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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
이도학 지음 / 학연문화사 / 2018년 7월
평점 :
600 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분량이라 어려울까 봐 걱정했는데 교양서 수준으로 쉽고 재밌게 읽힌다.
특히 사진이 많아 지루하지 않았다.
아쉬운 점은 동어 반복이 많고, 과도한 논리전개로 간간히 동의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삼국유사에 나온 대로 백제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이고 한 발 더 나가 의자왕이 선화공주의 아들이며 처가와 외가가 적국인 신라라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더더욱 신라 공격에 앞장섰다는 식이다.
이미 미륵사지 석탑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나와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밝혀졌는데도 아무 근거도 없이 그녀는 나중 부인일 것이고 선화공주가 첫번째 부인이며 의자왕의 생모라고 정황상 근거로 밀어부친다.
전공자의 책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거친 논리 전개라 공감하기 힘들었다.
전설에 빗대어 소정방이 당나라에서 죽은 게 아니라 삼국통일 후 신라와 대치 중일 때 피살됐다는 주장도 수긍이 안 간다.
당의 역사서에 버젓이 나와 있는 사망 기록은 개연성이 없다고 무시하고, 우리나라에 떠도는 전설을 근거로 소정방 피살설을 주장하는 게 의아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소한 부분이고, 그 외 대부분의 역사적 평가에는 많이 공감했고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인들의 명예를 되살려 준 점에 대해 감동했다.
삼한 통합을 이루려는 신라와, 옛 한사군의 땅을 되찾겠다는 당나라의 이익이 맞아떨어져 한반도에 비로소 완전한 통일국가가 성립됐다.
단지 고구려 옛 땅을 잃었다는 이유로 한반도 최초의 민족국가 성립을 폄훼하는 요즘 대중들의 역사인식이 안타깝고, 소국이었던 신라가 지도층의 살신성인 정신과 놀라운 외교력, 그리고 외세를 몰아내고 하나의 완전한 국가를 이룬 단합력 등은 후손인 우리가 높이 평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춘추와 그 아들인 문무왕, 그리고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의 일화는 읽을수록 가슴이 뜨겁다.
한반도의 어떤 왕이 나라를 위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전을 편 적이 있었던가.
아버지 김춘추는 통일 전쟁을 위해, 아들인 문무왕은 당을 몰아내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김유신과 화랑도는 과연 신라가 통일을 이룰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126p
고구려가 국왕 주도하에 말갈병과 더불어 요서 지역을 공격한 배경도 재해석이 가능하다. 수 문제 이래의 고구려 침공 배경도 고구려의 침공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수대에 고구려 서쪽 영토가 갑자기 넓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에 위협을 느낀 수가 고토수복론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침공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와의 전쟁 전 고구려 영토가 요서 지역에 소재했다는 것이다. 수가 붕괴되고 당이 들어선 후에는 고구려와 관계 정상화를 서둘렀다. 그러한 차원에서 경관을 허물어 적대 의식을 청산하였다. 동시에 천리장성도 축조하여 고구려의 서쪽 계선을 명확히 했다. 요서 지역에 소재한 고구려 군진이 일제히 요동으로 철수한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 집권 후 당의 내정간섭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써 고구려는 요하를 건너 양국 간의 공지였던 영주와 지금의 천리장성 사이를 석권했을 수 있다. 이 구간은 거란이나 해와 같은 유목민족들이 이동하거나 잠주했던 곳이었다. 당으로써는 이를 고토수복론의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131p
경관을 헐게 된 배경에는 고구려측의 양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고구려와 당 간의 화평의 표지로써 경관을 헐고 천리장성 축조를 시작한 것으로 보겠다.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축조함으로써 중국을 넘볼 일이 없음을 가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598년 고구려군의 요서 기습과 같은 침범이 재현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즉 중국에 대한 불가침 표지라고 하겠다. 동시에 당으로 하여금 요동에 대한 고지수복론을 재론하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고구려와 당이 각자 절충하여 타협하는 선에서 고구려의 서계가 설정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고구려는 양국 간의 화평을 꾀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화평 관계는 642년에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파견한 연개소문이 그래 10월 영류왕을 시해하고 집권함으로써 파탄 상태에 빠졌다. 화평의 표상인 천리장성 축조에 파견된 이가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그에 대한 불만으로 대당 유화론자인 영류왕을 시해하고 대당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의 침공을 막아낸 후에 천리장성이 아무런 상징적 구실도 못한다는 것을 체감하였다.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요서 지역의 거란이나 해를 비롯한 주변 민족을 영향권에 넣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랬기에 고구려의 지배권이 요하 서쪽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고 본다.
