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시황제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13
쓰루마 가즈유키 지음, 김경호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고판의 가벼운 책인 줄 알았는데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일본에서는 수준높은 교양서들이 정말 많이 출간되는 것 같다.

특히 중국사의 분석 수준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고 분서갱유를 일으킨 희대의 폭군, 좋게 말하면 정복 군주의 느낌이 강한 진시황의 인간적인 측면을 분석한 책이다.

인간적인 면이라고 해서 사서 몇 줄 가지고 맘대로 이랬을 것이다, 상상하는 수준낮은 아마추어식 분석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김종성 씨가 떠오른다)

저자는 사마천의 사기라는 보편적인 문헌 자료 외에, 최근에 발굴된 죽간 같은 출토 자료를 근거로 인간 시황제를 묘사한다.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온 영자초가 여불위의 소개로 조희를 만나 12개월 만에 진시황을 낳았으므로 저자는 여불위 소생 설을 일축한다.

좀 의아했던 점은 진시황이 영씨가 아니라 조씨로 기록한 책도 있는 것이다.

무덤이나 옛 우물 등에서 발굴된 출토자료 중 <사기> 보다 먼저 편찬된 <조정서>라는 책이 있다.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으로 알려졌는데, 이 책에서는 진나라 왕족이 趙 성에 봉해졌다고 해서 조정이라고 칭한다.

이 책에서 처음 접한 내용이라 조나라 출신도 아닌데 왜 조정인지 의아하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장평 전투에서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무려 45만 명을 생매장 했다는데, 현실적으로 이 숫자가 가능할까?

당시 수도의 인구도 45만 명이 될까 말까 할 것 같은데 지나치게 과장된 숫자는 아닌지 궁금하다.

진시황의 할아버지 효문왕은 즉위 후 3일 만에 사망한다.

저자는 죽간 등을 통해 당시는 10월부터 새해가 시작됐고, 효문왕이 즉위한 시점은 윤 9월이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즉위 3일 만에 사망이라니, 심장마비로 급사한 걸까?

만력제의 아들인 태창제가 즉위 한 달 만에 사망하긴 했지만 3일은 정말 심하다.

치우를 산동성 제나라의 전쟁신으로 보는 시각도 독특했다

보통 치우라고 하면 동이족, 곧 한민족과 관련있다고 믿고, 붉은 악마가 바로 치우를 뜻한다고 대중매체에 알려졌는데 중국에서 보는 동방이 한반도라기 보다는, 산둥 반도와 발해만을 얘기하는 모양이다.

불로초를 찾아주겠다는 서복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갔고 진씨, 곧 하타씨의 시조가 됐다는 것도 일본에서 전해지는 전설인 모양이다.

하타씨라고 하면 신라인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 기원을 진나라로 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어떤 책에서, 삼한의 진이 바로 시황제 통일 전후의 혼란기 때 한반도로 내려와 정착한 유이민이라는 가설을 읽은 적도 있다.

고대를 현재의 국경 혹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봐서는 안 되는 게 분명하다.



<인상깊은 구절>

10p

<사기>에는 시황제가 죽은 직후 사구에서 호해, 조고, 이사 세 사람이 음모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적혀 있다. 장남 부소에게 후계를 맡긴 시황제의 유조가 이곳에서 파기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정서>에는 시황제하에서 호해를 정통적인 후계자로 하는 회의가 열려, 시황제도 이에 동의했다고 한다. <사기>와 차이가 명확하다.

(호해 치하에서 진나라가 계속 통일국가를 유지했다면 사기의 전승이 야사가 됐을 것 같다)

72p

어쨌든 노애보다도 진왕이 먼저 움직인 것은 성인이 된 진왕이 노애보다 더 영리했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의 위기를 느껴 기민하게 행동한 것이다.

(먼저 거사를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친 후 그들이 나를 공격해서 방어했다는 논리를 편 태종이 생각난다. 승자들은 항상 상황판단이 빠르다)

76p

모초는 진왕의 행위는 제후에게 신뢰받지 못하므로 진에 반기를 드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진왕의 불효가 뒤에서 비난받았을 것이다. 

 진왕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불효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진시대에서도 가문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효가 요구되었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진왕 자신에게 이런 불효의 규율이 적용되지는 않지만 불효로 인해 제후와 민중의 신뢰를 잃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태종이 함흥에 가 있는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애를 썼던 것도 단순히 개인적인 효심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106p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여 왕을 퇴위한 시점에서 진나라는 멸망하였고 왕의 생사는 국가의 멸망과는 관계가 없었다. 전국시대 국가를 나타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직이었으며 왕이 제사지내는 토지의 신과 곡물의 신을 없애는 것이 국가의 멸망을 의미했다.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멸망했을 때도 여전히 왕은 천수를 누린 것을 보면 과연 그런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인 견훤의 행동은 당시 사람들에게 잔악무도하게 비춰졌을 것 같다)

114p

중앙으로부터 전파된 통일선언만으로 지방이 바로 다스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더욱 시황제가 친히 지방으로 가는 순행을 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이야 신문 방송 매체가 있지만,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넓은 땅덩어리를 처음으로 통일한 진시황의 업적을 전국에 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왜 진시황이 교통도 불편한 시대에 통일 후 죽을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전국을 순행했는지 그 까닭이 비로소 이해된다)

