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과 이슬람 - 그 문명의 역사와 사상
임병필 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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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읽은 이와나미 문고의 <이슬람 문화>에 비하면 깊이가 얕은 느낌이지만 같이 읽어서 도움이 됐다.

이슬람 세계 중에서도 주로 중동의 아랍 국가에 초점을 맞췄다.

표지디자인은 산뜻하고 예쁜데 도판이 전부 흑백이라 아쉽다.



<인상깊은 구절>

170p

샤리아의 법 제정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코란, 순나, 법학파들을 통해 '돼지는 불결하다'는 것을 돼지 금지의 일관된 이유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어디에서도 돼지 금지를 위반할 시의 처벌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세계에서는 핫드형을 집행하는 술 금지보다 아무런 처벌이 없는 돼지 금지가 무슬림들이나 비무슬림들 모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는 돼지 금지를 준수하는 것이 알라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신념과 정체성의 유지나 실천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돼지 금기의 복합적 요인들이 무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돼지에 대한 금기를 지키려는 것은 타종교와의 차별성과 이슬람이라는 집단적인 자기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300p

아랍 사회는 매정스럽고 엄하고 냉혹하다.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에의 동정은 없다. 개인에게 가혹하다. 사소한 실수로도 큰 질책을 당한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인정되면 과실은 용서를 받을 것이나, 나쁜 일을 범한 사람에게는 평생 동안 비난이 따라다닌다.

 아랍인들은 무엇이든 숨기려고 든다. 자기 행위를 밝히려고 하지 않는 것은 그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중요한 일은 비밀리에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혼자만 진행한다면 불리한 가치판단을 받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랍인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는 무엇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말에 따라 사는 듯하다. 사회에서 벗어나 자기를 알아보는 이가 없는 곳에 사는 아랍인의 행동에는 놀랄 만한 변화와 이완이 일어난다. 

307p

"주님은 죽음으로만 우리를 공평하게 하신다"

종교를 원망하는 속담이다. 이집트인들은 열악한 자연환경 속의 삶에서 만족보다는 불만족이 많았기 때문에 다음과 이런 속담들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속담은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인간들 간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하기에 결국 죽어서 공평해질 수 있다며 신을 원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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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의 마지막 승자는 누구인가? - 근세 초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4
김원중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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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이 시리즈는 분량이 작으면서도 역사의 여러 주제에 대한 쉽고 깊이있는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괜찮은 기획물 같다.

홍보가 많이 안 된 것 같아 아쉽다.

살림 문고나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보다 훨씬 깊이있다.

왜 대항해 시대는 서유럽이 아닌 이베리아 반도에서 먼저 시작된 것일까?

특히 포르투갈은 당시 유럽의 부국도 아닌데 말이다.

이베리아 반도는 피레네 산맥으로 가로막혀 지중해 무역에서 이탈리아 등에 밀린 상태였고 특히 에스파냐는 국토 회복 운동을 통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데 총력을 기울이던 때라 유럽 대륙 내에서의 확장을 추구하기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의 결단은 놀랍다.

과학 기술이 일천하던 시절에 모험심을 갖고 바다로 나가게 한 지도자의 리더쉽이 나라를 중흥시킨 것이다.

포르투갈은 유럽의 빈국이었기 때문에 해상 무역을 위한 상관을 건설하고 이익을 얻고 싶었을 뿐 후발주자인 서유럽처럼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희망봉을 돌아 찾아간 아시아와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이 함부로 점령할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나라의 힘을 밖으로 팽창시키려 한 에스파냐는 운좋게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체제가 후진적이었던 인디언들을 점령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아시아 국가들이 포르투갈과 무역할 제품들이 많았던 반면, 인디언들은 유럽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상품이 부족해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은광을 개발하고 대농장을 직접 운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디언들의 몰락으로 에스파냐인들의 잔혹한 학대 등을 거론하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책에 나온대로 천연두 같은 질병이었을 것이다.

마치 유럽 인구의 30%가 흑사병으로 쓰러졌던 것처럼 말이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점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고찰이었다.



