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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로 읽는 독일문화
김홍섭 지음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34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인데 아주 유익하다.
저자가 독문학자인 것 같은데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분 같다.
대학출판사에서 이렇게 좋은 책이 발간됐다는 게 놀랍다.
책의 수준이나 내용은 당연한 거겠지만, 디자인이나 도판도 읽기 편하고 정말 선명하다.
도판의 선명도가 떨어지거나 어두운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도판이 정말 마음에 든다.
클림트와 뒤러의 자화상이 그려진 표지도 개성있다.
보통 미술이라고 하면 전근대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혹은 네덜란드, 스페인 정도이고 현대는 미국이나 영국 정도라, 독일 미술에 대해서 기술한 책은 거의 못 봤던 것 같다.
뒤러를 좋아하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읽은 기억은 난다.
제목은 미술로 읽는 독일문화이지만, 건축도 많이 포함되어 있고 넓은 의미의 독일 문화권인 오스트리아 문화도 잠깐 나온다.
역사와 미술이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연결되어 독일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앞부분의 성당 건축은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이 많아 100% 이해가 안 갔지만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인상깊은 구절>
44p
카페 왕조는 제후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시민계급을 지원하였다. 국왕의 지원을 받은 시민계급들은 정치 참여를 늘리는 한편 자신들의 종교적 열정과 물질적 부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성당 건축에 참여하였고, 그렇게 건립한 웅장한 성당을 자신들의 위상을 상징하는 기념비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고딕 건축은 시민들의 자부심의 표현이자 도시들 간의 경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91p
대부분의 시민은 교역으로 부를 이룩한 교양 있는 상인들과 부유한 귀족들로, 그들은 문화적 삶을 즐기는 예술의 후원자들이었다. 뉘른베르크에는 금은 세공품과 인쇄술이 발전했고, 과학기구를 만드는 공방도 여럿 있었다.
이런 풍부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성장한 뒤러는 북유럽과 남유럽의 회화전통을 접목시켜 독일 르네상스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1500년대 유럽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된다.
93p
자신의 작품에 AD라는 서명을 적어 넣을 정도로 자신의 예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북유럽에서는 예술가가 일개 장인에 불과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었는데, 뒤러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그 곳 예술가들이 인문학자요 과학자로 존경받는 것을 보고 북유럽 화가들에게 이탈리아의 학문세계를 전파하는 한편 예술가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진력하였다.
97p
뒤러는 두 번에 걸친 베네치아 여행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로부터 인물의 형태나 자세를 따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술원리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 미술이론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어떤 화가도 미술이론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최고의 예술가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는 점에서 원근법이나 해부학 등 미술 이론에 몰두한 것은 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과학자요 인문학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뒤러는 고딕 미술이 도외시했던 인체의 아름다움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 형태가 가지는 미의 법칙성을 발견하기 위해 여러 고전을 연구하고 인체 비례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을 시도하였다.
100p
뒤러의 유화는 초상화가 대부분이고 제단화는 그리 많지 않다. 제단화라 하더라도 개인 예배당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당시 진행되던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교회의 제단화 수요가 절대적으로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가로서 뒤러의 업적이 최고 수준에 도달한 것은 제단화라고 할 수 있다.