144p

어떻게든 동방 땅으로 들어가서 전쟁이 아니라 제사를 통하여 통일사업을 침투시키려는 진의 입장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중앙에서 통일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완전하게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진제국의 영역은 광대했다. 시황제 스스로가 몇 번에 걸쳐 지방을 순행했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147p

통일전쟁에서 진군은 스스로 정의의 병사로 칭하고 괴팍하고 잔인한 왕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겠다며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군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는 군현화한 제국을 바깥에 있는 만이로부터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대에서도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념은 필요했다. 시황제는 동쪽 바다에 정착하여 육국이라는 적을 잃은 지금, 남북을 향하여 만이라고 하는 새로운 적을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만이를 멸하고 복속시키려는 것은 아니었다. 시황제는 진제국의 주변에 만이를 두어 중화와 만이의 세계를 대치시킨 제국을 쌓아올리고 싶어 했던 것이다. 만이의 세계에 위신을 보여야만 중화인 것으로 시황제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시황제는 한 세기 전의 알렉산더와 같은 무한한 정복욕을 가진 캐릭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156p

담기양씨의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만리장성이 평양 서쪽 해안에서 끝나는데 이것이 실제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진이 요동반도에 집착했던 이유는 연과 흉노와 조선이 교착하는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삼자의 연계를 끊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기 위해서라도 장성의 동단을 바다에 둬서 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필요가 이었다.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만리장성을 평양까지 연결하는 행위는 동북공정의 대표적인 역사왜곡일 듯한데, 외국 학자들은 이렇게도 생각하는 모양이다. 고조선은 한 무제에게 멸망하기 전까지 독립된 왕국이었으니 진시황 때 만리장성이 한반도까지 왔다는 것은 무리한 추측 아닐까?)

162p

흉노와 백월과의 전쟁은 남북 모두 무모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중화 바깥과의 전쟁을 통해 진과 옛 육국 지역에 일체감을 부여하려 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국 통일 후 조선을 침략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 같다. 내부를 안정시키기 위해 외부의 적이 필요한 셈이다)

164p

하천을 따라 진나라 사람들이 거주하는 현과 성을 벗어나면 산악지대에는 월인들의 세계가 펼쳐졌다. 진의 지배는 이 지역에서 점과 같은 지배에 지나지 않으며 점과 점은 하천을 따라 생긴 교통로로 겨우 연결돼 있었다.

167p

원래 진의 백월 지배와 그 이후의 남월 독립은 진에서 남하한 동일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황제 사후, 2세 황제 때에 멀리 중원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이 멸망했기 때문에 남월을 건국하여 조타는 무왕(자국 내에서는 무제로 자칭)이 되었다. 조타 주변의 지배자는 원래는 진에 정복당한 옛 육국지역 사람으로, 월인들을 기반으로 하여 그들이 정복왕조를 세웠다. 

(위만이 연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넘어와 위만 조선을 세우고 현지화 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일까?)

171p

이런 말 등은 법치주의라기보다는 신분의 귀천과 남녀 분업을 지켜야 한다는 예치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황제는 법치만으로는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5p

시황제는 이러한 이사의 분서령 제안에 동의했다. 80만 명이나 되는 인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치루고 있는 전쟁, 겉으로는 만이를 내쫓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부담은 컸다. 이사는 전쟁을 비판하는 언론을 억압하였다.

 공자의 학문 그 자체를 탄압했던 것이 아니라 전시체제하의 인민들을 불안하게 했던 점이 법에 저촉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잔인한 행위가 있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일반에게 유포된 '분서갱유'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신분 차별과 충성, 효 등을 내세운 유교가 통치에 적합하다는 것을 시황제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대로 분서갱유는 전시체제 하의 불만 여론을 잠재우려는 상징적인 행위였을 것 같다)

184p

시황제는 우주의 움직임을 거스르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중화제국 주변의 정치 상황을 확인하기로 했을 것이다. 황제든 서민이든 고대 사람들에게 천문은 일상생활과 결부돼 있었다. 

(마치 유럽의 중세인들이 기독교의 교리가 곧 일상 생활의 축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198p

시황제는 본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품은 채 주변에 대해서는 순행을 통하여 중화제국 제왕으로서의 위신을 지속적으로 보이고자 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면 마지막 순행 전 후계자 문제를 정리해 놨더라면 진 제국이 15년 만에 허망하게 멸망하지는 않았으려나? 표트르 대제도 갑자기 요석 때문에 요도가 막혀 1주일 간 패혈증에 시달리다 목숨을 잃을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오긴 했다)

200p

승상 이사와 어사대부인 풍거질은 먼 거리를 순행하는 가운데 신하들에게 詔 를 내리면 대신들의 음모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호해를 비밀리에 후계자로 택하도록 제안했다. 진왕 자신의 재가가 있고 나서 진왕은 죽고 호해가 즉위했다. 이 고사에는 장자인 부소는 등장하지 않고 시황제 자신이 호해를 정식으로 후계자로서 인정한 것이다.

