에 돌진하였다. 그는 적장을 베고 진영을 흔들어 전세를 반전시키는 등 수범을 보인 자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거인 김유신은 시대의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건너갔다.

(이런 지도자의 표상같은 위인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둥 폄훼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494p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위의 기사를 통해 목전의 백제군과 대처한 상황에서도 김유신은 소정방과 정면 대결하였기에 김문영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 의존이 아니라 외세 이용이었다. 외세 이용도 자주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당자주 정권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지도자였으니 군사들이 충심으로 믿고 따랐을 것 같다)

505p

소국 신라가 대국들을 상대하여 지루하게 투쟁해서 얻는 성과였다. 통일전쟁에 있어서 신라 지배층의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당군과의 전투에서 국토를 사수하기 위해 현령급의 사망은 비일비재했다. 이들이 수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통일을 이루어 넓어진 영토와 불어난 인구 환경 속에서 토지와 노비를 상급으로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정도로 지배층의 희생은 실로 컸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로 인해 문화의 황금기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은 고려를 경유해서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고 본다.

 신라가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소정방의 발언에 적혀 있듯이 신라는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신뢰로 맺어진 관계였다. 신라는 상대등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국가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을 시대의 권화로 여겼다. 지배층 전사단이 수범을 보였다. 이는 백제나 고구려의 지배층이 분열된 상황과는 비교된다. 고구려가 수 양제의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자산은 사회적 인화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절대권력 구축 이후 고구려 사회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연개소문의 강고한 권력은 한시적이나마 국가를 지탱하게 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이라는 절대권력의 소멸은 마지막 결속력의 줄을 끊게 했다. 백제도 의자왕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15년 이후부터 민심 이반이 가속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나 백제와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508p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최고의 야전 지회관으로 평가받은 조지 스미스 패튼은 전쟁을 회고하면서 "좋은 군인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특권"이라며, "좋은 군인이 되려면 규율, 자존감, 부대와 국가에 대한 자긍심,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충만한 긍지는 정신전력의 기본이었다. <신라사연구> 서문에서 쓰보이 구메죠는 신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드디어 한반도를 통일하고서 3백년간 국사를 유지한 것은 당의 외번이 되어 그 부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응위한 바탕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522p

소나의 전사 소식을 접한 그 처는 "내 남편은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전쟁에서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돌봄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지금 죽은 것은 그 말과 같다"고 하였다. 

 화랑은 신라 지배계급 가운데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야심 많은 귀족의 자제가 출세하는 길이었다. 화랑의 낭도가 되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유동성을 저지해 온 엄격한 골품제로부터도 어느 정도 탈피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화랑은 인도적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를 지녔다. 그리고 화랑제도는 신라의 문화에 커다란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신라 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린 비합리적인 열병적 사고는 무려 3백여 년 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주민들을 끊임없이 동원시키게 했다. 신라 왕은 삼국통일전쟁을 국가의 신성한 대과업으로 정당화시켰다.

 화랑의 역할로 인해 신라 사회가 격조 있는 품격 사회로 전환하였다. 화랑들이 일상 생활에서 보여준 신의와 품격은 귀감이 되기에 족했다. 이들을 선망하면서 지금까지의 본성에 좌우된 거친 삶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 결과 격렬한 전쟁 속에서 사회 전반의 격조를 상승시켰다. 이렇듯 화랑도는 신라 사회를 선도하는 동력원이었다. 김대문은 삼국통일을 위해 전장을 뛰어다닌 신라의 장병과 화랑들의 보국적인 역할, 그리고 그들이 맛보았던 승리의 감격과 전장에서 속절없이 사라진 동료들의 죽음에 대하여 깊은 비탄을 느꼈던 것 같다. 이들의 무사로서의 꽃다운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화랑세기>를 집필했다고 생각된다. 

 왕족인 김흠운은,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말하면,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감읍한 것이다. 김흠운과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적진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뒤 김흠운은 백제와의 전쟁에 출정했다. 부하들이 "공은 신라의 귀골이니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후퇴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아 뿌리치고는 적진에 돌진하여 여러 명을 죽이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서로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풍속이 나아가 죽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여 王事 로 죽은 자가 귀산 이하 수십 인이 있었으나, 백제가 망할 적에는 계백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적에는 죽어 절개를 지킨 자가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 백제의 절의가 퇴폐한 것이 이 같았으니, 어찌 신라를 대적할 수 있었으랴!"고 했다. 백제나 고구려가 절의로 충만한 신라를 이길 수 없었다고 단언했다.

