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사라지지 않는 로마, 신성로마제국 - 실익과 명분의 천 년 역사
기쿠치 요시오 지음, 이경덕 옮김 / 다른세상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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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이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서 못 읽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2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밀도있게 신성로마제국의 복잡한 정치 체제를 잘 설명한다.

일본 번역서들은 조잡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특히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류) 적어도 전공자들의 역사교양서들은 정말 짜임새 있고 수준이 높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체는 비잔틴 제국보다 더 모호했는데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책에 정확히 기술한대로 "독일인의" 신성로마제국었다.

프랑크 왕국이 갈라지면서 서프랑크는 프랑스라는 국민국가가 일찍 만들어져 독립했고, 중프랑크는 제일 먼저 소실됐던 반면, 동프랑크는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황제위를 지키는 대신에 중국식의 절대군주가 아닌 선거에 의해 뽑힌 무수한 제후국들의 상징적 통치자로 남았다.

막시밀리안 1세가 즉위한 후부터는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를 필요도 없이 세습됐지만, 실제로 통치 영역은 합스부르크 영지인 오스트리아 정도에 국한됐다.

그 후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이 통일되면서 국민국가가 만들어지고 오스트리아는 떨어져 나간다.

유럽은 오랫동안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무수한 전쟁을 치뤘는데도 자본주의를 발달시켜 19세기에는 전 세계의 패권을 쥐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 하다.

수천 년 전부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중국이 자기식으로 세계화를 이룩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경쟁 속에서 성장한다는 말이 맞는 것인가 싶다.

복잡한 중세 유럽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쉽고 명료하게 잘 설명해 준 책이고 번역도 아주 매끄럽다.



<인상깊은 구절>

33p

왕권의 영속성은 권위의 밑바당이 된다. 지배가 오랜 기간 이어질수록 지배자 일족의 혈통에 아우라가 부여되게 마련이며 그것이 지배의 근간이 된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종교적 가치이다. 메로빙거 왕조가 사분오열된 서유럽에서 강대국으로 나설 수 있었던 요인은 로마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의 승인은 메로빙거 왕조의 권위를 높였다.

44p

로마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중세적 제국 이념은 훗날 독일의 역대 황제들에게 "이탈리아를 지배하지 않고 어떻게 황제라 할 수 있겠는가?" 라는 강박관념을 심었다. 여기에 독일 황제 뿐만 아니라 프랑스 황제도 제위 찬탈을 노리면 끊임없이 이탈리아로 손을 뻗쳤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둘러싼 독일과 프랑스의 격돌은 중세 유럽의 역사를 팽팽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50p

남자 균일상속이라는 왕가의 개인적 사유 때문에 나라가 분할된 모습은 당시의 나라가 공공의 것이 아니라 왕가의 개인 재산이었음을 알려 주는 좋은 증거이다. 도한 넓게 퍼져 있는 지배 지역에는 나라라는 일체감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라인강과 알프스 산맥이라는 자연의 구분에 따라 셋으로 나눌 수 있는 각 지역의 다른 풍속들이었다. 그리고 상속 문제로 제기된 제국 삼분할은 중부 프랑크 왕국의 영지인 알프스 이북을 제외한 풍속이 다른 지역들 사이에서 훗날 민족 감정이 생기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즉 나중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되는 원형이 탄생한 것이다.

53p

국왕 선거는 게르만의 오래된 관습으로 선거 원리는 혈통 원리와 크게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거와 혈통은 서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 왕제는 세습 선거제의 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즉 국왕을 선거로 뽑기는 하지만 선거에 나설 수 있는 후보자는 전왕의 혈연자로 한정되었다. 여기에 더해 전왕은 후계자를 지명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국왕 선거는 형식적인 절차였다. 다시 말해 이 선출 과정은 새로운 왕이 전왕의 혈연자이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참된 국왕에 어울리는 사람익 때문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의식에 불과했다. 