 <조정서>가 무제 만년에 편찬된 <사기>보다도 이른 무제 전기의 책이라면 사마천도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만 사마천은 '호해 후계의 고사'를 다루지 않고, '부소 후계의 고사'를 택한 것이다. 시황제와 관련된 고사는 수없이 전해지고 있어 사마천도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 내에서도 아니고 순행 중 시황제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고 새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도 후계 계승의 정확한 내막을 몰랐을 것 같다. 오직 이사와 조고 몇 사람만이 진실을 알고 무덤 속으로 가 버렸을 것이다)

223p

공자는 사람을 닮은 俑 을 묻는 일이 참기 어려웠다고 한다. 여기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순사를 대신해서 진흙으로 만든 인형을 만들었다는 <일본서기>에 보이는 발상은 없다. 등신대도 살아 있는 인간을 충실하게 잘 모방해서 만든 진의 병마용을 만약 공자가 보았다면 심히 슬퍼했을 것이다. 사람의 혼을 옮긴 것 같은 리얼한 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유가 사상이었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 지낼 때 영정이나 소상 대신 신주를 모시나 보다. 서구와 달리 조각이 발전하지 못한 까닭도 사람의 형상을 꺼리는 유교 전통 때문일까?)

230p

2세 황제의 짧은 3년간 재위기간 중에 조고는 궁중에서 황제의 명령을 공포하고 이윽고 승상 이사를 대신해서 승상에 올라 안팎의 권력을 맘대로 휘둘렀다. 시황제 시대를 총괄하여 신화화하고 시황제의 지하제국을 정비한 것도 조고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노애와 함께 악역 이미지가 강하지만 악역이라고 하면 할수록 조고라는 인간의 실상을 들추어내고 싶어진다. 

(시황제 사후 겨우 3년 만에 제국이 와해됐으니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도 엄청난 무덤을 건설한 조고의 노력이 대단하긴 하다)

236p

조고가 이사를 배척하고자 해도 자의적으로는 실행할 수 없어 일정한 재판 수속을 밟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이는 진의 법치주의가 철저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고대에도 마음에 안 든다고 권력자가 갑자기 죽여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문을 해서라도 죄를 인정하고 자백을 받아내는 끔찍한 절차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247p

패공 유방도 상장군 항우도 황제의 지위를 바라지 않고 우선은 진나라 땅인 관중의 왕이 되기를 바랐다. 동방 땅은 이미 전국의 나라들이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두 사람은 진을 대신해서 관중의 왕이 될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력에서 우세했던 항우도 결국 관중의 왕은 되지 않았다. 항우 입장에서 보자면 시황제가 만든 제국 따위는 허구로밖에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황제릉을 파헤친 일에 대해서는 함양이 3개월간이나 불탔다는 고사에 이끌려 후대에 과장되었던 것으로 실제로 항우가 지하궁전까지 파헤쳤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지하궁전이 천천히 계속 불탔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리모트 센싱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하 공간은 확실히 남아 있다.

(항우가 전부 도굴했다면 오늘날까지 그 엄청난 규모의 병마용과 무덤이 전해질 리가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왜 여전히 전부 발굴하지 않는지 참 궁금하다)

252p

매일 정해진 업무의 수행과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유능한 전제군주인 시황제, 분서갱유나 만리장성의 건설 등으로 인한 폭군의 대표적 인물인 시황제. 그런 시황제의 이미지와는 달리 본서에서는 동방 육국을 통일하여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낯선 동방의 해양 문화를 접촉하면서 당혹스러워하는 황제가 아닌 '나약한' 인간 시황제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293p

사후의 시호 제도를 폐지하고 2세 황제, 3세 황제라고 하는 칭호를 사전에 결정해둔다. 황제가 되면 동시에 사후를 생각하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군이 신하에게 평가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314p

2세 황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서는 효행뿐만이 아니라 신하로서 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행동이 신하의 도리를 지키지 않은 것이므로 사죄를 받을 것인지 순사하여 효와 신을 다할 것인지를 공자와 공주들은 추궁당했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반역한다는 의심을 받아 아사당한 사도세자의 경우도, 영조는 부자관계라는 사적인 情 보다 신하로서의 忠 을 먼저 내세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왕실여성 인물사전 한국학 주제사전
김창겸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왕실여성 인물사전이라는 형식이 독특해 읽게 됐다.

사전 특성상 지루한 인물 나열일까 봐 걱정했는데 관심이 워낙 많아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라 정리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워낙 역사서에 등장하는 왕실 여성들이 적기 때문에 무려 단군의 어머니 웅녀부터 덕혜옹주까지 내려갔는데도 400 페이지가 안 된다.

왕조별로 나누고, 그 안에서는 가나다 순이라 시대적 흐름이 약간 뒤섞인 것은 보기 불편했다.

사전이라는 특성상 찾아보기 쉽게 하려고 그런 것 같긴 하다.

삼국시대는 익히 알려진 이야기들이라 정리하면서 읽었고 고려 시대의 복잡한 족내혼 때문에 약간 힘들었다.

삼국시대와 고려까지는 왕실에서 족내혼이 매우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조선 역시 왕비는 사대부가에서 들였지만 사돈끼리 혼인하는 겹사돈이 매우 활발했다.