<인상깊은 구절>

37p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이 1492년 무슬림들의 최후의 보루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오랫동안 사회의 필수적인 구성원이었고 예술, 상업, 지식에 지대한 기여를 해 온 유대 인과 무슬림들을 추방하거나 강제 개종시킨 일은 비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근절하려는 에스파냐 사회의 종교적 열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 주는 예다. 또 에스파냐는 좁은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슬람 세계인 북아프리카와 대치하고 있었고, 지중해에서 튀르크 이슬람 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벨 여왕이 대이슬람 투쟁의 한 방법으로서, 콜럼버스를 지원해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에 그리스도교를 전하기 위해 해외 팽창을 생각하게 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15세기에 종교는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었고, 정치 혹은 무역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종교적 요인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종교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인들의 팽창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강렬한 종교적 확신, 이슬람을 타도하고 이교도들을 개종시킬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그들의 신념은 확신을 가지고 해외 모험에 나서게 만들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좀 더 신중하고 실용적인 국가들, 특히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은 그것을 무모하고 별로 실소득이 없는 사업으로 생각했다. 이는 종교가 왜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이 해외 팽창에서 중요한 요인이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58P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궁정과 도시 국가들은 부와 예술적 성취를 과시하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이탈리아 내에서 멋진 건물을 건축하고, 위대한 미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지역의 '발견'과 팽창을 위해 쓸 돈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이런 내향적인 경향과 자기만족은 그보다 더 가난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모험적일 수 있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한 15세기 말~16세기 초 이탈리아는 외침과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내분으로 분열되어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각축장이 되었고, 이탈리아 소국들은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야심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그에 비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네덜란드와 영국 등 북서 유럽 국가들은 보다 통일되고 경제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좀 더 안정되고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66p

처음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해안 지역을 습격해서 얻을 수 있었으나 148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 국가 혹은 무역업자들과 포르투갈 간의 교역의 일부로 공급되게 된다. 즉 아프리카의 지배자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붙잡아 포르투갈 인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공급되었다. 

(아프리카는 무조건 유럽 제국주의의 피해자라고만 인식되는데 자국민들 노예로 팔아넘긴 이런 행태는 좀더 비판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 같다)

69p

다가마의 항해가 있고 나서 50년이 채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인들은 인도양 무역을 거의 지배하게 되었다. 이 지배가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무력에서의 우위 때문이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그 외에도 당시 이 지역에는 포르투갈의 도전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만한 어떤 단일한 해상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포르투갈 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말라바르 해안을 따라 늘어선 작은 국가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은 포르투갈 인들을 위협할 만한 힘이 없었다. 동아프리카 해안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이집트와 페르시아는 강국이었으나 둘 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인도양에는 정규적인 함대를 유지하고 있지 않았다. 중국 명나라는 더 강국이었지만 이 무렵 중국은 더 이상 인도양 해역에 관심이 없었다.

72p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어디에도 대규모 영토와 다수의 인구를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지 않았다.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의 지배, 그러니까 아시아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지배라고 할 만한 현상이 시작되는 것은 포르투갈에 의해서가 아니라 17세기 네덜란드의 자바 지배, 에스파냐 인들의 필리핀 지배에 의해서였다. 포르투갈이 아시아에서 가졌던 관심은 수지맞는 해상 무역 제국의 건설과, 그것의 안정적인 유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그것을 유지할 만한 자원도, 병력도,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은 단지 가끔 자신들의 상업적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지 지역 세력들 간의 라이벌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들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군주들 혹은 세력가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을 뿐이었다.

 유럽의 빈국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포르투갈인들이 15.16세기에 건설한 해외 제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일련의 요새와 상관들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론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은 아시아 해역에서 중국의 명 왕조, 인도의 무굴 제국 등 가공할 적수들과 맞서야 했다. 그러나 이들 열강들은 강력한 육군에 의해 유지되는 육상 제국이었고, 자국의 부의 원천이 해군과 대외 무역이 아닌 농업과 국내 교역에 있다고 생각했다. 무굴 제국과 명의 황제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자신들의 이해와 별 관계없는 사람들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그들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물리치기 위한 시도를 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인들 또한 그런 강력한 아시아 국가 지배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처신했음은 물론이다.