77p

힐데브란트는 가차 없이 덮쳐오는 세상의 모든 모순을 받아 내는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불굴의 힘을 가진 남자의 마음에 클뤼니 교회 개혁 운동의 정신이 깊이 파고들었다. 그 정신은 강철처럼 그를 단련시켰고 귀하게 큰 도련님들이 빠지기 쉬운  꿈과 같은 이상주의에 경도되지 않았다. 그는 성직자의 금욕, 성직 매매의 금지, 교황권의 확립이라는 이상을 실현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 때문에 그는 황제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던 노르만인의 세력과 주저 없이 손을 잡았다.

86p

독일 제후둘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 교황과 결탁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레고리우스 7세가 이상으로 생각했던 신권 정치 시스템을 받아들일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91p

하인리히 4세가 악전고투하며 어찌어찌 해서 56살까지 황제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타고난 자질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왕의 영험한 위엄'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의 매형이자 강력한 적이었던 슈바벤 공작의 죽음이 그랬다.

116p

교황이 파문한 이유는 프리드리히가 내뱉은 말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프리드리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

"모세, 그리스도, 무함마드는 세계 3대 사기꾼이다!"

이것은 종교가 위정자에게 어디까지나 통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후세에 스위스 역사가인 부르크하르트에게 '왕좌에 앉은 최소의 근대인'이라고 칭송을 받은 프리드리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125p

당시 "교황의 파문 따위 개나 줘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 사람은 당대 유일한 허무주의자였던 프리드리히 정도였다. 욕심이 강한 제후들도 결국 신앙심이 깊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두려운 것이었고, 프리드리히와 같은 배를 탈 배짱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독일 각지에서도 반란의 불꽃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는 교황이 계속해서 보내는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이슬람 병사로 구성된 황제 직속의 이교도 부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했다.

130p

삼왕조 시대의 독일 왕들은 바로 이런 에피고넨들이었다. 그들은 '조상의 가치를 느끼는 자'였기 때문에 위대한 로마제국 황제의 에피고넨으로서 제국을 부흥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꿈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념과 행동이 여과 없이 결합되어 있던 유럽 중세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황제다운 황제였다.

160p

카를은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칼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았다. 독일로 돌아온 카를은 역대 여러 왕들이 좌절하였고 결국 혁명적인 수단과 격렬한 전쟁을 경험하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는 독일 특유의 문제, 즉 제후 특히 선제후의 힘을 억누르겠다는 패권의 길을 버렸다. 그는 이 길을 버림으로써 평화의 확립이나는 대의를 얻었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현실을 직시하는 분석 능력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카를은 모험주의를 배제하고 오로지 현실 노선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167p

당시의 귀족은 모두 토지 귀족이었고, 군인 귀족, 법복 귀족, 부르주아 귀족 등이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지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귀족은 자기의 영지를 죽을 힘을 다해 지켰다. 재판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 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법적 수단은 무력 충돌이었다. 당연히 치안은 문란해지고 페데의 희생자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물론 희생자는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이었다. 

183p

왕권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조직, 단체의 강한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 조직은 내부에 수도회처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수도사들이 조직한 많은 단체를 거느리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 단체에 속해야 비로소 교회 상층부로부터 자신들의 개인적인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교회 조직의 단체 개념은 세속에도 영향을 미쳐 신분이나 직업이 같은 동지들이 조합 등의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를 통해서 자기들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여기에 과거 게르만 민족정신이 얽혀 왕권과 각 단체가 교섭하는 장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권 특유의 신분제 의회가 생겨났다.

 제국 회의에서 왕권에 제한을 가하고 자기들의 특권 확보에 광분했던 제후들도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면 제국 회의의 축소판인 영방 회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신단이 주군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은 구도가 당시의 영방 국가의 모습이었다.

203p

신성로마제국은 서유럽의 황제로서 이 이교도의 침략을 막을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왕'이어야 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논리로 이교도 슐레이만과 손을 잡았다. 악마를 쓰러뜨리기 위해 사탄과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합스부르크 집안에 대한 증오가 강했다.

211p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에 '독일 국민'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려는 징조는 15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제국의 실질적인 지배 영역이 독일과 그 주변으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의 증거이며 동시에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대한 적대적인 선을 그은 독일 국민감정이 싹트로 있음'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독일뿐 아니라 이 무렵이 되면 유럽의 나라들은 제각기 국가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다. 당시 국가 기구의 대표자인 왕실은 이 움직임을 잘 파악해서 왕권을 강화하여 절대주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독일에서 싹튼 국민감정은 16세기에 들어 종교 개혁과 함께 쑥쑥 자라났다.

