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 싶다, 빈 - 디테일이 살아 있는 색다른 지식 여행 색다른 지식 여행 시리즈 7
신양란 지음, 오형권 사진 / 지혜정원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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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국어 교사였던 저자의 경력 탓인지 요약 정리를 너무 잘 해주는 책이다.

바람직한 여행 안내서의 표본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소회가 전혀 없는 게 약간 아쉽긴 하지만 정보 전달이라는 본질적인 측면에 매우 충실한 책이다.

사진도 아주 훌륭하다.

보통 저자가 글도 쓰고 사진도 찍는 경우가 많아 여행 책자의 사진은 아쉬운 경우가 많은데 전문 사진 작가가 따로 있어 이 책은 볼거리도 훌륭하다.

슈테판 대성당이나 쇤부른 궁전의 조각품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럽게 설명하고 있어 약간 지루하기도 했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관심이 많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나라라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오류>

257p

레오폴트 제단은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독수리를 문장에 사용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촐한 성당을 고딕 양식의 웅장한 슈테판 대성당으로 환골탈태시킨 레오폴트 4세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 슈테판 대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바꾼 사람은 레오폴트 4세가 아니라 루돌프 4세이고, 사진에 나온 제단의 주인공은 레오폴트 4세가 아니라, 성 레오폴트 3세이다. 그는 합스부르크의 왕도 아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아니고, 오스트마르크 변경백이었던 바벤베르크 가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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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양란 2020-01-30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저는 <가고 싶다, 빈>을 쓴 여행작가 신양란입니다.
올려주신 리뷰를 일찍 확인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먼저,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의 내용이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는 독자분들이 있어 어려운 작업임에도 지치지 않고 꾸준히 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쓰려고 노력함에도 글에 오류가 난 것을, 올려주신 리뷰를 읽고야 알았습니다.
명백히 저의 잘못입니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출판사와 의논하여 다음 쇄에서 수정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리고 제 블로그에 지적해 주신 내용을 올려 독자들이 오류를 알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오류를 찾아내 주신 점에 대해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작업하는 글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욱 신중하게 임하겠습니다.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신양란 드림

marine 2021-01-14 09:28   좋아요 0 | URL
저자가 직접 댓글을 달아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저희 엄마도 국어 교사로 퇴직하셔서 더 친근감이 드는 책이었습니다.
여행 관련 책자를 보면 정보는 별로 없고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수준의 감상문을 사진 몇 컷과 짜집기 해서 출판하는 경우가 많아 반감이 좀 있던 터라 무척 신선했습니다.
사진작가와 같이 작업하시는 점은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부탁드려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가이드북 - Korean 한국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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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판은 너무 훌륭한데 번역의 수준이 아쉽다.

처음에는 내가 이해를 못하나 싶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색한 문장 때문에 가독성이 매우 떨어진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364p

"벨터의 자연 묘사의 개화의 꽃다발로 아름답게 꾸며진 벨터의 화려한 응접실 소파는 그의 가장 최고 전작품을 요약합니다."

찾아보니 역자 정보도 없다.

출판사의 무성의가 아쉽다.

이렇게 훌륭한 도록을 펴내는데, 좀 수준있는 번역자를 찾을 일이지.

읽기 편한 좋은 문장으로 재번역 되길 기대한다.

확실히 메트로폴리탄은 미술관이 아니라 박물관이다.

이 책 역시 회화 작품은 일부만 실려 있고 그 외 전 시대와 지역을 아우르는 인류의 위대한 예술품들을 골고루 소개한다.

널리 알려진 그림 외에는 도판 만으로는 솔직히 감상이 어렵긴 했다.

박물관에 직접 가서 유물들을 보면 물질 그 자체가 주는 강렬한 미적 감동을 느끼게 되는데, 작은 도판만 가지고는 제대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다양한 분야를 접하게 된 점은 장점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을 때 제일 기억에 남은 전시실이 피어리드 룸이었다.

각 시대와 지역별로 실내를 장식해서 당시 주거 분위기를 잘 표현했다.

이 도록에서도 그 부분을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서문을 쓴 메트로폴리탄의 관장인 토마스 캠벨이 경영 실적 악화로 최근 물러났다는 뉴스를 봤다.

메트로폴리탄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이 아닌 만큼 관장에게도 CEO 같은 경제적 타산성이 요구되는 모양이다.