왕가의 자식들이 혼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을 가진 명문가가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고려시대까지는 그마저도 혈통 보전을 위해 같은 왕실 내에서만 이루어지다 보니 사촌이나 이복남매끼리 혼인은 물론이고, 이모나 조카와의 결혼도 흔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왕실 여인들의 출산율이 매우 높아 후궁 뿐 아니라 왕비들도 10여 명의 자식을 낳았다.

확실히 유교적 교조주의가 강화되면서 금욕할 날들이 많아져 왕실이 후계자 부족으로 시달리지 않았나 싶다.

조선시대 후궁들의 집안이 간략히 나왔는데 의외로 간택 후궁이 많고 승은 후궁은 몇 안 되는 것 같다.

중전 자리에 오른 장희빈만 하더라도 궁인임에도 중인 역관 집안이었다.

이 책에서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닌, 침방 나인으로 나온다.

쟁쟁한 왕가 사람들 속에서 영조가 느꼈을 출신 컴플렉스가 얼마나 컸을지 새삼 느껴진다.

사료가 많지 않다는 게 너무 아쉽다.

이 많은 왕실 여성들 중 자신의 문집을 낸 사람은 오직 혜경궁 홍씨 한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 대단하다.

<한중록> 같은 개인적 자료가 많이 나올 수 있는 문화였다면 역사는 얼마나 풍부해졌을까!



<인상깊은 구절>

319p

정순왕후를 간택한 이유는 학문적으로도 명망이 있고, 영조의 첫째 사위 월성위 김한신을 배출한 만큼 가문의 위상도 있었던 데 비해 정치적으로는 한미하였기 때문이다. 영조는 자녀들을 당대 최고의 가문 자제들과 혼인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강력한 외척들이 존재하였다. 초기에는 외척들과 협조하여 탕평을 추진하였지만, 강력한 외척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49p

효의왕후는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문안을 받는 차서를 혜경궁보다 먼저 받게 하자 이를 환수하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혜경궁 홍씨를 지극히 모셨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화완옹주가 그를 괴롭혀도 개의치 않았고, 특히 시누이 청연군주, 청선군주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점잖은 정조와 아주 잘 어울리는 부덕있는 배필이었던 것 같은데, 자식을 못 낳아 안타깝다. 시어머니 혜경궁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특한 며느리였을까 싶다)


<오류>

54p

마야부인은 진지왕의 아들 용춘과 혼인한 천명부인과 자매이다.

-> 마야부인은 진평왕의 부인으로, 선덕여왕과 천명부인의 어머니이다.

57p

원성왕-인겸-충공-문목부인과 원성왕-예영-헌정-희강왕으로 이어지는 원성왕 후손(8촌)간의 근친혼으로 맺어졌다.

-> 문목부인과 희강왕은 8촌이 아니라 6촌이다.

89p

조생부인의 남편은 <삼국유사>에는 눌지마립간의 동생 기보갈문왕으로, <삼국사기>에는 나물왕의 증손 습보갈문왕으로 되어 있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습보는 나물왕의 손자이다.

206p

창왕이 즉위한 뒤 "사헌에서 혜비, 신비, 정비(正妃), 현비의 4妃 들이 모두 본처가 아니니 충혜왕 때 경비의 전례에 의하여 공상을 중지하고 세록을 지급할 것을 청하였다."

-> 正妃 는 우왕의 6비인 정비 신씨로, 우왕 폐위 후 곧 쫓겨났고, 위 기사의 정비는 공민왕의 비 이씨로 한자가 定妃이다.

239p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인 민부대부인의 친족으로 명성황후가 종질녀의 항렬이 된다.

-> 명성황후와 부대부인은 질녀가 아니라 12촌 자매 사이로, 같은 항렬이다.

1884년 급진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이 발생하여 민치호가 죽음을 당하였다.

-> 갑신정변 때 죽은 사람은 순명효황후의 아버지 민태호이다.

276p

1885년(고종 22) 을미사변이 발생하였을 때

-> 을미사변은 1895년에 발생했고 고종 32년이다.

294p

의인왕후의 아버지는 번성부원군 박응순이며

-> 반성부원군이다.

302p

인성왕후는 1577년 11월 66세로 승하하였다.

-> 1514년생이므로 66세가 아니라 64세에 승하하였다.

309p

장렬왕후는 1688년 64세로 창경궁 내반원에서 사망하였다.

-> 장렬왕후는 1624년생이므로 65세로 사망하였다.

328p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는 정희왕후의 오빠 윤사분의 증손녀이고

-> 장경왕후는 오빠 윤사윤의 증손녀이다.

331p

안동김문에서는 19세기에서만 3명의 왕비를 배출하게 되었는데 모두 김성행의 후손들이었다.

-> 김성행의 후손은 철인왕후이고, 순원왕후는 김달행, 효현왕후는 김탄행의 후손이다.

364p

가계도에서 조생부인이 자비마립간의 딸로 나왔는데, 눌지마립간의 딸이고 자비마립간의 누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불교미술 이야기
배재호 지음 / 종이와나무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학예사를 했던 저자의 불교 미술 이야기다.

단순히 불상을 설명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불상에 담긴 불교 교리와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어 불교 이해에 도움이 됐다.

기독교 교리는 현대 사회가 서구화 되기도 했고,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녀 직관적으로 금방 이해를 하는데 불교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저 문화적 관심 때문에 슬쩍 보는 정도라 불상이나 불화, 사찰 등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든 것 같다.

