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세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그림 100 손 안의 미술관 2
김영숙 지음 / 휴먼아트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번 휴가 때 오르세 미술관에 갈 예정이라 미리 읽게 됐다.

작은 판형이라 도판의 크기나 선명도가 다소 떨어져 아쉽지만 많이 알려진 그림들이라 감상에 큰 불편은 없었다.

좋아하는 그림들과 화가들

1) 드가. 사진의 한 장면처럼 어떤 부분을 뚝 잘라놓은 것 같은 독특한 시점과 구도가 인상적이다.

2) 마네. 강렬한 평면성과 색채가 마음에 든다. 특히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화나 <발코니>를 보면 이 여류 화가의 우아함과 개성을 너무 잘 잡아냈다. 그가 왜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열광했는지 이해된다.

3) 휘슬러. 대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색채들의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가 매력적이다.

4) 세잔. 이 책에 소개된 <목맨 사람의 집>과 <목욕하는 사람들>의 단단한 양감이 색채감과 잘 어울어져 기억에 남는다.

5) 그리고 역시 고흐!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아름다운 밤 풍경! 고흐는 낭만주의자 같다.

역시 회화의 본질은 사물이나 선이 아니라 색채와 구도, 곧 평면인 것 같다.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를 봤을 때 의 충격과 열렬한 환호가 너무나 이해된다.

<세계미술관기행>의 오르세편에 선정된 그림과 거의 90% 이상 일치하고 거기서 따온 문맥도 많다.

본인이 연구자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이 어딘가에서는 정보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듯 하고 이런 것이 대중서 필자들의 한계인 것 같다.

이런 책들의 한계에 비하면 조용준씨의 <유럽도자기여행>이나 유홍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정말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더욱 든다.

그리고 이 책의 도판이 너무 밝게 나와 <세계미술관기행>에 비해 색감 전달이 상당히 떨어진다.

이를테면 고갱의 <백마>에서 이 책의 설명에 나오는 푸른 색 말이 전혀 푸른 색으로 안 보여 의아했는데, <세계미술관기행>을 보니 정말 푸른 색으로 그려져 이해가 됐다.

색감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00p

후기로 갈수록 르누아르는 점점 더 인물화에 집착하게 되었고, 그럴수록 전통 회화에 대한 향수가 짙어지는 경향이 있다. 인상주의식의 그림은 어떤 장소를 스치게 되었을 때 한순간 받은 '인상'을 잡기에는 좋지만, 인물의 섬세한 표정이나 도드라지는 특징과 성품을 잡아내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데생', 죽 '선'을 중요시하는 라파엘로의 그림에 크게 매료되었고, 이후 살롱전에 다시 도전하면서 공공연하게 고전미술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곤 했다.

115p

드가의 참신함은 무엇보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진부하기까지 한 소소함'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세상 모든 것을 다 '볼거리'로 만들고, 그리하여 무심코 스쳤을 익숙한 장면을 경이롭게 만드는 힘에 있다. 

139p

세잔은 아내를 모델로 마흔 점이 넘는 유화 작품을 비롯해, 셀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데생과 수채화를 남겼다. 이는 그녀 말고는 누구도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야 하는 그의 모델 역할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린 <세잔 부인과 커피포트>에서는 오르탕스의 미화된 아름다움, 성품, 또는 그녀와 화가 사이의 친밀함 등 전통적인 초상화가 추구하는 그 어느 것도 발견할 수 없다

149p

파리를 떠나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론 강의 밤 풍경에 깊이 매료되었고, 동생 테오에게 '캄캄한 어둠이지만 그조차도 색을 가지고 있는 밤의 모습을 그리겠노라고 의욕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대로 그 밤을 짙은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잡아냈다.

 고흐의 풍경화는 이처럼 자연과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대상의 풍경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보이는 것 저 너머의 환상적이고 초월적인 세계를 그린다기보다 자신의 삶을 따라다니는 고통, 격정, 분노 등을 모두 대상 속에 잔뜩 이입시킨 채 그렸다.

