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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가문의 탄생 ㅣ 조선의 사대부 11
홍원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9월
평점 :
120 페이지의 아주 짧은 분량인데도 조선 시대 가문 의식에 대해 체계있게 잘 설명한다.
유교는 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었고 효라는 이데올로기를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일종의 종교였지만, 기독교처럼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후세계 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자연보다는 인간사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매우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적 담론에 치중한 점도 특이하다.
조선은 귀족사회였던 고려와 달리 정치적 지위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은 가능했으므로 가문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정계에 진출하기 어려운 재지사족의 경우 향촌 사회에서 학문 활동과 교유를 통해 영향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가문의 유명한 조상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그를 현창하고 족보를 펴내고 제사를 지내며 유대감을 강화시켰다.
비슷한 위상을 가진 가문과의 혼인 역시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인 연애 결혼은 개인주의 시대의 새로운 풍습 같기도 하다.
<인상깊은 구절>
11p
유교적 '家'의 특수성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넘어 그것을 시간과 공간상에서 적극적으로 확대시킨 점에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특수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 뒤, 공자 이후 그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생각 아래 조선사회의 특징과 그 속에서 가문의 존재양상을 살펴본다.
유교는 먼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무한 확장시키는 데에 다른 어떠한 사상과 큰 차별성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직접적인 혈연과 생육 관계가 있으므로 어느 사이보다 가깝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 사상, 종교 등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보편적 모습이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직접적 생육 관계가 없는 조상, 그것도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존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제사가 그 대표적인 구체적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럼으로써 家 의 시간적 확대는 종교적 의미를 그 속에 담게 된다.
공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천지만물에 대해 두루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와 살아간 역사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가 마치 천지만물에 관심을 둔 것처럼 만든 이들은 뒷날 그의 후예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후세계와 영혼, 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이런 점에서 공자는 현세와 현실 중심적이며 비종교적 인문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거나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불분명하고 괴이한 존재를 믿고 그 힘을 빌어 복을 구하는 행위를 배척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사후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했지 부정하지는 않았고, 죽은 조상의 영혼을 잘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살아 있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제사에서 조상의 영혼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마저 깊게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반면 제사를 지내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유난히 강조하며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공자는 제사를 지낼 때 마치 그 분이 앞에 살아 있는 듯이 생각하며 공경을 다하라고 말했다. 이렇듯 제사 대상인 영혼보다 제사를 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더 중시하는 것, 여기에다 중심을 두는 것, 바로 이 점이 유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공경을 다하듯 돌아가신 부모와 그 조상에게도 공경의 마음을 다하는 것, 산 부모만이 아닌 죽은 부모와 거슬러 올라가 그 조상에 대해서도 효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제사의 본래적 내용이요, 의미다, 공경스런 마음으로 부모의 상을 치르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손과 후손으로서 효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감응설에 따라 조상의 혼백이 자손들에게 발복한다고 믿거나 이를 위해 음택, 곧 묘지를 중시하는 것 등은 후대에 생겨난 모습일 뿐이다.
개별적 氣 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보편적 理 의 관점에 서서 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개별 생명체로써 인간은 결국 죽으며,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천지만물의 이치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영생을 도모하는 것은 사심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너무나 철학적이고 차갑기까지 하다.
한편 그들은 내 몸은 비록 죽으나 이름을 통해 내 삶의 흔적은 영원토록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자기 존재는 자손에게로 영원에 이어진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인간에게서는 생물학적인 의미 이상의 것도 함께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이 제사다. 바로 가를 통해 자신의 혈연적 뿌리를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 제사요, 부모에 대한 효의 시간적 확장이 바로 제사다.