도솔천과 수미산, 욕계, 업보, 윤회, 보살 이런 개념도 이제서야 약간 감이 잡히는 정도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문화재를 가지고 불교를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이해되는 게 장점인 책이다.

한국은 대승 불교의 경전 위주라 석가모니가 출생한 인도 문화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샐러리맨 아트 컬렉터 - 저 같은 직장인도 미술품을 모을 수 있을까요
김정환 지음 / 이레미디어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좋아하지만 책 내용이 좋지 책이라는 물질 자체는 전혀 관심이 없다.

궁금하고 알고 싶은 분야가 무궁무진해서 기존의 책을 다시 보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지라, 예술품을 수집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는데 최근 약간의 호기심과 욕구가 생겨 읽게 됐다.

정말로 소유하고 싶다기보다는, 평범한 소시민이 나름 큰 돈을 들여 작품을 구매할 정도로 예술에 대한 지대한 욕구를 가진 그 심리가 궁금해서다.

어차피 자산가들은 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계층이므로 별로 궁금할 것도 없지만, 소시민적 컬렉터들은 어느 정도 예산을 세우는지, 어디서 작품의 정보를 얻는지, 생업과 예술에 대한 욕구는 어떻게 조절을 하는지, 보관은 어떻게 하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하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진다.

저자는 증권맨이면서 그림을 직접 그리고 평론을 하는 어찌 보면 두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 단순한 독자인 나와는 또다른 계층인 것 같기도 하다.

본인이 직접 작업을 하는 화가이니 작품을 보는 안목이나 수집의 의미가 남다를 것 같다.

고무적인 것은 대부분의 작품이 100만원 미만이고, 많아도 500만원을 안 넘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읽은 고미술 책에서도 삼국시대 토기 등이 100만원 안쪽이라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작품을 구매해 보면 어떨까?

책에도 평범한 샐러리맨 부부 컬렉터 이야기가 나온다.

뉴욕 우체국과 도서관 직원인 보겔 부부가 한 사람의 월급으로 아껴서 살고 평생 2500 점의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자녀가 없었을까?

아끼고 사는 것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자녀 교육 때문에 안 될 것 같다.

부부간의 합의도 중요하다. 

어쩜 이렇게 취미가 딱 맞는 사람끼리 부부가 됐을까?

훌륭한 화가들은 작품 수집도 열정적으로 한다는 대목에서 뭉클했다.

렘브란트의 수집벽은 파산을 맞을 만큼 어리석은 행동으로 거론되는데, 예술가들은 정말로 예술 그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

미술품 가격이 오를지 여부보다는 컬렉터로서의 기쁨을 느끼라는 주제가 마음에 든다.

저자가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설명해 주는 부분은 흥미로웠다.

그렇지만 솔직히 현대미술은 아직 제대로 이해를 못하겠다.

실제로 그림을 보면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겠으나 도판과 저자의 설명만으로는 현학적이라는 느낌 뿐이다. 

어떻게 보관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미술품 자체가 곧 현금화 할 수 있는 재산이다 보니 매우 신중하고 까다롭게 보관법을 설명한다.

집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수장고를 따로 만들어야 한다면 평범한 컬렉터들 입장에서는 보관도 쉬운 문제가 아닐 듯 싶다.



<인상깊은 구절>

27p

"모든 미술품은 교양있는 인류 전체의 것이다. 미술품 소유는 그것을 보존하려는 사려깊은 의무와 결합되어 있다." -괴테

52p

"인생에서 살아갈 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이다." -플라톤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문구가 정말로 현실에서 뚜렷히 느껴진다)

107p

미술품은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장식적 요소이다. 즉 작품의 크기, 무게, 재료, 매체, 물리적 상태 등의 외적 속성이다. 다른 하나는 지적 요소이다. 즉 작품의 미술사적 가치, 품질, 미술가의 창조적 역량 등의 내적 속성을 말한다.

111p

"영감은 아마추어를 위한 것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일을 하러 가야 한다. 모든 최고의 아이디어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일 자체에서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디어가 찾아오는 것이다." -척 클로스

114p

미술품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가치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의 변하는 감성으로부터 미술품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이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세계 미술 시장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118p

먼저 미술 시장의 활성화 기능이다. 갤러리는 작가와 컬렉터 간의 상업적인 매개를 통하여 미술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새로운 미술 시장을 통하여 미술의 발전을 도모한다. 또한 지속적인 고객 확보와 관리를 하여 미술 시장의 기능을 유지시키고 확대한다. 이것이 갤러리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두 번째는 작가 지원 기능이다. 갤러리는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작품 판매를 하여 간접적인 자본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으로 문화 공간으로서의 기능이다. 갤러리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작품 판매에 있으므로 이를 위해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전시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훌륭한 미술품을 감상하게 하는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다. 이 점에서는 미술관 못지 않은 문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갤러리스트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좋은 미술품 유통을 통해 미술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유능한 갤러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작품의 예술성, 작가의 가능성, 작품의 상업적 가치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125p

오늘날에 어떤 물건이 예술품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술가가 그것을 예술품으로 선택하고, 명명해야 한다. 이후에 그 물건을 예술 제도 안으로 진입시키면, 미술관, 갤러리, 미술 비평가, 관람객과 미술 시장, 유명 컬렉터가 작품으로 인정하고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완제품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 되었다. 그 과정 가운데서 작품의 매매도 중요한 단계를 이루며, 비로소 매매됨으로써 작품으로 인정받는다. 현대 미술품의 높은 가격에는 매수자가 작품 창작에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스스로 창조자가 된다는 약간의 허영, 사치도 포함된다. 