 그림과 관련하여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단순하게 하여 색채가 사물들에 더 많은 스타일을 부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이는 그가 형태의 자연스러움이나 현실감이 돋보이는 공간의 조화보다는 색채들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집착했음을 보여준다.

167p

세뤼시에와 동료 화가들은 이 그림을 두고 "화가들은 본능적으로 자연을 베껴야 한다는 관념에 시달리게 되는데, 우리는 이 풍경화를 통해 그러한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드니는 퐁타방 화가들의 이 혁신적인 화풍을 두고 "회화란 전쟁터의 말이나 나체의 여인, 또는 개인적인 일화를 그리기 이전에 순수하게 근본적으로 일정한 질서에 의해 배열된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오로지 형태와 색채의 조화로만 나아가는 추상화의 출현을 예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시대 가문의 탄생 조선의 사대부 11
홍원식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20 페이지의 아주 짧은 분량인데도 조선 시대 가문 의식에 대해 체계있게 잘 설명한다.

유교는 현실을 추구하는 학문이었고 효라는 이데올로기를 제사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일종의 종교였지만, 기독교처럼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후세계 보다는 현실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자연보다는 인간사 자체에 몰두한 나머지 매우 형이상학적 공리공론적 담론에 치중한 점도 특이하다.

조선은 귀족사회였던 고려와 달리 정치적 지위의 세습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은 가능했으므로 가문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정계에 진출하기 어려운 재지사족의 경우 향촌 사회에서 학문 활동과 교유를 통해 영향력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가문의 유명한 조상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모여 그를 현창하고 족보를 펴내고 제사를 지내며 유대감을 강화시켰다.

비슷한 위상을 가진 가문과의 혼인 역시 매우 중요한 방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을 바탕으로 한 낭만적인 연애 결혼은 개인주의 시대의 새로운 풍습 같기도 하다.



<인상깊은 구절>

11p

유교적 '家'의 특수성은 단순히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넘어 그것을 시간과 공간상에서 적극적으로 확대시킨 점에 있다고 본다. 이 글에서는 그 특수성에 대해 먼저 살펴본 뒤, 공자 이후 그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나라가 조선이었다는 생각 아래 조선사회의 특징과 그 속에서 가문의 존재양상을 살펴본다.

 유교는 먼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시간적으로 무한 확장시키는 데에 다른 어떠한 사상과 큰 차별성이 있다. 부모와 자식 사이는 직접적인 혈연과 생육 관계가 있으므로 어느 사이보다 가깝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대와 지역, 사상, 종교 등을 초월해서 나타나는 보편적 모습이다. 그런데 유교에서는 직접적 생육 관계가 없는 조상, 그것도 먼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 존봉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제사가 그 대표적인 구체적 행위 가운데 하나다. 그럼으로써 家 의 시간적 확대는 종교적 의미를 그 속에 담게 된다.

 공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 곧 천지만물에 대해 두루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사회와 살아간 역사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가 마치 천지만물에 관심을 둔 것처럼 만든 이들은 뒷날 그의 후예들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종교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사후세계와 영혼, 신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이런 점에서 공자는 현세와 현실 중심적이며 비종교적 인문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종교적인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거나 중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가 불분명하고 괴이한 존재를 믿고 그 힘을 빌어 복을 구하는 행위를 배척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사후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했지 부정하지는 않았고, 죽은 조상의 영혼을 잘 섬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살아 있는 부모를 잘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기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유교문화권의 대표적 종교 행위인 제사에서 조상의 영혼 그 이상의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마저 깊게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반면 제사를 지내는 자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는 유난히 강조하며 세세하게 논의하고 있다. 공자는 제사를 지낼 때 마치 그 분이 앞에 살아 있는 듯이 생각하며 공경을 다하라고 말했다. 이렇듯 제사 대상인 영혼보다 제사를 행하는 자의 마음가짐을 더 중시하는 것, 여기에다 중심을 두는 것, 바로 이 점이 유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살아 계신 부모에게 공경을 다하듯 돌아가신 부모와 그 조상에게도 공경의 마음을 다하는 것, 산 부모만이 아닌 죽은 부모와 거슬러 올라가 그 조상에 대해서도 효를 확대해나가는 것이 제사의 본래적 내용이요, 의미다, 공경스런 마음으로 부모의 상을 치르고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자손과 후손으로서 효의 마음을 다하는 것이지, 어떤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다. 동기감응설에 따라 조상의 혼백이 자손들에게 발복한다고 믿거나 이를 위해 음택, 곧 묘지를 중시하는 것 등은 후대에 생겨난 모습일 뿐이다.

