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安東 金門 연구
이경구 지음 / 일지사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너무 좋은 책인데 한자가 많아 힘들게 읽었다.

한자만 아니면 역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에 쭉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로운 저작이다.

한자로 표시를 해야 뜻이 정확해지는 용어들이긴 하지만, 기왕이면 한글 표기를 같이 했으면 훨씬 가독성 있었을 것 같다.

읽을 줄 모르니 마우스로 네이버 사전 필기 인식기에 힘들게 그리면서 찾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19세기 세도정치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주범이라고만 생각했던 안동 김문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애써왔고 당대 최고의 벌열 가문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책을 읽는 내내 느낀 점은, 도대체 이덕일씨는 어느 포인트에서 노론이 정조를 죽였다고 추론했을까 하는 점이다.

정조야말로 18세기 후반 노론의 의리론을 국시로 정립시켰고 안동 김문을 국정 파트너로 삼아 척신으로 키우려고 한 사람이다.

정조는 왜 개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문체반정도 정조니 그 정도로 끝났지 다른 왕이었으면 다 죽였을 것이고 사실은 패관잡기류의 변화를 정조가 지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던 책이 생각난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정조는 원래 존주의리와 순수 주자학을 신봉했고 노론의리를 정론으로 생각해 자신이 국정을 주도해 나갔다.

그가 대표적인 척화가문인 안동 김문을 외척으로 선택해 척신으로 키운 것이다.

정조는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처가로 김이중을 생각했고 아들이 요절하자 결국 훗날 순조의 처가로 김이중의 아들인 김조순을 선택해 국정을 맡긴다.

노론을 마치 악의 축처럼 인식하는데 노론의 순혈주의가 결국 조선을 폐쇄적이고 고립된 전근대 국가로 만들고 말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양난을 극복하고 모든 학설의 도전을 이겨내고 우뚝 선 가장 탄탄한 이론을 가진 집단이었다.

안동 김문은 김상용, 김상헌 형제로부터 시작된 척화의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김수항, 김창집, 김제겸 3대가 죽임을 당하고서 왕위에 올린 영조 시대에 조정은 물론 재야의 산림도 장악하게 된다.

단순히 권력욕에 취해 나라를 어지럽히는 가벼운 가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사책에서는 자주 안 나와 존재감을 몰랐던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등의 학문적 저변 확대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처음 알았다.

단순히 관료로서만 잘 나간 게 아니라 뒤에서 학문적으로 탄탄하게 받쳐주던 가문의 학자들이 있었기에 안동 김문이 조선 최고의 명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 둘

1) 역시 서울에 살아야 한다.

안동 김씨가 경파와 향파로 분기되면서 끝까지 서울에 세거했던 청음파는 인적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많은 정보를 얻으면서 자연스레 경화사족으로써 위상이 올라가게 됐다.

조선시대에도 지방 차별은 엄청났던 것 같다.

대한민국의 서울 중심주의는 비단 요즘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2) 가문이 잘 되려면 누대에 걸쳐 관료직에 나가야 하고 당대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은 가문의 부속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개인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시대와는 다소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부모가 강남 살아야 중심부 문화를 맛보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업을 얻게 되고 그것을 발판으로 자식에게는 더 많은 것을 물려주는 패턴이 일반적인 흐름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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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 계보와 구성원 조선왕실의 의례와 문화 5
원창애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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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궁금했던 조선 시대 종친과 의빈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책이다.

막연한 추론이 아니라 통계를 가지고 학술적으로 결론을 낸 책이라 신뢰도가 아주 높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어 써서 교양서로 바람직한 수준이다.

종친은 왕의 4대손, 즉 현손까지로 관직에 못 나가는 대신 종친부에서 관작과 녹봉을 줘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5대손부터 9대손까지는 원친이라 하여 친진되는 대신 과거를 볼 수 있고 그 전에도 이미 음직 등으로 많이 출사해서 관료가 된 후에 문과에 급제하면 국가 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당상관으로 빠른 승진을 했다.

10대손은 원친에서도 배제되지만 그렇다고 나몰라라 하지 않고 국가에서는 역을 면제해 주는 등의 혜택을 부여해 왕실 후손으로서 위엄을 세워준다.

종친이 4대손까지 일종의 사회적 금고에 처해지는 반면, 왕의 외손들은 경제적 혜택과 더불어 관직에 나갈 수 있고 빠른 승진이 가능해 조선 후기로 올수록 문반 관료 가문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대표적인 예가 정명공주와 혼인한 풍산 홍씨의 홍주원 가문을 들 수 있다.

종친이라고 해서 대를 거듭할수록 다 번성했던 것은 아니고, 후손들이 생원, 진사시에 붙어 관직에 나가서 관료가 되어야 하고 특히 혼맥이 중요했다.

좋은 가문과 혼인을 맺어야 사회적 위상을 유지하는데, 종친은 원칙적으로 사대부가와 혼인해야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에 따라 서얼이나 중인 가계와 혼사를 맺는 경우도 종종 생겼다.

사대부들이 첩의 자식과의 혼사를 꺼리기 때문이다.

본인은 적자라 하더라도 윗대에 서자가 있으면 서자 가문으로 인지되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왕의 후손이라 해도 어머니가 첩이면 관료로 나가기 힘들고 혼사도 격이 떨어지는 가문과 이루어지면서 중인 가계로 전락하는 경우도 간혹 발생했다.

조선 시대의 양반이란 집안에 적어도 관료나 관료 예비군이 있어야 하고, 혼인을 통해 가문의 격을 유지했다는 말이 이해된다.