151p
연개소문의 위세가 비록 하늘을 찌르기는 했지만 복종하지 않는 세력이 지방에 여전히 온존했음을 뜻한다. 아울러 연개소문이 지방의 성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과정을 통해 일정 기간 고구려가 내전 상태에 놓였음을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연개소문의 지배 체제를 강고하게 만든 것이 당군의 침공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군을 파견하여 지원했다. 이러한 비상시국의 전쟁 극복 과정을 통해 연개소문의 지배력은 자연히 지방 말단까지 미치는 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연개소문 아들에까지 권력이 승계되는 세습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193p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의 장수 유원외가 선조 앞에서 한 말이 있다.
"귀국은 고구려 때부터 강국으로 불리었는데, 근래에 와서 선비와 서민이 농사와 독서에만 치중한 탓으로 이와 같은 변란을 초래한 것입니다."고 잘타했다. 고구려로 인해 강국 이미지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229p
신라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의 공격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신라는 바다 건너의 당과 제휴하게 되었다. 백제와 연화하는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으로 거의 유일한 세력이 당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고구려를 침공함으로써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231p
반란군의 기세에 여왕은 무서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김유신이 여왕을 뵙고 말하기를 "길흉은 무상하여 오직 사람이 하기에 따른 것입니다. 덕이 요사를 눌러 이길 수 있으니 星辰 의 변이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왕은 근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즉시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안기고 연에 실어 날려 하늘로 올라가게 하였다.
(과연 삼국을 통일한 명장의 언사답다. 선덕여왕은 이런 용장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했을까!)
238p
전통적 권위의 위광을 지닌 정치적 수반으로서의 신라 왕, 쟁란의 시대를 군사로서 직접 지배하는 김유신, 그리고 국가존망에 깊이 관련되는 외교를 짊어진 김춘추의 3세력이 결합하여, 신라 독자의 권력집중 방식을 성립시켰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 후에 전개된 삼국통일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친당자립의 장기적이고도 공고한 체제가 확립될 수 있었다. 실제 신라는 곡절 많고 복잡한 삼국통일 과정에서, 친당책을 추구하면서도 자립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였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을 포섭하여 백제 고토를 회복하고,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을 옹호한 김춘추와 김유신은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김춘추의 극적인 혼인담은, 지방호족 세력을 대표하는 야심 많은 김유신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의 제약을 깨고 신라 중앙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할 목적으로, 김춘추의 '등'을 빌리기 위한 주도면밀한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로 인한 두 사람의 운명공동체적인 결속은, 7세기 한반도와 만주대륙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 받을 수 있다.
249p
당은 고구려 침공과 그 지배를 위한 명분으로서 역사적 근거를 자주 들먹였다. 이러한 실정이니 고구려 패망 후 그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에 선선히 넘겨 줄 이유가 없었다. 신라로서는 현실적으로 당의 지원이 다급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타협하고 절충하는 선에서 '평양 이남' 지배로 선을 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신라는 삼한 영역의 당초 북계인 임진강을 넘어섰다. 즉 대동강선까지의 고구려 영역을 지배하는 발판을 구축하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이 점은 주시할만한 대목이다. 요컨대 신라 삼국통일의 영토적 불완전성은 통일 과정에서의 역부족이 아니었다. 당초부터 내재된 이러한 약정의 산물이었다. 아울러 신라는 통일의 정당성과 명분의 확보에서 중요한 소재를 개발하였다. 즉 "삼한을 합쳐서 한 집을 이루었다"는 표제인 것이다. 분열을 청산한 통합은 분명 성과요 위업이라는 긍정적 기제의 극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당은 고구려 영역 가운데 위대 이후의 요동군과 과거 한4군 영역을 수복지로 지목하였다. 당 태종은 "요동은 옛적에 중국 땅이었다. 짐은 장차 가서 이를 경략하려 하는 것이다"고 했다.