234P

독일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가 장악했다. 독일 제후는 무엇보다 전쟁을 사랑한 태양왕 루이 14세의 모험주의적인 확장 정책에 전전긍긍했다. 당시 18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초강대국 프랑스는 마구잡이로 패권주의의 길을 걸었다. 여기에 맞선 것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두 나라 모두 상업 국가였다. 상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판로 확대를 위해 세력의 균형 상태를 간절하게 원했다. 두 나라는 제국에 금전이라는 강심제 주사를 계속 놓았다. 제국을 프랑스에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다.

245p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7년 전쟁이라는 계속된 전란에서 희생된 사람은 무려 100만 명에 이른다. 두 전쟁의 당사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운이 좋은 전쟁보다 어정쩡한 평화가 훨씬 낫다"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 이후 내정으로 눈을 돌렸다. 물론 이것은 제국의 내정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집안의 세습 영지의 내정이었다. 제국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지에 휘둘린 전쟁'으로 불에 타 지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252p

애초에 유럽에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카를 대제에 의해 부활한 서로마제국을 마지막으로 세계제국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세의 농업 혁명'으로 유럽은 11세기경부터 경제가 팽창하기 시작했고 사람의 이동과 물자의 유통이 왕성해졌다. 14세기 중세 최대의 불황을 거쳐 15세기 이후 자본주의적 경제가 발흥하여 유럽 각 지역은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윌러스턴이 말하는 '유럽의 세계 경제'의 성립이다. 

 16세기 합스부르크 집안은 이 유럽의 세계 경제라는 세계 시스템을 '제국'화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17세기 30년 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을 채용해서 유럽은 결정적으로 세계 경제 시스템의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세계 제국 시스템의 포기를 의미한다.


<오류>

100p

하인리히 사자공은 의부인 영국왕 헨리2세에게 몸을 의탁했다.

-> 하인리히 사자공의 부인이 헨리 2세의 딸 마틸다이므로 의부가 아니라 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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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잊혀진 유목제국 이야기
쳉후이 지음, 권소연 외 옮김 / 네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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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이고 내용도 우리나라 역사 스페셜 수준이라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무조건 외웠던 요나라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TV 다큐를 책으로 낸 것이라, 밀도면에서는 상당히 떨어지지만 거란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좋은 선택일 것 같다.

확실히 중국은 한족 중심에서 다민족 국가로 선전을 바꾸려고 하는 것 같다.

위구르나 티벳의 독립을 탄압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고, 여러 민족을 포용하려는 관대한 자세라면 이들의 역사를 품어 보편제국으로써 내연이 확대되는 것이니 좋은 일이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현재 중국의 태도를 보면 좋은 쪽은 아닐 것 같지만 말이다.

(소국 대국 타령하는 국가 지도자를 가진 나라니 어쩔 수 없나 싶기도 하다)


요나라의 창시자 아율아보기가 사망하자 황후 술률평이 오른팔을 자르고 순장 대신 그 팔을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완황후라는 무서운 별칭이 생겼다.

그런데 뒤에 나오는 소작, 즉 경종의 황후이자 성종의 생모는 한족인 한덕양과 사실혼 관계였고, 심지어 성종이 부친으로 우대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남편을 따라 죽는 순장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술률평은 극단적인 행동을 취한 것인가 의아하다.

또 성종의 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후궁 소누근이 낳은 흥종이 즉위하자 핍박받아 자진하고 만다.

궁녀 출신인 소누근은 흥종이 16세로 왕위에 오르자 전권을 휘두르고 심지어 큰아들을 폐하고 작은 아들을 세우려는 음모까지 꾸민다.

조선 같으면 아무리 왕을 낳은 생모라 해도 대비로 추존될 수 없고 어떤 권력도 가질 수 없는데 유목민족의 관습이 참 신기하다.

이를테면 정조가 왕위에 올랐어도 생모인 혜경궁은 대비가 아니기 때문에 며느리인 효의왕후보다도 모든 의절에서 뒷자리였던 것과 비교된다.

