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역사 - 이슬람 유입에서 이슬람 혁명까지 살림지식총서 336
유흥태 지음 / 살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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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조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의해 멸망한 후 이란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쓴 책이다.

앞서 읽은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후속편이랄까?

근대사는 좀 복잡하긴 해도 자료가 많아서인지 훨씬 흥미로웠다.

이란은 이라크와 달리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고 20세기까지 왕조를 이어갔던 모양이다.

팔라비 왕조의 마지막 왕인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세속화 정책이 터키처럼 성공했다면 석유 자원국인 이란은 오늘날 보다 훨씬 개방적인 사회가 되지 않았을까?

호메이니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여전히 실권을 갖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모습이 무척 낯설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우즈벡, 아르메니아 등이 이란의 지배 하에 있었는지는 처음 알았다.

이란은 역사도 매우 길고 광대한 영토를 가진 나라인데 그저 사막 한가운데의 중동 국가로만 알려진 것 같다.



<인상깊은 구절>

15p

사만조의 가장 큰 역할은 이슬람 침입 후에 잠들어 있던 페르시아 문화를 부활시킨 것이다. 사만조의 총독들은 페르시아의 복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인과 작가, 지식인들을 지원하였다. 

23p

투르크인이란 이란의 동쪽인 중앙아시아에 살던 민족으로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고 유목생활을 하는 종족을 일컫는다. 사산조 시기에 몇 차례 페르시아를 침략하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으로 돌아간다. 이슬람 등장 후 이슬람 군대가 투르크인들이 살던 중앙아시아를 공격하면서 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다. 이슬람화된 투르크인들이 사만조 시기에 대거 '맘룩'이라는 전쟁 노예 혹은 용병으로 이란과 이슬람 세계로 들어온다. 이들은 사만조 말기에 군사령관 등 고위직을 차지하기 시작하였고 사회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10세기에서 13세기까지 가즈나, 셀죽, 하라즘샤라는 세 왕조를 이란에 건립하였다. 이들이 이란의 독립왕조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란 지역에 나라를 세운 것뿐만 아니라 이들은 페르시아 즉, 이란 문화에 심취하여 자신들의 공용어도 페르시아어로 사용하여 이란 문화를 지속,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27p

부예조의 간섭에서 해방시켜 준 셀죽에 대해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권력을 인정해 주었고, 토그롤도 칼리프를 존중했다. 토그롤 사후 그의 후계자인 조카 알프 아르슬란은 토그롤의 확장 정책을 이어받아 동로마(비잔틴)을 공격하였다. 이때 말러즈게르드 전투에서 비잔틴 황제를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린다.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데, 이 승리로 인해 소아시아(현재 터키)가 이슬람화 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 광대한 영토로 인해 셀죽조를 셀죽 제국이라고 부르게 된다.

90p

쿠란을 연구하여 진정한 이슬람과 정부는 어떤 것인지를 모스크와 학교에서 토론하고 연구하였다. 이렇게 정립된 이론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알려졌다. 이 책과 함께 직접적 혹은 간접적 형태로 이론들이 퍼져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속 정부가 아닌 이슬람에 입각한 정부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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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 아케메니드 페르시아·파르티아 왕조.사산조 페르시아 살림지식총서 335
유흥태 지음 / 살림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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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총서는 100 페이지 남짓의 짧은 분량으로 하나의 주제를 다루다 보니 주제의 다양성은 좋은데 깊이 면에서 아쉽다.

고대 페르시아라는 유구한 역사를 문고판 한 권에 담아 내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중동의 역사는 대중들의 관심 밖이라 그런지 적당한 교양서가 없는 듯하여 고른 책이다.

이란 고원에는 기원전 4000년 전부터 유목민이 살기 시작했고 아리아인의 침입이 시작되어 엘람 왕국이 기원전 3000년 전쯤 세워져 페르시아 등장 전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알렉산더에게 망한 후 셀레우코스 왕조를 거쳐 파르티아가 세워지고 다시 사산조 페르시아가 들어선 후 7세기에 이슬람에 정복당한다.

이슬람 출현 전에는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다.

이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과는 확실히 다른 종족이고 그래서 같은 이슬람이라 해도 시아파를 믿는 듯하다.

역사가 소략되어 아쉽지만 기본적인 줄기를 잡을 수 있었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때까지 로마와 경쟁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로마는 유럽 국가 느낌인데 비잔틴 천도 후에는 아시아와 많은 접촉이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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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천년의 시간을 걷다 - 벚꽃향 아련한 흥망성쇠 이야기 Creative Travel 3
조관희 글 그림 / 컬처그라퍼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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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니던 도서관에 없던 책이라 무척 읽고 싶었는데 상호대차 시스템이 시행되면서 빌리게 됐다.