142p

"모든 예술가에게는 시대의 각인이 찍혀 있다. 위대한 예술가는 그러한 각인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는 사람이다." -마티스

144p

삶과 재산, 명예를 걸고 자신이 선택한 화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 그는 볼라르화랑을 열었다. 이곳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중심지이자, 예술가들의 천국이 되었다. 무명 화가들을 위한 지속적인 전시와 작품 판매는 화가들의 꾸준한 작품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볼라르는 그림과 화가를 단지 경제적 부를 이루는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진심 어린 지원과 격려로 화가들에게 큰 위로와 믿음을 주었다. 세잔, 피카소 등 많은 화가들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초상화를 그려주었고, 볼라르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남자가 됐다.

146p

이렇듯 과거에도 미술가들의 예술성을 발견하고 세상과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화상이 존재했다. 그들은 작품이 당장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해도 묵묵히 작가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지지하며 막역한 신뢰를 쌓아 나갔다. 시대가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 작품에 끈기 있게 매달린 화가와 오랜 심적, 재정적 후원으로 인내한 화상에게 시대가 감응할 때, 시간을 초월하는 명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171p

피에르 술라주의 추상 작품은 어둠에서 반사됨으로써 존재하는 빛,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닌 존재와 실재에 대한 고찰, 자연의 흐름과 공간의 생성에 대한 순간적이고 영원한 기록을 담고 있다.

172p

"예술은 손끝의 재주가 아닌 정신의 소산이어야 한다. 학문과 교양을 통한 순화된 감성의 표현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장우성

 문인화에서 제시는 필수 요건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스스로 제시를 못 쓰는 화가는 화사가 되어도 진정한 화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화면에 담긴 작가 고유의 철학적 이해와 공감을 위해서라도 제시를 반드시 병행하여야만 했다.

(시서화가 함께 공존하는 수묵화의 매력인 것 같다. 화가가 그림에 얽힌 시정과 추구하는 바를 제시로써 기록하고, 내용뿐 아니라 글씨 자체가 그림과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예술 형식이 완성되는 것 같다)

187p

사진이 주는 매력은 재현의 의미보다는 역시 사물에 대한 재해석일 것이다. 내가 보면 그냥 평험한 물건이거나 자연 속의 한 장면인데, 사진 작가가 찍어 놓으면 그 물건에 감정이 실리게 되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이미지의 재해석이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206p

"미술품은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재화입니다. 자신의 지성을 가시적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미술품밖에 없습니다. 자본력과 지성, 교양을 보여 주는 총 집합체가 미술품입니다. 미국, 유럽의 최고 상류층은 미술관 이사들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이사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작품을 보고, 구입하고, 사회에 기증하고, 그제야 자격이 생기는 명예의 자리입니다. 그들만이 누리는 폼나는 사회죠."

231p

"당신이 인지하고 있든 아니든 간에, 당신은 이미 당신이 가려는 길 위에 서 있다. 달리 부연 설명할 필요 없이,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이다." -아그네스 마틴

246p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스카 와일드

258p

김종학 작가는 화가들이 대체적으로 두 부류라고 말한다.

"첫째는 진지한 이들입니다. 자신을 엄격하게 몰아붙이는 이들이지요. 둘째, 인기에 영합하는 이들입니다. 가령 그림 팔아서 돈을 벌면, 예술품이나 골동품을 사는 게 아니라 재규어 자동차를 사는 사람입니다. 화가라면 이중섭, 박수근처럼 죽어서 그림값이 올라야지, 살아생전에 돈을 지녀서 무엇을 하겠어요?"

(진정한 예술가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다)

326p

"당신은 옷이든지 그림이든지 어느 하나는 살 수 있어요. 다 살 수는 없어요. 입고 있는 옷차림이 유행에 좀 뒤진다 해도 신경 쓰지 마시고 튼튼하고 편안한 옷을 사세요. 그러면 당신은 절약된 그 돈으로 그림을 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제대로 된 양복 한 벌 사지 않는다 해도, 제가 갖고 싶은 피카소 그림을 살 만큼의 충분한 돈은 없을 겁니다."

"피카소는 당신에게 맞는 값이 아니죠. 당신 또래, 말하자면 당신의 동년배들의 그림을 사세요. 젊은이들 가운데는 언제나 좋은 화가가 있기 마련이죠."

돈을 절약해서 그림을 구입하라는 것과 비싼 작가들 말고, 동년배 작가의 비교적 저렴한 그림을 사라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궁핍했던 시절의 조언임을 감안하면, 이런 조언은 지금도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럽 미술의 거울 프랑스
윤세홍 지음 / 청암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이번 여름 휴가 때 근 20년 만에 파리를 다시 가게 됐다.

가기 전에 많은 미술책들을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막상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려고 하니 방대한 양에 질려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온 것 같아 아쉽다.