 김종선 교수는 화랑의 정신세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국가를 위한 광적이고 일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 행위는 신라 무사들의 정신 속에 샤머니즘이 강한 지류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진충의 정신은 물론 삼국시대의 끝없는 위기 상황이 몰고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충효사상이 샤머니즘과 결합하게 되어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570p

당에서의 백제 유민들 가운데는 군문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은 백제인들이 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항쟁할 때 용맹성을 깊이 체감하였다. 무력으로써는 제압하기 어려운 대상인 백제인들을 당의 우환인 돌궐이나 토번 정벌에 투입했다. 흑치상지를 비롯한 사타상여와 예식진 등의 현달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백제 유민들의 기량은 그들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오류>

199p

이 만치가 곧 475년 한성 함락시 문무왕을 보필했던 목만치로 비정되기도 한다.

-> 문무왕이 아니라 문주왕이다.

450p

남생의 아들 현성은 내준신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 현성이 아니라 헌성이다.

489p

축천무후가 조회를 3일간이나 폐하고

-> 측천무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아름다움 - 고미술에 매혹된 경제학자의 컬렉션 이야기
김치호 지음 / 아트북스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미술 컬렉터가 쓴 에세이다.

수집욕은 없지만 미술, 특히 도자기나 서화 등 고미술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게 됐다.

책 디자인도 잘 되어 있고 내용도 괜찮았다.

고미술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 다소 사변적이고 당위적인 예찬론이 많아 뒤로 갈수록 지루하긴 했지만,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저자의 수집품을 소개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어떤 작품을 모으는지, 왜 그 작품을 사랑하는지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없어 아쉽다.

특히 전시 공간을 갖기 힘든 일반 컬렉터들은 자신의 수집품을 어떤 식으로 보관하는지 궁금하다.

나는 소유보다는 감상 쪽이지만 본질적으로 미에 대한 욕구는 같기 때문에 많이 공감했다.

특히 무라카미 류의 말을 빌려, 취미만으로는 큰 성취감을 얻기 힘들고 일로 접근할 때 비로소 몰두하여 큰 만족감을 얻게 된다는 주장이 신선했다.

돈을 들여 수집을 하는 사람들처럼 나 역시 독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생산성이 없는 단순한 취미는 그저 가볍게 즐길 뿐 깊이 몰두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만족도 역시 낮을 수밖에 없다.

관심이 가는 분야는 역시 서화이고, 그 외 도자기도 좋지만 나도 저자처럼 목가구나 토기가 참 좋다.

사방탁자 같은 목가구의 공간미, 비례미도 좋고 도자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 삼국시대 토기에 마음이 끌린다.

저자도 삼국시대 토기가 제 값어치를 못받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한다.

분청사기의 현대적인 조형미도 좋지만, 흙이 주는 투박함, 특히 수천 년 전의 기물이라는 긴 시간의 깊이까지 더해져 기회가 된다면 토기는 한 번 소장해 보고 싶다.

가격도 좋은 것이 백만원 수준인라니 초심자들이 관심가져 볼만 하겠다.



<인상깊은 구절>

미술품의 창작과 거래, 컬렉션 문화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국가든 개인이든 축적된 자본에서 창출되는 경제적 풍요를 토대로 꽃을 피우고 발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높에 평가받는 고급한 미술품을 비롯해서 세계가 찬탄하는 문화유산들은 대개가 절대왕조시대,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상류층의 후원과 주문으로 만들어지고 수집 보존되어온 결과임을 상기하자.

 근대를 지나 현대로 넘어오면서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이 일반 시민계급으로 분산되는 가운데 컬렉션 문화는 사회 저변으로 확대된다. 그러나 역사적 뿌리가 오래된 부(경제력)와 미술품 컬렉션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별 변함이 없다. 미술품 수요는 본질적으로 '소득'보다는 '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45p

우현 고유섭 선생의 말을 떠올린다. "한국 미술은 신앙과 삶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즉 '생활 자체의 본연적 양식화'라는 점에서 민예적 성격을 갖는다."