그래서 청나라의 서태후도 정궁인 동태후를 핍박해 죽이고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인가? 

거란사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런 가벼운 교양서들이 많이 발간되면 좋겠다.



<인상깊은 구절>

51p

아율아보기가 별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술률평은 중요한 고위 관료들을 소집하여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들은 돌아가신 황제가 그리운가?"

"돌아가신 황제의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땅히 그를 보러 가라"

 술률평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자 아보기와 생사를 같이한 문무 중신들은 반박할 여지도 없이 참수되어 순장되었다. 대신들은 무고하게 살해되었고, 그들의 식솔들은 속수무책으로 울고불고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과부살이를 하고 있으니 너희들도 마땅히 나를 본받아야 한다!" 

59p

거란군대는 기병을 위주로 하고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줄곧 사용해왔다. 개봉을 점령한 후에 거란 군사들은 도처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이는 중원 사람들의 강력한 반항을 불러일으켰고 야율덕광은 3개월도 채 버티지 못하고 모친이 그립다는 명분으로 초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봉을 돌아보며 야율덕광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나는 중원 사람들이 이렇게 다스리기 어려운줄 몰랐다!"

88p

목종은 보기 드문 황제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도리어 여색은 좋아하지 않았다. 사료를 보면, 그가 총애한 그 어떤 여인의 기록도 없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도 없었다. 목종의 성격은 괴이하였다. 이는 그의 선천적인 성 불능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성격은 괴팍하고 냉혹하며 심리 상태는 변태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온 정력을 술 마시는데 쏟았기 때문에 술 마실 때에는 병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146p

이는 수레에 장막을 친 것으로 사람이 안에서 살 수 있었다. 조리용은 소작과 한덕양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같은 줄에 앉아있는 것이다. 만약 부부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태후와 '나란히' 앉겠는가? 태후 또한 신하와 '나란히' 앉으려고 하겠는가?

153p

그는 중원왕조는 무력은 약하지만 문화는 발달했다는 점과 장기적인 대처는 거란국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전연의 맹약을 맺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덕양은 승천태후의 신임과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그는 승천태후에게 충성하여 그녀만을 사랑했고, 거란의 진흥과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쏟았다

180p

소누근은 큰아들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다. 흥종이 세상을 떠난 뒤, 그녀는 생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 아프하지 않았다. 흥종의 황후 소달리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옆에서 냉정하게 "너는 아직 나이가 젊은데, 구태여 이렇게 슬퍼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했다.

199p

소관음은 도종에 의해 죽기 전 <절명사>를 지은 뒤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다. 그녀의 나이 서른 여섯이었다.

"내가 태어났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어찌 이 순간을 두려워하겠는가?"

황태숙의 반란을 경험한 도종은 집안싸움으로 '활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라는 새'처럼 되었다. 그는 황제 자리를 차지하려고 모의하는 사람이 있을까 언제나 근심하였고, 특별히 가까운 친족을 더욱 의심하였다. 야율을신은 그러한 도종의 병적인 심리 상태를 이용하여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한 것이다.

202p

생산력 수준이 아주 낮은 당시의 형편에서 많은 노동력이 사회 생산에서 이탈하였으므로, 백성들은 헛되이 이런 무리(승려)를 먹여 살려야 했다. 이것이 거란국 후기 백성과 조정 사이의 모순을 날로 첨예하게 만들었다.

 지나친 불교 숭상은 용맹하고 싸움을 잘 하는 거란 민족의 정기를 잃어버리게 하여, 대요 제국의 흥망성쇠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

217p

거란 왕조는 국내의 여러 민족을 비교적 잘 융합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중국의 농업 지역을 확대시켰고, 장성 밖 유목민족의 정치이념과 문화사상, 사회습속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리하여 중화민족의 정체성 형성을 촉진하였다.

 학자들은 요 왕조가 이후의 금, 원, 청 같은 유목 왕조가 장성 밖에서 흥기하고 중국의 각 민족들이 식민주의자들의 침입에 저항할 수 역사적 기초를 다졌다고 생각한다.

 근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의 눈길을 장성 밖과 이미 사라져버린 요나라로 돌리고 있다. 사람들은 일찍이 초원에서 말달리던 저 영웅적인 민족을 잊을 수 없다.