250p
고구려 영역 가운데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로 마무리하고, 중만주와 동만주 일대가 방치된 것은, 이러한 당의 영역관에 기인하였다. 그랬기에 방치된, 즉 신라나 당으로서는 일종의 무연고지였던 동만주를 기반으로 발해가 흥기할 수 있었다. 요컨대 당의 고구려 침공은 고토탈환전이었고, 신라로서는 삼한통합전이었다. 고구려 멸망은 이념적으로는 중국인들의 누대 숙원과 신라인들의 삼한통합대망론의 귀착점이었다.
신라인들은 자국 영역의 북계인 대동강을 삼한의 북계로 인식했다.
276p
의자왕의 경우에는 지속적인 음주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알코올 중독의 결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복잡한 정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잔치에 참여한 구성원들 간의 일체감을 조성하여 강력한 왕권을 유지하고자 한 것이다. 의자왕이 성충이나 흥수의 간언을 배제하거나 제거할 수 있었던 요인도 술에 기반하였다. 술의 힘을 빌어 단호하게 정적들을 제거했다. 의자왕은 신라와 당의 침공 대비라는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자신은 신라와 당의 협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았다. 그럼에도 경고긔 비상 나팔을 불어대자 짜증을 낸 것이다. 의자왕이 현실을 잊거나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술을 이용한 측면도 배제하기 어렵다.
282p
진덕여왕은 "작은 것이 큰 것을 범하려다가 위태로워지면 장차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것'은 신라이고, '큰 것'은 백제를 가리킨다. 이에 김유신은 "군사가 이기고 지는 것은 크고 작은 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을 따름이옵니다. 지금 저희들은 뜻이 같아서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저 백제라는 것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없나이다"고 했다.
(死卽生 生卽死 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생각난다. 난세의 영웅들은 범인이 근접할 수 없는 담대하고 초연한 기개를 가진 듯하다)
310p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에 이르러 강가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 군대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했다.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인해 천시를 어길 수 있으리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라고 말하고는 이내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자, 새는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327p
의자왕은 종전에 백제가 취해 왔던 것과는 달리 당에 크게 양보하면서 적극 예속되는 선에서 타협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의자왕은 예하의 신료들과 무력 수단을 당군에 깨끗이 헌납하는 항복의 길을 통해 멸망의 기로에 선 국가의 활로를 트고자 했다. 의자왕은 적대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소정방의 경우도 백제와 기를 쓰며 싸워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당의 숙적은 고구려지 백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제를 멸망시키는 일은 신라 왕실의 숙원이었다. 당은 궁극적으로 고구려를 장악하기 위한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참전했을 뿐이었다. 그랬기에 당은 백제 공략전에서 소극적으로 대처하였던 것이다.
345p
신라와 당군에 힘차에 대적하던 백제 군대는 일제히 항쟁을 멈추었다. 그런데 신라측에서 백제의 존속을 용납하지 않았다. 신라로서는 숙원의 백제 멸망을 손아귀에 넣었는데 포기할 리 만무했다. 결국 신라의 강력한 항의와 더불어 고구려 정벌에 필요한 신라로부터의 병참 지원 문제도 따랐다. 당은 백제 멸망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454p
김부식은 고구려가 패멸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했다. 고구려가 자리잡은 중국의 동북 모퉁이는 난세에는 영웅들이 많이 일어나 격동치는 곳이니 '두려움이 많은 땅'이라고 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강역을 침략하여 원수를 맺고, 또 중국의 군현에 들어가 살았으니 전쟁이 언제나 끊이지 않았고 편안할 날이 없었다고 했다. 오만한 고구려의 몰락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부식의 평가는 틀리지 않다. 고구려는 수,당과의 오랜 전쟁을 통해 국력이 피폐해져 있었다. 614년 수의 제2차 침공시 고구려는 "우리나라 또한 어렵고 궁핍하여 있었다"고 실토했다. 고구려는 수, 당의 침략을 모두 격퇴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은 중국에 빼앗겨 줄어들었다. 고구려로서는 실리를 챙기지 못한 승리였다. 오히려 패배한 중국이 실리를 챙긴 측면도 있었다.
