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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문득 고대 중국의 가족관계가 궁금해져 재독하게 됐다.
22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잘 읽힌다.
북위 효명제 시절, 어머니 영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고모인 난릉장공주가 임신 중에 남편에게 맞아 유산되고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유휘가 평민 여자 둘과 간통하여 부부싸움을 벌였는데 오히려 임신한 아내를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뉴스에 대서특필 될 일이다.
심지어 아내는 황제의 고모가 아닌가.
그럼에도 조정 관리들은 부부싸움 중에 처가 사망한 사건이라고 하여 도형 4~5년에 처하라고 했고 당시 섭정이던 시누이 영태후는 황족을 살해했다고 하여 유휘를 사형시키려 한다.
부존처비, 즉 남편은 높고 여자는 낮다는 유교의 가족원리를 불쌍한 난릉공주에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여성 집권자였던 영태후만이 불쌍한 시누이의 원통함을 풀어주려 했으나 결국 유휘는 방면되고 만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로 친소의 관계가 결정되던 시절에, 이혼한 어머니가 사망시에 자식들은 부부의 연이 끊어지듯 부자간의 인연도 끊어진다고 생각하여 복을 입을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당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이혼도 가능하고 간통을 했다고 해서 죽이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거쳐 명청대로 넘어오면서 부권적 유교주의가 강화되어 간통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게 됐으니 남녀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 앞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이 가고, 그럼에도 최고 자리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무측천이나 문명태후, 영태후, 서태후 등은 참으로 여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80p
여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이 남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보다 무겁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 추정하건대 진, 한, 위진 시기의 사람들은 남녀를 구별하기보다 항렬 간에 지켜야 할 윤리를 더 중시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근친상간 혹은 다른 항렬 간의 간통은 그 처벌이 엄격했지만 성별에 따른 처벌은 오히려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
104p
진한 이래 가정 구성원 간 상호 구타, 살인, 상해는 법률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후대의 법률은 가정 구성원 간의 친소, 존비 관계에 따라 제재의 정도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는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서로 상해를 입히고 죽이는 것에 대한 처벌의 경중의 차이가 있는지 여부는 그 시대의 법률이 어떻게 '부존처비'의 논리를 다루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남송시기부터 간통한 처를 죽인 남편을 가벼이 처벌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원대에 이르면 아예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38p
전통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에 근거하면 한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신분은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이다. 부계 중심의 윤리 규범 안에서 이 아이와 그 생모의 지위는 생모인 여자와 아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139p
남성의 폭력 행위는 일반적으로 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폭력 행위는 다른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폭력의 방향이 다른 여성을 향해 있었다. 다음으로 가정폭력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이가 남편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소송이 성립되기 어려웠다.
157p
옛날 사람들은 '부부는 義로 맺어진다'고 여겼다. 만약 서로간의 정이 식어버렸다면 혹은 더 이상 함께 생활할 수 없다면 이혼을 할 수 있었다. 당대의 <放妻書>가 보여주듯이 남편은 처를 보내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두 번째의 봄을 맞으라고 축복한다. 이혼 후에 부부는 더 이상 서로에게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라는 관념이 확실했던 모양이다. 정이 식으면 이혼하는 게 순리인데 오늘날의 유책주의는 두 남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175p
과거 100여 년의 역사 연구에서 학자들이 유가의 도덕질서를 옹호해 온 중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전제황권은 항상 그 주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전제황권은 유가 윤리의 범제화 과정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역대 조정이 고전 윤리 사상을 채택하고 운용할 때 사실은 고도의 취사선택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윤리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법률 규범을 이용했고, 조정이 원하는 법률 규범이란 일반적 사회 풍속과 관습에 부합해야 함은 물론 통치자의 최종 권력에 도전이나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고대 가족 위주의 사회에서 혈연을 위한 복수 관념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진한 제국 시기에 이르면 정부는 백성들의 생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러한 풍속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만 이러한 통제 정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한 말기까지는 복수의 풍속을 뿌리째 뽑지 못했다. 윤리 관념이 율령에 침투된 이상 법 집행자의 심리 상태에도 영향을 끼쳤다. 복수는 윤리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로써 막기는 어려웠다. 조위 시대에 이르면 아버지와 형제를 위해 복수를 한 사안에 대해 법은 일종의 타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수를 명분으로 하는 다른 행동에 대해서는 법률로써 엄격히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조정은 고전 예경에서 허락한 혹은 격려한 윤리 관념에 대해 제한적인 수용을 하였던 것이지 결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79p
사실상 한대 이래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공식적인 관료기구에 의지하여 천하를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관료기구가 점점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스스로 체계를 이루어 황권 밖에 독립하게 되면, 황제는 관료 체계가 자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시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개입하여 자기의 권위와 이익을 지켜야 했다. 동한 말기에 이르면 황제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승상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에 원래 황제의 비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상서가 황제와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조서를 기초하는 등 점점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정책 결정과 집행에 참여하기 시작한 상서는 시간이 흐르자 황궁의 일개 부분(내조)에서 조정의 구성원(외조)으로 점차 변하였다. 정식 관료기구의 한 부분이 된 후 상서는 황제를 따라 나팔을 불고 춤추었던 그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상서를 운용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다른 비서를 찾았다. 이에 비서령, 훗날 중서령이 조위 시기 황궁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서령은 발전하면서 그 전의 상서와 비슷한 궤도를 밟아 점차 황제의 개인 비서에서 조정의 공공 기관이 되었다.