95p

과학기술의 수준이 낮고 더욱이 그 진보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던 근대 이전, 풍토와 마을이 인간의 미술활동을 비롯해 삶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를 경제력 향상과 물적 풍요의 원천으로 인식하는 이 시대에는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던 시대와는 달리 자연환경과 마을의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다. 그 대신 과학기술,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문명화와 같은 새로운 환경요소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

107p

당시만 하더라도 이 분야 연구 성과가 거의 축적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이 분야와 관련이 없는 농림학교 졸업 학력의 일본인이 이 정도의 연구보고서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이링 아닐 수 없다. 다쿠미의 그런 업적에 대해 나는 오직 조선 도자와 민예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114p

그 추도 호에서 1920년대에 이미 천재 도예가로 명성을 떨쳤던 가와이 긴지로는 다음과 같은 헌사를 남겼다.

"한일합방 이래 조선에 건너간 일본인들이 그 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취급했던가에 생각이 미치면 지금도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됩니다. 그런 가운데 아시카와 씨 등이 매사에 그에 대한 속죄를 하시던 일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복자가 저지른 과오. 그런 야만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가운데 당신이야말로 인간의 무지에 빛을 비추어준 분이었습니다."

 아사카와 노리다카, 그는 조선 도자기를 조선 사람보다 더 깊이 탐구하고 수많은 소중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아우 다쿠미와 더불어 조선의 도자문화와 민예를, 그리고 조선미술의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깊이 이해하고 사랑한 몇 안 되는 일본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39p

"인생에서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말이다. 

153p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회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김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께 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무라카미 류는 '취미'와 '일'에서 비롯하는 감흥이나 성취감의 정도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으며, 오직 일을 통해서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말에 너무나 공감한다. 그저 좋아서 하는 순수한 취미는 생산성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전심전력하면서 몰두하지 않는다. no pain, no gain 은 성취감에도 해당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직업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인간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므로 너무나 소중하고 사명감을 갖게 만든다)

162p

예를 들어, '완물상지'를 경계하는 유교적 시대정신이 미술창작이나 수집 감상 활동을 억제했다고 보는 관점이다. 유교정신에 충실한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하면 일리 있는 지적이라 하겠다. 하지만 나는 조선시대의 나라 형편이 미술활동을 후원하고 고급 골동서화를 즐겨 소장할 수 있을 정도로 물적 경제적 토대가 충분치 않았다고 보는 관점에 더 점수를 주고 있다.

165p

시대적으로 대략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서화를 수집하고 완상하는 취미는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왕실이나 종친, 또는 사대부만이 누릴 수 있는 고급하고 아취있는 생활의 한 방편이었다. 적어도 중인이나 상민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경제가 확산되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조류를 앞서 인식하고 전문기술 직종에 종사하면서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이 새로운 서화 수집과 감상층으로 가세한 것이다. 중인계층 가운데서도 특히 경제력이 확대된 의관이나 역관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은 당시 문화 선진국인 청나라를 왕래하며 새로운 사상사조인 북학을 받아들이면서 시대변화를 앞서 읽었고, 한편으로는 서화 컬렉션을 통해 사대부 영역으로의 진입을 꿈꾸기도 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세상에 구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문화를 선양하여 태평시대를 수놓음으로써 300년 조선의 풍속을 바꾸어놓은 일은 먼 훗날 알아주는 이가 나타날 것이다."

206p

마지막 세 번째 삶은 문화예술을 통한 삶이다. 문화예술의 세계에서는 1000년 단위로 흥망성쇠와 순환 질서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그 세계의 힘(삶)은 질기고 그 영향(생명력)은 오래간다는 말이다. 인간의 인식체계로는 영원의 삶, 내세의 삶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에 내재된 흥망성쇠와 순환 질서는 100년을 살기 힘든 인간의 안목이 아닌 역사의 안목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256p

우리 사회에서 고미술품 딜러나 컬렉터들이 문화계를 이끄는 지성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신뢰를 토대로 하는 거래문화의 정착은 결국 고미술계 사람들의 양식과 모럴에 달려 있다는 보편적 인식에 지금의 현실이 겹쳐질 때, 그 둘의 어긋남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오류>

136p

도판의 주인공은 메디치가를 세운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가 아니라 훗날 공작 가문을 연 후손인 코시모 1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후기 중앙 군영과 한양의 문화 장서각 한국사(조선사) 강의 9
노영구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체제로 바뀌면서 군대가 한성에 주둔하게 되고 그로 인해 바뀌게 된 제반 상황에 대한 이야기다.