김부식이 지적한 고구려 패망 요인 가운데 '겸손의 뜻이 없고'는 굽히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재현할 수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멜로스인의 당당한 태도는 국가 파멸로 이어졌다. 유연성을 잃은 연개소문의 굽히지 않는 태도 역시 이와 동일하였다.
462p
"당군이 우리를 위해서 적국을 멸망시켰는데, 도리어 그들과 서로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겠소?" 김유신인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주인을 물게 되니 어찌 국난을 당하고서도 자신을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디 대왕은 이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고구려가 멸망한 668넌 9월 이후 신라는 당초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당을 실력으로 축출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서 신라는 고구려의 재건을 명문으로 했다. 신라는 우선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하였다.
476p
<삼국사기> 열전은 김유신 한 사람에게 지나친 편중을 보여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삼국사기>의 저자는 김유신에게 이다지도 많은 비중을 할애하였을까?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김유신의 생애가 후대의 귀감이 되는 한 시대의 권화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김유신이 출생하여 15세에 화랑이 된 후 79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일생 기록인 김유신전은 멸사봉공과 위국충절로 일관되었다. 특히 신의가 크게 돋보이고 있다.
가령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당군에게 식량을 보급하기 위해 신라 군대가 나섰다. 그런데 엄동설한이라 군사와 우마들이 얼어 죽는 형편이었다. 이때 칠순을 바라보는 대장군 김유신이 어깨를 벗어 붙이고 앞으로 달려가니 젊은 장병들이 힘을 다하여 달려가며 땀을 흘리면서 감히 춥다는 말을 못하였다. 그 밖에 국운을 건 낭비성 전투에서 신라 군대가 계속 패하여 밀리자 김유신은 말에 올라 칼을 뽑아 들고는 단기로 고구려군 진영에 돌진하였다. 그는 적장을 베고 진영을 흔들어 전세를 반전시키는 등 수범을 보인 자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거인 김유신은 시대의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건너갔다.
(이런 지도자의 표상같은 위인이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둥 폄훼당하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494p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소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 김문영을 군문에서 목을 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위의 기사를 통해 목전의 백제군과 대처한 상황에서도 김유신은 소정방과 정면 대결하였기에 김문영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 의존이 아니라 외세 이용이었다. 외세 이용도 자주성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친당자주 정권의 면면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런 지도자였으니 군사들이 충심으로 믿고 따랐을 것 같다)
505p
소국 신라가 대국들을 상대하여 지루하게 투쟁해서 얻는 성과였다. 통일전쟁에 있어서 신라 지배층의 사망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당군과의 전투에서 국토를 사수하기 위해 현령급의 사망은 비일비재했다. 이들이 수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랬기에 통일을 이루어 넓어진 영토와 불어난 인구 환경 속에서 토지와 노비를 상급으로 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정도로 지배층의 희생은 실로 컸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로 인해 문화의 황금기가 열리게 되었다. 그러한 문화적 전통은 고려를 경유해서 조선과 지금의 대한민국에까지 면면히 이어졌다고 본다.
신라가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소정방의 발언에 적혀 있듯이 신라는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신뢰로 맺어진 관계였다. 신라는 상대등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국왕 중심의 일원적인 국가체제를 구축했다. 국가라는 대의를 위한 희생을 시대의 권화로 여겼다. 지배층 전사단이 수범을 보였다. 이는 백제나 고구려의 지배층이 분열된 상황과는 비교된다. 고구려가 수 양제의 대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자산은 사회적 인화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절대권력 구축 이후 고구려 사회는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나마 연개소문의 강고한 권력은 한시적이나마 국가를 지탱하게 한 요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망이라는 절대권력의 소멸은 마지막 결속력의 줄을 끊게 했다. 백제도 의자왕이 강력한 권력을 구축한 15년 이후부터 민심 이반이 가속되었다. 신라는 이러한 고구려나 백제와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508p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최고의 야전 지회관으로 평가받은 조지 스미스 패튼은 전쟁을 회고하면서 "좋은 군인이 되는 것은 자랑스러운 특권"이라며, "좋은 군인이 되려면 규율, 자존감, 부대와 국가에 대한 자긍심,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충만한 긍지는 정신전력의 기본이었다. <신라사연구> 서문에서 쓰보이 구메죠는 신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드디어 한반도를 통일하고서 3백년간 국사를 유지한 것은 당의 외번이 되어 그 부액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라인들의 마음속에 응위한 바탕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고 단언했다.