아버지의 신분만이 아니라 어머니의 신분도 사회적 지위 확립에 매우 중요했던 것을 보면, 확실히 조선은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던 게 분명하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현대 사회와는 매우 다르게, 가문의 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여러 대에 걸쳐 애를 써야 비로소 자손들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고, 그것도 영속적인 게 아니어서 당대의 노력이 없으면 다시 몰락하게 되는 걸 보면 전근대 사회에서 개인은 가문이라는 집단의 구성원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조선 초기에는 태종이 외척의 정치 개입을 막아서 외척가문 성장이 어려웠으나, 16세기 이후는 왕실 혼인이 외척가문의 성장 내지는 유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과의 혼인은 현달한 가문이 그들의 族勢 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41p

송에서 親 이 다한 5.6대 왕실구성원에 대한 배려로 단문친의 관직 제수와 종실 親試 를 제도화하여 그들이 왕실 후손으로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도 역시 단문친에게는 돈녕부 관직 제수라는 통로를 열어 주어 왕실 후손이 사회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44p

세종 종친 봉작법에 자품은 없지만, 정1품으로 규정되었던 대군과 군은 <경국대전> 종친 봉작법에서 무품으로 법제화하였다. 이것은 왕자가 왕세자, 대군, 군 등의 서열이 있긴 하지만 모계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종친과 관료와는 비교될 수 없는 지위에 있다는 것을 뜻하였다.

51p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종법은 승습할 적장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양자를 세워 승중하게 되어 있었다. 반면 조선 전기의 종법에 대한 인식은 적장자의 후사가 없으면 중자가 계승하고, 중자 역시 후사가 없으면 첩자가 계승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통성이라는 명분이 아니라 혈엽에 입각하여 종법이 시행되었다는 증거이다. 결국 <경국대전>에는 당대의 친족 의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63p

17세기 중엽 이전 왕후보첩 수록의 기준점이 왕후의 고조부가 아니라 조부였던 것은 보첩이 미비된 것이 아니라 조부 이하의 자손을 친족으로 의식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오복제에 의한 친족 의식이 왕실에도 나타났다. 영조는 왕실의 친족을 종성 4대손까지, 이성은 외손자까지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원계보기략>에 잘 반영되어 있다.

67p

정조 역시 대동보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정조는 국왕으로서 탕평을 통해서 권력과 이념을 주도하려 하였으므로 왕실가문의 지원이나 영향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서 권력의 주도권은 국왕에게서 세도를 장악한 관료들에게로 넘어갔다. 이러한 정국하에서 국왕은 공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수장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가문의 대표자로 전락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의 왕실구성원은 계속 쇠락해 갔다. 선조대 이후로 종친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효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의 소생 왕자군은 왕위를 계승할 원자 1명만 두었으며, 숙종이 낳아 장성한 왕자 두 사람은 모두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종친이 거의 없었다.

76p

사왕 자손은 일련의 조처를 통해서 완벽하게 왕실구성원이 되었다. 태종이 이들을 선원세계에서 배제했던 정책이 이때 논란 없이 폐지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사왕 자손이 더 이상 왕위 계승권 경쟁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왕의 4대손까지 종친으로 봉작하더라도 고종대에 와서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사왕 자손들에 대한 군역이나 천역 면제는 12대 손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12대손까지라는 제한이 큰 의미가 없었다. 이들은 선원의 지파로 이미 대수에 상관없이 국역에서 면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들을 왕실구성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쇠락한 왕실을 재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왕 자손을 포함한 왕실 후손이 하나의 거대한 가문임을 보여 줌으로써 왕실이 허약하다는 인식을 불식키시고 왕권의 위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103p

얼마 되지 않는 종친도 역모에 연루되는 자가 많아서, 종친이 살아남기가 쉽지 않았다. 특별히 조선 후기에 종친의 정치적 희생이 많았던 것은 왕통의 정당성이 약하였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조선 후기에 왕후에게서 난 적장자가 왕통을 이은 예는 현종과 숙종뿐이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대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왕실 내부의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하였다. 

108p

이주가 자신의 서녀를 서자의 아들에게 시집보내자, 종친들이 이를 불편하게 여겼다. 이에 대해서 성종은 종친이라도 천첩 소생을 명문가에 억지로 혼인시키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당시에 이미 종친의 적서를 막론하고 반드시 사족과 혼인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종친이 지체 낮은 집안과 함부로 혼인하여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종부시에서는 종친의 혼사가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단속하고, 종친과의 혼사를 거부하는 타당한 이유가 없을 경우에는 처벌까지 하였으나, 당시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111p

서자 출신 종친이 대부분 서자 혹은 중인가문과 혼인한다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하여 종친은 적서와 상관없이 사족과 혼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반드시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신분제 사회의 혼인에 있어 家格 은 무시할 수 없다. 가계가 서자 계통인 경우 그 집안의 가격이 점차 낮아지기 마련이다.

112p

영순군의 활발한 정치 활동은 그의 자손들이 명문가와 혼인을 맺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결국 종친으로 가격이 높은 가문과 혼인하고 그 후손들이 번성할 수 있으려면, 첫째, 종친이지만 정계와의 긴밀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둘째, 서자 가계 출신보다는 적자 가계 출신이어야 했다.

184p

왕후를 배출한 성관끼리 서로 혼인 관계를 맺거나, 왕후가문에서 지속적으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것은 혼인이 사회적 지위를 형성 유지하는 데 중요 요인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190p

17세기 현종비 이후 선대 부계 친족 특히 왕후 부친 형제, 종형제 등이 관원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사실은 왕후가문이 명문가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원군 이외의 외척가문 출신 관료가 관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여기에다 왕후의 모계 선대 친족까지 보태진다면 왕후의 친인척이 왕후 책봉 이전에도 정치 세력화되어 있었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배태되어 있었음을 밝힐 수 있다. 이것이 17세기 외척이 조선 전기의 외척과는 다른 면모이다.

201p

두 왕후의 친족은 관직 진출이 용이하긴 했으나,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당상관으로서의 승진은 많지 않아서 척신정치로 발전되지는 않았다.