 개별적 氣 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보편적 理 의 관점에 서서 리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개별 생명체로써 인간은 결국 죽으며,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천지만물의 이치요,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영생을 도모하는 것은 사심으로 가득한 어리석은 행동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했다. 너무나 철학적이고 차갑기까지 하다.

 한편 그들은 내 몸은 비록 죽으나 이름을 통해 내 삶의 흔적은 영원토록 남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자기 존재는 자손에게로 영원에 이어진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인간에게서는 생물학적인 의미 이상의 것도 함께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의식이 제사다. 바로 가를 통해 자신의 혈연적 뿌리를 오래오래 기억하는 것이 제사요, 부모에 대한 효의 시간적 확장이 바로 제사다.

21p

생각해보면 인간은 참으로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유교에서는 그래도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사이가 가장 가까운 관계인 부모와 자식 간이며, 여기에서 길러진 도덕적 품성과 능력이야말로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도덕의 사회적 실천을 실질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맹자는 혈연과 비혈연을 연결짓고 비혈연으로 넘어서는 데 있어서 인과 더불어 義 의 중요성에 주목했다. 의는 달리 말하면 私 를 넘어서는 公 이다. 공자가 극기복례를 말하고, 군자와 소인을 의와 리로 대비시킨 것도 같인 의미라 볼 수 있다. 이렇듯 유교에서는 의를 통해 매사 자기중심적 태도를 극복할 것을 요구했다.

30p

고려 말 원 간섭기에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들은 주로 하급 관료나 지방 향리의 자제들로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들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재지 중소지주 출신이었다. 이들은 충렬왕 때 전래된 주자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충선왕과 충숙왕, 충목왕 때의 개혁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개혁 대상이 된 권문세족들과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으로 대립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마침내 공민왕 대의 개혁정치를 거치면서 이들은 권문세족들과 자웅을 겨룰 위치로까지 성장했으며, 이후에는 정치상황을 주도하는 가운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흥문장세력과 결탁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조선 건국의 주체로 나서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개인의 입신출세와 명문명족으로 발돋움하기가 과거라는 관문을 거치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고위 관료나 공신들의 지위도 자신에게만 그칠 뿐 제도적으로 세습할 수 없었다. 고려처럼 조선에도 음서제가 있기는 했으나 극히 제한적이었고, 승진에도 한계가 주어져 세습적 성격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런 만큼 과거제의 역할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조선사회에서 명문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대를 이어 과거급제자를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더불어 가문의 필사적인 노력이 불가피했다. 이제 세습이 아닌 피나는 노력을 통해 가문을 만들어가야만 했다. 3대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면 국법으로나 현실적으로 평민화되는 현상이 속출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세습적 가문 전승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역설적이게도 더욱 많은 유력 가문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어찌 되었든 그들의 노력에 의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서처럼 단순히 세습에 의해 존재한 귀족 가문보다는 그 구성원들에 의한 필사적 노력의 결과로서 등장하는 가문을 진정한 의미에서 '가문의 탄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조선에서는 아버지와 조상의 정치적 지위는 제도적 세습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신분은 달랐다. 이 사회신분적 지위가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했다. 이렇게 사회신분적 지위를 획득한 명문명족들이 중심 역할을 하며 유지된 사회가 바로 조선이었다. 과거를 통해 때로는 공훈 등을 통해 관료로 진출하면 일단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게 된다. 비록 정치적 지위는 자손에게 세습되지 않았지만 이미 확보된 경제적, 사회신분적 지위는 현실적으로 세습되었으며, 그것이 다시 정치적 입지를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선순환을 위한 가문 구성원의 집단적 노력의 결과로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명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망 있는 인물이 있어야 하며, 그를 중심으로 한 후손들의 강한 계승의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특히 결집의 중심이 되어줄 종가와 종손이 필요하다. 국가에서 영구히 제향하도록 불천위를 내린 인물의 경우 혈맥이 끊어져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면 양자를 들이도록 국법으로 보장했으며,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양자제도는 양반가에서 보편화되었다. 족보 편찬도 혈통의 확인과 가문의 사회적 지위 확보 및 후손들을 결속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유명 가문이 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문 내 결속만이 아니라 다른 가문과의 연대나 그들로부터의 인정도 반드시 필요했다. 다른 가문과 연대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혼인이었다. 명문을 유지하는 데 명문가와의 혼반은 더없이 중요했으며, 이는 명문의 주요한 지표가 되기도 했다. 이때 왕가와 혼인관계를 맺게 되면 일약 명문벌족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 조선에서 신분제적 사회의 성격은 더욱 공고해졌다. 