97p

에스파냐인들에게 아메리카는 땅과 재산 모두를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정복 대상이었다. 당시 에스파냐인과 포르투갈인을 포함하여 유럽인들은 자기들이 점령한 '이교도들'의 땅에 대해 그곳에 사는 원주민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직 그리스도교도만이 영토의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는 원칙을 만들어 놓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자신들이 '발견한'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발견한' 포르투갈인들은 그 소유권을 현실화할 힘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실제로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에스파냐인들은 아메리카에 대한 지배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99p

콜럼버스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카리브 해는 인도양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발견했던 수지맞는 교역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본토 내륙에 사는 훨씬 개화된 원주민들도 백인들과 지속적으로 교역할 만한 물품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에스파냐인들이 볼 때 아메리카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은 오로지 금광과 은광, 진주 어장, 비옥한 토양뿐이었다. 이것들을 수탈하기 위해서는 몇몇 해군 기지를 발판으로 하는 해상 제국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정복과 식민지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한 원주민의 노예화였던 것이다.

111p

탐욕스럽고 거칠고 강인했던 그들은 비록 끝까지 살아남아 오래도록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그 부를 얻기 위해 인디언들과 낯선 환경과 기후에 맞서 싸우면서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밀림을 헤치고 돌아다녔다. 정복자들은 저마다 출신 배경은 달랐지만 모두 강한 개인적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들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인디언들에 비해 월등히 우월한 존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아메리카 정복은 바로 이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135p

인디언의 몰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자주 이른바 '흑색 전설'로 설명해 왔다. '흑색 전설'이란 주로 영국 미국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생겨난 것으로, 에스파냐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왜곡하고 과장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에 따라 에스파냐 인들이 처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단히 잔인하게 대했으며, 그런 학대를 못 이기고 많은 인디언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설명은 당시 에스파냐 인들이 인디언들의 노동력에 거의 의존하고 있었고, 인디언들에 대해 고의적으로 과도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얻을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유럽인들이 의도하지 않게 아메리카로 들여와 면역력이 없는 주민들 사이에 들불처럼 확산되었던 천연두 같은 '유럽의 질병'이 인디언 인구의 궤멸을 가져 온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데에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아마도 인구 감소의 주원인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온 역병이었을 것이다.

(유럽 인구의 1/3 이상을 앗아간 흑사병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140p

"거대한 새로운 시장의 출현과 그것의 끊임없는 확대는 유럽의 상인과 제조업자에게 전례없는 기회와 자극을 제공했고, 유럽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 새로운 부와 자본이 축적되고 새로운 근대적 기업 형태가 나타나고 금융업은 보다 합리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적이고 세계적인 규모의 자본주의 색채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시민 계급이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었다."

 이처럼 대항해 시대는 유럽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것은 유럽인들에게 중요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이 해양 팽창은 19세기에 현실화된 유럽의 세계 지배를 불가피하게 만든 요인이었는가?

 유럽이 적극적으로 해외 팽창을 한 것은 사실이고 최종적으로 제국주의의 지배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이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았다는 설명이다. 16세기의 대항해와 19세기 유럽의 세계 지배 간에는 직접적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대항해가 시작될 무럽 부와 군사력, 과학 기술은 모두 중국과 이슬람권 등 아시아 세계가 우위에 있었고, 그 상태가 300년 가량 유지되었으며 19세기에 가서야 세계 경제의 중심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 갔다는 설명이다. 그 근거로 유럽 인들이 해외 팽창에 나설 무렵 세계의 많은 문명권들이 모두 나름대로 팽창을 시도했다는 점, 1800년까지 세계 인구의 2/3가 아시아에 거주했고 (그 대부분은 중국과 인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1775년 경 아시아가 세계 생산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생산성도 더 높았다는 점 등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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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가? - 고대 민음 지식의 정원 서양사편 2
정기문 지음 / 민음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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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의 <지식의 정원> 시리즈는 문고판이면서도 내용이 참 알차다.

전문 필자들을 잘 선정하여 역사에 대한 깊이있는 설명을 제시한다.

살림문고 같은 얕은 수준이 아니라 전공자들의 역사 해석이 수준있는 교양서로서 손색이 없다.

이번 책의 주제는 로마가 강대국이 된 비결이다.

로마의 멸망에만 초점을 맞췄지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한 편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넘어 유럽과 북아프리카, 중동으로 뻗어가는 과정에서 제국으로서의 보편성을 유지한 것이 천 년 제국의 비밀이 아니었나 싶다.