그와 더불어 지금까지 무료였던 관람료도 25달러로 책정됐다고 한다.

국가보다는 개인이나 시민 사회가 나서서 문화 정책을 펴는 걸 보면 확실히 미국은 자본주의의 최첨단 사회답다.

유물들도 거의 대부분이 기증받은 것들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 기증받았는지, 구입했는지도 자세히 표기했다.

신생 국가였던 미국이 이렇게나 방대하면서도 질적으로 뛰어난 유물과 예술품을 갖게 된 것은 엄청난 경제력과 더불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예술 작품을 수집하기 전부터 견지했던 이상은 예술은 감상을 통해 개인을 고양시킨다는 근본적인 사회적, 도덕적 전제였습니다. 개인의 사고가 고양되고 산업 및 제조업이 진보하면 더 나은 사회가 실현될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사명은 기원전 8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을 비롯 모든 문화권과 그 시대를 망라하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위엄을 나타내는 작품을 수집하는 것입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역사는 많은 면에서 미국 고유의 가치를 대변합니다. 그것은 포부, 시민의 의무감 및 심오한 관대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수세기 동안 군주의 후원으로 구축된 유럽의 박물관들과는 달리, 1866년 7월 4일 파리에서의 점심식사 중 박물관의 구상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의 독자적인 박물관이 필요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동석했던 미국인 동지들은 그 목표의 실현을 위해 함께 맹세했으며, 4년 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탄생하였습니다.

(왕조가 아닌 자유민이 대표를 뽑아 건국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자부심과 가치가 이 박물관 탄생 비화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확실히 미국은 자긍심을 가져도 될만한 나라다)

 1970년 설립 이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일반 대중의 계몽에 전념하였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역사를 통해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술 장려입니다. 소장품을 이해하지도 해석하지도 못한다면 우리는 문화재 창고 역할밖에는 못할 것입니다. 1906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감행했던 이집트 발굴 조사를 계기로, 본 박물관의 고고학 연구 성과는 고대 문명 연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우리가 출판한 수천 권의 서적 중 다수가 이 분야에서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박물관 설립 당시 이는 다소 진보적인 생각이었지만, 교회 또는 왕궁이 아닌 개인의 컬렉션을 일반 대중과 공유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졌던 기증자들의 뜻은 현재도 그 의의를 잃지 않고 계승되고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예술적 위업을 전시하여 일반 대중을 계몽하고 영감을 주고자 했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설립 취지는 지금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236p

이탈리아에서 시각 예술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조토는 사후에도 그 명성이 거의 도전받지 않고 남게 되었습니다. 그의 예술은 지금까지도 회화와 연관되어 있지 않은 지적 차별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오류>

287p

잔 다르크는 보불전쟁(1879~71) 이후

-> 보불전쟁은 1870~1871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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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서 24시간 살아보기 - 3000년 전 사람들의 일상으로 보는 진짜 이집트 문명 이야기 고대 문명에서 24시간 살아보기
도널드 P. 라이언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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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주인공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재발굴에 참여한 미국인 학자의 유쾌한 이집트 시대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전공학자들이 대중 교양서를 수준있게 잘 편찬하는 것 같다.

이 책도 이집트 신왕국 시대상을 이야기 형식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고대 이집트인들도 21세기를 사는 현대인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평균수명이 짧고 거의 문맹이라 문화적 혜택을 적게 누리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까, 감정이나 사고방식은 현대인과 전혀 다를게 없다.

고대 이집트의 번영은 나일강이 주는 옥토의 놀라운 생산력 덕분인 것 같다.

워낙 토양이 기름져 씨앗만 뿌리면 신민을 다 먹여 살릴 정도로 충분한 수확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역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비로소 문화가 가능한 모양이다.


<인상깊은 구절>

81p

이집트의 사제들은 신의 물리적 조각상 자체를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신들이 형상 안에 실존하고 머문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성한 공간 내에서라면 신들을 직접 응대하고 찬양할 수 있다고 믿었다.