 재지사족 가문의 경우에는 향촌사회에서 가문의 위상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들은 향론을 주도하며 의병과 같이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는 앞장서기도 했다. 유명 인물과 학연을 맺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으며, 지연과 학연은 당색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당색은 벼슬로 나아가는 길과 직결되었다.

42p

특히 혼인관계 사항을 자세히 기록한 것은 대외적인 사회적 신분 인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곧 남성 배우자 부친(장인) 성명과 본관을 반드시 기재하고, 여성도 결혼 상대(사위)의 성명과 본관을 기재한 것은 친족 관념을 갖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혼반이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인정받는 데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74p

이렇게 입향조가 별묘에 모셔져 불천위에 오르게 됨으로써 비로소 그의 가문은 명문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수신과 제가에 힘써 학행이 널리 알려지고, 향약을 실시하는 등 향촌에서의 재지 기반을 확고하게 한 덕분이며, 또한 적극적으로 유명 가문들과 혼맥을 맺고 명사들과 교류한 결과다.

78p

그의 종가는 종부들을 당대 영남 최고의 명문가 출신들로 맞았다. 이렇듯 그의 가문은 명문가와의 혼반을 통해 더욱 공고해져갔다.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활발한 교유도 필요했다. 최흥원은 선대부터 내려온 퇴계, 한강 학맥과의 긴밀한 교류를 바탕으로 직접 122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자식과 조카들을 멀리 경기의 성호 이익과 한양의 번암 체제공 등을 수시로 찾아뵙게 하여 교유의 폭을 넓혀감으로써 그의 가문은 더욱 공고해졌다.

104p

이처럼 이승희는 아버지 이진상의 성리설이 하나같이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근거해서 주장된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진상도 주자와 이황의 영역 밖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그의 학설이 그 영향을 벗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누구도 주자와 이황의 학설에 대한 독점적 해석의 권한은 가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이진상의 해석도 어디까지나 하나의 관점에 지나지 않으며, 얼마든지 달리 해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다만 그의 해석이 돋보였고, 이에 따라 많은 비판자들이 등장했던 것이다.

111p

이제 명문명족으로 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관문을 끝없이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등과한 자의 신분은 당사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뿐 세습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명문의 반열에서 탈락할 수 있는 위기 속에 혈연의 '家' 를 중심으로 한 지난한 집단적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명문가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습이 아닌 구성원들의 집단적 노력에 의해 형성된 가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가문의 중심에는 종가가 있었다. 종가에 가면 혈통의 중심에 서 있는 조상을 받드는 사당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에서는 공동의 뛰어난 조상을 함께 기억하며 혈연적 유대감을 이어갔다.

113p

그들은 왜 그토록 가문을 중시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가문을 '확대된 나'로 인식했던 것 같다. 혈연을 통한 생물학적 계승과 더불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창고가 가문이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 조선의 사대부 16
김세은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혼례라고 하면 영조와 정순왕후 가례만 보다가, 조선사에서 가장 유명한 부부인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이 주제라 흥미로웠다.

형식적인 절차를 주로 다뤄서 지루하긴 하다.

인현왕후와 숙종의 정치적 배경은 워낙 잘 알려져 새로울 것도 없지만 삼간택 과정이나 왕비를 뽑는 당시 풍습에 대해 좀더 많은 정보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든다.