시민권이라는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나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일 것 같은데 수천 년 전 로마 제국이 정복한 땅의 피지배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하고 식민지에서 황제가 나오는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개방성을 가졌던 것 같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사분한 것도 넓어진 땅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유연한 발상이었고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게르만 용병도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음을 보여준다.

최종 결과만 가지고 가볍게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널리 퍼져 국교가 된 것도 하나의 제국으로서 무역과 교류의 폭이 넓었고, 박해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다양한 사상을 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단순히 법률과 건축 유산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위대한 제국이 바로 로마가 아닌가 싶다.



<인상깊은 구절>

27p

왕정을 실시했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왕권은 하늘이 내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왕들은 인민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의 통치를 판단하다고 생각했고, 인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곤 했다. 그러나 로마는 인민의 동의가 있어야 왕권이 성립된다고 생각했으며, 이 생각은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따라서 로마는 이미 왕정 시대에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주권 재민의 원리를 확립했고, 후대 민주주의의 한 원칙을 수립했던 것이다.

35p

이렇게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된 공화국은 '레스 푸블리카'라고 불렸는데, 이는 '공공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인들은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것이 아니라 인민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참으로 선진적인 것이었다. 근대 초의 서양에서는 서로 다른 나라의 왕자와 공주가 결혼하면 나라들이 통합되거나 쪼개진다. 당시 유럽인들은 국가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국왕의 사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을 생각해 보면 로마인들이 정치 분야에서 얼마나 선진적이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47p

로마는 정복한 지역을 동화시키고 전열을 정비하는 작업을 마치기 전에는 또 다른 전쟁을 벌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했다. 로마는 어떤 지역을 정복하면 그 지역 사람들을 로마인이나 최소한 친로마 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 작업이 끝나서 새롭게 인적 자원이 보강된 다음에 다른 지역을 정복하였다. 따라서 로마의 정복 작업은 '한 걸음 한 걸음'씩 진행되었고,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56p

이 책은 너무나 뛰어난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최대 업적은 갈리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 <갈리아 전기>를 쓴 것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라틴 어를 배우기 시작하는 많은 학생들이 이 책을 교본으로 삼고 있다.

63p

민주정이 잘 운영되지 못하고,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황제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더욱이 제국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당시의 행정력으로서는 민주정을 펼칠 수가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일단 정치가 안정되고, 로마의 군사력이 복원되자 로마는 중흥하기 시작하였다.

75p

포카스는 아마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칭하면서 로마 인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히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동로마 제국인이 진정한 로마 인이며 독일인은 롬바르드인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니케포루스 포카스 황제의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이래 콘스탄티노플이 제국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고, 로마 황가의 혈통이 단절 없이 이어져 왔을 뿐만 아니라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편의상 동로마 제국, 혹은 비하해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제국은 로마 제국의 연장이 아니라 로마 제국 그 자체이다. 즉 로마 제국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한 시기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의 역사를 2200년으로 파악해야 하고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 또한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포함시켜야 한다. 물론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 해도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긴 역사 동안 로마 제국이 인류에게 어떤 업적을 남겼는가를 살펴보자.

131p

<로마가 함대를 갖추고 무장해야 하며 시민들이 수병들에게 급료와 물자를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먼저 부담을 집시다. 원로원 의원들이여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인 반지를 제외한 모든 금, 은, 주조한 동전을 모두 내일까지 국가에 바칩시다. 국가를 잃는다면 개인들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위기에 처한 로마는 세금을 내라는 포고문 하나 발표하지 않고 해군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재산을 바치지 않았다면 로마는 결코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지배층의 도덕성, 리더십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63p