여러 미술관이 다 좋았지만 특히 오르세 미술관에서 도판으로만 보던 인상파 작품들을 눈으로 봤을 때의 그 감동이란!

특히 마네의 그림은 크기도 대작이지만 너무나 선명한 색채감과 강렬한 평면성, 검은색의 사용 등으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왜 마네가 인상주의의 선구자였는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정도였다.

가장 의문이 들었던 점이, 이렇게도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왜 어떤 것은 명작이 되고 어떤 그림은 그저 그런 작품으로 남느냐는 것이다.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는 유명한 작품들 외에도 좋은 그림들이 넘쳐났다.

명작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벨 에포크 시대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로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풍성함과 선구적인 자세는 탁월했던 것 같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프랑스 미술을 콕 집어 서술한 이 책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게 됐다.

표지나 제목은 읽고 싶은 마음이 1도 안 들게 생겼는데,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미술 500년을 잘 정리했고 이 작은 책에 도판도 비교적 많이 실렸으며, 인상주의 이후 현대 미술이 추구하는 바에 대한 철학을 잘 설명해 준다.

미술은 근대 이후 목적으로부터 해방되어 수단이 아닌, 예술 그 자체가 되었고 화가들은 장인에서 내면의 미적 욕구를 분출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선이 먼저인가 색이 먼저인가 하는 질문은 회화의 핵심은 형태가 아닌 색면 그 자체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짧은 분량이지만 알기 쉽게 미술 사조와 철학을 설명해 주는 유익한 책이다.




50p

<최후의 만찬>은 당시 유행하던 프레스코 벽화 기법이 아닌 템페라 기법으로 그려져 바로 퇴색이 시작되는 등 그의 도전이 실패한 그림도 많다. 당대에 확립된 다 빈치의 천재 미술가적 이미지는 그의 작품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매우 크다.

62p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별 가운데 태양'이라고 불렸던 티치아노는 평생에 걸쳐 초상화, 풍경화, 그리고 신화적, 종교적 주제를 담은 작품들을 640여 점 남겼다.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주의며, 그는 일생 동안 그런 특징을 유지했다. 기나긴 생애의 마지막 무렵 그는 극적인 양식과의 단절을 완수했고, 그것은 이미 바로크적 특성을 향해 있었다.

126p

로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나 중세 프랑스 조각으로부터 많은 자극과 감회를 받았으나,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18세기 이래 오랫동안 건축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던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훌륭하게 성취시켜 회화의 인상파와 더불어 근대 조각의 전개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적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30p

코로는 그때까지 형성된 풍경화의 고전적 기법에 새로운 개인적인 시정을 불어넣었다. 그는 자연을 사실적으로 표현했지만 밀레나 쿠르베와 같은 방법으로 농부나 노동을 이상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 사이의 논쟁 밖에 있었다.

134p

1845년까지만 해도 평론가와 컬렉터들은 코로의 작품에 그리 호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몇 평론가들, 특히 보들레르, 고티에, 상플뢰리 등이 자연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진지한 태도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그림을 시처럼 그린다는 것을 알았다. 보들레르는 "코로는 현대적 양식의 풍경화를 개척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 시기에 쿠르베와 밀레는 주변의 일상적인 장면들을 사실주의 방법으로 묘사했는데, 코로는 두 사람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136p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에밀 졸라나 공쿠르 형제의 예술 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 정신의 발현이다.

140p

자연에 대한 로맨틱한 감정과 서정적인 정취가 바르비종파 그림의 특색이었다. 

141p

빛과 형태를 유희적으로 분석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이성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순수 상태에서 얻어진 시각의 느낌만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인상주의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 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눈에 보이는 대로 대상을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 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이들은 빛의 변화에 따라 전혀 양상을 달리하는 풍경과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하는 데에서 쾌감을 누렸다.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 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겨 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 미술의 최종 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가정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46p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로서 언제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 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 부분에도 명도가 낮은 색채인 파랑과 보라를 사용하였다.

 빛의 광휘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색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색, 특히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융합되고,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한 색감을 보여 준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 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였다.

(왜 인상주의 그림들이 관람자의 마음을 확 사로잡는지 이해가 된다.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본질이었던 것이다)

147p

쇠라의 경우 인상파가 경시한 화면 구성이나 형체의 질서를 다시 정밀하게 확보한 것은 신인상주의의 공적이라 할 수 있다.

152p

드가는 인상주의 화가였지만 시력이 나빠서 주로 실내의 정경을 그린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신고전주의 대가인 앵그르에게서도 그림을 배웠는데, 앵그르는 그에게 "선에 충실하도록 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그 조언을 충실히 따른 드가는 소묘에 매우 뛰어났으며, 산업화되어 가는 근대 사회의 모습을 화려한 색채로 그렸다. 드가는 발레리나의 얼굴은 대충 그리는 대신 몸의 균형이나 독특하게 뒤틀린 자세 등을 섬세하게 나타냈다.