왕후가 죽고 나면 보통 3년상을 치룬 후 새 왕비를 간택하지만 21세의 국왕이 아직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독자인 아들이 걱정된 모후 명성왕후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5개월 만에 간택이 시행된다.

15세부터 19세까지의 처녀들을 간택했는데 임신 가능한 처녀를 뽑아야 하니 국왕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숙종이 재혼 당시 21세이고 인현왕후는 15세라 적당해 보이지만, 삼혼 당시는 42세이고 신부 인원왕후는 16세로 26년차가 난다.

국왕이 오래 살면 어쩔 수 없이 새 왕비는 어려지고 국왕 사후 대비가 되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15p

숙종은 자신이 여러 해를 참고 기다린 끝에 이런 처분을 내린 것이며, 신유년 국혼 때 왕비 책봉을 하던 날 지진이 일어나는 드문 변고가 있어 마음이 항상 우울했는데, 이제 보니 하늘의 뜻이었다는 내용의 비망기를 내렸다.

(정말 찌질함의 극치다. 무려 9년 전 혼인할 때 천재지변이 있어 마음에 걸리더니만 결국 폐위하게 됐다니, 이게 마누라 쫓아내면서 할 소리인가 싶다.)

116p

인현왕후는 본가에서 외롭게 살면서 먹고 입는 것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정도로 곤궁하게 살았다. 간혹 신료들이 별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양식을 내려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했지만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인현왕후는 스스로 죄인을 자처하며 찬 방에서 잠을 자고, 아름다운 옷을 입지 않았다. 하루가 긴 여름에도 점심을 먹지 않았다. 어려운 처지에도 항상 "오늘날까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성은이 아닌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보통 사람과 똑같이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근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 죄도 없이 쫓겨나 친정은 풍비박산이 났으니 이 불행한 전처를 위해 양식이라도 내려줄 만 하건만 숙종은 정말로 냉정하다. 인현왕후는 양반가의 여식답게 본가에서도 가난함을 견디며 근신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으니, 과연 조선시대 현숙한 여인상에 잘 어울리고, 만약 복위가 안 됐더라면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불행했을 것 같다)

117p

인현왕후가 처음 발병했을 때 의관들은 통풍으로 진단했지만 전체적인 발병 과정을 보면, 억울한 일을 당해 마음이 상했을 때 나타나는 '옹저'라는 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할 때 흔히 발병했다. 왕비 책봉과 폐위, 복위를 겪어낸 인현왕후가 오랫동안 느꼈을 두려움과 슬픔, 불안, 분노, 울분 등으로 얻은 병이었다.

(옹저가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으나 허리와 다리가 붓고 소변이 안 나온다고 하는 걸 보면 심부전이나 신부전 같은 게 있었을 듯 한데 어찌 됐든 조선 500년 동안 폐위와 복위, 그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걸 보면서 견뎌야 할 심적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으리라. 더군다나 자신은 아이를 낳지도 못하는데 상대는 당시까지 국왕의 유일한 아들을 낳은 후궁에다가 사서에 기록될 만큼 미모가 출중하고 정치력이 뛰어나 최초의 중인 출신 왕비가 된 장희빈이 아닌가! 평범한 양반가 여식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 같다)



<오류>

113p

왕실 자손인 동평군, 숭선군과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인 조사석 등으로부터 정치적 후원을 받고 있었다.

-> 조사석은 장렬왕후의 재종동생이 아니라 사촌동생이다.

114p

작은아버지 민정중은 평안도 벽동으로 유배되어 죽었고

-> 민정중은 작은 아버지가 아니라 둘째 큰아버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4 - 교토의 명소, 그들에겐 내력이 있고 우리에겐 사연이 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교토 편 두 번째 책은, 무로마치 막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역사다.

여전히 일본 역사는 체계가 잘 안 잡혀 반복해서 읽고 있다.

2년 전에 갔던 교토 절들을 떠올리면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마지막에 실린 가쓰라 이궁과 수학원 이궁은 따로 신청을 해야 하는 곳이라 못 가봐서 아쉽다.