181p

파라오 아멘호테프의 고관인 그는 통치자의 오른팔로서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다. 파라오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는 그는 지위에 걸맞은 호화 생활과 혜택, 그리고 부를 누리며 산다. 하지만 그 대신 끝없는 업무량을 감당해야 한다. 그는 평소에 불평이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궁극의 결정권자 아멘호테프보다 오히려 자신이 더 많이,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273p

고대 이집트 건축물은 대부분 진흙 벽돌로 만들어져 지난 수세기를 거치는 동안 살아남지 못했다. 진흙 벽돌은 시간에 따라 풍화되고 부서지기 때문이다. 특히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건축물이 물에 잠기면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돌로 만들어진 신전과 무덤만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이것이 이집트에서 신전과 무덤 외에 다른 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다. 따라서 현존하는 건축물만 보고 이집트인들이 종교와 죽음에만 집책했다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275p

이집트인들은 피부색이나 지리적 뿌리를 이유로 외국인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굳이 나서서 차별하지 않아도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차피 열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284p

왕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했고 근친혼은 흔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한 번에 한 명씩이었고, 친척과의 결혼은 대개 사촌 이상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졌다. 흔히들 남편이 부인을 '누이'로 불렀지만, 애정의 표현이었을 뿐 유전적 현실을 반영하는 호칭은 아니었다. 왕가 내에서는 부와 권력을 한 가문 내에서만 유지할 수 있도록 의붓 형제와 남매간, 그리고 아버지와 딸 사이의 결혼이 이따금 이루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337p

고대 이집트인들은 출산과 유아기를 무사히 넘길 경우 평균 30~35세까지 살았다. 죽음의 원인은 다양했는데 질병, 작업 중 사고, 혹은 전쟁이 대표적이었다. 현대 의학과 예방 접종으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여러 감염병과 질병 등 비교적 단순한 병으로도 죽음에 이르곤 했다.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기생충과 안구 질환도 흔했으며, 현재 미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암의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오류>

120p

이 오벨리스크는 파라오 투트모세 3세가 위탁하여 그의 손자인 투트모세 5세가 테베의 카르나크 신전에 건축한 것이다.

-> 투트모세 3세의 손자는 투트모세 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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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화유적답사기 - 하남성.하북성.서안.강소성.절강성 문화유적 심층 답사기
김종원 지음 / 여행마인드(TBJ여행정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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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독특한 컨셉 같다.

본격적인 여행서는 아닌데 그렇다고 인문학적 컨셉도 아니고, 800 페이지 남짓되는 엄청난 분량의 매우 꼼꼼한 답사기다.

분량이 많아 걱정했는데 사진이 워낙 많고 쉽게 서술되어 금방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특장점은 깜짝 놀랄 정도로 뛰어난 사진들이다.

저자가 직접 찍은 것 같은데 프로 사진 작가 수준이다.

사진의 양도 엄청나게 많아서 글로 설명하는 답사기라기 보다는 눈으로 즐기는 여행기 같아 너무 좋았다.

3만원이라는 책값이 전혀 비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중국 각 지역의 자연 풍경과 유적 사진들이 많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도판 수준이 실망스러운데 어쩌면 이렇게 선명하게 잘 인쇄를 했는지 참 신기하다.

다만 붉은 색이나 파란색 색감은 좀 과하게 밝게 나와 간혹 촌스러운 관광 엽서 사진 같은 컷도 몇 개 있긴 했다.

중국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유적지 곳곳이 다 흥미로웠다.

가 본 곳이라고는 북경 밖에 없지만 만리장성에 갔을 때의 감동이 잊혀지지 않는다.

자금성은 오히려 생각보다 별 감흥이 없었고, 만리장성은 이 높은 산 위에 이렇게도 엄청난 성벽을 건설해서 이민족의 침입을 막았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책을 읽으면서 가 보고 싶은 곳을 꼽아 봤다.

1. 칭더의 피서산장.

청나라가 최고의 국력을 자랑할 때에 건립된 곳이라 그런지 건축물들이 정말 웅장하고 화려하다.

18세기 조선 선비 박지원이 이 곳에 와서 보고 느꼈을 문화적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2. 청동릉, 청서릉, 명 13릉 같은 황제의 무덤들.

중국 황제들은 정말 스케일이 크다.

땅덩어리가 넓고 부릴 수 있는 인력이 많아서 그런가, 진시황릉만 대단한 줄 알았더니 명나라와 청나라의 왕릉들도 정말 규모가 엄청나다.

크기가 주는 압도감이 있는 것 같다.

3. 소주나 항주의 원림들.

이번에 프랑스 가서도 잘 가꿔진 정원들을 보면서 정말 감탄했다.

인간이 자연을 아름답게 조경하는 정원 문화는 자연과 어울어져 눈이 즐겁다.