로마인들은 수많은 전투에서 신분이 높은 자들이 당연히 용감히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용감히 싸웠다면 설령 패배했다고 해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패배한 장수를 심하게 문책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패배한 장수의 임무는 자살하거나 문책을 두러워하여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병사들을 수습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216년 8월에 있었던 칸나이 전투의 뒤처리는 로마 인들의 이런 성향을 잘 보여 준다. 이 전투에서 로마는 약 9만 명을 병사로 5만 명밖에 되지 않는 한니발군에 대패하였다. 명장 한니발의 지도력과 한니발군의 전투력을 과소평가한 결과였다. 7만여 명의 병사가 전사했기 때문에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인들은 결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투에서 지난해 콘술, 그해 콘술이었던 수많은 지도자들이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총사령관이었던 바로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로마로 귀환했을 때, 모든 시민들이 로마 성문까지 가서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가 '나라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했다.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도 그가 평민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렇게 로마는 무능한 장군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던 카르다고와는 정말 다른 태도를 취했고 그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를 위기에 처하게 한 패잔병의 사령관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눈물나는 대목이다)

175p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대인들은 모두 각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로마인뿐만 아니라 고대인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었으며, 인간은 신들이 정해 놓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원래 고대 세계에서 종교는 도시의 사회 및 정치 생활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신들을 경배하는 것이 공동체의 안녕을 보장하고, 시민들의 유대를 강화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각 도시나 공동체는 그들을 보호하는 신들을 모시고 있었다.

 모든 고대인들이 신들을 믿었고, 신들이 세상을 주재한다고 믿었지만 로마 인만큼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있고 신들을 모시는 데 열성적이지는 않았다. 로마 인들은 공적인 일이든 사적인 일이든 모든 일을 신에게 물어본 다음에 했다. 과연 이것이 로마의 세계 정복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종교가 인간에게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것이 그 답이다. 전투를 하기 이전에 신에게 뜻을 물어보았고, 신이 전투를 허락했다면 병사들은 신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승리를 가져다준다는 확신을 갖는다. 전투에 임해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런 로마 인들의 심성을 이해한다면 왜 키케로가 로마의 성공 비결은 투철한 신앙심이라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84p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로마 인들이 법을 너무나 좋아했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발달시켰기 때문에 종교적인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현대인의 관념이나 편견을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다. 로마인의 종교 생활을 깊이 있게 살펴본다면 이런 평가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종교와 정치, 종교와 학문, 종교와 일상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종교는 종교 고유의 영역이 있어서 다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대인은 종교와 정치, 사회, 문화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종교야말로 그들에게 모든 것이었다. 종교는 믿는 자에게 강한 자부심과 확신을 주고, 믿는 자는 거기에서 힘을 얻는다. 로마인들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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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교계 가이드 - 19세기 영국 레이디의 생활 에이케이 트리비아북 AK Trivia Book
무라카미 리코 지음, 문성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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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오타쿠적 성향과 서구 문화에 대한 동경은 참 대단하다.

학문적인 측면으로까지 승화시켜 이런 좋은 책을 내는 걸 보면 감탄스럽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 사회 모습은 어떤가 궁금해 읽게 됐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주제에 딱 맞는 상세한 설명과 함께, 컬러 도판이 많이 실려 있어 책의 품격이 더해진다.

<오만과 편견> 등 19세기 영국 소설을 읽을 때 등장하는 사교계의 실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귀족들의 몰락 없이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영국은 여전히 왕실과 계급사회가 굳건히 존재하는 것 같고 일본도 그런 의미로 영국 사회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노동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인 나같은 독자는 사실 굳이 읽을 필요도 없는 책이지만, 하여튼 소설과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드레스 입은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인상깊은 구절>

30p

사교계란 귀족이나 지주 등 상류 계급 사람들이 교제하는 커뮤니티다. 거기에는 권력, 권위를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쥐게 하며, 신참자가 너무 많이 늘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는 힘이 존재한다. 사교계에 속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당연히 몸에 익혔을 터인 풍습도 외부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 세계의 기본적인 교제 룰을 익히고 있는지의 여부가 안과 밖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었다.에티켓이 사교계를 '천한 사람들'로부터 지키는 벽이 되었고, 또한 벽을 통과하기 위한 암호가 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37p

돈을 아끼지 않고 지위를 사려는 것은 일반적인 중류 계급의 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우선 친한 친구, 친척이나 지인부터 시작해서, 지인의 지인, 또 그 지인의 지인을 소개받아 나아가게 될 것이다.