저자는 중국사 전공 교수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교토에서 1년을 지내면서 이 책을 낸 것 같다.

오래 머물러서 그런지 단순한 기행문에 머물지 않고 교토의 지역과 역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주고 있어 흥미롭게 읽었다.

역시 아쉬운 점은 도판.

색감이 선명하지 않다.

쓸데없는 개인적 감상을 많이 넣지 않아 읽기 편했고, 교토의 구석구석을 역사적 연원과 함께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 유홍준씨 책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도래인의 존재를 항상 강조하느라 약간의 거부감이 든 부분도 있었다.

천 년 수도 교토의 구석구석을 역사와 함께 살펴 본 좋은 시간이었다.



<인상 깊은 구절>

173p

항상 전장에서 적과 싸우는 장수들은 삶과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간이 갖고 있는 본연의 것일진대, 아무리 용감한 사무라이라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법. 아울러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적과 마주해 싸울 수 없기에 사무라이들은 살고 죽는 것을 그저 덧없는 한바탕의 꿈인 양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것이지요. 여기에 선불교가 일본에 들어오자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현세 초월적인 풍조가 일시에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210p

인생사 오십 년

넓고 넓은 우주와 비교하면

꿈과 같이 허망하도다

한 번뿐인 생을 얻어

죽지 않는 자가 어디 있을까 

-오다 노부나가의 시 중에서-

211p

한 시대를 풍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늘의 뜻이라 할 수 있는 천운도 따라야 하는 법입니다. '전쟁의 신'이라 불릴 만큼 전투의 귀재였던 다케다 신겐에게도 적이 있었으니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연전연승 싸우는 족족 승리를 거두며 교토로 향하던 도중에 병사하고, 천하통일의 대업은 오다 노부나가의 손으로 넘어가고 맙니다.


<오류>

다이고 천황이 죽고 스자쿠가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조부인 좌대신 후지와라노 다다히라가 다시 섭정을 맡았고

-> 후리와라노 다다히라는 스자쿠 천황의 외조부가 아니라 외삼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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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과 미술 - 서양미술의 갑작스러운 고급화에 관하여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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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서다.

어려운 제목과는 달리 내용이 아주 흥미롭고 상업적, 특히 동서무역의 관점에서 본 르네상스 회화의 폭발적 성장이라는 주제가 신선하다.

무엇보다 도판이 매우 좋다.

소장처나 크기 표시가 안 된 점이 아쉽지만 도판의 질이 정말 훌륭해서 한 권의 미술책으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과연 저자가 서문에서 도판에 특히 신경을 썼다고 얘기할 만하다.

전문 연구자인 만큼 분석의 깊이가 남다르다.

다소 어려운 개념, 이를테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추구한 명도의 깊이라는 부분은 잘 이해를 못했다.

이번에 루브르 가서 <암굴의 성모>라는 유명한 작품을 봤는데 (모나리자는 줄서서 한참 기다려야 해서 못 보고 말았다) 색감이 너무 어두워 책에서 보던 만큼의 큰 감동이 없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이런 어두운 분위기는 화가가 추구했던 것 중 하나라고 한다.

나도 항상 의문이 있긴 했었다.

왜 갑자기 르네상스 시대에 서양미술의 수준이 확 올라갔을까?

저자는 수준에 더해 양적으로도 엄청나게 폭발했다고 한다.

그저 몇몇 천재 화가들의 탄생 덕분이 아니라 이 모든 회화혁명이 중세 상업혁명을 통해 거부가 된 상인들이, 귀족과의 차별화를 통해, 혹은 흑사병으로 죽어가는 개인의 구원을 위해, 또 미술품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유럽의 상인들이 직접 안료를 수입하여 거래했기 때문에 그 식견이 탁월해서 (당시로서는 장인 수준이었을) 화가들에게 색채에 대한 까다로운 요구를 했고 이것을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회화의 수준이 확 올랐다는 점이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안료들의 수입이 활발해지는데 이것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미술을 통해 과시적 소비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잘 아는 분야인 색채감을 까다롭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바로 "상인과 미술"이다.

거상들은 평민이나 귀족과의 차별화를 위해 미술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흑사병도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다.

"모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구가 유행일 정도로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됐던 시절이라 중세인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그 전에는 제단화 같은 공적인 미술품만 있었다면 추모 열기가 과해지면서 개인이 영혼 구제를 위해 캔버스화 등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게 용인되는 분위기로 바뀐 것이다.

비단 거상들 뿐 아니라 하층민들도 작은 패널화라도 갖길 원했고 상인들은 미술품을 상품으로 인식해 대량 생산이 되면서 가격도 떨어지게 된다.


왜 자본주의 경제가 승리하게 됐을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만들어 내고 그 과정에서 질적 수준이 높아져 사회가 계속 발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에서처럼 단순히 우아한 선비의 취미 정도로는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기 어려운 것 같다.