여러 명의 필자가 쓴 책들은 통일성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하나의 주제로 잘 압축되어 있는 좋은 기획이라 조선 후기 군사 체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수도 방위에 중점을 두게 되어 한성에는 많은 주둔군이 생긴다. 

당시 한양에 거주하는 남성 인구가 10만, 여성이 10만인데 군사가 무려 2만이니 남자의 20%, 전 인구의 10%가 군인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흔히 문치주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군사가 한양에 주둔했다는 것도 놀랍고 무신정변 등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잘 관리된 점도 신기하다.

훈련도감 군인들은 모병제인데 미달되자 3년에 한 번씩 전국 각지에서 군역을 질 승호군을 뽑아 올린다.

그런데 한 번 승호군에 뽑히면 고향의 재산을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상경해야 돼서 한양은 군인들의 거주지 부족에 시달린다.

또 처음에는 재원을 조달했으나 재정이 피폐해지고 균역법 시행 등으로 군필이 줄어들자 군영에서는 활자 인쇄나 조총 판매, 심지어 화폐 주조 등을 하게 된다.

군영에 장인들이 소속되어 직접 무기를 만들었기 때문에 사적인 상업 활동도 어느 정도 용인되어 난전 등에서 팔게 되자, 시전 상인의 이득과 충돌하여 금난전권 문제로 다투게 된다.

국사 시간에 배울 때만 해도 시전 상인들이 난전을 금하여 이익을 독점하려 하자 정조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철폐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시전 상인들 역시 시장에서 장사하는 권한을 얻기 위해 많은 세금과 역을 부담하고 있고 군영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면서 군대의 힘을 빌려 괴롭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라에서는 군대에 제대로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기 때문에 알아서 먹고 살 길을 찾으라는 의미로 적당히 눈감아 줬던 모양이다.

역시 역사는 간단하게 선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문제다.




<인상깊은 구절>

24p

조선의 기병은 16세기 말까지도 전투의 주역이었다. 물론 16세기 명나라의 요동 지배가 안정적이었으므로 조선의 군사적인 역할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전과 같은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줄어들어 군사력이 상당히 축소되었다. 이에 더해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발달한 수전 농법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주로 말 목장이 있었던 저지대 일대가 논으로 개발되었고, 목장이 주로 해안 도서로 이동하면서 이전에 비해 말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정병 중 기병인 기정병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보병, 즉 보정병으로 전환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

51p

기병이 공격의 주요 무력이 된 것은 그들의 신분이 일반인(농민)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왕조 국가의 신분제에서 력을 소유하는 지배층에서 기병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을 유지하는 비용도 문제지만, 기병이 되기 위한 무예의 단련과 기간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병이 사용하는 검술, 궁술의 습득은 아동기부터 학습해야 양성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따라서 기병 위주의 군대는 신분제가 강하게 유지되는 사회가 뒷받침한 결과라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66p

장용영에 대한 우수성과 뛰어남을 말하지만, 군사적으로 보면 새로운 군영이거나 신무기로 육성된 군부대도 아니었다. 정조와 화성이 언급되면서 등장하는 군영이어서 조명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정조 사후 장용영이 급속히 해체되고 그 흔적조차 사라진 것을 보면 확인되는 일이다. 장용영의 체제나 군병이 군사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면 비록 해체되더라도 다른 군영에서 접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심지어 정조 대 가장 큰 기념비적 건물인 화성조차 더 이상 군사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결국 정조가 장용영을 이용해 군제를 변화시키고 병력을 재배치한 과정은 군사력 강화라든지, 수도권 방어망의 구축이라는 군사적인 면보다는 군영을 이용해 정국을 좌우하려던 심중에서 나온 국왕의 통치행위로 해석해야 하겠다.

 정조가 서거한 1800년, 장용영은 별다른 논쟁도 없이 해체 수순에 들어갔다. 일견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장용영의 병력과 재원이 다른 군영에서 이속한 것이 많았고, 화성을 지속적으로 경영할 정도로 국가 재원이 넉넉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70p

정조가 주도해서 창설한 장용영도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기구이며, 정조의 정치적 명분을 수행하던 임시 기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장용영 설치가 일시적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정부의 공식 기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신료들의 인식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환지의 말뜻은 장용영이 정조와 신료 간의 타협에 의해 만든 것이 아닌 국왕이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만든 기구이므로 더 이상 존속시킬 이유가 없으니 철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으로 보인다. 심환지와 신료들의 장용영에 대한 시각은 정조가 장용영을 설립하기 위해 기존 군영들을 재편하고 축소하던 시각과 별반 차이가 없다. 군영은 정국을 돌파하거나 새로운 정치 판도를 만들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던 것을 확인하여 준다.