저자의 교토 예찬을 듣고 있노라면 문화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다는 생각이 들고, 이렇게 교토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교토인들도 무척이나 감사할 것 같다.

가쓰라 이궁의 과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하고 기능적인 건축미를 예찬하는 브루노 타우트의 글도 애틋하다.



<인상깊은 구절>

96p

천룡사호를 비롯한 무역선의 빈번한 왕래는 일본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화폐경제가 활성화되었으며,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선종이 크게 일어났고, 도자기와 그림 등 중국의 발달된 문화가 속속 전래되었다. 이것은 무로마치시대에 일본문화가 꽃피는 물질적,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120p

사람들은 운동이라는 것을 그저 체력과 훈련으로 다져진 기술 정도로 생각하고 운동선수에게서 어떤 철학적 사고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쏟은 집념에는 나름대로 마음가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평소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정적인 때는 즉발적인 감성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곤 한다.

 당시 김연아 선수가 인터뷰를 하면서 "저보다 절실하게 금메달이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갔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인생을 달관한 말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했다.

325p

타우트는 가쓰라 이궁의 결정적인 매력은 우아한 삶, 높은 도덕, 고상한 취미를 다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어떤 일본 주택보다도 '문자 그대로 간소하게' 처리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327p

브루노 타우트는 가쓰라 이궁을 보면서 일어난 감격을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예술작품을 만날 때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나는 가쓰라 이궁의 저 신비에 가까운 수수께끼 속에서 예술의 아름다움은 형태의 미가 아니라 그 배후에 서려 있는 무한한 사상과 정신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여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332p

이처럼 지방문화가 활성화됨으로써 일본의 문화유산은 아주 풍성해졌다. 이것은 봉건사회를 제대로 경험해본 일본 역사의 산물로 단 한 번도 지방분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와 비교된다. 

356p

나는 수학원 이궁에 와서도 일본 정원에서 인공과 자연의 관계는 조화가 아니라 병존이고 강한 콘트라스트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극명한 대비로 그 둘을 모두 간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공이 흔연히 어울려 어디까지가 인공인지 모르는 우리 정원의 모습과 아주 다르다. 우리는 되도록 인공적인 태를 감추려고 하는데 일본은 반대로 인공의 자취를 강조하며 드러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 3 - 교토의 역사 “오늘의 교토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와나미 총서의 <교토>를 읽은 김에 재독하게 됐다.

벌써 세 번째 읽으니 일본 역사와 교토의 명승지에 대해 조금은 감이 잡힌다.

표지 디자인이 참 예쁘고 사진 도판도 괜찮은데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어둡게 나온 것 같아 아쉽다.

교토는 두 권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 책은 가마쿠라 막부 때까지 역사를 절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불교 역사는 매우 깊고 신불습합이라고 하여 전통 신앙과 잘 조화된 것 같다.

조선처럼 숭유억불로 불교를 완전히 밀어낸 것은 메이지 유신 때니 불교가 곧 일본의 전통인 듯하다.

책에 나온 절들은 교토 여행 때 거의 가 봤는데 33간당이 폐관시간에 걸려 못 본 게 너무 아쉽다.

목조각 전통이 너무 훌륭한데 사진으로만 봐야 하는 게 아쉽다.

저자의 표현대로 1000점이나 되는 관음상들이 거대한 법당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얼마나 장관일지 궁금하다.

항상 느끼는 바지만 유홍준씨의 책은 답사기의 정석 같다.

정보와 감상을 잘 버무려 명승지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인상깊은 구절>

196p

신을 앞세운 악승들의 위세에 절대권력을 자랑하던 상황의 원정도 어쩔 수 없었다. 시라카와 법황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가모가와의 물, 쌍륙의 주사위, 그리고 산법사(즉 히에이산의 승병)이다."

247p

청수사의 결구를 보니 가로세로로 어긋나게 물린 것이 여간 야무져 보이지 않는다. 마냥 바라보다가 또 올려다보며 그 공교로움을 감상하고 있자니 인간은 참으로 못하는 일이 없는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건축이라는 장르는 참으로 위대하다는 생각도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