205p

정희왕후는 수렴청정 당시 원상과 대신들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성종 즉위 전부터 원상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성종이 즉위한 후 정희왕후의 남동생 윤사흔이 원상이 되었다. 정희왕후는 원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대신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겸판서 제도를 활용하였다. 정희왕후의 친족으로 정국 운영에 참여하였던 사람은 극소수이며, 인척 중 몇 사람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순원왕후의 친족이 대거 관직에 진출하고, 그중 많은 인원이 당상관에 포진되었던 것과는 달리 정희왕후의 측근에 있었던 친족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 전기만 해도 수렴청정 제도가 비교적 잘 운영되어 한 가문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제도적으로 수렴청정이 미비된 상태라 그럴 수도 있고, 정희왕후가 측근정치를 하지 않고 대신들과 같이 국정을 운영하는 현명한 선택을 해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조선 후기 순원왕후 시절의 세도정치와는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다)

212p

조선 전기 국왕의 외손은 문과 합격자 인원이 매우 미미하였으나, 선조대 외손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16세기 이후 왕실 인척의 문과 합격이 급증하는 것은 문과를 통한 관계 진출이 완전히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문과에 합격한 후에 관계에 진출해야 참상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 승진이 용이해지는 관료 체제가 정착되었다. 그러므로 왕실 인척도 역시 문과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하려 했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손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러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사림정치가 활발해지자 사림가문 외척의 정치 참여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왕후가문에서의 관직 점유율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247p

국왕의 4대손까지는 왕실 근친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진된 이후 국왕의 원친은 사회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원칙적으로 과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완전히 끊기는 것은 아니었다. 친진된 이후 관직에 나가지 못한 왕실 원친은 16세가 되면 충의위나 족친위에 소속되어 군직을 받을 수 있었으며, 잡역도 면제되었다. 국가에서의 경제적 지원이 있을 때에 왕실 후손들은 손쉽게 과업에 힘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국왕과의 촌수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았고, 서울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인적 교류의 폭도 넓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원친이 문과에 합격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252p

친진되어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나면, 원친은 그 이전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여야만 했다. 특수 병종에 입속하여 서반 관직을 받는 것으로는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야 했다.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생원, 진사를 획득하는 것이다.

 왕실 종친의 지위에서 벗어난 원친 가계에서는 우선 생원, 진사를 획득하여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생원, 진사를 획득한 이후 문음으로 관직을 획득하고, 청요직과 당상관으로 승진하기 위해서 문과에 응시하였다. 

257p

 원친이 문과에 합격하여 많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인조대에서 정조대까지로 치우져 있었다. 이 당시에 왕실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국외적으로는 전쟁을 겼었고, 국내적으로는 왕실의 정통성 문제를 정립해야 했으며, 당쟁정치로 인한 페혜도 컸다. 또한 왕실 후손이 귀한 시기에 국왕들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필요로 하였다. 정계에서 활동하는 왕실 후손들이 국왕의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후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국왕들은 능력이 있는 원친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여 정계를 이끌어 가게 하였다.

 그러나 10대손 이하 문과 합격자가 정계에 많이 나간 시기는 19세기였다. 이 시기는 척신 세도정치가 형성된 시기였다. 그러나 왕실 후손 관료들이 세도정치의 핵심이 될 수는 없었다. 정3품 당상관까지 승진되기는 하였으나, 척신 세도가들이 왕실 후손에게 아경 이상의 관직을 제수하지 않아 정국 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258p

조선에서 사족으로 인정받으려면 적어도 가문 내에서 생원, 진사가 배출되어야 한다. 중종은 4조 이내 6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가 있어야 하고, 문,무과 합격자의 자제 그리고 당사자가 생원, 진사이어야 사족이라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가 있다. 이 규정은 전가사변이란 형률에서 면제될 수 있는 범위의 사족을 언급한 것으로, 좁은 의미에서 사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규정을 확대하면, 대수는 차치하고라도 가문 내에 6품 이상의 관직자, 문,무과 합격자, 생원,진사 등이 있어야 사족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문 내에 관료나 관료 후보군이 존재해야 된다.

261p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는 시기적으로 17세기 이후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안원대군파의 생원, 진사와 문과 합격자의 거주지는 거의 정주라는 점이 주목된다. 정주는 평안도 지역으로 사족이 드물고 상업이 성행한 지역이었다. 중국의 명과 청이 교체되자, 평안도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 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로 서북 지역이 국방상 요지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이곳에 사는 지역민들을 성리학적으로 교화시키고, 인재를 등용하여 변방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특히 문과, 무과의 경우에는 道科 라는 이름으로 함경도과와 평안도과를 신설하여 그곳 지역민만을 대상으로 시험이 시행되었다. 서북 지역민에 대한 교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원, 진사나 문과 합격자가 급격히 배출되기 시작하였다.

 정주에 세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안원대군파 역시 그러한 경우이었다.

 관료가문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생원, 진사의 배출이나 문과 합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문과 합격자가 연속적으로 배출되어야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 <표23>에서 10명 이상의 문과 합격자를 낸 17개 파가 핵심 관료가문의 전부라 할 수는 없다. 문과 합격의 연속성이 강하게 나타난 가계만이 핵심 관료가문으로 성장하였다. 

270p

그가 늦게 관계에 나가서 80세가 넘을 때까지 관직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정계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들과의 깊은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이수광과 그의 형들은 관직에 나가지 못했으나, 이유간이 교유한 인물들은 선조, 광해군, 인조 때 정계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다. 

275p

이경석은 최고 엘리트 관원의 승진 경로를 그대로 밟았다. 문과에 합격한 지 7년 만에 당상관에 오른 것은 초고속 승진이었다. 이경석이 참상 청요직을 두루 거쳐서 당상관에 빨리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지적 능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서인이 주도하는 정계에서 관료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활동 시기에는 정치적인 장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형 이경직과는 달리 참상 청요직을 거쳐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290p

이천수 집안에는 삭과를 당한 인물이나 역당으로 몰린 인물이 있기는 하나 조선 후기까지 문관 관료가문으로서의 문지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경직, 이경석 가문과는 달리 노론가문으로서 정치적인 부침이 적었기 때문이다. 

307p

이처럼 무과를 통한 무반 관료를 6대 이상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무반가문임에도 무반 벌열가문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무반 벌열가문들은 무반 고위직 진출자가 많이 배출되는 동시에 왕실 또는 종실과 외척 관계를 이루거나 다른 무반 벌열가문과의 통혼 관계를 통해서 벌족화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무관가문이라고 하더라도 파계 내에 동반 관료가 포진되어 있을 때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기가 수월하였다. 대장직은 도성을 지키고 국왕을 시위하는 군영의 최고위직이었다. 그러므로 국왕의 측근이거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당대 핵심 동반 관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이들이 대장으로 발탁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파계 내에 핵심 동반 당상이 다수 존재하는 왕자군 파계 내의 무관가문에서 대장직이 주로 배출되었다. 화의군파의 경우에는 문과 합격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만큼 가능성이 적을 수밖에 없다.