82p

당시의 젊은 독신 여성에게, 특히 런던 사교기의 무도회나 정찬회는 신분과 수입이 어울리는 독신 남성과의 만남의 장이었고, 결혼 상대를 붙잡기 위한 장소였다. 즉, 젊은 여성의 풀 드레스에는 낮에는 보닛이나 장갑, 하이넥 옷으로 꼭꼭 숨겨두었던 피부를 이 때다 하고 노출하였고, 여성적인 매력을 발휘해 이성을 매료시키는 역할이 있었다. 여성에게 요구되던 도덕과 조심성이 이면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87p

흔들림 없는 지위가 확보된 '고귀하게 태어나고 자란' 상류 계급 사람들이야말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행동하는' 자유와 독립이 허용되어 있었다. 룰을 설정하는 것도 그들 자신이었으며, 깨트리면서 즐기는 것도 자유였다. 신분이 낮은 외부인들이 드레스코드를 실수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전전긍긍하는 것과는 달리, 지배 계급인 그들은 에티켓을 조금 위반하는 것 정도로 사교계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다. 자신들 자체가 사교계이기에.

109p

"'가정 초대회'가 성공하기 위한 최대의 비결은 가능한 한 많은 저명인을 모으는 것입니다. 단순히 칭호가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능이나 인격으로 사교계에서 부동의 지위를 점유하는 그런 남녀가 좋습니다."

137p

'약속'을 깰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이거나, 아니면 다양한 희생을 지불하고 얻은 부, 명성, 권력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176p

빅토리아 시대의 무도회란 여성이 주최하고, 여성이 주역이며, 여성의 아름다움과 행동을 피로하는 것이 목적인 공간이다. 참정권도 없고, 재산의 보유도 제한되어 사회적인 권리가 남성보다 대폭 억제되어 있던 그녀들은, 결혼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여성은 무도회라는 '사냥터'에서, 그저 자신의 매력을 빛냄으로써 남편 후보의 눈에 머물고, 선택받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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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문화 - 그 밑바탕을 이루는 것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33
이즈쓰 도시히코 지음, 조영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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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번역서를 보면 조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많지만, 적어도 역사서에 대해서는 깊이가 정말 대단하다.

지금까지 봐 온 어떤 이슬람 책들보다도 이슬람교의 본질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이있게 설명해 준다.

문고판이라 분량도 적고, 강연록이라 이해하기 쉬운 수준에서 그러나 이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 종교인지 명확하게 짚어줘 큰 도움이 됐다.

시아파와 수니파가 그저 이슬람 분파 중 하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내면의 예언자, 즉 이맘을 마치 기독교의 메시아처럼 본다는 점에서 매우 다른 종교라는 느낌이 든다.

마치 아랍인과 이란인이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진 별개의 종족인 것처럼 말이다.

이슬람은 사막의 대상들이 믿던 비교적 늦은 시기에 생겨난 종교라 어떤 종교보다도 더 생활에 밀착되어 지금까지 성속의 분리 없이 종교가 곧 생활의 원리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세상은 과학과 합리주의 세계관이 지배하고 특히 민족별로 국가가 세워진 현대 사회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이 되버렸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의 지체 현상은 종교를 극복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다.

종교가 그저 개인의 개별적인 믿음이 되버린 터키가 이슬람 국가가 가야 할 바람직한 모델이 아닐까?



<인상깊은 구절>

66p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격렬하게 공격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아들이라 여기는 기독교의 근본적 입장을 명백한 우상숭배로 간주한다. '신이 아들을 낳았다'는 생각 자체가 엄청난 미망이라고 본다. 알라는 "자식도 없고 부모도 없고, 그분과 견줄 자 없는" 유일한 신이다. 어떤 의미에서든 그리스도의 신성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70p

"마리아의 아들 메시아는 단지 사도에 불과하다. 그 이전에도 사도는 몇 명이나 세상에 나타났었다. 또한 그의 어머니도 평범한, 매우 정직한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와 아들 모두 밥을 먹는 사람이었다."