225p

최근 중국 문명주의의 확장에는 장성 북쪽의 유목민족과 남쪽의 농경민이 투쟁과 교류를 통해 서로 혈통적, 문화적, 제도적으로 뒤섞이는 과정에서 중국의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인식, 다시 말하면 한족 위주의 중국 역사상에서 탈피하려는 인식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북방의 강력한 세력으로 중국을 지배한 거란족은 중국역사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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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죽음 - 우리가 모르는 3-7세기 중국 법률 이야기
리전더 지음, 최해별 옮김 / 프라하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문득 고대 중국의 가족관계가 궁금해져 재독하게 됐다.

220 페이지의 짧은 분량이라 쉽게 잘 읽힌다.

북위 효명제 시절, 어머니 영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의 고모인 난릉장공주가 임신 중에 남편에게 맞아 유산되고 결국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한다.

남편 유휘가 평민 여자 둘과 간통하여 부부싸움을 벌였는데 오히려 임신한 아내를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오늘날 같으면 뉴스에 대서특필 될 일이다.

심지어 아내는 황제의 고모가 아닌가.

그럼에도 조정 관리들은 부부싸움 중에 처가 사망한 사건이라고 하여 도형 4~5년에 처하라고 했고 당시 섭정이던 시누이 영태후는 황족을 살해했다고 하여 유휘를 사형시키려 한다.

부존처비, 즉 남편은 높고 여자는 낮다는 유교의 가족원리를 불쌍한 난릉공주에게 적용시켰던 것이다.

여성 집권자였던 영태후만이 불쌍한 시누이의 원통함을 풀어주려 했으나 결국 유휘는 방면되고 만다.

상복을 얼마 동안 입느냐로 친소의 관계가 결정되던 시절에, 이혼한 어머니가 사망시에 자식들은 부부의 연이 끊어지듯 부자간의 인연도 끊어진다고 생각하여 복을 입을 필요조차 없다고 했다.

그래도 당나라 시대까지만 해도 이혼도 가능하고 간통을 했다고 해서 죽이지는 않았다.

송나라를 거쳐 명청대로 넘어오면서 부권적 유교주의가 강화되어 간통한 여자는 사형에 처하게 됐으니 남녀를 떠나 인간의 존엄성이 이념 앞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는지 알 수 있다.

고대 사회에서 여성들의 종속적인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짐작이 가고, 그럼에도 최고 자리에서 권력을 휘둘렀던 무측천이나 문명태후, 영태후, 서태후 등은 참으로 여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상깊은 구절>

80p

여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이 남성이 간통을 범했을 때 받는 처벌보다 무겁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자료로 추정하건대 진, 한, 위진 시기의 사람들은 남녀를 구별하기보다 항렬 간에 지켜야 할 윤리를 더 중시한 것 같다. 다시 말해 근친상간 혹은 다른 항렬 간의 간통은 그 처벌이 엄격했지만 성별에 따른 처벌은 오히려 크게 드러나지 않는 편이었다.

104p

진한 이래 가정 구성원 간 상호 구타, 살인, 상해는 법률의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후대의 법률은 가정 구성원 간의 친소, 존비 관계에 따라 제재의 정도가 달라졌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는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자녀가 부모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면 일반 사람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서로 상해를 입히고 죽이는 것에 대한 처벌의 경중의 차이가 있는지 여부는 그 시대의 법률이 어떻게  '부존처비'의 논리를 다루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남송시기부터 간통한 처를 죽인 남편을 가벼이 처벌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원대에 이르면 아예 처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38p

전통 중국의 가부장적 가족 윤리에 근거하면 한 아이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중요한 신분은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이다. 부계 중심의 윤리 규범 안에서 이 아이와 그 생모의 지위는 생모인 여자와 아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139p

남성의 폭력 행위는 일반적으로 처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여성의 폭력 행위는 다른 여자에게서 남편을 빼앗아 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므로 폭력의 방향이 다른 여성을 향해 있었다. 다음으로 가정폭력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죽은 이가 남편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을 경우 일반적으로 소송이 성립되기 어려웠다