327p

중인 가계가 왕자군파 내의 절손된 계통에 끼어 들어갔다. 18세기 이후 족보의 간행이 성행되면서 양반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족보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따라서 족보를 위조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전주이씨의 성관으로 활동하던 중인 가계가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왕자군파의 가계와 연결시킨 것으로 가정할 수 있다.

343p

18세기 이후 국왕 자손이 귀해져서 종친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세도정치하에서 국왕은 왕실 후손의 단합된 모습으로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간 왕실구성원 중심으로 왕실보첩을 편찬하던 것을 <선원속보> 라는 형식으로 고쳐 대수에 제한 없이 왕실 후손 모두를 등재하고자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은 조선 초 왕실 후손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했던 4왕 자손까지 왕실 후손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348p

외척의 직역 분포에 있어 명종비인 인순왕후 이후로 당상관 점유율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전기 태종의 외척 견제 정책이 효력을 상실한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왕실이 핵심 관료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핵심 관료가문이었다고 하더라도 왕후를 배출한 가문에서 당상관이 양산된다는 것은 결국 외척이 주요 정치 세력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49p

조선 전기 왕후가문에서는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매우 저조하지만, 16세기 이후에는 왕후가문에서도 문과 합격자 배출이 많아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 문과 합격 이후 관계에 진출하는 것이 청요직을 획득하고 아경 이상의 대신으로서 정국 운영에 핵심이 되는 관료 시스템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왕후가문이나 국왕 외신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태종의 외척 억제 정책이 지속되다가 중종, 명종대에 이르면서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척족정치가 행해진 문정왕후 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14.5%이다. 17세기에는 왕후가문의 관직 점유율이 대부분 25%를 넘으며, 특히 세도정치기에는 70% 이상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350p

문과에 합격한 이후에는 승진에 어떠한 장애도 없이 아경 이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은 과거가 아니라도 25.8%는 당상관직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국왕의 외손이야말로 핵심 관료로 승진할 수 있는 부류였다.

352p

원친이 문과 시험에 합격하고, 지속적으로 문관 관료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종친이지만 정치적인 활동 영역을 넓혀야 한다. 종친은 원칙적으로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지만, 반정이 있을 때마다 종친이 개입되어 있었다. 적절한 정치 참여를 통해서 그들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확보해야만 명문가와의 혼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종친의 지위에 있을 때에 정치적 기반이 확고해야만 친진된 이후에도 왕실 후손이 기댈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 기반이란 다름이 아닌 문관 혹은 음관으로라도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여건 형성이다. 예를 들면 덕천군파의 이유간은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음관으로 관직에 나갔다. 다행히도 그의 두 아들이 문과에 합격하면서 관료가문으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이유간의 경우 왕실의 친인척, 학맥 등의 네트워크가 폭넓어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유하였다. 그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서인계였다.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그 가문의 출셋길이 열렸다.

 화의군의 가문은 무반 벌열가문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화의군이 정변에 연루되면서 가문의 문지가 약해서 무반 벌열가문과의 혼인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파계 내에 문관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무반 벌열로 발전한 효령대군파 같은 경우는 갈래는 같지 않더라도 문관이 왕성히 배출되는 친족들이 있었다. 문관들의 후원이 전혀 없는 화의군파는 지속적으로 무관 관료가문이긴 했으나, 벌열가문으로 발전되지 못하였다.

 왕자군파 내에서 기술직 중인가문을 형성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모계가 천인이거나, 서얼인 경우 일시적으로 중인의 지위에 있을 수는 있다. 



<오류>

87p

정종의 장남 이원생은 언제 태어났는지가 확실하지 않다. 이선생처럼 11세쯤 종반직이 처음 수여되었다면, 이원생은 1402년(태종2)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론이 맞다면, 1400년 정종이 동생인 정안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전해 줄 때에는 명실상부한 정종의 친자는 없었다.

-> 다른 자료를 찾아보면 1392년생, 1393년생,1399년생 아들들이 여럿 존재한다. 어떤 게 맞는 건지 좀더 찾아봐야 할 것 같다.

89p

고려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종의 아들들은 부정윤에조차도 제수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실록에서는 정종의 자녀들을 거론할 때마다 궁인 소생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궁인의 소생들을 소군이라 하여 봉작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야만 하였다.

->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정종의 후궁 성빈 지씨와 숙의 지씨는 자매 사이로 고려 시대 재상을 지낸 지윤의 딸들로 나온다.

그녀들의 언니는 정종의 형 진안대군의 부인인 삼한국대부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문벌가의 딸들인데 이 책에서는 전부 궁인으로 나오니 헷갈린다. 궁인이었다면 성빈이라는 직첩도 못 받았을 것 같다.

207p

장경왕후의 형제 윤지임이 인종의 외삼촌으로서 문정왕후를 견제하려다~

-> 장경왕후의 형제는 윤지임이 아니라 윤임이다.

256p

특히 이경여와 이이명은 조부와 손자로서 정승까지 올랐다. 이건명과 이이명 역시 6촌지간이었다.

-> 이경여의 아들 이민적은 작은 아버지 이정여의 양자로 갔고, 그 아들이 이이명이다. 이건명은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의 아들이므로 실제로는 4촌이고, 족보상으로는 6촌이다. 그런데, 이이명은 다시 이경여의 아들인 이민채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결국 둘은 6촌이 아니라 4촌이 맞는 것 같다.

283p

최승녕의 장남 최도일 역시 그의 딸들을 왕실에 시집보냈다. 예종이 세자였을 때 소훈으로 간택되어서, 예종이 즉위한 후 공빈이 되었다.