동양의 정원, 특히 개인 정원들은 어떤 개성을 지녔는지 가 보고 싶다.

소주는 운하의 도시라 더욱 풍경이 수려할 것 같다.

4. 시안의 병마용과 성벽, 당나라 유적지들

진시황이 묻혀 있는 지하궁전은 아직 발굴이 안 되었고 그 옆의 병마용 세 개가 발굴되어 전시되고 있다.

무려 6천 개의 토용이 묻혀 있다니 정말 놀랍다.

작은 토용들도 아니고 180cm 에 달하는 실제 등신상이라니 과연 중국 대륙을 통일한 시황제답다.

그 외 중국의 탑들도 석탑인 우리나라와는 달리 나무나 전탑들이 많아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고 직접 올라가 볼 수 있다니 꼭 관람해 보고 싶다.

당나라 때 만들어진 성벽도 가보고 싶다.

또 중국은 유적지에서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게 신기하다.

장이머우 감독의 인상 시리즈 외에도 다채로운 공연들이 많아 관람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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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가 낳은 천재들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29
이나미 리쓰코 지음, 이동철.박은희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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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5천년 중국 역사에 남을 천재들은 과연 누구일까?

영웅 호걸 보다는 문인들에 중점을 둔 책이다.

흔히 알고 있는 이백이나 백거이 같은 유명인 외에도 처음 들어보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한다.

300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에 56인이나 인물평을 하다 보니 주마간산 식인 경우도 있지만, 인물의 생을 한 문장으로 잘 짚어낸 경우도 많아 흥미롭게 읽었다

책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류 시인들 이야기도 흥미롭다.

우리나라로 치면 허난설헌 정도의 인물들이다.



<인상깊은 구절>

10p

비록 현실 정치에서 큰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공자는 결코 무기력한 지식인이 아니었다. 키가 9척 6촌에 달하는 위풍당당한 대장부로서, 거인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방랑 생활을 꿋꿋하게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39p

사람들이 "종사관 나리와 의논해봐야 한다"고 하자, 반초가 화를 내며 말했다. "잘되고 못되고는 바로 오늘 결판난다. 종사관은 머리가 굳은 문관 나리이니 이 얘기를 들으면 필시 두려워하여 계획을 누설하고 말 것이다. 죽으면서도 아무런 이름을 남기지 못한다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과연 대범하고 두려움이 없다)

58p

틈만 나면 부지런히 소박한 학문 작업에 매달렸던 두예는 청담이 유행하고 재치 있는 재사들이 환영받던 화려한 귀족사회 서진의 이단아였다. 그래서 어쩌다 그가 모임에 모습을 드러내면 좌중의 분위기가 썰렁해지곤 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정말 그랬을 법한 이야기다.

64p

시대의 거친 파도를 순조롭게 넘어갔던 숙부들과는 달리, 태생적으로 귀족이었던 왕희지는 때때로 권모술수도 동원할 줄 알아야 하는 중앙 관리 생활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66p

동진 중기는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된 시대여서, 정권을 지탱하던 귀족들 사이에 사교 모임이 번성했고, 그들의 미의식 또한 점점 더 세련되어졌다. 이런 가운데 서화가 예술 장르로 확립되어 서예의 왕희지와 회화의 고개지를 필두로 많은 예술가들이 배출되었다. 강남의 망명 왕조 아래서 화려한 예술이 꽃을 피우다니, 역사는 참으로 모순적인 것이다.

71p

'서성' 왕희지는 명문 귀족 출신이어서 서예를 취미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든든한 배경이 없던 고개지는 자신을 후원해줄 유력자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84p

학식이 있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안심할 수 있다. 난리(후경의 난)가 일어난 이래 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다. 비록 백 년 동안 조상 대대로 신분이 비천했다 하더라도 <논어>와 <효경>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하다못해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도 되었다. 반면 천 년 넘게 조상 대대로 귀족이었다 하더라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전부 밭 갈고 말 먹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예를 볼 때, 어찌 학문을 열심히 갈고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항상 책 수 백 권을 보유할 수 있다면, 천 년이 지나도 결코 낮은 신분으로 전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안씨가훈>

(과연 학자 집안의 가훈답다)

88p

측천무후에게는 사람을 압도하는 면이 있어서, 원래부터 백성들에게도 무척 인기가 좋았다. 그녀는 합리적이고 유능한 대정치가임과 동시에 극단적인 신비주의자이기도 했다. 위대한 여인이었지만 어쩐지 음침하기도 했던, 복합적인 요소를 두루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합리와 비합리가 뒤섞인 복합성은 그녀의 이미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다.