 정순왕후는 국가의 재정을 풍족하게 하게 하는 민생 위주의 정치를 하기 위해 장용영처럼 쓸데없는 제도는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조도 시대가 바뀐 상황에서 동일한 정책을 시행했을 것이라고 했다. 관료는 물론 상민에 이르기까지 장용영의 군사적 기능은 유지해야 한다는 등의 반대 의견이 없었던 것은 심환지 등이 장용영 철폐를 주장한 것에 대부분 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95p

광해군이 풍수나 술법에 많이 의지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다.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를  꺼려했던 것은 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곳이기 때문이다.

106p

왕조 시대의 국왕은 국가와 같은 의미를 지닌 존재였다. 그 때문에 왕을 지키는 것은 국가를 지키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123p

양 난 이후 오군영이 설치되면서 '북벌'이라는 기치 아래 군사력이 증강되었지만 실상 급료병 운영은 많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는 사업으로 군문을 창설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지에도 많은 재정이 투입되어야 했다.

 당시 유통을 고려한 화폐는 백성이 동전 형태로 당장 입거나 먹을 수 없었지만, 동전을 주조해 배포할 때 액면가대로 곡식을 받거나 주전 과정에서 이익을 확보한다면 그만큼 잉여 자원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부 입장에서는 주전을 통해 제작한 동전 자체로 부가가치를 높인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것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정부는 조선초기부터 화폐의 유용성에 주목해 민간에 화폐를 유통시키려고 노력했다. 특히 동전뿐만 아니라 비교적 재료비가 적은 저화를 유통시키려는 노력을 개국 초부터 지속했다. 저화 같은 지폐는 액면가에 해당하는 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 못해 민간에서는 화폐의 가치에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금속화폐는 제작량이 충분하지 않아 전국적으로 사용을 강제할 수 없었던 이유가 컸다. 

132p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군문은 정번한 재원뿐만 아니라 주전을 통해 남는 재원을 창출했고 이를 국가재정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164p

18세기 서울시장에서 난전의 폐단으로 문제시되는 부류는 생계를 위해 좌판을 벌이는 빈잔한 민호가 아니라 왕실, 세가, 군문처럼 권력을 가지고 조달시장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특히 균역법 시행 이후 군문에서는 줄어든 군포 수입을 균역청으로부터 급대받기는 했지만, 급대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재정의 부족분을 만회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문 차원에서 군인들의 상업활동을 조장한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특히 군문의 장인들은 직접 수공품을 생산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난전활동에 가담하기 쉬웠다.

169p

정부에서는 왜 시전상인들의 요구에 따라 군문의 난전활동을 강력하게 규제하지 않았을까? 형조와 한성부,사헌부로 대표되는 삼법사가 난전에서 거두는 속전이 관원의 급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난전을 일방적으로 줄일 수는 없었다. 정부로서도 이미 속전을 재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으므로 난전을 없애기보다 단속하는 차원에서 관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기존의 금난전권을 행사하는 시전 상인의 특권을 최소한으로 인정해 주는 선에서 정부는 서울시장의 참여 계층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자 했다. 군문의 경우 이미 음성적인 상업활동을 통해 이권에 가담하고 있었던 데다가 군문에 속한 군인들 역시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국역에 편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의 상업활동을 일방적으로 규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195p

화기도감은 국왕이 장인들의 작업 실태를 매월 보고받을 정도로 국가적 사업의 성격을 지녔으므로 장인들을 동원하는 방법도 강제성을 따고 시행되었다. 

198p

당시 개인 휴대 화기로서 조총보다 뛰어난 것은 없었으며 왜란을 통해 이미 그 위력이 증명되었는데도 생산에 주력하지 않은 것은 큰 의문이다. 광해군 대는 조선에서 조총 제작에 용이한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조총의 지속적 개발과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데도 대형 화기인 화포를 중점적으로 제조했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당시의 대외 방어책이 산성 중심이었고, 조선초부터 야인의 침입에 화포가 큰 효능을 발휘했다는 것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겠다.