'밥을 먹는 사람' 혹은 '밥을 먹고, 시장을 걷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 무렵 흔히 사용했던 표현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전혀 갖지 않은 사람, 신이나 천사의 요소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예수관 때문에 이슬람과 기독교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슬람의 철저한 절대 일신교적 성격은 이러한 형태로도 나타난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 것이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곧 신의 아들이고 더 나아가 신 그 자체라니, 유대교도들이 불경죄로 거짓 예언자를 십자가에 못 박던 심정이 이해된다)

139p

인간의 본성은 원래 청정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이슬람은 생각한다. 원죄 때문에 본성적으로 더럽혀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통한 정화는 필요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고통을 겪는, 그러한 고뇌의 실존철학은 이슬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다. 신의 외아들을 희생시켜 인류의 본원적 죄를 대속하는 일 따위는 이슬람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원죄 부분도 비기독교인이 받아들이기 매우 힘든 교리다. 내가 왜 근원적인 죄인이며 내가 저지른 죄도 아닌 조상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난단 말인가?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원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사면받는다는 것인데, 인간의 죄인이라는 전제부터 인정하기가 참 어렵다. 이런 면에서 이슬람은 후대에 생겨난 종교라 그런지 교리적으로는 훨씬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느낌이다)

 게다가 이슬람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카르마) 사상이나 관념도 없다. 인간은 현재의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전생에 행한 일의 업을 운명적으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은 다시 태어나는 것, 윤회전생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기 때문에 업 사상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슬람은 그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다양하게 인도 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윤회 사상만은 줄곧 완강히 거부했다. 인도 계열의 사상 가운데 윤회, 즉 죽은 사람의 혼이 이 세상에서 거듭해서 새로운 육체를 입어 태어난다는 사고방식만큼 이슬람에 맞지 않는 것은 없다.

 이슬람은 인간인 이 세상에 단 한 번 태어난다고 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목숨에도 절대적 시작과 절대적 끝이 있다. 

147p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구분, 혹은 그것과 유사한 어떤 것도 이슬람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19세기 말 이래 서양의 과학기술 문명이 압도적 영향력을 과시하면서, 이슬람 세계 각지에서 근대화 바람이 불어 완전히 서양식 생활 원리에 바탕을 둔, 즉 종교적 질서에서 떨어져나온 세속국가 혹은 그것에 가까운 것이 나타났다. 그러자 근대인으로서의 이슬람교도나 근대인다워지려는 이슬람교도는 매우 곤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근대 내셔럴리즘의 발흥은 이런 의미에서 이슬람의 문화 구조 차레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무엇이었다. 이슬람이 내셔널리즘, 근대화, 과학기술 문명을 이상으로 삼아 서구화의 길을 걷는 데 제일 먼저 직접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聖'의 전폐는 아니더라도 성과 속을 구분하는 일이다. 

(유교와 불교, 기독교가 근대 국가의 지배원리로부터 떨어져 나갔듯이 이슬람 역시 이제는 21세기 국가의 지도자적 역할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종교가 더 이상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종교는 세상을 움직이는 지배 원리가 아니라 그저 마음의 양식 정도로 축소되야 할 듯 하다)

200p

외면적으로 공공연하게 밖으로 드러난 예언자와 내면적 예언자로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예언자의 특성을 자기 심층에 간직한 사람, 이렇게 되면 이단 냄새가 풍긴다. 적어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단이다. 외면과 내면의 구별은 그렇다치더라도 어쨌든 무함마드 외에 이슬람의 예언자가 여럿임을 인정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208p

이 숨어 있는 이맘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세적 시간의 주기가 끝날 때, 종말의 날에 메시아로서 다시 이 세계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우리들 국외자에게는 신화적 형상, 신화적 상상력이 지어낸 불가사의한 심상의 연쇄로 보이지만, 숨어 있는 이맘이 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이야기는 시아파적 정신의 소유자들에게는 신화나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이다.

(종말의 날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개념인가?)

 이것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시아파적 현상을 이해하는 데서 아무래도 알아둬야 할 사실이 있다. 일반적으로 이란인은 본래부터 현저하게 환성적이고 신화적이며, 그 존재 감각도 체질적으로 초현실주의자라는 점이다. 이러한 특질은 이란 문학이나 미술에 흔히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 이란인은 감각적으로 현실주의적인 아랍과 대조적이다. 

219p

수니파가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자 무함마드조차 '시장을 걷고, 음식을 먹는' 평범한 인간이라 여기는 것과 달리, 시아파는 이맘이라 부르는 신적 인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모든 일의 밑바탕이라 여기는 점에서 기독교에 더욱 가깝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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