-> 최씨는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숙의가 되고, 예종 사후 성종 14년 1483년에 귀인에 봉해졌다. 공빈 최씨의 존재는 영조 대 문제가 되었던 듯하다. 위에 나온 최도일의 딸은 귀인 최씨이고, 전주 최씨 족보에 공빈 최씨라는 인물이 있어 그녀가 문종의 왕후인지 논란이 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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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한 예술가들 - 걸작 뒤에 숨은 예술의 경제학
오브리 메넨 지음, 박은영 옮김 / 열대림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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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다니던 도서관에 없어 미뤄두다 상호대차 시스템을 통해 드디어 읽게 됐다.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매우 학술적이고 유머가 돋보이는 책이다.

마치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를 읽을 때 느낌 같다.

예술가도 창조적인 "직업"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돈과 예술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도 8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평생을 돈 때문에 고민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티치아노 같은 대화가들도 돈을 떼먹는 군주들 때문에 그림값 지불을 간청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던 걸 보면 그들도 우리 같은 생활인이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 시대만 하더라도 예술가는 장인의 위치에서 벗어나기 힘들었으나 반종교개혁 등으로 가톨릭이 예술을 선전의 도구로 후원하면서 많은 돈이 쏟아져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했으며 점차 예술가의 지위를 획득해 갔다.

루벤스나 피카소 등의 예를 보면, 천재 예술가가 돈 문제에 답답할 리가 없다는 말이 이해된다.

사후에 유명해진 반 고흐가 매우 예외적인 경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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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과 미술
서성록 외 지음 / 예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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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종교개혁과 미술"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워 오래전부터 읽고 싶던 책인데, 상호대차시스템을 통해 빌리게 됐다.

미술보다는 종교개혁에 방점을 찍은 책이다.

표지의 개성적인 인물은 크라나흐가 그린 루터이다.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을 쓰고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서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던 시절의 루터이다.

흔하게 보는 초상화는 아니라 아주 인상적이다.

여러 저자들이 종교개혁 시대를 살아간 7명의 인물들에 대해 쓴 책이라 관점이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을 잘 갖췄다.

150 페이지의 짧은 분량에도 당시 유럽의 격변기를 살다간 종교개혁가와 화가들을 예술사의 관점으로 잘 설명한다.

저자들이 개신교인이라 그런지,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적 교리를 화가들이 어떻게 표현했는지에 중점을 둔다.

루터나 칼뱅은 종교개혁가이니 그렇다 쳐도, 뒤러와 크라나흐, 홀바인, 브뢰헬,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이 개신교도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신선했다.

이들도 성서적 주제를 그렸지만 확실히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가톨릭 사회의 화가들과는 관점이 다른 것 같긴 하다.

나는 네덜란드가 중산층 시민 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면서 화가들의 미적 관점이 변했다고만 이해했는데 저자들은 이 화가들이 프로테스탄트적 교리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종류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본다.

루터는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고, 구원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선물이자 은총이라고 했다.

루터는 종교예술을 거부하지 않았고, 칼뱅도 성상 숭배는 금지했으나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려는 인간의 예술적 본능은 긍정했다. 

네덜란드 사회에서 성인 대신 주변을 그리는 장르화가 유행한 것도 이런 이론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20p

루터에 따르면 사람들이 이미지를 느끼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형태를 만드는 것을 '자연적인 인간심리 과정의 부분'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예술은 이러한 인간 성형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십자가와 성인들 같이 기념 및 증거를 위한 형상들에서 본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념과 증거를 위하여 그것들은 칭송할 만하고 귀중하다"고 보았다. 또한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그림은 성서의 글과 유사한 방법으로 교훈을 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53p

"우리는 정신에 의해 살고 그 외에는 죽음에 속한다"라는 명문을 적어 넣었다.

58p

크라나흐가 루터를 도우면서도 그와 적대적이었던 상대진영으로부터 작품 의뢰를 받은 것은 그가 종교적, 정치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깊이 연루되기보다 당대 최고의 화가로서 다양한 주류계층에게 선호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선제후로부터 귀족이나 왕족, 고위 성직자들만이 지닐 수 있었던 개인문장을 갖는 특권을 선제후로부터 부여받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61p

인간의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지고 누군가의 중재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구원됨을 나타낸다. 이는 가톨릭에서 성인이나 마리아의 중재와 개인의 선행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는 주장과 정반대된다. 루터가 오직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뤄진다고 한 것과 연결된다. 

67p

루터는 신앙고백이 신자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영성체를 받게 하는 정화의식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스처도 아닌, 죄 있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루터에게 죄를 인식하고 용서를 바라는 것은 보상받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믿음을 갖게 되면 회개와 위로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94p

칼뱅은 조국인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이루었다. 루터가 자신의 조국인 독일에서 영주들의 후원을 받아 교회개혁에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래서인지 루터교회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반면, 개혁교회는 매우 진취적이다. 루터교회는 16세기 농민전쟁 때 독일의 영주들 편에 섰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독일 국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가톨릭 편인 프랑스 국가의 박해 속에서 살아 남아야 했다. 칼뱅 자신도 제네바에 정착한 후, 그곳의 토착 귀족들과 치열하에 투쟁하면서 교회의 영향력을 키워 갔다. 이러한 초기 조건이 칼뱅을 따르는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토들을 시민적명의 주도세력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99p

유아세례와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하여 심한 박해를 받은 재세례파도 마찬가지로 성상을 우상 숭배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루터교회를 제외한 유럽의 개신교회로부터 모든 성화와 조각이 제거되었다. 반면에 성화를 제외한 미술은 오히려 장려했기 때문에 개혁교회가 뿌리내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바로크 미술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101p

인문주의는 고대의 문화유산을 로마 가톨릭교회의 스콜라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고 종교개혁을 준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인문주의가 중세 후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재발견해 낸 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수사학 전통이었다. 

103p

칼뱅은 하느님 자신을 묘사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탁월한 은사들로 생각했다. 그는 예술이 죄에 의해 깨어진 세상보다 더 높은 현실, 즉 타락 이전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칼뱅은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나타난 창조 세계를 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뱅의 영향 아래 당시까지 교회로부터 '세속적'이라고 비판받던 자연이나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회화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발전했다.