522p
소나의 전사 소식을 접한 그 처는 "내 남편은 항상 말하기를 '장부는 진실로 마땅히 전쟁에서 죽어야지, 어찌 병상에 누워서 집사람의 돌봄을 받으며 죽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의 평소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지금 죽은 것은 그 말과 같다"고 하였다.
화랑은 신라 지배계급 가운데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야심 많은 귀족의 자제가 출세하는 길이었다. 화랑의 낭도가 되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회의 유동성을 저지해 온 엄격한 골품제로부터도 어느 정도 탈피할 수 있었다. 때문에 화랑은 인도적 사회를 만드는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를 지녔다. 그리고 화랑제도는 신라의 문화에 커다란 활기를 가져다주었다. 신라 문화에 깊은 뿌리를 내린 비합리적인 열병적 사고는 무려 3백여 년 간에 이르는 오랜 기간 동안 주민들을 끊임없이 동원시키게 했다. 신라 왕은 삼국통일전쟁을 국가의 신성한 대과업으로 정당화시켰다.
화랑의 역할로 인해 신라 사회가 격조 있는 품격 사회로 전환하였다. 화랑들이 일상 생활에서 보여준 신의와 품격은 귀감이 되기에 족했다. 이들을 선망하면서 지금까지의 본성에 좌우된 거친 삶을 되돌아보게 하였다. 그 결과 격렬한 전쟁 속에서 사회 전반의 격조를 상승시켰다. 이렇듯 화랑도는 신라 사회를 선도하는 동력원이었다. 김대문은 삼국통일을 위해 전장을 뛰어다닌 신라의 장병과 화랑들의 보국적인 역할, 그리고 그들이 맛보았던 승리의 감격과 전장에서 속절없이 사라진 동료들의 죽음에 대하여 깊은 비탄을 느꼈던 것 같다. 이들의 무사로서의 꽃다운 행적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화랑세기>를 집필했다고 생각된다.
왕족인 김흠운은, 낭도들이 아무개가 전사하여 지금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말하면, 개연히 눈물을 흘리고는 하였다. 감읍한 것이다. 김흠운과 같은 문하에 있던 승려 전밀이 이러한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적진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뒤 김흠운은 백제와의 전쟁에 출정했다. 부하들이 "공은 신라의 귀골이니 적의 손에 죽는다면 백제의 자랑거리요 우리에게는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라고 말하면서 후퇴하기를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굳게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칼을 뽑아 뿌리치고는 적진에 돌진하여 여러 명을 죽이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서로 군사를 일으킨 이래로 그 풍속이 나아가 죽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물러나 사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하여 王事 로 죽은 자가 귀산 이하 수십 인이 있었으나, 백제가 망할 적에는 계백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적에는 죽어 절개를 지킨 자가 하나도 없었다. 고구려, 백제의 절의가 퇴폐한 것이 이 같았으니, 어찌 신라를 대적할 수 있었으랴!"고 했다. 백제나 고구려가 절의로 충만한 신라를 이길 수 없었다고 단언했다.
김종선 교수는 화랑의 정신세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 "국가를 위한 광적이고 일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적 행위는 신라 무사들의 정신 속에 샤머니즘이 강한 지류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진충의 정신은 물론 삼국시대의 끝없는 위기 상황이 몰고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으니 충효사상이 샤머니즘과 결합하게 되어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띠게 된 것으로 보인다."
570p
당에서의 백제 유민들 가운데는 군문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은 백제인들이 국가를 회복하기 위해 항쟁할 때 용맹성을 깊이 체감하였다. 무력으로써는 제압하기 어려운 대상인 백제인들을 당의 우환인 돌궐이나 토번 정벌에 투입했다. 흑치상지를 비롯한 사타상여와 예식진 등의 현달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백제 유민들의 기량은 그들 스스로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오류>
199p
이 만치가 곧 475년 한성 함락시 문무왕을 보필했던 목만치로 비정되기도 한다.
-> 문무왕이 아니라 문주왕이다.
450p
남생의 아들 현성은 내준신의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 현성이 아니라 헌성이다.
489p
축천무후가 조회를 3일간이나 폐하고
-> 측천무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