상업의 발달이 예술의 발전을 견인했고 결국 사회의 흐름도 바꿔 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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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읽는 독일문화
김홍섭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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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 아주 유익하다.

저자가 독문학자인 것 같은데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 같다.

대학출판사에서 이렇게 좋은 책이 발간됐다는 게 놀랍다.

책의 수준이나 내용은 당연한 거겠지만, 디자인이나 도판도 읽기 편하고 정말 선명하다.

도판의 선명도가 떨어지거나 어두운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도판이 정말 마음에 든다.

클림트와 뒤러의 자화상이 그려진 표지도 개성있다.

보통 미술이라고 하면 전근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혹은 네덜란드, 스페인 정도이고 현대는 미국이나 영국 정도라, 독일 미술에 대해서 기술한 책은 거의 못 봤던 것 같다.

뒤러를 좋아하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읽은 기억은 난다.

제목은 미술로 읽는 독일문화이지만, 건축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넓은 의미의 독일 문화권인 오스트리아 문화도 잠깐 나온다.

역사와 미술이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독일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앞부분의 성당 건축은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아 100% 이해가 안 갔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인상깊은 구절>

44p

카페 왕조는 제후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민계급을 지원하였다. 국왕의 지원을 받은 시민계급들은 정치 참여를 늘리는 한편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과 물질적 부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당 건축에 참여하였고, 그렇게 건립한 웅장한 성당을 자신들의 위상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고딕 건축은 시민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자 도시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p

대부분의 시민은 교역으로 부를 이룩한 교양 있는 상인들과 부유한 귀족들로, 그들은 문화적 삶을 즐기는 예술의 후원자들이었다. 뉘른베르크에는 금은 세공품과 인쇄술이 발전했고, 과학기구를 만드는 공방도 여럿 있었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성장한 뒤러는 북유럽과 남유럽의 회화전통을 접목시켜 독일 르네상스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1500년대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된다. 

93p

자신의 작품에 AD라는 서명을 적어 넣을 정도로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일개 장인에 불과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 곳 예술가들이 인문학자요 과학자로 존경받는 것을 보고 북유럽 화가들에게 이탈리아의 학문세계를 전파하는 한편 예술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97p

뒤러는 두 번에 걸친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로부터 인물의 형태나 자세를 따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원리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 미술이론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어떤 화가도 미술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최고의 예술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원근법이나 해부학 등 미술 이론에 몰두한 것은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과학자요 인문학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뒤러는 고딕 미술이 도외시했던 인체의 아름다움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 형태가 가지는 미의 법칙성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고전을 연구하고 인체 비례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100p

뒤러의 유화는 초상화가 대부분이고 제단화는 그리 많지 않다. 제단화라 하더라도 개인 예배당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진행되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교회의 제단화 수요가 절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뒤러의 업적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은 제단화라고 할 수 있다. 

119p

루터는 1522년 번역을 마친 독일어판 성서에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설명하는 목판화를 삽입하는 등 성서의 내용을 시각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모세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미지에만 해당된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우상 숭배와 관련되지 않은 그림이나 조각은 허용될 수 있으며, 또한 하느님이 교회에서 성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성상 사용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정신적 자유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은 하느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미술의 교육적 특성에 더욱 주목하여 심미적이고 예술적 관심보다는 훈계나 선도의 목적으로 신앙적 내용을 형상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미술의 교육적 의미에 강한 확신을 표명하였다. 이후 루터는 성인이나 성물 숭배 등에서 유래한 미신적인 그림을 제외한 교육적 목적의 종교미술을 허용하고 설교집이나 기도서, 찬송가, 교리 문답집 등에 삽화나 장식 등을 적극 이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미술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특히 루터파가 득세한 독일의 경우 종교적인 변화가 예술가들의 활동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미술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22p

번역출간된 성서에서도 삽화를 수록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성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수십 년에 걸쳐 루터의 성서 판매부수가 엄청났던 점으로 미루어 종교개혁에 대한 크라나하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131p

한스 홀바인은 바젤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고 신교도들이 정권을 잡자 1532년에는 아예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스위스는 츠빙글리와 칼뱅이 급진적인 복음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미지 숭상을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에 성상파괴 행위가 극심했고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반면, 영국은 성공회가 교리나 의식 등에서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135p

근대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초상화가 크게 늘어났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시민 초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류층뿐만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도 자신의 직업과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신분이나 혈통이 아니라 어떤 직종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138p

<대사들>은 주인공의 부와 직업적 활동을 과시하듯 드러내고 있지만, vanitas, 즉 지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되다는 교훈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자신의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면서 늘 경건한 삶을 살고자 했던 당시 북유럽 상인들의 윤리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7p