113p

네덜란드인들에게 미술이란 포장되어 팔리기에 충분할 만큼 작은 상품으로서 사고파는 시장 활동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많은 작품을 팔기 위해 감상자층을 확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점이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제공하며,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명확하고 서술적인 방식들을 선호하도록 했던 것이다. 

119p

"가감 없이 거기에 겨울이 존재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행복은 한동안 힘들어지거나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행복의 부재는 불행이 아님을 상기하자

불행이 가능하다는 것, 불행을 생각할 수 있는 것

혹시 올 겨울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자

삶을 지속하거나 기다리기를 지속하는 것, 아니 기대를 품고 사는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은 참고 견디라,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푸쉬킨 시랑 같은 맥락인가? 인생은 고단한 것이라는 정규재씨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브뢰헬이 매우 사실적인 방식으로 가난한 농부의 현실을 묘사할 때조차, 화면에는 지긋이 배어 나오는 낙관과 소망의 정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뢰헬의 세계는 신비로운 낙관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존재의 심연에서 신앙의 뜨거운 열망이 식지 않고 있었기 때문일까?

123p

브뢰헬은 당시 네덜란드에서 화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고 구매하기 원했다. 사람들은 그의 따뜻한 감성과 신랄한 태도, 천부적인 상상력을 통해 재현된 성서의 이야기와 도덕적 교훈을 즐겼다. 이는 특히 오늘날과 같이 '저자의 죽음'이 보편적 담론이 된 시대에 예술가가 자신의 삶 자체로 쌓아 온 신뢰와 유대감의 힘, 곧 시민들에게 다가서고 교감하도록 했던 잠재력에 대해 새삼 환기하게 한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야기했던 분열과 혼돈의 상황 속에서 그의 그림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동족과 시민과 농민의 편에 서 있었다.

(브뢰헬이 과연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톨릭 성화 대신 농민 그림을 그렸을까? 그가 태어난 사회과 신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곳이고 구매자들이 프로테스탄트 그림을 원해서이지 않았을까?)

124p

브뢰헬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진정한 예술에 내제될 수 있는 창조적 지성의 역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이끈다. 모든 예술가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도로시 세이어스의 말에는 당위성이 부여된다. 진정으로 창조적일 때, 예술은 그 자체로 개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그 주요 전제에 손을 올려놓고 세계의 토대를 흔들어놓는다. 그가 이런 위험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집이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지성이야말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임을 그녀는 확인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 자기 시대를 견인해 가는 힘, 인상파와 입체파 정도일까?)

125p

예술은 오로지 '자신만이 그 궁극'이라는 오만방자한 담론으로부터 멀리 떨어여 나와 창조의 심오한 근간인 시간과 영원이 한 인격체 안에서 화해되는 사건과 결부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이 글은 왜곡된 규범과 혼란과 폭력이 지배적이었던 시대이자 어느 때보다 변화의 욕구가 높은 개혁과도기를 살았던 한 화가가 자신의 그리기를 통해 어떻게 창조적 지성을 구현했으며, 그것으로 어떻게 자신의 시대에 기여했던가 살피는데 그 의미를 두었다.

127p

화가의 관심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향하지 않고 모든 계급과 지위의 사람들을 주제로 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은 그때의 인간관이 지위고하에 따른 신분 차별적 인간관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민이 그림에서 주연으로 등장하게 된 것을 단순히 명석한 화가들의 통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인간이 인간으로 조명된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가장 높고 가장 풍부한 계시'라는 통찰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런 인식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132p

렘브란트를 촉망받는 화가로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시장의 딸과 결혼하여 유력인사들과 친하게 지내는 등 사회 관계망을 넓혔다. 그의 출세를 귀족집안 출신 아내와의 결혼으로만 돌리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아무튼 사스키아를 만난 덕에 그의 평판이 높아졌고 재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달라진 그의 위상은 자화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오류>

65p

도판 설명 "코니크리크 박물관, 안트베르펜"

-> 코니크리 박물관이란 곳이 도대체 어딘가 했더니만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이었다. 

koninklijk 란 말이 loyal, 즉 왕립이란 뜻이었다. 이 정도는 번역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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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의 한화 정책과 낙양 호인사회 (반양장) - 북위 후기 호속 유지 현상과 그 배경
최진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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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전작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 나온 신간도 같이 읽게 됐다.

북위의 효문제는 수도를 산서성 평성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옮긴 후 적극적인 한화를 추진한다.

한화란 무엇인가?

호어 사용금지, 복성인 호성을 단성인 한성으로 바꾸기, 본적을 낙양으로 옮기기, 구 수도인 평성으로의 이장 금지, 장례 문화 변화, 수계혼 금지 등이 있다.

기존 학설로는 효문제의 한화 정책으로 한인 문화에 동화됐다고 알려졌는데, 저자는 이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위는 호인의 관습과 언어, 성명 등을 유지했다고 본다.

낙양으로 이주한 상층부는 비교적 한화 정책을 잘 수행했으나 그 기조가 하층부까지 완전히 내려온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북위는 한족에게 동화됐다고 해서 요, 금, 원, 청 같은 정복왕조가 아니라 침투왕조라 분류하는데 이분법적으로 나누기 어렵다고 본다.

왜 효문제는 천도를 하고 한어 사용을 강제하고 성까지 바꾸게 했을까?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완전하게 성공하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한족을 점령했으나 압도적인 한족 문화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일까?

지배 민족인 호인 입장에서는 황제의 이러한 강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 같기도 하다.

효문제는 29세 때 낙양 천도 후 강력한 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33세에 허망하게 죽고 만다.

정책 기조가 완벽하게 시행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과는 반대로 문자를 만들고 자신들의 관습을 유지한 요, 금, 원, 청 등의 정복왕조가 대단해 보인다.