157p

옛날 사람들은 '부부는 義로 맺어진다'고 여겼다. 만약 서로간의 정이 식어버렸다면 혹은 더 이상 함께 생활할 수 없다면 이혼을 할 수 있었다. 당대의 <放妻書>가 보여주듯이 남편은 처를 보내면서 아름답고 행복한 두 번째의 봄을 맞으라고 축복한다. 이혼 후에 부부는 더 이상 서로에게 법률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부부는 헤어지면 남이라는 관념이 확실했던 모양이다. 정이 식으면 이혼하는 게 순리인데 오늘날의 유책주의는 두 남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175p

과거 100여 년의 역사 연구에서 학자들이 유가의 도덕질서를 옹호해 온 중국 사회를 이야기할 때 전제황권은 항상 그 주된 동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전제황권은 유가 윤리의 범제화 과정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역대 조정이 고전 윤리 사상을 채택하고 운용할 때 사실은 고도의 취사선택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조정은 윤리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법률 규범을 이용했고, 조정이 원하는 법률 규범이란 일반적 사회 풍속과 관습에 부합해야 함은 물론 통치자의 최종 권력에 도전이나 위협이 되지 않는 것어야 했다.

 고대 가족 위주의 사회에서 혈연을 위한 복수 관념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러나 진한 제국 시기에 이르면 정부는 백성들의 생명권을 장악하기 위해 이러한 풍속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만 이러한 통제 정책이 있었다 하더라도 동한 말기까지는 복수의 풍속을 뿌리째 뽑지 못했다. 윤리 관념이 율령에 침투된 이상 법 집행자의 심리 상태에도 영향을 끼쳤다. 복수는 윤리적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로써 막기는 어려웠다. 조위 시대에 이르면 아버지와 형제를 위해 복수를 한 사안에 대해 법은 일종의 타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수를 명분으로 하는 다른 행동에 대해서는 법률로써 엄격히 금지되었다. 다시 말해 제국의 조정은 고전 예경에서 허락한 혹은 격려한 윤리 관념에 대해 제한적인 수용을 하였던 것이지 결코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79p

사실상 한대 이래로 역대 황제들은 모두 공식적인 관료기구에 의지하여 천하를 통치해야 했다. 그러나 관료기구가 점점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스스로 체계를 이루어 황권 밖에 독립하게 되면, 황제는 관료 체계가 자기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시 비공식적인 방법을 통해 개입하여 자기의 권위와 이익을 지켜야 했다. 동한 말기에 이르면 황제는 백관의 우두머리인 승상을 신뢰할 수 없었다. 이에 원래 황제의 비서 성격을 가지고 있던 상서가 황제와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조서를 기초하는 등 점점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정책 결정과 집행에 참여하기 시작한 상서는 시간이 흐르자 황궁의 일개 부분(내조)에서 조정의 구성원(외조)으로 점차 변하였다. 정식 관료기구의 한 부분이 된 후 상서는 황제를 따라 나팔을 불고 춤추었던 그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상서를 운용할 수 없게 되자 다시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되고 다른 비서를 찾았다. 이에 비서령, 훗날 중서령이 조위 시기 황궁에서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서령은 발전하면서 그 전의 상서와 비슷한 궤도를 밟아 점차 황제의 개인 비서에서 조정의 공공 기관이 되었다.

184p

동한 말기 이후로 법률 지식은 특정 가문에서 대를 이어 전하는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사실 한나라 창건 초기에는 진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관리를 양성하고 임용할 때 그들의 행정능력과 사법지식을 매우 중시하였다. 이로 인해 중앙정부의 관원 중에는 율령에 정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동한 말년에 이르면 조정이 새로 보충하고 개정하여 반포한 법률 조문이 이미 너무 많아져 일반 관리들은 근본적으로 법률 조항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문체의 화려함, 즉 붓끝을 놀려 글재주를 부리는 능력이 원래 행정 사법 능력을 대신해 임관 기준이 되었다. 이로써 율령의 학문은 점차 쇠락했다. 이러한 경향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조위가 한을 찬탈할 무렵 조정은 반드시 '율박사'를 세워 전문적으로 법률 지식을 보존하는 임무를 맡겨야 했다. 또한 이들로 하여금 조정을 위해 법학 인재를 육성하게 했다. 비록 율령의 학문이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긴 했어도, 정권이 매우 빠르게 교체되고 사회가 점점 변화했던 위진남북조 시기의 삼, 사백 년간 율령학은 몇몇 법학 명문에 의해 계속 전승되었다. 