다음으로 중요한 요인은 독일 제후들의 후원이었다. 사실 루터교회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독일 내 각 영방국가의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루터의 반란 이후 초기에는 사태를 관망하다가 루터가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고, 황제 카를 5세가 국제적인 문제로 인해 국내 문제에 간여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에야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조치는 개인적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성직자를 임명함으로써 주권을 확보하고,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는 엄청난 종교세와 수도원을 비롯한 막대한 교회 재산을 차지하는데 더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153p

예수회는 신앙의 단순성과 교파 분열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개신교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를 통해 가톨릭의 일치된 힘과 신앙의 웅대함을 드러내고 가톨릭의 개혁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가톨릭의 심오한 정신을 구현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신앙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바로크 미술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이를 통해 현실감 있는 환영을 만들어냈다. 바로크의 넘칠 듯한 풍부함은 가톨릭교회가 되찾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통해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은 가톨릭의 교화방식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95p

슁켈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패배를 문화와 교양으로 대치시키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의지를 구현하고 프로이센의 문화적 자의식을 고전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한편 독일 통일에 대한 의지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새로운 건축물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독일인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긍지를 심어주었고, 프로이센의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23p

빈 분리파는 오스트리아 예술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적 고립을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였고, 모든 예술이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삶을 예술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분리파는 건축, 회화, 조각, 공예, 장식 등 모든 예술의 상호작용을 주장하고 총체예술작품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장식과 공예를 회화나 조각의 하위 장르로 보지 않고,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이 동등하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27p

클림트는 '장식의 화가'였다. 200여점에 이르는 그의 회화 작품에서는 장식이 화면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가 그린 수많은 여성상은 장식과 밀접하게 얽혀있었는데, 얼핏 보아 빈 상류사회 여성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그의 회화에도 역시 여성에 대한 클림트 자신의 개인적 환상이 존재한다. 그는 장식을 이용해 빈 사회에 걸맞은 격조 높은 분위기를 창조했지만, 그 세부 장식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에로틱한 욕구를 표현하였다.

238p

림트가 우아하고 매혹적인 상류사회의 여성들을 주로 그렸다면, 쉴레는 어딘지 조야하고 저속한 여성들을 즐겨 그렸다. 클림트가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데 비해, 쉴레는 화면의 인물을 위협하거나 때로는 압도할 정도로 공간을 비워둔다. 클림트가 장식을 통해 관능적 욕구를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표현했다면, 쉴레는 관능적 욕구를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클림트가 고급스러운 문양과 기교적인 장식을 통해 빈 사회가 그리는 꿈의 세계를 표현했다면, 쉴레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탐욕스런 허위의식, 성에 대한 호기심 등을 고통스럽게 파헤침으로써 빈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다. 클림트가 평생을 두고 몰두했지만 간접적으로만 표현했던 것들을 쉴레는 보다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240p

쉴레는 한 편지에서 "별 같은 광채의 흔들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항상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빛나는 어떤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생산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쉴레는 예술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으며 "나는 너무도 풍요롭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남에게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이런 메시아적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영적인 무언가를 구체적인 예술 행위를 통해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화상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은 무엇보다도 자아도취적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258p

키르히너, 베크만, 마르크, 딕스 등 많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는 당시 독일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속물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성 등을 목격하면서 유럽이 이미 늙을 대로 늙어 구제불능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몰락기에 접어든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기도 하였는데, 마침 전쟁이 일어나자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너도 나도 자원해서 열광적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쟁이 군대들 간에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다소 낭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번 전쟁은 자동화된 첨단무기들과 독가스 등을 이용해 군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대량학살을 감행하는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이에 낭만적인 꿈을 안고 참전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전쟁의 실상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키르히너 역시 자원입대했지만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 쇠약에 걸려 요양소로 보내졌다.

263p

입체주의나 다른 화가들들도 추상적인 구성을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나온 적이 없었다. 칸딘스키는 여러 가지 색채와 선을 통해 형태를 왜곡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켜 아예 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색채와 형태의 효과에는 의존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심리적인 효과를 통해 정신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써 '추상미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양식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401p

키퍼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후 독일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전후 세대인 그가 일찍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화단의 호평 때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인지 그 작품성을 떠나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대대적인 키퍼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고, 일약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에 대한 독일 내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루던 전후 독일회화에 형상성과 역사성을 되살렸고, 독일사회가 금기로 여겨오던 나치 과거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독일의 정체성 회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일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오류>

231p

<다나에> 도판의 소장처가 빈의 뷔르틀레 미술관으로 나온다. 그런데 검색해 봤더니 이 미술관은 1995년에 문을 닫았고 위키에 따르면 현재 이 그림은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혹은 다른 자료에서는 개인 소유로도 나와서 소장처가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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