북위가 전국을 통일하기에는 역량 부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 책의 주제는, 낙양 천도 이후 북위 사회가 "한화" 된 것이 아니라, 호한융합 체제로 선비족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인상깊은 구절>

56p

임성왕 원징과 광양왕 원연처럼 고위직에 올랐던 일부 종실제왕과 효명제 시기의 권력자 원차는 문서 작성을 부하들에게 하게 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호인 상층부에서도 한문과 문서 작성에 능한 인물들은 그 수가 제한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주영과 사적간처럼 북변에 거주하고 雁臣 생활을 했던 호인들은 한문의 독해와 작문 능력이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3p

모용씨와 혁련씨, 저거씨는 16국 시대의 옛 황실 일족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토욕혼씨도 북위 당시 독립국이었음을 보면 군주 씨족에 대한 견제책 혹은 우대책으로 호성 사용을 방치했거나 북위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호성 개칭을 따르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해볼 수 있다.

105p

효문제의 한성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들에게서 비교적 엄격하게 지켜졌고, 기타 지역의 호인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호성 혹은 한성을 사용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적어도 북변의 호인들은 본래의 호어를 사용했고, 호성을 사용했으나, <위서>의 편찬자 위수나 문서 행정을 담당했던 한인 관료들이 이를 한성으로 바꾸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룽멍 석굴 등의 조상기를 검토하면 북위 황실이나 훈신 팔성 등 호인 상층 지배층이 아니라 대부분 중하급 관리나 일반 호인들 사이의 호성을 사용한 예가 보인다. 지배층의 말단이나 일반 호인 가운데 일부는 상층 지배층과 달리 여전히 고유의 호성을 사용했다고 해석된다. 이는 승진이나 벼슬에 관심이 없거나 도태된 일부 호인이었을 것이다.

120p

문제의 본적 개칭 조치는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에게 한정된 것으로 보이며, 기존의 견해처럼 호인의 분열과 정체성의 분화에 공헌했을 것이다. 모든 호인이 하남군 낙양현으로 본적을 바꾼 것은 아니었고, 본적 규정이나 선택에 유예 조항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126p

효문제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사한 대인들의 본적을 "하남 낙양인"으로 고쳤다. 이는 호인들의 본적을 하남군 낙양현으로 바꾸어 한인들과 같은 군현 표기의 본적 혹은 호적을 가짐으로써 호와 한의 구별을 없애려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남 낙양인"인 이들을 구대인 혹은 대래 한인으로 지칭하거나 법률상 대천호 혹은 대천민이라 칭했던 예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외형상 "하남 낙양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낙양으로 이주한 호인으로 간주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42p

"오환 사람은 전쟁하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사람이 막 죽었을 때) 처음에는 소리 내어 울면서 슬퍼했지만, 장사를 지내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사자를 보낸다."

 인이 장례식에서 노래와 악기를 연주하며 일종의 축제처럼 지냈음을 보여준다. 반면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장례식은 엄숙하고 애도를 표하는 것이므로 선비 등 호인의 풍습은 중국인에게 독특한 것으로 비추어졌을 것이다. 이 때문에 한인 관료가 금지하도록 주청했을 것이다.

191p

한인 여성인 호태후가 활쏘기에 능했다는 사실은 '정숙한 여성상'을 강조하는 한인들의 윤리와 도덕관념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호인들의 상무적인 호풍이 궁중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230p

명문인 범양 노씨 출신이 형수와 성관계를 맺은 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이것이 대대로 유학자 가문이었던 범양 노씨 집안에서 생긴 예외적인 패륜이기도 하지만, 유목민들의 수계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한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유학 사상의 수용, 특히 유가의 윤리와 도덕의 수용이 하나의 잣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적인 북위의 호인들이 중화가 되려면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 사상과 거기에서 파생된 윤리와 도덕의 체득은 필수적일 것이다. 

232p

북위 황실의 종실 제왕과 공주, 종실 일족, 훈신 팔성에 속하는 호인(선비인) 문벌 등은 가족을 중시하는 유가 사상의 윤리를 체득하지 못했으며 거리낌 없이 혼외정사를 벌였다. 이는 북위 후기에 일부 호인이 여전히 한문화의 정수인 유가의 가족 윤리를 실천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247p

"남조의 부녀자들은 대개 교유하지 않으므로, 혼인한 후 양가 사이에도 십수 년간 서로 만나지 않고 오직 심부름꾼을 보내 문안하고 선물을 주어 공손함을 다한다. 반면 업하, 즉 북제의 풍속은 부녀자가 집안일을 모두 관장해, 쟁송의 곡직을 가리고, 세도가들을 방문한다. 항대(북위를 지칭)의 유풍인가?"

 안지추는 결혼한 여자가 교유하지 않고, 심지어 친정에도 자주 가지 않는 남조의 풍습과 북제의 풍습을 비교하면서 북제 시기 엽관 운동이나 각종 소송 등 북제 여성들의 치맛바람을 북위 시대의 유산으로 생각했다. 

251p

이처럼 중요한 의례에 호태후가 직접 참여한 것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자신이 사실상의 황제임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이처럼 황제와 맞먹는 용어를 사용하고 황제가 해야 할 의례를 직접 주관하는 호태후의 행동은 유교적 정치 이념이나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체제로는 설명할 수 없다.

 '2성'의 의미 변화는 풍태후 시기에 시작해 호태후 시기에 노골화된 '황태후들의 황제화' 시도로 볼 수 있다. 본래 중국식 의미에서 황태후는 황제의 나이가 어릴 때, 성인이 될 때까지 권한을 위임받아 대리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다. 

293p

선무제는 황후 고씨의 투기에 제제를 가하지 않았다. 고황후는 선무제가 여성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감시해 선무제가 죽을 때까지 선무제와 성관계를 맺지 못한 부인과 빈이 있었다. 따라서 선무제는 오직 아들은 효명제 1명만 남겼다. 선무제가 남성 중심의 유가 사상을 체득했다면 고황후의 투기를 두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즉, 선무제는 한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호속에 익숙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선무제는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한 다문화의 배경을 지녔을 뿐, 일방적으로 한화된 인물은 아니었다.

296p

북위 전기 근시관처럼 친위 부대인 영군부 장령들이 정치에 개입하면서 남조와는 달리 문서 행정을 담당하는 중서성보다 황제를 지근에서 보필하느냐가 중요해졌다.