186p

비록 북위의 한화 운동은 효문제 즉위 후, 즉 문명태후 섭정시대 비로소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지만, 탁발 선비의 북방 통치의 역사에서 보면 사실은 처음부터 부분적으로 한족의 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위 건국 이래 몇 차례 율령을 수정하고 제도를 개혁한 것은 모두 한의 정치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또한 위, 진과 남조의 통치 체제를 종종 참고하였다. 상서의 관원들은 경전에 의거하여 정확히 의견을 밝혔고, 그들이 주장한 것은 모두 유가의 가족주의였다. 확실히 북위의 법률 개정 과정에서 유가의 윤리 사상은 매우 중요했고 점차 법전의 조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212p

전통적 예법 관념에서 보면 이혼을 하여 집을 떠난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가족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 즉 아버지의 가족과 친속의 명분이 없어진 사람이다. 반면 자녀는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았고 여전히 아버지 집안의 한 사람이니, 부계 가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과 이혼한 어머니는 당연히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녀는 어머니를 위해 복상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다. 

214p

여성 통치자가 만약 자기의 인생 경험에서 출발해 여성의 시각으로 새롭게 부계 중심적 예법을 대한다면, 그 가운데의 '부존처비', '부존모비' 그리고 '시댁 가족정체성' 등 각종 원칙들에 대해 필시 다른 느낌과 태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무측천이 복상 기간을 개혁한 것이든, 영태후가 공주를 보호한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또 사안의 부인 유씨가 했던 불평도 납득이 간다.

"주공은 남자라 그렇게 썼습니다. 만약 주공의 아내더러 시를 쓰라했다면, 필시 그런 말은 없었을 것입니다!"

223p

현실적인 측면에서 간통은 후사의 혈통을 혼란시킬 수 있다. 간통한 여성이 낳은 아이는 부친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고, 이는 부계 가족의 계승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나 당대 법률은 간통죄에 대해 그저 '도형'에 처하는 것으로 그쳤다. 또 부계 혈통의 혼란 문제를 걱정한다 하여 따로 간통한 여성에 대한 처벌을 가중하지는 않았다. 명, 청 시기 이후 간통한 여성을 엄벌하여 사형에 처했던 상황과 비교하면, 당대한 해도 부권의 영향력이 그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법률로써 혼외 성행위를 금지한 것은 아니다. 비록 정서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일반 사람들은 배우자가 다른 이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그것을 법에 고소하여 '간통을 잡는' 방식으로 혼외 성행위를 막은 것은 아니었다. 한 여성이 만약 평생을 온 힘을 다해 혼인과 가정에 헌신했는데, 법률로써 남편의 배반을 제재할 수 없다면 아마도 그녀는 증오에 떨 것이다! 

 남성은 자기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어떤 경우는 정말로 모골이 송연해지고 주먹이 불끈 쥐어질 정도다. 고대 흉노는 소위 '탕장'이라는 습속이 있었다. 임신에 관련된 검진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가 본인의 자식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남자들은 처를 취한 이후 태어난 첫 번째 아이를 예외 없이 죽이고, 두 번째 아이부터 키웠다고 한다. '탕장'은 바로 처의 배 속을 먼저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가정폭력방지법의 추진은 민법 친속편의 개정과 마찬가지로 여성단체가 줄곧 힘을 쏟은 부분이다.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사람이 어어가고,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결과, 최근에 이르러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어찌되었던 여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결국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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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의학이라 불리는 사기
에트차르트 에른스트 지음, 강석하.김현우 옮김 / 과학과세상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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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대체의학을 믿으시나요> 보다 한 발 더 나간 강경론적 입장의 책이다.

앞의 책은 대체의학이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지나치게 상업적이지 않다면 플라시보 효과 측면에서 나쁠 건 없다는 쪽이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거짓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한다.

현대의학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그것이 대체의학의 존립 근거가 될 수 없다.