21p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유교에서는 그래도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사이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이며, 여기에서 길러진 도덕적 품성과 능력이야말로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도덕의 사회적 실천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맹자는 혈연과 비혈연을 연결짓고 비혈연으로 넘어서는 데 있어서 인과 더불어 義 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의는 달리 말하면 私 를 넘어서는 公 이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말하고, 군자와 소인을 의와 리로 대비시킨 것도 같인 의미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유교에서는 의를 통해 매사 자기중심적 태도를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
30p
고려 말 원 간섭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들은 주로 하급 관료나 지방 향리의 자제들로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재지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충렬왕 때 전래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충선왕과 충숙왕, 충목왕 때의 개혁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개혁 대상이 된 권문세족들과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으로 대립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공민왕 대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이들은 권문세족들과 자웅을 겨룰 위치로까지 성장했으며, 이후에는 정치상황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흥문장세력과 결탁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조선 건국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개인의 입신출세와 명문명족으로 발돋움하기가 과거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위 관료나 공신들의 지위도 자신에게만 그칠 뿐 제도적으로 세습할 수 없었다. 고려처럼 조선에도 음서제가 있기는 했으나 극히 제한적이었고, 승진에도 한계가 주어져 세습적 성격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런 만큼 과거제의 역할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조선사회에서 명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를 이어 과거급제자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더불어 가문의 필사적인 노력이 불가피했다. 이제 세습이 아닌 피나는 노력을 통해 가문을 만들어가야만 했다. 3대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면 국법으로나 현실적으로 평민화되는 현상이 속출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세습적 가문 전승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많은 유력 가문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처럼 단순히 세습에 의해 존재한 귀족 가문보다는 그 구성원들에 의한 필사적 노력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가문을 진정한 의미에서 '가문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아버지와 조상의 정치적 지위는 제도적 세습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신분은 달랐다. 이 사회신분적 지위가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이렇게 사회신분적 지위를 획득한 명문명족들이 중심 역할을 하며 유지된 사회가 바로 조선이었다. 과거를 통해 때로는 공훈 등을 통해 관료로 진출하면 일단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게 된다. 비록 정치적 지위는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았지만 이미 확보된 경제적, 사회신분적 지위는 현실적으로 세습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한 가문 구성원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로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망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강한 계승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결집의 중심이 되어줄 종가와 종손이 필요하다. 국가에서 영구히 제향하도록 불천위를 내린 인물의 경우 혈맥이 끊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면 양자를 들이도록 국법으로 보장했으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양자제도는 양반가에서 보편화되었다. 족보 편찬도 혈통의 확인과 가문의 사회적 지위 확보 및 후손들을 결속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유명 가문이 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문 내 결속만이 아니라 다른 가문과의 연대나 그들로부터의 인정도 반드시 필요했다. 다른 가문과 연대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혼인이었다. 명문을 유지하는 데 명문가와의 혼반은 더없이 중요했으며, 이는 명문의 주요한 지표가 되기도 했다. 이때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 일약 명문벌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 조선에서 신분제적 사회의 성격은 더욱 공고해졌다.
재지사족 가문의 경우에는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은 향론을 주도하며 의병과 같이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는 앞장서기도 했다. 유명 인물과 학연을 맺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지연과 학연은 당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색은 벼슬로 나아가는 길과 직결되었다.
42p
특히 혼인관계 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대외적인 사회적 신분 인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곧 남성 배우자 부친(장인) 성명과 본관을 반드시 기재하고, 여성도 결혼 상대(사위)의 성명과 본관을 기재한 것은 친족 관념을 갖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혼반이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인정받는 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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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입향조가 별묘에 모셔져 불천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의 가문은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수신과 제가에 힘써 학행이 널리 알려지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에서의 재지 기반을 확고하게 한 덕분이며, 또한 적극적으로 유명 가문들과 혼맥을 맺고 명사들과 교류한 결과다.
78p
그의 종가는 종부들을 당대 영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들로 맞았다. 이렇듯 그의 가문은 명문가와의 혼반을 통해 더욱 공고해져갔다.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활발한 교유도 필요했다. 최흥원은 선대부터 내려온 퇴계, 한강 학맥과의 긴밀한 교류를 바탕으로 직접 122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자식과 조카들을 멀리 경기의 성호 이익과 한양의 번암 체제공 등을 수시로 찾아뵙게 하여 교유의 폭을 넓혀감으로써 그의 가문은 더욱 공고해졌다.
104p
이처럼 이승희는 아버지 이진상의 성리설이 하나같이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근거해서 주장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진상도 주자와 이황의 영역 밖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학설이 그 영향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누구도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대한 독점적 해석의 권한은 가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진상의 해석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얼마든지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의 해석이 돋보였고, 이에 따라 많은 비판자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111p
이제 명문명족으로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관문을 끝없이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등과한 자의 신분은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뿐 세습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명문의 반열에서 탈락할 수 있는 위기 속에 혈연의 '家' 를 중심으로 한 지난한 집단적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명문가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습이 아닌 구성원들의 집단적 노력에 의해 형성된 가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가문의 중심에는 종가가 있었다. 종가에 가면 혈통의 중심에 서 있는 조상을 받드는 사당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공동의 뛰어난 조상을 함께 기억하며 혈연적 유대감을 이어갔다.
113p
그들은 왜 그토록 가문을 중시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가문을 '확대된 나'로 인식했던 것 같다. 혈연을 통한 생물학적 계승과 더불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창고가 가문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