306p

재정수입 증대에 소금 전매제도가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염철전매가 폐지되었던 시기에는 재정수입을 확보할 수단이 적었으므로 재정지출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호태후는 개인의 사치와 불사 건축으로 생긴 재정 부담을 절약으로 해결하기보다 염지도장을 설치해 염지 감독을 강화하고 소금 전매 수입 증대로 과도한 재정지출로 생긴 재정 수지를 맞추려고 했다.

323p

우문귀가 공부보다 무예로 출세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상무적 기상을 강조하는 육진 출신 호인과 한인들의 일반적인 심리였을 것이다.

325p

십익건 시기의 법률은 멀리 부여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 백제뿐만 아니라 돌궐과 실위, 거란, 여진, 몽골 등에서 살인과 상해, 간음, 도범 등의 범죄를 물자로 배상하는 법 문화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법률은 유목민들의 법률에서 영향을 받았고, 만주와 한반도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지> <형벌지>의 배상과 대속 규정은 유목민 법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즉, 서기 시대 유목민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327p

<불도를 공경하고 받들어 믿었음으로 아들에게 유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본향의 장법은 반드시 큰 말을 죽이니, 죽은 사람에게는 이익이 없다. 나는 마땅히 그 풍습을 그만두고 나를 시복으로 염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라.">

 "반드시 큰 말을 죽인다"라는 구절은 무천진 일대의 사람들은 장례식을 지낼 때 말을 죽여 순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요제희의 무덤에 말과 말의 머리가 발견된 것과 일치한다.

331p

문벌을 모칭하던 가문들이 해당 성씨의 본적이나 고거에 들어앉아 문벌임을 확인받으려 했던 당시 상황을 보면,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이후 독고신 일가가 본적으로 표기한 하남 낙양현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장안 근처에 묻힌 것은 하남 낙양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독고신의 선조는 필자가 추정한 것처럼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 하남 낙양인으로 본적을 바꾸라는 조치에도 무천진에 여전히 정거했으므로 형식적인 본적인 낙양에 대한 애착이 없었을 것이다. 

 독고신 일가처럼 실제로는 북위 말에 낙양에 거주하지 않고 북변에 거주했지만, 하남 낙양을 본적으로 표기한 호인들이 빈출한다.

365p

낙양에 거주했던 서역인과 낙양에 영향을 준 서역 문화는 낙양에 한인과 한문화만 존재했을 것 같은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환기시킨다. 서역 문화는 호인(유목민)들이 한인과 한문화에 일방적으로 경도되는 것을 막는 완충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인뿐만 아니라 북방의 유목민, 고구려 등 만주와 한반도의 사람들, 남조에서 귀화한 사람들, 중앙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 서역 사람들이 낙양에 거주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들에게 자신의 문화를 퍼뜨렸다. 따라서 북위의 호인 지배층이 일방적으로 한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의 문화를 섭취할 수 있는 공간이 낙양이었다.

368p

유가의 사상과 윤리 수용을 '한화'의 기준으로 본다면 호인들은 '한화'되지 않았고, 본인들의 윤리와 도덕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혹은 이민족(미개인)으로서 금수와 같은 행위를 했다는 화이론적 평가도 할 수 있다. 그런데 호태후는 유가 문화의 세례를 받은 '정숙한 한인 여성'이 아니라 각종 호속을 따른 '호화된 한인'이었다. 호태후는 임조칭제를 하는 태후를 넘어 황제처럼 행동했고, 아들 효명제 대신 제사를 주관했으며 유가 의례와 예절을 무시했다. 또한  과부인 호태후는 남편 선무제의 동생 청하왕 원역, 정엄, 이신궤, 양화 등과 정을 통했다. 

 효문제는 각종 '한화 정책'을 선포한 후 낙양에서 실행 여부를 살펴본 것이 아니라 잦은 순행과 남제 친정에 참가하면서 장기간 낙양에 거주하지 못했으므로 '한화 정책'의 감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낙양에 체류한 호인들이 효문제의 눈치를 피해 호속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호인들의 반발을 우려해 호어 금지, 이장, 본적의 개칭, 낙양 천사 등 '한화 정책'의 중요한 정책과 명령에서 예외 규정을 두었다. 특히 호어 금지는 30세 이상에게는 해당하지 않았고, 조정 혹은 조정의 특정 장소로 해석할 수 있는 조당 안으로 한정함으로써 사실상 효과가 적었다. 또한 재정적으로 '한화 정책'을 추진할 재원이 부족했다. 남조의 남제와 양과의 전쟁 때문에 전쟁 비용이 증가했고, 선무제와 호태후가 불사 건축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유가의 예제 건축이나 증축, 개보수에 써야 할 비용이 부족했다. 따라서 '한화 정책'의 상징이자 유가 문화의 정수인 명당, 태학, 국자감은 제대로 건설되지 않았거나 보수되지 않고 황폐하게 버려졌다. 이어서 당시 한랭기였던 기후는 목축을 할 수 있는 지역을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는 남쪽으로 이동시켜 낙양 주변의 하양 목장에서 목축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낙양 거주 호인들에게 양털과 양젖 등 의식주에 필요한 재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랭한 기후 때문에 추위에 강한 호복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371p

18세기부터 만주문자는 문화 상징으로 변해 만주인들의 정체성과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청 말까지 유지되었던 팔기제도는 만주인들의 귀속 의식을 공고히 했고 만주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만주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팔기를 우대하고 만주어의 위상을 제고했으며, 만주인의 기질을 유지하고 할하 몽골을 복속시키는 전략으로서 대규모 사냥을 자주 벌였다.

374p

<위서>는 낙양시대 호인들의 호속을 기록하기를 꺼렸고 마치 한화된 것처럼 기록했다.

378p

효문제의 통혼 정책은 북위 황실과 기존에 존재하는 한인들의 문벌권과 통혼권에 끼어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성등급이라는 문벌에 소외된 한인 관료들을 끌어들여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정치적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류>

293p

원탄(선무제의 이복형제 함양왕 원희의 아들)

-> 함양왕은 선무제의 아버지인 효문제의 이복형제로, 숙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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