119p
루터는 1522년 번역을 마친 독일어판 성서에 요한 계시록의 내용을 설명하는 목판화를 삽입하는 등 성서의 내용을 시각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모세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단지 하느님을 대신하는 이미지에만 해당된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우상 숭배와 관련되지 않은 그림이나 조각은 허용될 수 있으며, 또한 하느님이 교회에서 성상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명령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성상 사용에 대해 스스로 선택할 정신적 자유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성경의 이야기를 묘사한 그림은 하느님의 구원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긍정적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미술의 교육적 특성에 더욱 주목하여 심미적이고 예술적 관심보다는 훈계나 선도의 목적으로 신앙적 내용을 형상화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미술의 교육적 의미에 강한 확신을 표명하였다. 이후 루터는 성인이나 성물 숭배 등에서 유래한 미신적인 그림을 제외한 교육적 목적의 종교미술을 허용하고 설교집이나 기도서, 찬송가, 교리 문답집 등에 삽화나 장식 등을 적극 이용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미술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특히 루터파가 득세한 독일의 경우 종교적인 변화가 예술가들의 활동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미술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122p
번역출간된 성서에서도 삽화를 수록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성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수십 년에 걸쳐 루터의 성서 판매부수가 엄청났던 점으로 미루어 종교개혁에 대한 크라나하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131p
한스 홀바인은 바젤에서 성상파괴운동이 일어나고 신교도들이 정권을 잡자 1532년에는 아예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스위스는 츠빙글리와 칼뱅이 급진적인 복음주의에 기반을 두고 이미지 숭상을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에 성상파괴 행위가 극심했고 예술가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던 반면, 영국은 성공회가 교리나 의식 등에서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예술 활동에도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135p
근대에 접어들면서 시민들의 초상화가 크게 늘어났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시민 초상화의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상류층뿐만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도 자신의 직업과 신분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신분이나 혈통이 아니라 어떤 직종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138p
<대사들>은 주인공의 부와 직업적 활동을 과시하듯 드러내고 있지만, vanitas, 즉 지상의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헛되다는 교훈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자신의 직업을 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신의 은총으로 생각하면서 늘 경건한 삶을 살고자 했던 당시 북유럽 상인들의 윤리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7p
다음으로 중요한 요인은 독일 제후들의 후원이었다. 사실 루터교회의 성립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독일 내 각 영방국가의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루터의 반란 이후 초기에는 사태를 관망하다가 루터가 대중적 지지를 얻게 되고, 황제 카를 5세가 국제적인 문제로 인해 국내 문제에 간여할 여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에야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조치는 개인적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성직자를 임명함으로써 주권을 확보하고, 교황청으로 흘러들어가는 엄청난 종교세와 수도원을 비롯한 막대한 교회 재산을 차지하는데 더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153p
예수회는 신앙의 단순성과 교파 분열로 특징지을 수 있는 개신교와는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를 통해 가톨릭의 일치된 힘과 신앙의 웅대함을 드러내고 가톨릭의 개혁을 과시하고자 하였다. 또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통해 가톨릭의 심오한 정신을 구현하고 관람자로 하여금 작품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신앙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바로크 미술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했고, 이를 통해 현실감 있는 환영을 만들어냈다. 바로크의 넘칠 듯한 풍부함은 가톨릭교회가 되찾은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통해 공감을 유도하는 방식은 가톨릭의 교화방식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195p
슁켈은 프로이센의 군사적 패배를 문화와 교양으로 대치시키고자 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의지를 구현하고 프로이센의 문화적 자의식을 고전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한편 독일 통일에 대한 의지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의 감독 하에 이루어진 새로운 건축물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독일인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긍지를 심어주었고, 프로이센의 국가적 위신을 회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23p
빈 분리파는 오스트리아 예술의 지역주의를 극복하고 문화적 고립을 벗어나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고자 하였고, 모든 예술이 삶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삶을 예술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분리파는 건축, 회화, 조각, 공예, 장식 등 모든 예술의 상호작용을 주장하고 총체예술작품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장식과 공예를 회화나 조각의 하위 장르로 보지 않고, 건축을 중심으로 모든 예술이 동등하게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총체예술작품'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227p
클림트는 '장식의 화가'였다. 200여점에 이르는 그의 회화 작품에서는 장식이 화면을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가 그린 수많은 여성상은 장식과 밀접하게 얽혀있었는데, 얼핏 보아 빈 상류사회 여성들의 구미를 맞추기 위해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드로잉과 마찬가지로 그의 회화에도 역시 여성에 대한 클림트 자신의 개인적 환상이 존재한다. 그는 장식을 이용해 빈 사회에 걸맞은 격조 높은 분위기를 창조했지만, 그 세부 장식에서는 여러 가지 상징적 기호들을 통해 자신의 에로틱한 욕구를 표현하였다.