204p

왕조시대에 개인이 무기를 보관한다는 점은 의아할 수도 있지만, 상번군이 화기인 조총과 개인 군장을 모두 구매해서 상경하던 일은 조선후기에 흔한 일이었다.

216p

우의정 정유성이 "군복 차림으로 도성 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병기를 가진 군사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어 식자들은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조선후기 한성부는 많은 수의 군병들로 가득했는데, 지방에서 올라온 군병들이 서울 인구 증가에 큰 원인이 되었다.

222p

17세기 국방력 강화와 함께 국가는 승호군의 수효를 점차 증액하였는데, 이는 많은 수의 지방 군병이 서울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군병들은 생활기반이 전혀 없는 서울에서 적은 급료로 가족까지 부양했으므로 서울의 상권 발달을 이용해 상업활동을 하거나 각종 토목공사, 하역작업의 일용노동자로도 활동하였다. 하지만 절도나 강도 행각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들이 생길 정도로 지방 군병의 서울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289p

18세기 후반 조선의 중심인 서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 중의 첫째가 바로 배경 없는 무인들이 관직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 언급될 정도로 차별받는 무인들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표현이다.

303p

군영 소속 무인들은 공공 분야에서 민간인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조선시대는 생활 전반에 관습법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시대였다. 그러므로 미풍양속을 해치는 사건 혹은 그 사건의 주체들에 대한 간섭 및 통제력 역시 어느 정도 예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궁중서화 1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도록 제6책
국립고궁박물관 지음 / 그라픽네트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회화와 서예 작품 도록이다.

논고가 많지 않아 얻을 만한 정보가 적은 점이 아쉽지만 대신 도판이 아주 선명해서 감상하는 맛이 있다.

이런 큰 도록들은 대출제한 되는 경우가 많은데 대출이 돼서 집에서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해강 김규진의 죽란도 병풍이다.

이번에 국립중앙박물관의 근대서화전에서도 비슷한 작품을 봤던 기억이 난다.

굉장히 큰 규모의 병풍에 단지 먹과 붓으로만 저렇게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감탄스럽다.

격조 높은 궁중의 청록산수화도 멋스럽지만 역시 이름있는 화가들의 예술 작품들이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다.

연잎을 그린 이도영의 수묵담채도 먹이 주는 청아한 감상미가 있어 좋았다.

그림과 글씨를 자수로 수놓은 자수병풍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기도 힘든데 그걸 실로 수놓기까지 하다니, 바느질 솜씨가 정말 대단하다.

서예는 감상하는 법도 모르고 다 비슷해 보였는데, 이하응의 서예 작품 바로 다음에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의 글씨가 실린 걸 보니 수준 차이가 극명하게 대조되어 아, 하고 무릎을 쳤다.

흥선대원군의 글씨는 그야말로 예술적인 작품 같은데, 뒤에 나온 손부의 글씨는 마치 초등학생이 붓글씨 연습한 것처럼 보인다.

명성황후의 글씨는 좀 나은데 여성들은 붓글씨 쓸 일이 많지 않아 그런지 단정하긴 하지만 서예가 주는 예술적 느낌이 전혀 없다.

서예 병품을 보면 과연 동양에서는 붓글씨가 회화와 같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믿겨진다.

흥선대원군의 난 그림도 시서화와 여백의 미가 어우러져 아주 좋았다.



<인상깊은 구절>

369p

궁중장식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장식적인 용도에 부합하는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장식적인 색채가 사용되었지만 깊이 있는 색감의 구현으로 지나치게 튀지 않는 품격을 갖추고 있는 것도 궁중장식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회화 유물 중 일부에서는 단순화, 도식화가 심화되고 정교하지 못한 필치와 이질적인 색감들이 눈에 띈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낮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그림들은 조선말기와 대한제국시대를 거치며 궁중 회화 전담 기구가 폐지되고 외래 문물이 밀려들어오는 등의 급격한 변화를 겪던 시기의 산물로 보인다. 정교한 필법과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감이 어우러져 높은 격조를 자랑하던 전통 궁중장식화의 흐름이 이렇게 단절되고 만 것이다. 


<오류>

366p

혜경궁 홍씨 (1737-1815)

-> 혜경궁은 1737년생이 아니라 1735년생이다.

426p

안중식 (1851-1919)

-> 안중식은 1851년이 아니라 1861년생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