184p
동한 말기 이후로 법률 지식은 특정 가문에서 대를 이어 전하는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사실 한나라 창건 초기에는 진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관리를 양성하고 임용할 때 그들의 행정능력과 사법지식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관원 중에는 율령에 정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동한 말년에 이르면 조정이 새로 보충하고 개정하여 반포한 법률 조문이 이미 너무 많아져 일반 관리들은 근본적으로 법률 조항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체의 화려함, 즉 붓끝을 놀려 글재주를 부리는 능력이 원래 행정 사법 능력을 대신해 임관 기준이 되었다. 이로써 율령의 학문은 점차 쇠락했다. 이러한 경향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조위가 한을 찬탈할 무렵 조정은 반드시 '율박사'를 세워 전문적으로 법률 지식을 보존하는 임무를 맡겨야 했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조정을 위해 법학 인재를 육성하게 했다. 비록 율령의 학문이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긴 했어도, 정권이 매우 빠르게 교체되고 사회가 점점 변화했던 위진남북조 시기의 삼, 사백 년간 율령학은 몇몇 법학 명문에 의해 계속 전승되었다.
186p
비록 북위의 한화 운동은 효문제 즉위 후, 즉 문명태후 섭정시대 비로소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지만, 탁발 선비의 북방 통치의 역사에서 보면 사실은 처음부터 부분적으로 한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위 건국 이래 몇 차례 율령을 수정하고 제도를 개혁한 것은 모두 한의 정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또한 위, 진과 남조의 통치 체제를 종종 참고하였다. 상서의 관원들은 경전에 의거하여 정확히 의견을 밝혔고, 그들이 주장한 것은 모두 유가의 가족주의였다. 확실히 북위의 법률 개정 과정에서 유가의 윤리 사상은 매우 중요했고 점차 법전의 조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12p
전통적 예법 관념에서 보면 이혼을 하여 집을 떠난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가족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 즉 아버지의 가족과 친속의 명분이 없어진 사람이다. 반면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았고 여전히 아버지 집안의 한 사람이니, 부계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과 이혼한 어머니는 당연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녀는 어머니를 위해 복상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214p
여성 통치자가 만약 자기의 인생 경험에서 출발해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부계 중심적 예법을 대한다면, 그 가운데의 '부존처비', '부존모비' 그리고 '시댁 가족정체성' 등 각종 원칙들에 대해 필시 다른 느낌과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무측천이 복상 기간을 개혁한 것이든, 영태후가 공주를 보호한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사안의 부인 유씨가 했던 불평도 납득이 간다.
"주공은 남자라 그렇게 썼습니다. 만약 주공의 아내더러 시를 쓰라했다면, 필시 그런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223p
현실적인 측면에서 간통은 후사의 혈통을 혼란시킬 수 있다. 간통한 여성이 낳은 아이는 부친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고, 이는 부계 가족의 계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 법률은 간통죄에 대해 그저 '도형'에 처하는 것으로 그쳤다. 또 부계 혈통의 혼란 문제를 걱정한다 하여 따로 간통한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가중하지는 않았다. 명, 청 시기 이후 간통한 여성을 엄벌하여 사형에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당대한 해도 부권의 영향력이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법률로써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일반 사람들은 배우자가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그것을 법에 고소하여 '간통을 잡는' 방식으로 혼외 성행위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한 여성이 만약 평생을 온 힘을 다해 혼인과 가정에 헌신했는데, 법률로써 남편의 배반을 제재할 수 없다면 아마도 그녀는 증오에 떨 것이다!
남성은 자기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어떤 경우는 정말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주먹이 불끈 쥐어질 정도다. 고대 흉노는 소위 '탕장'이라는 습속이 있었다. 임신에 관련된 검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가 본인의 자식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남자들은 처를 취한 이후 태어난 첫 번째 아이를 예외 없이 죽이고, 두 번째 아이부터 키웠다고 한다. '탕장'은 바로 처의 배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가정폭력방지법의 추진은 민법 친속편의 개정과 마찬가지로 여성단체가 줄곧 힘을 쏟은 부분이다.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어어가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결과, 최근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어찌되었던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결국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