238p
클림트가 우아하고 매혹적인 상류사회의 여성들을 주로 그렸다면, 쉴레는 어딘지 조야하고 저속한 여성들을 즐겨 그렸다. 클림트가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 등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데 비해, 쉴레는 화면의 인물을 위협하거나 때로는 압도할 정도로 공간을 비워둔다. 클림트가 장식을 통해 관능적 욕구를 간접적으로 우아하게 표현했다면, 쉴레는 관능적 욕구를 솔직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클림트가 고급스러운 문양과 기교적인 장식을 통해 빈 사회가 그리는 꿈의 세계를 표현했다면, 쉴레는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탐욕스런 허위의식, 성에 대한 호기심 등을 고통스럽게 파헤침으로써 빈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다. 클림트가 평생을 두고 몰두했지만 간접적으로만 표현했던 것들을 쉴레는 보다 직접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240p
쉴레는 한 편지에서 "별 같은 광채의 흔들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항상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고, 자신도 모르게 점점 더 빛나는 어떤 것들을 자신의 내부에서 생산해내고 있다고 말한다. 쉴레는 예술에 어떤 특별한 힘이 있으며 "나는 너무도 풍요롭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남에게 나눠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이런 메시아적 믿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영적인 무언가를 구체적인 예술 행위를 통해 표현하는 수단으로 자화상을 이용한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은 무엇보다도 자아도취적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258p
키르히너, 베크만, 마르크, 딕스 등 많은 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하였는데, 이는 당시 독일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속물적인 부르주아 문화와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성 등을 목격하면서 유럽이 이미 늙을 대로 늙어 구제불능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고, 전쟁이 몰락기에 접어든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돌파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쟁을 높이 평가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를 고대하기도 하였는데, 마침 전쟁이 일어나자 새로운 유럽을 건설하는 역사적 현장에 참여한다는 생각에 너도 나도 자원해서 열광적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전쟁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쟁이 군대들 간에 밀고 밀리는 싸움으로 다소 낭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번 전쟁은 자동화된 첨단무기들과 독가스 등을 이용해 군인과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대량학살을 감행하는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이에 낭만적인 꿈을 안고 참전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전쟁의 실상을 직접 목격함으로써 열렬한 반전주의자가 되었다.
키르히너 역시 자원입대했지만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정신 쇠약에 걸려 요양소로 보내졌다.
263p
입체주의나 다른 화가들들도 추상적인 구성을 시도하였지만, 그들은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나온 적이 없었다. 칸딘스키는 여러 가지 색채와 선을 통해 형태를 왜곡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표현주의의 이념을 더욱 발전시켜 아예 주제를 고려하지 않고 전적으로 색채와 형태의 효과에는 의존하는 새로운 예술을 추구하였다. 그는 순수한 색채와 형태의 심리적인 효과를 통해 정신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써 '추상미술'이라 불리는 새로운 양식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3401p
키퍼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후 독일미술을 대표하는 예술가이다. 전후 세대인 그가 일찍부터 독일을 대표하는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화단의 호평 때문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독일에서는 과거의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는 이유 때문인지 그 작품성을 떠나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대대적인 키퍼 회고전이 개최되면서 그에 대한 인기가 급상승했고, 일약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다. 그에 대한 독일 내의 다양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상회화가 주류를 이루던 전후 독일회화에 형상성과 역사성을 되살렸고, 독일사회가 금기로 여겨오던 나치 과거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한 성찰을 통해 독일의 정체성 회복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독일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오류>
231p
<다나에> 도판의 소장처가 빈의 뷔르틀레 미술관으로 나온다. 그런데 검색해 봤더니 이 미술관은 1995년에 문을 닫았고 위키에 따르면 현재 이 그림은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혹은 다른 자료에서는 개인 소유로도 나와서 소장처가 애매하다.