156p

쿠르베는 "회화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사물의 재현에 의해서만 구성된다. 추상적 대상은 회화적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주의 미학을 펼쳤는데, 이러한 회화 이념에 대한 반발로 상징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는 예술의 본질적 원리는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징주의 미술은 인간의 내면을 강조하고 비합리성을 추구함으로써 일상적인 이미지의 왜곡과 비사실적인 우화 세계 및 주제의 기묘한 병치를 일으켰으며, 이는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개념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현실적 주제보다는 신화적이고 신비한 주제를 도입하여 상상의 세계를 그리는 것은 어떤 감정이나 사고에 상응하는 조형 세계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해설이나 설명 없이 감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미술에 대한 추구가 상징주의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했음을 말해 준다.

159p

나비파는 색채 분석에 의존하여 대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인상파의 작품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던 만큼, 화면을 하나의 창조라고 생각하고 종합적인 구성을 시도하여 자신의 사색을 전개하는 고갱의 작품 경향을 새로운 계시로 받아들였다. 평면적인 병렬이나 장식적인 구성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가 그리는 형태나 색채는 작가의 해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인상주의의 화풍과 이론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하여 작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였다.

 '종합'은 인상주의의 색채 분할과 그 기법의 해체적, 분석적인 경향에 반대하는 개념으로서의 종합을 의미한다. 고갱은 자연에서 광선과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한 인상주의 방식이 지극히 피상적이며, 사상이나 지적 사고를 소홀히 여긴다는 한계를 자각하였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인상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인상주의 기법이 대상을 오히려 해체시킬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고, 인상주의가 해체한 색채의 단편들을 강한 윤곽선으로 두른 넓은 면으로 종합하였다. 그럼으로써 작가의 주체성에 기반을 둔 형태와 색채를 회복하고 궁극적으로는 주관과 객관의 종합을 목표로 하였다.

 회화 기법에 있어서는 명암이나 입체감의 표현이 없는 순수한 색면과 선을 토대로 구성 요소들을 거의 이차원적으로 배열한 새로운 장식적인 회화 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이차원의 평면을 강조하는 종합주의의 기법은 주제의 느낌이나 기본 개념을 색면과 선이라는 형식에 종합시키고자 했다. 

 반면 에두아르 뷔야르와 피에르 보나르는 색채를 정성스레 다음어서 신변 제재를 정감있게 묘사하는 앵티미즘으로 나아갔다. '앵티미즘'이란 '친밀한'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intime 에서 파생된 말로, 서양 근대 회화의 한 경향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일상적인 신변의 광경과 가정 내의 정경, 모자상 등을 제재로 삼는 가정적인 친밀감이 넘치는 회화를 말한다.

168p

야수파는 아카데미즘에 대항하며 인상파 이후의 새로운 시각과 기법을 추진하기 위해 순색을 구사하고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등의 원색을 굵은 필촉을 사용하여 병렬적으로 화면에 펼쳐 대단한 개성의 해방을 시도하였다. 새로운 색의 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의도 때문에 이를테면 공기나 수목에 붉은색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사실주의의 색채 체계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명암이나 양감도 파기하였다. 격렬한 정신의 표현과 강렬한 색채는 고흐의 작품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그림이 대상으로부터 독립된 색과 형태에 의한 하나의 조형 질서임을 확인시킨 점에서는 고갱과 나피파의 회화관에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색채의 고양에 기초를 둔 야수파 운동은 결국 외계의 질서를 그대로 화면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화폭을 자아 해방의 장소로 생각한 점, 그리고 색과 형태의 자율적인 세계를 창조하려 한 점 등에서 20세기 최초의 예술 혁명이었다.

(내가 인상파나 고흐, 마티스를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강렬한 색채감 때문이다. 특히 마티스의 그림을 보면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존 회화와는 아주 다른 느낌이 든다. 형태는 마치 색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에 불과한 것 같다)

171p

마티스 역시 세잔의 누드화를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세잔에 심취해 있었고, 피카소는 당시 미술계에서 가장 진보적으로 평가되면서도 화상들의 후원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마티스를 꽤나 의식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피카소는 더더욱 마티스를 능가하는 보다 혁신적인 누드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피카소로서는 야수파 화가들이 영감을 얻은 아프리카의 조각과 가면들을 보다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173p

브라크는 무엇보다 대상에 뒤지지 않는 공간을 탐구하고 이른바 '물질화'하고자 했다. 피카소의 관심이 아직까지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면, 브라크는 대상과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새롭게 구축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178p

1905년경부터 미술의 기본 목적을 자연의 재현으로 보는 것을 거부하며, 르네상스 이래 유럽 미술의 전통적 규범을 떨쳐 버리려 했던 미술 운동을 표현주의라 부른다. 표현주의 화가들은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회화의 선, 형태, 색채 등은 표현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감정을 더욱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 구성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무시했으며, 형태, 색, 구도의 왜곡은 주제나 내용을 강조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

 19세기말 이전에는 감성적인 메시지의 명료한 전달을 위해 형식의 아름다움이나 구성의 조화가 종속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규범의 완전한 파괴는 없었다. 뭉크는 불안, 공포, 애정, 증오와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한 화가로서 표현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191p

슈비터스에게 메르츠는 '시각으로 확장될 수 있는 모든 예술 형태'를 의미했으며, 이것은 쓰레기임에도 불구하고 조형성을 지닌 작품으로 승화되었다. 우연한 만남과 의외성, 미술적 생명력을 지닌 메르츠는 산업적 詩情 을 감지하게 되며 또한 추상적 차원으로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