의학은 근거를 가지고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데, 대체의학은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할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근거라고 제시하는 것들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허술한지 책에 잘 설명되어 있다.

SCAMDMS So-called Alternative Medicine 의 약자, 간단히 말해 scam, 곧 사기다.

저자의 명확한 관점이 돋보이지만 대중에게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제일 저명한 지지자로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나온다.

역시 방송에서 보여지는 이미지처럼 덜 떨어진 인물이었다.

왜 여전히 대체의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상업적 이익을 얻는 것일까?

여전히 인간은 달에 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원래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대체의학은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

단순하고 명쾌하게 결론을 내 주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쉽게 수용되는 듯 하다.

현대의학의 복잡성은 의과대학과 전문의 과정을 10년 넘게 수료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일반인들에게는 잘난 척 하는 배타적 집단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환자 선택권이라는 것은 책에 나온 표현대로 토론에서는 이길 수 있는 논리로 쓰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환자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함을 인식하고, 의료인들이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인과 관계가 입증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임상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즘 정치를 보면서도 느끼는 바지만, 대중의 시대에 정말 중요한 것은 진리를 어떻게 대중에게 잘 알리는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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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의 역습 - 좌파의 역주행, 뒤로 가는 대한민국
이동관.윤창현.김대호 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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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김대중, 노무현 당선됐을 때 이 땅의 민주화가 왔다고 울었던 적도 있었다.

학생운동 세대는 아니지만 5.18의 현장인 광주에서 자랐고 아빠가 그 일로 옥살이를 하고 불운한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독재에 투쟁하는 것이 절대선이고 박정희나 특히 전두환은 절대악이라고 생각했었다.

노무현이 당선되던 날 어찌나 가슴이 벅차던지 대한민국은 이제 진보가 이끄는 새 세상이 될 거라 믿고 새벽까지 TV 를 시청하면서 희망에 부풀었다.

그런데 이제 40대가 되고 보니, 더군다나 이 정부에서 핍박하는 영세 자영업자가 되고 보니 이상과 현실은 전혀 다르며, 586 운동권 세력이 꿈꾸는 이상이라는 것도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좌파는 선전과 선동에 능하다더니 과연 그렇다.

자본가에게 핍박받는 노동자 스탠스를 고수하는 민노총은 사실은 상위 10%에 해당하는 소득을 가진 기득권층이고, 문재인 정부가 열심히 증원하고 있는 공무원들 역시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생고용이 보장되고 죽을 때까지 연금을 보장받는 소득 상위층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리는 이유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책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책에서는 민노총과 공무원들을 신기득권층이라 부른다.

이미 직업을 얻은 사람들은 회사의 생산성과는 상관없이 절대 고용을 보장하여 해고를 어렵게 만든다면 회사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당연히 인력 충원을 중단한다.

그렇다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는 청년층에게는 닫힌 문이 되버린다.

이게 바로 평등의 역습이다.

문 정부가 그렇게도 외치는, 기회는 평등하고 결과는 공정할 거라는 주장과는 달리, 출발선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권리만 보장해 준 꼴이 되버렸다.

왜 꼭 하늘로 승천해야 하나, 개천에서도 잘 지내면 된다, 내가 강남 살아보니 별로 좋을 것도 없더라는 식의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으니 결국은 사다리 걷어차기가 되버린다.

열심히 경쟁해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가지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고 이런 욕망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해 왔는데 정부에서는 평등을 내세워 규제와 형벌로써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글로벌 시대에 걸맞지 않는 현 정부의 시책들에 한숨이 나오고 대한민국이 과연 보다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는지, 더 보편적으로는 AI 시대에 기술을 갖지 못하는 대다수의 대중들이 일자리를 얻어 중산층의 삶을 유지할 길이 있기는 한건지 절망적인 느낌이다.

세계화의 실제적인 피해를 후진국이 보는 게 아니라, 제조업 위주의 나라인 미국의 노동자들이 대량해고를 당하게 된다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개도국들은 공장 세워서 일자릴 얻고 저가 물건들을 전세계에 팔아 훨씬 잘 살게 된다.

그러나 선진국의 제조업 비숙련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게 되는 것이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 충분한 이윤을 얻어야 하는데 과연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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