(시아버지의 후궁으로 시작해 중국 5천 년 유일무이의 여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과연 남다른 카리스마와 매력과 지략을 가졌을 것 같다)

90p

당나라 때는 과거제도가 채 정비되지 않아 상인 계층은 시험을 치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백은 넘치는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정식 관문을 거쳐서는 관직에 오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이백의 생애를 좌우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92p

그러나 자유분방한 이백에게 황제의 비위를 맞추는 궁정 문인의 역할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노령에 접어든 현종은 양귀비와 환락에 빠져 있었고, 그 측근들은 온통 비열한 소인배뿐이었다. 이에 완전히 실망한 이백은 출세를 향한 그 간절했던 소망도 잊고, 엉망으로 술에 취해 현종이 총애하는 환관 고력사에게 자기 신발을 벗기게 하는 등 방약무인한 광태를 거듭했다.

98p

당시 한미한 집안의 수재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등용문인 과거에 반드시 합격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백거이도 과거 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당나라에도 나름 계층 사다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107p

겁을 먹은 황제는 그만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여전히 재상의 지위에 있던 풍도는 도망친 황제와 진퇴를 같이하는 대신 이종가에게 '권진문', 곧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는 문장을 지어 바쳤다. 그러면서 반대하는 동료들을 향해 "일이란 모름지기 현실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위대한 현실주의자의 면모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이후 풍도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종종 맞닥뜨릴 때마다 자신의 발언대로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차례차례 교체되는 왕조에서도 항상 행정의 달인으로 중용되어 정치의 중추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풍도의 이러한 삶을 절조 없고 파렴치하다며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때는 군사력을 거머쥔 자가 차례로 주도권을 장악하던 난세였다. 그 와중에 행정을 담당하는 문관에 불과했던 풍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출현하는 권력자에게 일일이 충성하고 의리를 지켰다가는 목이 열 개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16p

이러한 금전적인 도움이 임포의 은둔생활을 지탱해주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정작 임포 자신은 아무리 도움을 받아도 고맙다는 인사라든가 부담스러워하는 내색 따위는 전혀 하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 배포 한 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128p

휘종은 예술가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초일류였다 .요컨대 정치에는 몽매했던 예술가 휘종이 황제로 즉위한 일은 본인에게도, 북송이라는 시대에도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159p

이탁오는 유교의 경전으로 손꼽히는 <논어>와 <맹자>에 대해서는 "영원한 진리 따위는 없다. 이것들을 절대시하는 자는 말라비틀어진 인간뿐이다"라는 등 가차 없이 혹평을 날렸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 <장서>에서, 한 시대에는 그 나름의 기준이 있으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고정된 유교적 기준에 의해 일률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사문난적으로 사형당했을 것 같다)

174p

일설에 따르면 장대는 강희 28년 93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청의 지배 아래서 반세기 가까이를 명나라 '頑民(완강한 유민)'으로 살았다는 말이 된다. 실로 가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너무나 오랜 시간을 망한 나라를 추종하면서 살았으니 긴 삶이 오히려 불행이었을 것 같다)

120p

김농과 정판교를 필두로 한 '팔괴'는 명나라 중기 소주에서 활약한 '오중사제'의 명맥을 계승하여, 청나라 중엽 양주를 거점으로 자립형 서예가, 화가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렇게 명에서 청으로 왕조는 교체되었지만, 그것을 초월하여 비록 소수일지라도 사대부 지식인 안에서 자유를 추구하며 자립 생활을 지향한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출현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234p

그중 압도적인 양을 차지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잡문집이다. 이 엄청난 양의 잡문 속에는 고전학자나 소설가로 대성하는 길을 버리고 논쟁의 장에 몸을 던져 전환기를 살아간 루쉰의 흔적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주인일 때 타인을 전부 종 취급하는 사람은, 주인을 모시게 되면 반드시 스스로도 종으로 처신한다. 이는 만고 불변의 진리로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류>

36p

흉노가 부쩍 세력을 키워 후한 제12대 황제인 명제 무렵에는

-> 명제는 후한 12대가 아니라 2대 황제이다.

139p

오고타이의 아들 쿠빌라이 시대에는

-> 오고타이는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고, 그 아들은 구육이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4남 훌라구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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